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19:18:56

장자(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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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張蚝
생몰연도 불명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병주(幷州) 상당군(上黨郡) 현현(泫縣) 출신. 본래 성은 '궁(弓)'이었나, 병주에서 할거하던 군벌 장평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장(張)'으로 바꿨다.

2. 생애

소를 끌면서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용력이 뛰어났고, 성벽의 높이에 상관없이 뛰어넘는 비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병주의 군벌 장평은 이런 장자의 능력을 아껴 자신의 양자로 들이고 성을 장씨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자는 장평의 애첩과 은밀한 관계를 맺다가 장평에게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장평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장자는 잘못을 깨우치고 몹시 수치스러워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손수 제거하여 고자가 되었다.

영흥 2년(358년) 2월, 전진의 천왕 부견이 군사를 일으켜 장평의 세력을 정벌하였다. 전진의 전봉독호 등강이 기병 5,000기로 선봉에 서서 분수(汾水)에 이르자, 장평은 장자를 보내 이를 영격케 하였다. 장자와 등강은 서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격한 전투를 벌였으나, 10여 일 동안 승부가 전혀 나지 않았다.

영흥 2년(358년) 3월, 천왕 부견의 본대가 동벽(銅壁)에 이르자, 그 소식을 들은 장평이 모든 무리를 내몰아 전진군을 쳤다. 장자가 홀로 큰 소리를 지르면서 전진군의 진영을 들어갔다 나갔다 하기를 너덧 번 반복하며 많은 적군들을 베어 죽이는 용맹함을 선보이니, 부견은 장수들에게 장자를 생포해오는 자에게 포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전진의 응양장군 여광이 달려나와 장자와 싸우면서 그를 찔러 상처를 입혔고, 이때를 틈타서 접근한 등강이 장자를 사로잡아 부견에게 바쳤다. 장자의 용맹에만 의존하던 장평의 무리는 장자가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고 모두 놀라 흩어졌고, 장평은 대패하여 사람을 보내 전진에 투항하였다. 이때 포로가 되었던 장자도 항복하여 호분중랑장에 임명되었고, 부견 역시 장자의 용맹을 좋아하여 두텁게 예우하고 무척 총애하였다. 이후 장자가 광무장군으로 승진하여 등강과 더불어 부견의 좌우를 지키니,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만인지적이라 칭하였다.

건원 4년(368년) 정월, 전장군 양안과 함께 섬성(陜城)의 위공 부수(苻廋)를 공격하였다. 장자 등은 부견의 지시에 따라 섬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해 적군을 감시하면서 보국장군 왕맹 등이 나머지 공들의 반란을 진압할 때가지 대기하였다.

건원 4년(368년) 12월, 포판(蒲阪)을 함락시킨 왕맹이 장자와 합류한 뒤, 마침내 섬성을 공격해 떨어뜨리고 부수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건원 6년(370년) 6월, 천왕 부견이 왕맹에게 부절을 내려 전연 정벌을 명하였다. 왕맹은 패상(灞上)에서 출격하여 북진하였고, 장자도 호아장군에 임명되어 왕맹군에 종군하였다.

건원 6년(370년) 8월, 진남장군 양안의 진양(晉陽) 공략이 지체되자, 마침 호관(壺關) 점령에 성공한 왕맹은 양안과 합류하였다. 진양성 내에는 식량이 매우 많았기에, 왕맹은 지구전 대신 성 아래로 땅굴을 파고, 장자로 하여금 그 지하도를 통해 장병 수백 명을 이끌고 성 안으로 진입케 하였다. 잠입에 성공한 장자는 크게 소리 지르고 날뛰면서 성 내부를 혼란스럽게 하였고, 안쪽에서 성문을 열어 전진군이 들어오게 하였다.

건원 6년(370년) 10월, 진양까지 점령한 왕맹은 노천(潞川)에 주둔해 전연의 사도 모용평이 이끄는 300,000명에 달하는 전연군과 대치하였다. 왕맹은 먼저 기병 5,000기를 뽑아 모용평의 군영 뒷편으로 접근해 전연군의 군량을 모두 불태워 모용평이 싸움에 응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열원(涅源)에서 전연군과 회전을 벌였다. 장자가 한 손에 창을 든 채로 서성, 등강 등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였다가 빠지기를 4번 정도 반복하니 죽거나 다친 적병이 무척 많았다. 결국 해가 중천에 뜰 즈음에 모용평은 대패하여 달아났고, 죽은 전연군이 50,000명, 투항하는 자가 100,000여 명에 이르렀다. 전진군은 노천에서 거둔 대승의 기세를 몰아 전연의 도읍인 업(鄴)까지 함락시켰고, 헌무제 모용위와 모용평은 용성(龍城)으로 도주하다가 전진군에게 붙잡혀 항복함으로써 전연은 멸망하였다. 장자는 전연을 멸망시킬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7년(371년) 정월, 수춘(壽春)에서 대사마 환온이 이끄는 동진군에게 포위당한 반란군 원근(袁瑾) 등이 사람을 보내 전진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천왕 부견은 장자와 무위장군 왕감(王鑒)에게 20,000 군사를 주어 원근을 구원케 하였다. 장자가 팔공산(八公山), 왕감이 낙간(洛澗)에 각각 주둔하여 형세를 살피니, 환온은 회남태수 환이, 남돈태수 환석건을 파견해 야밤에 장자와 왕감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동진군에게 패한 장자와 왕감은 모두 신성(慎城)으로 퇴각하였다.

건원 12년(376년) 10월, 전금장군에 임명되어 구난(倶難), 등강과 함께 보•기 200,000명을 거느리고 대나라의 탁발십익건 정벌에 참여하였다.

건원 12년(376년) 12월, 대왕 탁발십익건과 그 아들들이 탁발십익건의 서장남 탁발식군에게 살해당하자, 탁발식군 형제들을 따르던 무리가 대거 이탈하여 전진군에게 항복하였다. 장자와 이유(李柔)는 이를 기회로 삼아 대나라의 도읍 운중(雲中)을 점거하여 혼란에 빠진 대나라를 멸망시키고, 정변을 일으킨 탁발식군과 그를 부추긴 탁발근을 붙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건원 15년(379년) 2월, 병주자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건원 16년(380년)에 후장군으로 옮겨졌다.

건원 19년(383년) 5월, 동진의 형주자사 환충이 전진군에게 빼앗긴 양양(襄陽)과 촉(蜀)을 탈환하고자 100,000 대군을 일으켜 양양을 침공하였다. 또, 전장군 유파가 면수(沔水) 이북의 여러 성을 쳤고, 보국장군 양량(楊亮)은 촉 땅의 성 5개를 뽑은 뒤 부성(涪城)을 공격하였으며, 응양장군 곽전(郭銓)이 무당(武當)을 공격하였다. 천왕 부견은 공격당하는 각 지역에 군사를 파견해 구원하였고, 이때 장자는 보병교위 요장과 더불어 부성 구원 임무를 맡았다. 이후 장자와 요장의 군대가 사곡(斜谷)을 넘어 부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양량은 두려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났다. 이 공적으로 장자는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0월, 천왕 부견이 100만 대군을 일으켜 동진을 침공하자, 장자는 부융, 모용수와 함께 선봉이 되어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동진군을 격파하고, 동진의 평로장군 서원희(徐元喜)와 안풍태수 왕선(王先)을 사로잡았다.

건원 19년(383년) 11월, 동진의 광릉상 유뢰지가 낙간을 지키던 위장군 양성을 대파하고, 비수(肥水) 인근까지 진격해 나아갔다. 동진군을 지휘하던 사석이 비수를 건너려 하자, 장자는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비수 남쪽 언덕까지 달려가 사석을 격파하였다. 사현은 뒤늦게 비수에 이르러 모든 대비를 마치고 장자가 습격해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이미 비수 건너편으로 넘어간 장자는 진영을 세워 굳게 지킬 뿐이었다. 결국 동진군도 차마 비수 도하를 시도하지 못하고 비수 남쪽에 진영을 세워 주둔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천왕 부견이 사현의 요청에 응해 군대를 뒤로 물렸다가 동진군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였고, 장자 역시 천왕 부견을 따라서 낙양으로 후퇴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2월, 비수대전에서 대패한 천왕 부견이 어느정도 패잔병을 수습해 낙양에 도착하니, 그 무리가 100,000에 달했다. 부견은 장자에게 우림군 5,000을 주고, 진양으로 보내 그곳을 진수케 하였다.

건원 20년(384년) 10월, 모용수가 전진을 배반하고 업성을 포위하자, 업을 지키던 장락공 부비가 진양으로 사람을 보내 장자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장자는 병력이 적어 부비의 구원군 요청을 거절하였다.

건원 21년(385년) 8월, 장락공 부비가 업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도망쳐 노천(潞川)에 이르렀다. 이에 장자는 부비를 영접해 진양성으로 모셨다.

태안 원년(385년) 9월, 장락공 부비가 아버지 선소제 부견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상한 뒤 황제로 즉위하자, 장자는 시중•사공에 임명되고, 상당공(上黨公)에 봉해졌다. 이후 왕영(王永)의 추천으로 중군도독에 임명되어 중용받았다.

태안 2년(386년) 6월, 태위에 임명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태위에 임명된지 4개월만에 애평제 부비가 섬성에서 전사하고, 진양성 역시 후연이 머지않아 빼앗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좋은 최후를 맞이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