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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선수 경력/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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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200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역투하는 모습이다.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
2.1.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2.2. 고등학교 시절
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추신수의 아마추어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아버지 추소민 씨와 어머니 박유정 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추신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야구선수의 길을 걸었다. 추신수의 집안에는 이미 유명한 야구인이 한 명 있었는데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추신수에게 외삼촌이 되는 롯데 자이언츠 프랜차이즈 스타 박정태였다. 추신수가 야구에 입문하던 시절 박정태는 이미 부산시민 대부분이 알고 있던 슈퍼스타이자 부산의 자랑거리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조카 추신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외삼촌 박정태의 영향을 받아 추신수도 야구 선수를 목표로 했다. 이에 추신수의 아버지가 추신수의 외삼촌이자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박정태에게 아들이 소질있냐고 묻자 박정태는 소질은 있지만 재능만으로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매우 힘든 것이 야구 선수라며 추신수의 꿈에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추신수의 의지가 강하자 결국 야구를 가르쳐주면서 야구 선수로서 길을 본격적으로 걷는다.

2.1.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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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초등학교 재학 당시.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감독이 아니고- 이대호, 앞줄 왼쪽 세 번째가 추신수,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이우민(이승화)이다.

추신수는 그가 나고 자란 부산 남구의 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워낙에 운동을 좋아했고 친구들과 테니스공으로 야구 놀이를 하던 평범한 어린이였다. 어린 시절의 추신수는 그저 야구 놀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뛰어놀았다고 한다. 또 외삼촌 박정태가 활약하던 경기를 보기 위해 외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사직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모습을 외삼촌 박정태가 목격했고 조카에게 야구의 소질이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조카에게 정식으로 야구를 가르쳐주기로 하고 수영초등학교로 전학해서 야구를 배우게끔 다리를 놔준다. 그가 자라난 남구에도 대연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으나[1] 집에서 버스로 무려 30분이나 걸릴 정도로 멀리 떨어진 수영초등학교로 전학을 시킨 것은 당시 이 학교 야구부 코치 중 1명이 박정태의 후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수영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배우기 시작한 추신수는 전학 온 첫날 같은 반 교실에서 본인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덩치의 친구를 발견했다. 같은 반 급우의 덩치에 놀랐던 추신수는 대뜸 야구부 감독에게 "우리 반에 웬 고등학생이 하나 있어요!"라는 말을 했고 감독은 그 학생을 당장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추신수는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포스를 뽐내던 이 학생에게 "같이 야구 해보자"는 권유를 했고 결국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학생이 바로 훗날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2호 영구결번으로 헌액된 슈퍼스타 이대호다. 훗날 추신수가 무릎팍도사에서 술회하기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이대호에게 야구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대호는 물론이고 이승화와도 같은 팀이 되어 뛰었다.

유명 아마추어 선수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추신수 역시 투수와 타자 두 부문에서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제6회 롯데기 초등학교 야구대회에서 수영초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당시 유격수 이대호가 최우수선수상, 추신수가 우수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에서 이대호는 가정 형편상 대동중학교로 가게 되었고[2] 추신수와 이승화는 함께 부산중학교로 진학했다.

2.2. 고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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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대통령배 결승전 당시.

부산중을 졸업한 추신수는 바로 옆 학교인 부산고로 진학하게 된다. 1학년 시절에는 2년 선배인 우완 백차승이 전국구 에이스로 버티고 있었고 2, 3학년 시절에는 우완투수 김백만[3], 키스톤콤비 정근우-진병국, 포수 허웅, 외야수 이승엽[4]과 함께 활약했다.

특히 고2(1999년) 때부터 두각을 내기 시작하여 제33회(1999년)와 제34회(2000년) 대통령배에 부산고를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 제33회(1999년) 결승전에서는 배명고를 6-3으로 이겼다. 당시 배명고의 에이스 투수는 심수창, 4번타자는 이명호였으며 8회말 심수창의 번트 수비가 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부산고는 집요하게 스퀴즈 번트를 대며 추가득점에 성공하였다. 심수창이 회상하기를 이때의 추신수의 공은 마치 대포알 같았다고 한다. 심수창은 8회말 2아웃 상황에서 추신수를 투수 앞 땅볼로 잡았다.[5]

3학년 때인 제34회(2000년) 대회는 경기고를 10-3으로 결승전에서 꺾었다. 당시 경기고의 에이스는 이동현 오승환이었으며 1학년 서동욱이 외야수로 간간히 출전했다. 조성옥 감독의 지도를 받아 본인도 2년 연속 MVP[6]를 받으면서 많은 팀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7] 관련기사

제34회(2000년) 대통령배에서 부산고의 경기 전적과 추신수의 등판 기록이다.
  • 1회전 vs 울산신정고 8-1 7회콜드게임 승
  • 16강전 vs 신일고 7-3 승[8]
  • 8강전 vs 속초상고 연장 12회 4-3 승[9]
  • 준결승전 vs 덕수정산고 8-1 승[10]
  • 결승전 vs 경기고 10-3 승[11]
  • 5경기 등판 4승 0패 31 1/3이닝 6자책점 방어율 1.74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0437391101_20120721_59_20121017162519.jpg
제19회 IBAF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참가 당시.

같은 해에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뽑혀, 에드먼턴에서 열린 18세 이하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를 제패했는데 당시 멤버였던 김태균, 이대호, 정근우, 이동현, 이정호와 동기생이다. [12] 이들 1982년 개띠 라인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전병호, 차명주,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 등을 배출한 1973년 소띠 동기생(일명 황금의 92학번[13])과 더불어 한국야구의 중흥기를 이끈 역대 최강의 기수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14]

이 당시 부산 연고팀 롯데 자이언츠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산고 졸업 예정자인 추신수를 2001년 1차 지명 신인으로 뽑기로 했다. 그러나 추신수는 롯데 입단을 거부하고[15] 청소년선수권이 끝난 뒤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외숙부 박정태에게 롯데 구단이 하는 행동을 보고 실망해서[16] 그랬다는 설, 당시 추신수의 아버지가 실망했다고 할 만큼 롯데 구단의 계약금 액수가 적었다는 설 등이 있다. 다만 롯데 자이언츠 측이 제시한 전체적인 금액(계약금 4억2000만원) 자체가 부족하진 않았다고 하며 이보다는 시애틀 매리너스 측에서 제시한 계약금이 137만 달러(당시 환율로 16억원)로 롯데가 제시한 금액보다 4배나 많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간 것이라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당시는 박찬호의 활약에 의해 대한민국 유망주들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아마추어 FA 계약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그리고 추신수는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라 할 정도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주목을 받는 탑 클래스 유망주였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라고 추신수의 아버지가 말한 것을 보면[17] 어느 정도 실망은 한 모양. 추신수도 본인의 지명뿐만 아니라 외숙부 박정태에 대한 홀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실망한 탓에 한동안 롯데제과의 과자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인터뷰에서도 적나라하게 이 감정을 토로하던 때도 있었으나, 박정태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 들어가는 등 롯데와의 관계가 회복되자 추신수도 롯데에 대한 악감정은 풀었다고 인터뷰했다. 추신수는 KBO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고 있으나 롯데에서 뛰고 싶고 부산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인터뷰 했다. 관련기사[18]

장민석이 술회하길 부산지역에서는 추신수, 이대호, 채태인이 앞서 나갔다고 한다. 김경언 : 신수 다음이 내 아이가? 송승준 : 경언아 니 미친거 아이가? 고3이던 송승준은 고1이던 추신수에게 홈런을 허용한 적이 있다.

부산고 동기 김백만은 추신수 - 정근우의 경쟁이 팀 내 체력단련 훈련때부터 치열했다고 하며 김백만 본인에게 '저 친구만큼은 꼭 이기고 싶다'는 라이벌 의식을 심어준 친구로 추신수를 뽑았다. 전국대회 본선 진출권이 걸린 부산지역 예선에서 김백만이 대부분 던지고 승리해도 스포트라이트는 추신수에게 많이 돌아갔다.
파일:추신수 조성옥.jpg
파일:조성옥 발인.jpg

부산고 감독이었던 조성옥은 추신수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특별대우 없이 오히려 더 강하게 키웠다. 스승의 마음을 제자도 알았는지 재능에 노력을 더해 고교 최고의 선수가 됐다. 그래서 조성옥의 부음 소식을 듣고 추신수가 유독 슬퍼하였다.[19] 조성옥 감독의 영산재에는 추신수를 비롯 장원준, 손아섭, 손용석, 황성용, 김태군, 전병두 등 그의 제자들이 모여 조 감독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3. 관련 문서


[1] 심지어 박정태의 모교가 이 곳이다. [2] 당시 신종세 대동중 감독이 이대호의 숙식을 지원해주는 등 혜택을 줬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대호의 어린 시절은 눈물 없이 듣기 힘들 정도로 매우 불우했다. [3] 2001년 한화 이글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고 계약금 2억 원에 입단했으나,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하고 2009년에 방출당해 은퇴했다. 은퇴 후 부산고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부산정보고 감독으로 옮겼다. [4] 국민타자 이승엽과 동명이인이며, 부산고-중앙대에서 활동했다. 걸출한 타격실력을 보유했으나 프로에서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 [5] 여담으로 심수창은 코피가 터져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지혈하는 일이 있었다. 정근우와 추신수가 훗날 술회하기를 심수창이 수비하다가 다리 꼬이고, 실점해서 열받아하고, 코피 흘리고 혼자서 여러가지를 다 보여줬다고 했다. [6] 제33회(1999년) - 제34회(2000년) 대회 모두 최우수선수상과 우수투수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배 사상 최초다. [7] 고교 시절 혹사를 당하지 않았다고 이전 버전에 서술됐으나, 혹사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제34회 대회에서 추신수, 이동현 모두 진통제를 맞고 결승전에서 던졌다. [8] 추신수가 3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9] 추신수가 마운드에서는 8이닝 9탈삼진 무실점, 타석에서는 3타수 1안타 1타점으로 활약했다. 심지어 추신수는 3과 1/3이닝을 먼저 막고 동기생 김백만이 4이닝을 던지며 3실점하자 다시 등판하여 4와 2/3이닝을 막았다. [10] 선발투수 김백만이 6피안타 1실점으로 완투했고, 류제국은 패전투수가 됐다. [11] 추신수가 16탈삼진 7피안타 3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12] 당시 부산지역에는 훗날 KBO에서 활약할 1982년생 동기생들이 많았다. 부산고의 추신수, 정근우, 김백만, 경남고의 이대호와 장기영, 경남상고 김경언, 송산, 백승룡, 김덕윤, 부산상고 채태인, 차정민, 이승화, 부산공고 이명우 등. [13] 학번은 대학생에게 쓰는 말이지만 야구 팬들은 편의상 고졸 입단 선수들도 XX학번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염종석, 박종호 등도 포함된다.( 정민철은 1972년생으로 유급 경력이 있어서 적용하기가 애매하다.) [14] 그러나 1982년생 중심의 라인업은 성인무대에서 가동된 적이 2009년 WBC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뿐이다. 그나마도 두 대회 모두 1982년생 전원이 다 잘한 적은 없다. 한두명씩 꼭 부진했다. 2009년 WBC 때는 김태균이 날아다니는 동안 추신수는 본선 1·2라운드를 말아먹었지만 준결승, 결승에서 맹활약했고 이대호는 중간에 살짝 해맸다. 2010년 광저우 AG 때는 면제로이드를 한사발 들이킨 추신수가 대회를 뒤집어 엎는 와중에 김태균은 타율 0.091 충공깽급 성적을 냈고 그해 타격 7관왕을 석권한 이대호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홈런 1개와 3할의 타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2009년 WBC와 2010년 아시안게임 모두 꾸준히 잘했던 1982년생 선수는 정근우 1명 뿐이었다. [15] 1차 지명권은 한 번 사용하면 이를 취소하거나 바꿀 수 없기에 추신수의 입단 거부로 롯데는 1차 지명권을 그대로 허공에 날리게 됐다. 이후 2차 1라운드로 이대호를 뽑았는데 사실상 그 해 1차 지명자나 다름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이것도 바로 앞 순위 지명권, 그것도 신생팀 지원 차원에서 3장을 행사할 수 있었던 SK가 이대호를 지나친 덕을 어느 정도 본 것이다. [16] 이 당시 롯데 자이언츠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대우가 유난히 나빴던 구단이었다. 부산야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였던 최동원을 매몰차게 내쳤고 롯데 특유의 짠돌이 경영 방식을 수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에게 들이밀며 홀대했다. 이는 1990년대 중후반 롯데의 최고 스타였던 박정태도 피하지 못했다. 추신수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2000년 초부터 롯데 구단은 박정태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당시 박정태 선수협의회 창설 핵심 멤버로서 활약한 것을 구단 고위층이 곱게 보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롯데 구단은 최동원 시절부터 선수협 활동을 죄악시하던 구단이었다. [17] 당시 추신수의 동기생 중에는 추신수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프로에 입단한 이들이 있었다. 대구상고 출신 투수 이정호는 5억3000만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과 삼성자동차의 중형 세단 SM5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받았고 신생팀 SK 와이번스 역시 인천 동산고 출신 포수 정상호에게 4억5000만원의 계약금을 쥐어줬다. 추신수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2년 연속으로 고교야구 MVP를 석권할 정도로 전국을 평정한 아들이 다른 지역 유망주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만하다. [18] 다만 이 발언은 지명권을 지닌 SK를 무시하는 듯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것이었다. 뭐 SK 팬들이야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는 추신수가 당장 SK에 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니 별 신경 안쓰고 있었지만...요즘 하는 거 보면 당당하게 메쟈에서 은퇴할 거 같다 근데 2021년 2월 23일 SK를 이은 SSG에 입단했다. [19] 김백만은 조성옥 감독보다는 이상번 부산고 투수코치(조성옥 감독 사후 동의대 감독 승계)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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