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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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丁穆(? ~ 383)
동진의 인물. 자는 언원(彥遠). 예주 초국(譙國) 출신.
2. 생애
벼슬을 지내면서 치적을 쌓아 진정후(真定侯)에 봉해지고 누차 승진해 순양태수에 임명되었다.태원 4년(379년) 2월, 조정으로부터 진위장군, 양주자사(梁州刺史)에 제수받았으나,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전진의 천왕 부견이 보낸 군대에 의해 순양(順陽)이 함락되면서 사로잡혔다. 정목이 장안(長安)에 이르렀을 때, 부견은 그를 등용하고자 불렀지만 정목은 병을 핑계로 전진에 입조하지 않았다.
태원 8년(383년) 8월,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켜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자, 정목은 관중의 토호들을 찾아다니며 기의를 모의하고 장안을 습격할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계획을 시행하기도 전에 일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살해당했다.
정목은 죽기 직전에 아내 주씨(周氏)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훗날 비수대전이 끝난 뒤에 다시 동진으로 귀환한 주씨는 이를 들고 수도 건강(建康)에 들어가 효무제 사마요를 알현하길 청했다. 정목의 유서를 받아본 효무제 사마요는 정목의 충절을 칭송하고, 그를 용양장군, 옹주자사로 추증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