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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포진성 西平浦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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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진성 多大浦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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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포진성 知世浦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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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 | |
웅천왜성 [ruby(熊, ruby=ウン)][ruby(川, ruby=チョン)][ruby(倭城, ruby=わじょう)] | Ungcheon Japanese Fortress |
|
<colbgcolor=#01454F> 국가유산 명칭 |
창원 웅천왜성(昌原熊川倭城) |
이칭 |
일본제이수군기지(日本第二水軍基地) 웅포평행장진(熊浦平行長陣) 외남산고왜성(外南山古倭城) 남산왜성(南山倭城) 웅천영(熊川營) 웅포성(熊浦城) 와성(臥城) 의실(義室) |
형태 | 제곽식 산성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
우에스기 카게카츠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추정] 고니시 유키나가?[추정] |
|
폐성 | 1595년 (선조 28년, 추정)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17,930㎡ |
지정연도 | 1998년 9월 9일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산211-1 |
[clearfix]
1. 개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경 일본군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쌓은 일본식 산성이다.2. 역사
-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지난 6월 27일 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치보(馳報)에 "부산 · 김해의 적선이 웅천으로 옮겨 모였는데 그 수가 7 ~ 8백 척은 족히 된다."고 했던 것을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웅천 등지에 옮겨와서 정박해 있던 그 적선들이 금년 6월 23일 야음을 틈타 몰래 바다를 건너
거제 경계에서부터 영등포 · 송진포 · 하청가이(河淸加耳)까지 가득 정박하고 있는데 선박의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염(閭閻)을 분탕(焚蕩)하는 것은 전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이들 적세를 보건대, 수륙(水陸)이 함께 공격하여 호남을 침범할 뜻이 분명하므로 적로의 요충인 거제의 경계와 한산도 · 견내량 등처에서 삼도(三道)의 주사(舟師)가 합세하여 죽을 각오로 막기로 작정하였으나 행재소(行在所)가 멀리 있어 미처 치보(馳報)하지 못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7월 20일 기사호남의 수군은 웅천에 있는 왜적에게 제지당하여 나아갈 수가 없는 데다가 수전(水戰)에서도 실패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3년 9월 17일 기사이제 흉적이 잠깐 물러간 것은 소굴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아닙니다. 그들이 경성(京城)을 떠나면서부터 그 연도(沿道)에서 노략질을 자행하는 등 조금도 금즙(禁戢)함이 없었고 대군이 고개를 넘어 진격한 다음에야 서서히 물러가 경상좌우도의 요해지인 울산 · 서생포 · 동래 · 부산 · 기장 · 언양 · 양산 · 김해 · 웅천 · 제포 · 가덕 · 천성 · 거제 · 영등포 · 율포 · 옥포 · 지세포와 수군절도사의 진영이 있는 군읍(郡邑)과 진포(鎭浦) 등처에 둔취하고 있는데 거의 수십 구역이나 됩니다. 흉적들이 여기에다 방옥(房屋)을 짓고 성호(城壕)를 수축하는가 하면 양곡을 운반하고 곡식을 가꾸면서 관병(官兵)에게 큰소리치며 공갈 협박을 가하고 있으니 그 흉모(兇謀)의 소재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19일 기사경상우도는 김해 · 죽도 · 덕교 · 웅천 · 웅포 · 안골포 · 제포 · 천성 · 가덕 · 거제 등지에 역시 전처럼 웅거하여 적선이 항상 드나든다고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0일 기사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 웅천 · 제포에 4천, (...) 귀국(貴國)에서 만일 2 ∼ 3월 이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하면 다행히 초멸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시기를 놓치고 일본의 정병 예졸이 4 ∼ 5월 사이에 모두 나오면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적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김해와 웅천에 있기 때문에 배신 이빈(李薲) 등은 의령을 지켜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막고 있으며 (...)
『 조선왕조실록』, 1594년 8월 20일 기사지금 적병이 동으로는 서생포에 있으니 그들은 장차 관동(關東)으로 향할 것이고, 서쪽으로는 웅천과 김해에 있으니 그들은 장차 전라도로 향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4년 11월 5일 기사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웅포(熊浦)에는 행장(行長), (...) 유 대무가 현소에게 준 시는,
웅천의 산 빛은 푸르고 푸른데
산위의 외딴 성 광활한 지대를 굽어본다
땅은 동남쪽 부세 없는 곳에서 끝나고
연기 낀 구렁마다 잔우(殘雨) 걷히고
난간 밖의 봉우리마다 석양볕 흩어져 있다
은하수 속에 뗏목을 타고
금오궐(金烏闕) 아래 부상(扶桑) 보게 된 것 기쁘다
하였고, 현소의 화답시는,
하늘을 우러러 묵묵히 친교를 비노라니
국화 심은 옛 정원 황폐해짐 애닯네
어찌 생각했으리, 먼 오랑캐 나라 사랑하여
오늘날 열국의 왕으로 봉해 줄 것을
서로 만나는 기간 번개처럼 빠르니
술 부어 대작하며 사양볕 아겼네
웅천의 진영 어찌 잊으리
옛부터 삼숙(三宿)의 인연 경계했는데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접대 도감이 아뢰었다. "방금 정사의 차관 이서(李恕)가 웅천에서 왔기에 그곳의 소식을 물었더니 "19일에 소서행장이 통사(通事)의 칭호를 붙여 보낸 절강인(浙江人) 5명이 와서 말하기를 「 행장이 관백에게 가서 휴가를 청해 조상(祖上)에게 제사지낸 뒤 5월 26일에 출발하여 배에 올랐는데 중로에서 역풍을 만나고 또 관백의 부름으로 인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6월 4일에 비로소 출항하여 12일에 낭고야(郞古耶)에 이르고 16일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렀다. 만약 순풍을 만난다면 23일이나 24일에 웅천에 도착할 것이고, 바람이 순하지 않으면 다시 며칠 더 걸릴 것인데 종합해서 말한다면 그믐 안에는 돌아올 것이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철병에 대한 소식을 물었더니 "크고 작은 여러 둔들이 다 행리를 꾸려 놓고 행장이 오기만 고대하니, 행장이 이르면 철수해 돌아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박이 와서 정박하는 일에 대해 물었더니 "16일 이후로 선박이 계속 와서 정박했는데 거의 3, 4백 척은 되며, 후일에도 끊이지 않고 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25일 기사처음에 웅천에 이르러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선유(宣諭)한 뒤에 배를 타고 거제를 지나면서 3영[1]의 정세를 살펴보고 웅천으로 돌아왔으며, 또 수로(水路)로 부산에 도착한 다음 다시 수로로 김해에 도착하여 살펴보고 나서 19일 저녁 김해를 출발하여 돌아왔다. 대개 웅천의 4영 가운데 삼포(蔘浦)에 있는 평의지(平義智)의 진영은 이미 모두 불태웠고 의지는 행장을 따라 웅천의 진영에 있으며 거느렸던 군사는 철수하였는데 제포(薺浦)와 안골포의 진영은 철수하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24일 기사
임진왜란 발발 1년째인 1593년에, 일본군의 공세가 점점 난항을 겪자 수세로 전환하여 후방에 쌓기 시작한 왜성 중 하나이다. 웅천현 지역은 임진왜란 발발과 거의 동시에 순식간에 일본군에게 장악당한 경상좌도 연해지방 중 하나로, 초기부터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요충지였다.[2] 그러나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등 조선 수군에게 발목이 잡히고 부산포 해전으로 최후방인 부산포까지 타격을 받자 일본군 입장에서 기존에 주둔하던 조선의 요새들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왜성을 쌓을 필요성이 생겼다.
1593년부터 경상좌우도의 연해지방 곳곳에 십수 곳의 왜성을 축성하기 시작했고, 중심점이자 최후방 본진인 부산포왜성을 기점으로 동해안의 최전방이 서생포왜성이라면 여기에 대응하는 남해안의 서쪽 최전방이 웅천왜성이었다. 축성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쌓은 것으로 보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축성에 관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고적조사자료』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원래 남산 정상부에 있었던 웅포성(熊浦城)을 개축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해당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다른 진영과 비교해도 규모가 컸고 많은 병력이 주둔했으며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가 이곳에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자리를 지킨 것으로 유명해서 으레 웅천왜성 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성채로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593년 12월 28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에서 건너와 약 1년간 은거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 안에서 종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한국사상 최초로 한반도에 상륙한 가톨릭 신부이기도 해서, 이를 기리기 위해 웅천읍성에서 웅천왜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다만 그 규모에 비해 실제로 사용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595년 강화 회담이 한창이던 중 일본군은 최전방 진영들에서 후방으로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화의 의사를 표했는데,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포왜성, 소 요시토시는 아예 대마도로 철수하면서 웅천왜성은 폐성되었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던 반대편 최전선의 서생포왜성도 가토 기요마사가 철군하면서 함께 폐성되었지만, 이쪽은 정유재란 때 부활한 데에 비해 웅천왜성의 경우 더 이상 기록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는 새로 확장한 최전방이 바로 근방의 울산왜성이었기 때문에 계속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울산왜성을 보조할 수 있었던 서생포왜성과는 달리, 웅천왜성이 원래 담당하던 서측 최전선이 저 멀리 전라도의 순천왜성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활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대신 웅천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차단하는 기능은 바로 옆의 안골포왜성이 계속 수행했다.
3.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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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 위치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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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 항공사진 (1969) |
주곽부는 총 7개의 곽(郭)으로 구성했다. 해발 184.5m의 남산 정상 지점에 천수 기단을 두고, 그 동측에 치성과 어긋문(喰違い虎口)을 연 제1곽이 있으며, 그 동측에 제2곽이 있다. 제2곽의 북측에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를 두어 북측의 제3곽과 동측의 제4곽으로 동시에 통하게 했고, 남측에 어긋문과 제5곽을 두어 출입하게 했다. 제3곽은 북측으로 크게 돌출된 어긋문을 열어 산 북측 사면으로 통하는 주출입구(大手口)로 삼고, 서측에는 천수를 보호할 목적으로 제6곽을 덧붙였다. 제4곽의 동측에는 북측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둔 제7곽을 덧붙여 놓았는데, 제4곽 및 주곽부와 통하지 않는 개별적인 부곽으로 되어 있어서 일종의 스테쿠루와(捨て郭)[3]처럼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왜성의 주곽부 주변에는 남산의 능선을 차단하고, 외곽부와 연결한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를 3개소 두었다. 제6곽 서북측의 노보리이시가키는 8부 능선 부분에 2개의 곽으로 구성한 데쿠루와(出郭)가 1개소 있다.[4] 데쿠루와를 넘어서도 쭉 이어지는 체성의 끝단에는 타원형의 석축에 2곳의 치를 적용한 부곽이 하나 더 있다.[5] 노보리이시가키의 안쪽(동측)의 산 경사면에는 수없이 많은 계단 모양의 지형이 연속되는데 일본군의 막사가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하며, 외측(서측)에는 석축을 따라 길게 2줄의 해자를 파서 접근을 막았다.
주곽부의 북측 산기슭에는 와성마을이 있고, 마을 서남측의 계단형 경작지 중간중간에 일부 왜성의 체성으로 판단하는 석축이 분포한다. 이곳을 웅천왜성의 산록거관(山麓居館)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한다.[6] 본격적으로 왜성을 쌓기 전인 1592년에 이미 웅포에 일본군 진영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 처음 일본군이 주둔했던 부지일 가능성도 있다. 좌우 양측으로 웅천읍성과 안골포왜성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주곽부 제7곽의 동남측으로 2번째 노보리이시가키가 뻗어 있다. 중간에 남측으로 돌출된 치가 1곳 있고, 끄트머리에 와서는 모서리의 치 부분에서 꺾으면서 하나의 데쿠루와를 형성했다.[7] 이곳은 전체적으로 북측의 웅포를 향하고 있는 웅천왜성의 지형을 극복하고 안골포 및 가덕도 해협 방면의 조망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공간으로 보인다. 체성의 남측을 따라 길게 1줄의 해자가 나 있고, 출입구로 판단하는 개구부(開口部)가 1곳 있다.
천수 기단의 남측으로 3번째 노보리이시가키가 뻗어 있다. 이쪽은 다른 노보리이시가키에 비해 길이가 비교적 짧으며, 중간에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이 하나 있다. 체성의 끄트머리에 천수 기단에 버금가는 규모의 망루 기단이 있고 바깥쪽(서측)을 따라 2줄의 해자를 파 놓았다. 또한, 상술한 2번째 노보리이시가키와의 사이에 길게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아 1겹의 방어선을 추가로 둘렀다. 이 석축에는 2곳의 치가 돌출되어 있으며, 노보리이시가키의 해자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을 볼 때 증축의 결과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주곽부의 서측으로 이어지는 산자락[8]에 데쿠루와로 볼 수 있는 삭평지가 5곳 존재한다. 산줄기 때문에 조망이 가려 보이지 않는 제포 방면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망루 역할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이 주를 이루는 주곽부와는 달리 토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성의 존재를 잘 알아볼 수 없다. 2019 ~ 2020년 국립진주박물관이 실시한 왜성 지표조사에서 새로이 드러난 구역이므로 좀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웅천왜성은 서생포왜성과 더불어 노보리이시가키와 치성의 적용과 같은 왜성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서생포왜성이 매우 장대한 길이의 노보리이시가키로 외곽부를 둘러 나성(羅城)과도 같이 운용했다면, 웅천왜성은 곳곳에 노보리이시가키를 깔아 차단벽처럼 운용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서생포왜성은 일본식 망루 기단과는 구별되는 치성을 2곳 적용했지만 웅천왜성은 곳곳에 여럿 배치함으로써 활용하려고 한 점이 엿보인다.
3.1. 데지로(出城)
웅천왜성은 그 규모에 걸맞게 여러 곳의 전진기지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조선이 쌓아 놓은 웅천읍성과 제포진성, 삼국시대의 성인 자마산성까지 진출해 주둔했으며, 수군을 기동하기 위해 인근의 삼포에 진출해 명동왜성을 쌓았다. 이렇게 웅천왜성을 중심으로 육로와 수로를 가리지 않고 뻗어나가는 형세의 전진기지를 여러 곳 두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웅천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진영이 4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3.1.1. 웅천읍성
자세한 내용은 웅천읍성 문서 참고하십시오.3.1.2. 제포진성
자세한 내용은 제포진성 문서 참고하십시오.3.1.3. 자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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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4c3c><colcolor=#fff> 자마산성 [ruby(子, ruby=チャ)][ruby(馬, ruby=マ)][ruby(山城, ruby=サンソン)] | Jamasan Fortress |
|
이칭 |
웅천고산성(熊川古山城) 웅천성지성(熊川城支城) 자마왜성(子馬倭城) 감포산성(甘浦山城) 배산성(背山城) 잣메 |
형태 |
테뫼식 산성 왜성[일부 개축] |
면적 | 미상 |
건설 |
미상,
4세기경 초축 추정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미상 소 요시토시?[추정] |
|
폐성 | 1595년 (선조 28년, 추정) |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산15 |
|
자마산성 항공사진 (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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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산성 터의 산불감시 초소 |
성의 내부와 동측 능선을 따라서는 편평하게 삭평한 계단형의 지형이 연속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왜성으로 개축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이는 눌차도왜성에 속한 갈마봉산성과 유사한데, 아직 면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왜성과 정확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예부터 왜성이라고 구전되어 오므로 자마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벽과 축대는 현재 거의 무너지고 억새밭과 수풀로 뒤덮여 관찰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이외에 진해구 소사동 산 15번지의 남쪽 끄트머리 능선에 자마왜성의 외곽부로 볼 수 있는 지형이 타카세 테츠로(高瀬哲郎)의 2000년도 저서「倭城跡を訪ねて(2)」『研究紀要』6[9]에서 보고되었는데, 현재 이곳에 대한 지표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정말 일본식의 왜성 유구인지 아닌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다. #
▶ 현황을 보려면 다음을 참조.
3.1.4. 명동왜성
<colbgcolor=#01454F><colcolor=#fff> 명동왜성 [ruby(明, ruby=ミョン)][ruby(洞, ruby=ドン)][ruby(倭城, ruby=わじょう)] | Myeongdong Japanese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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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
삼포평의지지영(蔘浦平義智之營) 사화랑산왜성(沙火郞山倭城) 웅천성지성(熊川城支城) 삼포진(森浦陳) |
형태 | 연곽식 산성 |
면적 | 미상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마츠라 시게노부?[추정] 소 요시토시?[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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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성 | 1595년 (선조 28년) |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명동 산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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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왜성과 웅천왜성의 위치관계 (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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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왜성 항공사진 (1969) |
마츠라 시게노부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대마도주이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가 쌓았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세스페데스 신부가 보낸 서간에 1 레구아[10]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소 요시토시가 주둔한 성이 있다는 내용이 있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조선왕조실록 역시 소 요시토시가 웅천 지역의 제포와 삼포(森浦)에 주둔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축성까지는 몰라도 명동왜성에 소 요시토시가 주둔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것으로 본다.
해발 약 80m의 사화랑산 중봉 정상부에 주곽부로 판단되는 가장 넓은 장방형의 부곽군(副郭群)이 위치하고, 둘레 365m에 높이 1 ~ 2m에 이른다. 석축에 쓴 자연석은 큰 것은 140×110㎝, 110×60㎝ 정도이고, 작은 것은 56×35㎝, 30×18㎝ 크기이다.
주곽부는 동측에 출입구가, 북측에 좁은 치와도 같은 돌출부가 있으며 서북측에 장방형 망루(多門櫓)가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는 축대를 배치했다. 북측의 돌출부 바깥으로는 능선절단형 해자(堀切り)가 있고, 서측으로는 완전히 평평하지 않고 약간 경사진 부곽이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막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서측 부곽의 남측 끄트머리와 북측에도 작은 출입구가 있어 각각 산 아래와 산 위로 통하도록 했다. 성 내외에는 곳곳에서 기왓조각이 나오고 있다.
주곽부의 동북측 · 북측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2곳의 데쿠루와(出郭)를 설치했다. 우선 북측의 부곽은 약 500m 떨어져 있으며, 주곽부가 위치한 곳보다 약간 높은 해발 약 90m 지점의 능선에 있다. 이곳은 현재의 진해구 중심부가 있는 곳에서 육로로 웅천으로 넘어오는 대발령(大發嶺)을 감시하기에 좋은 입지다. ㄷ자형의 석루(石壘)를 서로 교차시키며 교묘하게 2개의 부곽을 형성했는데 북측과 동남측으로 각각 통하는 평문(平入り虎口)과 마스가타 고구치가 있다.
동북측의 부곽은 명동왜성 부지 중 가장 높은 해발 약 150m의 고지에 있다. 2개의 부곽을 나란히 배치시키고 각각 남측으로 평문을 냈으며, 서로 어긋문으로 통하게 했다. 부곽의 동남측에 망루 기단을, 동북측에 돌출부를 1곳씩 배치했으며 이곳에서 동남측을 바라보면 본성인 웅천왜성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부곽의 동북측으로 이어진 능선을 500m 정도 따라가면 해발 196m의 사화랑산 정상이 나오고 이곳에 사화랑산 봉수대가 있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산 아래, 현재 명동마을과 명동항이 조성되어 있는 해안의 동측에 솟은 해발 30m의 구릉지에도 부곽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직각으로 꺾은 석축이 곳곳에 분포하고, 대체로 장방형을 띤 넓은 부지가 있어 산록거관(山麓居館)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삭평 상태가 좋지 않고 경사져 있는 상태라 확실하지 않다.
명동왜성은 수로로는 거제도와 칠천량 방면을, 육로로는 진해로 통하는 대발령 방면을 조망할 수 있어 웅천왜성과 연락하며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3.2. 와성 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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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당(廢堂)된 와성 신당 |
4. 현황
4.1. 웅천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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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왜성 주곽부 평면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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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노보리이시가키 끝단의 타원형 부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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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곽 서북측 제1 노보리이시가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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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곽 북측 주출입구 석축의 무너진 모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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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곽 북측 주출입구의 개구부(開口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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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의 입석쌓기(縦石積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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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북측 출입구 외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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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북측 출입구 내측[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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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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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출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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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대 계단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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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대 상부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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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곽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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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곽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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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곽 동남측 모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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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곽 남측 석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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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대 남측 제3 노보리이시가키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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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노보리이시가키와 제2 노보리이시가키 사이를 잇는 수평 석축 |
4.2. 자마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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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된 석축과 드러난 토축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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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 속으로 이어지는 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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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 축조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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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주위를 감싸고 있는 석위(石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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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다니는 성돌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가공 흔적 |
4.3. 명동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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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곽부 석축 축조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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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측 외곽 석축 잔존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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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록 부곽 석축 |
5. 교통
웅천왜성은 웅천동에서 멀리 떨어져 끝까지 돌출된 야산 꼭대기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도보로 약 1km나 떨어져 있는(!) 사도마을 정류장이다. 따라서 웅천왜성을 답사할 때는 자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다.웅천중학교와 진해웅천교회 바로 옆에 웅천왜성 주차장이 있고, 그곳에서 등산로를 타는 것이 유일한 접근법이다. 다만 등산로 입구에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올바른 길은 우측임에도 불구하고 좌측 길 옆에 표지판을 세우고는 화살표만 우측으로 해 놓아 헷갈리게 되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웅천왜성의 서북측 노보리이시가키와 만나게 되고, 거기서부터 제3곽의 어긋문으로 올라갈 수 있다.
자마산성의 경우 역시 야산인데다 최소한의 유적 안내나 정비라도 된 웅천왜성과는 다르게 아예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접근조차 쉽지 않다. 호산나노인복지센터 버스 정류장 근처의 등산로로 진입해 임도(林道)를 따라 접근하는 방법 외에 길은 없다.
명동왜성은 바로 앞에 진해 해양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다. 창원 버스 303이나 350을 타고 해양공원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해 마을 뒷산으로 오르는 길을 찾으면 된다. 다만 이쪽은 왜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거의 닦여 있지 않아 차칫하면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덩굴 사이사이를 헤치면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6.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창원 웅천왜성(昌原熊川倭城)
- 두산백과 : 창원 웅천왜성(昌原熊川倭城)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웅천왜성(熊川倭城)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 창원 웅천왜성(昌原熊川倭城)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 진해 자마산성(鎭海子馬山城)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 진해 명동 왜성(鎭海明洞倭城)
7.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
경상남도 진해시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소서행장(少西幸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소서행장(少西幸長)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8. 관련 문서
[1]
영등포왜성, 장문포왜성, 송진포왜성을 말하는 듯하다.
[2]
웅천현은 바다에서 부산포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을 틀어쥐고 있는 입지에 위치한다.
[3]
후방의 부곽을 엄호하는 역할을 하다가, 필요 시 버릴 수 있게 설계된 부곽을 말한다.
[4]
한국 측에서는 제3외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5]
한국 측에서는 북망루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 위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6]
한국 측에서는 제2외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7]
한국 측에서는 제1외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8]
제덕산(薺德山)이라는 이름이 있다.
[9]
佐賀県立名護屋城博物館 소장.
[10]
약 5㎞의 거리이다.
[11]
제2곽, 제3곽, 제4곽을 하나의 고구치로 한꺼번에 통하게 했는데, 마스가타(桝形)와 어긋문(喰違い)이 합쳐져 매우 복잡한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