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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현종 재위기에 김훈, 최질 등의 고위급 무신들이 일으킨 반란. 1014년 음력 11월부터 1015년 음력 3월까지 약 4개월 간 지속된 반란이었다.[1]2. 전개
2.1. 배경
- 음력 1010년 11월 24일
- 음력 1010~1014년
- 이러한 전과들로 인하여 김훈과 최질은 상장군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누차 무관직에만 제수되고, 문관직은 얻지 못하자 항상 불만을 가졌다.[2][3][4]
- 하지만 거란과의 전쟁 결과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되는등 큰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후에 나라가 곤궁해지자, 중추원의 일직원 황보유의가 중추원사 장연우와 함께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5]을 거두어 백관의 녹봉( 전시과)에 충당하게 하니 무관들이 자못 불공평하다고 여겼다.[6][7]
- 결국 김훈과 최질, 그리고 박성(朴成)·이협(李恊)·이상(李翔)·이섬(李暹)·석방현(石邦賢)·최가정(崔可貞)·공문(恭文)·임맹(林猛) 등은 황보유의와 장연우 같은 문신들이 자신들의 땅을 빼앗은 일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2.2. 무신 정변
- 음력 1014년 11월 1일 (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사 열전 - 황보유의)
2.3. 거란의 침입
- 음력 1015년 1월 22일~23일 ( 고려사절요)
-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했고, 고려 장군 고적여, 조익 등이 물리쳤다.
- 곧이어 거란군이 통주에도 쳐들어왔다.
2.4. 정변 진압
- 음력 1015년 2월 무렵
- 음력 1015년 3월 14일 (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사 열전: 왕가도)
2.5. 진압 이후
- 음력 1015년 7월 13일 ( 고려사1, 고려사2)
- 현종이 무관들이 만든 관호(官號)를 없앴다.
- 하지만 동시에 공이 있는 군사 12,500명의 관급(官級)을 높여 포상했다.[25]
- 음력 1015년 11월 23일 ( 고려사, 고려사 열전: 장연우, 고려사절요)
- 호부상서 장연우가 죽자 현종이 상서우복야로 추증했다.
3. 평가
"영업전을 박탈당한 자들이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던 점을 볼 때, 영업전은 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경제 기반이었을 것이다. 영업전의 박탈이라고 표현했지만 토지 그 자체를 빼앗기보다는 영업전 소출을 녹봉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백관의 녹봉은 民田에서 거두는데, 경술년(1010, 현종 1)에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어 녹봉이 부족해졌으니 경군영업전으로 충당하자는 것이 황보유의의 의견이었다. 영업전이 民田과 동일한 국가수조지였다면 녹봉으로 사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영업전은 군인에게 복무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였다. 따라서 영업전을 녹봉의 재원으로 사용하게 되면 군인의 보수가 박탈당하게 되니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
그런데 경군영업전 문제는 거란의 침공이 계속되는 가운데 직접 전쟁을 담당하고 있는 군인층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군인들은 일반 관리의 녹봉분을 채우기 위하여 참전의 대가로 지급받고 있는 경제급부를 빼앗아가는 상황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그리고 난의 주동자들은 이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군인세력을 규합하고 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
『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
역사학자들이 논문을 통해 김훈·최질의 난이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분석한 점을 종합해 보면, 황보유의가 관료로서 실력이 좋지 않고 결국 김훈과 최질 등이 불만을 품을 만한 일이었기에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 중론이다.[27] 물론 해당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문관 겸직에 대한 욕망 또한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 외에 색다른 해석으로는 문무 차별보다 유교관인층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28] 하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무신들이 반란을 폭발시킨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 원인은 당시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에 있었다.
또한 무신들이 반란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데에는 영업전 박탈이라는 경제적 문제외에도 무신들에 대한 처우 문제까지 추가로 더 존재하고 있었다.
목종대 과거에 합격한 강민첨이 무반으로 출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무반의 지위가 현종 이전까지는 문반에 비해 크게 열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종대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신들은 전공을 세워도 더 이상 문반직에 임명되지 못했던 것이다. 왜 이처럼 무신들의 처우가 현종대 이후부터 크게 달라졌을까?현종의 옹립을 주도했으면서도 강조에게 한때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긴 최항과 채충순 등은 군사력을 보유한 무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군공을 세운 무신을 문반직에 임명하지 않은 것도 무신에 대한 이들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신들의 정치적 지위는 열악해질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무신들이 불만을 품으면서 무신란이 터진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29]
즉, 김훈과 최질 등의 고위 무관들이 난을 주동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이유에는 경제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문관직을 겸대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즉, 처우가 이전보다 더 열악해졌다는 문제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이계 관료들이 인사행정에 참여하면서 문무의 반별을 강화한 결과였다고 생각되는데, 이에 따라 무관들은 주요관직으로의 진출통로가 막혀 더 이상 중요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거란의 침공 당시 확실한 전공을 세웠던 김훈, 최질 등은 자신들이 정국의 주요 관료군에서 오히려 배제된 상황에 대해 더욱 반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대거란전에 직접 참전하였기 때문에 전공의 대가로 마땅히 정치적 성장이 뒤따를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즉, 이계 관료들은 전쟁을 통한 무신들의 성장에 상대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고, 그렇기 때문에 억무정책을 주도한 측면이 있었다. 당시 계속되는 전쟁상황으로 말미암아 군인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예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무신들의 반발에 속수무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억무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30]
즉, 반란이 일어나 직접적인 원인에는 영업전 박탈 문제 뿐만 아니라 군인들에 대한 대우 문제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31]
그렇게 정변 이후 몇 달 동안 이러한 상황을 묵묵히 지켜만 보던 현종은 전 화주방어사로서 임기를 마친 후 개경(開京)에 돌아와 칩거하고 있던 이자림[32]이 일직(日直) 김맹(金猛)을 찾아가 현 시국을 헤쳐 나갈 계책을 귀띔하였다는 소식을 보고받았다.
“주상께서 어찌해 한나라 고조(高租)가 운몽(雲夢)을 순유한다고 하고서 한신을 체포했던 일을 본받지 않는가?”
《高麗史 卷94, 列傳7, 王可道》
운몽지유(雲夢之遊).[33] 현종은 이 뜻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그 즉시 이자림을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으로 임명한 뒤 먼저 가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급히 지시하였다. 1015년 음력 3월,
서경 행차에 나선 현종이 드디어 뭇 신하들을
장락궁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다음 주모자인 김훈과 최질 등이 모두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반란에 가담했던 열아홉 명을 모조리 제거해 버림에 따라 모든 사태는 신속히 마무리 된다. 참고로 왕가도가 서경에서 정변의 주도자들을 한번에 모두 몰살한다라는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서경장서기로 복무할 때에 쌓은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서경에서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34]《高麗史 卷94, 列傳7, 王可道》
여기서 주도적으로 난을 진압한 왕가도와 김맹은 과거를 통해 입사해 각각 지방 관직과 근시직을 역임하며 과거출신 관료로서 전형적인 성장과정을 밟고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던 중 무신들이 이계 관료가 주도한 정책에 반발하며 난을 일으키자 자신들의 인적 기반을 동원해 반란세력을 진압하였던 것인데 이들 과거출신 관료들은 이계 관료들이 시행한 정책방향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었으며, 정통 문반관료로서 무신들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변의 진압에 앞장섰던 것이다. 더욱이 이는 자신들의 앞으로의 환로에 직접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상황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김훈․최질의 난은 범문반관료와 무신간의 대립 양상을 띠고 있었지만, 이계 관료들이 원인을 제공한 사건을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과거출신 관료가 진압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정국이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35]
사실상 군부 전체가 들고일어나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이렇게 간단히 그리고 깔끔하게 사태가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과거출신 관료들이 본인들의 인적 기반들을 총동원해 신속히 핵심 지도부들을 한번에 소탕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암살이라는 비합법적 수단에 속아 수뇌부가 단번에 몰살 당하면서 상황이 빠르게 종결된 것이다.
어쨌든 이런 큰 실책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뒷수습만큼은 잘 했다. 원래대로라면 반역죄는 삼족을 멸해도 모자란 대죄였지만 주살한 19명 이외에 그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을 하지 않았으며, 아들과 동복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이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일단락 지었다. 이는 군인들이 고려를 위해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해주고 무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하는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는 동시에, 무력으로 임금의 권위에 도전한 역적의 무리를 단호하게 처벌함으로써 앞으로 이와 같은 폐단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한바탕 소동을 수습한 뒤 필요한 선에서 관대한 처결을 단행한 현종은 이후 대거란 전쟁 전몰자에 대한 예우 조처를 높여주고 보상도 크게 늘렸으며, 군공자에 대해서는 병사들까지 10,000여 명씩 포상을 내렸다.
이처럼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볼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이었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무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문신들이 강탈하고 문신들이 무신들의 처우를 이전보다 더 열악하게 만들면서 발생한 사건이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현종의 전체 일대기 중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여겨지진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하여 군율을 제정하고 군의 기강을 일신하여 보다 강하게 군을 통솔하고자 했던 현종이 군부의 반발에 휘말려 또 한 차례의 위험천만한 위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한편, 김훈・최질의 난을 두고서 최근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이것이 현종이 저지른 최악의 실책이라고까지 알려지며 급속하게 확산되기도 하였으며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고찰들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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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리 나라가 어렵다지만 목숨을 바쳐 싸운 무관들의 재산만 빼앗은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
우선 영업전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영업전은 국가에서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 즉 세금을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수조권의 행사는 면조 (세금 면제) 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라면 무관도 고려의 백성인 이상 세금을 내야 했으나 직역의 대가로 수조권을 받아 그에 해당하는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큰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나라 안의 살림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토지들의 조사를 실시하여 면조를 해제한 것이 바로 영업전의 환수이다.[36] 개혁의 대상에는 영업전 뿐만 아니라 30결 이상의 양반전과 궁원전이 포함됐으며, 이로 보건대 재정의 부족분을 문무양반과 왕실이 모두 나누어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감찬 등으로 대표되는 문관들 역시 이 개혁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간과된 부분이 존재한다. 영업전의 박탈이라고 표현했지만 토지 그 자체를 빼앗기보다는 영업전의 소출을 문신들의 녹봉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백관의 녹봉은 民田에서 거두는데, 경술년(1010, 현종 1)에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어 녹봉이 부족해졌으니 경군의 영업전으로 충당하자는 것이 황보유의의 의견이었다. 영업전이 民田과 동일한 국가수조지였다면 녹봉으로 사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영업전은 군인에게 복무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였다. 따라서 영업전을 백관의 녹봉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게 되면 군인의 보수가 박탈당하게 되고 영업전이 군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임을 생각해보자면 이는 군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다.[37] 무엇보다 무신들을 제외한 문신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녹봉을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서 충당하였기 때문에 무신들과 문신들이 공평하게 고통을 분담한것도 아니었다.[38] 심지어 영업전의 박탈은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측면 또한 컸었는데 무기와 군량, 기타 군수품 등을 모두 영업전을 통해서 개인이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구조상 영업전의 박탈은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즉, 황보유의가 단행한 무신들의 영업전 박탈 조치는 오히려 군액 증가가 아닌 군액 축소 조치로 해석[39]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2) '영업전을 강탈해 가면 생계를 장담할 수 없는데 무관들은 전부 굶어 죽으라는 말이냐'라는 주장
영업전의 회수가 전쟁을 직접 수행하고 있는 군인층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무관들의 경제적 파산상태를 뜻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장이다. -고려전기의 무반과 군반 (The Military Nobility and Gunban(軍班) of the Early Goryeo Period)- 연구에 따르면, 고려 전기 사회에서 무반 (경군・내군) 은 양반 관료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정권의 존립을 보장하는 무력적 기반이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무반들에게 직역의 대가로 전시과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무반에게 지급된 전시과는 전체 토지의 83%에 달하였고, 또 무반에게 지급된 녹봉은 전체 녹봉의 80%에 달하였다. 개혁의 조치로 일부 영업전을 회수했다 하여 무관들이 생계유지 불능상태에 놓인다는 것도 난센스일뿐더러, 원래 경군영업전의 성격 자체가 오직 직역을 승계할 때만 상속이 가능했던 토지로서 직역자가 사망하면 상속분을 국가에서 환수 조치하여 직역을 승계한 아들에게 다시 분급해 주는 시스템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반들의 불만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영업전을 기타 토지와 더불어 개혁 대상에 포함시킨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제도가 기존에는 상당히 문란하게 운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가 입장에서는 추후 조처에 대한 마련과 별도로 당장 국난의 극복을 위해 특정 집단이 일종의 특혜처럼 영유했던 면세지를 정리하여 재정에 충당해야 할 당위가 있었다.
하지만 황보유의 등이 단행한 영업전의 박탈조치는 회수가 아닌 엄연한 녹봉 박탈이었다. 영업전(전시과)은 국가에서 관직과 직역에 복무하는 사람에게 그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토지를 매개로 한 관직과 직역의 수행이 지속되도록 운영하는 것이 특징으로 관직과 직역이 계속 수행되고 있고 또한 직역을 승계하였다면 영업전을 승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40] 하지만 황보유의 등은 직역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던 현직 무신들의 영업전(더 정확히는 영업전의 소출)을 아무 대책도 없이 모두 박탈하였다. 심지어 그렇게 박탈한 무신들의 영업전을 백관(문관)들의 녹봉으로 충당하는 짓을 저질렀다. 즉, 무신들의 영업전을 합당한 이유없이 자신(문관)들의 녹봉으로 빼앗아간 것이다.
또한 무신들에게 지급된 전시과와 녹봉이 과연 80% 이상에 달하는 만큼 과대하였는지도 논란이 크다.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고려시대 4만 5천 명에 달하는 중앙군의 군인전만해도 무려 90만 결이나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고려시대 전국의 농경지 총면적은 약 80만 결에 불과했으며[41] 또한 이런 기록들에 따르면 고려시대 군인들은 병종에 따라 20결∼25결을 차등있게 지급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만약 이 규정대로 군인들이 군인전을 지급받았다면 고려의 군인들은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군인전은 어느 경우에서나 적어도 20결 이상이었는데, 이 액수는 중앙의 하급 문무관료들의 전시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다액의 전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규정된 전결수를 그대로 지급할 경우, 고려의 경군 조직인 2군 6위의 45領을 기준으로, 그 전체 병력은 4만 5천 명이 되므로, 군인에게만 100만 결 정도의 토지가 지급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고려 초기 전국의 총 전결수와 비등한 면적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막대한 양의 토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전시과의 군인전 지급 규정에 의문을 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인전 지급 규정 자체는 인정하지만 국가가 군인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규정상의 액수는 급전액(給田額)의 상한선을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규정은 있으되 실시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군인들은 규정액에 훨씬 미달되는 전토만을 보유하여 빈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42]
(3) '어찌 됐든 무관들의 불만을 다스리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으니 현종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하여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대하려는 욕구의 실현을 위해 이계 관료들과 정치경제적 지분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으로 이해하고 있다.[43] 그러나 현종을 옹립하고, 호종하고, 혁신을 이끌어 나가던 이계 관료들의 입장에서 무관들의 문관 겸대를 허용하게 될 경우,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절대적으로 위축될뿐더러 그간 착수해오던 개혁 작업 역시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무관 세력의 성장은 곧 진급 상의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현종 대의 여러 업적은 바로 이계 관료가 주축이 되는 근왕적 관료정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계 관료 대부분은 토착 기반이 비교적 미약하고 중앙 관직을 통해 진출하였으므로 관직 복무에 따른 경제 급부인 녹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문무관의 겸대 차단이나 녹봉 확보의 문제는 이계 관료들에게 있어 보다 절실한 현실적 문제였으며, 나아가 관료제 국가에서 백관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곧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위태로운 실태에 우선하여 현종은 그 자신이 강조의 군사 쿠데타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운 군인에 대해 관직을 매개 삼아 충분한 보상을 하였다. 당장 최질만 하더라도 전장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단 몇 년 사이에 중랑장에서 상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김훈의 경우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하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하여 단순히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대하려는 욕구의 실현이라고만 보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분명히 영업전 박탈이라는 경제적 요인 또한 정변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중 하나였음을 지적[44]하고 있으며 당시 무관들의 문관직 겸대 요구 또한 막상 현종 이전까지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임하던게 관행[45]이었으며 오히려 이계 관료들이 무신들을 정책적으로 강하게 견제(억무정책)하면서 무신들의 처우가 그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열악해진것이 정변의 주요 발생 이유라고 지적[46]하고 있다. 즉, 반란이 일어나 직접적인 원인은 전체적으로 봤을때 군인들에 대한 대우 문제였다라는 것이다.[47]
애초에 관료제 국가에서 백관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다는 것이 곧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라면 역으로 언제 거란이 다시 침공해올지 모르는 전시상황에서 군인들에게 줄 녹봉(영업전)을 모두 빼앗아간것 또한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계(吏系) 관료들인 장연우와 황보유의 그리고 고위직 무신들인 김훈과 최질은 모두 현종이 직접 임명하고 중용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들끼리 서로 무력으로 충돌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었다는것은 현종이 그들을 임명하고 중용한 최고국정운영자인 이상 현종에게 분명 책임이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그 당시 최고임명권자인 현종은 훗날의 고려의 고종처럼 아무런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나 꼭두각시 군주가 아니었으므로 그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는 주장은 오히려 여러 측면에서 봤을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에서 현종의 책임이 아예 전무하다라는 주장은 그 당시의 실체적 사실 관계와는 다소 동떨어진 주관적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어쨌든 반란이 일어난것에 대한 최고인사권자인 현종의 실책은 분명 존재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사료와 논문을 토대로 자세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리 건성건성 간단하게 묻고 갈 만한 사안이 결코 아님을 또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현종이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했다는 측면에서 군사정변에 관련해서 그의 사후대처 능력이 훗날 군사정변을 당한 다른 군주들보다는 분명히 뛰어났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김훈·최질의 난을 두고 '김훈과 최질이 떼를 썼으며, 떼를 과하게 쓰다가 결국 자신들의 몸을 망치게 된 것이다'라고 코멘트 하였다. #
4. 여담
- 현종이 난을 진압한 직후인 1015년 3월 19일 같은 날에 거란은 용주를, 여진족은 구두포를 양면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현종은 이들을 다 물리쳤고, 이 직후 4월 11일에 거란에서 찾아와 강동 6주를 내놓으라는 사신 야율행평을 억류까지 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48]
- 약 150년 가량 지나 위와 같은 교훈들을 잊어서 터진 것이 고려 의종 시절 일어난 무신정변과 무신정권이다. 다만, 무신정변은 하급 장교들이 상급 무신들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일으켰다면, 강조의 정변과 김훈· 최질의 난은 고위급 군인들의 주도로 벌어진 반란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존재한다. 강조는 서북면 지방군을, 김훈-최질은 중앙군 중 6위의 군을, 무신정변은 중앙군 중 2군의 군을 이용한 점도 차이점이다. 요약하자면 강조는 약 1년 9개월, 김훈과 최질은 약 4개월 간 무신정권을 세운 셈이었다.
- 이후 조선 왕조는 전조(고려)의 이런 교훈들을 되새기는 조치들을 펼쳤으나[49], 말기에 결국 교훈을 잊고 임오군란을 초래하고 말았다.[50]
5. 대중매체
- 2023 ~ 2024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16회부터 조짐을 보였으며, 25회부터 난이 제대로 일어나 29회 초반에 마무리되었다. 군사의 수가 많이 표현된 것이 유일한 장점이지만,[52] 각본가의 전작[53]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역사왜곡과 오리지널 등장인물의 지나친 푸시 등으로 '박진과 최질의 난'이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원 역사와는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 애초에 이 난은 상술했듯 고려라는 나라의 근본적인 한계와 자신(무신)들에 대한 지나친 홀대에 의해 촉발된, 상술한대로 고려의 구조상 언젠가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이었고 본 드라마에서도 김훈과 최질 두 명은 초반부터 문신들에게 차별받으면서 이에 대해 불만을 품는 모습을 드러내는 등 본 역사대로 난을 일으킬만한 개연성이 충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17회 이후 들어 박진이 개경으로 상경하여 김훈과 최질을 충동질해 난을 촉발시킨듯 묘사되었으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 주요 주동자중 한 명이던 김훈이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고 최질과 박진 위주로 비중을 잡아주는 등 새 등장인물을 챙겨준다고 정작 주동자가 홀대받는 어이없는 상황이 일어났다.[54] 안 그래도 본 드라마가 17회부터 각본가와 원작가에 대한 논란이나 역사왜곡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현종을 두고 김씨 부인[55]과 질투를 벌이고 있는 원정황후를 이 반란에 엮으면서 망쳐도 너무 망친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벌인 행패를 과장을 넘어서 악의적으로 묘사했는데 역사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무신들이 정부의 재정 출납을 고의적으로 개판으로 만들거나 대낮에 궁녀들을 희롱하는 장면까지 넣어서 각본가가 노골적으로 무신(군인)들을 비하하기까지 하였다.[56][57]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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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건은, 현종의 재위기에 일어난 최악의 실책으로 거론되며 대략
이의방,
정중부가 주도한 경인년에 벌어진
무신정변보다 약 150년 정도 먼저 일어나서 고려 역사상 최초의
무신정권이 세워진 사건이기도 하다. 비록 어이없게 무너지기는 했지만 김훈과 최질은 약 4개월 동안 정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어쨌든 최초의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들로 볼 수 있겠다.
[2]
고려는 무관들이 조선처럼 종2품 이상으로 승품하는게 불가능했던 탓에 더 높게 승품을 하려면은 필수적으로 문관에 임관돼야만 했다. 고려는 무과가 없었던 국가로 무반들은 가문대대로 승계되어 오든가,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그냥 뽑아서 임명하였다.
[3]
참고로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종2품 이상으로 승품이 가능하여, 조선 역사상 극히 드물기는 했지만
조영무나
최윤덕 같은 무관 출신 정승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당장
이순신도 정3품~종2품 품계의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더 상계 품위인 정2품 상계 정헌대부에서 역임했었다. 다만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운 것이 조선의 재상들은 크게봐서 정1~정2품직인 것과는 달리 고려의 재상들 중 가장 높은 문하시중이 종1품이고, 그외에 대체적으로 재상들은 정2~종2품직이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정1품 삼정승과 종1품 좌/우찬성이 재상이지만, 각 행정업무를 분할해서 담당하는 판서직과 몇몇 중요직들도 재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4]
대신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문관 못잖게 학문을 닦았다. 사실상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선비들 중 무술에 능한 이들이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했다고 보면 될 듯. 당연히
이순신도 문무에 모두 능했는데 이는
난중일기를 봐도 알 수 있다.
[5]
여담으로 똑같은 한자어가 조선 후기 쓰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토지개혁책으로 한전론을 주장했는데, 한전론이란 매매가 불가능한 토지인 영업전을 두어 토지 소유자들이 생계에 지장이 없게 하고, 나머지 토지들은 매매를 허용해 토지들이 매매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토지분배가 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6]
다만 원문을 어찌 해석하냐에 따라 1010년부터 시작한 군비 증강으로 인한 녹봉 문제가 난이 일어난 1014년에서야 큰 문제로 터져서 장연우와 황보유의 등이 그 해에 주장했을 가능성, 즉 수년간에 걸친 일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특히 관련 기록에도 언급되었듯 이미 무관의 관직 상승 제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최질 등의 무신들이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해도 문신들이 수년간 저런 행위를 하는 것을 해당 주장이 나온 첫 해에 항의했으면 모를까 묵과할 리 없었을 것이란 점도 있다.
[7]
즉,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당시 백관들에게 줄 녹봉이 부족하다라는 이유로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모두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큰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손가락만 빨게된 셈이 되었다.
[8]
고려군의 중앙군은 당시 6위였다. 김훈·최질의 난이 진압된 후 2군이 추가되어 2군 6위가 되었다. 즉, 왕실 직속의 임금의 호위를 담당하던 친위군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셈이라 현종이 도저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9]
이로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강조의 정변의 시퀄이자,
무신정권의 프리퀄이 4개월간 이어졌다.
[10]
고려사/고려사절요는 '
겉과 속이 다른', '
문외한', '정사가 어지러워져' 등으로 무신들을 비난한다.
[11]
실제로 민심이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12]
또한 개경 인근 여러 사찰들은 고려왕실의 보호를 받던 특별집단으로 후대의 무인정권시절에도 왕실을 위협하던 무인정권을 상대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13]
이 시기에 이뤄진 사면은 반란 세력이 민심을 얻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기에 억지를 부린 부분은 꽤 있으나 한편으로는 무관이 문관직을 겸하는 것에 대하여 문관들에게도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무관들에게는 일부를 승급시킨 것 외에 은전을 지급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윤훈표 (2021) 『고려 목종·현종대 실시된 사면과 은전의 내용 분석과 그 특징』)
[14]
당연히 장연우-황보유의는 제외.
[15]
거란 성종이
강조의 정변 때처럼, 고려의 혼란을 놓치지 않고 침략한 것이다.
[16]
앞서 1014년 6월, 요 성종이 "압록강에 부교를 놓고, 보주(保州)·선의주(宣義州)·정원주(定遠州)에 전진기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요사
# - 요사의 날짜는 실제와 1년까지 다를 수 있다.
[17]
훗날 '왕가도(王可道)'로 개명했다. 해당 인물 문서 참고.
[18]
한 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운몽의 연회'라는 고사를 가리킨다.
[19]
이자림이 일찍이 서경에 인심이 있으므로, 제수에 무관들이 의심을 갖지 않았다. 현종은 계책을 제시한 이자림 스스로에게 먼저 가서 암살의 준비를 갖추게 한 것이다.
[20]
이자림의 연회 준비가 마쳐진 것이다. 1월 말부터 거란이 압록강 남단에 전진기지까지 짓고 상시 대치하기 시작했으므로, 현종이 김훈-최질에게 '고려 측도 서경까지 가서 전방을 예의주시하자' 라고 제안하는 것은 특별히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21]
이로서 4개월 간의 무신 정권이 끝났다.
[22]
최구는 김훈-최질이 현종의 감시역으로 붙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사절요는 '성품이 거칠고 비루한 인물'이라고 기록한다.
[23]
뒷수습을 나름 잘 한 것이다. 군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그들이 높인 대우는 유지하되, 무력으로 왕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처벌해 폐단을 막은 것이다. 앞서
목종이 결국 시해당한
강조의 정변을 직접 체험한 현종으로서는 관대한 처벌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24]
난의 최대 피해자인 그에게 재정을 관할하는 역할을 맡겼다. 일종의 '피해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25]
무관들이 만든 관호를 없애는 날에 동시에 무관들의 관급을 높여 다독인 것이다. 이후 1016년 1월에도 군인 및 전사자에 대한 포상이 있으나, 이는 이어진 제3차 여요전쟁의 국지전들의 포상 성격이었다.
[26]
국왕에게 정사에 대해 간쟁하는 임무의
중서문하성 산하의 종4품 관직이다.
[27]
박종기 (1998)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김보광 (2014) 『고려 성종·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
[28]
김두향 (2005)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박재우 (1997) 『11세기 권력구조와 정치운영』
[29]
고려 顯宗代 과거 출신 관리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 김당택, 역사학보, 231 - 248 (18page)
[30]
『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
[31]
고려 성종 · 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김보광, 사학연구, 43 - 81 (39page)
[32]
이 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그는 말단 관리부터 시작하여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의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자림은
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왜 이름이 이씨인데 왕무숭의 아버지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자림의 본명은 이가도(李可道)로 청주 이씨지만, 현종 치세에 개경의 나성 축조를 총괄하여 마무리한 공로로 출세가도를 밟게 되면서 사성정책으로 국성을 하사받아 이가도에서 왕가도(王可道)가 되었다. 왕가도는 성종 시기에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로 문관이 되었으며 성종, 목종, 현종, 덕종 4대 임금을 섬겼고 현종 치세에 큰 활약을 하여 현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또한, 왕가도의 장녀 원질귀비는 현종의 후궁, 차녀 경목현비는 덕종의 제2비라 현종과 덕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33]
한(漢) 고조(高祖)가 항우를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달성하도록 공헌하였던 한신(韓信)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자, 그를 운몽 지방으로 꾀어내 죽이게 한 고사로서 "운몽의 연회"라고도 함.
[34]
『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
[35]
『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
[36]
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
[37]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
[38]
군인들은 일반 관리의 녹봉분을 채우기 위하여 참전의 대가로 지급받고 있는 경제급부를 빼앗아가는 상황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그리고 난의 주동자들은 이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군인세력을 규합하고 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
[39]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박종기, 역사와현실 제30권, 148 - 172 (25page)
[40]
고려 전시과의 성격 ―분급토지와 분급대상을 중심으로― , 오치훈, 역사와 담론, 5 - 33 (29page)
[41]
신편 한국사 고려 시대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Ⅲ. 군사조직 1. 경군 3)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관한 제설 (2) 군반씨족제설
[42]
신편 한국사 고려 시대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Ⅰ. 전시과 체제 4. 사전의 여러 유형 6) 군인전
[43]
오영선, 김당택, 김두향, 김보광 등
[44]
김두향, 오치훈, 박종기 등
[45]
김두향, 김당택 등
[46]
김당택, 김두향 등
[47]
고려 성종 · 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김보광, 사학연구, 43 - 81 (39page)
[48]
고려가 내부도 혼란스럽고 양면전선까지 열리니
강동 6주를 이번만큼은 내놓을 것이리라
생각하고 온 것으로 보이나, 현종이 내부도 진압하고 외적도 다 물리친 상황이라 자신있게 무례한 사신 따위는 인질로 삼은 것이다.
[49]
조선왕조는 고려와는 달리 승과를 폐지시킨 대신 무과를 지속적으로 문과 못지 않게 실시했으며, 무관들의 품계도 올려주는 등, 군인들의 대우는 대체로 고려왕조보다는 훨씬 나았다. 애초부터 태조 이성계가 백전노장의 무관 출신이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예를 들어
이순신은 생전 자신의 직위인
삼도수군통제사(정3품 ~ 종2품)를 더 높은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품계를 가지고 수행했으며, 전사 이후에는 정1품 상계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50]
중앙 정규군한테 1년이 넘도록
군량미를 지급하지도 않고, 그 후에는 모래와 겨를 섞는
군납비리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해당 사태 책임자였던
민겸호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지 않고 조사관으로 임명해서 피해자들이었던 군인들을 탄압하는 역대급 막장짓을 선보였다.
[51]
78회 최종회가 1011년
제2차 여요전쟁의 최후인 '애전 전투'부터 시작해 전후 처리를 거쳐 1018~1019년
제3차 여요전쟁(
귀주대첩)을 후반 5분 정도로 정리하고
추석연휴 이전에 드라마를 급하게 마무리되면서 이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을 모두 통편집한 것이다. 그 전의 속도로 이 시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족히 20회는 더 필요했을 것이다.
[52]
이는 오히려 예산 분배가 엉망인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이로 인해 본작의 귀주 대첩 묘사는 천추태후의 귀주 대첩보다 더 형편 없게 묘사된 것과는 정반대다.
[53]
임오군란은 엄연히 여흥 민씨 세도가의
별기군 편애와 황후의 외척인
민겸호가
군납비리를 저질러 이에 대한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벌인 난이었으나, 이정우 각본가는 자신이 각본을 담당한 조선 총잡이에서 이 사건을 안동 김씨들이 군인들을 선동시켜 원래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난을 일으킨 것처럼 왜곡시켰다.
[54]
심지어 박진은 충주의 호장 출신에 당시 벼슬도 겨우 종7품 장작주부로 상장군까지 찍는 등 무관으로선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 김훈과 최질이 만나줄 만한 건덕지도 없는 인물이었다.
[55]
후에
원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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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실제 역사상 권세를 탐했던 김훈과 최질 등으로 인해 조정이 혼란스러워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1014년 12월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의외로 원활하게 돌아간 부분도 있었다. 게다가 기록상 김훈과 최질 등이 직접 요구한 것은 어사대 혁파와 무관이 문관직을 겸하게 해달라는 것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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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역사왜곡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엄연히 실존인물이 있는데 이렇듯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고 심지어 당시 무장들을 겁탈자처럼 심각한 가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각색의 범주를 심히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실존 군인들을 철저히 비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