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1:42:18

곽문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郭文
생몰연도 불명

서진 동진 시기의 은사. 자는 문거(文舉). 사례 하내군(河內郡) 지현(軹縣) 출신.

2. 생애

곽문은 산과 물을 좋아하여 일찍이 항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연 풍경을 즐겼다. 그렇게 30세가 될 때까지 산림을 유람하였고, 한번 나갔다 하면 열흘 넘게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부모가 사망하자 곽문은 양친상을 모두 마친 뒤에 결혼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나 화음(華陰)의 언덕을 오르거나 유적지를 관람하는 등 이전보다 더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녔다.

영가 5년(311년) 6월, 낙양성이 함락당하자 곽문은 오흥군(吳興郡) 여항(餘杭)으로 가,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거적데기를 덮어서 천장으로 삼았고 주변에 벽 따위는 세우지 않았다. 이따금 맹수가 침입해 공격하기도 하였지만, 곽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홀로 10여 년을 살면서 해코지 당하지 않고 무사하였다. 그는 항상 사슴 가죽으로 만든 두건을 썼고,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콩과 보리를 파종하여 농사하거나 나무 열매를 따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 대나무를 이용해 죽염을 만듦으로써 소금을 직접 생산하였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곽문을 찾아와 헐값에 그가 생산한 물품을 사가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그가 곽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헐값에 사가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곽문은 기근이 들면 자신이 모은 곡식을 뿌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사한 마음에 무언가를 선물하면 설령 그것이 조잡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 그 호의를 존중하였다. 한번은 맹수가 큰 사슴을 물어 죽이고, 그 시체를 곽문의 거처 주변에 내팽개쳐 둔 일이 있었다. 곽문은 이를 즉시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시장에 가져다 판 뒤, 그 대금을 곽문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곽문이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이것을 원했다면 내 스스로 죽은 사슴을 가져다 팔았을 것이오. 그럼에도 내가 그대들에게 말한 까닭은 돈이 필요없기 때문이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또, 시간이 늦어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 사냥꾼들이 때때로 곽문의 거처에 들러서 머물다 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면 곽문은 밤 늦게 방문한 사냥꾼을 위해 물을 떠다 주는 수고를 하였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항현령이 고양(顧颺)과 갈홍에게 곽문을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고양은 곽문을 꾀어내고자 가죽옷 한 벌을 선물했는데, 그 의도를 눈치챈 곽문은 받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고양은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파견해 가죽옷을 곽문의 거처에 두게 하였으나 곽문이 끝까지 받지 않고 가죽옷이 썩어버릴 때까지 방치해두었다.

사도 왕도가 곽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 영접하게 하였다. 곽문은 짐을 싸고 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으나, 막상 왕도가 준비한 마차나 배에 타길 거부하고 걸어가길 고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곽문이 수도에 도착하니, 왕도는 곽문을 서원(西園)에 거주하게 하였다. 서원에는 과실나무들이 숲을 이룰 정도로 많았고, 새, 고라니, 사슴 등이 어우러져 뛰놀 정도로 넓었기에, 대충 곽문이 살던 숲이랑 비슷한 환경일 거라 생각한 왕도의 배려였다. 조정의 관료들은 은사 곽문이 산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구경하러 왔지만, 곽문은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있을 뿐이었다. 이때 온교가 먼저 나서서 곽문에게 말을 걸었다.
"인간에게는 모두 가족이 있어 서로를 즐겁게 하는데, 선생께서는 어째서 그것들을 버리고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곽문이 답했다.
"본래 도(道)를 공부한 뒤에 행하려 하였는데, 뜻밖에 난세를 만나 돌아가고자 해도 길이 없으니, 지금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교가 다시 물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듯이, 장성하면 결혼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일진대,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욕정 없이 홀로 안락하게 사실 수 있는 것입니까? "
곽문이 답했다.
"욕정이란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나타나는 법이니, 생각하지 않으면 욕정이 생길 일도 없습니다."
온교가 또 물었다.
"선생께서는 홀로 깊은 산 속에 살았는데, 만약 질병에 걸려 죽게 된다면 까마귀에게 그 시체가 뜯기는 것이 너무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곽문이 답했다.
"땅바닥에 묻혀도 어차피 땅강아지와 개미가 시체를 파먹을 텐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온교가 다시 물었다.
"맹수는 사람들을 해치기에 본디 사람이라면 이를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선생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곽문이 답했다.
"사람에게 맹수를 해칠 마음이 없다면 맹수 역시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온교가 또 물었다.
"세상이 불안하면 몸도 편치 않는 법입니다. 지금 장차 선생의 힘을 빌려 시대를 안정시키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곽문이 답했다.
"산 속에만 살던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안정시키는 데에 보필할 수 있겠는가!"
온교와의 문답이 끝난 뒤, 왕도는 곽문과 방문객들을 불러모으고, 악공들에게 거문고와 피리를 연주하게 하였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곽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림을 걸아다니듯이 화당(華堂)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방문객들은 종종 곽문에게 심오한 도리에 관한 복잡한 말들을 하였으나, 곽문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 하였다. 온교는 곽문에 대해
"곽문에게 현인의 성품이 있으나 현인의 재주는 없어, 유하혜(柳下惠), 양기(梁踦)에 버금간다 할 수 있다!"
라 평하였다.

영창 연간(322년 ~ 323년)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자, 곽문 또한 병에 걸렸다. 그 소식을 듣고 왕도가 약을 보내주니, 곽문이 사양하며 말했다.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지 약에는 없습니다. 수명의 길고 짧음은 그때의 운수에 맡겨야 합니다."

곽문은 왕도의 서원에 머물면서 7년 동안 단 한번도 외출한 적이 없었다. 단지 원래 살던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청할 뿐이었으나, 왕도는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곽문은 탈출하여 임안(臨安)의 산 속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임안현령 만총(萬寵)은 그를 영접하고 기꺼이 받아주었다. 오래지 않아 소준의 난이 일어나 여항현이 초토화되자, 사람들은 곽문이 여항으로 안 돌아가고 임안에 자리잡은 안목에 놀라워했다고 한다.

병이 점점 심해지자, 본래 살던 여항의 산골짜기에서 생을 마치고 싶었던 곽문은 만총에게 여항으로 돌아가길 청하였다. 곽문은 항의의 뜻으로 20여 일 단식하였는데, 전혀 여위지 않는 것을 보고 만총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앞으로 며칠 더 살 수 있겠습니까?"
곽문은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피고, 올렸다 내렸다를 3차례 반복하였다. 과연 그로부터 15일 뒤에 곽문이 세상을 떠났다. 만총은 곽문이 살던 곳에 그 시신을 안장하고는 제사를 올리며 곡하였다. 갈홍, 유천은 함께 곽문의 전(傳)을 집필하여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