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9 11:15:03

사마훈


사마진 추존 · 비정통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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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都王 | 성도왕
작위 통길정후(通吉亭侯)
왕호 성도왕(成都王)
성씨 사마(司馬)
훈(勳)
위장(偉長)
생몰 ? ~ 366년
출신 불명
부친 사마관(司馬瓘)
국적 진(晉)
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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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황족으로 추정. 제남왕 사마수의 증손자라고 전해지나 『진서』에 따르면 사마수의 아들인 사마탐과 사마집 모두 아들이 없었고, 결국 봉국은 철거되었다고 한다. 또, 사마훈의 아버지라는 사마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사마수의 증손자라는 주장 역시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자세한 혈통은 확인할 수 없다.

2. 생애

사마훈이 10대 무렵일 때는 민제 말로, 장안이 한나라에게 함락당한다. 유요의 장수 영호니가 그를 거두어 양자로 삼았다. 성년이 되었을 때 궁마술에 능숙하여 좌우로 활을 쏠 수 있었다.

함화 6년(331년), 사마훈은 관우 지방에서 남하하여 동진으로 간다. 그리고 자신이 사마의의 동생인 대장추 사마순의 현손이자, 제남혜왕 사마수의 증손, 악양태수 사마관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귀순을 청했다. 동진에서는 아무래도 수상하게 여겼으나 일단 그를 임시로 알자복야에 임명했다.

함화 11년(336년), 마침내 동진으로부터 용맹을 인정을 받아 건위장군에 임명되어 성한의 한중군 정벌을 명 받았다. 사마훈은 군을 이끌고 한중 입성에 성공했으나 이내 한왕(漢王) 이수에게 패배하여 동진으로 귀환했다.

건원 2년(344년), 북벌을 반대하던 강제와 유익의 맏형 유빙이 죽자, 유익은 반평생 칼을 갈며 준비한 북벌을 본격적으로 감행하였다. 유익은 환선(桓宣)을 양주자사로 삼고 관중 방면으로 가 장안을 공격하게 함과 동시에, 자신은 양양, 환온은 임회에 주둔하면서 장안이 함락되면 동시에 북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환선의 북벌군은 단수(丹水)를 타고 진군하다 장안을 지키던 후조의 장수 이비(李羆)에게 요격당해 궤멸당한다. 단수 전투의 패배로 유익이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오랜 기간 준비하던 북벌은 한순간에 좌절되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환선은 건위장군으로 강등당한다.[1]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마훈은 유익에게 자신이 양주자사 자리를 대신하겠다 청하니, 유익은 이를 받아들인다. 사마훈은 양주자사에 임명되어 서성(西城)[2]에 주둔하다 후퇴하여 무당(武當)을 지켰다.

영화 3년(347년), 안서장군 형주자사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켰다. 익주가 다시 진나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사마훈도 본진을 한중으로 옮겼다.

영화 5년(349년), 후조의 황제 석호가 사망했다. 석호의 아들들이 황제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는 바람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그해 사마훈은 낙곡에서 나와 관중을 침공했다. 그는 후조의 장수 장성수를 격파하고 현구에 주둔했는데 장안과의 거리가 200리였다. 사마훈은 부장 유환(劉煥)을 파견해 장안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하성(賀城)을 함락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관중의 여러 지역들이 동진에 호응했으나 사마훈의 군대는 곧바로 보급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게다가 후조의 장수 마추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사마훈은 병사가 적어 마추와 싸우기 힘들거라 판단해 다시 한중으로 회군했다.

영화 7년(351년), 저족의 부건이 관중 지역을 장악한 뒤 천왕이라 칭한다. 당시 장거와 두홍이 농동(隴東) 지역을 근거지로 부건과 다투었는데, 둘은 사람을 보내 사마훈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에 응한 사마훈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다시 한중에서 나와 진천(秦川)에 주둔한다. 하지만 부건이 군사를 파견해 쫓아내게 했고, 사마훈은 부건의 군대와 오장원에서 맞서 싸웠지만 지고 한중으로 돌아갔다. 한편, 동진은 비록 촉 땅을 손에 넣었지만 진위호군 소경문이 부성(涪城)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다. 환온은 등하와 익주자사 주무를 파견해 소경문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영화 8년(352년), 환온은 어쩔 수 없이 주무에게 경계 대상이던 사마훈과 협공하도록 했다. 소경문은 성공적으로 토벌되었고 익주의 여러 반란들도 하나둘 진압되거나 항복하니 촉 땅이 안정되었다.

영화 10년(354년), 환온은 북벌을 진행하였고 동시에 사마훈에게도 자오도로 나와 관중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환온의 주력은 남전현(藍田縣) 남쪽에 위치한 요류(嶢柳)에서 전진(前秦)의 부웅, 부생이 이끄는 군대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했지만, 잠시 진격을 멈추면서 전진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고 만다. 전진의 승상 부웅(苻雄)은 이 기회를 틈타 날쎈 기마병 7천을 이끌고 장안으로 달려가 자오도에서 올라오고 있던 사마훈의 군대를 격퇴시킨다. 사마훈은 부웅에게 패하고 물러나 여왜보(女媧堡)에 주둔했다가 동진의 북벌에 응했던 전량의 장수 왕진(王擢)과 합류해 진창(陳倉)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진창이 함락될 시기엔 이미 환온의 주력은 군량 보급 문제에 시달린 지 오래였고, 얼마 안가 환온이 퇴각하자 부웅이 다시 서로 군사를 돌려 사마훈과 왕진의 연합군을 격파한 뒤 진창을 탈환했다.

이후 사마훈은 정로장군으로 승진하여 관중 지역의 군사를 감독하고, 양주자사와 서융교위를 겸하며 통길정후(通吉亭侯) 작위를 하사받았다. 사마훈은 혹독하고 포학하여 휘하 관리나 양주의 호족들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참수하거나 사마훈이 직접 활로 쏴죽였다. 양주 사람들은 이런 사마훈의 흉포함을 늘 두려워하며 걱정했다고 한다. 한편, 사마훈은 촉을 점거한 뒤 양주와 익주에서 할거할 야심을 항상 품고 있었다. 이를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환온은 그를 달래기 위해 사마훈의 아들인 사마강을 한중태수로 삼았다. 사마훈은 할거할 뜻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익주자사 주무가 두려워 감히 역모를 행하지 못했다.

영녕 3년(365년), 주무가 세상을 뜨자 그해 10월에 사마훈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반란을 멈출 것을 간하는 양주별가 옹서와 서융사마 외수를 죽이고 검각을 통해 촉으로 들어갔다. 촉 땅에 성공적으로 들어온 사마훈은 스스로 성도왕이라 칭한 뒤, 부성(涪城)을 공격하니 성을 수비하던 서이교위 관구위가 달아났다. 아무런 저항없이 촉 땅에 들어오고 부성까지 접수하자 자신감이 붙은 사마훈은 곧바로 성도로 진격해 포위한다. 이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익주자사를 물려받은 주초는 성을 굳게 지켰다.사마훈의 반란을 보고받은 환온은 강하상 주서를 보내 주초를 구원하게 했다.

영녕 4(366년) 3월, 환온은 형주자사 환활과 독호 환비로 하여금 사마훈의 본진인 한중군 남정(南鄭)을 치게 했다. 그해 5월, 주서가 사마훈의 주력군을 성도에서 격파하고 사마훈과 함께 그의 아들 사마용자, 장사 양탄, 사마 김일 등 반란의 주모자들을 모두 생포하여 환온의 진중으로 압송한다. 환온은 이들을 모두 참수하고 수도인 건강에 보내면서 사마훈의 반란은 허무하게 마무리 된다.

3. 여담

전적만 놓고 보면 평범한 잡장처럼 보이지만 대진운이 상당히 안좋았던 점을 감안하긴 해야한다. 사마훈을 격파한 부웅은 외모는 볼품없었으나 문무 양면으로 모두 뛰어났으며 과감한 결단력에 성품마저 빼어나 부건이 특히 총애했던 명장 중에 명장이었고, 주서 역시 동진을 대표하는 명장 중 하나로 사마훈 토벌로 커리어를 시작해 군공을 차곡차곡 쌓아나가 후엔 비수 전투에서 대활약까지 한다. 사마훈이 동진에 귀부할 때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는 걸 생각하면 나름 동진에서 인정받는 용장이긴 했지만 이들을 상대하긴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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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선은 동진 초부터 활동했던 중신으로 나름 조정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패배로 환선의 명성은 회생불가능할 정도로 곤두박질 치는 바람에 그는 늙고 병들어 조정에 있을 수 없으니 강릉이나 지키겠다고 청한다. 동진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남군태수로 삼았지만, 같은 해 8월 31일 부임지로 가던 중 분사하고 만다. [2] 현재는 중국의 산시성 시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