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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 | 마누엘 케손 | 호세 라우렐 | 세르히오 오스메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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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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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f89><colcolor=#f6d251> | |||
KG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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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3월 9일 | ||
필리핀 도독령 타누안 (現 필리핀 바탕가스주 타누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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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9년 11월 6일 (향년 68세) | ||
필리핀 마닐라 | |||
재임기간 | 제3대 대통령 | ||
1943년 10월 14일 ~ 1945년 8월 1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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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f89><colcolor=#f6d251> 가족 |
배우자: 파센시아 라우렐(1911~1959) 슬하: 6남 3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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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산토 토마스 대학교 필리핀 법학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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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63cm | ||
종교 | 가톨릭 | ||
정당 |
칼리바피 -> [[국민당(필리핀)| 국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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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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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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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의 3대 대통령이다. 그의 행보를 요약하자면 필리핀의 필리프 페탱.2. 생애
유복한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정부에서 공직을 지냈다.1919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0년에는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옥스퍼드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국제법 특강을 수강한 뒤 1921년 귀국한다.
라우렐은 학생일 때부터 필리핀 산림청에서 일하며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그 다음 필리핀 법 성문화 위원회 법률 서기로 일했다. 서기로 일하는 동안 뒷날 필리핀의 대법원장이 되는 토머스 스트리트를 소개받기도 했다.
그 뒤 내무부 차관을 거쳐 장관으로 임명된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당시 필리핀 총독과 충돌했고, 1년만에 사임했다.
이후 상원의원과 대법관 등을 역임했다.
3.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1941년 일본 제국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뒤이어 1942년 필리핀에 군정을 실시했다.이때 라우렐은 일본에 협력하며 필리핀 행정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도조 히데키가 제안한 독립 방향을 따라 헌법 초안을 작성했고, 1943년 일본의 입김이 들어간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약 4개월 전, 총 4발을 맞았지만 심장과 간 같은 핵심 장기는 비껴나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도쿄로 가서 대동아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라우렐의 제2공화국은 많은 필리핀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필리핀인들은 오히려 마누엘 케손의 필리핀 자치령 정부를 지지하고 미국에 협력하여 일본에 저항했다. 한편 1944년 필리핀 2공 정부는 미국,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계엄을 선포했다.
4. 패전과 전범
일본은 미국에게 밀려나고 있었고, 미군의 더글러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전을 벌이며 진격해왔다. 결국 3월 말 라우렐은 야마시타 토모유키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만을 거쳐 일본 나라현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결국 8월 15일 일본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이틀 후 필리핀 제2공화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해산한다.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라우렐 역시 전범으로 분류되어 요코하마 감옥에서 2개월, 스가모 형무소에서 10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다.
1946년 7월 귀국하여 친일 행위로 인해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1948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에 의해 사면을 받는다.
5. 이후
1951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3년에는 라몬 막사이사이를 대통령에 세우는데 공헌하였다.1957년 정계에서 은퇴했고, 2년 뒤인 1959년 심장마비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6. 여담
- 10대 시절 여자 한 명을 두고 삼각 관계에 놓여 있던 라이벌을 칼로 죽여버릴 뻔하여 살인미수로 기소된 적이 있다. 그러나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동안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 재임기간이 마누엘 케손과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겹친다. 다만 두 사람은 미국의 속령 정부였던 필리핀 자치령의 대통령이었다. 이후 필리핀 정부가 일본의 괴뢰국이던 필리핀 제2공화국 정부도 인정했기 때문에 라우렐 역시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인정된 것이다.
7.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5 | 필리핀 상원의원 선거 | 필리핀 제5선거구 |
[[국민당(필리핀)| 국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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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선 (1위) | 초선 |
1943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필리핀 | 칼리바피 | 108 (100.00%)[2] | ||
1949 | 필리핀 대통령 선거 |
[[국민당(필리핀)| 국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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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320 (37.22%) | 낙선 (2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