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15:45:19

모용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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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4ba3><colcolor=#ece5b6>
태원원왕(太原元王)
모용해 | 慕容楷
시호 (元)
작위 태원왕(太原王)
모용(慕容)
(楷)
불명
생몰 ? ~ 395년 7월 8일
출신 창려군(昌黎郡) 극성현(棘城縣)
부왕 모용각(慕容恪)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최종직책 사공(司空)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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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의 황족.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조카이자, 전연의 태재•평원왕 모용각의 장남. 진류도왕 모용소의 형.

2. 생애

건희 10년(369년) 11월, 가족혼 태후와 태부 모용평이 거기대장군 모용수를 꺼려 주살을 모의하였다. 모용해와 모용수의 외숙부 난건(蘭建)은 이 사실을 알고 모용수에게 고하였다.
"먼저 손을 써서 제압해야 합니다. 당장 모용평과 낙안왕 모용장(慕容臧)을 제거하기만 하여도 나머지는 아무것도 못할 것입니다."
모용수가 말했다.
"가족끼리 골육상쟁하여 나라 안에서 난리를 일으키다니,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그런 짓은 할 수는 없소."
그러나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와서 모용수에게 고하였다.
"내부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속히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모용수가 다시 말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소. 내 차라리 외부로 피하겠으니, 다른 것에 대해 논의할 필요는 없소."
이후 모용수가 부인 단씨와 모용령 등 아들들을 데리고 전진으로 망명하자, 모용해와 난건 역시 모용수를 따라서 전진으로 갔다. 전진의 천왕 부견은 모용해의 재주를 마음에 들어하며 예우하고, 그를 적노장군으로 임명하여 매우 신임하였다.

건원 19년(383년) 8월, 천왕 부견이 동진의 정벌을 선포하면서 모용수를 선봉으로 삼았다. 이때 모용해는 동생 모용소와 함께 모용수를 찾아가 말했다.
"주상의 교만함이 극에 달하였으니, 숙부께서는 중흥(中興)의 업을 세우실 이번 기회에 이루셔야 합니다."
모용수 답했다.
"그렇다. 그대들이 아니면 내가 장차 누가와 더불어 이를 이루겠는가?"
이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대패하여 패망의 길에 들어서고, 모용해는 모용수를 따라 업(鄴)으로 가 자립을 준비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2월, 업(鄴)을 진수하던 장락공 부비는 모용수를 내심 꺼려 모용수로 하여금 신안(新安)에서 반란 일으킨 정령족 적빈(翟斌) 토벌을 명하였다.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과 조카 모용해, 모용소를 업에 남겨두고, 부비가 감시역으로 붙여둔 광무장군 부비룡(苻飛龍)과 함께 적빈을 토벌하러 떠났다.

부비룡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모용수는 황하를 건넌 다음, 참군 전산(田山)을 업으로 보내 모용농과 모용해 등에게 군사를 일으켜 호응할 것을 명하였다. 전산이 모용농 등에게 이를 전달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모용농과 모용해는 일단 업성에서 가만히 하룻밤을 보냈고, 모용소만 먼저 부비의 준마 수백 필을 훔쳐 포지(蒲池)에서 모용농과 모용해를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모용농과 모용해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기병 수십 기를 인솔하여 열인(列人)으로 달아났다.

건원 20년(384년) 정월 초하루, 장락공 부비는 신정을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성대하게 열고 수많은 빈객을 초대하였는데, 모용농 등만이 오지 않자 비로소 변고가 발생했음을 깨닫고 사방으로 사람을 파견해 그들의 행방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조사한지 3일만에 그들이 열인으로 가서 거병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부비는 장수 석월을 보내 모용농 등을 공격했지만, 석월이 오히려 대패하여 참수당했다. 이후 모용수가 군대를 모아 업(鄴)으로 들이닥쳤고, 모용농과 모용해는 무리를 거느려 모용수와 합류하였다. 모용수는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후연을 건국한 뒤, 모용해를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그 아버지의 작위였던 태원왕에 봉하였다.

당시 동호(東胡) 사람 왕연(王晏)이 관도(館陶)를 점거하여 업을 지키는 장락공 부비에게 호응하니, 여전히 많은 선비족, 오환족과 군현의 백성들이 제각기 요새를 점거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모용수는 모용해, 진남장군•진류왕 모용소를 보내 이들을 토벌케 하였다. 모용해가 모용소에게 말했다.
"선비, 오환, 그리고 기주(冀州)의 백성들은 본래 모두 연의 신하였으나, 이제 대업이 막 시작되어 인심이 아직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작은 이익을 탐하기보다는 덕으로써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며, 위엄으로 그들을 억누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한 곳에 주둔하여 군대의 중심이 될지니, 너는 백성과 오랑캐를 순찰하며 대의(大義)를 보여 주어라. 그리하면 그들은 반드시 복종할 것이다."
이후 모용해는 벽양(辟陽)에 주둔하였고, 모용소는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왕연에게 가서 화복(禍福)을 논함으로써 설득하였다. 왕연은 모용소를 따라서 모용해를 찾아가 투항하였고, 모용해는 그 무리의 노약자를 머무르게 한 뒤에 수령을 두어 다스리게 하고, 장정 100,000여 명을 징발하여 왕연과 함께 업으로 돌아갔다. 모용수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너희 형제는 문무를 겸비한 선왕(先王: 모용각)의 재주를 이어받았구나."

연원 원년(384년) 8월, 하남왕 적빈이 반란을 꾸미다 주살당하면서 한단(邯鄲)으로 도망친 그 조카 적진(翟真)이 한단에서 군사를 모아 부비와 안팎으로 후연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보와 모용륭의 협공을 받고 패해 다시 한단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적진이 다시 한단 북쪽으로 도망치자, 모용농은 태원왕 모용해와 함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해 하읍(下邑)에서 적진을 따라잡았다. 모용해는 즉시 적진과 싸우려 하였는데, 모용농이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지금 배고프고 지쳐있으며 또, 적의 진영에서 정장(丁壯)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매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용해는 이를 무시하고 진격해 싸웠다가 적진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적진은 성공적으로 후연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중산(中山)으로 달아나 승영(承營)에 주둔하였다.

건흥 원년(386년) 4월, 상서좌복야로 임명되었다.

건흥 원년(386년) 6월,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해, 조왕 모용린, 진류왕 모용소, 장무왕 모용주를 보내 전진의 부정(苻定), 부소(苻紹), 부모(苻謨), 부량(苻亮) 등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용해가 먼저 서신을 보내 화복(禍福)을 설명하니, 부정 등은 모두 항복하였고, 모용수는 항복한 전진의 황족들을 모두 받아들여 후작에 봉하고 말했다.
"이로써 진주(秦主: 부견)로부터 받은 은덕을 갚았노라."

건흥 2년(387년) 정월, 연나라를 배반해 동진에 항복한 제북(齊北) 태수 온상(溫祥)이 확오(碻磝)에서 고양왕 모용륭에게 패해 자신이 지키던 동아(東阿)를 버리고 동진으로 도망쳤다. 성무제 모용수는 모용해를 연주(兗州) 자사로 삼아 동아를 다스리게 하였다.

건흥 2년(387년) 5월, 성무제 모용수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정하여 정령족 적요(翟遙)를 치면서 모용해를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아 선봉에 세웠다. 적요의 무리는 모두 옛 연(燕)과 조(趙)의 사람이었는데, 모용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말했다.
"태원왕(太原王)의 아들이시면 우리에게는 부모와도 같은 분이시다."
그러고는 서로 앞다투어 모용해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적요는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건흥 2년(387년) 7월, 흉노의 철불부가 성무제 모용수에게 바칠 말을 독고부의 유현(劉顯)이 습격해 훔쳐가자, 모용수는 분노하여 모용해와 조왕 모용린을 파견해 독고부를 정벌케 하였다. 유현은 모용해와 모용린에게 대패하여 마읍(馬邑)의 서쪽 산으로 달아났지만, 북위의 위왕 탁발규까지 연나라에게 가세하여 치니, 유현은 독고부를 버리고 서연 모용영에게로 달아났다.

건흥 3년(388년) 12월, 태원왕 모용해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합구(合口)로 나아가 장신(張申), 왕조(王祖)의 반란을 진압 중인 고양왕 모용륭과 합세하였다. 후연군이 장신부터 공격하자 왕조는 장신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보루의 병력을 이끌고 밤에 후연군을 공격하였으나, 모용린 등은 이를 간파하여 역으로 왕조를 쳐 패주시켰다. 모용륭은 모용해와 모용린을 남겨둔 뒤, 왕조를 추격해 날이 밝을 때 즈음에 다시 한번 격파하고 적병의 수급을 많이 노획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전날 전투에서 얻은 수급들을 보루에서도 볼 수 있도록 매달아 놓으니, 겁을 먹은 장신이 보루에서 나와 항복하였고, 왕조도 죄값을 받기를 청하며 귀순하였다.

건흥 7년(392년) 7월, 기주목(冀州牧)으로 임명되었다.

건흥 8년(393년) 4월, 사공으로 승진하였다.

건흥 9년(394년) 2월, 성무제 모용수가 여러 갈래로 군대를 나누어 서연의 모용영을 친정할 때, 모용해도 참전하여 군대를 이끌고 부구(滏口)로 출진하였다.

건흥 10년(395년) 6월 5일[1],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원(元)'. 그의 아들 모용기(慕容竒)가 후사를 이었다.


[1] 395년 6월 계축일. 음력으로 6월 5일이고, 양력으로 7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