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2:11:52

베트남 공화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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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트남 공화국군기.svg
베트남 공화국 군력
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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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육군 베트남 공화국 해군 베트남 공화국 공력

<colbgcolor=#fff> 베트남 공화국 군력
[ruby(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 ruby=軍 力 越 南 共 和)][1]
Forces armées de la République du Viêt Nam (FAVN)
Republic of Vietnam Armed Forces (RVNAF)[2]
파일:베트남 공화국군기.svg 파일:남베트남 전쟁기.svg
평시 군기 전시 군기
창설일 1955년 12월 30일
해체일 1975년 4월 30일
소속 베트남 공화국 국방부
명령체계 총참모부
본부 베트남 공화국 사이공 도성
정규병력 586,838명
부서병력 1,000,000명
병영형태 징병제
편제 베트남 공화국 육군
베트남 공화국 해군
베트남 공화국 공군
참전 베트남 전쟁
라오스 내전
캄보디아 내전
파라셀 군도 해전

1. 개요2. 수뇌부3. 병역4. 구성
4.1. 베트남 공화국 육군4.2. 베트남 공화국 해군4.3. 베트남 공화국 공군
5.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 작전6. 문제점
6.1. 심각한 부정부패와 잦은 쿠데타6.2. 자구책의 부재6.3. 병사들의 사기 저하6.4. 아군에게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6.5. 전술, 전략적 실책6.6. 전쟁범죄 및 민간인 학살
7. 최후8. 계급
8.1. 1964년 이후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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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1년 남베트남군 열병식. 한국군도 등장한다.[3]
1973년 군력의 날(ngày quân lục) 남베트남군 열병식. 남베트남군의 마지막 열병식이다.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의 정규군으로 원래 정식 명칭은 프랑스식 명칭인 '베트남 공화국 군대(Quân đội Việt Nam Cộng hòa / 軍隊越南共和 / L'Armée de la république du Viêt Nam)'였으나 응우옌카인에 의해 미국식 명칭인 '베트남 공화국 군력(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 / 軍力越南共和)'으로 바뀌었다.[4] 월남군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북베트남 베트콩 괴뢰군이나 사이공군으로 불렀고, 자유진영에서는 정규군이나 정부군으로 불렀다. 베트남어 약칭은 QLVNCH이고 영어 약칭은 RVNAF(Republic of Vietnam Armed Forces)이나, RVNMF(Republic of Vietnam Military Forces)라고도 불렸다.

굴리는 장비의 질이나 양만 보면 동시대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강군이었으며 병력 수도 전 세계 5위에 달했으나[5] 실체는 60년대 초반의 주적인 월맹 정규군도 아니고 베트콩 상대로 게릴라전도 아닌 회전에서도 여러차레 털리는 등 졸전을 거듭하는 오합지졸 군대였다.[6] 물론 지휘관 개개인이나 부대 단위로 보면 미군에게도 칭송 받은 명장, 정예 부대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고질적인 수뇌부 자체의 부정부패, 미약한 동기부여, 미군에게 공여받은 고가치 장비를 제대로 굴리지도 못하는 미약한 국가 인프라 같은 핵심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미군 철수 이후 베트콩과 월맹군에게 패망했다.[7] 현대사에선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아도 동기부여와 정치적인 의지 없이는 오합지졸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교과서적인 사례로 꼽힌다.[8]

사실 장비 수준도 알려진 것만큼 높지 못했다. 월남군 지상군 대부분은 50년대부터 1968년까지 개인화기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인 M1 개런드 카빈을 사용했다. 그마저도 없으면 프랑스가 남겨놓고 간 노후화된 볼트액션 소총 따위를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지원화기 역시 M1918 브라우닝이나 M1919 브라우닝 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물건들이었다. 베트콩의 공세가 정점에 달한 68년에야 현역 사단들을 중심으로 M16 소총, M60 기관총, M72 LAW가 보급되었다.[9] 기갑전력으로 가면 M48 패튼 같은 주력전차는 소수였고 M41 워커 불독 이나 M24 채피가 주력이었다. 공군 역시 대한민국 공군이나 항공자위대가 보유한 F-4 팬텀 등은 한 대도 없었다. F-5만큼은 191대를 보유해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긴 했다. 양적 규모는 몰라도 질적인 측면에서는 마찬가지로 2선급 동맹국으로 간주된 동시기 대만군 수준이었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하자 해체되었다. 부패한 베트남 공화국답게 장교들도 부패해 우수하고 성능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결국 월맹군에 패배했다.[10] 패망 이후 이들은 재교육 캠프에 보내지거나 일부는 베트남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2. 수뇌부

1975년 4월 30일 패망 당시 기준이다.
파일:ID_28530-front_politics_1973.jpg.jpg 파일:220px-Trần_Văn_Đôn.jpg 파일:nguyn-hu-hnh-6c5a425c-eaa6-4527-a990-ecafe1f89db-resize-750.jpg
총통 즈엉반민 국방총장 쩐반돈(Trần Văn Đôn) 중장[11] 총참모장 응우옌흐우한(Nguyễn Hữu Hạnh) 준장 [12]

3. 병역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20세부터 45세까지의 성인 남성을 징병대상자로 지정하여 복무시켰다.18세, 19세 청년들은 징집대상에서 제외되던 시절도 있었으나[13] 주월미군 병사들이 대부분 18세에서 19세였는지라 주월미군과 베트남 공화국군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도 있었고,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징집 연령은 18세로 낮춰진다.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4. 구성

4.1. 베트남 공화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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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베트남 공화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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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베트남 공화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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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 작전

남베트남군은 단순히 자국 본토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호치민 루트가 위치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해서도 군사작전을 실시한 바 있다.
  • 캄보디아 캠페인(1970년 4월 29일~ 7월 22일):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미군의 철수를 위한 본격적인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이 자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캄보디아에는 북베트남군과 배트콩 4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위협하고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지원 아래에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북베트남군 세력을 공격했다. 북베트남군 지휘 세력을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동부 캄보디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하는 큰 성과를 얻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많은 병력들과 물자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목적을 달성한 남베트남군은 다시 철수한다.
  • 람 손 719 작전(1971년 2월 8일~3월 25일): 이번에도 “베트남화” 정책 추진의 연장선상으로 미국은 라오스의 호치민 루트를 남베트남군 주도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14] 남베트남군은 무려 20,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라오스의 국경을 넘었고 미국은 포병과 공습으로 남베트남군을 지원했다. 그렇지만 미국 정보 당국의 예상과 달리 라오스에 주둔한 북베트남군은 훨씬 많았고 이들은 남베트남군에 대해 격렬한 반격을 가했다. 북베트남군은 야포로 남베트남군을 타격했고 대공포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해 헬기를 이용한 보급을 막고 있었다.[15][16] 남베트남군은 라오스의 세뽄을 점령하고 북베트남군의 물자기지 일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지만 퇴각하는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결국 남베트남군은 10,000명이 넘는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남베트남군은 미군들이 수행하던 전투방식을 그대로 모방했으나, 결국 북베트남군에 허를 찔려 실패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작전 이후에도 해당 지역의 호치민 루트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고 실효성도 없는 작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비록 북베트남군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상당수가 미군의 항공폭격과 포병포격 덕분이었다. 특히 다름이 아니라 남베트남군 최정예 부대인 해병 사단과 공수 사단, 레인저 부대들의 피해가 매우 컸기에 남베트남군의 총체적 문제가 다시금 드러난 전투였다. 남베트남의 수 많은 전사자 유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이 울분을 토했으며 리처드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급하게 “라오스에서의 군사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마무리해야했다. 당시 미군은 다수의 항공기 소티로 4개월 동안 자그마치 52,00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그럼에도 작전이 실패해 남베트남군의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베트남화 정책은 사실상 실패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6. 문제점

헨리 키신저: 작전을 주시했는데 남베트남군은 우리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습니다.

리처드 닉슨: 그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헨리, 나는 그 망할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그들은 진짜 충돌을 할 준비가 안된 거 같아.

헨리 키신저: 그게 걱정입니다.

리처드 닉슨: 준비가 안 됐어. 1972년 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나왔으면 좋겠어, 현실을 직시하자고. 만일 내 재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면 이 사실을 기억하게. 난 이 일을 처리해야 해.
1971년, 라오스의 호치민 루트 차단을 위한 남베트남군의 '람 손 719' 작전에서 남베트남군이 패퇴하자 기록된 백악관 녹취록
(출처: 베트남 전쟁 10부작. 감독 켄 번즈) #
부패하고 무능한 남베트남이란 기존 통념과 달리 남베트남군의 병력 질과 수준은 초기 응오딘지엠 시기까지만 해도 제법 멀쩡했다. 도리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힘입어 숙련된 장교진의 활약이 북베트남에 비해 크게 두드러졌으며, 월남전 초창기 북베트남군, 베트콩 게릴라들과의 전투에선 남베트남군이 일방적으로 압도하거나 설령 패배하더라도 전투 중 전술/전략적 거점을 상실했을 뿐 북베트남의 공세에 휘말려 대규모 사상자로 발생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응오딘지엠 총통이 그런 강력한 군대의 쿠데타에 의하여 살해당하며 남베트남 정부와 정권의 정통성이 통째로 상실한 것이었다.

크고 작은 부대가 게릴라식으로 부딪히던 베트남 전쟁 특성상 가장 크게 두드러진 남베트남군의 장기였던 현장 장교와 부사관의 판단을 통한 유연성은 이들이 정권의 군사적 위협이 되자 곧 말살되어가기 시작했다. 2년간 무려 아홉 번이나 쿠데타가 연이어 발생하며 남베트남의 인적 자원은 이런 무의미한 쿠데타에 의해 크게 소모되었고, 73년까지는 그나마 미군의 지원과 남아있는 일말의 유연성을 통해서 버텼지만, 응우옌반티에우의 군사적 전통을 무시한 군사개혁과 정예부대의 사이공에만 집중된 소극적이고 수세적 운용, 그리고 무전기 등 중요한 전술자원의 부재가 합쳐진 총체적 난국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남베트남 군대는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썩어들어간 결과, 가장 거대한 자유국가의 군대에서 멸망해가는 베트남 민주주의를 바라보면서도 쿠데타를 진지하게 논의하던 정치군인과 똥별들의 오합지졸로 변하며 파괴되고 말았다. #

6.1. 심각한 부정부패와 잦은 쿠데타

먼저 남베트남군은 내부가 굉장히 부패했으며 이는 태생적으로 정통성이 없던 정권인 베트남국의 군대 베트남 국군의 후신으로써 처음부터 지니고 있던 문제였다.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국가군에서 응우옌반힌 같은 반항적인 수뇌부만 제거하고 자신에게 복종하는 군대가 되자 나머지 구성원이 부패했건 뭐건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부패한 군대를 가지고 숫자의 우위를 이용해서 종교파 같은 정적들을 숙청하는 데만 써먹었을 뿐이다. 사실 정권 2인자 응오딘뉴부터가 아편 밀매로 돈을 챙긴 부패인사였을 정도이니. 결국 초기의 베트남 공화국군은 충성하던 대상만 바뀐 베트남 국민군인 셈이다. 베트남 공화국군 인사들 중 많은 이들은 민족의식 역시 그렇게 투철하지 않았다고 하며, 서로간의 중요한 대화는 프랑스어로 하는 일이 많았다.[17]

그리고 그렇게 바뀐 것 하나 없이 부패한 공화국군 간부들 중에 남베트남의 이후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 중에 나머지 군 인사를 휘어잡을 만한 명분과 경력을 가진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이는 곧 빈발하는 후속 쿠데타로 이어져 공화국군 내 부패인사 숙군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남베트남 붕괴 직전에도 군부는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정치군인들이 난립하고 최전방의 정예부대나 수도방위 부대마저도 정권 탈취를 위해 남용하면서 베트남 공화국군은 폐렴에 감염된 환자의 폐처럼 병들어갔다. 그나마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는[18] 미국과 미군이 응우옌반티에우 정부에 힘과 권위를 실어주면서 응오딘지엠 정권 붕괴 이후 계속되던 쿠데타 행렬은 간신히 멈춘다. 미군이 철수하자 쿠데타 재발을 우려한 응우옌반티에우가 일선 부대 지휘관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공화국군의 지휘 체계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그나마 월맹군과 싸울 줄 알던 부대들도 핸디캡을 안게 된다.

남베트남군은 실력보다 매관매직으로 주요 보직을 결정했으며 군사교육훈련에는 소홀히 했을 정도였다. 부유층 자녀들은 뇌물로 거의 복무 기간 전체 동안 장기 휴가를 가는 것은 기본옵션이었고 10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부유층 기업이나 장성들의 저택의 경비원이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미군이 공여해준 물자와 무기를 베트콩에게 그대로 팔아넘기고 동맹국의 장교 현상금 삐라를 만들고 살포하는데 도움을 준 사례도 있었다. 당연히 남베트남군에게 그대로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고 미국으로부터 받는 신뢰도 떨어지게 된다. #[19]

풀 메탈 재킷에서도 남베트남 군인이 매춘부를 데리고 미군을 상대로 흥정하는 묘사가 있다. #

6.2. 자구책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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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지원과 미국으로부터 받은 우수한 군사장비와 물자들을 조합한 막강한 화력으로 북베트남군을 밀어내는 데 익숙했다. 그렇지만 1973년, 파리 평화 협상 타결로 미군이 철군하기로 결정하면서 남베트남군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미국이 단순히 군대 철수만 한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에게 지원하는 군사 원조도 크게 삭감해버린 것이다. 남베트남군의 탄약 및 유류 소모율은 미군의 지원이 있었던 시절에도 심각하게 높았는데 미국이 지원을 크게 줄여버리자 남베트남군의 군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강한 화력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붓는 "부자들의 전투방식"에 익숙해진 남베트남군은 기존 전투방식을 바꿀 수가 없었고 결국 1974년에 남베트남군은 송두리째 붕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중부 고원 남베트남군 포병 포대들은 미군 주둔 시에는 하루 평균 100발의 포탄을 소모했지만 1974년에는 하루 평균 4발로 줄어들었다. 보병들도 한 달에 불과 85발의 소총탄을 지급받는 상황에 처했으며 수류탄과 기타 탄약 그리고 무전기의 배터리도 고갈되어 제대로된 작전이 불가능해졌다. 남베트남군 트럭의 50%는 연료 부족으로 보관 상태에 있었으며 다른 차량과 장비도 절반밖에 운용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가동 가능한 차량들도 연료를 최대한 아껴야 하기에 필요한 상황에서만 장비를 가동해야 하므로 당연히 작전 범위도 제한되었다. 남베트남 해군도 메콩강에 주둔한 부대 절반을 해체했으며 남베트남 공군은 헬리콥터와 수송기 가동률이 최대 70%까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들은 철수하면서 자기들이 운용하던 무수히 많은 항공기들을 남베트남에게 공여하는 형태로 처분하고 갔는데 이 덕분에 남베트남 공군은 수치상으로는 세계 4위의 공군이 되었지만 정작 남베트남 공군 입장에선 이들을 유지할 여력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1974년, 남베트남군의 소티는 30~60소티 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러다보니까 신규 장비 도입들도 전부 취소되었다. 남베트남 민병대는 PRC-10 구형 무전기를 대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어야 했으며 이미 구매 발주한 F-5 전투기 36대 사업도 취소되었다.[20] 남베트남군 전체적으로도 1975년 7월이면 휘발유는 7일 치, 경유는 4일 치만 남게 된다는 절망적인 예상 데이터도 있었다. 물론 그러기도전에 남베트남은 패망해버렸다.

당시 남베트남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1973년에 북베트남이 공작원들을 보내 사이공 인근 남베트남의 원유저장고를 폭파하는데 성공하면서 그 남은 비축유마저 송두리째 날라가버리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파라셀 군도에서 석유 발견으로 잠시 들뜨긴 했지만 1974년에 중국 해군이 남베트남 해군을 격파하고 파라셀 군도를 점령해버리면서 남베트남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간다. 남베트남은 미국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 해군은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남베트남은 외교 채널을 모두 동원해서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미국 의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렇다할 자구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남베트남은 그렇게 패망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은 일말의 희망으로 북베트남군의 전면 재남침 시 미군이 다시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21] 당시 제럴드 R.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과제들을 해결하는데 급급했고 미국 의회는 베트남 재개입을 결사반대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렇게 남베트남을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살 왕에게 대리 원조를 부탁했고 곧 파이살 왕은 남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원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1975년 3월 25일에 그가 조카에게 암살당하고 말면서 이 마저도 수포로 돌아간다.[22] 사이공 함락 직전 대규모 미 해군 함대들이 남중국해에 집결했지만 이는 북베트남군을 폭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베트남에 체류중인 자국 국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6.3. 병사들의 사기 저하

남베트남군은 매우 부패한 군사조직이었고 실력이 아니라 뇌물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구조였다. 사회적으로는 종교단체들이 연일 남베트남 정권 타도를 외쳤으며 국민들도 역시 정통성 없는 정권과 계속해서 벌어지는 부정부패에 나라에 실망하게 되었고 애국심은 당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군부와 사회와 정치계에 깊숙히 침투한 간첩들은 선전을 통해 남베트남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당연히 사기가 저하되어서 무엇을 위해 싸우겠다는 동기부여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얻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한 월급이 전부였고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제대로 복무하겠다는 마음을 지닐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23] 그래서 많은 병사들이 뇌물이나 편법을 쓰고 탈영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탈영했던 병사가 재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 상황에서도 패배에 몰리게 되면 많은 병사들은 탈영했으며 그 과정에서 탈영병들을 제지하는 선임 장교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는 남베트남 붕괴 직전에도 있었던 일이며 많은 탈영병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환복한 뒤 북베트남군의 시선을 피해 민가로 숨기도 했다.

물론 남베트남군 전체가 당나라 군대는 아니었고 이 와중에도 잘 싸우는 정예 부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기울여진 전세를 뒤집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남베트남군이라는 집단 자체를 뜯어고쳐야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남베트남은 군대를 개혁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부정부패로 국가 상황이 어수선했다.

6.4. 아군에게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

남베트남군이 이렇게 막장을 달리는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상대로 열악한 사정에 비해 큰 전과를 올리던 집단도 있었다. 바로 자기 가족들, 이웃들,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자원해서 무기를 든 남베트남의 민병대들이었다.

이 민병대원들을 '러프 퍼프'라고 부르던 미국인들이 이들에 대해 쓴 글에서 나타나는 평가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남베트남 정규군에 비해 장비나 인력의 우선도, 훈련 정도 등 모든 면에서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베트콩과 자주 교전했고, 전과 역시 크다는 것이다. 비록 베트콩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민병대들을 우선적으로 노렸기에 교전 자체가 자주 벌어지기는 했으나, 그 교전들에서도 부족한 장비로도 치열하게 맞서 싸웠기에 베트콩들도 민병대를 상대로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24]

하지만 정작 남베트남 정규군은 이들보다 몇 배나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도 전투력은 뒤떨어졌다. 위 링크에 따르면, 남베트남 정규군에게는 각 마을을 방어하는 의용군들이 지원을 요청할 때를 대비해서 신속대응부대가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신속대응부대는 말만 신속이지 제 때 지원을 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1966년 10월에서 1967년 3월까지의 통계로는, 의용군이 베트콩과 교전한 케이스의 오직 45%만 제때 지원을 왔고, 민병대의 공격 작전에서는 더 심각해서 겨우 11% 정도로 아예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한 1969년에는 민병대 부대 중 30%만 정규군의 포병 화력지원을 받았는데 그 절반은 제대로 표적획득도 안 하고 쏘는 견제포격, 한 마디로 제대로 된 화력지원은 고작 15% 정도였다.

남베트남군은 민병대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하나 안 주는 주제에 민병대원들을 열등하다고 무시했다고 한다.

6.5. 전술, 전략적 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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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18일, 대규모 공세를 시작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군수 공장과 군수 물자가 밀집한 중부 고원 지대의 전략거점 부온마투옷를 기습적으로 함락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부온마투옷을 수비하는 병력은 민병대들과 23사단 예하 1개 보병연대가 전부였고 이는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남베트남군은 완벽히 기습을 당하게 된다. 남베트남군 수뇌부는 적의 투입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추가적인 23사단 예하 병력들과 레인저단을 투입했다가 그 의도를 쉽게 간파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23사단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결과만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은 중부 고원지대의 2군단 주력 병력을 비밀리에 철수시켜 현존 전력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방어가능한 지역을 보존하기로 결심한다.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철수하면서 병력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프랑스군의 전술을 모방한 전술이었다. 그렇지만 남베트남은 무려 군단급 병력을 짧은 기간안에 전부 철수시키려는 무리수를 두었고 당연히 사전 정찰 및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남베트남 군인들은 비밀 유지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가족에게 알려서 가족들을 대피시키고자 했고 결국 이 사실이 입소문 처럼 퍼져서 수 만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자신들도 피난시켜달라며 2군단 철수 대열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초기에 남베트남군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으나 이내 남베트남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남베트남군 철수 대로에다가 포격을 가하면서 주요 철수로를 가로막아 공격을 가했다. 결과는 2군단 병력의 총체적 붕괴, 그저 살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남베트남 병사들은 전선에서 이탈해 탈영하기 시작했으며 수 많은 남베트남군 장비와 물자들은 피난민들에게 가로막혀서 여기저기 유기되었다. 교통로마다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떨어져 피난민들과 남베트남군 병사들이 같이 떼죽음 당하기도 했다. 남은 2군단 잔여병력들도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다가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에 수 많은 병력들을 손실했다.

북베트남군은 1군단 주력 병력의 재배치 계획까지 파악해 1군단 관할 지역에 총공세를 가했다. 당시 1군단 관할 지역의 1번 도로가 유일한 전술 도로였고 북베트남군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전쟁을 피해 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전혀 가로막지 않았다.[25]

1번 도로는 공포감에 빠진 수 많은 피난민들로 넘쳐났고 주요 도시들도 북베트남 특공대가 석방시켜준 죄수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수 만명의 남베트남군 1군단 병력들은 이미 자기 살기 바쁜 상황에 이리저리 도망다니거나 도시에서 약탈과 살인, 강간을 하기 시작했고 이미 전투병력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북베트남군 수뇌부는 남베트남군의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지만 다낭을 포함한 남베트남 주요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하게 되자 놀랐을 정도였다. 그렇게해서 남베트남군의 4개 군단 중 2개의 군단이 송두리째 붕괴되었으며[26] 어마어마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고스란히 북베트남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27]

이렇게 섣부른 대규모 병력 재배치를 결정하는 큰 실수를 한 티에우는 자국군 병력의 절반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붕괴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그는 사임하고 부정부패로 축적한 수많은 자산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대만으로 망명해 버린다. 남베트남군은 남은 병력들을 재배치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해 보았지만 이미 한 번의 오판으로 인해 전세는 급속도로 기울어버렸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군은 더 이상 유의미한 반격을 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하에 가용 가능한 병력들을 모두 동원해 사이공으로 총공세를 했고 결국 부온메투옷이 함락된 지 55일 만에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만다.

6.6. 전쟁범죄 및 민간인 학살

의외로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는 사실인데, 남베트남군 또한 자국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과 베트콩이 구분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군, 한국군과 더불어 소탕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양민 학살과 억울한 양민들의 죽음이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베트민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에 가까운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한때 응오딘지엠의 진심어린 지도자였던, 조셉 버팅어의 경우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가 베트민 지지자 마을에서 벌인 학살에 대해 증언했는데, 1957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벌인 지역 습격에서 수만 명을 체포하고 수백 명 내지는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하는 일을 벌였다.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 전체가 포병의 포격으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러한 학살 사실들은 미국 언론에선 비밀로 은폐되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초기 남베트남군 경찰과 군인들에 의한 학살은 응오딘지엠 문서 백색테러와 학살 문단을 참고해도 좋다.

1964년 9월 사이공(현재 호치민시) 근처에 있는 곳에서, 536명의 민간인이 남베트남군의 항공 폭격으로 죽은 사건도 있다. #

7.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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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던 북베트남군은 4월 26일, 본격적으로 사이공을 함락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북베트남군 304사단을 막기 위해 롱탄의 남베트남군 보병학교에 육사 생도들과 기갑학교 철수 병력들이 합세했다. 이들 병력은 열악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이나 버티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해 돌파당하고 만다.

북베트남군 4군단은 비엔 호아 공군기지를 공격했고 이 공군기지를 방어하는 병력들은 남베트남군 최정예 부대인 3기갑여단과 18사단이었다. 남베트남군은 대전차호를 구축하면서 북베트남군 기계화부대를 저지했고 서로 교량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북베트남군 1군단, 3군단, 232군의 공세 방면에서도 남베트남군은 치열하게 저항해 북베트남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남베트남군은 몇 일 동안이나 파도같이 몰려오는 북베트남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남베트남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 병력과 탄약이 없었다. 4월 28일, 남베트남 장병들이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그 와중에 남베트남 육군 총참모장 카오 반 비엔(Cao Văn Viên)은 미 대사관으로 가서 헬기를 타고 미해군 함정으로 탈출해버렸다. 일선 교전 부대 지휘관과 참모들도 자기 목숨이나 부지하려고 탈출하는데 급급했다. 4월 29일, 해군 총참모장 지엡 꽝 투이(Diệp Quang Thủy)도 미해군 선박으로 탈출했다.[28] 남베트남군 주요 수뇌부의 탈출 러시는 계속 이어졌고 남베트남군 1군단장과 3군단장, 총통 안보담당보좌관, 심지어 후임 육군 총참모장 빈록(Nguyễn Phúc Vĩnh Lộc) 중장도 미해군 함정으로 탈출한다. 물론 일부 고위 장교들은 끝까지 남아서 싸우거나 자결하기도 했다.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재개되고 남베트남군은 밀려나면서 전투를 지속했다. 남베트남군이 사수하던 주요 거점과 공항들도 점령되었으며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협상을 하던 것도 더 이상의 진전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린 즈엉반민 총통은 결국 항복 및 모든 남베트남군의 교전 중지를 발표하면서 베트남 공화국과 베트남 공화국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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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 잔존 병력의 저항을 물리친 북베트남군은 전차를 몰고 총통 관저의 철문을 밀치고 들어가면서 베트남 전쟁은 공식적으로 미국과 남베트남의 패전으로 마무리되었다.[29] 메콩강 삼각주 일대에서 저항중이던 남베트남군 4군단은 아직 전력을 보존한 채 저항 중이었지만 사이공 함락 소식이 전해지고 즈엉반민 총통이 해산 명령을 내리면서 결국 해산당하고 만다. 남베트남 해군 일부 군함들은 필리핀으로 망명해 필리핀 해군에서 한동안 운용하게 되었다.

수 많은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바꿔 입은 뒤 민가로 숨거나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혀 재교육 수용소에서 교육을 이수한 뒤 풀려났다. 일부 병사들은 통일 베트남의 베트남 인민군으로 복무를 계속하기도 했다.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는 모든 비밀 문서와 컴퓨터 데이터가 파기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버린 바람에 북베트남군은 100만 명이 넘는 모든 남베트남군 명단을 손에 쥐게 되었다. 통일 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운용하던 군사장비와 물자들을 흡수해 인도차이나 지역의 막강한 군사강국이 되었고 1978년, 크메르 루주 전복을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하거나 중월전쟁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

사이공 함락 이후, 비엔호아에 위치하면서 남베트남에서 운영하던 비엔호아 국립묘지(Nghĩa trang Quân đội Biên Hòa 義莊軍隊邊和)[30]는 철저히 방치되고 훼손되었다. 국립묘지 정문을 지키고 있던 '지친 군인' 동상(Thương tiếc)은 끌어내려졌고[31], 순국 장병들의 묘비에 새겨진 사진은 깎여나갔으며, 유해는 경제 자유화 이후 해외의 보트피플들에게 송환하여 이장시키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부지 중 일부는 건물을 세울 용도로 재개발되기도 했는데, 유해 이장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마구 파헤쳐서 묘역을 훼손시켰다고 한다. 명목상 적군묘지로 취급하여 그대로 두면서도, 자연히 사라지도록 일부러 열악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여기 동영상 참조.

8. 계급

계급장의 출처는 이곳이다.

8.1. 1964년 이후

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에 채택되어 패망시까지 유지되었다. 전반적으로 미군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특히 해군의 경우 64년 이후로는 영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 대만 해군 해상자위대가 사용하는 국제 표준 계급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육군의 경우엔 좌관급 장교 계급장에 밑줄이 생겼는데, 좌관급과 위관급 둘 다 매화를 표장으로 사용했던지라 전투복에 부착하는 검은색 계급장으로는 좌관인지 위관인지 구분이 안되었던것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매화말고 딴 모양을 쓰지 그랬어

의외로 계급에 도독, 생원 등 전근대 중국식 호칭이 꽤 들어갔다.
구분 계급명 육군 해군 공군 수군육전사단




통장(육군)
thống tướng
統將
수사도독(해군)
Thủy sư Đô đốc
水師都督
파일:50px-B_ARVN-OF-10.svg.png 파일:50px-B_VNN-OF-10.svg.png 파일:50px-B_VNAF-OF-10.svg.png (없음)
대장
Đại tướng
大將
도독(해군)
Đô đốc
都督
파일:50px-B_ARVN-OF-9.svg.png 파일:50px-B_VNN-OF-9.svg.png 파일:50px-B_VNAF-OF-9.svg.png
중장
Trung tướng
中將
부도독(해군)
Phó Đô đốc
副都督
파일:50px-B_ARVN-OF-8.svg.png 파일:50px-B_VNN-OF-8.svg.png 파일:50px-B_VNAF-OF-8.svg.png 파일:50px-B_RVNMD-OF-8.svg.png
소장
Thiếu tướng
少將
제독(해군)
Đề đốc
提督
파일:50px-B_ARVN-OF-7.svg.png 파일:50px-B_VNN-OF-7.svg.png 파일:50px-B_VNAF-OF-7.svg.png 파일:50px-B_RVNMD-OF-7.svg.png
준장
Chuẩn tướng
准將
부제독(해군)
Phó Đề đốc
副提督
파일:50px-B_ARVN-OF-6.svg.png 파일:50px-B_VNN-OF-6.svg.png 파일:50px-B_VNAF-OF-6.svg.png 파일:50px-B_RVNMD-OF-6.svg.png




대좌
Đại tá
大佐
파일:50px-B_ARVN-OF-5.svg.png 파일:50px-B_VNN-OF-5.svg.png 파일:50px-B_VNAF-OF-5.svg.png 파일:50px-B_RVNMD-OF-5.svg.png
중좌
Trung tá
中佐
파일:50px-B_ARVN-OF-4.svg.png 파일:50px-B_VNN-OF-4.svg.png 파일:50px-B_VNAF-OF-4.svg.png 파일:50px-B_RVNMD-OF-4.svg.png

Thiếu tá
少佐
파일:50px-B_ARVN-OF-3.svg.png 파일:50px-B_VNN-OF-3.svg.png 파일:50px-B_VNAF-OF-3.svg.png 파일:50px-B_RVNMD-OF-3.svg.png




대위
Đại úy
大尉
파일:50px-B_ARVN-OF-2.svg.png 파일:50px-B_VNN-OF-2.svg.png 파일:50px-B_VNAF-OF-2.svg.png 파일:50px-B_RVNMD-OF-2.svg.png
중위
Trung úy
中尉
파일:50px-B_ARVN-OF-1B.svg.png 파일:50px-B_VNN-OF-1B.svg.png 파일:50px-B_VNAF-OF-1B.svg.png 파일:50px-B_RVNMD-OF-1B.svg.png
소위
Thiếu úy
少尉
파일:50px-B_ARVN-OF-1A.svg.png 파일:50px-B_VNN-OF-1A.svg.png 파일:50px-B_VNAF-OF-1A.svg.png 파일:50px-B_RVNMD-OF-1A.svg.png
준사관 준위
Chuẩn úy
准尉
파일:50px-B_ARVN-OF(D).svg.png 파일:50px-B_VNN-OF(D).svg.png 파일:50px-B_VNAF-OF(D).svg.png 파일:50px-RVNMD-OF(D).svg.png
사관생원
Sinh viên Sĩ quan
生員士官
사관후보생
Sinh viên Sĩ quan
生員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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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ạ sĩ quan
下士官
일등상사
Thượng Sĩ Nhất
上士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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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Thượng Sĩ
上士
파일:50px-B_ARVN-OR-8.svg.png 파일:50px-B_VNN-OR-7.svg.png 파일:50px-B_VNAF-OR-8.svg.png 파일:50px-RVNMD-OR-8.svg.png
일등중사
Trung Sĩ Nhất
中士一
파일:70px-ARVN-OR-6.svg.png 파일:50px-B_VNN-OR-6.svg.png 파일:50px-B_VNAF-OR-6.svg.png 파일:50px-RVNMD-OR-6.svg.png
중사
Trung Sĩ
中士
파일:70px-ARVN-OR-5.svg.png 파일:50px-B_VNN-OR-5.svg.png 파일:50px-B_VNAF-OR-5.svg.png 파일:50px-RVNMD-OR-5.svg.png



Binh sĩ
兵士
일등하사
Hạ Sĩ Nhất
下士一
파일:70px-ARVN-OR-4.svg.png 파일:70px-VNN-OR-4.svg.png 파일:50px-B_VNAF-OR-4.svg.png 파일:70px-RVNMD-OR-4.svg.png
하사
Hạ Sĩ
下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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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
Binh Nhất
兵一
파일:70px-ARVN-OR-2.svg.png 파일:70px-VNN-OR-2.svg.png 파일:50px-B_VNAF-OR-2.svg.png 파일:70px-RVNMD-OR-2.svg.png
이등병
Binh Nhì
兵二
없음 파일:50px-B_VNAF-OR-1.svg.png 없음

9. 관련 문서



[1] 군력월남공화 (꿘륵비엣남꽁호아) [2] '군력(Quân lực)'을 영어로 의역해서 'Republic of Vietnam Military Forces'라고도 불렸다. [3] 대략 15분 42초 정도에 특유의 팔 흔들기 제식과 태극기가 등장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4] '력(Lực / 力)'은 'Forces'를 의역한 단어다. [5] 6분 20초 참조 하지만 이는 정규군뿐 아니라 민병대도 합한 병력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정규군 병력인 58만명이라는 수치를 대입하더라도 당시 병력 6~7위로 무시하지 못할 수준인 건 마찬가지였다. [6] 1965년 미군의 개입은 6.25 전쟁 개전 때처럼 북베트남이 전차와 항공기로 중무장하고 전면전을 걸어온 상황에서 이뤄진 게 아니었다. 당시 북베트남은 내부 반란 지원과 정규군을 위장 침투시키는 선의 제한전만 수행하고 있었다.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 공화국군이 이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패망의 위기로 몰렸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초대 주월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역시 1965년 즉시 사단 단위의 대규모 미군 증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남베트남은 패망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7] 그나마 무기와 차량 야전 정비 실력만큼은 꽤 높아서 미군이 종종 배우기도 할 만큼 뛰어났다고 했다. [8]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육성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군 역시 소련의 원조로 양적으로는 수준급의 군대를 육성했지만 이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9] 단, 동시기에 월남에 파병된 파월 한국군의 사정 역시 크게 낫지 못했다. 파월 한국군은 60년대 후반까지 M1 개런드와 BAR 등을 주력 화기로 사용했다. [10] 당시 미군은 최신 무기는 지원해 주었지만 부패한 베트남 공화국 정부 때문에 그 무기를 운용할 돈과 물자를 전혀 지원해 주지 않았다. 또 병력 수가 100만명을 넘는다지만 정규군 병력 수는 58만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자원한 민병대인 지방군이나 의용군이였다. 자원해서 민병대에 입대한 사람들이 해가 갈수록 늘었기 때문에 정확한 병력 수는 각 해마다 다르다. 물론 받은 지원과 실제 전과 비율로 보면 오히려 이들이 정규군보다 잘 싸웠기 때문에 이 숫자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11] 쩐반돈은 4월 29일 헬리콥터를 타고 필리핀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패망 당시인 4월 30일에는 국방총장직이 공석인 상태였다. [12] 당시 남베트남군 수뇌부 대부분이 탈출해버려서 참모본부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흐우한 준장이 최후의 총참모장으로 자동 인수인계가 된 것이다. 남베트남군 전 부대에게 투항하라고 명령한 것도 이 흐우한 준장이다. 하지만 흐우한 준장이 도주하지 않은 이유가 북베트남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남베트남군은 물론 정부까지 적과 내통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통일 이후에도 고위직을 맡다가 2019년 사망했다. [13] 베트남 전통은 20세 이상이 되어야 성년으로 간주했다. [14] 미군은 남베트남군의 작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미군은 출입 금지’라는 표지판을 세워뒀다. 이제 더 이상 직접적 지상전은 수행하지 않겠다는 의미. [15] 남베트남군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육로 수송보단 헬기와 항공기 그리고 함선을 통한 보급을 선호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이러한 조치는 남베트남군에 대한 사형선고 수준이었던 것. 출처 [16] 미군 역시 헬기를 통해 지원하다보니 북베트남군의 대공포에 적지 않은 수의 헬기들을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고 헬기 운용 교리를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된다. [17] 예컨대, 응오딘지엠 암살을 방조한 장교는 암살 사건 직후 상관에게 '미숑 아콩플리(Mission accomplie, 임무 완료)'라고 프랑스어로 보고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군 장교가 상관에게 '任務完了(にんむかんりょう 님무 칸료)'라고 일본어로 보고하는 꼴이다. [18] 1965년부터 1973년 사이 [19] 사족으로 이런 막장 사실을 알고 있는 군 복무자들의 경우 월남의 패망의 원인을 오직 간첩만을 강조하는 국군의 정훈 교육에 대해 조소/조롱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실 한국군도 쿠데타 일으킨 전적도 있고, 정훈교육때 백마고지에서 싸운 메이커 사단인 건 강조해도 쿠데타 일으켜서 서울을 공격했다는 건 덮는 성향인지라... [20] 오일쇼크 때문에 남베트남 물가도 폭등하던 상황이라 무기 체계는 커녕 군사물자 도입도 꿈도 못꾸고 있었다. [21] 한국군의 현대화가 1970년대 중반부터 가속이 붙은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여유도 있지만 남베트남 패망을 보고 한국의 가치는 미국이 정하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45년 후 충분한 국방력을 갖추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그저 러시아와 서방만 바라보면서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에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강요하며 도발외교를 일삼던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했다가 멸망은 면했으나 또 다시 영혼까지 털리면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22] 만약 파이살 왕이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미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남베트남군 전선 붕괴가 한참 진행되던 시점이라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23] 병사들이 매일 먹는 급식만큼은 소금과 소량의 거친 밥이 전부였던 북베트남에 비해 상당히 나았다. 여러 반찬을 곁들여 먹을 수도 있었고,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는 고기나 생선도 배식되었다. 군복과 군화 같은 피복류 역시 폐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샌들을 신을 정도로 열악했던 북베트남군의 것보다 품질이 월등했다. [24] 민병대가 베트콩한테 골칫거리인 이유는, 베트콩과 남베트남 민간인들을 잘 구분해낼 수 있는 것이 이들 민병대었기 때문이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저항조직이라는 건 당연히 북베트남측이 주장하는 거짓이고, 오히려 베트콩은 남베트남 시골 지역에 침투해서 각 마을을 약탈했다. 따라서 남베트남 국민 당사자들이 만든 군대인 민병대,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고향 마을에서 살면서 파트타임 군인으로써 복무하는 의용군(nghĩa quân, Popular Force)들은 마을로 침투하는 베트콩을 색출해내는 데 적임자였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 가족, 친척,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기도 남베트남군보다 훨씬 높았다. [25] 심지어 야간에는 북베트남군 전차가 피난민들을 위해 서치 라이트를 비추어 주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다. [26] 말이 4개 중 2개이지 사실상 80% 이상이라고 봐도 된다. 4군단은 후방이라 그냥 이름만 있는 정도였고, 3군단도 전방의 1, 2군단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27] 북베트남군은 어마어마한 양의 남베트남군 물자와 차량들을 손에 넣고 그대로 전선에 투입하면서 스스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장비들의 숫자에 놀랐을 정도였다. 북베트남군은 물자와 장비들이 남베트남군에 비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28] 탈출하기 직전 자신의 오랜 친구인 즈엉반민에게 탈출하자고 종용했지만 즈엉반민은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손자와 딸과 사위, 조카들의 탈출을 부탁했다. [29] 현재 이 총통 관저는 통일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0] 베트남 공화국 경찰들도 거기에서 안장되었다. [31] 묘지 중앙에 있는 의용탑(Nghĩa Dũng đài)도 허물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