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라틴어: Appius Annius Atilius Bradua |
|
이름 |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Appius Annius Atilius Bradua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계급 | 로마 귀족 |
국가 | 로마 제국 |
출생 | 미상,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
사망 | 미상 |
직위 | 원로원 의원, 총독 |
가족 |
아피우스 안니우스 트레보니우스 갈루스(아버지) 아틸리아 카우키디아 테르툴라(어머니) 안니아 레길리아(여동생) 아티쿠스 브라두아(조카)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 방계 황족. 160년 집정관을 지냈다.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친척이다.
2. 생애
생몰년도는 미상이나, 고향은 이탈리아 로마이다.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황후 대 파우스티나의 친척어른으로 안니우스 가문의 일원인 세습 원로원 의원 아피우스 안니우스 트레보니우스 갈루스와 그 아내 아틸리아 카우키디아 테르툴라의 아들이다. 여동생은 그리스 아테네의 대정치가 키몬의 직계손이며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 원로원 의원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이다.
아버지 아피우스 안니우스 트레보니우스 갈루스는 안니우스 갈루스로 유명한 원로원 의원으로 139년 집정관을 지냈고, 서기 2세기 최고의 귀족으로 찬사받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존경받는 인사로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를 뒀고, '작은 여왕'을 의미한 레길루스를 종종 가문의 또 다른 명칭으로 삼았다. 안니우스 브라두아의 조부 아피우스 안니우스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역시 108년 집정관을 지냈던 거물 정치가였다. 그리고 조부의 아버지는 1세기 로마 장군이자 원로원 의원으로 명성을 당대에 떨친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였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 아래에서 존경받은 원로원 의원,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고, 67년 집정관을 지낸 뒤, 네로 불신임을 찬성하고, 네 황제의 해 당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지지했다가,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장군이었다.
이런 친가 못지 않게 외가 역시 이탈리아 안에서 명성이 대단했다. 어머니 아틸리아 카우키디아 테르툴라는 원로원 의원이며 총독 마르쿠스 아피우스 브라두아와 그 아내인 카우키디아 테르툴라의 딸로,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이다. 외삼촌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치하에서 여러 번에 걸쳐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역임한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메틸리우스 브라두아 카우키디우스 테르툴루스 바수스였다.
어릴 적에 관해서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할아버지의 친척으로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일찍부터 집안간 유대 관계가 깊었고, 그의 부모는 안니우스 베루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 부부의 자녀들인 대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1],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남매와 교류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배경으로 안니우스 브라두아의 여동생은 당시 모든 배경이 로마 제국에서 최고라는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160년, 안니우스 브라두아의 여동생 안니아 레길리아는 여섯째 아이를 임신한 지 8개월이 지나 9개월이 될 무렵, 남편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말대꾸한다는 꼬투리를 잡혀 폭행을 당하고,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해방노예 비서 알키메돈이 주인의 명에 따라 복부를 걷어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그녀는 죽기 전, 조산으로 아이를 낳고 사망했는데, 이 일을 놓고, 위기에 처한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 아내가 조산 증세로 의식을 잃어 자신과 비서가 이를 깨우고자 했지만, 결국 아이를 출산해 사망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고, 이를 강조했다. 그렇지만 가정폭력이 명확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그는 막대한 재력을 이용하고, 곧 제위에 오를 두 제자와의 친분을 과시해, 재판정의 판사, 배심원, 원로원 내 야심가들을 뇌물, 협박 등으로 포섭하고, 무죄를 받아낸다.
이 사건 당시, 안니우스 브라두아는 말도 안 되는 재판에 분노해, 당시 현직 집정관임에도 이례적으로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무죄인 것을 항의하고 그를 고소했다. 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고령의 황제가 사망하면 곧바로 황제가 될 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모함을 받고 있다며, 제자인 마르쿠스를 속이고, 역으로 안니우스 브라두아를 무고로 고발했다. 이런 가운데에서,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그리스로 거처를 옮긴 뒤, 자신이 살해한 아내를 기리는 행사를 열고 극장 등을 만들어 기부하면서, 그 모든 원인을 아내가 생전 안쓰럽게 여기고 아낀 장남 아티쿠스 브라두아에게 덮어 씌워 그를 학대하고 살해하려고 시도하며, 죽도록 괴롭혔다. 이에 안니우스 브라두아는 당시 요절한 여조카들의 시댁 식구 등과 함께 이를 경고했고,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본인 동생의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양자로 입적시키고, 아티쿠스 브라두아를 가문에서 추방하고 재산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아티쿠스 브라두아는 15살의 나이에 어머니가 결혼하면서 가지고 온 재산을 모두 물려받고, 이탈리아로 온다. 이후 그는 개명하고, 외가 식구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때 조카를 후원한 사람은 외삼촌 안니우스 브라두아였다. 그러나 이후 안니우스 브라두아에 대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아버지, 대 파우스티나의 첫째 남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