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11:17:21

사르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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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국가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지역 남부
중심 도시 칼리아리
시간대 UTC+1
주지사 알레산드라 토데(Alessandra Todde)

인문 환경
인구 1,661,000명
인구밀도 69명/km²
면적 24,090km²
HDI 0.856
파일:external/www.storiaradiotv.it/SARDEGNA.jpg
사르데냐 섬 지도. 북쪽 해협(보니파시오 해협) 건너편에 살짝 보이는 땅이 코르시카 섬이다.

1. 개요2. 언어3. 역사4. 분리주의5. 문화6. 행정구역7. 창작물에서의 사르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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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 자치주 공식 소개 영상
이탈리아의 섬이자 레조네. 이탈리아 서쪽 지중해 서부에 있다. 인구는 166만 1000명, 면적은 24,090 km²다. 섬이 마치 포르투갈을 두동강내어 튀어나온 반쪽같이 생겼다.

바로 북쪽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고향인 코르시카섬이 있다. 코르시카는 이탈리아 본토에 더 가깝지만 이탈리아의 섬이 아닌 프랑스의 섬이다. 가깝기는 하지만 사르데냐-코르시카 사이의 해협은 암초가 많아서 항해하기에 별로 안 좋다고 한다. 묘하게도 이탈리아 영토인 사르데냐와 달리 프랑스령인 코르시카섬의 언어는 이탈리아어와 흡사하다고 한다.[2] 사실 이탈리아계 국가였다가 프랑스에 먹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도 어릴때 이탈리아어를 썼었다.

사실 세계 지리 상식이 있고 이탈리아를 좀 안다는 외국인들도 코르시카가 프랑스의 섬이라는 건 잘 알아도 이 섬은 이름도 잘모르고 더구나 이탈리아의 영토라는 건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냥 코르시카의 일부나 코르시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령으로 착각할 정도로 코르시카에 비해 세계적 인지도가 안습하다. 외국인에게 이탈리아 지도를 그려보라고 하면 시칠리아 섬은 대부분 그리지만 샤르데냐 섬은 그냥 넘어간다. 이탈리아 창작물 등에도 잘 등장하지않고 크기나 인구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이탈리아의 데려온 자식 취급.

일단 서지중해에서는 가장 큰 섬이다. 2위는 코르시카섬, 3위는 마요르카 섬이다. 시칠리아섬이 더 크기는 하지만 시칠리아는 엄밀히 말해서는 서지중해와 동지중해 사이에 낀 섬인데다가 좁은 해협만 건너면 이탈리아 반도로 나아갈 수 있기에 고대부터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의 연장선으로 취급받았다. 실제로 뒤에 나오는 사르데냐 왕국도 시칠리아와 교환해버린 것이다.

사르데냐 섬에서 지중해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프리카 대륙의 마그레브 지역, 정확하게는 알제리, 튀니지가 나오며, 이 두 국가와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다.

먼 지역에서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대개 KLM 네덜란드 항공이 많이 이용된다. 로마에서 사르데냐 최대 도시인 칼리아리까지는 ITA 항공을 이용하며, KLM과 에어 프랑스가 코드셰어를 걸어놓았다.

여타 지중해의 그렇듯 온화한 기후와 수정 같이 맑은 물을 띄는 아름다운 해변들 덕에 휴양지로 유명한데 휴가철만 되면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빌 게이츠, 다이애나 스펜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등과 같은 여러 유명인들이 휴가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선사시대 돌탑들과 서지중해 중심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 덕에 다양한 지배 세력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여러 역사 유적 및 구시가지가 보존되어 있다. 다만 이탈리아의 외딴 섬에 있는 지방인 것 치곤 유럽에선 휴양지로 잘 알려진 탓에 물가가 조금 비싸다고 느낄 순 있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외부와 교류가 적었기 때문에 언어가 덜 바뀌었다. 언어학자들은 사르데냐어가 현존하는 로망스 계열 언어들 중 발음 면에서는 가장 고전 시기의 라틴어에 가깝다고 본다.

지역 음식으로는 치즈계의 최고 괴식 카수 마르주로 유명하다. 물론 샤르데냐 사람들 전부 이런 것만 먹지는 않는다. 고대 로마 시절 로마 지역의 전통 치즈인 페코리노 로마노도 현재는 샤르데냐에서 생산되고 있다.

정어리가 많이 잡혔던 시절이 있던지, 영어 단어 sardine(정어리)의 어원이 되는 지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섬의 고유종으로 사르데냐 우는토끼가 있었다. 그러나 1만 년 전부터 인간들이 해당 섬들에 정착하면서 이들을 사냥하고, 농경활동으로 서식지를 파괴하며 인간과 함께 들어온 포식동물 및 경쟁동물들에게 밀려서 기원전 810년 즈음에 멸종했다. 다만 그 후로도 이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1774년까지도 나오긴 했지만 3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집쥐 등 다른 종 혼동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3]

헤게모니로 유명한 정치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고향이기도 하다.

2. 언어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쓰지만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사르데냐어라는 고유어가 있다. 참고로 사르데냐어는 이탈리아어의 방언, 사투리가 아닌 별개의 언어이다. 언어 관련 정보 인도유럽어족 부분의 로망스어군 부분, 또는 로망스어군 항목을 잘 살펴보면 이탈리아어와 포르투갈어, 심지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보다도 계통상 거리가 멀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사르데냐어와 별개로 섬 북동부 갈루라(Gallura) 지역에서는 갈루레세어(Lingua Gallurese)라고 해서 코르시카어 계통의 언어가 사용되며, 섬 남서쪽의 산피에트로(San Pietro) 섬과 산탄티오코(Sant'Antioco) 섬에서는 리구리아어 방언인 타바르키노(Tabarchino) 방언이, 섬 북서쪽의 알게로(Alghero)에서는 카탈루냐어 방언인 알게로 방언(Dialetto algherese)을 쓰기도 한다.

3. 역사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석기시대로부터 살아온 선주민들 고유의 문화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이주민들의 문화가 서로 섞이고 대립하곤 했다. 사르데냐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문명 유적은 기원전 23세기~18세기 경에 바다 민족중 하나인 셰르덴인의 영향을 받은 누라게 문명이었으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쇠퇴하였다.

기원전 10세기부터 페니키아인들이 섬에 방문하며 식민도시를 세우기 시작했으며, 카르타고가 섬에 원정대를 보내 섬 남부를 점령하였으나 선주민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용병 전쟁 시점에서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로는 로마 제국 밀셔틀로 활약했다. 다만 스트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제정 시기까지도 내륙지역에는 섬 고유 문화인 누라게 문화가 일부 남아있었다고 한다.

중세에는 코르시카, 시칠리아와 더불어 동로마 산하 아프리카 총독부의 영역으로 있었지만 아프리카 총독부의 치소인 카르타고는 698년에 우마이야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이후 제국이 근근히 유지했지만 827년 이슬람 세력의 시칠리아 진출 시작을 계기로 콘스탄티노플 본국을 포함한 동지중해와는 시칠리아 근해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르데냐의 특성상 교통 및 통신이 점점 방해받아, 딱히 앞장서서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독립했다.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고, 이탈리아 본토와의 연락은 별로 없었던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 때는 섬의 일부가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본토 해양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어 그들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노바 공화국의 세력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쟁에서 불리해짐에 따라 1325년에 통제를 잃었으나 사사리 등 일부 도시는 친제노바계 정권이 유지되었다.

파일:500px-Giudicati_of_Sardinia_1_svg.png

한편 13세기까지 아르보레아(Arborea) 주디카토, 갈루라(Gallura) 주디카토, 토레스(Torres) 주디카토[4], 칼리아리 주디카토 등 4개의 주디카토(giudicato)[5][6]라는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르보레아가 나머지 세 국가를 병탄하여 통일하는 듯 보였으나 사사리는 독립된 도시국가가 되었고, 칼리아리는 아라곤 왕국의 치하에 들어갔다. 원래 시칠리아 왕국령이었는데 시칠리아의 만종[7]으로 시칠리아 섬이 독립하자 남은 나폴리 왕국의 카를로 2세가 아라곤 측이 시칠리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대가로 시칠리아 대신 사르데냐를 할양한 것이다.

1420년대에 들어서는 아라곤 왕국의 전면적인 침략에 의해 아르보레아가 멸망함에 따라 시칠리아와 함께 아라곤 연합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아라곤이 카스티야 왕국과 통합해 스페인이 되면서부터는 스페인 제국 압스부르고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71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잠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나 프랑스 왕위에 욕심낸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 인해 사국 동맹 전쟁이 일어나 시칠리아가 스페인 해군에게 함락되었다가 다시 탈환되자 카를 6세 사보이아 공국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협박을 앞세워협정을 체결하여 1720년부터는 사보이아 가문 치하에서 동군연합을 형성해 사르데냐 왕국이 되었다. 이후에는 이 사르데냐 왕국이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남부 양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한 주세페 가리발디와 붉은 셔츠단의 협조를 받아 이탈리아 왕국을 형성했다. 다만 여기서의 사르데냐 왕국은 사보이아 공국의 후신이자 피에몬테 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왕국으로 사르데냐 섬과는 영토 외에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모두 사르데냐 섬에 발 한번 내딛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어 공용어로 지정된 것도 1760년이 되어서였다. 딱 한번, 나폴레옹 전쟁때 국토가 점령당하여 사르데냐의 칼리아리 임시수도로 삼아 천도했던 정도였고, 그나마도 끝나고 환도했다.[8] 이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개칭했다가 통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중 근해 앞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추축국 해군이 교전을 치렀고, 연합군은 손실없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재정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 호텔 지배인 세르지 오볼렌스키를 포함한 OSS 직원 4명을 투입했다. 섬에 잠입한 오볼렌스키가 섬 내 이탈리아 왕국군 사령관 바소 장군을 설득하는데에 성공하여 연합군은 사르데냐 섬에 손쉽게 상륙했고 이후 이탈리아 상륙의 전초기지로 사용했다. 추축국인 이탈리아의 영토였음에도, 사르데냐 도민들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 본토와의 유대감이 없었다.[9]

4. 분리주의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본토 지역과는 이질적인 도서 지역이라 자치권이 있고, 가끔씩 독립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사르데냐 섬에는 이탈리아군을 포함해 나토 미군의 군사기지가 있는데 이 군사기지들이 유발하는 환경오염이 심각하다. 이외에도 군사기지 주변의 주민들이 이상한 병에 걸리거나, 기형아를 출산하는 등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분리주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 *

60-80년대에 사르데냐에서는 실제로 좌익 성향의 단체들이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도 시도했다. 오늘날에도 사르데냐 행동당 같은 일부 정당이 지역 선거에서 소소하게 힘쓰기도 한다.

5. 문화

매년 월드 랠리 챔피언십의 한 라운드를 차지하며 2004년부터 기존의 산레모 랠리를 대체하며 알그히로나, 올비아의 시내 주변 꼬불꼬불한 산길에서 열린다.

현재까지 세바스티앙 로브, 세바스티앙 오지에, 다니 소르도, 티에리 누빌이 해당 랠리의 2회 이상 우승자이다.

비슷한 이탈리아의 큰 지중해 섬인 시칠리아와는 달리 비록 강등권을 오고가기는 하지만 현재 엄연히 세리에 A에 소속된 축구 팀인 칼리아리 칼초가 사르데냐 섬 남부의 중심도시 칼리아리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6. 행정구역

7. 창작물에서의 사르데냐

7.1. 죠죠의 기묘한 모험

디아볼로의 정체를 알기 위해 주인공 일행이 조사하는 무대로 나온다.

7.2. 캄피오네!

작중 주인공 쿠사나기 고도가 할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가는 섬이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쿠사나기 고도가 승리의 신 베레트라그나를 살해했다.

7.3. 파드레 파드로네

타비아니 형제의 대표작 파드레 파드로네의 배경이기도 하다. 언어학자 가비노 레다의 자전적인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 샤르데나의 거친 문화를 잘 알 수 있다.

7.4. 토탈 워: 로마2

부흥 캠페인에서 사르데냐 진영인 이올레이족이 등장한다. 토탈 워: 로마2/이올레이 항목 참조.

7.5. 토탈 워: 파라오

바다 민족 셰르덴 진영이 사르데냐에서 왔다는 가설을 채택했다. 토탈 워: 파라오/바다 민족/이올라오스 항목 참조.


[1] 4명의 무어인(I quattro mori)이라고 불린다. 무어인 그림은 사르데냐 바로 위인 코르시카 깃발에도 그려져 있다. 깃발에 대해서 비판도 있는데, 인종차별 논란은 둘째치고 아라곤의 지배시절이 유래이기 때문. [2] 코르시카는 오랫동안 북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영토였지만 그에 반해 사르데냐는 동로마의 철수 이후 이슬람, 이베리아 국가들의 영토로 긴 세월 동안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반도와의 거리가 먼 사르데냐와는 달리 코르시카는 표준 이탈리아어의 근간이 된 토스카나 지방과 가까워 교류가 잦았다. [3]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고조선 시기에 멸종해서 조선 영조 5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기록이 나온 셈이다. [4] 로구도로(Logudoro) 주디카토라고도 한다. [5] 복수형으로는 주디카티(Giudicati)라고 한다. [6] 이 국가들의 군주들은 ' 판사'라는 의미를 지닌 주디체(Giudice)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7] 1186년,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인 루지에로 2세의 유복녀이자 상속자였던 쿠스탄차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6세의 결혼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조에게로 넘어간 시칠리아의 왕관이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가 잇따라 죽고 콘라트 4세의 아들인 콘라딘이 어린 나이에 시칠리아의 국왕에 오르자 콘라트 4세의 이복형제이자 콘라딘의 숙부였던 만프레디가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문제는 만프레디는 왕위 계승권이 없던 사생아였기에 이 기회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호엔슈타우펜 세력의 확장을 저지함과 좀 더 교황령에 우호적인 사람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넘기고 싶었던 교황이 당대 최고의 가톨릭 군주이자 후에 성인으로 시성되기까지 할만큼 독실했던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남동생이던 앙주 백작 샤를 당주가 시칠리아 국왕이 되는 것을 승인했고 이후 샤를은 만프레디를 전투 중 전사시키고 카를루 1세로서 시칠리아의 국왕이 됐다. 이후 적법한 왕위를 주장하고 쳐들어온 콘라딘까지도 1268년에 무찌르고 살해해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적통 후손을 단절시키자 시칠리아에서 카를루 1세에게 도전할 사람은 없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후였는데 카를루와 동로마 제국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카를루는 군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시작했고 이에 반발한 시칠리아 섬 주민들이 아라곤 왕국의 페드루 3세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를 시칠리아의 만종이라고 한다. 이렇게 한 순간에 영토의 반을 잃게된 카를루 1세는 분노하여 교황과 손을 잡고 아라곤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은 아라곤의 승리로 끝나면서 시칠리아 섬은 아라곤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존속하고 있던 시칠리아 왕국은 나폴리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게 된다. 단 그 때도 정식 국호는 시칠리아 왕국이었다. [8] 다만 칼리아리에 머무르던 시절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로부터 사르데냐 부왕으로 임명되었던 카를로 펠리체가 사르데냐 사람들의 후진적인 생활 수준에 개탄해 형으로부터 양위받은 후 사르데냐를 근대화시켰다. [9] 그당시 이탈리아는 통일된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하나의 이탈리아인이라는 인식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특히 사르데냐는 오랫동안 아라곤 왕국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그 다음으로 지배하게 된 사보이아 가문도 90여 년 동안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