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8:13:29

치음(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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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남창문목공(南昌文穆公)
郗愔 |치음
시호 문목(文穆)
작위 남창현공(南昌縣公)
(郗)
(愔)
방회(方回)
생몰 313년 ~ 384년 9월 28일
출신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부친 치감(郗鑒)
배우자 부씨(傅氏)
아들 치초(郗超), 치융(郗融), 치충(郗冲)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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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태위 치감의 장남이자, 서예가 왕희지의 처남.

2. 생애

치음은 어릴 적부터 남들과 다투지 않았고, 약관의 나이에 산기시랑에 임명되었지만 받들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사망하고 상을 치르다가 거의 죽을 뻔하였다. 상을 마친 뒤, 치음은 아버지의 남창현공 작위를 습작하고 중서시랑으로 임관하였다. 이후 표기장군 하충이 보정대신이 되어 정무를 처리하자 표기장사가 되어 하충을 보좌하였고, 정북장군 저부가 외직을 자청하여 경구(京口)에 주둔할 때 정북장사로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시 승진하여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

치음이 황문시랑을 지낼 당시, 오군(吳郡)의 태수 자리가 비어 조정에서는 치음을 오군태수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치음은 스스로 명망이 부족해 큰 지역을 다스리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며 사양하니, 조정에서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임해태수로 삼았다. 일찍이 아우 치담이 사망한 이후로 치음은 허탈감에 빠져 정치나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임해군에서 매부인 왕희지와 명망높은 선비인 허순(許詢)과 함께 거주하였다. 이들은 속세의 풍조를 멀리하고, 곡식을 끊고, 황로학과 같은 도가 사상을 연구하였다. 이후 병을 이유로 사직한 뒤, 장안(章安)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은거하다 죽을 10여 년 가까이 세상과 교류를 끊으며 지냈다.

회계왕 사마욱이 보정을 맡게 되자, 상서복야 강반 등의 대신들이 치음을 천거하였다. 치음은 은거를 그만두고 다시 관직에 올라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산기상시를 겸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태상으로 고쳐 임명하려 했지만, 치음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외지로 부임하길 희망하니, 조정에서는 그의 청에 따라 보국장군, 회계내사로 삼았다.

태화 2년(367년) 9월, 대사마 환온이 서주와 연주를 수복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치음을 도독서연청유양주지진릉제군사(都督徐兗青幽揚州之晉陵諸軍事), 영 서연2주자사(領徐兗二州刺史), 가절에 임명하였다. 치음은 비록 기뻐하지 않았으나, 명령을 받들어 경구에 주둔하였다.

태화 4년(369년) 3월, 전연을 지탱하던 명재상 모용각이 사망하자, 환온은 북벌을 시행하기 위해 서신을 보내 서연2주자사인 치음에게 협력을 구하였다. 환온의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있던 치음은 본인이 진군하여 원릉을 복원하는 임무를 맡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당시 치음의 아들 치초는 환온 휘하에서 참군을 지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서신을 중간에서 가로채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환온의 뜻과 다름을 깨닫고, 그것을 촌촌이 찢어 버렸다. 그리고 환온에게 경구의 병력을 넘겨주고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새로 써서 전달하였다. 환온은 매우 기뻐하며 스스로 서연2주자사에 오르고, 치음을 관군장군, 회계내사로 옮겼다.

태원 원년(376년) 정월, 효무제 사마요가 마침내 15세로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혼자 조정을 주도하게 된 효무제 사마요는 조회에 참석하여 치음을 진군대장군, 도독절강동5군군사(都督浙江東五郡軍事)로 삼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구하고, 회계군에 거주하였다.

태원 6년(381년) 11월, 조정에서 상을 하사하면서 치음을 사공으로 삼았지만, 치음은 굳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태원 9년(384년) 8월 27일[1], 치음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사후 시중, 사공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文穆)'이라 하였다. 아들로는 치초, 치융, 치충이 있었는데, 그들 중 장남 치초가 가장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다만 장남이 치음보다 먼저 사망하여 후사는 친척인 치승시가 이었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9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