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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

<colbgcolor=#BE0529><colcolor=#fff> 서생포왜성
[ruby(西, ruby=ソ)][ruby(生, ruby=セ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Seosaengpo Japanese Fortress
파일:attachment/왜성/a0105007_4c68deee4361b.jpg
▲본성내 추정도
형태 왜성
면적 91,453.1m²
건설 1593년 (선조 26년)
가토 기요마사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위치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데지로(出城) ・ 외성(外城) & 외곽(外郭)
3.1.1. 2단 전면 석축(二段前面石垣)3.1.2. 편장군 승첩동 마애비(片將軍勝捷洞磨崖碑)3.1.3. 남문지(南門址)3.1.4. 동문지(東門址)3.1.5.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3.1.6. 창표당(蒼表堂)3.1.7. 굴립주 건물지(掘立柱建物址)3.1.8. 동제당(洞祭堂)
3.2. 본성(本城) ・ 내성(內城)
3.2.1. 내성 대수구(內大手口)3.2.2. 돌출형 소곡륜3.2.3. 요코야마스가타(橫矢枡形)3.2.4. 천수지(天守址)3.2.5. 우마다시쿠루와(馬出し曲輪) ・ 폐문(廢門)3.2.6. 장군수(將軍水)
4. 가치5. 교통6. 여담7. 외부 링크8.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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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하였다.

2. 역사

파일:서생포왜성 노보리이시가키 2월.jpg
서생포왜성의 상징과도 같은 장대한 노보리이시가키(2021년 2월 촬영).
임진왜란 왜군은 속전속결로 한반도를 점령한다는 전략이 실패하자, 장기전에 대비해 일본 본토와 바로 이어지는 한반도 남동해안에 성을 많이 지었다. 서생포왜성도 그때 세운 성으로 회야강 하구와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본래 이 지역을 관할하는 조선 수군의 서생포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1]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일본군이 함락하였다.

서생포왜성 관련된 내용이 최초로 등장하는 고문서는 1593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작성한 명령서(朱印狀)이다. 명령서에서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에게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을 수비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에서 울산 서생포에 내려가 축성을 시작한 듯하다. 구체적인 일시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15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을 세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593년 9월 히데요시는 명령서에서 '강화에 방심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명령서로 보아 가토 기요마사[2]가 서생포왜성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축성 과정에서 인근의 조선 백성들을 동원하였고[3], 서생포만호진성을 헐어 그 석재를 이용하였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명군 벽제관 전투 이후로 왜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조선은 왜군과 강화함을 완강히 반대하였으므로 명 측의 심유경(沈惟敬)은 조선을 배제한 채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비밀리에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승장(僧將) 유정(惟政)을 파견하여 서생포왜성에 주둔하는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도록 하였다.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왜성 천수(天守)에서 실시한 1차 회담에서 유정 고니시 측이 심유경에게 비밀리에 제시한 조건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무려 조선의 남부 4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일본에 할양하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회담으로 일본의 무리한 요구조건을 확인하자 명군을 설득하고 고니시와 가토의 갈등관계를 이용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같은해 7월 12-16일 2차 회담을 치른 후 유정은 조정에 토적보민사소(討敵保民事疎)를 올려 그간 살핀 왜군 진영의 현황을 보고하고, '적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전민(全民)을 동원하여 일전(一戰)을 벌일 것'과 '교린(交隣)하여 적이 돌아가게 한 후 힘을 길러 다시 격돌할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토 유정의 회담을 보고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같은해 11월 고니시가 먼저 요청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함안 회담을 하였다. 여기서 고니시는 김응서에게 명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니 조선이 주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김응서가 거부했다. 조선 측에서 고니시와 별도로 협상하자 가토는 불만을 품었으므로 12월 23일 유정이 3차 회담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그 달, 고니시 심유경 간 비밀교섭으로 작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짓 항복문서가 고니시 조안(小西如安) 등의 수작으로 북경의 명나라 조정에 보고되었다. 명 조정은 이 문서를 사실로 믿고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595년 6월 28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따라 부산포왜성·죽도왜성·가덕왜성 등 몇 곳만 남기고 많은 장수들이 순차적으로 일본으로 귀국하는데, 이때 가토는 거점을 서생포왜성에서 기장 죽성리왜성으로 옮겼으므로 서생포왜성은 한동안 폐성이 되기도 했다.

1596년 9월 2일 열린 오사카 회담은 별 탈 없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10월에 귀국하려던 명 사신 측에 히데요시가 서신을 보내 '조선 남부를 할양하라는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조선을 재침(再侵)하겠다.'는 뜻을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이로써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1597년 1월 가토는 다시 군사 약 1만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 뒤, 기장군 양산시를 거쳐 서생포왜성에 재입성했다. 이후 가토는 서생포 일대의 군사적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해 2월 21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는 수비 책임자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를 임명하여 3천 명의 재번을 명령했다.

3월 18일 유정 가토의 요청으로 3차 회담을 열어 가토를 설득하며 일본의 재침을 막으려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정은 즉시 비변사에 상소를 올려 상황의 위급함을 전했는데,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1597) 4월 13일자 기사에 내용이 있다.

7월 21일 아사노 요시나가가 서생포왜성에 입성했다. 가토는 북위작전을 위해 출진하고, 9월 아사노는 천수각 인근의 증축공사에 착수한 듯하다. 10월 말 가토는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와서 (당시까지는 왜성 중 최동단에 있던) 서생포왜성에서 북동쪽으로 약 35 km 떨어진 최전선 울산에 성을 쌓으면 일본군 점령지의 수비가 한층 강화되리라 여겼다. 이런 의도로 건설한 곳이 바로 11월 10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따라 축성된 울산왜성이다.

12월 중순을 지나 성의 울산왜성의 외곽 부분이 거의 완공된 직후, 울산왜성이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서생포 왜성에서도 구원군을 보냈는데, 당시 회야강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 연합군에게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회야강은 당시 일승강, 대승강으로 불리기도 했다.[4]울산성 전투가 끝난 이듬해(1598) 1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따라 가토 울산왜성의 수비에만 전념하고, 모리 카츠노부(毛利勝信)·이토 스케타카(伊東祐兵)·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사가라 나가쓰네(相良長毎)·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여러 장수가 서생포왜성에 들어와서 수비를 맡았다.

1598년 5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로 구포왜성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서생포왜성의 수비담당자가 되어 왜란이 끝날 때까지 지켰다.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자 종전(終戰)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10월 15일자로 고다이로(五大老)가 구로다 앞으로 보낸 명령서는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령서는 가토와 협의하여 서생포성에서 퇴각하고 부산성으로 입성하라고 하였다. 11월 24일 가토 구로다 등이 부산포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자,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와 편갈송(片碣頌)이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함으로써 비로소 성이 함락되었다. 이듬해(1599) 마귀는 서생포왜성 안에 창표당(蒼表堂)을 지어 축하연을 열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서생포진은 수군동첨절제사진(水軍同僉節制鎭)으로 승격되었으나, 본래의 만호진성은 이미 폐성이 되어서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왜성의 장점도 이용할 겸 현재의 장소로 이동했다. 이후 구한말까지 조선 수군의 대진(大鎭)으로 사용되었지만, 기능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왜성은 조선군 성채와 많이 달라서 조선군에 맞게 이곳저곳 개조도 했다. 울산서생진지도(1872년 작) #를 보면 내성은 비었고 외성에 관청이 있으며, 인근에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진하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진하리(鎭下里)라는 지명도 서생포진 아래 마을에서 유래하였고, 지금도 성 위에 올라가면 진하해수욕장과 동해 바다가 아주 잘 내려다보인다.

마귀 장군이 세운 창표당은 조선 후기에 왜란의 공신들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헐려 터만 남았다가 2018년 8월에 복원 완료하였다.

울산왜성·서생포왜성·죽성리왜성·자성대왜성 간에 봉화를 이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하여 봉화성(烽火城)이라는 이칭도 있다. 이는 현재에도 남은 지명ㆍ유적들 봉화산 / 하산 봉수대[5], 봉화산 / 나사 봉수대[6], 봉대산 / 기장 아이 봉수대[7] 봉대산 / 기장 남산 봉수대[8], 간비오산 봉수대[9], 황령산 봉수대[10], 구봉산 봉수대[11]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동남해안에는 익히 알다시피 봉수대 왜성이 매우 촘촘히 박혔다.

일제강점기 사적 제54호로 지정되었고 광복 후에도 유지되었지만, 우리 문화재도 아닌 일본이 남긴 왜성을 보존할 가치가 있겠느냐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1997년 사적에서 해지되어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등록되었다. 말하자면 강등.

3. 위치 및 구조

파일:서생포왜성 위치.png

북으로는 울산왜성, 남으로는 임랑포왜성과 연계된다. 규모가 꽤 큰 성[12]이라 아주 넓은 범위에 분포하는데, 대략적인 주소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229, 273, 504, 505, 508-2, 560-2, 616-1, 631, 711, 714-1 ~ 718, 산51 일원
파일:5fb62fee2486f1605775342.jpg
임진왜란 당시 서생포왜성의 구조 출처
파일:서생포왜성 전도(국문, 수정본).png
고화질 : https://blog.naver.com/yk020428/222245778002

16세기 말 일본에서 발달했던 전형적인 연곽식 평산성이다. 회야강 하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山頂)에 내성(內城)을 쌓은 뒤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2 ~ 3단의 부곽(副郭)을 두었으며, 그 아래로 산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외곽(外郭)을 배치하였다. 성 바깥에서 내성과 외곽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각각 3개씩 있다. 외벽 바깥에는 2 ・ 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성곽 전체 면적이 해자를 포함하여 약 150,000㎡에 달하고 해자를 제외한 데지로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는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에 달하여 한반도에 분포하는 왜성 중 가장 웅장하고 보존 상태가 좋다.

성의 내외부에는 다수의 우물 터가 발견된다. 석축은 외곽의 경우 내탁식(內托式)이고 내성은 협축식(夾築式)이다. 기울기는 지면에서부터 60°가량이다.

3.1. 데지로(出城) ・ 외성(外城) & 외곽(外郭)

서생포왜성은 본성(내성) 바깥에 길게 노보리이시가키를 둘러 상당한 규모인 소토구루와(外郭)을 운용했다. 전면부의 작은 구릉에 위치했던 것이 데지로(出城)이고, 노보리이시가키로 둘러싸인 것이 소토구루와이다. 여타 왜성과는 다르게 서생포왜성의 소토구루와는 천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직하다.

3.1.1. 2단 전면 석축(二段前面石垣)

파일:서생포왜성 망해대.jpg
일제강점기에 찍은 망해대의 모습.
파일:망해대의 현재 모습[1].jpg
망해대의 현재 모습.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5

서생포왜성의 데지로에는 특이하게도 높이 약 10 m에 2단으로 된 석축이 있는데, 하중을 분산하기 위한 구조인 듯하다. 이렇게 지탱을 위해 기존의 석축 아래에 쌓는 보강석축을 고시마키 이시가키(腰巻石垣)라고 한다. 「1872년 지방지도」의 <서생진지도>를 보면 해당 부분이 망해대(望海坮)로 표기되어 있다.
지역에서는 "대물래", 혹은 "대문래"등으로 불렸다. 10여 년 전 해당 위치에 있던 교회가 이전하고 폐기물 업체가 들어오면서 망해대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해당 업체에서 외부인의 방문을 굉장히 꺼리는 듯하다.
왜성 남문 위치 민가에서 샛길로 빠지면 망해대의 위쪽으로 가볼 수 있어 회야강과 바다가 만나는 일대의 정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으나 정비가 전혀 되지 않은 관계로 풀숲만 남아있을 뿐이다.

3.1.2. 편장군 승첩동 마애비(片將軍勝捷洞磨崖碑)

파일:편장군 승첩동 마애비.jpg
바위에 새겨진 각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5

1598년 서생포왜성에 입성한 의 편갈송(片碣頌)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글자를 새겼다. 편장군승첩동(片將軍勝捷洞)이라는 여섯 글자인데, 그 곁에 1892년 후손 편영기(片永基)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긴 십일대손 전운랑 영기 하마 임진 윤유월 일(十一代孫轉運郞永基下馬壬辰閏六月日)이라는 각자가 있다.

편갈송은 조선에 귀화한 의 장군으로, 절강 편씨의 시조이다.

3.1.3. 남문지(南門址)

파일:그림24.png
네이버 지도 로드뷰로 본 남문지의 모습.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6

남문은 소토구루와의 대수구(大手口)[13]이기도 하다. 마스가타(枡形)형 고구치인데 도로 때문에 석축이 끊겼다. 남쪽을 향하는데도 어째서인지 서문(西門)이라고도 불린다. 속설에는 이 문이 서생포왜성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살아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문이었다 하여 '생명의 문'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서생(西生)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3.1.4. 동문지(東門址)

파일:그림25.png
네이버 지도 로드뷰로 본 동문지의 모습.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5

동문은 소토구루와의 익수구(搦手口)[14]이기도 하다. 마스가타(枡形)형 고구치이며, 도로에 의해 석축이 끊겨 있다. 북쪽을 향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동문이라 불린다.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석축을 알아보기 힘드니 주의.

서생포왜성이 축성될 당시 동문과 북측 체성은 회야강(回夜江)[15] 강변에 바짝 붙여 쌓았다고 추정하므로 동문 바로 바깥에 선소(船所)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가 보면 북측 체성이 지나가는 곳에 강변을 이루었던 듯한 암벽이 절리를 이루었다.

3.1.5.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x01ukT6Iv1uckof9o1_540.jpg
서생포왜성의 남측 노보리이시가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229, 273, 504, 505, 508-2, 560-2, 714-1 ~ 718

서생포왜성은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온전하고도 장대한 규모로 남아 있기로 유명하다. 나성(羅城)이라고도 하는 노보리이시가키는 곡륜(曲輪)을 평평하게 다지는 보통의 일본식 성과는 다르게 지형을 살려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식으로 쌓은 방벽의 일종이다.

에도 막부 수립 이후 일본의 수많은 성들이 군사용 시설에서 다이묘의 거주용 시설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별 쓸모가 없던 노보리이시가키를 철거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막부 정권의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신 정부의 '폐성령' 선포 및 태평양 전쟁도 수많은 일본 성들의 훼철 · 파괴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따라서 군사용 시설로서 노보리이시가키는 매우 희귀한데, 이것이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서생포왜성. 보존상태로나 규모로나 일본에 남은 노보리이시가키보다 훨씬 나은지라 일본 학자들과 일반 여행객들도 서생포왜성을 종종 방문한다. 이런 일본인 방문객의 숫자가 꽤 많은 듯 이들을 위한 일본어 가능 해설사도 현지에 상주한다.

3.1.6. 창표당(蒼表堂)

파일:창표당.jpg
2018년 복원 완료된 창표당의 모습.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31

1599년 11월 명나라 마귀(麻貴) 장군이 승전 기념 축하연을 베풀기 위해 창건한 초가 4칸을, 연회를 마친 후 기와 4칸으로 중창하여 임진왜란의 공신들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당연히 당국의 눈엣가시였기에 철거되었고, 2018년 복원되었다. 서생포왜성의 주차장이 창표당 곁에 자리하였다.

3.1.7. 굴립주 건물지(掘立柱建物址)

파일:서생포왜성 굴립주 건물지.jpg
기둥의 하단까지만 재현된 굴립주 건물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273

2011년 실시한 발굴조사 때 발견된 건물 터이다. 굴립주(掘立柱)는 주춧돌 없이 나무기둥을 그대로 땅에 박아 세운 것이다. 창표당 서쪽 경사면을 계단형으로 골라 소곡륜군(小曲輪群)을 만들어 평지를 확보한 다음, 지름 70 cm 내외에 깊이 70~110 cm인 구덩이를 파 내부에 지름 약 20 cm인 나무기둥을 세운 뒤 건물 2동을 3 m 간격으로 나란히 배치했다.

남측의 건물지는 정면 10칸, 측면 2칸의 장방형 구조로 기둥 간격은 약 2 m이며 각 기둥 사이에 지름 10~20 cm 보조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도 기둥을 세워 3개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면적은 9 6㎡.

북측의 건물지는 역시 똑같이 정면 10칸에 측면 2칸 장방형 구조이다. 그러나 이곳은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두었으며, 건물 중앙 전면에는 차양칸으로 추정되는 2칸 규모의 돌출 공간을 추가로 두었다. 면적은 역시 96 ㎡.

두 건물 주의에는 건물과 약 30 cm 정도 간격을 두고 깊이 80 cm 남짓한 ㄷ자형 배수로를 조성했으며, 두 건물 사이에도 길이 약 4 m로 수로를 두었다.

건물 내부 및 인근에서 기와조각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16세기 일본의 굴립주 건물에서 흔히 썼던 너와지붕을 올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돌로 눌러 놓았다고 추정한다. 건물 자체가 동향이어서 동해를 바라보는데, 선창이나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막사 건물이었다고 여긴다.

3.1.8. 동제당(洞祭堂)

파일:서생포왜성 동제당.jpg
보수공사가 끝나지 않은 동제당의 모습(2021년 2월 촬영).
마귀(麻貴) 제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동제당(洞祭堂)이라는 명칭은 마을제사(동제洞祭)를 지내는 건물이란 뜻이다. 요컨데 마귀 제독을 인근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긴 것이다.

3.2. 본성(本城) ・ 내성(內城)

3.2.1. 내성 대수구(內大手口)

파일:seosaengpo.jpg
복원사업 이전에 촬영한 내성 대수구.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16-1

내성 주출입구라고도 부른다. 평범한 히라이리(平入)형 고구치이다. 「1872년 지방지도」의 <서생진지도>를 보면 이곳이 내성으로 들어가는 중문(中門)으로 인데, 그 형태를 보아 아마도 고구치 위에 평석(平石)을 얹어 문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싶다. 창표당 좌측에서부터 오르막의 대수도(大手道)가 之자형으로 뻗어 이곳에 이른다.

3.2.2. 돌출형 소곡륜

파일:서생포왜성 돌출형 곡륜.jpg
파일:돌출형 곡륜 구조.jpg
돌출형 곡륜 전경과 구조.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산51(이하 동일)

서생포왜성에는 특이하게도 한쪽으로 돌출된 별도의 소곡륜(小曲輪)이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고구치는 총 2개로, 내성 대수구에서 올라오는 비탈길로 통하는 고구치와 바로 성 외부로 통하는 고구치가 있다. 성 외부로 통하는 고구치는 내성 익수구(搦手口)[16]의 역할을 한다.

3.2.3. 요코야마스가타(橫矢枡形)

파일:서생포왜성 요코야.jpg
니노마루 출입구 좌측에 돌출되어 있는 요코야의 모습.

일본의 성에는 성(雉城)이라는 개념이 없다. 대신 요코야가카리(橫矢掛り)[17]라는 축성 기법이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여러 형태가 있으나 직선으로 뻗은 외곽선에 ㄱ자 꺾임을 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요코야의 모습이다.

서생포왜성에도 곳곳에 요코야가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니노마루 출입구 좌측에 돌출되어 있는 요코야는 그 규모가 크고, 무엇보다 석축의 우각부(隅角部)에서 아직 정제되지 않은 산기즈미(算木積み)[18]를 관찰할 수 있어 중세성곽에서 근세성곽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놓여 있었던 왜성의 과도기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영지에 쌓은 구마모토 성의 '니요의 석벽(二様の石垣)' #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3.2.4. 천수지(天守址)

파일:서생포왜성 천수.jpg
아직 보수공사가 끝나지 않은 천수 기단의 모습(2021년 2월경 촬영).
천수(天守)가 있던 5 m 남짓한 기단이다. 앞뒤로 천수로 올라가게 만든 돌계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기단 위에는 지질조사 표지석이 꽂혀 있다. 이곳에서 유정 가토 기요마사와 세 차례 회담을 하였다.
파일:서생포왜성 증축2.jpg
천수 석축의 변천을 보여 주는 도표.
이 인근은 거듭하여 증축 공사를 시행했는데, 처음에는 천수가 섬처럼 혼자 떨어졌지만 점점 주위의 석축과 이어졌고, 정유재란 때 천수로 오르는 돌계단과 ㄴ자 방벽 등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3.2.5. 우마다시쿠루와(馬出し曲輪) ・ 폐문(廢門)

파일:서생포왜성 우마다시쿠루와 구조.jpg
우마다시쿠루와의 구조를 설명한 안내판.
우마다시(馬出し)는 본래 고구치를 보호하기도 하고, 그 안쪽에 소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있게 하며, 특히 외부에서 성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발전한 방어벽이다[19]. 우리나라의 옹성(甕城)의 역할을 일부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동일본에서 주로 발달한 구조이며, 서일본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우마다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일반 곡륜(曲輪)을 우마다시쿠루와(馬出し曲輪)라고 한다.서생포왜성의 경우 천수가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서쪽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우마다시쿠루와를 한 겹 두른 것이다.
파일:서생포왜성 증축1.jpg
연도별로 서생포왜성의 증축 과정을 보여 주는 도표.
사실 우마다시는 본래 성과 딱 맞붙여서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서생포왜성에서는 거듭 증축하여 처음에는 떨어져 있던 우마다시를 성 본체와 연결해 별도의 곡륜으로 만들고 외부로 통하는 고구치 2곳을 새로 조성하더니, 그마저도 이듬해 폐쇄했다.[20] 이는 일본군의 전황(戰況)이 그리 좋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1598년 울산성 전투를 전후로 하여 막았다고 추측한다. 두 고구치 중 북쪽으로 통하는 곳은 북문(北門)이라 하고 왜란 때 이곳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하여 '죽음의 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는데, 상술했듯 근거가 없다.

3.2.6. 장군수(將軍水)

파일:서생포왜성 장군수.jpg
장군수(將軍水) 팻말의 모습.
우마다시쿠루와 안쪽 구석에는 장군수(將軍水)라는 이름의 우물 터가 하나 있다. 서생포왜성 곳곳에서 이런 우물들이 발견되는데, 식수 보급이 쉽지 않았을 일본 중세성곽의 특성상 당시로서는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4. 가치

한반도의 왜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한반도의 다른 여러 왜성들[21]과 달리 비교적 원형이 남은 편이며[22] 대도시 울산, 부산에서 가까워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왜성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오히려 일본 본토에 있는 성들보다도 16세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양식 일본 성곽을 잘 보존해 가치가 높은데, 특히 '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있어서 일본 학계에서도 꽤 주목한다. 보급로 보호를 위해 산허리를 따라 지은 장벽인 노보리이시가키는 오늘날 일본에도 이요마츠야마성(伊予松山城), 히코네성(彦根城) 등 극히 일부 성곽에만 남은 희귀한 유적이다.

5. 교통


서생포왜성앞 정류장에서 약 500 m, 진하 정류장에서 약 800 m 거리에 있다. 경사가 좀 있기 때문에 체감거리는 그 이상.

진하해수욕장에서 도보로 좀 많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으며[23] 동해선 남창역이나 간절곶도 가깝다.

6. 여담

  •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울산에 오면 대부분 들르는 편이며, 인근 학교에서도 자주 찾는다. 특히 역사 매니아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 아예 부산부터 울산 ~ 경주시까지 해안선을 타고 올라가는 루트가 있다.
  • 내성에 올라가면 동해로 시야가 확 트여 있어 왜 왜군이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는 해맞이 장소로도 알맞다. 또한 낮은 가지를 가진 큰 벚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벚꽃놀이하러 많이 온다.
  • 서생포왜성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해서 서생포왜성에 건물이 있었던 건설 당시의 모습을 VR로 체험할 수 있다. 가서 볼 때 원래는 어떤 구조였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7. 외부 링크

8.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리에 있는 이 성은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왜장 가또기요마사가 돌로 쌓은 왜성이다. 기장죽도성과 부산진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서로 연락하였다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정상에 본성을 두고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2∼3겹으로 높이 6m의 성벽을 계단식으로 다시 쌓아 성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이것은 각 구역이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안에는 중간지점에 선조 32년(1599)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애국지사 위패를 모셨던 창표당 터가 남아 있으며, 본성 맨 서쪽에는 장군수라는 우물터가, 외성 남쪽에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가 있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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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기 울주군 서생면 화정리 산68 일대. 삼거리에서 진하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표지판이 있다. [2] 가토 일본에서도 축성의 명수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구마모토 성. [3] 속설에 따르면 1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4] 현재까지도 회야강 수원지가 있는 웅상 지역에는 이 명칭을 딴 건물이 상당수 있다. [5]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 산 66 [6] 울산 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산 36 [7]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산51-1. 고리원전 바로 뒤에 있다. 도로의 안내 표지판에 봉수대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고리 원전을 방어하는 군 부대가 있어 들어갈 수 없다. [8]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52 [9] 부산 해운대구 우동 산146-76 [10]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 50-1 [11] 부산 서구 동대신동3가 산1-2 [12] 『송운대사분충서난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층 누각에 큰 가옥도 지었다. 청정(淸正)의 거처에 이르니 방 안 전체가 화려한 자리에 금칠한 병풍으로 둘러쳐졌다.(중략) 오래도록 주둔해 머물 계획인 것 같다.
[13] 오테구치. 성(城)으로 들어가는 메인 입구 역할을 하는 고구치(虎口)를 말한다. 목조건물인 문(門)은 대수문(大手門, おおてもん)이라고 한다. [14] 가라메테구치. 성(城)에서 비상시에 빠져나올 수 있는 뒷문 역할을 하는 고구치(虎口)를 말한다. 목조건물인 문(門)은 익수문(搦手門, からめてもん)이라고 한다. [15] 당시의 명칭은 이어강(鯉魚江)이었던 것 같다. [16] 파일:서생포왜성 약수구.jpg

전형적인 마스가타형 고구치이다.
[17] 요코야(橫矢)는 성 외곽의 누선(壘線)을 다양한 모양으로 꺾어 여러 방향에서 적을 포위하는 방법 및 그러한 구조의 총칭이며, 일본어로는 '요코야를 걸다(掛かる)'라는 표현을 쓴다. 그 중 ㄱ자 모양의 꺾음 구조를 연달아 배치한 것을 뵤부오리(屏風折り, 병풍꺾기)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치성과 같이 네모나게 돌출시킨 것을 요코야마스가타(橫矢枡形)라고 한다. 마스가타는 '되박 모양'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고구치(虎口)에도 적용될 수 있고, 요코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18] 파일:산기즈미.jpg

일본의 성에서 곡륜(曲輪)의 하중을 지탱할 모서리를 처리하는 방법인데, 산가지를 쌓듯 돌을 차례차례 교차시키며 맞물리게 쌓는다고 하여 '산목 쌓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19] 우마다시는 시토미도이(蔀土居)와 카자시도이(茀土居)로부터 발전한 형태라고 한다. [20] 파일:서생포왜성 북측 폐문.jpg

돌담을 쌓아 입구를 막아 버렸다.
[21] 왜성은 우리 문화재도 아니라는 인식이 커서, 보존하자는 인식 자체가 최근까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왜성은 군략적으로도 별 가치가 없었기에, 많이 헐어서 재활용했다. 일부 왜성은 그 테두리를 둘러 그대로 조선 수군진영으로 활용했는데, 서생포왜성이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다른 예시로는 부산진성, 안골포진성 등이 있다. [22] 당연히 천수각을 비롯한 목조 건물들은 없다. 전국시대에 숱한 전쟁과 전투를 겪은 일본에서 성 구조는 군사기밀이므로, 함락되거나 철수할 때 일부러 많이 파괴하였다. 목조 건물은 불태우고, 모나게 쌓은 석축은 모서리를 무너뜨려 못 쓰게 만들었다. 이러한 행위를 파각(破却)이라고 한다. 천수각은커녕 목조 건물이 제대로 남은 성은 일본 현지에도 얼마 없는 실정. 그 밖에는 순천왜성이 그럭저럭 잘 보존된 편이다. [23] 해변 최단거리 기준 1.1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