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2:19:33

콘스탄틴 체르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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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체르넨코
Константи́н Черне́нко | Konstantin Chernenko
파일:Константи́н_Усти́нович_Черне́нко_02.jpg
본명 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
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Konstantin Ustinovich Chernenko
출생 1911년 9월 24일
러시아 제국 예니세이스크현 미누신스크군 볼샤야테시촌[1]
(現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노보숄로보군)
사망 1985년 3월 10일 (향년 73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연방시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제5대 서기장
1984년 2월 13일 ~ 1985년 3월 10일
제9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4년 4월 11일 ~ 1985년 3월 10일
서명 파일:콘스탄틴 체르넨코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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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우스틴 데미도비치 체르넨코
어머니 하리티나 표도로브나 체르넨코
형제자매 누나 발렌티나
남동생 니콜라이
이복남동생 시도르[2]
배우자 파이나 바실리예브나 체르넨코 (사별)
안나 드미트리예브나 체르넨코 (재혼)
자녀 아들 알베르트, 블라디미르
딸 리디아, 엘레나
학력 키시뇨프 교육대학 ( 학사)
종교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주요 서훈 사회주의노력영웅 (3회)
노력적기훈장 (3회)
레닌훈장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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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부터 군 입대까지2.2. 공산당 활동2.3. 서기장 취임 후2.4. 사망
3. 평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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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konstantin_chernenko.jpg

소련 정치인.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의 최고권력자로, 소련 공산당 제5대 서기장이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지냈다.

전임자 안드로포프와 함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이의 과도기 2년 4개월 동안 집권한 두 서기장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나마 안드로포프는 과거 KGB의 위원장이었다는 경력에서 오는 위엄, 정체 상태에 빠진 소련을 개혁하려고 한 점, 그리고 미국 소녀 서맨사 스미스와의 일화 때문에 어느 정도는 유명한 편이지만, 체르넨코의 경우에는 정말로 존재감이나 치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안드로포프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그다지 따라 주지를 못해서 고작 1년밖에 통치를 못 하고 죽어야 했다.

2. 생애

파일:external/s003.radikal.ru/6b98bb2b60f1.jpg
1975년 2월 23일, 소련 건군절 기념 정치국 회동에서.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와 함께 있는 사진.

왼쪽에서부터 세번째에 소련 원수 예복 차림으로 앉은 사람이 브레즈네프, 브레즈네프와 대화를 나누는 안경을 쓴 사람이 공산당 막후 실세로 평가 받던 미하일 수슬로프 공산당 제2서기, 브레즈네프 오른쪽에 대장 예복 차림으로 서 있는 사람이 유리 안드로포프,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단 정장 차림으로 서 있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람이 체르넨코다. 체르넨코 왼쪽 뒤에서 누군가와 대화 중인 소련 원수 예복 차림의 인물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오른쪽에서 등을 보인 채로 앉아 있는 사람은 알렉세이 코시긴 내각총리이다.

2.1. 출생부터 군 입대까지

1911년 9월 24일[3] 러시아 제국 예니세이스크현의 볼샤야테시(Большая Тесь) 마을에 살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는 부농에게 고용되어 일했다. 1929년 콤소몰의 단원으로 가입했으며,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스탄 지역의 국경경비대에서 복무했으며 서기장이 된 후에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는 체르넨코의 국경수비대 관련 기록을 발굴해서 오글거리는 선전물을 만들고 훈장을 수훈하는 법석을 떨었다.

2.2. 공산당 활동

193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체르넨코는 전역한 직후에 부임한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의 선전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4],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 서기로 승진했다.[5] 스탈린에 찍힌 것도 있고 별로 실적이 시원찮았던 모양인지 전쟁이 끝난 1945년 펜자 지구당 이론담당 서기로 전근했다가 1948년 몰도바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승진을 빙자한 좌천을 당했는데, 모스크바의 당 중앙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 행로가 역설적으로 체르넨코 인생의 전환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몰도바 공산당의 서기가 바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기 때문이다.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체르넨코는 그의 성실함과 재능을 높이 평가한 브레즈네프로부터 배려받은 덕택에 통신강의로 키시뇨프 교육대학을 졸업하면서 당 간부가 될만한 교양을 축적할 수 있었고, 측근으로 그를 충실히 보좌하며 브레즈네프가 어딜 가든지 따라다녔으며 사적인 사냥 휴가에도 거의 무조건 동행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함에 따라 체르넨코도 승진을 거듭했다. 지방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56년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산하 대중선동과장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960년 5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0월, 브레즈네프가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에 취임하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총무부장으로 영전했다. 총무부장 임명 직후인 1966년 2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1년 2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1976년 3월에는 25차 당대회에서 서기국 서기를 겸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치국원으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면서도 1965년 7월부터 1982년 11월까지 무려 17년간 총무부장으로 겸임한 덕택에 소련 공산당의 당 조직 안에서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할 수 있었고,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투서부를 마련해 소련 공산당/소련 장관회의/소련 최고회의 상무회를 구성하는 하급 관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려고 하는 등의 시책으로 당료들의 신망을 얻게 되는데 이는 브레즈네프 사후 권력 투쟁에서 당 관료 계층의 지지를 받게 되는 기반이 된다. 당 조직을 총괄하고 서기장의 사실상 비서로서 역할을 하면서 체르넨코는 경쟁자 안드레이 키릴렌코를 제치며 말년의 브레즈네프를 이은 2인자로 부상했다. 노쇠해진 서기장을 대신하여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체르넨코였고, 말년의 브레즈네프가 총기를 잃었을 때 국제 회담에서 그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한 것도 체르넨코였다.[6] 이 때 체르넨코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어서 카터 행정부는 브레즈네프와의 회담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로 장래의 지도자가 될 체르넨코와의 접촉을 꼽았을 정도.

하지만 1982년 11월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KGB, 내각의 테크노크라트들의 지지를 결집한 유리 안드로포프가 후임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체르넨코는 잠시 권력에서 밀려나는 듯했으나[7], 얼마 못 가 1984년 2월에 안드로포프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당정 관료계급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서기장에 취임하여 결국 대권을 획득했다.

2.3. 서기장 취임 후

1984년 4월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소련 헌법상의 국가원수)을 겸직한 체르넨코는 취임 초기부터 병약했다.[8] 안드로포프의 장례식에서 장례위원장으로서 추도사를 하던 그는 폐기종으로 인해서 계속 숨을 헐떡였고, 감정에 북받쳐 일시적으로 말을 더듬은 것이라는 소련 당국의 공식적 해명이 있었지만 외빈으로 참석한 의사 출신 데이비드 오언 전 영국 외무상은 그의 심각한 건강 상태를 바로 알아차리고 귀국 후 체르넨코가 폐기종을 앓는 것 같다고 언론에 밝힐 정도였다. 전임자 안드로포프의 취임 때 상당한 기대를 보였던 소련 사회는 브레즈네프의 2인자라는 이미지만이 강했고 더군다나 장례식장에서조차도 병약해 보이는 그를 보고는 상당한 실망을 보였다. 1984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 있는 <낫과 망치> 야금공장을 현지지도했을 때 체르넨코는 동행한 정치국원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현장의 노동자들을 대하는 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하는 등 이전 지도자들이 보여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었다.[9]

안드로포프의 개혁정책을 축소시키기는 했지만, 일정수준 지속시키기는 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실적은 없었지만, 그나마 본인의 전공이기도 한 교육 분야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교육분야에 대해서 대규모 개혁작업에 착수했다.[10]

우선 여러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던 직업전문학교를 기술학교로 단일화하고, 인문계 학교에서도 직업교육 시간을 늘리는 한편, 컴퓨터 과목 신설 등 기술교육 활성화, 학급당 학생 수 축소 및 교사 급여 인상조치, 교복 개정 등 광범위한 작업을 수행했으며 초등학교 취학연령 하향(만 8세→만 7세)을 통해서 의무 교육기간을 10년에서 11년으로 연장하는 한편, 9월 1일 지식의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런 교육개혁 정책은 소련 인민들 사이에서 체르넨코가 한 일 가운데 그나마 성과를 낸 일이라고 평가받았다. 체르넨코의 교육개혁 정책은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대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되지만, 러시아의 학제가 체르넨코 시대에 확정된 학제를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영향이 남아 있기는 하다.

또한 중요한 인사에 대하여 정책을 단행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9월 6일 당에 비판적인 언동을 반복하던 소련군 총참모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를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를 임명하면서 당정군의 관료 정치를 개편했다.

다만 오가르코프의 해임에 대해서는 체르넨코 본인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체르넨코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서기였던 그레고리 로마노프가 각각 여름 휴가와 해외 출장으로 동시에 부재중 상태가 된 다음날 새벽에 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급작스럽게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오가르코프의 해임이 결정되었다. 이 때문에 오가르코프의 해임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반(反)체르넨코 진영이 체르넨코 진영의 거대한 인맥에 흠집을 내기 위해 공작한 것이라는게 이 설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거다.

한편, 체르넨코는 노동조합을 지원하고, 중국과 무역협정을 위해 교섭하였다. 그러나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서독 방문을 반대하는 등, 정치적 사부였던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냉전의 해소나 데탕트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이미 브레즈네프 말엽에 데탕트는 무너지고 있었고 안드로포프 시대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동서대립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제1세계로부터 당한 보이콧에 대한 보복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 시절 내내 경색되어 있던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김일성을 소련에 초청하였고, 1985년에 북한에 미그 23기를 포함한 대규모 군사지원을 해주었다. 다만 북한의 NPT 가입을 유도하는 등 북한을 통제 하에 두려고 했다.

또한 브레즈네프의 셀프수훈도 본받았는지 체르넨코는 재임 시절 무려 3중 노력영웅이 되었으며 그가 젊은 시절 조금이라도 관여한 부분은 다 찾아서 관련 훈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볼고그라드를 스탈린그라드로 다시 개칭하려고 하는 등 이 당시까지도 사악한 독재자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재평가 작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재평가 논의는 묻혔고,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는 소련 붕괴 이후에서야 이루어졌다.

2.4. 사망

1985년 3월 10일, 오랜 세월 동안 앓고 있던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 악화되어[11] 발생한 심폐기능 부전에 의한 심장마비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오랜 관례대로 후임 서기장이 되는 고르바초프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의 절차를 지휘했으며,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래는 장례식 영상. 13분 33초부터 쓰는 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 피아노 소나타 2번의 3악장)이다. 소련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장례식 음악으로 애용되는 곡.

3. 평가

취임한 지 불과 1년 만에 죽음을 맞았으며 소련 인민들에게는 크게 인기 없는 서기장이었지만, 일가족의 가장으로서는 둘도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내인 안나 드미트리예브나 체르넨코는 남편의 장례식 때 오열하면서 죽은 남편의 시신에 계속 키스했을 정도. 건강 문제 때문에 굵적하게 해낸 일은 없지만, 그나마 눈에 띄면서도 성과를 낸 정책이 교육정책이었기 때문에 소련과 러시아 교육에 대해 다룰 때는 제법 비중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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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마을은 1972년 크라스노야르스크 수력발전소가 건설면서 침수되었고, 그 뒤로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2] 1924.~1962.9.26. [3] 니콜라이 2세 17년 [4] 이 시기로부터 10년 간의 기록이 부재해 사실 NKVD 요원이었던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5]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 서기를 맡을 당시 재밌는 일화가 존재한다. 스탈린은 1913년 크라스노야르스크 관할이던 쿠레이카라는 북극권의 오지에서 유형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체르넨코가 1942년에 이 때의 스탈린의 일화들을 모아 스탈린 숭배용 책으로 내서 점수를 좀 따보려고 했던 것. 그러나 스탈린은 이걸 알고는 직접 체르넨코에게 전화를 걸어 아주 혼쭐을 내줬다고.. [6] 이를테면 현재 북한의 조용원과 매우 유사한 역할과 위상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을듯. [7] 서구권 언론에서는 와병으로 인한 잠적을 실각으로 잘못 판단하기도 했을 정도. 물론 사실이 아니었고 루머 발생 후 프라우다 2면 전면에 걸친 기명 기고를 하며 정치적 건재함을 과시했다. [8] 안드로포프 집권 말기에 2달 간 공식석상에서 종적을 감춰 실각설이 돌기도 했는데, 정황상 이때부터 건강 상태가 이미 심각해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9] 사실 이전 서기장들이 정치장교나 군, 정보부서 등에서 일선 행정경험을 쌓은 것과 달리 체르넨코는 그야말로 책상물림의 커리어를 이어왔기에 그닥 놀랍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브레즈네프 사후에 안드로포프에게 권좌를 내준 것도 이 점이 약점으로 작용했기 때문. 볼코고노프는 체르넨코에 대해서 연설 원고 없이는 평생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까지 촌평했다. [10] 당시 소련의 교육체계는 학급당 학생수 과잉은 여전한 데다가, 인문계 선호 및 실업계 기피현상이 일어났고, 기술학교 교육내용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에 머무르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11] 무려 9살 때부터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