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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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步熊(? ~ 304)
서진의 인물. 자는 숙비(叔羆). 기주(冀州) 양평군(陽平郡) 발간현(發干縣) 출신.
2. 생애
젊어서부터 점술과 음양오행의 술수를 좋아하였고, 제자들을 매우 많이 두었다. 어느 날, 그의 학당 옆에서 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는데, 관리가 이를 실화로 의심하여 보웅의 제자들을 잡아들이려 하였다. 이때 보웅이 관리에게 말하길"이미 경을 위해 범인을 점으로 찾았소. 길 남쪽으로 따라가다 보면 불의 주인을 찾았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를 잡도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관리가 보웅의 말대로 하니, 실제로 밭을 갈던 사람이 나타나 자백하였다. 그는 풀밭을 태우려고 불을 질렀는데, 갑작스러운 바람으로 인해 멀리까지 불이 번졌던 것이고, 풀밭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진술하였다.또 한번은, 이웃의 한 아이가 멀리 여행을 떠났는데, 누군가 그들에게 그 아이가 죽었다고 전해주었다. 그 부모는 슬퍼하며 상복을 입고 통곡했지만, 보웅이 점을 쳐서 그 아이가 정해진 날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그 날이 되자, 실제로 아이가 돌아왔다고 한다.
얼마 뒤, 조왕 사마륜이 보웅의 명성을 듣고 그를 소환하였다. 보웅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조왕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를 따를 필요는 없다."
이에 사마륜은 분노하여 병사들을 보내 보융의 학당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보웅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고, 자신은 북쪽으로 빠져나가 탈출하였다. 이후 성도왕
사마영이 보웅을 초빙하여 그에게 점을 보게 하였고, 보웅의 점궤는 빗나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영흥 원년(304년) 12월, 혜제 사마충이 환궁하면서 권력을 잃은 성도왕 사마영은 업(鄴)을 버리고 관중으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업을 진수하게 된 평창공 사마모는 보웅을 사마영의 도당으로 여겨 주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