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6 21:16:45

보도 라멜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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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상원 제76대 의장
독일연방공화국 튀링겐주 제5대 주총리
보도 라멜로프
Bodo Ramelow
파일:800px-2019-10-27_Wahlabend_Thüringen_by_Sandro_Halank–57.jpg
<colbgcolor=#707070> 출생 1956년 2월 16일 ([age(1956-02-16)]세)
독일 니더작센 오스터홀츠샤름베크
재임기간 제5대 튀링겐 주총리 1기
2014년 12월 5일 ~ 2020년 2월 5일
제5대 튀링겐 주총리 2기
2020년 3월 4일 ~ 현직
제76대 연방상원의장
2021년 11월 1일 ~ 2022년 10월 31일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소속 정당

경력 튀링겐 주의회의원(1999-2005, 2009-2015, 2019-)[1]
튀링겐 민주사회당 원내대표(2001-2005)
튀링겐 좌파당 원내대표(2009-2014)
튀링겐 주총리(2014-2020, 2020-)
연방상원의장(2021-2022)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종교 기독교 ( 개신교)

1. 개요2. 초기 생애
2.1. 출신 배경2.2. 유년 시절2.3. 정계 입문 전
3. 정치 활동
3.1. 초기 정치 활동3.2.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3.3. 드디어 이룬 꿈
4. 주총리
4.1. 주총리 1기 (2014~2019)4.2. 험난한 재선 (2019~2020)4.3. 주총리 2기 (2020~)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정치인, 현 튀링겐주의회 의원이자 주총리. 전 연방상원의장.

좌익~극좌 성향의 좌파당 소속으로, 독일 통일 이후 최초로 탄생한 좌파당 소속 주총리다. 개인사를 훑어봐도 중학교까지만 졸업하고 곧바로 일터에 나간 저학력 노동조합원 출신으로 정치를 시작해 주총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2023년 기준 독일 전국의 유일한 좌파당 소속 주총리로, 좌파당 지역 정치의 거물급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2. 초기 생애

2.1. 출신 배경

현재 구 동독 영토인 튀링겐의 주총리직을 맡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동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서독 출신이다. 그나마 서독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어렸을 때부터 동독으로 이주하고 그 곳에서 성장하면서 사실상 동독 출신으로 분류되는 앙겔라 메르켈과는 달리, 라멜로프는 서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한, 그야말로 빼박 서독인. 통일 전에는 동독 영토에 아예 발도 들인 적이 없다.

여기에다가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인이었고, 라멜로프 본인 또한 독실한 개신교인이다. 헌데 동독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공산 국가답게 개신교 등 종교를 철저히 탄압했고,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구 동독 지역은 무신론자 비율이 구 서독 지역에 비해 높은 편. 그리고 루터교 학자인 요한 필리프 프레제니우스의 후손이다. 그리고 서독처럼 같은 제1세계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제르마나 알베르티(Germana Alberti)와 결혼했다.

즉, 출신 배경부터 완전 빼박 서독인이지, 동독과는 단 1의 접점도 없었으며, 동독이 표방하던 가치와도 완전 대치되는 배경을 갖고 있었다. 아직도 동서 지역감정이 만연한 독일에서 주총리를 할 거였으면 차라리 서독에서 했지, 동독에서 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특이한 부분.

2.2. 유년 시절

니더작센 주의 오스터홀츠샤름베크에서 태어났으며, 8세 때 부친을 여의었다. 이 때문에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모친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보도 외에도 3명의 남매가 또 있었으니, 홀로 네 자녀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 고로 쉬울 리는 없었을 듯. 이런 배경 때문인 지는 몰랐지만, 교육열이 아무리 높다는 당시 서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 했다. 단순 농담이 아니라, 어렸을 때 글을 제대로 쓸 줄도 몰랐다고.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르부르크[2] 직업전문학교를 전진했고, 그 사이에도 취업해서 모친과 함께 집안의 생계를 공동으로 책임졌다.

2.3. 정계 입문 전

여하튼 이런 학력 미달 전적 때문인지, 당시 징병제였던 서독에서도 병역은 면제를 받았다.[3] 하지만 낮은 학력 때문에 최소한 중소기업에서라도 직장인으로서 근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런 그가 갈 수 있던 곳은 다름아닌 노동조합이었다. 그가 가맹한 노조연합은 바로 Ver.di라고 불리는 곳으로, 은행, 보험사 등 각종 직장 내 노조에서 활동하며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당연히 통일 전이었으므로 서독 지역에서만 활동했으며, 이대로만 갔으면 서독 기반 정치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직 통일이 그저 먼 훗날의 일로 보였던 그 시절에는 더더욱...

그러던 1989년부터 동·서독의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고, 1990년 독일은 약 40여년 만에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이 때 일부 서독 직장에서 동독으로 재배치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라멜로프도 이 때 구 동독 지역인 튀링겐으로 재배치되었다. Ver.di 내에서 기반을 서서히 다져가던 그는 곧바로 Ver.di 튀링겐 지부장이 되었고, 1999년까지 재직했다.

3. 정치 활동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튀링겐 지역에서 기반을 다져가던 1994년 노동절, 당시 동독 기반 구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 민주사회당(PDS)이 자체적으로 노동절 기념 행사를 주최했는데, 마침 지역 노조 지부장으로서 민주사회당 등 지역 좌파 정당들과 밀착하던 라멜로프는 이 때 사회자로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드러냈다. 1997년 1월 9일 에어푸르트 선언의 발제자 및 서명인의 한 명으로서 이름을 알렸고, 이 때부터 지역 정계로부터 입문 제의를 꾸준히 받았다.

3.1. 초기 정치 활동

그렇게 1999년 주총선에서 민주사회당 측 주총리 후보로 입후보되어 당을 이끌었으나, 한동안 통일 직후라서 서독 기반이던 기민·기사련 사회민주당(SPD)의 인기가 워낙에 높았던 탓에, 정당 득표율 21.3%에 88석 중 21석으로 마무리했다. 이미 기민련이 과반 의석을 장악하면서 주총리가 되지는 못 했지만, 그럼에도 신인 of 신인이던 라멜로프가 기민련 소속 베른하르트 포겔 당시 현직 주총리를 상대로 저런 성적을 내었다는 점은 매우 신선했다. 라멜로프는 곧바로 민주사회당 튀링겐 원내부대표가 되었고, 2001년에는 원내대표직을 거며쥐게 되었다.[4]

이렇게 당 내에서 기반을 다져가며 2004년 주총선을 다시금 이끌었으나, 막상 여론조사에서 사민당하고 초접전을 벌이면서 민주사회당이 자칫 제1야당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그나마 일부 유권자들이 막판에 민주사회당에 투표한 덕에 제1야당 자리는 유지했으나, 달리 말하자면 원내 1당이 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 비록 기민련의 득표율이 여론조사보다 크게 추락해 과반 득표에 실패했으나, 과반 의석은 사수하면서 기민련이 계속 주총리직을 차기했다.

그러나 튀링겐 주에서 올라가던 지지율과는 달리, 막상 연방 정계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 하며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민주사회당이었고,[5] 결국 또 다른 극좌 정당인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과의 연대 내지 합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민주사회당은 라멜로프에게 눈을 돌렸고, 그는 2005년 총선을 앞두고 양당이 연합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행여나 선거에서 패할 경우 합당은커녕 좌파의 미래 자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매우 리스크가 큰 일이었지만,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54석을 획득, 종전 2석이라는 굴욕을 벗고 51석의 녹색당보다 조금이나마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물론 둘 다 오십보백보라지만, 어찌어찌 꼴등을 면한 덕(?)에 민주사회당과 WASG는 2007년 성공적으로 합당 절차를 마무리했고, 라멜로프는 이렇게 탄생한 좌파당에서 더더욱 입지를 굳이기 시작했다.

3.2.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걷는 길은 매우 험난했으니, 비록 합당과 좌파 진영 부활에 공헌을 들인 라멜로프였지만, 문제는 그가 다름 아닌 연방헌법수호청감시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2004년 주총선 이전인 2003년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가 극좌 성향의 정당인 독일 공산당(DKP)과 접촉했기 때문. 비단 라멜로프뿐 아니라, 좌파당 내 여러 인사들이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2009년 주총선에서 득표율은 27.4%로 5년 전보다 조금 더 늘었지만, 막상 의석은 되레 1석이 줄어, 생각보다 크게 부진한 성적을 냈다. 그나마 기민련의 과반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고, 좌파 진영(좌파당+사민당+녹색당) 의석 수를 합하면 과반이라 기민련으로부터 정권을 가져오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 때문에 라멜로프가 이러한 우여곡절을 넘기고 주총리에 올라갈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시궁창. 정작 좌파당이 제1파트너로 여겼던 사민당은 좌파당을 "협력의 대상자"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라멜로프 본인 또한 사민당 측 주총리 후보였던 크리스토프 마치와도 사이가 매우 극악했다.

결국 사민당은 기민련과의 대연정을 선택했고, 기민련이 새로 내세운 크리스틴 리버크네흐트가 신임 주총리로 취임하면서, 라멜로프는 주총리가 되는 데 실패했다. 연방헌법수호청의 감시 대상에 올라 유권자들이 탐탁치 않게 여긴 것도 문제였지만, 무려 세 번째 기회에도 적극적인 기지를 발휘하지 못 하면서, 그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져갔다. 이대로 가면 주총리직은 영원히 물 건너갔고, 좌파당이 중앙 정계에서는 더더욱 집권이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의 정치 생활은 이대로 끝이 나는 가 싶었다.

하지만 신의 뜻이었는가. 기회는 오고 있었다.

3.3. 드디어 이룬 꿈

2010년 자신이 연방헌법수호청의 감시 대상이라는 데 이의 소송을 제기했지만 퇴짜를 맞았는데, 2013년 연방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아, 드디어 본인의 아킬레스건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렇게 2014년 주총선에서도 어김 없이 좌파당의 주총리 후보로 나서게 되었지만, 당 내에서도 기회를 3번이나 줬는데도 성적이 영 그랬던 탓에, 한편으로는 그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도 지면 그가 주총리으로서 더 이상 적합하지도 않은 인물이라고 인증하는 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기민련이 전보다 무려 4석을 더 건지는 동안, 좌파당은 단 1석만 건지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라멜로프 본인도 5년 전에 본인이 이겼던 에어푸르트 제3선거구에서 기민련 마리온 발스만 후보에게 낙선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더욱이 기민련+사민당 대연정이 과반을 사수한 것은 덤. 그나마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원외로 쫓겨나는 신세는 겨우 면했지만,[6] 저조한 성적도 모자라 주총리 후보부터가 지역구에서 낙선한 순간부터 당 내에서 그의 입지는 땅바닥으로 추락했고, 이게 이미 4번째 기회였으니, 이대로 정치 인생이 끝나는 듯 싶었는데...

사민당이 기민련과 더 이상 연정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폭탄 선언을 하면서, 정계의 시선이 라멜로프로 향하기 시작했다. 기민련을 버리면, 유일한 선택지는 바로 좌파당 뿐이었기 때문. 그렇게 좌파당은 사민당, 녹색당과 연정 협상에 돌입했지만, 불과 1년 전 연방 총선 때만 해도 좌파당이 죽도록 싫다며 좌파 연정의 여지를 걷어찬 사민당이었기에,[7] 전례 없는 이 범좌파 연정 협상이 성공할 지 각계의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협상 전문가 라멜로프답게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고, 마침내 12월 4일, 주의회 투표 2차 표결에서 91석 중 46표의 찬성표로 과반을 확보하여 주총리에 취임했다.

4. 주총리

4.1. 주총리 1기 (2014~2019)

1999년부터 15년 간 싸워온 끝에 드디어 이뤄낸 꿈이지만, 막상 취임 초기부터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통일 후 최초의 좌파당 소속 주총리였는데, 언급했듯이 (라멜로프 본인은 아니지만) 좌파당이 구 동독 공산 독재정권의 후예였던지라, 당연히 우파 진영에서 이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통일 당시 동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 입장에서는 그 시절의 악몽이 부활하는 그야말로 피꺼솟할(...) 일이었고, 취임 당일 주의회 청사 앞에서 " 슈타지는 꺼져라!", "사민당 이 배신자들"이라며 시위를 벌였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기민련 소속)는 자당 소속 주총리가 연정 파트너의 배신(?)으로 축출당한 분노 때문인지 대놓고 맑시스트는 안 된다고 도발했다. 비단 우파만 반발한 것은 아니고, 좌파에서도 특히 사민당 내부의 반발이 매우 상당했다. 지역 당원들의 연정 협상 표결에서 무려 30.1%가 반대했을 정도.

하지만 통일의 성과가 생각 외로 크지 않아 구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동독 시절의 향수가 다시 자극되기 시작했고, 5년 전 사민당이 좌파 연합 대신 대연정을 고른 것에 대해 유권자들이 크게 분노한 탓에,[8] 라멜로프를 향한 기대감은 매우 컸다. 진보층들만 호응을 보낸 것은 아니었고, 중도층들도 일단 기성 양대 정당(기민련, 사민당) 출신이 아닌 제3지대 출신 주총리를 맞이했기에, 의외의 신선함에 기대를 갖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취임 후 주민들과 소통하는 차원에서 에어푸르트 기반 지역 방송인 Salve.tv를 통해 Ramelow & Co 프로그램을 개설해 직접 출연했다. 나름 좋은 취지로 시작했지만, 정작 정치권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는데, 대놓고 "소통 방송을 빙자한 주정부 방송",[9] "주정부는 방송과 거리를 둬야 한다", "프로파간다" 등의 비판에 시달렸다. 결국 주정부 산하 언론 기관까지 나서 위법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반발이 계속 이어지자 라멜로프는 아예 의원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같은 당 소속으로 주정부에서 교육청년체육부 장관을 역임하던 비어기트 클라우베르트도 동시에 의원직을 사임했다. 본디 내각제에서 이런 행위는 주총리직 사임으로도 자연스레 연결되나, 독일 헌법 상 "연방 총리나 주총리은 무조건 현역 의원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둘 다 내각 직책에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류의 비판은 주로 라멜로프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기득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한마디로 제3지대, 반(反) 기득권 출신인 라멜로프를 어떻게든 흠을 내고자 작정하고 때린 것에 가까웠다. 이게 처음에는 효과가 먹혔는지 좌파당의 지지율이 조금 하락했지만, 되레 유권자들로부터 "니들이 뭔데 시비질이냐?"며 격렬한 반발에 시달렸고, 안그래도 기득권들의 잦은 실책에 분노한 유권자들은 결국 2017년 연방 총선에서 기민련, 사민당 양당에게 전후 최악의 성적을 안겨주면서 제대로 심판했다. 물론 이런 걸로 정신을 차릴(...) 기득권이 아니었고, 201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도 기민련, 사민당 양당은 제대로 회초리를 맞았다. 그리고 얼마 후, 튀링겐주는 또 다시 주총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4.2. 험난한 재선 (2019~2020)

언급한 기득권들의 무차별적인 공격+라멜로프의 높은 인기+동독 시절의 향수가 겹쳐 라멜로프와 좌파당의 인기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고, 2019년 주총선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좌파당이 원내 1당이 되는 성적을 기록했다. 비록 단 1석만 늘어났지만, 정당 득표율 31%로 처음으로 30% 대에 들어섰고, 좌파당으로서는 주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과 녹색당의 의석을 까먹는 바람에 범좌파 연정의 과반이 붕괴되었고, 대안당, 기민련 등 범우파 진영이 과반이라, 라멜로프의 행복한 시절(?)은 5년으로 끝나는 가 싶었다. 그나마 대안당이 극우 성향이라 전방위적인 비토를 당하고 있었고, 중도 성향의 자민당이 모처럼 원내에 들어오면서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민당도 대체적으로 우파로 분류되는 경향이 강하고, 역으로 기민련보다 더 보수적인 인사들도 여럿 있어서, 당연히 이들이 좌파당에게 기회를 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좌파당을 버리고 거국내각(기민련+사민당+녹색당+자민당)을 구성하자니, 이미 좌파당+대안당 양극단이 과반인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상황이 신통치 않자 좌파 3당(좌파당+사민당+녹색당)은 기존의 범좌파 3당 연정을 소수 정부의 형태로라도 유지하고, 대신에 조기 총선을 잡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주의회에서 최대 3차례의 표결을 거쳐서 2차례까지는 과반의 찬성을 요구하고, 3차 표결에서는 단순 다수만을 요구하는데, 기민련이 자당 주총리 후보( 마이크 모흐링)를 입후보시키지 않아, 어차피 대안당이 모두의 비토를 받는 만큼 기민련 의원 일부가 기권하거나 하는 식으로 범좌파 소수 정부에 힘을 실어줄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표결이 치러졌고, 2차까지 라멜로프는 과반 득표에 실패해 3차 표결을 맞이하게 되었다. 두 차례 모두 기민련이 기권하면서 단순 과반만을 요구하는 3차 표결에서 라멜로프가 최다 득표는 자동으로 득표할 것이 확실했고, 다들 별일 없이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한 발 물러나 있었던 자민당이 갑자기 자당 주총리 후보( 토마스 켐머리히)를 입후보시킨 것. 물론 그래봤자 "어차피 자민당은 겨우 5석밖에 없는데 별 일 없겠지..."라며 별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설마가 사람 잡고 말았다.

뚜껑을 열어 보니, 라멜로프와 켐머리히가 각각 44:45로, 단 1표 차이로 켐머리히가 이긴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그야말로 모두가 충격에 빠졌고, 라멜로프는 울며 겨자먹기로 주총리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리고 켐머리히가 취임.[10]

이런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과의 실체가 드러났는데, 막상 켐머리히 본인도 놀랐던 모양. 자민당 5명이야 어차피 자당 소속 주총리 후보를 지지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그냥 조용히 기권하고 넘어갈 줄 알았던 기민련이 입장을 바꿔 켐머리히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는데, 사실 여기까지만 봐서는 뭐가 문제인 가 싶을 수도 있다. 기민련-자민당 협력은 오랜 전통(?)이었으니까.

문제는 대안당이었다. 대안당이 자당 주총리 후보인 크리스토프 킨더발터(Christoph Kindervater)를 지지하려다가, 돌연 입장을 선회해 켐머리히에게 표를 몰아준 것이다. 라멜로프를 작정하고 끌어내리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투표였던 것. 물론 전략적 투표가 불법인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전략적 투표가 크게 문제가 된 이유는, 대안당이 네오 나치 의혹을 받는 극우 정당이었기 때문. 비록 켐머리히는 중도 성향일 지 몰라도, 극우 정당의 지원을 받아 주총리에 선출되었으며, 대안당과는 절대 협력하지 않겠다던 자민당과 기민련이 자의반 타의반 협력을 한 꼴이 된 것.

이 사건으로 인해 전국이 발칵 뒤집혔고, 외신에도 보도가 되며 전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나치 시절의 만행에 반성하고자 극우를 경계하고 배제해 온 독일에서 그것도 극우의 지원을 받은 주총리가 취임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치의 엄정한 금기를 정면으로 깨는 일이었기 때문.

논란이 커지자 기민련과 자민당은 대안당과 선 긋기에 나섰지만, 결국 여론의 후폭풍을 이기지 못 하고 켐머리히는 취임 한 달만에 주총리직을 사임했다. 기민련은 안 그래도 은퇴하는 메르켈의 후계자로 낙점된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가 인기가 더럽게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번 사태로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결국 대표직에서 불명예스럽게 내려오게 되었다.

결국 코로나19에다가 극우 정당과의 협력 의혹이라는 정치 위기를 해결할 겸 기민련에서는 라멜로프의 재취임을 묵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대신에 2021년 4월 25일에 조기 총선을 치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3차례의 표결에서 라멜로프는 대안당 측 주총리 후보 비요른 회케와 맞붙게 되었고, 막판 회케가 사퇴하면서 3차 표결 결과, 라멜로프가 90표 중 42표를 획득, 단순 다수로 주총리직에 복귀했다. 이 때 회케는 라멜로프의 재취임을 축하하며 악수하고자 손을 내밀었지만, 라멜로프는 이를 거절하며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4.3. 주총리 2기 (2020~)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주총리직에 간신히 복귀한 라멜로프였지만, 2기 때는 1기 때와는 달리 별다른 호평을 받지 못 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전세계를 덮친 코로나19에 대한 부실 대응때문이다.

독일도 코로나19를 피해가지 못 하면서 전국적인 락다운에 들어갔는데 라멜로프는 독일에서 락다운을 가장 강하게 반대하는 정치인 중 하나였고, 주총리로서 가장 먼저 봉쇄를 완화했다. 문제는 2차 대유행때 찾아왔는데, 1차보다 훨씬 심각한 2차 대유행 앞에서 의료 강국 독일도 제대로 뒤집어졌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전국 단위의 락다운 재개를 시도했다. 튀링겐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만, 라멜로프는 이런 와중에도 록다운 부활을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튀링겐은 락다운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러한 결정은 엄청난 대참극을 불러 일으켰고, 튀링겐주의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자 뒤늦게 후회하며 락다운을 재개했지만,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 했다.

당연히 좌파당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본인의 인기도 빠르게 식어가고 있고, 2021년 4월 25일에 치를 예정이던 조기 총선도 9월 26일 연방 총선에 맞춰 치르는 것으로 연기되면서 상황은 영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갔다. 설상가상으로 9월 26일 총선도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의결에 실패, 취소되면서 체면을 구긴 것은 덤. 아무래도 기민련의 묵인 아래 소수정부를 출범시킨 구조다보니 정치적 제약이 과거에 비해 큰 영향으로 보인다.

결국 9월 26일 연방 총선에서 대안당이 튀링겐 지역구에서 완승했고, 좌파당은 비례대표 득표율 4.9%로 봉쇄조항 5%에 미달해 자칫 모든 의석을 까먹을 뻔한[11]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하면서, 라멜로프의 차기 행보에 빨간불이 켜졌다.

게다가 좌파당의 부진은 튀링겐식 범좌파 3당 연합(R2G 연정)이 연방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계획에도 악영향을 미쳐,[12] 결과적으로 라멜로프의 실책이 자당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친 것. 그나마 다음 총선까지 아직까지 3년은 남았으니 지금으로서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기화된 소수 정부의 한계, 자당의 부진으로 인해 축소된 당내 입지 등은 향후 3년이 라멜로프에게 큰 가시밭길임을 암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11월 1일 연방상원의장에 취임하였고, 2022년 10월 31일까지 직을 수행한 후 물러났다. 후임으로 사민당 소속인 페터 첸처(Peter Tschentscher) 함부르크주 총리가 선출되었다.


[1] 비례대표 1999-2004, 2014-2015/ 에어푸르트 1구 2004-2005/에어푸르트 3구 2009-2014, 2019- [2] Marburg라는 철자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마버그열의 기원이 되는 도시이다. [3] 여담으로 독일은 통일 후에도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가, 2011년이 돼서야 폐지했다. [4] 보통 내각제에는 제1야당 대표가 맡는 직책인 야당 대표(Leader of the Opposition)이 있기 마련인데, 독일은 이런 제도가 없다. 대신에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다. [5] 당장 2002년 총선에서 겨우 2석밖에 건지지 못 하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6] 독일에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에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지역구에서 당선되면 비례대표 순번에 있는 다른 후보가 대신 당선되고, 반대로 지역구에서 낙선하면 본인이 비례대표로 당선된다. [7] 당시 자민당이 원외로 쫓겨난 탓에 기민련이 유일한 원내 우파 정당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좌파였다. 문제는 독일 정계의 특성상, 원내 1당의 단독 과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이 때문에 범좌파 연정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좌파당을 혐오했던 사민당은 결국 기민련과 대연정을 택했다.그리고 몰락 크리 [8] 덕분에 주총선에서 의석을 까먹었고, 주총리 후보부터가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9] 이 반응은 기민련이나 대안당도 아닌, 연정 파트너 사민당에서 나온 것이다. 심지어 해당 발언을 한 의원은 동독 시절 SED 소속이었다. [10] 참고로 켐머리히는 몇 안 되는 자민당 소속 주총리였다. [11]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천운이 도운 게, 최소 지역구 3석을 건지면 봉쇄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조항 덕에 겨우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 있었다. [12] 3당의 의석을 합쳐도 과반에 미달해, 사민당과 녹색당은 자민당이나 기민련에 손을 뻗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최악의 경우, 튀링겐의 악몽이 부활할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