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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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1. 개요
桃豹(? ~ 340)
후조의 인물. 자는 안보(安步).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출신.
2. 생애
젊은 시절 대담한 성격에 용맹하고 기마술에 능해 고향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종종 소매를 걷어올리고 큰 소리로"대장부가 위(魏)나라의
태조를 섬겼으면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거나 상장군(上將軍)에 올라야지, 그러하지 못한 자는 장부라 할 수 없다!"
라 외치고 다녔다. 당시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웃으면 도표가 이들을 꾸짖으며 말했다."너희 같은 쥐새끼들이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君子豹變)'는 말의 의미를 어찌 알겠느냐."
이후
서진이 큰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영봉 2년(309년) 4월, 한(漢)의 안동대장군 석륵이 기주(冀州)를 침략해 군자영(君子營)을 세워 유능한 인재들을 모집하자, 도표도 석륵에게 귀순해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석륵은 도표를 별장(別將)에 임명하고, 기안(夔安), 공장(孔萇), 지웅(支雄), 녹명(逯明) 등과 함께 자신의 조아(爪牙)로 삼아 하북의 나머지 지역들을 병탄해나갔다.
가평 3년(313년) 4월, 업(鄴)의 3대(三臺) 유민들이 모두 업성을 들어 석륵에게 항복하였다. 석륵은 도표를 위군(魏郡)태수로 삼아 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몇 년 뒤에 석호를 보내 도표를 대신하여 업을 다스리게 하였다.
광초 2년(319년) 4월, 봉관(蓬關)에 주둔해있던 동진의 진류(陳留)태수 진천(陳川)이 항복해오자, 업의 석호는 진천의 무리 5,000호를 양국(襄國)으로 보내고 도표를 파견해 봉관을 지키게 하였다. 진천을 정벌하러 봉관으로 향하던 예주(豫州)자사 조적은 도표가 이미 봉관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듣고 다시 회남(淮南)으로 돌아갔다. 이후 도표는 석호의 명령에 따라 진천의 옛 성인 봉관의 천고성(川故城)을 점령해 지켰다.
광초 3년(320년) 6월, 조적이 장수 한잠(韓潜)을 파견해 천고성을 공격하였다. 도표는 서대(西臺)를 점거하고, 한잠은 동대(東臺)를 점거하면서 천고성을 나누어 대치하였는데, 도표는 남문, 한잠은 동문만 이용해 출입하며 40여 일간 서로 지키기만 하였다. 이에 대치 상태를 깨기 위해 직접 천고성으로 이동한 조적은 흙을 가득 채운 포대를 만든 뒤,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해 그것들을 대(臺) 위에 올려놓아 적들에게 마치 쌀포대를 쌓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 몇 명을 선발해 진짜 쌀포대를 짊어지고 이동하다가 도중에 길 위에서 쉬도록 지시하고, 만약 후조군이 오면 쌀을 그대로 버린 채 도망갈 것을 당부하였다. 이들을 습격해 버리고 간 포대의 내용물을 살펴본 도표의 병사들은 쌀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보고 조적의 무리가 풍족한 것에 놀라 사기가 크게 꺾였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당나귀 1,000마리로 보급을 담당하던 장수 유야당(劉夜黨)이 변수(汴水)에서 조적의 장수 한잠, 풍철(馮鐵)에게 습격당해 보급도 끊기고 마니, 도표의 병사들은 점점 굶주리기 시작하면서 무너져내렸다.
이대로 버텨봐야 동진군이 습격해오면 대패할 것이 뻔하다 판단한 도표는 하는 수 없이 천고성을 포기하고, 밤에 몰래 동연성(東燕城)으로 퇴각하였다. 도표가 물러난 것을 확인한 조적은 한잠을 봉구(封丘)에 주둔하게 하여 동연성을 압박하게 하고, 조적 본인은 옹구(雍丘)에 주둔하면서 여러 번 별동대를 파견해 후조군을 괴롭혔다. 이후 도표는 진무도독(鎮撫都督), 예주자사를 역임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1월, 전조의 황제 유요 낙양의 금용성을 포위하자, 석륵의 소집령에 따라 출병하여 형양(滎陽)에서 석륵과 합류하였고, 낙수(洛水) 근처에서 유요의 10만 대군과 싸워 전조군을 대파하였다.
건무 4년(338년) 정월, 연왕(燕王) 모용황이 도위 조반(趙槃)을 파견해 천왕 석호에게 단부를 토벌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천왕 석호는 날래고 용맹한 자 30,000여 명을 선발하여 모두 용등중랑(龍騰中郎)으로 삼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이를 눈치챈 단부의 수령 단요(段遼)는 양위장군 단굴운(段屈雲)을 보내 유주를 습격하고, 후조의 유주자사 이맹(李孟)을 격퇴시켜 역경(易京)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석호는 도표를 횡해장군, 왕화(王華)를 도요장군으로 임명해 수군 100,000명을 통솔하여 표유진(漂渝津)에서 출진하게 하였다. 이후 단부의 정벌은 전연군과 후조군의 협공으로 성공적으로 끝났고, 도표는 태보로 승진하였다.
건무 5년(339년) 12월 7일[1], 태보 도표가 세상을 떠났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340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