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관문화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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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박화성 소설가 |
1978 김환기†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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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현진건†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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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박수근†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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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박두진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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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조훈현 바둑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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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시인 천상병 千祥炳|Cheon Sang-by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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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0년 1월 29일[1] | |||
일본 제국 효고현 히메지시[2] | ||||
사망 | 1993년 4월 28일 (향년 63세) |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379번지 자택 | ||||
아호 | 심온(深溫) | |||
직업 | 시인, 평론가 | |||
수훈 | 은관문화훈장(2003년 추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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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colbgcolor=#fff,#1f2023>진동공립보통학교 (중퇴) 안와중학교 (중퇴) 마산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 경제학 51 /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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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영양 천씨[3] | |||
배우자 | 목순옥[4](1972년 – 1993년) | |||
가족 |
아버지 천두용, 어머니 김일선 누나 천기연, 형 천주병[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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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 (세례명: 시몬) | |||
등단 | 강물 (194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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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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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을 비롯한 여러 명시를 남긴 현대 문학계의 거성으로, 대체로 순수한 마음으로 인생을 노래하는 시를 남겼다. 그에 걸맞게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수차례 전기고문을 당한 탓에 이후 30여 년의 세월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받았다.
술, 그 중에서도 특히 막걸리를 즐겨 마셨으며 문학계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주당이자 기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장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보이는 그의 어록과 기행만 모아 보아도 책 몇권은 쓸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비슷하게 문학계의 주당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시인 김관식과는 절친으로서 서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그의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의 회고록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술을 잘 먹기로 유명했던 김관식 시인은 젊어서부터 술을 많이 먹다가 몸이 금방 닳아서 요절했고, 천상병도 과음으로 인해 간이 쇠약해져 숨을 거뒀다.
2. 생애
2.1. 청년 시절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아버지 천두용(千斗用, 1900. 9. 8 ~ ?. 9. 3)과 어머니 김일선(金日善)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에 잠시 귀국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진동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287번지에 본적을 두고 거주하면서 1937년 진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이후 2년을 다니다가 1940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치바현에 있던 아와(案房)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다. 이처럼 천상병은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거의 일본에서 보냈다.
1945년 8월,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부모와 함께 귀국하여 경상남도 마산시(現 창원시)에 정착하였고, 마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중학생 시절인 1949년, 그의 시인 〈공상(空想)〉이 《죽순(竹筍)》 11집에 추천으로 실리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또한 이때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그의 또다른 작품인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어 실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담임교사가 바로 유치환이었다.
6.25 전쟁 초기였던 1950년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했다.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지금은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산하)에 입학하여 송영택·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인 《처녀》지를 발간했다. 1952년, 《문예》지에 〈갈매기〉가 추천을 완료받아 시인으로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1953년, 《문예》지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 〈사실의 한계〉 등의 평론을 발표하는 등 시 문학 뿐 아니라 평론 방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5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4학년 1학기 때 중퇴하였다. 이후 1956년, 《현대문학》지에서 집필을 하였고 외국서적을 몇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김현옥 당시 부산직할시장의 공보실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이것이 천상병의 생애에 월급쟁이로 직장생활을 한 유일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성향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천상병은 그마저도 2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1960년대 당시의 천상병은 주로 서울 명동 거리를 드나들며 또래의 문학인들과 어울리고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므로 친분 있는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더부살이를 하거나 여인숙에 묵기도 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바로 이 천상병과 김관식, 그리고 이현우 등을 문학계의 3대 기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김관식은 시인 서정주의 동서였는데 당시 문학계의 대선배였던 월탄 박종화를 "박군"이라 칭하는 등 독설을 잘 퍼붓기로 유명했다. 이현우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김말봉의 의붓아들이었는데 안정된 생활을 때려치우고 스스로 떠돌이가 되었다가 80년대 이후에는 아예 종적을 감추어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2.2. 동백림 사건과 행려병자 생활
1967년, 천상병은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천상병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말았다. 동백림 사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는 사실 같은 해에 일어났던 6.8 부정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계획된 간첩조작사건 중 하나였다.그 황당한 전말은 다음과 같다. 천상병의 술친구 중 한 사람인 강빈구[6]가 서독에 유학하던 시절 동독을 드나들던 일이 있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동베를린을 드나들던 경험을 자랑삼아 천상병에게 말해 주곤 했다. 그런 친구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자 천상병 또한 술자리에서 그 사실을 전해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굴비처럼 엮여 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나 천상병은 평소 친구들에게 푼돈을 뜯어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강빈구 또한 수차례 천상병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곤 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하던 검사들은 이를 천상병이 간첩으로부터 받은 공작금이라 주장하며 그를 더욱 압박했다.[7]
1970년 김관식 시인이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김관식의 입관〉을 발표했다. 또한 이 해에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 〈귀천〉이 《창작과비평》지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천상병은 유독 죽음을 소재로 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는데, 동백림 사건 당시에 받았던 정신적인 충격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해 가을에 발표한 〈소릉조〉에 따르면, 그는 여비가 없어 추석에도 부모가 묻힌 산소에 성묘하지도 못하고 형제들을 만나지도 못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매우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1971년, 천상병은 행려불자,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뒷이야기가 있는데, 천상병은 평소의 버릇처럼 지인들에게 밥을 빌어먹기 위해 부산으로 갔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서울행 완행열차에 무임승차했다. 도중에 왜관에서 지인인 시인 구상의 부인이 병원을 하고 있다는 정보만 믿고 한밤중에 열차에서 내렸으나 끝내 길을 찾지 못하고 다시 서울행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이렇게 천상병이 서울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통금이 해제된 새벽녘이었는데, 그는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사는 시인 김구용의 집에 찾아가 밥을 얻어먹으려다가 삼선교에서 길에 놓여있는 자전거를 발견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천상병은 무작정 자전거를 잡아 타려다가 마침 그 근처에 있었던 자전거 주인에게 붙잡혀 절도죄로 성북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런데 그 곳의 경찰들은 고문 후유증과 음주 및 영양실조로 꼴이 말이 아니었던 천상병을 그대로 택시에 태워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렸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로 천상병이 실종되어 버리자 동료 시인들은 그가 거리를 떠돌다 객사한 것으로 오해하고 그 해에 천상병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시집인 《새》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천상병은 살아 생전에 유고시집이 출간되는 진기록을 세우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책이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상병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생존이 확인되었다.
천상병의 생존이 알려진 계기도 특이했다. 정신병원에서 천상병의 담당의사는 김종해 박사로, 평소에 수필을 써서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당시 천상병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그 신원을 알 길이 없었는데, 어느날 신문을 보다가 천상병이 실종되는 바람에 유고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기사를 보자 혹시 자신의 환자가 천상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를 신문사에 알렸다. 결국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찾은 문단 동료들은 천상병의 생존을 확인하고 그를 퇴원시켰다. 그러나 천상병은 한동안 정신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자신을 찾으러 온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천상병의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목순옥(1935~2010) 여사는 수년간 천상병을 간병해 주었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1972년 결혼하였다. 김동리 선생이 주례를 서주었다고 한다. 천상병이 아내 목순옥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동거하게 되면서 그의 오랜 방랑 생활도 끝을 맺었다.
다만 천상병 시인이 돈을 거의 벌어올 수 없는 상태였던데다가, 목순옥 여사가 생계를 위해 했던 일들이 잘 되지 않아 결혼 후에도 한동안 생활고는 면치 못했다고 한다. 생활고에서 벗어난 것은 이후 천상병 시인의 친구였던 강태열 시인이 빌려준 300만원으로 1985년 찻집 귀천을 개업하면서부터였다.
2.3. 이후
1979년 시집 '주막에서',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91년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등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지속적인 과음 탓에 천상병 시인은 결국 간경변을[9] 앓게 되었고 1993년 4월 28일 오전 11시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379번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기사에 따르면 집에서 식사도중 목이 막혀 물을 마시다 갑자기 쓰러졌다고 하며, 손쓸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곳은 이후 384번지로 지번이 변경되었으며 장암동 384번지에는 현재 수락리버시티 2단지아파트가 들어서있다. 다만 천상병 시인이 살던 집은 뜬금없게도 아직 남아 있으며, 심지어 살던 의정부가 아닌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에 있는데, 재개발로 살던 집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천상병 시인과 친분이 있던 한 지역예술가가 사비를 들여 자택을 통째로 안면도로 옮겨와 복원했다고 한다. #, # 안타깝게도 이 지역예술가도 2010년 세상을 떠나서 현재는 이분의 아내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타계 후 양주시에 위치한 의정부 시립공원묘지에 묻혔는데, 목순옥 여사도 타계후 합장되었다.
아내 목순옥이 천상병의 사후인 1993년 8월에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인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이 날은 천상병 시인이 죽은 지 100일 째 되는 날이다.
본래 천주교 신자였고( 세례명은 시몬.) 명동성당을 다녔지만 1981년 즈음에 개신교로 개종하며 연동교회를 다녔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이 쓴 시중에는 제목이 연동교회인 시도 있다. #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을 원작으로 한 KBS 1TV <인간극장> 9화 '귀천'이 1994년 방영됐다. 정진이 주인공 천상병, 김자옥이 천 시인의 아내이면서 원작자인 동시에 극의 화자인 목순옥 여사로 나왔다. 동명의 연극도 있었으며, 이재상 연출에 주연은 강태기. 이 연극은 마산MBC(현 MBC경남 창원본부)홀에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는데 당시 천상병 시인의 모교이던 마산고등학교 학생들 단체관람도 했었다. 목순옥 여사는 연극공연 며칠 후 학교를 찾아와 시인의 뜻을 기려 준 후배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3. 일화
천상병 시인은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여기 실린 것은 그중 유명한 것들로 지극히 일부이다.- 사람들이 천상병을 생각하면 흔히 순진무구한 시인이라고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미군 통역관으로 복무하고 서울대에 입학하였으나 미련없이 중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두뇌가 굉장히 명석한 천재였다. 작가 신봉승의 회고에 따르면, 천상병은 한동안 신봉승의 서재에 얹혀 살며 더부살이를 했는데 하루는 신봉승이 《서양문화사》[10]라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자 책을 뺏들곤 "뭘 하다가 아직도 이런 쉬운 책을 읽고 있냐? 지금부터 내 강의나 들어봐라."라 하곤 그 자리에서 책의 내용을 줄줄히 외워 읊었다고 한다. 또한 신봉승의 가족들과 함께 TV 퀴즈 프로를 시청하면서 퀴즈들을 단 한 문제 오답도 없이 전부 맞혀버렸었다. 이에 누군가가 "차라리 퀴즈쇼에 나가서 경품이라도 받아오라"라 말하자, 천상병은 벌컥 화를 내며 "천재는 저런 곳에 나가는 게 아니다"라 답했다고 한다.
- 시인으로서의 천상병과 평론가로서의 천상병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천상병은 시 비평에서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매우 엄격한 자세를 고수했는데, 처음에는 시인들이 천상병에게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 그의 평론을 꺼렸으나 후에 그의 비평에 틀린 말이 없음을 알고는 앞다투어 자신들이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 한창 젊었을 적 완전히 폐인 모습으로 살고 있던 천상병 시인은 머리가 하도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 한 명이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먹을까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갔다. 거기서 이발비를 지불하고 천상병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이발사에게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달라고 요구한다. 어이없어진 이발사는 환불을 해주고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 대학시절, 교수님 집에서 머무는데 화장대에 멋있어 보이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이상하게 향이 심해서 '역시 좋은 술인 가보다.'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향수였다고 한다. (출처: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 그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을 당시 죄명은 그의 친구였던 강빈구에게 공갈로 3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강빈구에게 술값으로 백 원, 오백 원씩 받아썼던 돈으로, 그것 때문에 하루 아침에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고, 45년 뒤에 전원 무죄 판결이 나왔다.
- 천상병과는 술동무로 절친한 사이였던 시인 신경림(천상병이 6살 연상)의 회고에 따르면, 먹성이 좋고 주량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또한 몸이 튼튼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험하게 살았음에도 어디서든 멀쩡히 잘 먹고 잘 살았던 탓에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속이 무쇠로 되어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그러나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먹성도 사라졌고, 술은 많이 먹었으나 주량이 줄어들어서 금방 취해 횡설수설하기 일쑤였으며,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을 이상한 글을 써서 동료 시인들이 무척 놀랐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크게 쇠약해진 것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한다.
- 천상병은 언제나 "사람은 탄탄한 조직에 들어가야 잘 살 수 있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이 영어학원 강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취직을 시켜주겠다면서 일자리 알선도 해 주었다고. 신경림은 일정한 수익이 없었던 천상병이 제 걱정은 않고 남 걱정만 하는 것을 보고는 우스워서 한마디 했더니, 천상병 또한 이에 지지 않고 "너와 나는 타고난 생리가 다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즉 자신은 남들보다 시를 잘쓰니 자기 힘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다.
- 천상병은 절친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김관식도 골탕먹이고 술사먹을 돈도 벌 겸 김관식의 집에 있던 오래된 책 한 권을 몰래 봉투에 담아 이를 고서점에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채고는 천상병이 훔친 책을 몰래 봉투에서 빼내고선 대신에 낡은 원고지 한뭉치를 넣어버렸다. 이를 모르고 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되려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천상병에게 따로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취조를 받던 당시 그의 별명은 '천희갑'이었다고 한다. 그의 얼굴이 당시의 넌센스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아서였다고 한다.
-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 당시에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전기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불임이 되었다. 아내 목순옥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다. 고문 후유증은 이뿐만이 아니었기에 치아까지 상하여 음식도 제대로 못먹을 정도가 되어 이를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정신질환까지 발생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정신치료를 받아야 했고 아내가 평생 돌봐주어야 할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 그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될 당시 그의 지인들은 그가 객사한 줄 알고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살아서 유고시집을 남기는 진기록을 가졌다. 물론 93년에 진짜로 죽은 뒤에도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출간되었다.
- 천상병 시인은 생전에 지인들에게 세금(?)으로 500원, 1,000원씩을 받아내곤 했다. 6~70년대에는 100원, 500원씩 받았던 것이 80년대 이후로는 1,000원~2,000원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징수(?)의 기준이 특이했다. 꼭 지인한테만 받았고 지인이 아닌 사람한테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이라 생각하면 1,000원, 어른이 아니라 생각하면 500원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기준도 나이같은 게 아니라 결혼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1,000원, 결혼 안 하면 500원씩 받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천상병이 스스로 어지간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천상병이 걷어간 돈들은 젊어서는 대부분 술값으로 소모되었으나, 나이 들어서는 반만 술값으로 썼고, 반은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사주는데 썼다고 하며, 이러고도 남은 돈은 장모의 장례식 비용 마련을 위해 저축을 했다고 한다.
- 평소 친하게 지낸 김동길 교수가 매일 술을 마시니까 이왕이면 좋은 술을 마시라고 비싼 조니 워커 위스키 한 병을 선물했는데 다음에 만났더니 "교수님[11]이 주신 그 비싼 양주에는 입도 대보지 못했다, 아내가 비싼 술이니까 팔아서 막걸리나 사서 마시라고 해서 팔아서 막걸리를 마셨다"라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병원장과 천상병 시인은 친구 관계였다고 한다. 그를 만났을 당시 병원장이 천상병 시인에게 배에 복수가 차서 누워있는 시인에게 배가 왜 이렇게 불렀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은 임신을 했다는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그 역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더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간의 반란이라는 시에서 드러난다.
- 역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의 일이다. 당시 소설가 이외수가 문병을 왔는데 그때 초면이었던 이외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수야! 넌 이제 내 동생이다! 이외수의 회고에 따르면 평소에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여 직접 만나 보고 싶었으나, 정작 그런 기회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뒤늦게 병문안을 가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가 이와 같은 환대를 받자 무척 감격했다는 듯. 이후에 서로 연락도 하고 자주 만난 듯 하다.
- 1988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목순옥 여사가 춘천으로 오고가면서 천상병 시인을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고 더 놀랍게도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목순옥 여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5년이 아니라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을..."
- 김동길의 회고에 따르면, 남을 원망할줄도 미워할줄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외수가 천상병에게 "동백림 사건 당시 선생님을 고문했던 사람을 길에서 다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천상병은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고 답했다. 이에 이외수가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친다면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라 물어보자, 천상병은 "괜찮다, 다 괜찮다"라 답했다고 한다.
-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보니 전화기 한 대 못 가지다가 80년대 후반에 전화기를 한 대를 가지게 됐는데 가지고 나서 전화기 곁에 계속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그가 또 잡혀가거나 그런거 아니냐고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8백만 원에 달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생전 처음 만져보는 돈을 그의 장모가 잘 숨겨둔다는 것을 하필 아궁이에 숨겨놓았다. 그런데 목순옥 여사가 이것을 모르고 불을 지폈다고 다 탈뻔 했다. 그나마 형태가 남은 것을 은행에 가져가서 그나마 절반은 건졌다고 한다.[12] 장모인 조성대 여사는 딸인 목순옥 여사가 세상을 뜨던 2010년까지도 살아있었고, 그리고 2011년 4월 12일 사위와 딸을 다 앞세우고 무려 103세의 나이로 귀천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천상병 시인은 평소 장모의 장례비 걱정을 많이 했다는데 그래놓고 장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남은 돈이 장모의 장례비만큼의 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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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을 운영했다. 천상병의 찻집이 아니고 아내 목순옥의 찻집이다. 특히 천상병은 결혼하기 전에 직업이 없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항상 시달렸는데 결혼하면서 아내가 생활비를 대주면서 나아졌다. 천상병 시인이 죽은 뒤에는 아내 목순옥 여사가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순옥 여사마저 2010년 세상을 떠나자 '귀천'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순옥 여사의
조카가 하고 있는 귀천 2호점은 계속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에 귀천 3호점인 카페귀천이 있다.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시인의 서재에 꽂혀있던 실제 서적들과 천상병 시인의 육필원고 등 유품들을 카페귀천 내 천상병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 당시 '귀천'에 자주 다니던 사람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 거냐고 묻자 천상병 시인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갚을 만큼의 공짜술을 주겠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대사란 책자에 나온 적도 있다.
- 개를 무척 좋아하여 개와 함께한 유명인이라는 책자에 나오기도 했다.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 기르던 개는 슬퍼하며 천상병이 자주 앉던 서재에 항상 누워있다가 3년 뒤에 주인을 따라갔다고 한다.
- 노원구 수락산[13] 등산로에는 천상병 공원이 있다. 여기에는 천상병 시인의 유품 203점을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있는데 천상병 시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2130년에 공개한다고 한다.
- 2017년 12월 인천광역시 강화군 건평항[14]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애주가였던 그의 특징을 반영해서 술잔을 든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동상의 술잔에 막걸리를 따라놓고는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에드거 앨런 포 사후 그의 팬이 묘 앞에 술을 바치고 갔던 행보와 비슷하다.
* 세상을 떠나기 6개월전인 1992년 10월 20일에 KBS의 '현장기록 요즘사람들'에서 그를 촬영하였던 적이 있다. 천상병 시인의 생전 모습과 육성을 들을 수 있다. 또한 아내 목순옥 여사와 장모 조성대 여사와의 일상적인 모습과 동료 시인들과의 생활이 담겨있는 귀중한 방송자료이다.
[1]
영양천씨대동보 처사공편 1권 1063쪽에는 1월 1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제적등본에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북면(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대티리 799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마산시(現
창원시) 태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3]
처사공파(處士公派) 15세 병(炳) 항렬. 영양천씨대동보 처사공편 1권 1063쪽에는 千尙炳으로 등재되어 있다.
[4]
1935. 3. 5 ~ 2010. 8. 26. 사천목씨(泗川睦氏) 목재문(睦在文)의 딸이다.
[5]
千柱炳. 1925년 11월 24일생.
[6]
천상병과는 서울대 상과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다.
[7]
당시 천상병이 강빈구로부터 받았다는 돈은 100~500원 정도의 돈으로, 1965년부터 1967년 사이에 도합 36,500원의 돈을 받았다. 물론 65~67년 당시의 1만원이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40만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36,500원이 아주 적은 돈은 아니지만 간첩에게 받았다는 공작금 치고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이다.
[8]
천상병이 석방되던 날,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명동의 금문다방에 데려갔는데, 이때 천상병은 다방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여기가 뉴욕이냐?"라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9]
죽기 5년 전인 1988년에도 간경변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해 수개월간 병원신세를 졌다 기적적으로 회생했었다.
[10]
서양사학자 민석홍의 책으로, 과거에는 대표적인 서양사 개론서 중 하나였다.
[11]
김동길 교수가 1928년생, 천상병 시인이 빠른 1930년생이라 둘은 친구나 다름없었기에 천상병 시인이 교수님이라고 부르면서 반존대를 하며 친하게 지냈다. "교수님아, 뭐하셔?" 같은 식의 화법이다.
[12]
아무리 재라도 형태만 살아있으면 은행에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꿔준다. 돈 탔다고 그냥 버리지 말자.
[13]
천상병 시인이 만년에 살다 세상을 떠난 곳은 의정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노원구하고도 경계를 맞닿아있을 정도로 가까운 지역이기도 하고, 실제 천상병 시인도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상계동에 거주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한때 노원구에서도 천상병 시인을 지역의 위인으로 밀어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4]
뜬금없어 보이지만 천상병 시인은 생전 고향 마산 앞바다가 그리울때마다 이곳을 찾곤 했다고 하며, 귀천도 이곳에서 쓴 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