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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5년 8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 지방의 베르주라크(Bergurac)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2. 상세
1345년 6월, 1343년 1월 19일에 체결된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이 만료되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3개의 전선에서 프랑스를 동시에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은 분견대를 이끌고 브르타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가스코뉴에서 활동하며, 에드워드 3세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은 플란데런 백국을 통해 프랑스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1345년 3월,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2,000명의 병력을 모집한 뒤 가스코뉴로 가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기로 했다. 그의 부대는 5월 말 사우샘프턴에서 151척의 함대에 몸을 싣고 출항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몇 주 동안 플리머스 항에 대피했고, 5월 23일에 날이 개자 다시 출발해 7월 9일 보르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와 함께 프랑스군을 상대할 예정이었던 가스코뉴인들은 스태퍼드 백작 랄프의 지휘하에 먼저 행동을 개시해 6월 초 도르도뉴에 있는 몽트라발과 몽브레톤을 손쉽게 공략하고 보르도 남쪽의 랑곤을 포위 공격했다. 여기에 가스코뉴 귀족들이 조직한 소규모 민병대가 가스코뉴 주변 지역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의 주력군은 6월 29일 출항했다. 그들은 7월 22일까지 플란데런의 슬로이스 항에 정박하다가 재차 바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잉글랜드의 여러 항구로 흩어졌다. 그 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데다 왕과 의회가 앞으로의 계획을 놓고 격론이 벌어지느라 시간을 더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재출항이 힘들어졌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내년에야 프랑스에 올 거라는 정보를 파악하자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 병력을 파견해 그곳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 분견대를 궤멸시키려 했다.
이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헨리는 중장병 500명, 기병 500명, 잉글랜드 및 웨일스 출신 장궁병 1,000명과 함께 랑곤으로 진군하여 스태퍼드 백작과 합류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규모 요새에 대한 포위 공격에 치중했던 스태퍼드와는 달리 적군이 집결을 완료하기 전에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로 했다. 정찰병이 프랑스군이 베르주라크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곳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분쇄하고 도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보르도와 가론강으로 연결된 베르주라크를 장악한다면, 보르도의 안전이 확보되고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프랑스를 상대로 작전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중순, 헨리는 1,200명의 중장병, 1,500명의 장궁병, 2,800명의 가스코뉴 보병대를 이끌고 베르쥬라크로 진군했다. 당시 베르주라크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중장병 1,600명과 다수의 보병대가 있었다. 그들은 몽퀴(Montcuq) 마을과 베르주라크 시 사이의 도로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그들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학자들은 베르주라크에 있다가 헨리의 유인책에 넘어가 도로로 쫓아갔다가 매복에 당했거나 몽퀴 마을을 포위 공격하다가 뒤늦게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던 중 도로상에서 급습당한 것 중 하나일 거라 추정한다.
헨리는 장궁병을 동원해 적군에 화살비를 퍼부은 뒤 기사들을 앞세워 돌격했다. 프랑스군은 갑작스러운 급습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베르주라크 시의 다리 남쪽 끝에 있는 생 마들렌 성당 교외 지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추격이 너무 가까워서 성당 문을 미처 닫지 못했고, 잉글랜드군은 다리를 향해 밀고 들어가서 양 끝을 장악한 뒤 다리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프랑스군을 가론 강둑으로 밀어붙여 모조리 사살했다. 그 후 베르주라크 시로 방향을 돌려서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오지 못한 프랑스군을 몰살시킨 뒤 성문에 불을 질러 손상을 입혔지만 당일에 공략하지는 못하고 생 마들렌에 진을 친 뒤 포획한 음식과 포도주를 즐겼다.
비록 당일에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베르주라크의 주요 강변 방어 시설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남은 방어시설은 약하고 구식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며칠 후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은 짧은 공성 끝에 도시를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지휘를 받으며 페리괴로 퇴각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600명 이상의 프랑스 기사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많은 수가 포로로 잡혔으며,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는 앙리 드 몽팅니와 다른 10명의 고위 귀족, 그리고 다수의 하급 귀족이 포함되었다. 헨리는 몸값과 전리품을 챙김으로써 34,000 파운드(2023년 기준 3500만 파운드)를 챙겼다. 이 수익은 그가 영지에서 확보하는 연간 수입의 약 4배였다고 한다. 잉글랜드-가스코뉴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했을 것이다.
이렇듯 큰 성과를 거둔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페리괴를 포위했다가 남부 프랑스의 주력군이 그 해 10월에 소집을 끝내고 구원을 위해 진격해오자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그러다 1345년 10월 21일 오베르슈를 포위 공격하는 프랑스군 분견대를 기습해 궤멸시키면서( 오베르슈 전투) 남부 프랑스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해산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