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9:59:34

국기단

<colbgcolor=#fff> 흑·적·금 국가국기
Reichsbanner Schwarz-Rot-Gold
Black, Red, Gold Banner of the Reich
파일:국기단.jpg 파일:국기단2.png
깃발 엠블럼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통합과 정의와 자유
[1]
Für Demokratie und Republik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위하여
창설일 1924년
창설자 독일 중앙당, 독일 민주당, 독일 사회민주당[2]
이념 자유민주주의[3]
반공주의
반파시즘
빅 텐트
내부 계파 :
스펙트럼 중도 ~ 중도좌파
규모 3,000,000명(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500명(현재)
참전 프로이센 쿠데타(계획상)
위치 마그데부르크(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베를린(현재)
공식 홈페이지 파일:국기단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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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립3. 수비대와 저항 계획4. 해산5.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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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 휘하의 준군사조직. 유사품 '흑백적 제국국기단'은 우익계열이라 정치적 입장은 정 반대이다. 흑적금 국기단이라는 명칭은 독일 중앙당 검은색(흑색), 독일 사회민주당 빨간색(적색), 독일 민주당 금색에서 유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출전했던 참전용사 연합회 역할도 하였다. 본부는 마그데부르크에 있었다.

국기단은 평소에는 나치당 SA와 가두 투쟁 패싸움을 벌이며, 사회민주당의 유세 등의 정치활동을 보호했다.

청소년 조직으로 청년국기단(Jungbanner Schwarz-Rot-Gold), 스포츠 조직으로 노동자 체육 스포츠 협회(Arbeiter-Turn- und Sportbund)가 있었다. 활동 부대는 주요대(Stammformationen (Stafo))와 엘리트 단원을 선발하여 구성된 수비대(Schutzformationen (Schufo))가 있었다.

국기단의 단장 칼 헤르타맨의 회고에 따르면 조직원의 수는 약 300만 명으로, 그 가운데 엘리트 대원인 수비대는 25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2. 설립

1923년, 나치당 SA, 독일 공산당 붉은전선전사동맹과 같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반대하는 우익, 좌익의 준군사조직이 연달아 무력 봉기를 일으켰다. 극우, 극좌 세력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사민당의 정부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봉기와 폭력 사태가 반복되자 사민당을 비롯한 바이마르 헌법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우익이나 극좌파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력으로 전복당할 수 있다는 우려를 안게 되었다.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모여서 공화국의 헌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 1924년 국기단(Reichsbanner)을 발족했다. 사민당만의 준군사조직은 아니었지만, 90% 이상의 대원이 사민당 당원이며 실질적으로 사민당의 준군사조직이었다.

이후 정식으로 사민당의 기반 단체가 되었다.

3. 수비대와 저항 계획

수비대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할 경우, 무력 저항 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훈련을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지자가 많았던 경찰로부터 군사 교관을 파견 받아, 소총, 기관총 사격 훈련, 위생병 양성, 정치 학습, 야전 시가전 훈련을 받았다. 부상 대원을 치료하려는 목적에서 병원과 전투 부대에 대한 보급 센터까지 갖추고 있었으며, 저항 계획도 미리 짜두고 있었다.

국기단의 마르데부르크 본부는 나치당이 봉기하거나 그에 가까운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한 경우, 철도 도로를 점거하여 봉쇄하고 교량을 폭파하며 전화선을 절단하기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경찰을 통해 무기를 입수하여 수비대원은 최소한 권총 정도는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과 협력한 것은 경찰 가운데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우호적인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민당 당수 오토 벨스 등 사민당 수뇌부는 국기단의 활동을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공화국 지지세력이었던 가톨릭 중앙당이 나치의 거짓말에 속아 당을 해산하는 것을 보고 국기단이 봉기하는 일은 결국 없었다.

4. 해산

1932년 7월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이 사민당의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주 총리에서 해임하고 자신이 프로이센 주 총리로 취임하는 불법적인 ' 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켜 사민당이 장악하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파괴하자, 국기단은 파펜이 불법적이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프로이센 주 정부를 강탈했다고 판단하여 무장 봉기를 시도했지만 노동조합총동맹(ADGB)의 반대로 포기하고 말았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총리로 임명되자, 노동조합총연맹은 파업을, 국기단은 봉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사민당의 오토 벨스 당수는 총파업과 봉기에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고, 국기단의 계획을 몽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실 히틀러의 총리 취임 전까지 사민당이 세우고 있었던 봉기 계획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우호적인 경찰이 전면적으로 협력 해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경찰조차도 나치당에 장악당한 상태였다. 벨스는 약간의 무기만으로, 국방군 경찰, 돌격대 철모단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나치당과 독일 국가인민당 등 극우파는 의회에서 과반수를 쥐고 있었다. 야당인 사민당이 여당인 나치당을 무력으로 타도한다는 것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민당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국기단에게 만일 다음 선거에서 히틀러 내각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결정된 국민의 의사라고 논평했다.

1933년 2월 1일, 국회가 해산되고 선거전에 돌입하였다. 사민당은 무장봉기나 총파업 대신에 선거로서 파시즘과 싸우기로 천명했다. 국기단은 사민당의 당 집회를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선거에서 사민당은 1석 줄은 120석으로 선전했지만, 나치당은 과반수에 가까운 288석을 획득했고, 독일 국가인민당과 합쳐 과반수를 넘었다.

국기단은 비슷한 단체였던 강철전선(Eiserne Front)과 함께 활동이 금지되어 해산되었다. 사민당도 뒤를 따랐으며,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나치 독일 지배기간 동안 국기단의 잔존 조직은 지하에 숨어들어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다.

5. 재건

1953년, 국기단은 민주주의 활동 단체로서 재건되었으며 5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세미나를 열고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함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공식 사이트도 있다.

지금은 예전의 준군사조직의 특성을 버린지 오래로 사실상 이름과 구성원만 같은 다른 단체가 되었다.[4]

2024년 창설 100주년을 맞았다.


[1] 깃발에 적힌 슬로건. 독일 국가이자 당대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인 Deutschlandlied 3절에 나오는 첫 번째 문장이다. [2] 중앙당과 민주당보다 사민당 친화적인 조직이였다. 특히 중앙당의 경우 파펜 등은 이념적으로 국기단과 상극이였다. [3] 사실상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수호가 목적이였다. [4]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와 달리 극단주의가 줄고 치안이 확보된 현대 독일에서 민병대/준군사조직 혹은 폭력을 수반하는 반파시즘 단체 자체를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에서 '좌익극단주의'로 지정하는 상황에서 중도좌파 성향인 국기단이 굳이 더 이상 파시스트들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 현대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