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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체첸 전쟁 Second Chechen War Втор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Шолгӏа оьрийн-нохчийн тӏо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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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 집권기 사건 중 일부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기 사건 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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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99년
8월 7일 ~
2000년
4월 30일(전쟁 기간) 2000년 5월 1일 ~ 2009년 4월 16일(반란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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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 |
결과 | |
러시아의 승리 | |
영향 |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멸망 및 체첸의 러시아 연방에 편입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치적 입지 상승 2017년까지 저강도 반란 지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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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국가 및 세력 |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임시 이사회 [[체첸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카우카즈 전선 [[카우카즈 이슬람 토후국| ]][[틀:국기| ]][[틀:국기| ]] 무자헤딘 그레이 울프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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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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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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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50,000명~80,000 사망 실종 5,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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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진 러시아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전쟁.잔존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세력의 테러 등을 합하면 2009년까지 이어졌다.
2. 제2차 체첸 전쟁 이전의 상황
2.1. 1차 전쟁 이후 체첸의 사정
체첸클리어 영상을 본 후 분노에 찬 푸틴[5] |
왜냐하면 조하르 두다예프는 체첸 부족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양쪽 모두를 끌어안는 정치를 펼쳤기 때문이다. 체첸은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1994년까지 러시아가 지원했던 내부 반군들과 내전을 벌였는데 두다예프는 내전을 하던 반군 세력들(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화전양면전술을 통해 체첸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1994년 중순 내전을 종결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두다예프가 이후 체첸 부족민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융화를 잘 시켰더라면 문제는 없었겠지만… 체첸의 정치 융화를 시키기도 전인 1996년 제1차 체첸 전쟁 와중에 두다예프가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죽고 말았다.
두다예프의 이런 정치 방식은 두다예프 사후 체첸 정치에서 독이 되었다. 특히 두다예프의 사후 군권을 장악한 샤밀 바사예프는 두다예프만큼의 정치력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성과를 좇으며 나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사예프는 체첸 내부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고 당장 정부 내부에서도 바사예프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바사예프도 1991년 체첸 대선에서 두다예프에게 밀려 낙선하자 앙심을 품고 내전을 일으켰다가 두다예프가 바사예프를 박살내 버리자(...)[6] 1992년 아제르바이잔으로 건너가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 아제르바이잔 편으로 참가했다가 아르메니아한테 또 깨지고 1992년 말에는 조지아- 압하지야 전쟁에 참전해서 또 조지아한테 깨지고(...) 1993년에 두다예프한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체첸으로 돌아온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체첸에서 세속주의자들은 바사예프가 두다예프 사후 언제라도 통수를 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믿지 않았다.
거기다 바사예프는 이븐 알하탑으로부터 전술과 와하비즘을 전수받은 자로서 샤리아에 입각한 통치를 시도하고 있었고 이에 염증을 느낀 상당수의 체첸인들은 러시아로 이탈하거나 중앙정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젤림한 얀다르비예프(Зелимха́н Абдулмусли́мович Яндарби́ев / Йандарбин Ӏабдул-Муслиман воӀ Зелимха, 체첸어 표기)의 후임 대통령이자 온건파였던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Али́евич Масха́дов / Масхадин Ӏелин воӀ Аслан, 체첸어 표기)가 어떻게든 제어하려고 했으나 군권은 샤밀 바사예프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소용없었다. 특히 바사예프의 부하들은 체첸에서 각종 행패를 부려 체첸인들에게서 분노를 샀으며 샤밀 바사예프는 성전을 명목으로 러시아령 다게스탄을 선제 침공하는 희대의 사건을 저질러 체첸을 다시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2.2. 샤밀 바사예프의 다게스탄 침공
샤밀 바사예프는 다게스탄을 '해방'하고 러시아에 이슬람 신정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999년 8월에 2,000명의 체첸군, 러시아 입장에서는 체첸군을 이끌고 다게스탄 공화국을 침략했지만 옆동네 체첸과 달리 다게스탄은 러시아 정부와 딱히 문제 없이 잘 지내 오고 있었으며 침공 이후에는 바사예프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연방정부와 사이가 더 좋아졌다.[7] 물론 다게스탄의 캅카스계 민족들도 과거엔 체첸 못지않게 분리독립을 강하게 시도하였던 적은 있었지만 소련 붕괴 후에도 여러 번 무력으로 분리독립을 시도했던 체첸에 비하면 다게스탄은 갈등은 있었어도 유의미한 수준의 분리주의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8]이에 러시아는 체첸군의 다게스탄 월경을 연방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체첸군을 와해시켰다.
3. 시작되는 침공
서방: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러시아 전차 측면: 그로즈니가 아니면 죽음을[9] |
체첸으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전차와 장갑차들 | 체첸군 기지에 포격을 가하는 러시아군 포병 |
그로즈니 시내를 포격 중인 러시아군 소속 T-72B | 항복하는 체첸군 |
그러나 1999년에 체첸 반군들의 주도[10]로 행해진 9월의 모스크바 아파트 테러, 모스크바 극장 테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연이은 테러로 수백 명의 러시아 국민이 사망했고 이는 러시아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어 러시아 정부가 체첸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제2차 체첸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당시 동원한 러시아군의 병력은 5만 명 안팎으로 1994년과 다를 게 별로 없었지만 나중에 가면 8만명으로 증강되었다.
3.1. 실패를 통한 성장
제2차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제1차 체첸 전쟁과 달리 철저하게 준비해서 병력을 훈련 및 조직화했다. 특히 러시아군은 제1차 체첸 전쟁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어 휴전 기간 동안 러시아군의 전투 능력을 크게 개선했다.-
체첸은 절대 만만한 집단이 아니며 시민들의 협조 때문에 대규모 소탕 작전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제2차 체첸 전쟁에서는 러시아군이 초토화 전술로 나가 체첸군에 협조적인 체첸인들을 찾아내 전부 사살하여 공포를 유발하고 군과 민간인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
산간지방에서의 게릴라전에는 정예 부대를 분산 투입해 게릴라전으로 대응해야 한다.
1차 전쟁처럼 대규모 부대가 이동하면 눈에 띄기 때문에 반군들의 매복에 취약하며 비효율적이고 인명피해만 많아진다. 그래서 2차 전쟁에서는 스페츠나츠와 VDV(공수부대)를 분산시키고 대규모로 투입하여 산악 지방의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한 유격전을 시행했다. 체첸군은 구 소련군 출신 인사들과 베테랑들로 이뤄진 유격전의 명수들이었지만 군사를 대규모로 재편하고 체계를 재정비한 스페츠나츠와 VDV 부대들에 비하면 결국 게릴라들에 지나지 않았다. -
항공 전력과 지상 전력의 긴밀한 연결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CAS 요청, 좌표, 통신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교육을 확실히 실시해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했다. -
전차는 멈추지 않는다.
시가전에서의 반응장갑은 전차의 생명줄이다. 빠르고 민첩하게 기동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돌아다녀야 한다. 1차 그로즈니 전투에서처럼 당황하여 정차해 버린다던가, 전차들이 몰려다니다가 선두 전차와 후미 전차가 격파되어 가운데에 있는 전차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격파되어 버리는 상황이 있어선 안 된다.
특히 보병과 기갑이 합동으로 작전을 펼쳤는데 체첸군의 대전차 부대를 러시아군 보병들이 상대하고 그들을 사살하는 동안 기갑 부대가 보병들을 지원해 주어서 1차 전쟁 당시 체첸군이 장기로 삼았던 대전차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때 러시아군은 고속기동전술 같은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고 여기에 처음부터 시가전 과정에서 사용 가능한 건물의 수를 최대한 줄일 목적으로 항공기까지 동원해 항공 공격과 포병의 대규모 포격과 공습 이후 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9년 말부터 전쟁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의 주도면밀하고 압도적인 총공세에 체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2000년 1~2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시로 러시아군이 강력한 공세를 펼쳐 체첸군을 격파하고 그로즈니를 최종적으로 점령했지만 사전포격과 공습으로 그로즈니 시가지를 콩가루로 만들어도 막상 러시아군이 진입했을 땐 방공호에서 살아남은 반군이 워낙 거세게 저항해서 러시아군은 굉장히 고생하면서 싸웠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체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체첸군은 2만 2천 명[11] 중 1만 4113명이 사살되었고 살아남은 체첸군은 그로즈니 남부의 산악 지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던 체첸군은 러시아군에게 포위된 와중에 한 러시아 대령을 매수해서 탈출로를 벌어 보려고 했으나 사실 그 대령은 FSB 소속으로 일부러 바사예프의 병력에게 매수된 척 하고 이를 러시아군에 알렸으며 러시아군은 그 정보를 토대로 육군 병력을 그 지역에 매복시켜 뒀기 때문에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군의 매복에 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유일하게 봉쇄되지 않은 지뢰 지대를 도보로 강행돌파하던 중 바사예프가 한쪽 다리를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남는 등 사상자를 잔뜩 내고 겨우 일부가 도망쳤다.[12]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거나 러시아군의 눈 밖에 난 체첸인들은 러시아군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그들 대부분은 테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살아서는 더 이상 감옥에서 나올 수 없었다. 고문이 의심되지만 테러리스트의 시신을 반환하지 않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전 | 후 |
공격 후의 사진을 보면 건물의 그림자가 거의 없는데 건물이란 건물은 거의 다 부숴놓았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잔해들. 얼마나 심하게 공습과 포격을 해 댔는지 러시아군의 공격 후 그로즈니 시내는 그냥 녹아 버렸다. 그로즈니뿐만 아니라 체첸 전체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2차 그로즈니 전투 항목에서 설명되듯이 안개가 짙은 날이 많은 그로즈니의 특성상 포격과 공중 폭격이 불가능한 날이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군 보병들이 굉장히 고생하면서 전투에 임해야 하는 것은 여전했다.
아예 대놓고 열압력탄이나[13] 당시 신형이었던 TOS-1A 부라티노, BM-30 스메르치 다연장로켓 등 거의 신무기 실험장으로 썼다. 러시아 정부는 생화학 무기도 고려해 봤지만 부작용을 우려해서 취소했다. 군에 채택되지 않은 AEK-971 같은 프로토타입형 총기도 러시아 특수부대가 극소수로 사용했다.
당시 체첸에 투입된 특수부대의 전투 |
이때 활약한 언론인 중 안나 폴릿콥스카야도 있었는데 결국 2006년에 암살당했다.
3.2. 2차 그로즈니 전투 (1999.12.26~2000.2.5)
한편 그로즈니 동부로 진입하던 러시아 연방군 병력은 그로즈니 동부 근교에 있는 마을에 진입했고 이곳에서도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는데 제33차량화화보병 여단, 제101차량화보병 여단의 대대가 전투를 벌였다. 12월 29일 연방군 현장 사령관이었던 예브게니 쿠카린(Евгений Кукарин) 대령은 체첸군이 터뜨린 화학 물질들이 자신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고 이미 도시 전역이 화학물질로 오염되었다는 보고를 받아 바로 생화학경보령을 내렸으며 기술병들에게 계속해서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할 것을 명령했고 이미 그로즈니 시내로 진입한 부대들에게는 민간인들과 함께 지역에서 후퇴하라고 명령했으며 러시아군은 체첸 민간인과 병력들을 BMP와 APC에 실어서 빠르게 대피시켰다. 기술병들은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서 조명탄을 쏘아올리는 방식을 취했다. 이때 영국의 종군기자였던 마커스 워렌(Marcus Warren)은 해당 사건을 러시아군 병력 사이에 끼어서 목격했고 체첸군이 화학공격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이후 서방 국가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후 바람은 무자헤딘 세력과 다른 체첸 반군들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화학공격을 받은 무자헤딘과 체첸 반군 세력은 오히려 러시아군이 생화학 공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점엔 영국 종군기자가 아직 기사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적 비난이 러시아에게 향할 뻔 했지만 이후 영국 종군기자가 사실을 보도하면서 바람 계산조차 안 하고 막무가내로 생화학 공격을 실행했다가 도리어 화학 공격에 당한 꼴이 되어 버린 체첸 반군과 무자헤딘은 비난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체첸이 러시아군 포로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체첸클리어 사건에 이어 해당 사건이 보도되면서 서방 국가들은 체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체첸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러시아군 |
12월 31일 러시아 연방군은 원래라면 '새해' 공격을 위해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했지만 반군의 저항과 도시의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대부분의 민간인들을 대피시켰다는 것을 고려해 대규모 포병 공격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내무부 병력은 오염되지 않은 그로즈니 북서쪽에서 계속 전투를 치렀고 그 과정에서 반군의 저항으로 손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그로즈니 산업지대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체첸 반군은 이곳에서 방어를 이어나갔다. 체첸 반군의 화학 공격으로 인한 오염 때문에 러시아군의 진군 속도는 작전 초기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으며 동시에 체첸 반군은 전술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체첸 반군 지휘부는 체첸의 거대 무장 범죄 조직들과의 연계를 통해 러시아군의 후방에 혼란을 주는 작전으로 변경했다.
2000년 1월 3일에 그로즈니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진 마을의 상황이 러시아 입장에서 급격히 악화되었다. 체첸 반군과 연합한 무장갱단이 내무부와 러시아 연방군 그룹의 일부를 산개시키려는 작전을 행했다. 해당 마을과 그 옆에 있는 마을에서 갱단 세력은 내무부 부대의 호송대를 공격했다. 교전이 벌어져 상황이 악화되자 내무부 병력의 일부가 스타로프로미슬롭스키 지구를 떠나 해당 마을로 향해 방어에 성공했지만 1월 7일 야간을 틈타 갱단 세력이 마을을 떠나 순자(Sunzha) 강을 건넜다. 1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슬람 테러리스트 하탑(Khattab)이 이끌던 300명의 산적들이 러시아군의 지원병력들 중 일부를 우회시키려고 시도했다. 산적들은 후방부대와 사령관 사무실, 임시 내무부 후방 호송대를 공격했고 러시아군은 맞서 싸웠는데, 2~3일간의 전투 끝에 산적들을 러시아군이 모두 사살하면서 상황은 진정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러시아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로즈니 작전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2000년 1월 17일 그로즈니 작전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 지원 부대가 그로즈니 시내로 도착하면서 군단의 재편성, 휴식 및 보충 후 당시 내무군 산하의 특수부대인 OMON 및 SOBR은 서부, 북부, 동부방향으로 그로즈니로 진입하면서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날씨가 허락하는 한 탱크와 자주포 부대의 원거리 지원을 받으면서 진격했다.[15] 당시 전투는 정말 치열했는데 1월 17일 최전방에서 지휘를 하던 그로즈니 특별지구 서부집단 사령관 미하일 말로페예프(Михаил Малофеев) 소장이 전사했을 정도였다. 이런 손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지속적인 공격으로 점차 무장 세력의 저항을 극복해 나갔다.
1월 19-20일 동안 그로즈니 북쪽의 산업지구의 통조림 공장과 낙농장에서 저항을 이어가던 무자헤딘 세력들이 완전히 소탕되었다. 1월 25-26일 동부집단은 다른 부대보다 더 진격을 감행해서 도심 중심지에 있는 체첸 반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방어 센터인 미누카 광장에 거의 도달했다. 1월 31일 미누카 광장에서의 치열한 전투 끝에 러시아군이 승리했고 주요 반군 세력과 무자헤딘 병력들은 패배해 후퇴했다.
포위를 진행하는 동안 러시아군은 체첸군과 무자헤딘 세력들이 캅카스 산맥 방향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포위망 중 한 곳을 느슨하게 해 놓고 그곳에 지뢰를 엄청 많이 심어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1월말 러시아군 사령부는 반군 지도자들이 도시에서 대규모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지뢰 매설과 동시에 그곳에 병력과 기관총, 박격포를 비롯한 중화기 초소들과 전차를 미리 배치해 놓아 만반의 준비를 했다. 2월 1일 밤 그로즈니에서 후퇴하는 2,000여명의 무장세력들이 지뢰밭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군은 사격하여 일방적으로 무장세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생존한 병력 대부분들은 근처 마을에 숨으려고 했으나 이를 예상하며 대기하던 러시아군에 의해 곧 가로막혔다. 그 중 정말 일부만이 산으로 갈 수 있었고, 나머지는 항복했으며 항복을 안 한 나머지는 2월 2-5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
함정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한 러시아군 T-62 115mm 활강포 형식의 사진. 전차로 포격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곁에 쌓여있는 포탄 탄피들이 인상적이다. |
베를린 공방전의 그것과 비슷하다. |
3.3. 계속되는 전초전
러시아군 T-80 | 캅카스 산맥에서의 러시아군 |
체첸군 사령관 샤밀 바사예프 | 체첸군 |
그러나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함락만으로는 체첸 반군을 모두 섬멸할 수 없었다. 특히 동원된 러시아군의 병력도 10만~수십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던 소련 시절과 달리 10만 이하의 병력이기에 완벽하게 저지하기엔 인원이 부족해서 체첸군의 퇴로를 완벽하게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때 러시아의 재정이 좋지 못해서 10만~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면 재정에 심한 부담을 줄 수 있었다.
따라서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었고 2004년에는 그로즈니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아흐마트 카디로프 체첸 공화국 대통령과 수행원 수십 명이 사망하는 등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했다. 계속된 테러는 체첸 반군의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특히 체첸인들은 러시아군 포로를 전기톱으로 썰어죽이고 러시아인 소녀를 윤간한 다음 그녀의 손가락 3개를 총으로 쏘는 악행을 저질렀고 이를 영상으로 찍어 소지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상을 노획하여 보게 된 러시아 군인들이 경악하고 분노했으며 나중에 이 영상을 보게 된 푸틴과 러시아 수뇌부도 경악했을 정도였다.
체첸 내부도 러시아에 충성하는 친러계인 체첸 공화국과[16] 독립을 희망하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나뉘었는데 물론 이치케리야 체첸이 구 체첸 정부다. 이들은 그나마 서방의 동정 여론과 이슬람권의 지원 속에 저항을 지속했지만 샤밀 바사예프가 2004년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통해 러시아에 공격당할 명분을 제공하자 깜짝 놀란 체첸인들과 지원 세력들이 등을 돌림과 동시에 이미 잃고 있던 서방 세력들의 지지도 일거에 싸늘해졌고 특히 미국은 9.11 테러를 겪었으니 절대로 지지해 줄 수가 없었다. 전 대통령이자 저항 세력 지도자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2005년 암살되었고 이후 체첸군을 이끌던 샤밀 바사예프가 2006년 인구세티야에서 연방보안국의 공작으로 사살되면서 적어도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체첸 저항 세력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이후 도쿠 우마로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체첸 독립 정부는 소멸되었고 그 자리를 러시아 연방 산하 체첸 공화국 정부가 완전히 자리잡았다.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토벌을 계속하여 체첸군 2,186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결국 체첸군은 대원들이 러시아군의 회유에 넘어가 항복하거나[17] 사살되어 수가 극도로 감소했고 수뇌부도 러시아군에게 대부분이 암살되거나 사살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궤멸되었다. 이치케리야 공화국이 멸망하자 러시아 정부는 승리를 선언하면서 자축했고 옐친 시대 이후 사실상 독립 분위기였던 체첸 지역들은 완전한 러시아 영토가 되었으며 체첸에서의 승리를 들고 온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굉장히 크게 올랐다.
4. 전쟁의 마침표
2009년에는 러시아 정부가 체첸의 '대테러 작전'을 종결한다고 선언하여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확정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이 시점을 제2차 체첸 전쟁의 종결 시점으로 본다.살아남은 극소수의 체첸군 중 일부는 튀르키예로 피신했는데 러시아에서 가만 놔두지 않고 암살팀까지 보내면서 고위 인사 3명을 사살하자 튀르키예 경찰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기사 2019년 8월에는 독일로 망명한 체첸군 지도자가 암살되었다. # 오스트리아에서도 망명한 체첸 반체제 인사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제2차 체첸 전쟁의 승리는 푸틴을 대통령직으로 올려 놓는 것에 크게 공헌하였다. 제2차 체젠 전쟁 당시 러시아는 1990년에 전후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찍은 이래 경제가 좋았던 적이 없었던데다, 1998년에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하는 등 정국은 혼미의 연속이었으며 아예 2000년 대선에서 공산당이 집권할 것이라는 예상까지도 나왔을 정도였던 데다 제1차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자국 내 분리독립 세력도 통제를 못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러시아의 국가적인 위상마저 만신창이가 되었다. 결국, 지지율이 바닥을 찍던 옐친은 탄핵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뒤에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는데 이전까지 러시아 대중들에게 무명의 인물이었던 푸틴은 체첸 반군을 강하게 찍어누르면서 러시아인들에게 오래간만에 사이다를 안겨주었다.
이를 통해 푸틴은 겐나디 주가노프, 프리미코프와 호각을 다투면서 대권주자로써 지지율을 올렸고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가 당초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선전하는 데 성공했다. 옐친이 푸틴에게 조기에 대통령직을 물려주고[18] 2000년 대선에서 푸틴이 과반수 이상의 득표를 확보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0년대에 망가졌던 경제도 어느 정도 복구하는 데 성공하면서 2024년 기준으로 현재까지 계속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푸틴이 제1차 체첸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고전했으면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남았을 것이고 옐친도 말년을 별장이 아닌 감옥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 전쟁이 끼친 나비 효과는 엄청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때까지만 해도 푸틴은 친옐친파인데다 친서방 성향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았기에 국제적인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푸틴은 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한 뒤 승리하면 어찌됐건 표가 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고 이후 이해관계가 있는 분쟁지대 곳곳에 군대를 보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었을 때 남오세티야 전쟁을 개전했고 2014년에는 유로마이단 혁명이 일어나자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돈바스 전쟁에도 개입했으며 시리아 내전에 참전해 시리아를 '안정화'시키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했는데 이를 2018년 연금개혁 이전까지 경제제재에 저유가까지 겹쳐 물가가 크게 오르고 실질 임금수준이 하향조정되는 경기침체에도 지지율은 80%를 웃도는 등, 정국이 어려워질때마다 전쟁을 일으키면서 잘 써먹었으나 2022년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 시행한 특수군사작전은 단기전으로 끝날거라는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전쟁 의지는 결연했고, 무려 3년에 가까운 소모전으로 전개되어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남겼다.
[1]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
[2]
체첸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람잔 카디로프의 아버지다. 원래는 반러시아 인사였지만 1999년 다게스탄 침공을 계기로 친러파로 전향했다.
[출처]
Oryx
#
[4]
2003년부터 2009년까지 2,186명 전사
[5]
이 당시에는
총리였다.
[6]
두다예프는 바사예프의 세력을 박살내기 위해 바사예프를 제외한 바사예프 파벌의 나머지 주요 인사들을 체첸 임시정부의 주요 각료에 지명하고 바사예프가 이끄는 세력 중 세속주의자들을 끌어들여 체첸 개발 사업을 맡겼다. 그러자 바사예프는 자신의 세력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러시아의 손을 빌려(!!)
그로즈니에서
테러를 일으켰으나 두다예프는 바사예프 잔당을 간단히 진압했다.
[7]
거기다 복잡한 민족 분포에도 불구하고 "자마트(djamaat)"라 불리는 전통적인 정치 체제 덕에 어느 한 민족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견제되는 등 정치 면에서 체첸보다 안정적이었다. 물론 이 동네도
이마라트 캅카스의 하부 조직인 빌라얏 다게스탄이 발호해 혼란스럽기는 했다.
2013년
볼고그라드 폭탄 테러도 이들이 주범으로서 이마라트 캅카스 따위 쌩까고 지들 맘대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충성 맹세를 한 집단이다.
[8]
소수의 분리주의자나 살라피스트 정도만 제외하면 조용했고 이들도 대부분 이치케리야 체첸의 광신적 극단주의자들이나 이마라트 캅카스를 포함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에 선동되어 이들을 도운 경우였다.
[9]
~ or bust라는 영어 표현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다, 무조건 ~, ~가 아니면 죽음을'이란 의미이다. Grozny or Bust는 러시아군의 진격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10]
단 이 부분에 대해서 논쟁이 있다. 영국으로 망명한 연방보안국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모스크바 폭탄 테러는 연방보안국이 푸틴을 선거에 당선시키기 위해 시도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샤밀 바사예프도 다게스탄 침공은 인정했지만 모스크바 테러는 자기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러시아 폭탄 테러를 다룬
영어 위키백과 문서들에 몇 가지 논쟁이 서술되었다.
#신고를 받고 지역 경찰이 출동해서 체포한 범인의 신분이 FSB소속으로 밝혀진점 FSB수장 니콜라이 파트루셰프는 훈련이며 내용물은 설탕이라 했지만 폭탄으로 밝혀진점 독립조사를 하던 수사관 2명이 암살 한명은 감옥에 간 점 등을 이유로 러시아 정부, 정확히는 막 총리에 오른 푸틴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체첸전의 개전 명분 조작 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11]
혹은 3만 명으로 추정한다.
[12]
러시아에서는 우르스 케르트 전투라고 불린다. 초반에는 체첸군이 매복 중이던 러시아 공수부대 1개 중대를 역으로 포위하여 궤멸시키는 등 꽤 선전했지만 이후 복수심에 불타는 러시아군에게 있는 대로 두들겨 맞으면서 박살이 났다.
[13]
주로 체첸군이 저항하거나 숨어 있는 지하실이나 벙커에 투입하여 체첸군을 대량으로 몰살시켰다.
[14]
6.25 전쟁 사상자는 한국 인구의 3% 정도다.
[15]
그로즈니는 주기적으로 짙은 안개가 끼기 때문에 공중지원과 포병지원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6]
다만 그렇다고 체첸 공화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척결된 것은 전혀 아니다. 체첸 공화국은 근본주의적인 통치를 하고 있어 러시아 내부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도 체첸 공화국의 근본주의적 통치가 불법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체첸 정부에 제재를 가하면 또 내전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일단은 독립 시도를 하지 않는 선에서 놔 두고 있다.
[17]
대원들의 가족 전체를 인질로 잡고는 항복하도록 했다. 물론 항복을 거부하면 가차없이 사살했다.
[18]
당시 옐친은 건강이 나빠서 더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