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22:28:56

블라디미르 푸틴/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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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활동

푸틴은 소브차크와 KGB에 양다리를 걸친 채로[1] 소브차크의 해외출장에 동행한 뒤 시위원장 특별보좌관으로 승진하며 체제와 반체제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1991년 6월, 소련 각지에서 발생하는 유혈 사태와 중앙위원회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고르바초프 세력이 흔들리던 틈을 타 빠르게 권력기반을 넓히던 보리스 옐친처럼 소브차크는 레닌그라드에서 개명된 상트페테르부르크[2]의 초대 시장에 당선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 무렵 소동을 조장하던 분리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공산당 보수파와 달리 고르바초프는 좌/우익의 반체제 인사들을 포용하며 개혁개방을 이어가길 고집했고 자신이 호의를 배풀었던 옐친[3]이나 소장파 공산당 관리들과 은밀히 교감하며 8월 요통치료를 위해 크림 반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고르바초프가 자리를 비운 사이 KGB 국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와 보수파 중심으로 쿠데타 논의가 이루어지고 별장에 있던 고르바초프에게 당 원로들의 명의로 비상사태 선언을 건의했는데 고르바초프가 이를 단칼에 거절하자 KGB 경호부대를 동원해 고르바초프 일가와 대통령 경호원들을 강제로 별장에 연금시키면서 8월 쿠데타가 일어났다.

보수파 측은 KGB의 방대한 조직력 전체를 쿠데타에 동원하려고 했으나 적잖은 KGB 무장부대와 각 부서 요원들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지지하며 보수파에게 적극적으로 항명하거나 아예 쿠데타 협조 지시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중적인 생활을 하며 KGB와 소브차크 양측의 신임을 얻은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대외관계위원장에 오른 뒤, 칼리닌그라드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뒤늦게 쿠데타 소식을 접했다. 푸틴은 크류츠코프 KGB 국장을 평소에도 높이 평가했으며 크류츠코프와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소련을 재건할거라 생각하고 보수파를 지지했지만, 정작 본인은 신중히 상황을 지켜볼 뿐 쿠데타를 돕기 위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소브차크가 쿠데타 반대파와 협조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던 무렵 푸틴은 보수파와 쿠데타 반대파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소련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저항시위가 일어나고 쿠데타 반대파가 하나로 결집하자 대세를 읽은 푸틴은 KGB에 사표를 제출하고 소브차크 편으로 완전히 배를 갈아탄다.

이후 쿠데타가 제압되고 당시에 우익진영의 거두인 옐친에 의해서 소련은 해체수순을 밟는다. 생존자로 남은 푸틴은 새로운 러시아 연방에서 소브차크를 계속 보좌하며 해외 투자유치 등 각종 시정업무에 집중했다. 잇따른 정책실패로 인해 시당국의 인기가 차츰 감소하던 1992년, 푸틴은 자신이 깊게 관여한 바 있는 생필품 수입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은 뒤 소브차크의 비호를 받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으로 승진했다. 그외에도 푸틴은 소브차크 밑에서 부시장으로 일하던 시기에 공금 유용, 내부자 거래, 리베이트 등 여러 가지 부패 의혹을 샀다. 승승장구하던 소브차크 시장이 1995년 선거에서 패배하자 푸틴도 부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에는 푸틴 가족들에게 여러 사고가 은근 많았다. 아내인 류드밀라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중상을 입고[4] 새로 지은 집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5] 이런 불운을 겪던 중 푸틴은 1996년 새 시장의 지시로 직무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이후 한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직으로 방황하다가 소브차크와 KGB선배들의 도움으로 옐친 선거캠프에 작은 직함을 얻은 뒤 캠프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린다. 옐친의 재선이 성공하자 성실히 친옐친 인사로 활동하며 인맥을 넓힌 푸틴은 옐친 이너서클과 올리가르히들, 특히 푸틴의 전폭적인 후원자였으나 나중에 정적이 된 보리스 베레좁스키에게 신임을 받으며 고속으로 승진해 KGB 제2총국(국내담당 핵심부서)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 장관, 대통령 행정실 총무실장, 내무담당 수석보좌관 등 다수의 정부 요직에서 재직하였다.[6]

그러다가 1999년 8월 보리스 옐친에게 총리로서 깜짝 발탁되었다. 이는 옐친의 신체적, 정치적 한계를 우려해 수년간 후계자를 몰색하던 핵심 측근들의 판단과 당시 막강한 자본으로 옐친을 지원하던 베레좁스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7]

러시아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전무했던 푸틴은 총리 취임 초기에는 옐친처럼 국민들에게 냉소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승기를 잡으면서 그동안 상황에 지친 러시아 국민의 지지가 급상승하여 12월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친 옐친 정당[8]이 총선에서 선전을 거두는 데 일조하였고 그 공로로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12월 31일 보리스 옐친이 건강 문제[9]로 사퇴하면서 푸틴에게 직위를 넘겨주어 2000년 5월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며 2000년 3월 대선에서 52.9%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고 정식으로 대통령직에 오른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12월에 조기 퇴진한 이유는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차기 대선 후보로 내정된 후계자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푸틴은 유권자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체첸 반군과의 싸움을 최대한 빠르게, 성공적으로 끝내야만 했다. 옐친의 입장에서는 이미 정치적으로 파산한 자신이 앞으로 몇 달 더 재임해봐야 자신과 함께 푸틴의 지지율까지 떨어져서 결국 유력 당선후보로 꼽히던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가 차기 대통령이 될 확률만 높여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옐친은 각종 혐의로 기소된 뒤 100% 감옥에서 은퇴생활을 보낼 예정이었기에[10] 사임안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물러나는 조건으로 퇴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푸틴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옐친에게 퇴임 후에도 면책 특권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옐친과 푸틴의 사이는 그런대로 괜찮았고, 사후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11]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옐친이 푸틴을 후계자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 사실, 집권 초기의 푸틴은 친옐친파인데다 친서방 성향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국제적인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2024년 기준으로 현재의 푸틴은 반서방 성향 정치인의 대표격으로 거론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1.1. 블라디미르 푸틴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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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전히 KGB 요원(중령 계급)으로 활동하며 정기적으로 KGB 레닌그라드 지부에 선출직 시위원회 감시내역을 보고했다. [2] 정식개명은 러시아 중앙정부의 인가를 받은 뒤 11월 7일에 이루어졌다. [3] 옐친은 쿠데타 이후 정국에서 코너에 몰린 고르바초프 일파를 명렬히 공격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4] 신호를 무시한 과속차량이 류드밀라의 차를 들이받았는데 류드밀라는 중상, 동승했던 막내딸 예카테리나는 경상을 입었다. 다행히도 류드밀라는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상까지는 아니었다. [5] 이때 푸틴이 불타는 집에 들어가 현금을 가지고 나왔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고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청렴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부패한 러시아 정치계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겪어도 얼마든지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 [6] 여담이지만 소브차크를 모시던 부시장 시절, 과거 소련 공산당 소유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비지니스 센터 건물 한편에 공산당 지지자들이 소련 국기를 내걸었다가 푸틴을 비롯한 건물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국기를 다시 수거하는 일이 몇차례 반복되자 푸틴은 국기 게양대를 아예 철거해버렸다. [7] 푸틴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얼마안 가 옐친의 이너서클과 정면으로 충돌하는데 옐친의 가신이던 악쇼넨코, 카샤노프, 볼로신 등 크렘린 고관들과 자신의 옛 후원자였던 베레좁스키 및 기타 적대적 올리가르히들(상당수가 정부 고위공직자 직함을 겸직)을 차례로 축출하고 이때 자신과 협력한 친푸틴 올리가르히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한다. 특히 베레좁스키는 영국으로 탈출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맹렬히 푸틴을 비판하다가 몇차례의 위기를 겪은 뒤, 러시아 당국의 압박에 굴복하여 푸틴에게 용서를 구하다 2013년에 사망했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 [8] 옐친은 무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9] 2007년에 그가 사망하게 된 원인인 심장 이상은 1998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 옐친은 이미 대통령 임기 중에 다수의 범법행위을 저지르고 수시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사고 있었는데, 임기 후반부에는 이를 뒷받침해줄 러시아 검찰의 폭로도 나온 상황이라 정권교체에 성공한 공산당이 이걸로 건수를 잡으면 퇴임하자마자 감옥에 들어갈 판이었다. [11] 푸틴 초창기에 총리를 지내다가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총리직에서 해임 당한 뒤,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카시아노프에 의하면 말년의 흐루쇼프처럼 풍족하지만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전화도 맘대로 못하는 불편한 삶을 살았다고 하고, 옐친도 사석에서 은근히 푸틴을 까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푸틴에게 비토를 날린 건 아니며, 소련 붕괴 이후 옐친 시대에 푸대접을 받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대우를 받았다.(사실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푸틴 시대에는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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