최근 수정 시각 : 2020-02-09 12:21:07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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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기의 작품

영어: Attila the Hun
고대 노르드어: Atle, Atli
독일어: Etzel
헝가리어: Attila hun király(어틸러 훈 키라이)

생몰년도: 406년~453년
재위기간: 443년~453년

1. 개요2. 일생
2.1. 초기 일생과 즉위2.2. 동로마 원정과 콘스탄티노플 포위2.3. 동로마와의 교섭 실패와 암살 기도2.4. 호노리아의 청혼2.5. 갈리아 원정과 카탈라우눔 전투의 참패2.6. 서로마 원정과 이탈리아 침공2.7. 죽음과 사후
3. 인격
3.1. 사람됨과 인품3.2. 생김새와 인종 논란
4. 평가
4.1. 일반적인 평가4.2. 헝가리에서의 평가4.3. 터키에서의 평가4.4. 몽골에서의 평가
5. 창작물에서의 양상

1. 개요

5세기 훈족(Huns)의 왕. 형인 블레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서 훈족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아틸라는 게르만족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까지 침략하여 악명을 떨쳤다. 그는 특히 이전의 훈족 지도자들과는 달리, 동로마와 서로마의 심장부였던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인근까지 진격하여, 서양인들에게는 잔혹한 파괴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가 훈족의 왕좌에 앉았던 시간은 고작 8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틸라는 재위기간 동안 온 유럽을 전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훈족의 아틸라(Atilla the Hun)"라 불린다.

2. 일생

2.1. 초기 일생과 즉위

아틸라는 훈족의 왕이었던 루아(Ruga)의 둘째 조카였다. 루아에게는 문주크(Mundzuk)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문주크에게는 블레다(Bleda)와 아틸라 등의 두 아들이 있었다.

434년경에 루아가 사망하자 그의 맏조카이자 아틸라의 형이었던 블레다가 뒤를 이어 훈족의 왕이 되었다. 아틸라가 그의 형인 블레다와 함께 공동으로 훈족을 통치하였다거나 혹은 아틸라가 이때에도 정치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훗날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친 아틸라의 위상을 높이 봐서 나온 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그냥 형의 휘하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가진 강력한 2인자 정도로 간주해야 옳을 것이며 그마저도 여전히 왕인 블레다가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1]

이후 443년에 형인 블레다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틸라는 마침내 훈족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블레다의 사망에 대해서는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과 이것을 가장해 아틸라가 암살했다는 설로 나뉘는데, 블레다가 죽기 전에도 아틸라와 대립 구도가 있었다는 점에서 후자 쪽을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아틸라 이전의 훈족은 여러 부족들이 왕이라는 하나의 대표적인 통치자를 중심으로 뭉친 연합 체제에 가까웠으나, 아틸라의 통치 아래 훈족은 단일 권력자의 통제를 받는 왕국으로 거듭났다. 아틸라는 블레다 왕 아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린 2인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갖춘 2인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오레스테스, 콘스탄티우스, 에우독시우스, 오네게시우스 등을 비롯한 로마와 그리스 지역 출신의 유능한 외국인 관료들과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는 그가 서방에서 가장 체계적이었던 로마의 관료체제를 일부나마 받아들이고자 했던 흔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그는 다른 강대한 세력과 맞서기 위하여 스키리와 게피다이 등의 외부 세력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의 외교적인 안목도 발휘하였다.

2.2. 동로마 원정과 콘스탄티노플 포위

블레다 시대인 442년, 훈족은 동로마의 발칸 반도를 공격하여 나이수스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훈족은 동로마로부터 금을 지불받는 조건으로 철수하였으나, 동로마는 시칠리아 원정군이 귀환하면서 어느 정도 병력에 여유가 생기자 약속했던 금을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아틸라는 447년 동로마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아틸라는 형인 블레다가 생전에 동로마의 변경을 두들겨대며 금을 뜯어내는 것에 만족한 것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에 따라 아틸라는 훈족과 이란 및 게르만 일대에서 끌어모은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틸라의 대군은 동쪽으로 치우친 경로를 택하여 동로마의 강력한 요새들을 교묘히 피해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나치는 도시마다 철저한 파괴와 약탈을 일삼으며 진군하며 동로마 측의 저항의지를 짓밟았다. 이는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력을 살려서 신속한 전격전을 펼쳤던 훈족의 기존 전술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훈족의 이와 같은 파괴적인 공격으로 동로마의 도시인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이 함락되었으며 발칸 반도 일대 또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전술은 훗날 아틸라가 떨치게 될 악명에도 어느 정도 일조하였다.

훈족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로 인하여 많은 건물이 무너졌으며 인명피해도 극심했다. 특히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이 크게 훼손되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주민들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동로마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이 훈족의 군세에 직접 노출되는 상황만은 피하기 위하여, 게르만족 출신의 지휘관이었던 아르네글리스쿠스로 하여금 트라키아에서 아틸라를 막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르네글리스쿠스는 분투 끝에 훈족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결국 동로마 군대는 패배하였고, 아르네글리스쿠스 또한 전사하였다.

그러나 아르네클리스쿠스가 목숨을 바쳐가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동로마는 지진으로 훼손된 성벽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 데 성공했고, 특히 테오도시우스 2세가 쌓은 "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상상을 초월하는 견고함을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에 반하여 훈족은 콘스탄티노플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할 만한 공성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구축하고도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더욱이 말라리아와 이질 등의 전염병과 질병이 훈족 진영에 퍼지면서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훈족 입장에서도 딱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방법은 없었지만, 제국 입장에서도 수도 코앞에 적을 놓아둘 수는 없었으므로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수차례 사신들이 오간 결과 아틸라는 이전에 비해 8배 이상 늘어난 금 6천 파운드, 훈족 포로들의 석방, 훈족을 배반하고 동로마 측에 가담한 이민족들의 신병, 도나우 강 하류 일대의 영토를 대가로 받아갔다. 동로마는 그 막대한 금액을 감당하기 위해 원로원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해야 했고, 자신들을 위해 싸워준 이민족들을 아틸라에게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영토까지 떼어주면서 그 위상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수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만 이런 모습만을 보고 당시의 동로마가 훈족보다 약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다. 동로마 동쪽의 강적이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기동 야전군의 4할을 동부전선에 주둔시켜야 했으므로 북방의 이민족들을 상대로 전력을 집중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피터 히더 교수의 저작인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참고할 만하다. 당시 동로마군의 배치는 여기를 참조.

2.3. 동로마와의 교섭 실패와 암살 기도

449년, 아틸라는 동로마에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기 위하여 사절을 파견하였다. 당시 훈족 사절단의 대표는 아틸라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그의 경호를 담당했던 스키리 왕 에디카, 그리고 아틸라의 측근이었던 오레스테스 등이었다.[2] 이때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측근이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몰래 에디카를 만찬에 초대하여 아틸라를 암살하고 로마에 귀화한다면 막대한 부를 나누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에디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우선 아틸라 암살에 협조할 이들을 구하기 위해 금 50파운드를 요구했다.

그해 초여름, 동로마에서는 훈족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표면적으로는 아틸라의 요구에 따라 포로를 반환하고, 아틸라의 심복이자 비서관이었던 콘스탄티누스를 동로마 측의 여인과 혼인시켜 양국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막시미누스와 프리스쿠스 등을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 가운데에는 아틸라의 암살을 지시받은 통역관 비길라스도 끼어 있었다. 그는 에디카가 받은 금 50 파운드를 보관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는데, 에디카가 동로마 측으로부터 금을 받아온 것을 행여라도 아틸라가 눈치챌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동로마 측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길라스를 제외한 다른 사절들에게는 아틸라 암살 계획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사절단은 13일 동안의 여정 끝에 오늘날의 불가리아의 소피아, 즉 세르디카에 도착하여 연회를 즐겼다. 이 자리에서 동로마 사절단, 그리고 에디카와 오레스테스 등을 비롯한 훈족 측 사람들은 각기 동로마 황제와 훈족 왕을 기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비길라스가 신성한 동로마 황제를 한낱 인간인 훈족의 왕과 비길 수 있겠느냐는 실언을 하였고, 그 자리에 있었던 훈족들은 모두 화를 내었다.[3] 이런 얼뜨기 통역관을 암살자로 지정한 것부터가 딱 실패할 징조 언변이 좋은 막시미누스가 급히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지만, 오레스테스 또한 어째서 에디카가 혼자서 크리사피우스를 만났는지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본래 아틸라는 이곳에 와서 직접 사절단을 맞이할 계획이었으나 결국은 오지 않았다. 그에 따라 사절단은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훈족과 동로마의 접경 지대였던 니시로 이동해야 했다.[4] 이미 세르디카에서 비길라스가 자신을 험담하는 등 망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틸라는 사절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아틸라는 사절단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 고함을 질러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훈족들은 동로마의 사절단에게 술과 음식 및 숙소를 내주는 등 융숭히 대접했다.[5] 사절단 일행은 아틸라의 행렬을 뒤따라 북쪽을 향해 여행했으며, 마침내 오늘날 헝가리 티소 강에 위치한 아틸라의 궁전에 도달하였다.[6] 아틸라는 그곳에서 사절단을 위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 즈음에 에디카는 돌연 변심하여 자신의 주군이자 친구인 아틸라에게 동로마의 암살 계획을 모두 털어놓고 말았다. 에디카가 어째서 갑자기 마음을 돌렸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부터 아틸라를 제거할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말도 있고, 암살 계획 자체가 영 엉성했던 데다 암살자라는 작자가 술에 취해 아틸라를 모독하는 초대형 사고까지 친 만큼 암살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변심했을 수도 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아틸라는 그 자리에서 통역관 비길라스에게 금 50파운드의 출처를 강하게 추궁하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비길라스와 함께 온 그의 어린 아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비길라스는 동로마 황제가 자신에게 아틸라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털어놓았고, 자신은 죽어도 좋으나 아들만큼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암살자가 엉성한 자였기에, 에디카의 계산은 정확했던 셈

놀랍게도 아틸라는 암살자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동로마 황제의 암살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절단들에게는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또한 비길라스의 어린 아들에게 에디카를 매수하는 데 쓰인 금 50파운드를 그대로 주어 돌려보냈고,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비길라스에게는 그 두 배인 금 100파운드를 넣은 자루를 그 목에 매달아서 동로마 황제에게 보내었다. 아틸라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이들을 오히려 멀쩡히 돌려보냄으로써 동로마 황제에게 치욕과 망신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처럼 건재하다는 사실을 과시하여 무언의 압력을 가한 셈이었다. 처형할 명분은 충분했지만 비길라스를 처형하면 공범인 에디카 역시 살려둘 수 없고, 그러면 아틸라의 최측근이자 친구가 적국에 매수되어 암살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감출 수가 없어 자신의 체면과 위신이 크게 깎이는 꼴이 된다. 또한 이처럼 중요한 업무에 고작 비길라스 같은 얼간이를 동원할 만큼 허술한 동로마 제국에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훈족 간의 교섭이 암살 기도 사건 때문에 별다른 소득없이 끝나버린 후, 이듬해인 450년에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낙마 사고로 급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마르키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의 측근이었던 환관 크리사피우스를 숙청하였으며, 그동안 훈족에게 해마다 바치던 연례 공물을 폐지하였다. 이렇게 양국의 관계는 거의 끊어져 버렸으나, 아틸라는 이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미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 제국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2.4. 호노리아의 청혼

당시 서로마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였던 호노리아는 라벤나의 별궁에서 시종인 에우게네스와 통정하여 임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에우게네스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반역을 꾀하였다.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에우게네스는 처형당했으며, 호노리아 자신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사실상의 유폐 생활을 하게 되었다.[7] 궁지에 몰린 호노리아는 450년, 환관인 히아신스를 통하여, 금반지를 아틸라에게 보내서 청혼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은 아틸라에게도 매우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비록 아틸라가 동로마로부터 금을 뜯어가며 세를 과시하긴 했지만, 사실 동로마의 국력은 여전히 만만히 볼 수준이 아니었다. 더욱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청혼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낙마사고로 급사하였고, 그보다 더욱 강경한 성향의 마르키아누스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훈족은 동로마에서 더이상 금을 뜯어내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때문에 아틸라는 동로마와는 달리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한 서로마를 상대로는 원하는 만큼의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틸라는 이미 여러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호노리아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며,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 지참금으로 요구하였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생존해 있었던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는 기절초풍하였다. 그는 행여라도 아틸라가 또다시 동로마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호노리아와 히아신스를 서로마로 돌려 보내버렸다. 한편 누이의 철딱서니없는 행동에 격분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와 내통한 히아신스를 고문하고는 죽여버렸으며,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훈족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드러냈다.[8]

2.5. 갈리아 원정과 카탈라우눔 전투의 참패

451년, 아틸라는 마침내 군사를 움직였다. 그는 훈족 기병들로 구성된 자신의 주력군을 동쪽으로 파견하여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원하였으며, 아틸라 자신은 직접 게피다이족, 스키리족, 동고트족, 슈바벤족, 알레만족 등의 다양한 이민족들로 구성된 혼성군을 거느린 채 당시에 서로마의 세력권이었던 오늘날의 독일 및 프랑스 지역, 즉 갈리아 일대를 침공하였다.[9] 당시 아틸라가 거느린 군대의 수는 정확하지 않다. 많게는 10만 정도까지 추산되지만, 실제로는 3~5만 정도를 넘지 못했으리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아틸라의 행군로는 기록이 부실해서 불분명한 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라인강을 넘어서 모젤 강을 따라 진군하여 여러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프랑크 족도 아틸라의 군세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모젤 강변의 주요 도시였던 트리에를 함락시켰으며, 그해 4월에는 갈리아 지방에서 가장 전통있는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메스를 공격하여 무참히 파괴하였다. 훈족의 갈리아 침공으로 인하여 서로마 기독교 사회에서 훈족과 아틸라가 떨치던 악명은 극에 달하였으며, 그를 신의 징벌이라 불렀다는 전승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해 6월, 아틸라의 군대는 마침내 오를레앙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서로마의 군사령관이었던 명장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리크 1세 손을 잡고는 갈리아 내에 있는 약소한 여러 부족을 포섭해 연합군을 편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에티우스 또한 군대를 거느리고 오를레앙으로 진격하여 아틸라의 앞을 막아섰다. 각기 여러 이민족을 거느린 아틸라와 아에티우스의 군대는 오를레앙의 카탈루니아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후에 카탈라우눔 전투라 불리게 된다.

아틸라는 싸움에 앞서 관례에 따라 주술사들에게 소의 창자와 뼈로 점을 치게 하였는데, 주술사들은 이 싸움에서 훈족은 끔찍한 피해를 입을 것이나 그 댓가로 적장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아틸라는 그 적장이 아에티우스가 분명하다고 믿었다. 한편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는 전투를 개시하기 직전에 자신의 군대 앞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로마의 군대는 지금껏 자신들이 물리쳐왔던 적들처럼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였다. 당시 아틸라가 했다는 발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내가 적에게 첫 창을 던지리라. 이 아틸라가 싸우는 전장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죽은 자들뿐이다."

아틸라의 진영이 먼저 서로마 군단의 진영을 공격하며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 격렬한 전투에서 과연 서로마 군단의 지휘관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틸라의 예상과는 달리, 아에티우스가 아니라 서고트 왕인 테오도리크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처음의 목표와는 달리 전투의 유리한 고지였던 언덕을 점령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마 군단과 서고트 전사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결국 훈족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틸라는 도랑과 수레로 방벽을 형성해서 그 뒤로 진영을 숨길 수밖에 없었으며, 훈족 군대는 아에티우스에게 포위당하였다. 아틸라는 그동안 숱한 싸움을 치르면서 이와 같은 대패를 당해본 일이 없었기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승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패배를 직감한 아틸라는 자신의 진영이 함락될 시에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기 위해 장작더미까지 쌓아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싸움에서 거의 다 이긴 상황에서 어째서인지 아틸라가 무사히 후퇴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이유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다만 요르다네스의 서술에 따르면,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세력이 갑자기 붕괴된다면 이민족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서 서로마의 국방에 악영향을 가져올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결국은 다른 이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필요악인 훈족의 소멸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덕분에 아틸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목숨을 건져서 돌아갈 수 있었다.[10]

2.6. 서로마 원정과 이탈리아 침공

아틸라는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훈족의 본거지인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으로 귀환하였다. 서로마 군단에게 참패를 당한 탓에 딱히 영토나 전리품도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틸라가 거느린 게르만 족들은 그로 인하여 불만이 쌓였는지, 귀환길에 오르면서 갈리아 침공 중에 사로잡은 포로와 인질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한다. 더욱이 아틸라가 자신의 주력인 훈족 기병을 파견해서 지원해주었던 아르메니아의 반란도 사산 왕조에게 무참히 진압당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헝가리로 돌아온 아틸라는 다시 동로마에 금을 요구하였으나, 이미 서로마에게 패배한 여파가 큰 탓에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결국 아틸라는 다시 군세를 정비하여 서로마 침공을 재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패전으로 입은 피해를 매우 빠른 속도로 복구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이번의 타겟은 갈리아 지방이 아니라, 서로마 제국의 본토였던 이탈리아 반도였다.

452년, 아틸라는 혼인 지참금을 가져가겠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해왔다. 당시 아틸라의 행군로는 기록에 정확히 남아있지 않으나, 아마도 과거 로마를 약탈했던 서고트 족의 왕인 알라리크의 진격로를 답습하여 오늘날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선의 클라겐푸르트 협곡을 지났을 것이라 추측된다. 아틸라는 그 곳에서 아퀼레이아라는 도시에 이르러 3달에 걸친 공세를 퍼부었다. 아퀼레이아는 난공 불락의 요새였기에 알라리크도 피해갔던 곳이었지만, 훈족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성벽이 무너졌으며 그 도시는 초토화되었다.[11]

아틸라의 군대는 아퀼레이아를 거쳐 포 강을 따라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파두아, 비첸차, 베로나 등의 도시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는 많은 전리품을 뜯어갔다. 이미 아퀼레이아가 훈족의 무자비한 공격에 파괴당하여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브레시아와 베르가모 등의 지역은 싸워보지도 않고 훈족에게 항복하며 길을 내주기까지 하였다.

지난번 싸움에서 훈족을 물리쳤던 아에티우스는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이미 서고트 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지원이 끊어졌기 때문에 휘하에 거느린 병력이 턱없이 모자라 훈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떠나 로마로 옮겨갔는데, 그가 라벤나를 버리고 달아난 것인지, 혹은 로마를 훈족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 곳으로 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동안에 아틸라는 지금의 밀라노이자 제국의 옛 수도였던 메디올라눔을 점령하였다.[12]

이후 아틸라는 파비아를 거쳐 민키아 강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교황이었던 성 레오 1세가 직접 민키아 강변으로 가서 아틸라를 만나서 강화를 제안하였다. 아틸라는 레오 1세와 만난 후에 돌연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였는데, 당시 두 사람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아틸라의 수하들은 철군을 만류하였으나, 아틸라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13] 당시에 아틸라가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이고 군사를 돌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당시에 훈족이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특히 당시 서로마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던 전염병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아틸라는 세계 정복을 꿈꿨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 공격을 계획했다는 설이 있다. 동로마 사절단이 아틸라를 섬기는 옛 로마인과 연회를 벌였는데, 옛 로마인들은 아틸라가 이제 사산 왕조를 치리라는 추측성 발언을 한다. 실제로 아틸라가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 합병을 막고자 파병한 적이 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 군대일 뿐 아틸라는 본대를 이끌고 갈리아를 쳤기에 정말로 페르시아 정벌을 생각했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게르만족을 대상으로 한 지배권 확대와 로마에서의 공납에 더 관심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2.7. 죽음과 사후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헝가리 지역으로 돌아온 아틸라는 동로마 측에 공물을 요구하면서 그 속주를 공격할 것처럼 위협을 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452~453년에 걸친 겨울, 서고트족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아틸라의 실제 동선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중구난방인지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빙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453년 봄, 아틸라는 오늘날 헝가리의 티소 강에 위치한 자신의 목조 궁전에서 일디코(Ildico)[14]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였다.[15] 그리고 그날 밤에 아틸라는 갑작스럽고도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였다.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는 신부 일디코와 동침하던 중, 엎드린 자세로 동맥이 터지는 바람에 코피가 쏟아져나와 질식사했다고 한다. 그는 죽어가면서 피를 많이 흘렸으나 상처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아틸라가 신부와 첫날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시종들은 아틸라가 일어나지 않자 그를 살피기 위해 침실에 들어갔다가 이미 피를 흥건하게 흘린 채 죽은 아틸라와 겁에 질린 채 비탄에 잠긴 일디코를 발견하였다. 아틸라의 진정한 사인은 여전히 의문이다.[16]

아틸라의 장례식은 들판 한가운데에 비단으로 쳐놓은 대형 천막에서 거행되었다. 엄선된 뛰어난 기수들이 죽은 왕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천막 주변에서 말을 달리는 의식을 치렀고, 사람들은 아틸라의 정복전쟁과 그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아틸라의 부하들은 왕의 죽음을 눈물이 아닌 전사의 피로써 기리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털을 잘랐다.[17] 훈족 사람들은 아틸라의 시신을 금으로 만든 관에 안치했는데, 관 속에는 망자의 신분에 걸맞은 보석과 말갖춤(마구) 등 값비싼 보물들이 부장되었다. 이들은 아틸라가 묻힌 곳을 비밀로 하기 위하여 관을 한밤중에 매장하였으며, 관을 매장한 이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아틸라가 사망한 후에 훈족의 위세는 급격히 무너졌다. 아틸라의 뒤를 이어 훈족의 왕이 된 장남 엘라크가 자신의 두 아우들인 뎅기지크 및 에르나크와 내분을 일으켰다. 엘라크는 아버지인 아틸라가 그랬던 것처럼 단독으로 훈족의 왕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의 아우들은 각기 자신만의 세력 지분을 나눠 가지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454년에 뎅기지크와 에르나크는 형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하여 훈족의 땅에서 쫓겨났다.

이후 454~455년 사이에 아틸라와 동맹을 맺었었던 게피다이의 왕 아르다리크가 동로마의 지원을 등에 업고 훈족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엘라크는 네다오 강 전투에서 아르다리크에게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훈족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18] 한편 도나우 강 하류로 밀려났던 뎅기지크는 동로마와 2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가 469년에 전사하였고, 그 두개골은 전리품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에 전시되었다. 에르나크는 동로마의 속방이 되는 조건으로, 오늘날 루마니아 동쪽에 위치한 도브루자의 땅을 얻게 되자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3. 인격

3.1. 사람됨과 인품

후대의 기록에 보이는 아틸라의 성품은 의외의 관대함과 소박함, 그리고 잔혹함과 교활함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후대의 많은 정복군주들처럼 매우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으나 세상을 전란에 빠뜨린 장본인인지라 긍정적인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에서도 아틸라가 지닌 의외의 면모를 약간은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사(History of Byzantium)》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449년에 동로마의 사절 중 한 사람으로서 훈족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19] 당시에 프리스쿠스는 다른 사절들과 함께 아틸라의 연회에 초청받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아틸라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상당히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프리스쿠스의 묘사에 따르면, 아틸라의 용모는 당시 동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추하고 매력이 없는 편이었다.[20] 그러나 프리스쿠스가 본 그의 몸가짐은 상당히 검소하고 절제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다. 프리스쿠스는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훈족과 고트족을 모두 스키타이 혹은 야만인이라 칭하며 무시하였으나, 아틸라의 성품과 인격만큼은 의외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부하들과 사절단들에게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을 베풀었고, 금은으로 만든 화려한 술잔으로 대접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목기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사용했으며, 연회 중에는 고기 몇점을 먹었을 뿐 사치스러운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정갈하되 검소하고 소박해서, 옆구리에 검을 차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훈족이나 고트족들과는 달리 부츠에 걸쇠가 걸려있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이들이 보석과 귀금속으로 만든 말굴레를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아틸라 자신은 수수한 모양새의 말굴레를 사용했다고 한다.[21]

마찬가지로 프리스쿠스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 참석한 다른 이들이 라틴어와 훈족 및 고트족의 언어를 구사하며 재주를 부리던 난쟁이 광대인 제르카[22]의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으나, 아틸라만큼은 그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다가 자신이 귀여워하는 막내아들인 에르나크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또한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아틸라는 훈족의 통치 체계를 혁신하기 위하여 외국 출신의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조차 받을 수 없던 대우를 아틸라에게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다고 하였는데, 이를 보건데 사람을 다루는 능력도 상당히 출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면과는 별개로 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동로마 원정 당시에 보여준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천천히 짓밟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는 도시의 약탈과 파괴 및 무수한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아틸라가 벌였던 전쟁의 참상은 그를 증오하던 로마인들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대부분인지라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당대인들의 시각으로도 아틸라의 전쟁 수행 방식은 매우 참혹하고 잔인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3.2. 생김새와 인종 논란

훈족에 사절로 파견되어 직접 아틸라의 모습을 목격했던 동로마의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의 외모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따로 남기지 않았다. 한편 요르다네스는 아틸라의 모습에 대하여, 작은 키에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머리는 컸고, 눈은 깊이 들어가 박혀 있으며, 피부가 거무스레하고, 코는 납작했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런 상세한 묘사는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그다지 잘생긴 용모와는 거리가 있었던 듯 싶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프리스쿠스는 그 외모와는 별개로 아틸라를 검소하고 금욕적이면서도 가족들과 부하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하였다.

한편 요르다네스의 기록만 보면 투르크계나 몽골계 중간쯤의 유목민 같아 보이지만 다른 유럽 지역의 여러 기록을 보면 오히려 아틸라와 훈족을 아리아계나 이란계처럼 묘사한 기록도 있다. 훈족을 다룬 서양 측의 기록에는 동양인으로 추측되는 묘사가 많다. 그러나 동양 측에서는 서양인처럼 붉은 머리에 큰 코로 묘사하기도 한다. 훈족이 게르만족이나 로마인들과 싸울 당시 아틸라가 이끌던 훈족 기병들 중에는 훈족에 복속된 게르만족 전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아틸라를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슬라브 계열의 혼혈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딱히 아틸라를 혼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 공동체에 여러 민족이 뒤섞이는 과정에서도 지배계급 사이에서 교류가 생기는 일은 드물고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보통은 폐쇄성을 띤다.

4. 평가

4.1. 일반적인 평가

로마인들과 게르만족에게 아틸라와 그가 이끄는 훈족은 가히 공포이자 신의 심판이었다. 이전의 유럽에서는 그토록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던 족속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동안 로마인들 또한 수없이 많은 야만족들과 싸워 왔으나, 아틸라처럼 한 지역을 타겟으로 삼아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악질적인 행동을 의도적으로 수차례 일삼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틸라와 그의 군대를 신의 심판이 현실화라고 묘사하였으며 아틸라를 공포의 대왕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확산과 로마 제국의 쇠퇴,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인하여 신음했던 당시 사람들의 사고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이후 몽골 제국도 동유럽 침공 당시 비슷한 악명을 듣게 된다.

아틸라와 훈족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유럽의 여러 전설에도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게르만 계열 전설에는 위엄 있고 강대한 군주로 묘사되고[23], 바이킹 계열 전설에선 술고래 정도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참고로 바이킹들은 술을 잘 마시는 것과 대단한 전사를 동일시했다. 일례로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인 토르는 술을 매우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이것을 거인왕 로키와 겨루기도 한다. 기독교와 관련된 전설에서는 거의 현세에 도래한 악마들의 군주 정도로 묘사되며 교황 성 레오 1세가 신의 기적과 위엄을 설파하자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고도 한다.위엄 쩌는 교황 성하의 업적 당연히 이는 기독교 세계의 프로파간다로 실제로는 위에서 봤듯이 강화 협상으로 물러난 것이다.

한편 아틸라의 공포성이 유럽권에 널리 각인되어 아틸라를 통칭하는 말인 '훈족의 아틸라(Atilla the Hun)'는 대체로 성격이 거칠고 포악한 사람을 이르는 은어나 수식어로 쓰였으니 서양권에서 아틸라의 악명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짐작할 만하다.[24]

4.2. 헝가리에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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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다페스트에 세워진 아틸라 동상.)

이상은 일반적인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의 평가고 헝가리에서는 좀 다르다. 아틸라는 헝가리의 국가적 영웅이다.[25] 12세기부터 이미 헝가리 왕족들은 아틸라의 후예라고 자칭했고, Atlakviða, Atlamál 같은 헝가리의 전설에서는 아틸라를 훌륭하고도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드디어 아틸라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사가 여러 차례 올라온 적이 있고 가장 최근은 2014년이었다. # 물론 저 중에 진짜 아틸라의 무덤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사실 헝가리인인 마자르족과 훈족은 혈통상 별로 연관이 없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학자들의 의견이고, 따라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헝가리인 중에서도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상당히 어이없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페니키아와 혈통상 전혀 상관없는 튀니지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영웅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 아무튼 다른 유럽 나라에서는 헝가리의 이런 주장을 기이하게 보는 편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헝가리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뭐라고 왜곡하든 아틸라는 위대한 왕이며 헝가리의 조상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

헝가리에서는 지금도 아틸라(Attila, 어틸러)라는 이름은 지금도 상당히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2014년 출생자 기준으로는 남자 이름 중 아틸라는 26위. 기독교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요한의 헝가리어인 야노시(János)보다도 많다. 한국도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흔했던 이름들이 현대에는 사장되는 추세인 국가가 많다.

4.3. 터키에서의 평가

이스탄불의 아틸라 흉상

터키에서도 튀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아틸라가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아틸라 치세의 훈 제국이 오스만 제국 이전에 유럽 정복에 적극적으로 나선 튀르크계 국가라는 점에서 터키인들에게 아틸라는 튀르크족의 유럽 정복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터키에서도 아틸라라는 성이나 이름이 흔한 편이다.

4.4. 몽골에서의 평가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라고 여기는데 이들은 훈족이 흉노의 후예라는 설도 사실로 여기므로 훈족 또한 자신들의 역사로 여겨 헝가리인들 및 터키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틸라를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한다. 다만 아무래도 아틸라가 몽골 초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유럽 땅을 다스렸던 군주인지라 몽골 초원을 다스렸던 묵돌선우, 칭기즈 칸 등에 비하면 덜 존경받는 감이 있다.

5. 창작물에서의 양상

위의 각주와 같이 아틸라의 외모, 인종에 다룬 기록이 부족한 이유로 현대의 서브컬쳐에서는 그 생김새가 다양하게 묘사된다.
  • 제라드 버틀러가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 '훈족의 아틸라'에서는 백인과 같은 외모로 묘사되며, 영화 내용이나 전개가 매우 우수하나 작중 로마군 고증이 완전 개판이다. 기원후 5세기인데 로마 군단병들의 복장이 무려 400년전에 입었던 로리카 갑옷이다. 사실 1-2세기에도 로리카 세그먼타타는 결코 로마군이 일괄적으로 입었던 제식무장은 아니었다. 영화적 묘사와 달리 고대 군대에 복장통일 따위는 없었다.
  • 코미디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에서는 몽골계 황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박물관이 살아있다에 등장하는 훈족들은 몽골인을 참고한 듯한 모습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틈만 나면 주인공인 래리의 사지를 찢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밈이 되었다. 그래도 2편, 3편에서는 래리의 조력자 역할로 굳어지면 나중에는 친구로 지내게 된다.
  • 북유럽신화의 뵐숭 사가를 바탕으로 한 중세 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지크프리트 사후 복수를 꿈꾸는 크림힐트와 결혼한다. 이후 크림힐트의 복수를 도와 부르군트족을 멸망시킨다. 뵐숭 사가에서는 다르다. '아틸라' 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훈족의 지도자로 나오는 건 같지만 브륀힐트의 오라비로서 자신은 군나르의 여동생인 구드룬과 결혼했으면서 브륀힐트가 죽게 한 이유로 군나르가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하는건 반대한다. 그런데 그 자신에게 파멸이 찾아온다. 지크프리트 사후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은 모두 군나르의 것이었는데 아틸리가 그것을 노린것 그래서 함정을 파두고 군나르, 회그니 형제를 불러들인 뒤 그들을 죽인다. 하지만 구드룬은 그에게 구드룬과 아틸라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안주로 대접한 후 아틸라를 살해한다.
  • 헝가리 로망스 풍으로 그려진 아틸라의 연회(1870)라는 그림이 있다. 작가는 탄 모어. 여기서는 유럽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온다.
  •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된 '에다' 언역에서는 브륜힐트의 오빠로 나온다.
  • 아틀란티카에서는 아틸라를 모델로 용병을 만들었는데 용병 성별 균형을 맞추려는 이유 때문인지 여체화해 등장했다. 다만 용맹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상당히 부각된 탓에 이건 여캐가 아니고 남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 임페리얼 가드의 스페셜 캐릭터 모굴 카미르는 아틸라의 패러디다. 아예 그가 살던 행성 이름 자체가 아틸라다.
  • 문명 5 확장팩 신과 왕에서 부디카와 함께 커버 이미지를 장식했으며 훈족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틸라는 중앙아시아 계열의 유목민 모습으로 표현되며, 시도 때도 없이 전쟁할 정도로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의 지도자이면서 도시를 다른 지도자들보다 빠른 속도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여담으로 그의 훈족 문명에 관련된 음악은 모두 흉노에 관련된 '이릉사한'의 멜로디에 기초한다. 가끔 AI가 너무 호전적이어서 주변 국가와 도시국가들에 선전포고하며 어그로 끌다가 주변 문명에게 역으로 다구리 맞아 멸망하는 일도 있다. 물론 그 전에 공성추러쉬로 개작살내는게 대부분이지만...인게임에서 아틸라는 추바시어를 사용하는데 훈족의 언어를 고증할 수 없기 때문에 투르크계인 추바시인의 언어를 사용했다. 여담으로 훈족의 수도명 또한 아틸라의 궁정(Attila's Count)로 나온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에선 캠페인 미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션 제1편과 제6편에서 직접 조종 가능한 영웅 유닛으로도 나온다. 근데 훈족의 특수 유닛인 타칸이 아니고 비잔틴의 카타프락토이로 나온다. 어? 능력치도 센 데다가, 카타프락토이라서 창병에게 보너스 데미지가 안 박힌다. 같은 카타프락토이 영웅인 벨리사리우스조차도 창병한테 죽는 걸 생각하면 메리트. 참고로 이 캠페인의 화자는 아틸라의 군세에 포로가 되어 옆에서 아틸라를 지켜봤던 한 성직자인데, 마지막에 해골을 바라보며 그때가 그리워... 라는 상당히 오싹한 발언을 한다.
  •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 토탈 워: 아틸라에서 주인공이자 지옥에서 기어나온 대마왕으로 등장. 다만 시대적 문제로 인해 훈족의 초기 지도자는 아틸라가 아니다. 유닛들의 모델링, 게임의 OST 등 전반적인 컨셉으로 알 수 있듯이 이번 편의 유목제국 팩션[26]들은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을 모티브로 하여, 흑발 직모에 누런 피부, 째진 눈과 커다란 광대를 지닌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아틸라만큼은 곱슬머리 튀르크계 유목민의 모습에 유럽식 왕관을 쓰고 있는데, 북유럽 전설에도 등장하는 만큼 유럽인들에겐 오랜 시간에 걸쳐 지역화되고 대중화된 캐릭터다 보니, 고증과 상관없이 유니크 스킨(...)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우는 그리스 출신 배우 파노 마스티(Pano Masti). 성우는 그리스인인데, 캐릭터는 그리스에 패악질을 하고 돌아다닌다.[27]
  • Fate 시리즈 세이버 클래스로 TS되어 등장했다. 알테라 항목 참조. 정식 오픈 전 PV때부터 진명이 아틸라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캐릭터성과 과거 등은 많이 어레인지 되어서 원전의 기록과는 달리 사지를 찢지도 않고 천연 속성으로 변했다. 그리고 니벨룽겐의 노래의 에첼 이야기도 Fate 세계관에서는 정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1] 유명인이 권좌에 오르기 전에도 실권을 쥐고 있었으리란 가설은 후세 사람들에게는 꽤나 매력이 있어서인지 람세스 2세도 파라오가 되기 전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고 한다. [2] 그는 본래 로마인이었기에, 아틸라가 죽은 후에는 다시 서로마로 돌아와서 실권자로 행세했다. 재미있게도 오레스테스의 아들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훗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으나 결국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폐위되었다. [3] 어째서 비길라스가 이런 의심을 사기 딱 좋은 짓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술김에 생각없이 내지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애당초 훈족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만하다. [4] 니시는 본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출생지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443년경에 블레다의 공격을 받아 과거의 영광은 간데없이 초토화된 상태였다. 동로마 사절단 중 한 사람이었던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따르면, 한때 기념물이 세워졌던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며, 죽은 이들의 해골이 도처에 널려 있었고, 젊고 건장한 이들은 모두 도망치는 바람에 노약자들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5]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여자들을 보내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사절단도 이것만큼은 부담스럽게 여겨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6] 프리스쿠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궁전은 나무로 지어졌다고 한다. [7] 이는 호노리아의 어머니였던 갈라 플라키디아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딸의 목숨을 보존시키는 동시에 서로마 정계에서의 그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8] 이후 호노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설마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훗날 발렌티아누스가 시해당했을 당시에 함께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9] 당시 아틸라가 직접 거느린 군대에 훈족 기병은 이미 아르메니아로 보냈기 때문에 그다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훈족의 세력권에 편입된 여러 종족들로부터 끌어모은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0] 그 아틸라조차도, 아에티우스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물러난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틸라는 이를 함정이라 생각하여 서고트 족이 물러난 후에도 한동안 진을 거두지 않으며 방어선을 유지했다고 한다. [11] 아퀼레이아는 상당히 번영한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아틸라의 공격으로 인하여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오늘날까지도 이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12] 당시에 아틸라는 그곳에서 스키타이의 족장들이 옥좌에 앉은 로마 황제에게 엎드려 절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는, 화가에게 명령하여 이를 옥좌에 앉은 아틸라에게 로마 황제가 황금이 든 자루를 공물로 바친다는 내용의 그림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그림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3] 전설에서는 레오 1세가 아틸라에게 신의 권능을 보여주며 겁을 주어 강화를 맺도록 한 듯이 전한다. 성인들의 기적에 대한 전승에 따르면 레오 1세가 사제들 몇명만을 대동하고 아틸라 앞에 나섰을 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상은 막대한 재물을 싸들고가서 협상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레오 1세의 결단력과 외교술이 큰 힘을 발휘했음은 사실이고, 레오 1세는 이후 반달족의 침략 당시에도 협상으로 로마를 구했다. 그 업적으로 레오 1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14] 정확한 정체는 미상이다. 부르군트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딱히 근거는 없다. [15] 아틸라는 이미 그 이전에도 수차례 결혼하여 많은 아내들을 두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결혼은 부족과의 선린 우호와 연합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디코의 경우도 마찬가지. [16] 혹자는 심장마비나 뇌출혈로 인한 복상사로 보기도 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마르켈리누스는 아틸라가 신부에게 살해당했다고 보았으나 그 주장에 별다른 근거는 없다. [17] 지도자가 죽었을 때에 장례식에서 부하들이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서 피를 내는 관습은 유라시아의 다른 유목민족들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18] 엘라크를 무찌루고 훈족의 본거지를 차지한 게피다이 족 또한 동고트에게 패배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나 쇠퇴하게 되었다. [19] 앞서 언급했던, 동로마 황제가 몰래 자객을 끼워넣어서 보냈던 바로 그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20] 사실 이 부분은 현존하는 프리스쿠스의 기록에는 없다. 다만 요르다네스가 아틸라의 외모를 묘사한 대목에서 프리스쿠스의 기록을 참고했으리라 보는 것이 다수의 견해이다. [21] 역사학자 피터 히더는 이런 아틸라의 검소함에 대하여, 스스로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지도자라는 점을 부하와 로마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도 닮았다. [22] 이 인물은 아틸라의 형인 블레다의 총애를 받던 훈족의 궁중 광대였다. 아틸라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후에 그를 추방하였다. [23] 대표적으로 니벨룽의 노래, 에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4] 아틸라와는 역사적인 접점이 없는 멕시코에서도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싫어했던 대지주들은 그를 남쪽의 아틸라(El Atila del Sur)로 불렀다. [25] 아틸라를 패배시킨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경우 아틸라와는 반대로 유럽에서의 일반적인 평가가 매우 좋은 반면, 헝가리에서는 자국의 영웅인 아틸라에게 패전이라는 굴욕을 준 적의 수괴마왕으로 여겨진다. 후술할 터키에서의 아에티우스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26] 훈족 백훈족 외에도 이아지게스, 록솔라니, 부디니, 사비르, 아바르, 마자르가 있다. [27]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훈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헝가리와 터키는 역사적으로 그리스가 속한 정교회 문화권과 대립했던 나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