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1:48:17

김희조

파일:은관문화훈장 약장.png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74
박화성
소설가
1978
김환기
화가
1978
나운규
영화감독
1978
이중섭
화가
1978
현진건
소설가
1980
박수근
화가
1980
조치훈
바둑기사
1984
박두진
시인
1988
김광균
시인
1988
김중업
건축가
1988
이봉상
화가
1989
조남철
바둑기사
1989
조훈현
바둑기사
1992
김영주
화가
1992
김춘수
시인
1992
장리석
화가
1992
전광용
소설가
1992
한갑수
교수
1995
박노수
화가
1995
전왕영
시인
1996
이창호
바둑기사
1998
김남조
시인
1999
박홍근
아동문학가
2001
권영우
화가
2001
박용철
시인
2001
박태현
작곡가
2001
신경림
시인
2001
유종호
문학평론가
2001
이지관
문화연구가
2001
최일남
소설가
2001
홍연택
지휘자
2002
고은태[1]
시인
2002
김종하
화가
2002
나춘호
출판가
2002
민경갑
화가
2002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
2002
이수홍
한국문화협회 이사장
2002
이오덕
아동문학가
2002
이형기
시인
2002
이호철
소설가
2002
정수봉
교육인
2003
박봉석
사서, 국립도서관학교 교장
2003
신동엽
시인
2003
이종상
화가
2003
천상병
시인
2003
황병기
국악인
2004
김동혁[2]
연극인
2004
김사엽
국문학자
2004
김서봉
화가
2004
김충현
서예가
2004
김희조
지휘자
2004
박연희
소설가
2004
엄대섭
도서관연구회장
2004
임동권
민속학자
2005
고우영
만화가
2005
김성구[3]
불교인
2005
김충실[4]
무용가
2005
전숙희
수필가
2005
이문열
소설가
2006
이규태
언론인
2006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
2006
한명희
국립국악원장
2006
홍기삼
교육인
2007
김주영
소설가
2007
이강덕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2007
안병희
국어학자
2008
박광진
예술인
2008
오세영
시인
2008
최종태
조각가
2008
한백유[5]
화가
2009
이미자
가수
2010
김희진
무형문화재 매듭장
2010
레프 콘체비치
러시아인 한국학자, 훈민정음 해례본 러시아어 번역 공로
2010
백건우
피아니스트
2010
백성희
연극배우
2010
장민호
연극배우
2010
전혁림
화가
2011
신영균
영화배우
2011
이수만
가수, 연예기획사 사장
2011
하춘화
가수
2011
이근배
시인
2011
해의만
국악인
2012
최영필[6]
가수
2012
김기덕
영화감독
2012
김순옥[7]
드라마 작가
2012
손숙
연극배우
2012
윤일봉
배우
2013
구봉서
희극인
2013
안성기
영화배우
2013
조용필
가수
2013
최인호
소설가
2013
김혜자[8]
가수
2014
김승옥
소설가
2014
박정란
드라마 작가
2014
송해
희극인
2014
최영한[9]
배우
2015
이천백[10]
희극인
2015
이덕화
배우
2015
이성희
음반제작자
2016
김윤식
문학평론가
2016
백영수
화가
2016
홍경일[11]
배우
2016
김명자[12]
배우
2016
김덕용[13]
희극인
2017
김남진[14]
가수
2017
박근형
배우
2017
윤여정
배우
2018
이순재
배우
2018
김민기
가수
2018
조동진
가수
2019
김혜자
배우
2019
양희은
가수
2019
봉준호
영화감독
2020
변인철[15]
배우
2020
고두심
배우
2020
유영기(1936)
인간문화재 궁시장
2021
김병기
화가
2021
이장희
가수
2021
이춘연†
영화인
2021
안숙선
국악인
2021
한석홍†
사진 작가
2022
강수연
배우
2022
박찬욱
영화감독
2023
원종철
삼원인쇄 대표
2024
신순기[16]
배우
2024
강부자
배우

[1] 필명 고은 [2] 예명 김동원 [3] 법명 월운 [4] 예명 김백봉 [5] 예명 한묵 [6] 예명 금사향 [7] 필명 김수현 [8] 예명 패티김 [9] 예명 최불암 [10] 예명 남성남 [11] 예명 남궁원 [12] 예명 김지미 [13] 예명 남보원 [14] 예명 남진 [15] 예명 변희봉 [16] 예명 신구
}}}}}}}}} ||

파일:옥관문화훈장 약장.png
옥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84
이매방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춤 보유자
1987
강수연
배우
1988
김송†
소설가
1988
유현목
영화감독
1991
김희조
작곡가
1992
구봉서
희극인
1992
금수현†
작곡가
1992
김길봉
향토문화인
1992
김학수
화가
1992
도동환
영화인
1992
오승우
화가
1992
윤장섭
건축가
1992
이인표
기업인
1992
천혜봉
서지학자
1992
황금심
가수
1995
금난새
지휘자
1995
박춘석
작곡가
1995
고성현
성악가
1998
고운봉
가수
1999
안숙선
국악인
2000
최민식
사진작가
2001
권성덕
연극인
2001
마에다 켄지
영화감독
2001
박형진
문화원장
2001
송대관
가수
2001
유광열
도예인
2001
장석웅
건축가
2001
주남철
건축가
2001
하춘화
가수
2002
김민태
국악인
2002
김혜식
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
2002
명계남
배우 겸 제작자
2002
문소리
배우
2002
문장호
2002
2002
서경선
작곡가
2002
신응수
대목장
2002
이명동
사진작가
2002
이배구
출판가
2002
이성강
애니메이션 감독
2002
임동진
배우
2002
장세건†
만담가
2002
최완귀[1]
시나리오 작가
2002
조방헌[2]
가수
2002
황일인
건축가
2003
구희서[3]
연극평론가
2003
김기덕
영화감독
2003
김숙자†
중요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
2003
김춘옥
화가
2003
박노을
온양문화원장
2003
박행보
화가
2003
배만금[4]
가수
2003
안종만
출판가
2003
윤승중
건축가
2003
이장호
영화감독
2003
이토 아비토
문화인류학자
2003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
2003
최은순
중요무형문화재 매듭장 보유자
2004
강영중
기업인
2004
김기찬
사진작가
2004
김정동
고건축학자
2004
성백엽
애니메이션 감독
2004
우제길
추상화가
2004
이정호
애니메이션 제작자
2004
정석진
문화원장
2004
최기영
대목장
2004
최민식
배우
2004
태덕수
탈춤연구자
2004
한용희
작곡가
2005
권창륜
서예가
2005
김규원[5]
무용가
2005
김태원
문화원장
2005
박기정
만화가
2005
오윤†
판화가
2005
조남식
문화원장
2006
강상수[6]
가수
2006
김준섭
서예가
2006
김태근
연극연출가
2006
백락구
문화원장
2006
이병훈
PD
2006
이정일
출판가
2006
임남곤
문화원장
2007
고두심
배우
2007
김상옥[7]
불교인
2007
오기수
건축가
2007
위황량
장흥문화원 이사
2007
전도연
배우
2007
정재만
전통무용가
2007
정재욱
문화원장
2007
카네코 카즈시게
일본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장
2007
파트리스 드 라 페이에
미술평론가
2007
한창조
조각가
2008
김산호
만화가
2008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008
김준식
문화원장
2008
박만식[8]
불교인
2008
박주환
한국화랑협회 회장
2008
안선재[9]
서강대 명예교수, 번역가
2010
김동학
중요무형문화재 전통장
2010
박춘석†
작곡가
2012
박재상[10]
가수
2012
이무호
서예가
2012
이정진
배우
2012
조민수
배우
2015
정재도
한글학자
2019
송강호
배우
2021
백영규
도예가
2024
이문세
가수

[1] 필명 최인수 [2] 예명 태진아 [3] 필명 구히서 [4] 예명 배호 [5] 예명 김성일 [6] 예명 현철 [7] 법명 범하 [8] 법명 성각 [9] 귀화 전 이름 브러더 앤서니(Brother Anthony) [10] 예명 싸이
}}}}}}}}} ||
<colbgcolor=#000><colcolor=#fff> 김희조
Heejo Kim | 金熙祚
파일:attachment/heejokimportrait.jpg
이름 김희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20년 11월 21일
경기도 경성부 수창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
사망 2001년 9월 4일 (수 80세)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군역 육군 중령 퇴역 ( 군악대 6기 / 육군본부 군악대장)
직업 작곡가, 지휘자
1. 개요2. 생애3. 주요 작품들4. 수상 경력5. 음악적 특징6. 사생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작곡가, 지휘자. 호는 춘봉(春峰).

대한민국의 국악 뮤지컬 발전에 기여한 음악인으로 손꼽힌다.

2. 생애

1920년 11월 21일 경기도 경성부 수창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매동공립보통학교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익혀 야마하 하모니카 합주단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졸업 후 한성은행(이후 조흥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김흥조에게 피아노, 안성교에게 비올라, 안병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외에 화성학 대위법을 독학으로 익혔고, 임동혁과 김순남에게는 작곡을 배웠다.[1]

1944년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군수산업체인 조선전공회사에 경리 직원으로 입사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는 철도국 직원 자격으로 조선호텔 실내악단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실내악 연주 경험도 쌓았다. 해방 후에도 명동의 7인조 경음악 합주단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1946년에는 현제명이 창단한 고려교향악단에서 비올라와 콘트라베이스 주자 겸 편곡자로 활동했다. 고려교향악단이 내분으로 와해된 뒤에는 김생려가 창단한 서울관현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직계 모체)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 겸 편곡자로, 서울시립취주악단에서는 튜바 주자로 활동하는 등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연주 경험을 했다.

1948년에 더 나은 수입을 위해 육군 정훈음악대( 군악대) 장교 모집에 지원해 6기생으로 임관했고, 광주에 주둔하던 제5여단 군악대장으로 부임했다. 6.25 전쟁 발발 후에는 육군본부 군악대장으로 이임했고, 1957년에 중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여러 행진곡 군가를 작곡했다. 동시에 김소희 박귀희 판소리 명인들을 군악대 문관으로 초빙해 이들의 음악을 채보하고 편곡하는 등 전통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2]

전역 후에는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의 작곡과 전임강사로 부임해 작곡 이론과 취주악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58년에는 KBS의 방송 전용 소편성 관현악단인 KBS 스몰 오케스트라[3]의 상임 지휘자로도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민요를 비롯한 전통음악들을 채보하고 편곡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서양 관현악과 국악기들인 단소, 피리, 가야금의 협연 작품과 민요의 합창 편곡들인 '울산아가씨', ' 아리랑', '베틀노래', '옹헤야', '한강수타령' 등을 지휘/방송했다.

1962년에는 신흥대 강사직에서 퇴임해 정부가 갓 조직한 뮤지컬 등 무대예술 공연 단체인 예그린악단에 작/편곡자로 들어갔고, 여기서도 '신고산타령' 과 '경복궁타령' 을 비롯한 민요들을 합창으로 편곡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국악예술학교(현 국립국악고등학교) 양악 교사로도 활동하면서 지영희, 성금연, 신쾌동, 박녹주, 박초월 등 당대의 국악 명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고, 이들의 연주를 듣고 채보하는 등 계속 전통음악 자료의 수집에 몰두했다.

1965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자 작/편곡자로 기용되었고, 여기서도 여러 민요를 국악관현악으로 편곡했다. 1968년에는 지휘자로도 부임해 악단을 이끌었고, 같은 해 예그린악단의 의뢰로 뮤지컬 '대춘향전' 을 작곡해 초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작곡에도 뛰어들었다. 1974년에 예그린악단이 국립가무단으로 재창단되면서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고, 여기서도 '대춘향전' 의 개정판이나 '종이여 울려라', '시집가는 날', '상록수', '심청전' 등 전통 소재에 기초한 뮤지컬을 계속 작곡했다.

이외에 '심청' 과 '춘향전' 등의 무용음악과 '처용' 등 창작 발레의 음악도 작곡했고, 판소리 '심청가' 의 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편곡도 남겼다. 1982년에는 서울예술대학 국악과 교수로 부임해 1987년까지 재직했고, 같은 해 국악관현악을 위한 합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아시안 게임 개막식의 음악 작곡과 총감독을 맡았고, 1988년의 서울올림픽에서도 개막식과 폐막식의 매스게임 음악을 작곡했다.

이후 주로 국악관현악 작품들의 작곡에 주력했고, 특히 1999년까지 작곡한 11곡의 합주곡은 지금도 한국 국악관현악단들의 기본 연주곡으로 자리잡고 있다. 2000년까지 계속 작/편곡 활동을 했지만, 이후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원주기독병원에서 투병 중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유해는 강원도 원주시의 귀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들

국악관현악
산조 주제에 의한 합주곡 (1977)
합주곡 제1번 (1982)
합주곡 제2번 (1983)
합주곡 제3번 (1987)
합주곡 제4번 (1988)
축전 1988 (1988)
플루트 독주와 국악 합주를 위한 무용환상곡 (1989)
박상근 산조 주제에 의한 합주곡 (1990)
김죽파류 산조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 (1991)
윤윤석류 산조에 의한 아쟁 협주곡 (1991)
한범수류 산조에 의한 대금 협주곡 (1992)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국악 칸타타 '서울교성곡' (1993)
합주곡 제5번 (1993)
가야금 3중주를 위한 협주곡 (1994)
농부가 주제에 의한 사시풍경 (1994)
합주곡 제6번 (1994)
서용석류 대금 산조와 관현악 (1995)
성금연의 흥을 주제로 한 가야금 협주곡 (1995)
합주곡 제7번 '자작 주제에 의한 여섯 개의 변용' (1998)
합주곡 제8번 '다심, 다악, 다선 삼매' (1998)
합주곡 제9번 '영남의 봄' (1998)
합주곡 제10번 '축전 서곡 1999' (1999)
합주곡 제11번 '짓밟힌 우리소리 움티운 찬가' (1999)

서양관현악/국악관현악+서양관현악 협주
피리와 관현악을 위한 민요 스케치 (1957)
단소와 관현악을 위한 수상곡 (1958)
성금연류 가야금 산조와 관현악 (1958)
한/양 관현악 합주를 위한 '봄의 찬가' (1988)
한/양 관현악 합주를 위한 '아름다운 농촌 풍경' (1997)

무용음악/발레
무용음악 '종송(鍾訟)' (1967)
무용음악 '심청' (1975)
발레 '처용' (1981)

뮤지컬
대춘향전 (1968. 1974 개작)
종이여 울려라 (1974)
시집가는 날 (1974)
상록수 (1975)
심청전 (1976)
태양처럼 (1976)
달빛 나그네 (1978)
신데렐라 (1980)
양반전 (1986)
아리랑아리랑 (1988)

영화음악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창근 감독, 1959)
젊은 표정 ( 이성구 감독. 1960)
귀거래 (이용민 감독. 1960)
종자돈 (김진규 감독. 1967)
장군의 수염 ( 이성구 감독. 1968)
당신 ( 이성구 감독. 1969)
여진족 (이규응 감독. 1969)
결사대 작전 ( 고영남 감독. 1969)
마님 (주동진 감독. 1970)
내 아내여 (유현목 감독. 1971)
분례기 (유현목 감독. 1971)
춘향전 ( 이성구 감독. 1971)
의사 안중근 (주동진 감독. 1972)
을화 ( 변장호 감독. 1979)
조선왕조 500년 - 임진왜란 (MBC 대하드라마. 1985)

군가/행진곡
대한 국군의 자랑
대한의 방패
개선행진곡
한글 노래
승공의 노래
6.25의 노래
현충일의 노래
나의 조국
충성을 다하라
묵념곡
자유의 표상

의례곡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사가
계몽사 사가
데이콤 사가 (1991)
신동아화재 사가 (1994)
우리증권 사가
제일제당 사가 (1990)
한국통신 사가

교가
충남대학교 교가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가
삼육대학교 교가

건전가요
잘 살아보세
조국의 찬가
민족의 노래 등

체조/체육음악
국민체조 음악
전국체전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 음악
1988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 매스게임 음악

종교음악
천주교 찬송가와 불교 찬불가 다수

여타 편곡
판소리 '심청가' 와 '춘향가' 의 창과 국악관현악 편곡
뮤지컬 ' 지붕위의 바이올린' 의 서울시뮤지컬단판 편곡
뮤지컬 ' 사운드 오브 뮤직' 의 신시 뮤지컬컴퍼니판 편곡
민요의 합창과 서양관현악용, 합창과 국악관현악용 편곡 다수

4. 수상 경력

제4회 방송문화상 음악상 (1961)
제1회 청룡영화상 음악상 (1963)
옥관문화훈장 (1991)
뮤지컬의 날 공로상 (1993)
MBC 가곡 공로상 (1994)
어린이문화예술원 반달동요대상 (1994)

5. 음악적 특징

보통 작곡을 음악대학이나 음악원에서 전공하고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달리 주로 연주 분야에서, 그것도 대부분 독학이나 개인 교습으로 배우고 시작한 인물이라 '음악은 듣기 쉬워야 한다' 는 철칙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김희조가 본좌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서양음악을 배우며 커리어를 시작한 음악인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국의 전통음악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창작에 응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향은 작곡 스승이었던 김순남에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김순남도 월북 전 함화진을 비롯한 국악인들에게 국악 이론을 배우거나 민요 등을 채보하면서 창작에 응용하는 등 민족적인 요소를 상당히 중시했다. 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 전위적인 경향까지 보였던 스승에 비해, 김희조는 오히려 음악이 어려우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쉽다고 판단해 통속성을 더 중시하면서 국악과 양악의 요소를 긴밀히 접목시키는데 집중했다.

한국전쟁 직후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양악계와 국악계는 서로 선을 그어놓듯이 나뉘어져 있었고, 적대하는 관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소 닭 보듯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김희조의 경우 군악대장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명창이나 명인들이 녹음한 판소리나 시나위 등을 비롯한 전통음악 SP를 모으고 국악인들을 군악대에 편입시키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국악계와 소통했고, 이렇게 형성된 경험이 이후 국악관현악의 태동기와 발전기에 쏟아낸 작품들에 녹아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뮤지컬의 한국 유입 과정에서도 외국의 명작을 그대로 공연하는 것이 아닌, 한국적인 소재를 통한 독자적인 뮤지컬 창작 노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한국 뮤지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특히 '대춘향전' 이나 '시집가는 날' 은 김희조 사후에도 계속 반복 상연되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합창단에서도 김희조의 민요 편곡 합창은 지금도 정평있는 레퍼토리로 계속 애창되고 있고, 군악대의 연주 곡목에도 지금까지 김희조 작곡의 군가나 행진곡, 편곡 작품이 들어있는 등 다방면에서 이 사람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음악에 문외한이거나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학창 시절 국민체조 음악에 맞추어 체조를 했거나 '잘 살아보세' 의 가락을 흥얼거리는 등 알게 모르게 이 분의 음악과 자주 마주칠 수 있다.

비록 통속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러 실험적인 시도에는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있고, 5.16 이후의 군사 정권이 주도한 문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이유로 삐딱하게 보는 시선도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국악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음악인들은 김희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조국의 찬가' 와 '민족의 노래' 같은 건전가요는 차지철이 작사를 맡은 바람에 공인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예그린악단에 들어가 뮤지컬에 전념하기 전에는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소소하지만 한국 오페라 역사에 업적을 남겼는데, 베르디의 ' 일 트로바토레' 와 플로토의 '마르타' 한국 초연을 지휘한 인물도 김희조였다.[4] 이후에도 7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계속 정기적으로 지휘대에 올라 자작곡들을 지휘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음악 전공자 외의 일반인들에게는 정작 존재감이 덜한 편인데, 세기가 넘어간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동명이인 여성 아나운서 때문에 더 공기화 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구글링을 해보면 이 분보다 아나운서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6. 사생활

군악대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어서 매우 완고하고 고압적인 인물로 여겨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작곡할 때는 영감이 안떠오르면 시간이 언제든 그냥 잤다가 삘꽂혔다 싶으면 마찬가지로 밤이든 낮이든 계속 악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마감 기한은 거의 어기지 않아서 높으신 분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일에 치여서 살다 보니 담배도 하루에 한두 갑 정도 피웠다고 하는데, 깊이 들이마시지는 않았고 그냥 뻐끔거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외에는 군악대장 시절 미군들과 어울리면서 익숙해진 초콜릿이나 오레오, 설탕 프림을 듬뿍 넣은 커피(소위 '다방커피') 같은 달달한 군것질 거리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자식 농사도 잘 지었는데, 1946년에 결혼한 부인 지정숙과 평생 좋은 금슬을 유지하면서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이들 중 큰아들인 김은기는 의사로, 작은아들인 김덕기는 성악 반주자 겸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외손녀인 박윤영도 외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뮤지컬을 비롯한 무대 작품의 작/편곡자와 대본 작가로 일하고 있다.

[1] 다만 김순남의 경우 해방 후 월북했기 때문에, 김희조가 김순남에게 배웠다는 사실은 월북 문인과 예술인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내려진 노태우 정권 시절에야 공개적으로 밝혀졌다. [2] 조선 시대 후기에도 군악을 맡은 취고수 국악을 주도했음을 생각하면 공교로운 일이다. # # [3] 현 KBS 관현악단. KBS 교향악단과는 별개의 조직이다. [4] 일 트로바토레는 1960년 5월에 고려오페라단에서, 마르타는 1961년 12월에 푸리마오페라단에서 한국 초연했다. 두 공연 모두 관현악단은 김희조가 당시 이끌고 있던 KBS 스몰 오케스트라가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