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2 02:25:33

손기(서진)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孫旂
(? ~ 301)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백기(伯旗)로 청주 낙안군 광요현 출신.

2. 생애

아버지 손력(孫歷)은 위나라에서 유주자사, 우장군을 지냈다. 손기는 맑고 침착한 성격을 타고나 젊은 나이에 바르게 수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황문시랑에 올랐고 지방으로 나가 형주자사가 되니, 그 명성과 지위는 해계 형제와 맞먹을 정도였다.

영희(永熙) 연간에는 중앙으로 돌아와 태자첨사를 맡았다가 위위로 옮겨졌으나, 수많은 보물들을 보관해두었던 황궁 창고에 원인불명의 큰 화재가 나는 바람에 공자가 신었던 신발, 한고제가 붉은 뱀을 벨 때 사용한 검 등 진귀한 보물들이 소실되었다. 결국 손기는 책임을 떠안고 면직당했다. 그리고 1년 남짓 지나서 다시 관직에 나가 연주자사로 취임했고, 평남장군, 가절로 옮겼다.

손기의 아들 손필(孫弼)과 조카 손모(孫髦), 손보(孫輔), 손염(孫琰)[1] 네 사람 모두 우수한 관리로 당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이들은 간신배인 손수와 영합하여, 밤에 손수를 따라 신무문을 열고 조왕 사마륜을 맞았다. 이후 사마륜이 정권을 잡자 손필과 그 사촌들은 고위 관직을 연달아 누렸다. 손필은 중견장군에 임명받고 상서좌승을 겸하다가, 얼마 안가 상장군으로 승진하고 사성교위를 겸했다. 또, 손모는 무위장군(武衛將軍)에 태자첨사를 겸했고, 그 동생 손염도 무위장군(武威將軍)에 태자좌솔을 겸하였다. 사마륜이 황제를 칭하고 이들에게 군후의 작위가 주어지니,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던 손기 또한 거기장군에 개부를 더해 직위가 매우 높아졌다.

애시당초 사마륜을 지지하지 않았던 손기는 어린 아들 손회(孫回)를 보내, 손필 등에게 정통되지 못한 조정의 벼슬을 함부로 받은 것을 꾸짖고 지나치면 반드시 화를 부른다며 경고했다. 하지만 손필과 조카들이 손기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으니, 이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던 손기는 그저 집에서 통곡할 뿐이었다. 얼마 후, 제왕 사마경이 사마륜을 토벌함에 따라 손필 등 네 명의 일당은 모두 주살되었다. 양양태수 종대(宗岱)는 사마경의 명을 받들어 손기를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1] 손기의 동생 손윤(孫尹)의 아들들. 손윤은 자가 문기(文旗)로 진류, 양평태수를 역임했으나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