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南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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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家煥
1742년 ~ 1801년 (향년 59세)
1. 개요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은 여주이다.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 정헌(貞軒)이다.[1]유학 뿐만 아니라 당시 서학이라고 불린 천문학,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2], 문장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학에 조예가 깊던 군주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동시대 정약용으로부터도 천재[3] 소리를 듣던 브레인이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조선 후기 3대 천재 문인으로 이가환과 함께 노긍(盧兢, 1738 ~ 1790), 심익운(沈翼雲, 1734 ~ 1783)을 꼽았다.
정파적으로는 남인 시파에 속하며 채제공의 후계자로 꼽혔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호감과 관심, 교인들과의 친분, 노론과 거리가 있어온 집안 내력[4] 등으로 집중 견제를 받았고, 정조 사후 발생한 신유박해 당시 타겟이 되어 옥사하였다.
2. 생애[5]
아버지는 조선 후기 명문장가로 유명한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6]이며, 어머니는 진주 류씨로 참의 류헌장의 딸이다. 조부 이침의 아우인 종조부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이며 시, 경사, 자학, 천문, 지리, 수학, 의학에 통달하였다. 20대에 성균관에 유학하여 월과마다 입격하며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29세인 1771년 (영조 47년) 식년시에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1777년 (정조 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7] 1778년 2월[8], 1778년 2월[9], 1780년 2월 문신 제술[10]에서 2차례 장원하였다. 1781년 8월에도 정조의 책문 시험이 있었고 논(論) 부분의 “ 소하가 미앙궁을 크게 지은 일(蕭何大起未央宮)"에 대한 책문을 작성하여 장원으로 선발되었다.[11][12] 비인 현감에서 예조정랑이 되어 숙부 이맹휴가 1744년 편찬했던 '춘관지(春官志)'를 증보하라는 명을 받았고, 링크 지평이 되었다. 링크
1782년 부친 이용휴가 사망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784년 3월 정조가 이가환이 상을 마쳤는지 묻고, 링크 3년상이 끝나자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링크 이 해에 조카인 이승훈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귀국하였고, 가까운 사이던 이벽, 권철신, 정약용 등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접하였다. 교리 연구에 집중하고 교인들과도 어울림이 있어, 노론으로부터 견제 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1785년 1월 고향에서 올라와 감인 낭청(監印郞廳)이 되어 ' 대전통편(大典通編)' 편찬에 참여하였고, 당상관인 정3품 병조 참지에 올랐다. 정조가 학식을 칭찬하며 총애하니 노론 벽파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13] 10월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786년 7월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어 지방에 내려간다. 1787년 4월 정주 목사 재임 당시 암행어사 이곤수(李崑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1788년 채제공의 힘으로 유배가 풀려 승지가 되었다. 1791년 윤지충 사건으로 천주교도들이 비난을 받을 때 남인 신서파의 교주로 지목되어 다시 중앙에서 밀려나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내려간다.
1792년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이잠의 조카라는 이유로 탄핵당하였으나 정조가 편당하지 말라며 탄핵한 지평 김희순을 삭직하였다. 링크 대사성에 제수되었을 때도 유생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링크 정조가 3차례 패초하였으나(=왕이 승지를 통해 부르는 것) 나아가지 않아 사직 의사를 표하며 지방관인 개성 유수로 내려간다. 링크 이후에도 심환지의 처벌 상소가 올라오고, 링크 이동직(李東稷)이 이가환의 문체를 문제 삼았음에도 정조는 매우 길게 실드쳐주었다. 링크 1793년 1월 이잠의 변호 상소를 올리자 김이소[14]와 김종수가 이가환의 처벌을 청하는 맞불을 놓았다. 5월에 승지 해임 및 패초하지 못한 죄를 벌주기를 바라는 상소를 올린다. 링크 6월에는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물러났고, 8월에 정조는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만난 자리에서 다시 이가환을 언급한다.[15] 링크 9월에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상황이 나아가기 어렵다고 아뢰었으나 정조는 일단 나오라고 명하였다. 링크 1794년 개성 유수이던 시절 탐오(貪汚)했다는 탄핵을 받아 삭탈 관직되었다가 10월 다시 대사성에 임명된다.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본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1월에 가의 대부 및 공조판서가 되었다. 정약용과 함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편찬하였다. 7월에 이승훈과 함께 서학교도로 지목되어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16] 링크,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의 탄핵도 받았다. 속죄하라는 의미로 충주 목사에 보임되었다가, 12월 의궤를 정리하도록 교정 당상(校正堂上)에 임명된다. 1797년 도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2월 한성 판윤이 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정조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이가환을 추천하고[17] 사망한다. 정조가 수리, 역상(數理 曆象)에 대한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좌의정 이병모에 의해 '사학의 괴수'로 지목받아 탄핵되나 정조가 다시 실드해주었다. 그리고 정약용과 함께 채제공의 시문집 '번암집(樊巖集)'을 교정하였다.
1800년 (정조 24년) 5월 정조가 오회연교(五晦筵敎)에서 대통합의 뜻을 비추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는 극심하였고[18] 스트레스를 받던 정조는 종기가 악화되며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고 8월에 사망하였다.
결국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인 1801년(순조 1년), 벽파는 남인의 수장인 이가환의 죽음을 목적으로 한 신유박해를 일으켰고, 이가환은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옥중에서 단식하여 사망하였다.[19][20] 이후 남인은 쇠락하여 사실상 정치적으로 소멸하였다.
딸만 둘을 두었으며, 6촌 형인 이구환의 아들 재적(載績)을 양자로 삼았다.
3. 천주교 신자였는가?
이가환이 천주교에 관심이 많았던건 사실이나 그가 신자였냐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는데 #, 열성 신자였다고 적어놓은 글도 있는 반면, 이가환은 세례명이 없고 1791년 종2품 광주 부윤 당시에도[21]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전력이 있어 천주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적 호기심이었을 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혹자는 정약종이나 황사영, 권일신[22], 이승훈처럼 확실한 천주교 신자일 경우에는[23] 묘지명을 짓지 않았던 정약용이 이가환의 묘지명은 지어줬다는 점을 거론하기도 한다. #하여튼 이가환은 벽파가 자신에게 씌우는 프레임을 잘 알았기에 천주교 탄압에 앞장서는 등 색깔론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으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는 남인의 씨를 말리려고 하였고, 서학과의 연결점은 그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시비의 빌미가 되기 충분했다.
4. 평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탄핵 받고 견제 받으며 정치적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활약이 있었더라도 신유박해 이후 족적이 삭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재로 유명했음에도 막상 업적을 따져보자면 남아있는 것이 없어 평가하기가 어렵다. 당시 문명을 날리던 이가환이기에 분명히 저술도 방대했을 것으로 추정되나,[24] 링크1 링크2 전하는 문집인 '금대집(錦帶集)'의 분량은 2권 1책에 불과할 정도로 양이 부실하다. 고종 후반에 이르러서야 신원되었기에 저술이 보존되거나 수집, 정리되지도 못했다. 금대집은 서문도 없고 정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기하, 천문, 역법에 대한 원고도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문장들은 매우 뛰어나 여러 책들에 포함되어 전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금대집이 번역되어 시중에 출판되어 있다. 금대시문초 해제 참고이가환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을 정약용이 작성한 정헌묘지명이 아마도 당대의 평가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정헌묘지명
공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글은 평생토록 잊지 않고 한번 입을 열면 줄줄 내리 외는 것이 마치 치이(鴟夷; 호리병)에서 물이 쏟아지고 비탈길에 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으며, 구경(九經)ㆍ사서(四書)에서부터 제자 백가(諸子百家)와 시(詩)ㆍ부(賦)ㆍ잡문(雜文)ㆍ총서(叢書)ㆍ패관(稗官)ㆍ상역(象譯)ㆍ산율(算律)의 학과 우의(牛醫)ㆍ마무(馬巫)의 설과 악창(惡瘡)ㆍ옹루(癰漏)의 처방(處方)에 이르기까지 문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황사영의 백서에 언급된 이가환에 대한 평가.[25]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뭇사람들을 초월했고, 장성하여서는 풍채가 훤칠하고 태도가 훌륭하였다. 문장은 온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보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은 신과 같을 정도였다.
5. 이가환에 대한 정조의 쉴드
정조 2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이던 이가환을 정조가 불렀다. 이전에도 만남이 있었던 모양으로 정조가 질문을 쏟아내고, 본인이 잠깐 쉬는 와중에도 승지 이진형에게 질문하라고 한다. 질문의 범위와 양이 어마어마하다. 실록 링크"저번의 대책(對策)에서 이미 해박(該博)함을 알고 있었거니와, 일전의 시권(試券)도 근래에는 이런 작품(作品)이 없었다고 이를 수 있으니, 진실로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오늘 너에게 전석(前席)을 빌려 주었으니, 모름지기 평소에 쌓은 공부를 털어놓도록 하라."
"이 사람은 해박(該博)하여 바로 질문하고 논란하기 좋으니, 승지(承旨)가 질문하기 시작하라."
"이 사람은 해박(該博)하여 바로 질문하고 논란하기 좋으니, 승지(承旨)가 질문하기 시작하라."
정조 16년, 승지 심환지가 이가환을 탄핵한다. 그에 대한 정조의 답. 실록 링크
"개탄스럽다고 배척한 것을 지나치다고 하지 않았는데 대신(大臣)에게도 개탄스러운 일이 있단 말인가? 이가환의 종조[26]에 대해서는 나도 그 이름을 익히 듣고 있으나, 종조는 종조이고 종손은 종손이다.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맡겼는데 이가환이 문사(文士)가 아니라는 말인가. 경 또한 과구(科臼) 중의 사람으로 옛 습관을 면하지 못하고 이렇게 뭇사람들을 따라 하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윤영희를 배척하고 이상황을 신구하는 일은 또한 어찌 따른다 따르지 않는다 말할 것이나 되겠는가."
정조 17년, 우의정 김이소가 이가환을 논핵하나, 정조는 다시 감싼다. 실록 링크
"이가환의 상소는 무단히 원통함을 하소연한 일과는 다르다. 바로 지난번에 특지로 벼슬이 제수된 것으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밀어닥치는 공격을 견디지 못해 이렇게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장을 올려 변명한 것이니, 오히려 딱하고 안타깝다고 말할 일인데 어찌 꼭 경의 말처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왕조 임술년 9월의 하교와 다음 해 여름의 하교가 기거주(起居注)의 기록에 자세히 실려있거니와, 잠의 조카 이맹휴(李孟休)의 일에 관해서도 성교가 오히려 아래와 같이 정중하고 간곡하였다. 그 성교에 ‘내가 죄를 씻어주고자 하면 그를 등용할 수 있다. 전일의 성상께서는 기미를 막고자 하는 뜻에서 처분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그 뒤에는 진달(陳達)하여 증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그를 표창하려는 것도 당파의 마음이고 그를 헐뜯는 것도 당파의 마음이다. 만일 그의 조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시었다. 내가 승선을 시켜 이 성교를 찾아내게 해서 본 뒤에야 비로소 가환을 등용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고 여긴다."
정조 19년, 박장설이 천주교의 폐해와 엮어 당시 공조판서인 이가환을 탄핵한다. 정조는 박장설을 조적에서 삭제하였다. 실록 링크 다음은 비답의 일부이다. 너희가 뭐래도 난 믿는다는 정조의 굳은 신뢰가 보인다.
"공조 판서가 이단(異端)을 전공(專攻)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인께서 해 주신 훈계에 깊이 징계되고 있다는 것은 요즘 연석(筵席)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바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물결처럼 흘려보내고 다시 남이 열 번을 하면 나는 백 번을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해 나간다면 중신(重臣)에게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정조 23년, 대사간 신헌조가 이가환 논죄 상소를 올리자 신헌조의 체직을 명한다. 실록 링크
"대사간은 이에 잘못을 깨달은 사람에 대해서 소급하여 다스리려 하고 연루됨이 없는 사람들까지 뒤섞어 의심하였다. 그리고 그가 적용하여 죄를 청하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법률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니 만약 벼슬이 언론을 맡은 관원이라는 이름과 바른말 하는 것을 막는다는 혐의 때문에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조정의 기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잉임시킨 것이 대신의 계청을 따른 것이기는 하나 다시 피혐하는 계사를 보니 아직도 깜깜한 밤중에 있어 꿈에서 깨어나려면 한참 멀었다. 이것은 바로 걸려 있는 것이 사사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사간 신헌조를 체직하라."
1792년 11월 문체 관련하여 노론[27]에게 공격받는 이가환에 대해 정조는 다음과 같이 대응하였다. 링크[28][29]
먼저 이가환에 관한 일부터 말하는 것이 좋겠다. 그대는, 이가환의 문체가 경전을 쓸모없이 여기는 것으로 이야깃거리를 삼았는데, 이는 곧 내가 한번 말하고 싶었으나 그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안이다. 그런데 그대가 그 말을 하였으니, 그야말로 이른바 가려운 곳을 긁어 준 셈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기는 하나 팔역(八域)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그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하늘을 나는 것은 나는 것대로 물속에 잠겨 사는 것은 잠겨 사는 대로 그들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모난 것은 모난 대로 둥근 것은 둥근 대로 각각 기량에 따라 알맞게 쓰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형세를 인하여 유리하게 인도하는 방법이고 나아가 황극(皇極)에 모이고 황극에 귀의하게 하는 오묘함이 절로 있는 것이다. 이를 넓은 천하에 비유하면, 곧 주 부자(朱夫子=
주희)의 문장이 천지와 같고 풍운과 같으며 권도와 정도를 적절하게 쓰고 천지의 기운을 여닫을 만한 큰 역량을 소유해서 오계(五季)의 누추함을 완전히 씻어 내고 천인(千人)의 대군을 깨끗이 물리친 것과 같다. 그 맛은 고기를 씹은 듯 맛나고 그 용도는 포백(布帛)처럼 요긴해서, 그 글을 읽게 되면 마음이 상쾌하고 후련하기가 마치 증점(曾點)의 비파 소리와 안자(顔子)의 거문고 소리를 듣는 듯하니, 한번 책을 펼치면 거의 성대한 종묘와 백관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왕양명(王陽明)은 도에 가까운 자질을 지니고서도 너무 지나치게 꾸미는 잘못이 있어서 오로지 양지(良知)에만 전력하고 반약(反約)만을 힘쓰면서 묻고 배우는 일은 아예 덮어 두었다. 이에 태원(太原)에서 뛰놀던 말이 그 높다란 총령(葱嶺) 사이를 마음껏 내달리고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깃발이 시내와 벽루(壁壘)에 광채를 내는 듯하였으나, 마침내는 성인의 문하에서 거절을 당하였던 것이다. 또 더구나 이보다 못하여 저속하고 음란하면서도 그럴싸한 맛을 지닌 잗단 패관 소품들을 입 가진 사람이면 한마디씩 해 보지만, 그것은 마치 구자(龜玆)나 부여(夫餘)같이 작은 나라들이 각기 제 나름대로 모양을 조금 갖춘 듯이 보여도 모기의 눈썹이나 달팽이의 뿔처럼 보잘것없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집집마다 찾아가서 오류를 바로잡고 사람마다 그 어긋남을 고쳐 주자면 임금 된 자가 너무 힘들지 않겠는가.
내가 근일에 치세에 관한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해서 맨 먼저 젊은 한두 문신들을 등용하여 일깨우고 경계시키도록 하였다. 이들은 대대로 사륜(絲綸)을 관장해 온 남공철(南公轍)과 집안에서 유학의 예교(禮敎)를 전수받아 온 김조순(金祖淳)과 서연(書筵)에 참여했던 옛 궁료(宮僚)의 아들인 이상황(李相璜)과 심상규(沈象奎)이다. 이들이 무젖어 있는 것은 높은 벼슬을 얻기 위한 작품들이고 외우고 익혀 온 것은 빙문할 때 응대하는 문체이니, 너무 앞서는 자는 조금 낮추고 모자라는 자는 좀 더 노력해서 참으로 각각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송(宋)나라를 버리고 월(越)나라에 가거나 중화의 문물을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도를 말미암지 않고 본말을 전도시키는 것이 있었다면 문교(文敎)를 펴는 데에 해가 되고 그 선대의 사업을 욕되게 한 셈이니, 어찌 다만 뜻하지 않은 작은 과오이겠는가. 그들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提學)을 쉽게 차지할 것이다. 과거를 주관할 때에 많은 선비들을 그르치고 글을 윤색할 때에 왕언(王言)을 욕되게 하는 것은,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악기로 비속한 노래를 연주하고 좋은 술을 토기에 붓는다는 것이다. 성균관과 관각(館閣)의 높은 자리를 한결같이 이들에게 맡겼다가 잘못되게 한다면 이들을 북쪽 변방에 정배하더라도 어찌 족히 속죄할 수 있겠는가.
이가환으로 말하면, 가문의 운수가 나쁜 집안은 아니었지만 100년 동안 벼슬길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 알이나 꿰면서 스스로의 분수를 떠돌이 신세나 시골에 묻혀 사는 촌사람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오는 소리들이 비분강개하는 말들이었고, 마음에 맞아 어울린 자들이 우스개나 일삼고 이상한 짓을 하는 무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말은 더욱 편파적이었을 것이고, 말이 편파적일수록 문장 역시 더욱 괴벽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색 무늬로 수놓은 듯 화려한 문장은 그 당시 팔자 좋아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양보하고, 〈이소경(離騷經)〉이나 〈구가(九歌)〉를 빌려다가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이가환이 좋아서 그런 것이겠는가. 이는 조정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신 기자의 홍범(洪範)을 준행하고 거룩한 공적과 신비로운 교화를 남기신 선왕의 뒤를 잇게 되자, 침전의 편액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특별히 쓰고 ‘정구팔황(庭衢八荒)’ 네 개의 큰 글자를 여덟 개의 창문 위에 죽 써서 두고는 아침저녁으로 돌아보며 나의 맹세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미한 집안의 남루한 선비들을 초야에서 뽑아 올렸는데, 이가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별안간 상도를 어긴 남공철 부류들과 동일하게 다루어 똑같이 배척한다면 이가환이 유독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 더구나 저 사람은 배척해야 하는데도 배척하지 않고 이 사람은 배척하면 안 되는데도 이 사람만 배척한다면 되겠는가.
그리고 이외에 다시 말해 둘 것이 있다. 재주가 있는데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뜻을 갖고서도 스스로 시험해 볼 길이 없어서 기꺼이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어 가는 자는 세속에서 이른바 ‘서얼’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인륜의 떳떳한 의미를 알고 싶어서 도리어 천리나 떨어진 곳의 다른 풍속을 흠모하고, 함께 나아가 벼슬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열일곱 사람이 발분한 이야기를 즐겨 보는 것이다. 시문을 짓는 지엽적인 일에서도 걸핏하면 서로 묘사하고 은연중에 얘기하니, 능히 초연하게 그 속에서 빠져나오는 이가 드물다. 이 또한 조정의 책임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성대중(成大中)과 오정근(吳正根)이 공경히 올바른 길에 나아간 것을 내가 평소에 좋아해서 점수를 이중(二中)으로 똑같이 주고 포상하는 뜻으로 윤음을 내렸으며, 박제가(朴齊家)와 이덕무(李德懋)로 말하면 많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써서 또한 양지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 주었다. 성대중과 박제가와 같은 무리들은 그만두고라도 요행히 이름을 드날린 자로 그 사이에 최립(崔岦)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얻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한다.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 지위를 한정하지 않으니, 어찌 또한 최필공(崔必恭)이 자신을 그르치고 그의 무리들까지 무수히 그르쳐 놓은 것을 돌이켜 살피지 않는 것인가. 이는 모두 이른바 그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각기 그 기량에 적합하게 해 줌으로써 그들이 함께 황극에 회귀(會歸)할 것을 기약하는 묘책인 것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는 이가환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이가환은 지금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에 올랐고 썩은 두엄에서 새롭게 변화한 것이다. 그의 심중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점차 훌륭한 경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어찌하여 근심하겠는가. 설사 이가환이 재주가 둔하여 사흘이 지났는데도 괄목할 정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가 또 어찌 번번이 남에게 양보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훌륭하게 내지 않으리라 장담하겠는가. 맹단(盟壇)에 올라 소의 귀를 잡고 기나긴 밤 술에 취해 자는 꿈속에서 대일통(大一統)의 권한을 다시 밝히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성 가운데는 준수한 이도 있고 우둔한 이도 있어서 먼저 깨닫고 늦게 깨닫는 차이는 있으나 일단 깨닫고 나면 같은 것이다. 더러 미욱하여 벗어나지 못한 자가 그 사이에 끼어 있더라도 이는 단지 태양 앞의 횃불과 같은 셈이고 군자 앞의 소인과 같은 셈이고 황곡(黃鵠) 앞의 땅속의 벌레와 같은 셈이니, 주인은 주인 노릇을 하고 객은 객 노릇을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 공자(孔子))이 《시경》 311편을 편집하면서 상간복상(桑間濮上)의 시들을 법도에 맞고 의미가 심장한 〈대아(大雅)〉 사이에 함께 끼워 넣은 것이다. 오늘 이 곡진한 깨우침을 들은 자가 자기를 미루어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에 감동하여 분발하고 모두 구비하기를 바라는 것을 경계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선하게 되고 집집마다 좋은 소리가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의 운명이 영원하도록 하늘에 비는 근본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근일에 치세에 관한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해서 맨 먼저 젊은 한두 문신들을 등용하여 일깨우고 경계시키도록 하였다. 이들은 대대로 사륜(絲綸)을 관장해 온 남공철(南公轍)과 집안에서 유학의 예교(禮敎)를 전수받아 온 김조순(金祖淳)과 서연(書筵)에 참여했던 옛 궁료(宮僚)의 아들인 이상황(李相璜)과 심상규(沈象奎)이다. 이들이 무젖어 있는 것은 높은 벼슬을 얻기 위한 작품들이고 외우고 익혀 온 것은 빙문할 때 응대하는 문체이니, 너무 앞서는 자는 조금 낮추고 모자라는 자는 좀 더 노력해서 참으로 각각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어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송(宋)나라를 버리고 월(越)나라에 가거나 중화의 문물을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정도를 말미암지 않고 본말을 전도시키는 것이 있었다면 문교(文敎)를 펴는 데에 해가 되고 그 선대의 사업을 욕되게 한 셈이니, 어찌 다만 뜻하지 않은 작은 과오이겠는가. 그들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提學)을 쉽게 차지할 것이다. 과거를 주관할 때에 많은 선비들을 그르치고 글을 윤색할 때에 왕언(王言)을 욕되게 하는 것은,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악기로 비속한 노래를 연주하고 좋은 술을 토기에 붓는다는 것이다. 성균관과 관각(館閣)의 높은 자리를 한결같이 이들에게 맡겼다가 잘못되게 한다면 이들을 북쪽 변방에 정배하더라도 어찌 족히 속죄할 수 있겠는가.
이가환으로 말하면, 가문의 운수가 나쁜 집안은 아니었지만 100년 동안 벼슬길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나 깎고 염주 알이나 꿰면서 스스로의 분수를 떠돌이 신세나 시골에 묻혀 사는 촌사람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오는 소리들이 비분강개하는 말들이었고, 마음에 맞아 어울린 자들이 우스개나 일삼고 이상한 짓을 하는 무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말은 더욱 편파적이었을 것이고, 말이 편파적일수록 문장 역시 더욱 괴벽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색 무늬로 수놓은 듯 화려한 문장은 그 당시 팔자 좋아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양보하고, 〈이소경(離騷經)〉이나 〈구가(九歌)〉를 빌려다가 흉내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이가환이 좋아서 그런 것이겠는가. 이는 조정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마침내 내가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신 기자의 홍범(洪範)을 준행하고 거룩한 공적과 신비로운 교화를 남기신 선왕의 뒤를 잇게 되자, 침전의 편액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특별히 쓰고 ‘정구팔황(庭衢八荒)’ 네 개의 큰 글자를 여덟 개의 창문 위에 죽 써서 두고는 아침저녁으로 돌아보며 나의 맹세로 삼았다. 그리하여 한미한 집안의 남루한 선비들을 초야에서 뽑아 올렸는데, 이가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별안간 상도를 어긴 남공철 부류들과 동일하게 다루어 똑같이 배척한다면 이가환이 유독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 더구나 저 사람은 배척해야 하는데도 배척하지 않고 이 사람은 배척하면 안 되는데도 이 사람만 배척한다면 되겠는가.
그리고 이외에 다시 말해 둘 것이 있다. 재주가 있는데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뜻을 갖고서도 스스로 시험해 볼 길이 없어서 기꺼이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어 가는 자는 세속에서 이른바 ‘서얼’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인륜의 떳떳한 의미를 알고 싶어서 도리어 천리나 떨어진 곳의 다른 풍속을 흠모하고, 함께 나아가 벼슬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열일곱 사람이 발분한 이야기를 즐겨 보는 것이다. 시문을 짓는 지엽적인 일에서도 걸핏하면 서로 묘사하고 은연중에 얘기하니, 능히 초연하게 그 속에서 빠져나오는 이가 드물다. 이 또한 조정의 책임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성대중(成大中)과 오정근(吳正根)이 공경히 올바른 길에 나아간 것을 내가 평소에 좋아해서 점수를 이중(二中)으로 똑같이 주고 포상하는 뜻으로 윤음을 내렸으며, 박제가(朴齊家)와 이덕무(李德懋)로 말하면 많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써서 또한 양지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 주었다. 성대중과 박제가와 같은 무리들은 그만두고라도 요행히 이름을 드날린 자로 그 사이에 최립(崔岦)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얻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한다.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 지위를 한정하지 않으니, 어찌 또한 최필공(崔必恭)이 자신을 그르치고 그의 무리들까지 무수히 그르쳐 놓은 것을 돌이켜 살피지 않는 것인가. 이는 모두 이른바 그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각기 그 기량에 적합하게 해 줌으로써 그들이 함께 황극에 회귀(會歸)할 것을 기약하는 묘책인 것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는 이가환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이가환은 지금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에 올랐고 썩은 두엄에서 새롭게 변화한 것이다. 그의 심중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점차 훌륭한 경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어찌하여 근심하겠는가. 설사 이가환이 재주가 둔하여 사흘이 지났는데도 괄목할 정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아들이나 손자가 또 어찌 번번이 남에게 양보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훌륭하게 내지 않으리라 장담하겠는가. 맹단(盟壇)에 올라 소의 귀를 잡고 기나긴 밤 술에 취해 자는 꿈속에서 대일통(大一統)의 권한을 다시 밝히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성 가운데는 준수한 이도 있고 우둔한 이도 있어서 먼저 깨닫고 늦게 깨닫는 차이는 있으나 일단 깨닫고 나면 같은 것이다. 더러 미욱하여 벗어나지 못한 자가 그 사이에 끼어 있더라도 이는 단지 태양 앞의 횃불과 같은 셈이고 군자 앞의 소인과 같은 셈이고 황곡(黃鵠) 앞의 땅속의 벌레와 같은 셈이니, 주인은 주인 노릇을 하고 객은 객 노릇을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 공자(孔子))이 《시경》 311편을 편집하면서 상간복상(桑間濮上)의 시들을 법도에 맞고 의미가 심장한 〈대아(大雅)〉 사이에 함께 끼워 넣은 것이다. 오늘 이 곡진한 깨우침을 들은 자가 자기를 미루어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에 감동하여 분발하고 모두 구비하기를 바라는 것을 경계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선하게 되고 집집마다 좋은 소리가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의 운명이 영원하도록 하늘에 비는 근본이라고 말할 것이다.
6. 정약용이 기록한 일화
1. 당쟁에 곤혹스러워 하는 이가환과의 대화.기미년(1799, 정조 23) 여름 내가 정헌공(貞軒公)을 방문하였더니, 공이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당인(黨人)들이 천금(千金)을 걸고 나를 얽어넣으려 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기에 내가, “대감을 얽어넣는 데 천금이라면 나 같은 것은 5백금에 불과할 것입니다. 공께서는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하고 서로 크게 웃었다.
2. 정약용이 이가환에게 장난삼아 난해한 한자의 발음을 물어 곤혹스럽게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물어본 그 글자가 나왔던 정약용이 본 그 책을 바로 언급하고,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근거를 들어 설명해준다.
하루는 소보(邵寶)의 《용춘당집(容春堂集)》을 보니 나모전(㒩母傳)이란 것이 있는데, 나(㒩)자를 알 수 없어 자서(字書)를 두루 찾아보았으나 이 글자가 없었다. 이에 나는 손뼉을 치며, 이 글자로 정헌(貞軒)을 곤혹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재촉하여 공에게 가서 몇 마디의 말을 주고 받은 뒤 나자의 음(音)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이 글자는 알 수 없다. 자휘(字彙)나 자전(字典)에도 나오지 않는다. 자네가 혹시 소보의 나모전을 보았는가? 나모전은 모영전(毛穎傳)과 비슷하니 역시 기문(奇文)이다. 나는 마침 기억하고 있다.”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 내리 외고 나서 말하기를, “서릉씨(西陵氏)의 딸이 들에 나가 비로소 누에(蠶)의 민숭민숭한 모양을 보고 그를 나조(嫘祖)라 하였다. 나(㒩)자의 음은 당연히 나(嫘)의 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하였다.
3. 한 선비가 지역 과거장에서 '지이(之而)'라는 글이 들어간 시를 썼는데 그 글자가 문제가 있다고 낙방하였다. 신광하의 시 외에 다른 곳에서도 본 기억이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아 대꾸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채제공이 왕안석의 시에 나온다며 이야기해주자, 이가환이 추가로 그 전의 출전을 이야기하는데 좔좔좔 이야기 해줘 좌중에서 시원해했다는 일화이다.
일찍이 번옹(樊翁)의 석상(席上)에 화성(華城)으로부터 왔다는 어떤 선비가 있어 말하기를,
“근간 제가 시권(詩卷)에 지이(之而) 두 글자를 썼더니, 유수(留守)가 저를 낙방(落榜)시키고 시권을 여러 사람들에게 돌려보이면서 ‘벽서(僻書)ㆍ괴문(怪文)을 어전(御前)에 올릴 수 없다.’고 하므로 저는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승지(承旨) 신광하(申光河)의 시에 지이 두 글자 쓴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그 출전(出典)을 알지 못하여 힐난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번옹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왕형공(王荊公 형은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시에, 고래 잡느라 파도와 싸우니(采鯨抗波濤) 바람이 일고 비늘이 서네(風作鱗之而)
란 것이 있는데, 이 시가 노소(老蘇 소순(蘇洵))의 시를 압도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왕형공과 노소의 감정이 이 시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형공의 시도 본래 정경(正經)에서 나온 것이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재인위순거장(梓人爲筍虡章)에 ‘움켜 죽이고 물어뜯는 짐승은 반드시 발톱을 감추고 눈은 툭 튀어나오고 비늘은 불거져 나온다(之而). 발톱을 감추고 눈이 튀어나오고 비늘이 불거지면 사람이 보기에 반드시 발끈 성을 내는 것 같다. 진실로 성을 낸다면 무거운 악기를 짐질 만하다. 여기에 채색까지 갖추면 반드시 소리를 낸다. 발톱을 감추지 않고 눈이 튀어나오지 않고 비늘이 불거져 나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기운이 쇠하여 시들한 짐승이다. 여기에 채색까지 갖추지 못하면 두들겨도 반드시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은 ‘지이(之而)는 불거져 나오는 것(頰𩑔)’이라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은 ‘협곤(頰𩑔)은 두려운 모양이다.’하였다. 고공기가 어찌 벽서(僻書)란 말인가. 고경(古經)에 어두우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당세를 논하면 좋아서 입이 벌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자네는 어찌 이로써 대답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공이 이 《주례》의 글을 욀 적에 빠름이 마치 나는 물굽이와 세찬 물줄기 같아서 온 좌중(座中)이 모두 시원스러워했다.
4. 누군가 소동파의 특이한 시구가 있는데 기억나지 않아 아쉽다고 하자, 이거 아니냐며 바로 알려준다.
하루는 여러 학사(學士)들이 정원(政院)에 앉아서 시(詩)를 논하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동파(東坡)의 주행시(舟行詩)에 괴기(怪奇)한 시구가 있는데, 지금 내가 잊어 한두 글자도 욀 수 없으니 한스럽다.”
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류는 물 가에서 생기고(暗潮生渚) 지는 달은 버들가지에 걸렸다(落月挂柳)
라는 시가 아닌가?” 하니, 그 사람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대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분입니다.”
5. 의약의 지식을 보여주는 일화
하루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와서 묻기를, “선수(蟬酥)와 아편(鴉片)은 어떠한 물건입니까?”
하자, 공이 정색(正色)하며 말하기를, “소년은 정욕(情慾)을 억제하고 학업을 닦아야 하거늘 이 어인 질문이냐.”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뒤 내가 공에게 선수와 아편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음약(淫藥; 음탕한 약)의 재료이다. 선수는 두꺼비 오줌이고 아편은 앵속각(罌粟殼)의 진액인데, 저 사람이 그것을 조제(調劑)하고자 하기 때문에 내가 일러 주지 않았다.”
6. 우리나라와 중국의 시를 언제, 누구의 시인지 모두 외우고 있어 물어도 틀지지 않았다. 조카가 중국 시체를 모방하여 지은 후 이건 어떤 시냐고 물었더니 개xx 의 시라고 하였다.
공은 또 감식(鑑識)이 정통하여 당ㆍ송ㆍ원ㆍ명(唐宋元明)의 시를 한번 들으면 백 번에 한 번의 착오도 없이 모두 어느 때의 시인지를 알았고, 우리나라 사람의 시로는 더욱 그를 속일 수 없었다. 공의 생질 허질(許瓆)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시집(詩集)을 가지고 그 속에서 시를 뽑아 종일토록 물어도 끝내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허질은 재사(才士)였는데, 중국의 시체(詩體)를 모방하여 한 편의 시를 지어가지고 가서 이 시가 어느 때 누구의 시이냐고 물으니, 공이 한동안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강아지(犬子)의 시이다.” 하였다.
허질이 탄복하며, “참으로 귀신입니다. 어떻게 내가 지은 것인 줄 아셨습니까?”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웃었다.
[1]
정약용이 쓴 이가환의 묘지명이 '정헌묘지명'이다.
[2]
이가환의 천문학, 수학에 대한 교수신문 기사 참조.
[3]
'문자로 쓰인 모든 학술이, 한번 물으면 모조리 술술 쏟아져 나와 막힘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각 부분을 전공한 학자처럼 모두 깊이있게 파악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질문한 사람이 놀라서 귀신이라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 안대회 저, '고전산문산책', 208p
[4]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 '이잠'이
장희빈의 아들인 원자(훗날의
경종)의 세자 책봉이 미뤄지는 것은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당시
노론이 후사로 밀기 때문이라며 상소했다가
숙종의 진노를 사 국문을 받고 사망한 일이 있었다. 참고로 이잠이 둘째, 이가환의 조부 이침이 넷째,
성호 이익이 다섯째였다. 여담으로 이잠은 동생 이익의 스승이기도 했다.
[5]
정약용의 묘지명 참고.
링크
[6]
이용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는 기사 참조
[7]
을과 7위. 합격자 35명 중 10위.
링크 그러나 정조가 답안을 보고 장원보다 낫다고 평가하고 불러서 여러가지를 묻고 칭찬하였다.
링크
[8]
주제는 ' 유주를 받아들이지 않은 일에 대해 논하라(不納維州)' 였다. 정조는 “논(論)에서 장원한 글은 근래에 없었던 작문이라고 말할 만하니, 참으로 훌륭하다.”, “오늘 문신 제술 때에 논(論)에서 삼상(三上)으로 수석을 차지한 부정자(副正字) 이가환(李家煥)의 글은 참으로 근래에 이러한 작문은 없었다고 하겠다. 일찍이 전책에서 그 박식함을 보았는데, 오늘 제술에서는 더더욱 해박함에 놀랐으니, 인재를 육성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상례(常例)를 따르겠는가. 특별히 승륙(陞六)하여 조용(調用)하라.”고 언급하였다.
일성록 링크
[9]
정조와 홍국영의 대화에서 홍국영이 기재(奇才)라고 하였고, 정조는 해박함을 당할 수 없다 했다.
링크
[10]
주제는 ‘항우가 오강을 건너지 않은 일에 대해 논하라(不渡烏江)'였다. 정조는 “문신 제술의 논(論)에서 삼상(三上)을 받은 이가환(李家煥)은 그동안 세 차례나 거수(居首)하였으니, 《속대전(續大典)》에 의거하여 우직(右職)으로 승전(承傳)하라. 표(表)에서 거수한 자 이하에 대한 상전(賞典)은 모두 정원에서 규례를 상고하여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라.”고 하였다.
링크
[11]
일성록의 일부. 논(論) 한 편에 이르자, 내가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잘 지었다.” 하였다. 등급을 삼상(三上)이라 쓰고 봉미(封彌)를 뜯으니, 바로 이가환(李家煥)이었다. 내가 이르기를 “명성은 헛되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니, 언뜻 그 글을 보기만 하고도 월등한 등급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은 그동안 모두 네 차례 장원(壯元)이었다.”,
링크
[12]
참고: 백진우, 策文의 정치적 활용성에 관한 시론 — 정조시대 이가환의 蕭何大起未央宮論 분석을 중심으로 —
[13]
성균관 대사성, 형조 참판, 승정원 좌/우승지, 공조 판서, 형조 판서를 역임했지만 노론의 견제로 정승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수시로 탄핵을 받아 사직과 제수를 반복하였고, 정조의 배려로 중앙 정계에서 떨어져 지방관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잦았다.
[14]
김수항의 현손자이며
김창집의 증손자로 노론에 속한다.
[15]
'10여 년을 이렇게 하면 풍속이 어찌 저절로 크고 넓은 데로 변화해 가지 않겠으며 인재를 등용하는 길도 어찌 이로부터 넓어지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이가환(李家煥)을 뽑아 쓴 일도 이러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관계 있는 사람이 흉악한 역적이라 해도 이에 연좌(連坐)된 경우가 아니면 굳이 벼슬길을 막을 필요가 없는데, 이잠(李潛)은 흉악한 역적과는 다른데도 어찌 종조부의 잘못 때문에 막아서는 안 될 종손(從孫)의 벼슬길까지 막아서야 되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반드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돕고 서로 믿은 뒤에야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어찌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천자로부터 나온다는 뜻이겠는가.'
[16]
'이승훈(李承薰)이 요망스러운 책을 구입해 와서 그 흉악한 삼촌 이가환을 학습시켰다는 것을 온 세상이 모두 전하고 있으니 도당의 악에 대한 주벌을 또한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17]
상이 일찍이 경모궁(景慕宮) 재실(齋室)에서 번옹(=채제공)을 불러 조용히 묻기를, “경이 늙었으니 누가 경을 대신할 만한가?” 하니, 번옹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믿고 쓸 사람으로 이가환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축년 봄의 상소로 인하여 시론(時論)에 미움을 샀기 때문에 기괴한 비방이 있어 감히 용서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은, “경의 말이 아니라도 내가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다.” - 정헌묘지명의 내용
[18]
오회연교는 이가환, 정약용 등의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뜻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런 내용은 읽어보면 사실 보이지 않는다. 안대회 교수 인터뷰 참고.
링크
[19]
'공은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단식(斷食)한 지 6~7일 만에 기절(氣絶)하여 죽으니, 끝내 기시(棄市)하였다.' - 정헌묘지명
[20]
"내가 죽으면 조선의 수학이 단절될 것이다."라고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21]
직전 신해박해 당시 이가환은 반대파의 모함으로 천주교인으로 몰려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경력이 있다.
[22]
권철신의 동생으로 신해박해 당시 장형을 받고 유배지에 가다 장독으로 사망했다. 참고로 권철신 역시 수시로 천주교 반대파들에게 모함 당했으나, 정조의 비호로 이가환처럼 몇차례 화를 면하였다. 한 예로 1799년에도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을 정약종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피소하였지만, 정조는 오히려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면서 머리 아픈 서학 사건을 거론하지 못하게 하였다. 허나 정조가 죽자 신유박해 때 권철신도 붙잡혀 사망한다.(...)
[23]
다만 이승훈은 항목에 있듯 배교한 것으로 보여 논란이 있다.
[24]
이가환이 사망하기 전 반대파들이 올리는 상소에도 문학에 이름 났다는 언급을 한다.
[25]
참고: 명평자, 금대 이가환 기문의 주제 표출 양상
[26]
상기한 이잠을 일컫는다.
[27]
부교리 이동직
[28]
홍재전서 43권, 비답 2 - 강혜선, 정조의 문체 비판 재론, 2010 참조.
[29]
실제
문체반정의 직접적 계기가 된 인물이 이가환이다. 이가환이 문체 꼬투리로 실각할 위기에 처하자 정조가 이가환이 그런 문체를 쓰는 건 맞지만 너희도 그러니 다 고치라는 식으로 문체반정을 일으키며 전선을 넓힌 것. 너희에 해당하는 것은 노론이며, 거기에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도 얽혀들어갔다. 윗 부분의 안대회 교수의 관련 인터뷰를 같이 참고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