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공산당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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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CE00> 당기 | 로고 | ||
<colbgcolor=#f5f5f5><colcolor=#D00000> 약칭 | KPD | ||
표어 |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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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 1919년 1월 1일 | ||
해체 |
1933년
3월 6일[1] 1946년 4월 21일 ( 동독)[2] 1956년 8월 ( 서독)[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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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4] |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에른스트 텔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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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
공산주의 룩셈부르크주의 (1919 – 1923) 마르크스-레닌주의 (1925 – 19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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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 극좌 | ||
선행 정당 |
스파르타쿠스 연맹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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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정당 |
독일 공산당 (재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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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수 | 약 360,000명 (1932년) | ||
제국 의회 |
81석 / 647석 (12.6%) (수권법 통과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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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의회 |
0석 / 402석 (0.0%) (해체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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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색 |
빨간색 (#D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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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조직 | 코민테른 | ||
준군사 조직 | 붉은전선전사동맹[7] |
KPD LISTE 3, “Schluss mit diesem System“ 기호 3번 독일 공산당, “ 이 체제에 종결을“[8] |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1918년~1933년)과 구 서독 시기(1950년대) 활동한 독일의 공산주의 정당.1차 대전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쟁 수행 협조 노선에 반발한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조직한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으며, 실제로도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으로 표기)의 '혁명적 대안'으로 자처했다. 코민테른에서도 종주국의 소련 공산당을 제외하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정당이었다.
에른스트 텔만을 중심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선거 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제1당인 사민당, 제2당인 가톨릭 중앙당에 이어서 10~15% 정도의 지지를 꾸준히 받으며 원내 제3~4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를 통하여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연정에 참여한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를 '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꿈꿨던 공산당이 연정에 참여하면 모양새가 이상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정당들도 공공연하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타도를 주장하는 공산당을 연정에 끼워줄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 거센 탄압을 받던 중 일어난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배후로 지목당했으며,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 제정 이후 정식으로 금지되었으며 KPD 지도자였던 텔만이 수감된다.
1945년 나치 패망 이후 조직이 복구되었으나, 동독에서는 동독 사민당과 강제통합해 사회주의통일당이 되었고, 서독에서는 그대로 활동하다가 1956년에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으로 규정되어 해산되었다.
1968년에 서독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활동이 허용되고, 1990년의 독일 통일을 거쳐 현재 독일에는 이 시기의 독일 공산당의 계승을 천명하는 정당이 여럿 있다.
2. 역사
2.1. 초기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기치로 내건 사민당 세력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 1890년에 '반사회주의법(Sozialistengesetze)'이 폐기된 이래 합법화된 사민당은 지속적으로 지지층을 확대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점차 기성 정치 세력과 타협을 했고, 이미 20세기에 이르면 소위 ' 계급투쟁' 정당이라기 보다는 ' 개량주의' 정당으로 변모하게 된다.[9]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보여준 모습이 바로 1914년 1차대전 발발 당시1918년 11월 혁명을 통해 독일 제국이 붕괴되고, 독립사회민주당은 사민당과 협의를 거쳐 연립정권에 참여한다. 그러나 12월 24일에 발생한 수병 폭동 사건에서 사민당이 취한 일련의 행동에 대한 항의로서 12월 29일 독립사회민주당은 연립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스파르타쿠스 연맹 또한 독립사회민주당을 탈당하였고, 다른 좌파 조직들과 통합한 뒤,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에 걸친 창당 대회를 통해서 독일 공산당을 창당한다. 주요 지도자 중 하나인 룩셈부르크는 자신이 작성한 창당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계획서는 독일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중 다수의 명확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1919년 1월 1일, 룩셈부르크는 앞으로 있을 선거에 독일 공산당이 참여할 것을 재차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수를 차지하는 과격파에 의해 표결에 부쳐져 기각되어버린다. 과격파는 길거리에서의 투쟁과 공장에서의 소요, 선동을 통해서 권력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9년 1월 4일, 지난해 12월 24일의 수병 폭동 사건 당시 일어났던 노동자 시위에 대한 진압 명령을 거부했던 베를린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Emil Eichhorn)이 당국에 의해 해임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 소속이었던 아이히호른은 사민당을 제외한 좌파 세력에게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 등의 반정부(반 사민당) 세력들은 이를 받아들여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다음날인 1월 5일,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시위대의 숫자는 시위를 조직한 이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규모였다.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졌고, 상당수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시위는 곧 무장 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규군뿐만 아니라 우익 준군사단체인 자유군단까지 동원하여 신속히 봉기를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지도자들 중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잃었으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원래부터 험악했던 사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이 사건 이후로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버렸고
2.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진로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은 레닌주의를 내세운 에른스트 텔만이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초기의 '소련 공산당보다는 더 민주적인' 이미지가 사라진 것도 이 때. 이 시기 독일 공산당은 소련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정당이었고 코민테른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떨칠 수 있었다. 선거에서는 꾸준히 10% 이상의 지지를 거뒀으며, 1929년 몰아닥친 미국발 대공황이 독일 경제를 초토화시켜버리자, 절망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그 세력을 급속히 불리는 데도 성공했다.사민당과의 관계는 여전히 막장이었다.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창립 세력이 된 이후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봉기 때부터 카프 폭동과 잇다른 루르 봉기, 1923년의 함부르크 봉기에 대해 체제 수호의 관점에서 시위를 진압했고, 이에 대해 공산당은 사민당이 좌파의 정국 주도보다 기득권 사수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사민당 정부는 우익의 정권 전복 시도가 있을 때마다 공산당 주축의 급진 노동자들의 파업과 봉기를 호소하면서 간신히 막았는데, 막상 또 사민당 정권의 요청으로 궐기한 급진 좌파의 세력이 조금만 커졌다 싶으면 자유군단을 비롯해 방금 전까지 정권을 뒤집으려고 했던 극우 민병대를 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우경화되었던 독일 사법부는 우파의 반정부 행위는 솜방망이로 처벌한 반면 좌파를 진압할 때는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1928년, 코민테른은 이른바 '제3기(Third Period)' 이론을 내세웠는데, 이에 따르자면 자본주의 체제가 최종적인 붕괴 단계에 접어들었으므로 모든 공산당들은 더욱 공격적이고 극좌적인 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중도 좌파 세력들을 '사회 파시즘(Social fascism)' 세력으로 낙인찍고,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이들 중도 좌파 세력들을 파괴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10] 한편, 독일 공산당에서는 텔만이 측근의 공금횡령 추문을 덮으려다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극좌적인 성향을 띠는 텔만이 코민테른의 정책 실현[11]에 유용하다고 본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에 개입하여 텔만을 위원장 자리에 복귀시킨다. 이어서 당내 우파 및 중도 좌파의 숙청이 벌여졌으며, 이는 독일 공산당의 스탈린주의화(Stalinization)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은 텔만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충실히 따라 사민당과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이 때는 빌리 뮌젠베르크와 같은 당원도 많이 숙청되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사민당이 합작을 거절하고 공산당도 질세라 사민당 공격에만 혈안이 되다 보니 좌파가 단합하여 세를 불려가는 나치당에 맞서는데 장애물이 되었고, 결국 서로의 이런 근시안적 행보는 텔만과 상당수의 독일 공산당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렇게 속 편하게(?) 싸울 수 있던 데에는 이 당시 독일 정계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고, 공산당과 사민당도 나치당을 과소평가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이 기존 정당을 배격하는 노선을 채택할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영향으로 나치당의 잠재력을 진작 알아차렸으면 속 편한(?) 노선을 채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기는 했지만.[12]
1932년에 텔만은 공산당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여 10.2%의 지지율을 얻었는데, 히틀러가 무려 36.8%의 득표율을 획득하였다.[13] 이에 사민당에게 '과거의 원한은 잊고 일단 나치부터 없애자'라고 제안하였으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공산당의 발목잡기에 질릴 대로 질려 있던 사민당 측이 이를 한큐에 거절했다고 한다. 1932년 7월 20일에 프란츠 폰 파펜이 ' 프로이센 자유주(Freistaat Preußen)'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대항해서 공산당은 총파업을 호소하고 사민당에도 공동 투쟁을 벌일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독일 좌파의 분열과 상호 대립은 처음에는 각종 우파 단체의 수장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히틀러가 움직이는데 이상적인 정국을 만들어줬고, 그 결과로 나치당의 급부상을 방치해버리게 된다.
2.3. 나치의 집권, 그리고 붕괴
1933년, 마침내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올랐고, 총선 6일 전인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터져버린다. 용의자로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Marinus van der Lubbe)가 체포되었다. 당연히 이 사건은 독일 공산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선거 직전 에른스트 텔만을 비롯한 4천여명의 간부 및 당원들이 체포되었다. 3월 5일의 총선에서 나치당은 92석(총 의석수 288석. 득표율 43.91%. 원내 제1당)을 추가로 얻었으며, 공산당은 19석(총 의석수 81석. 득표율 12.32%. 원내 제3당)이라는, 가장 많은 의석수를 잃은 정당이 되고말았다. 총선 바로 다음날인 3월 6일, 공산당은 금지되었다. 이어서 수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7월 14일에 독일 내에서 나치당만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라고 선언되었다.히틀러는 방화 사건이 일어난 후 공산당을 즉시 금지해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이 염려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총선에 참가하도록 내버려 두면 사회민주당의 표를 갉아 먹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후 빌헬름 피크, 발터 울브리히트 등 일부 공산당원들은 소련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을 떠난 이들 중, 반 레닌/스탈린주의 계열에 속하는 많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1937년 대숙청 당시 NKVD에 의하여 제거당한다.
2.4. 2차 대전 종전 이후
2차대전 종전으로 나치 독일이 붕괴된 이후에야 공산당은 다시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동독에서는 스탈린의 지시에 의하여 사회민주당과 강제로 합당하면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했다.
서독에서도 공산당이 재건되었다. 1949년의 초대 총선 당시 15석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서독 지역에서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이 거론되었지만, 1950년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사민당의 당수 쿠르트 슈마허가 공산당과의 합당을 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당시 사민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완전히 버리고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현재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확립했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공산당과 이념으로 타협하기는 어려웠다.
서독 공산당은 1950년대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의 재무장 정책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2.5. 위헌정당 지정 및 해산
1951년에 서독 연방정부는 공산당을 위헌정당이라 주장하여 연방헌법재판소에 해산을 청구했다. 연방정부가 독일 공산당을 위헌정당이라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독일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위한 투쟁정당으로서 폭력혁명의 방법으로 연방공화국의 권력을 장악하려 하고 있고, 또한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형태를 수립하려고 하는 혁명정당이다. 이들은 권력을 획득한 후 독일 전역을 포괄하여 소비에트점령지역과 일치하는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혁명정부의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한 지배체제는 폭력과 전제의 전체주의적 체제인 것이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근본가치와 합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독일 공산당의 존재는 기본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 독일 공산당은 그 강령에서 혁명 또는 폭력적 투쟁수단에 의한 ‘아데나워 체제’의 전복을 주장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동독, 인민민주주의, 소련의 지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독일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 독일 공산당은 기본법의 내용이 되고 있는 자유민주적 제원리와 모순되는 정치적 발전을 저지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정당이다.
- 독일 공산당은 점령군이 그 민주적 성격을 확인하고 정식으로 인가한 정당으로써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는 정당이 아니다.
-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은 증거조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세계관의 신봉은 기본법에 의하여 기본권의 하나(세계관신봉의 자유)로서 보장되고 있다.
- 독일 공산당의 구체적 목표는 서독과 동독이 평등한 입장에서 참여하는 집단안전보장제도에 의한 평화의 유지와 보장, 민주적 기초에 입각한 독일의 평화적 재통일, 헌법적 질서에 의거한 민주적 권리와 자유의 보장 및 확장 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56년에 연방정부의 청구를 인용하였으며, 이로써 독일 공산당은 해산당한다. 이 판결에 대해서는 법적, 역사적으로 충분한 정당성을 가졌냐를 두고 지금까지 계속 논쟁이 되고 있다. # 구 공산당 당원들은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불복해 유럽인권위원회(European Commission of Human Rights, 현 유럽인권재판소)에 위헌정당해산제도를 규정한 서독 기본법 제21조 2항이 위헌이라고 제소하였으나, 유럽인권위원회는 1957년에 서독 연방정부가 주장한 것과 같은 이유로 합헌으로 결정하였다.
해산 이후 서독 공산당 당원들은 독일평화연맹(DFU)에서 활동한다.
3. 후계 정당
재건된 독일 공산당(DKP)의 로고
시위 중인 독일 공산당(DKP) 당원들
1956년에 서독의 독일 공산당이 해산된 이후, 한동안 독일 공산당과 유사한 목표를 가진 정당조직을 세우는 것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데탕트에 따라 1968년에 서독이 동독 및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동독과 소련은 할슈타인 원칙의 폐기와 함께 서독 내 공산당 조직 허용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 대해 서독 정치권은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국 구 독일 공산당과는 별개의 공산당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서독 내 공산당 조직을 다시 허가했다.[14] 이에 따라 1968년에 독일 공산당(DKP)이 1956년 해산된 독일 공산당의 후신으로 세워졌으며, 이 정당은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지지율은 시망. 득표율은 0.1%에서 0.3%를 오가고, 연방하원에서 한 번도 의석을 낸 적이 없다. 2021년 총선 당시에는 회계 서류 제출 누락으로 인해 선관위로부터 선거 참여를 금지당하는 굴욕을 당했다가 서유럽 최대의 공산당인 프랑스 공산당부터 영국 공산당(1968), 영국 공산당(2004), 룩셈부르크 공산당 등 사상적 동지인 독일 및 유럽 내 공산당들의 강한 반발로 금지 조치가 철회되기도 했다. 관련 기사
재건된 서독의 독일 공산당(DKP) 이외에도 옛 독일 공산당(KPD)을 계승했음을 주장하는 정당 몇이 더 등장한다. 독일마르크스레닌주의당(MLPD), 독일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자(KPD/ML) 그리고 1990년 결성된 독일 공산당(KPD/1990) 등이 그런 정당들이다.
독일마르크스레닌주의당(MLPD)의 로고
독일마르크스레닌주의자당(MLPD)와 독일 공산당(KPD/1990)은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고, 마오주의 노선을 채택한 독일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자(KPD/ML)는 몇 차례 분열을 겪은 뒤,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통합하여 사회주의연합당(VSP)을 세웠으나, 90년대 초반 해산했다. 이 통합을 반대한 당원들이 독일 공산당/붉은 아침(KPD/Roter Morgen)을 결성하였고 2011년 12차 당대회에서 더 이상 '공산당'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는 실천적 오류가 심하였음을 천명하고 독일공산당재건그룹(KPD-Aufbaugruppe)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후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좌파당(Die Linke)의 로고
2007년에 민주사회당과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Arbeit und soziale Gerechtigkeit – Die Wahlalternative; WASG)'이 통합하여 창당한 좌파당(Die Linke)은 자신이 독일 공산당의 역사적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독일 민주사회당의 계열[15]로 따진 것이며, 독일 공산당의 진정한 후신임을 자처하는 여러 좌파 세력들 중에서는 좌파당이 가장 유명한 세력일 것이다. 좌파당은 동베를린에 위치한 독일 공산당의 당사를 카를 리프크네히트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여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좌파당의 싱크탱크 명칭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이다. 한편 전간기 사민당의 공산당 혐오는 좌파당으로 대상이 그대로 이어져서 좌파당은 단 한 번도 연방정부 연정의 구성원이 된 적이 없다.[16]
4. 둘러보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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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 독일 공산당 | |
사회주의 · 사회민주주의 | 독일 사회민주당 | |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 | |
자유주의 · 급진주의 | 독일 민주당 | 독일 인민당 |
가톨릭 | 독일 중앙당 | 바이에른 인민당 |
보수주의 · 개신교 | 독일 국가인민당 | |
독일 조국당 | 독일 중산층 제국당 | |
극우 민족주의 | 독일 노동자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독일 민족자유당 |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
[1]
아돌프 히틀러에 의한 금지정당 지정
[2]
사회주의통일당으로 계승
[3]
연방 헌법 위반으로 인한 강제 해산
[4]
독일 공산당은 특별한 당수 혹은 서기장 없이 집단지도체제로 정당을 운영하였다.
[5]
초창기에는 레닌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 부분은 룩셈부르크의 저서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로도 확인 가능.
[6]
당내 좌파 일부가 탈당하여 창당했다.
[7]
나치의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에도 등장한다.
[8]
잘 보면 탁자 왼쪽 부분에 피켈하우베를 쓴 힌덴부르크와 히틀러가 있다.
[9]
사민당이 공식적으로도 계급투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서이다.
[10]
스파르타쿠스 봉기에서 볼 수 있듯 사민주의 정당에서 공산당이 분당하자 어제의 동지 등에 칼을 꽂아버린 각지 사민주의 정당의 작태가 크게 작용했다.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파탄낸
4.12 상하이 쿠데타도 마찬가지였고.
[11]
기존 코민테른의 노선방침은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우익과 좌익이 연립하는 합작형태'의 연합노선을 채택하였으나,
4.12 상하이 쿠데타 등 각지에서 합작하던 우파, 중도파의 배신이 드러남에 따라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를 기점으로, 기존의 좌우의 연립합작 노선을 깨뜨려 스탈린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공격적, 극좌적 노선이 채택되면서 코민테른도 점차 획일화 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참고로 이 대회는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준다.
신간회 문서 참고
[12]
이후 파시즘의 광풍을 목격한 코민테른은
인민전선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고 그 결과 스페인, 프랑스에서 중도파부터 공산당까지 합작한 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
스페인 내전 문서 참고
[13]
1위는 53.0%를 획득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
[14]
당시 서독은
CDU/CSU와
사민당이
대연정을 구성하고 있어 강경 반공주의자인
아데나워가 집권하던 1956년 당시보다는 공산주의자에 유화적이었다.
[15]
민주사회당은 구 동독 집권당인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 동독의 일당제 붕괴를 맞아 개편되어 창당된 정당이며, 사회주의통일당은 구 동독의 사민당과 공산당이 강제 합병되어 탄생한 정당이다.
[16]
주 정부에서는 좌파가 강세이거나,
기민련이 중앙보다 심각한 결함이 있거나, 좌파당보다 백안시되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 강세라서 연정이 필수인 등 특별한 경우에서 입각한 적은 있어도 연방 차원에서는 기민련, 사민당, 자민당 할 것 없이 좌파당 배제를 공공연히 내세운다.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좌파당이 최초로 R2G 연정 형태로 입각할 뻔했지만 충족 의석에 미달하면서 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