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2 09:15:15

요안니스 두카스

Ἰωάννης Δούκας

두카스 성씨를 가진 인물들은 요안니스라는 이름을 가진 경우가 왠지 많다. 그래서인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처럼 동명이인이 매우 많아졌다(...).

1.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2.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차남3. 알렉시오스 1세의 외손자4. 요안니스 3세

1.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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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88)

카이사르 칭호를 하사받아 형을 치세 내내 충실히 보좌하였다. 형이 죽고 조카인 미하일 7세가 제위에 오르자 사실상 두카스 왕조의 실권자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후의 군인 황제들인 로마노스 4세, 니키포로스 3세 모두가 요안니스와 어떤 형태로든 대립했다. 심지어 그가 옹립한 황제이자 손녀사위인 알렉시오스 1세와도(...).

형수인 에브도키아가 국난 타개를 위해 로마노스 디오예니스를 끌어들이자 조카 미하일을 보호하기 위해 황제와 꽤 많은 각을 세웠고,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주요한 지휘관으로서 만지케르트 전투에 참전했기에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안드로니코스가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전투 도중에 군대를 물린 것인지, 아니면 전열이 무너지자 패배했다고 판단하고 휘하의 병력을 보전하려 퇴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로마노스 4세가 대패하고 이후 미하일 7세가 정계의 전면으로 나서게 되기까지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는 근왕파로서 활동했으며, 이 때 원로원 의장인 미하일 프셀로스와의 친분은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조카가 선임황제로 나선 이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한 은퇴생활을 하는 듯 했으나, 동부 전선의 전황이 나쁘게 굴러가 루셀 드 바이욀이 프랑크 용병대를 이끌고 제국군에서 이탈하면서 제국군 총사령관인 아들 안드로니코스와 함께 얼마 안되는 동부 중앙군을 이끌고 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좀포스(Zompos)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요안니스는 아들 안드로니코스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고, 사령부가 있던 도릴레온도 유린당하면서 동부 중앙군은 완전히 붕괴했다. 여기서 요안니스는 루셀에 의해 황제로 선포당하게(!) 되었는데, 루셀은 이후 제국 정부가 끌어들인 튀르크인들에 의해 격파되지만 요안니스는 조카의 정부로부터 완전히 신임을 잃게 된다.

결국 미하일 7세 정권이 연이은 정책실패로 지지를 잃고 대세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에게로 기울자 조카와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미하일 7세에게 수도원으로 은퇴하라고 조언했으며, 두카스 가문의 영향력을 줄이려 노력하는 형수 에브도키아와 니키포로스 3세와의 결혼을 저지하고 조카의 황후였던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니키포로스 3세의 재혼을 주도했다. 정계는 물론 종교계에도 적잖은 영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손녀사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형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자 여기에 참여하여 병력조달과 자금조달에 기여했으며, 형제 중 손녀사위인 알렉시오스가 황제로 선택되는데 영향력을 미쳤음은 물론 수도 성벽을 돌파하기 위한 계략까지 짜냈다. 성벽을 돌파하여 쿠데타 성공이 거의 확실히 된 이후엔 야망과 가문의 영향력을 위해 갈팡질팡 흔들리는 콤니노스 형제에게 조언하고 다그쳐가며[1] 두카스 가문의 영향력을 최대한 지키려 노력했다.

손녀인 이리니 두케나가 알렉시오스 1세와 결혼하여 이후 황제들의 중시조가 되었고, 알렉시오스의 동서- 즉, 황후의 자매와 결혼한-인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주요한 시조인 것을 생각하면, 형 콘스탄티노스 10세보다도 승리자 일지도?

2.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차남

(1064 - ~1136)

1의 인물의 손자. 1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와 불가리아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다. 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가 1077년에 죽자,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랐다. 초년기에 대한 이야기로 루셀에게 조부와 부친이 포로로 잡혔을 때 부상당한 부친 대신에 포로로 잡혀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보다 더 인상적이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으로 1081년에 등장한다. 그렇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쿠데타 당시의 이야기 인데, 행동을 개시한 콤니노스 형제가 요안니스 부제를 쿠데타에 참여시키기 위해 서신을 전할 때 조부에게 직접 소식을 전하는 손자로 그가 알렉시아스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1의 요안니스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말도 안 된다며 손자인 2의 요안니스의 뺨을 때리는데(...), 곧 사실임을 깨닫고 고뇌하다 쿠데타군에 참여하러 떠난다. 1의 요안니스가 노련한 정치가임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랬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꽤 불쌍하고도 미묘한 취급의 조연으로 등장한 셈.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등극한 이후 황실에서 두카스 가문의 영향력을 줄이려 노력한 편임에도 황제의 처남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신임받아 제국이 노르만족으로 부터 디라히온 일대를 탈환한 이후(1085), 디라히온의 둑스(Doux)로 임명받았다. 그는 침공을 당해 민심이 불안정했을 디라히온 지역을 훌륭히 1092년까지 지켜내었으며, 두클랴(Duklja)와 라쉬카(Raška)에서 세르비아인들을 격퇴함은 물론 안나 콤니니에 의하면 세르비아인들의 왕 콘스탄틴 보딘을 사로잡기까지 했다고 한다. 20대의 청년임에도 고위 지방관과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수도로 귀환한 1092년, 그는 매형인 황제로부터 메가스 둑스(Megas Doux: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이후 그는 스미르니를 차지하고 히오스 섬까지 점거했던 튀르크인 에미르 차카를 공격하여 히오스에서 쫒아냈으며, 1092년 말과 1093년까지는 크레타 키프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1차 십자군의 조력으로 니케아를 수복하여 아나톨리아 수복을 위한 교두보가 마련되자, 요안니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수복을 위한 사령관으로 임명받는다. 스미르니에 있던 차카의 잔당을 쫒아내고 사르디스(Sardeis)와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등 사모스와 트라키시온의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수복하여 서부 아나톨리아의 넓은 요지를 제국으로 되찾아오는데 성공한다.

여기까지의 기록으로만 보면 황제의 인척이자 구황실의 귀공자가 젊은 나이에 능력을 입증해 앞으로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릴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기록이 뚝 끊긴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은퇴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알렉시아스에서의 취급이 불쌍하거나, 실속없거나, 전공이 폄하되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황실에 피해가 되는 행위를 3~40대 즈음에 한것으로 의심된다.

3. 알렉시오스 1세의 외손자

요안니스 두카스(세바스토크라토르) 참조.

4. 요안니스 3세

니케아 제국의 황제.


[1] 콤니노스 형제는 쿠데타가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 않은 성벽 돌파 직후 가족들이 갇혀있는 페트리온 구의 수녀원으로 달려가려했으나, 요안니스는 이들을 질책하며 황제를 먼저 제압하라고 조언했다. 이후에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던 형제에게 황제가 선임황제에서 물러나는 형식으로 타협안을 내놓자 이를 거절하라고 종용하는 등 가문에 유리한 선택을 제시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