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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건설 부문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12년 8월 1일, 함경남도 함주군 상조양면 상보리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장진강발전소, 수풍발전소 건설장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본인 주장에 따르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 파업과 태업에 수차례 참석한 바가 있다. 이러한 경력 덕분인지 해방 이후 무장자위대에 입대하여 발전소 경비를 하였다. 이후 수풍발전소 세포위원장이 되었다.1946년 4월 삭주군 수풍면당 위원장에 임명, 1946년 10월 10일, 수풍으로 현지지도를 온 김일성과 만나게 되면서 고속 승진하게 되었다. 삭주군당 부위원장, 태천군당, 선천군당 위원장을 거쳐 1948년 11월 수풍발전소 지배인에 임명, 내각 전기국 국장, 전기성 부상을 거쳤다. 6.25 전쟁 이후 평양복구 사업을 진두지휘, 그 공으로 1956년 12월 전원회의에서 건설상에 임명되었다. 1957년 8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건설성이 건설건재공업성으로 개편됨에 따라 초대 건설건재공업상을 맡았으며 소위 평양속도 창조자로서 김일성의 큰 총애를 받았다.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건설건재공업상에 유임되었다. 1958년 9월 7일, 김응기, 김응상, 리병남, 박문규, 박세창, 유철목, 정성언, 최재우와 함께 북한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하지만 1958년 10월 13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일성이 직접 조문을 왔으며 내각수상 명의로 보내진 화환이 너무 작다고 더 큰걸 새로 보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그 구성은 발표되지 않았으며, 장의위원회의 명의로 부고를 발표, "고 최재하 동지는 항상 당과 정부가 위임한 모든 과업을 충실히 집행하여 왔다. 고 최재하 동지가 전체 조선인민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데 대하여 우리는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 동지는 오늘 애석히도 서거하였으나 그가 남긴 업적은 길이 빛날 것이다."라고 하였고, 내각과 당중앙위원회는 연명으로 별도의 애도 성명을 발표, "고 최재하 동지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당과 정부의 정책을 받들고 그의 실현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바치였으며 당과 인민의 리익에 충실히 복무하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남긴 고 최재하 동지의 공로는 길이 빛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월 15일에 장의식이 거행되었으며 리주연 부수상 및 림해, 동상무, 리종옥, 김익선 등이 참가하였다. 맨 처음에 대성산 기슭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1966년 10월, 김일성이 우연히 그의 무덤을 보고 너무 외롭다면서 렬사묘로 이장하라고 지시했고, 애국렬사릉이 조성되면서 그곳에 이장되었다.
현재까지도 북한에서 로동계급 출신의 첫 장관이라고 역사적 위인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3. 여담
그의 아들이 김정은 시대에 정치국 위원,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근로단체부장을 지낸 최휘다.또 다른 자식들로 아들 최연, 딸 최미림이 있으며 손자 최영송은 모란봉구역당위원회 책임지도원을 지냈다.
그의 일대기를 두고 영화 <시련을 뚫고>가 제작되었다.
4.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