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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맨사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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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ntha Smith

1972년 6월 29일 ~ 1985년 8월 25일 (항년 13세)

1. 개요2. 서맨사의 편지3. 안드로포프의 답장4. 세기의 방문5. 다시 오는 겨울6. 기타

1. 개요

미국의 아역 배우 겸 평화 운동가.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소련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녀다.

2. 서맨사의 편지

미국 메인 주에서 태어나 불과 13세의 나이로 요절한 이 평범한 소녀가 평화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1982년 11월 만 10살의 나이에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 된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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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포프 서기장님,


저는 서맨사 스미스라고 합니다. 10살이에요. 취임 축하드립니다.

러시아 미국 사이에 핵전쟁이 날까 항상 걱정이었어요. 서기장님은 전쟁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라면 전쟁을 어떻게 막으실 건지 알려주세요.

이 질문은 굳이 답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왜 세상을, 적어도 우리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하느님께서는 서로 나누어 돌보라고 세상을 만드셨어요. 세상을 놓고 다투거나 누구 하나가 온 세상을 다스리라고 만드신 게 아니라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모두의 행복을 지키자구요.


서맨사 스미스 올림

추신. 답장 꼭 해주세요.
서맨사 스미스가 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같은 달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가 유리 안드로포프였기 때문이다. 이를 본 서맨사는 어머니에게 "이 아저씨가 그렇게 무서우면, 편지를 보내서 전쟁을 할 작정인가 물어보면 되지 않아요?"라고 물어보게 된다. 어머니는 딸에게 "네가 해보지 않겠니?"라고 대답하게 된다.[1]

3. 안드로포프의 답장

놀랍게도 이 편지는 1983년 4월 12일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실렸고, 4월 26일 안드로포프의 답장이 서맨사에게 전달되었다. 바로 위의 사진이 서맨사가 안드로포프의 답장을 들고 있는 모습. 답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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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서맨사 양,


편지 잘 받았습니다. 요즈음 서맨사 양의 조국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편지가 많이 오더군요.

편지를 보니, 서맨사 양은 정직하고 용기가 넘치는 게, 톰 소여의 친구 베키를 꼭 닮은 듯합니다. 서맨사 양의 동포 마크 트웨인이 쓴 유명한 소설에 나오죠. 우리 나라의 아이들도 백이면 백 톰 소여의 모험을 알고 또 즐겨 읽는답니다.

우리 양국 사이에 핵전쟁이 있을까 불안하다고 적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핵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물으셨고요. 지성인이 가질 수 있는 질문 가운데서도 더없이 중요한 질문이지요. 저도 진지하게, 또 정직하게 답하겠습니다.

그래요, 서맨사 양. 소련에서는 다들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소련의 누구든지 평화를 원하지요. 우리 나라를 세운 위대한 건국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가르쳐준 바기도 합니다.

소련 인민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십 이 년 전, 온 세계의 정복을 꿈꿨던 나치 독일은, 우리를 공격해 수천의 도시와 마을을 불태웠으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천만 명의 소련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고 그 때 우리는 미국과 함께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나치 침략자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려 함께 싸웠지요. 이 사실은 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다면 좋겠습니다.

이윽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평화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먼 나라와 이웃 나라를 가리지 않고 교역하고 협력하기를 마음 속 깊이 바랍니다. 미국만큼 위대한 나라와는 더더욱 말이죠.

미국에도 우리 나라에도 핵무기가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눈 깜짝할 새에 앗아갈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핵무기가 쓰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소련이 어느 나라를 상대로도 핵무기를 절대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고 전 세계에 엄숙히 선언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2] 핵무기 추가 생산을 중단하고, 더 나아가 모든 핵무기 비축분을 폐기할 것을 제안하는 편이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도대체 왜 세상을, 적어도 우리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시는 건가요?'라는 두번째 물음에도 충분한 답이 되었을 것 같네요. 노동자도 농민도, 작가도 의사도, 성인도 청소년도, 정부의 각료도, 우리 나라의 그 누구도 크건 '작건' 전쟁은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할 일이 있으니까요. 밀을 기르고, 건물을 짓고 발명하고, 책을 쓰고 우주를 나는 일이 우리 자신과 지구상의 모든 인민을 위해,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도, 또 서맨사 양, 그대를 위해서도요.

부모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서맨사 양을 이번 여름의 적절한 시기에 우리 소련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에 대해 알아가고, 또래 아이들과 만나고, 해변가에서 열리는 국제 어린이 캠프 아르텍에 방문하시게 될 겁니다. 직접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소련에서는 평화와 우정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편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맨사 양의 유년기에 좋은 일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유리 안드로포프 올림
보다시피 유리 안드로포프는 정성스런 답장을 보낸 것을 넘어, 서맨사와 그녀의 부모를 소련에 공식 초청하였다. 미국 일각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에 넘어가면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미국 소녀와 소련 지도자가 평화를 지향하는 따뜻한 서신을 교환했다는 사실 자체가 갈수록 첨예해지던 살벌한 냉전 체제를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기에 전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4. 세기의 방문


서맨사 스미스의 소련 여행을 담은 미국의 다큐멘터리(영어)

마침내 1983년 7월 7일 서맨사 스미스와 그녀의 부모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7월 22일까지 머물렀다. 공항에는 수많은 환영 인파가 나왔으며 소련에 도착한 심정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서맨사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씩 웃고는 "спасибо(스파시바: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이것으로 서맨사의 소련 방문이 시작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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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텍에 참여했던 시기의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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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서맨사를 초청한 데에는 물론 어느 정도는 소련의 최고 지도자에게 편지를 보낸 당돌한 미국 소녀에 대한 순수한 예의 차원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체제 경쟁에 대한 일종의 메시지를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소련 정부는 서맨사의 주변에 영어를 잘하는 교사와 학생들을 대거 배치하는가 하면 크렘린 등의 여러 명소를 방문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정작 서맨사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인터뷰에서 소련에 사는 건 어떠냐는 질문에 "그냥 미국에서 살래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끝내 안타깝게도 서맨사는 안드로포프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안드로포프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 그래도 서맨사는 마크 트웨인의 연설집을 그에게 선물했고, 안드로포프는 와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화를 걸어 서맨사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후 서맨사 스미스는 미국과 소련 양국에서 친선 대사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스미스는 소련 방문 당시의 에피소드에 관해 책을 집필하고, 디즈니채널과 <라임 스트리트>라는 TV 시리즈에서 배우로도 활동했다. 1983년 12월에 '미국의 꼬마 친선대사'로 일본을 방문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를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녀는 "미국 대통령이 그녀의 손녀가 방문할 수 있는 나라라면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1984년 미국 대선 정국에서는 조지 맥거번이나 제시 잭슨 같은 미국 민주당의 유력 진보 정치인들이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

5. 다시 오는 겨울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1983년 당시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가을녘 한반도에서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터져 전국이 떠들썩해졌으며, 세계를 멸망시킬 우발적 핵전쟁의 가능성이 또 한 번 세계를 스쳐 지나갔다.

이후 서맨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불과 7개월 만인 1984년 2월 안드로포프가 사망하고, 그로부터 1년 6개월 후인 1985년 8월 25일 서맨사마저 경비행기 사고(바 하버 에어라인 1808편 추락 사고[3])로 요절하면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한 소녀의 아름다운 여행은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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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맨사의 사망 후 소련에서 그녀를 추모하는 우표를 발매했고 소련인 소녀 예카테리나 리초바(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Лычёва, Yekaterina Alexandrovna Lycheva)가 1986년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로널드 레이건과 만나기도 하였다.


[1] 그녀는 이미 5살 때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왕실을 향한 존경심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2] 1982년 소련은 중국에 이어 2번째로 핵무기 선제 사용 금지 선언을 명시화했다. 이는 소련 해체 이후 1993년 폐지되었다. [3] 작은 경비행기로 승객 6명과 승무원 2명이 전부인 여객기이다. 서맨사 말고도 그녀의 아버지도 같이 탔다가 탑승자 8명 전원 사망했다. 서맨사의 어머니나 다른 유족들은 바 하버 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3년 뒤에 미공개로 합의했다. 추락 원인은 조종사의 실수 및 여러 원인. 바 하버 항공사는 1991년에 문을 닫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