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0 16:47:35

오회연교

1. 개요2. 연교의 배경3. 내용4. 분석5. 같이보기

1. 개요

1800년 5월 30일 조선 정조 경연 석상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이다. 이날이 5월 그믐이었기에, 오회연교(五晦筵敎)라고 불린다.

정조가 평생 노력했던 의리 재정립을 역설하는 메시지였지만, 신하들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같은 해 정조가 승하한 탓에 별다른 소득은 없었으며 후에 정순왕후는 이것을 오히려 노론 벽파의 기존 의리가 옳다는데 이용한다.

2. 연교의 배경

1800년(정조 24년) 5월 12일, 정조가 중비(中批)[1]를 통해 인사를 단행하면서 이만수(李晩秀)를 이조 판서로 임명하는데 이에 대해 홍문관 수찬을 지내고 있던 김이재(金履載)가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제는 이만수가 이미 우의정으로 있었던 이시수의 동생이었다는 것. 조선시대에는 상피제도가 있었고, 우의정은 특정 관서의 장은 아니나 정승으로서 이조를 포함한 육조의 업무에 대해 관리하고 감독하기 때문에 이시수·이만수 형제의 예시 역시 원칙대로라면 상피를 적용해 한쪽이 직을 그만둬야 했다. 이를 인지해서 이만수 역시 한차례 상소를 올려 이조 판서 임명을 사양했으나 정조가 이를 물리고 이를 강행했고 김이재는 상소를 통해 끝까지 사양하지 않은 이만수와 사양에도 임명을 강행한 정조를 동시에 비판한 것이었다.

김이재의 이런 비판이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이 시기는 준론탕평의 틀 속에서 당쟁이 이어지는 시대였다는 것. 이시수와 이만수는 소론에 속했고, 상소를 올린 김이재는 노론 시파에 속했기 때문에 정조 입장에서는 상피제를 핑계로 군주의 인사권을 무시하고 자기 당파의 이익을 위해 상대 당파를 공격한 것으로 보였다.

5월 29일, 정조는 김이재를 언양으로 유배하면서 강경 대응하였으나 다음날 오히려 이만수의 형인 우의정 이시수가 나서 김이재를 용서해줄 것을 청했고 이를 본 정조가 연교를 내리게 되니 이것이 바로 '오회연교'다.

3. 내용

약원(藥院)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내의원 도제조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어제 삼가 전교를 보았더니 수찬 김이재를 귀양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원소(原疏)를 보지는 못했으나 이것은 한 재상을 논박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옥당이 한 재상을 논박하였다 하여 귀양을 보내기까지 한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신은 감히 신의 아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 대한 처분이 중도에 지나친 것이 아닌가 염려되기 때문이니, 빨리 더 깊이 생각하시어 도로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이 이르기를,

“지금 연석에 불러 접견한 것은 이 일을 확실하게 일러주기 위해서인데, 차대(次對)하는 날짜를 앞당겨 정한 점은 조금 지나친 일이고 나의 요즘 정력으로는 여러 사람을 상대하여 대화하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에 유사 당상만 들어오게 한 것 이다. 경의 그 말은 너무나 뜻밖으로 도리어 한탄스럽다. 경의 선경(先卿)이 일찍이 고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을 구제한 일이 있는데, 경이 김이재를 구제하는 것은 경의 선경의 일과는 그 말로 보면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일은 사실 다르다. 대체로 선조(先朝) 당시에는 신축·임인년의 의리로서 성궁(聖躬) 자신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의리를 고수하는 사람은 모두가 선조(先朝)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었는데 사대부의 기풍과 절개 또한 오늘날보다 백배나 되었으며, 게다가 공적인 분개 이외에 그들의 조부와 부친 때부터 잊지 못할 사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의리는 저절로 신장이 되었으나 그로 인해 파급된 폐단은 세신(世臣)과 세가(世家)도 보전하지 못할 염려까지 생길 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선대왕의 거룩한 덕과 큰 사랑으로 반드시 그들을 붙잡아주고 존속시키고자 번득이는 창칼 속에서 구제하여 반석처럼 안전하게 해 주셨다.

김시찬을 처분한 일은 대체로 지나친 자를 꺾고 거센 자를 억제하는 고심에서 나왔으나 당시에 의리를 고수한 선비들은 하나같이 김시찬과 같았으므로 그 처분이 비록 엄중했지만 공론은 더욱 더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천지를 떠받치고 우주를 관통하는 의리는 이로 인해 한층 더 튼튼해지고, 당쟁을 없애 서로간에 화합하게 한 성덕(聖德)은 이로 인해 한층 더 빛났다. 경의 선경의 경우는 김시찬과 본디부터 친근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구제했는데 이는 참으로 당연한 도리인 것이다.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옛날과는 달라 이른바 청의(淸議)를 고수하고 준엄한 언론을 지녔다는 자들이 옛날 사람들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니, 만일 위에서 밝히지 않는다면 한줄기 춘추(春秋)의 의리는 금방 어두워져 장차 밝힐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이 처분은 순전히 의리를 밝히기 위해서였는데 경은 그 일이 경의 아우와 관련되었다 하여 도리어 구제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성인의 이른바 처지를 바꾸면 다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말은 그 처지가 서로 다르고 처리한 일도 따라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선경이 김시찬을 구제한 일은 대체로 그가 의리를 붙잡아 세웠기 때문이지만 지금의 김이재가 한 말은 의리의 반대편인 세속의 무리 속에 속한 것이니, 경이 그를 구제하는 일을 어찌 선경의 일을 끌어다가 전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만일 외면으로만 본다면 그 상소는 한 사람 이조판서를 논박한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 또한 경고하고 꾸짖으라고 한 것에 불과하니, 이른바 추고하는 정도로 약간 다스리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처럼 어물어물 넘어가는 때에 이조판서 정도는 말할 것도 없고 혹시 경을 논급하거나 더 올라가 임금을 논급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그 이유로 죄를 가해 이와 같이 처분할 수가 있겠는가. 이 어찌 의리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대신은 자기 자신이 탄핵을 받은 것과 관계되는 일이더라도 의리에 관계된 것이라면 작은 혐의를 피하지 않고 앞장서서 벌을 줄 것을 청한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경의 그 말은 전혀 경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신은 그 상소의 원본을 보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답하였다가 이제 분부를 받고 보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사실이 덕이 못난 사람으로 등극한 이후 3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나 정책적인 면에서는 볼 만한 것이 없으나 한 가지 정당한 규범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꿋꿋하게 지켜 변동이 없었다. 대체로 을해년 이후부터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제도가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천도(天道)는 순환하는 법이라서 성쇠가 계속 반복되었다. 사실 모든 신료들이 극도로 성하면 다시 쇠퇴해진다는 경계를 잊지 말고 의리를 고수하던 자세를 잃지 않아 항상 을해년 이전이 마음을 지님으로써, 의리를 고수하는 것이 모두들 자기 조부와 부친이 선조(先朝)를 위해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하였더라면, 어찌 모년(某年)의 의리를 범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 원인을 따져보면, 안일을 즐기는 고질 속에 깊이 빠져들어가 한 조각 정신이 궁리하고 경영하는 것은 오로지 명리를 얻을 것을 걱정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까 걱정하는 데에만 있으므로 추고나 체차 등 가벼운 벌까지도 다 신경을 쓰면서도 의리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의리와 배치되는 쪽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한 번 발전하여 모년의 대의리에 관계되었고 두 번 발전하여 을미년의 상황이, 세 번 발전하여 병신년의 상황이, 네 번 발전하여 정유년의 상황이 벌어졌으며 정유년 이후는 참으로 이른바 회국(鄶國) 이하는 자질구레하여 비평할 것도 없다는 상황이므로 나 또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의 모든 신자들은 어느 누가 선대왕께서 만들어 길러주신 자가 아니겠으며 또 어느 누가 선조 때 충성을 다 바친 자들의 아들 손자가 아닐 것인가. 그런데도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이와 같은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으니, 이는 인인(仁人) 군자만 차마 방관하지 못할 일이 아니라 세도(世道)와 국가를 돌아볼 때 어찌 추위가 살을 에이듯 송연하지 않겠는가.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한 부류의 청의(淸議)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두 척리(戚里)의 다툼이 춘추 시대 의리가 없는 싸움과 흡사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의리를 부식하고 있는 아무아무도 그들이 어찌 모두 척신(戚臣)과 친한 자들이겠는가.

나의 한 조각 애절한 마음은 오로지 찌들은 더러운 습속을 전부 새롭게 만들어 마침내 나쁜 무리들까지도 모두 착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에 처음 왕위에 오를 때부터 한 가지 정당한 규모를 분명히 내보여 의리를 천명하고 함께 대도(大道)로 가는 근본으로 삼았는데, 규모가 크게 정해진 뒤로 이 속에 들어온 자는 국가를 위하는 편으로서 충신이고 군자였으며 여기서 벗어난 자는 역적의 편으로서 충성스럽지 않은 자이고 소인이었다. 의리에 관계되는 일은 실로 못을 자르고 쇠를 끊듯 과감하게 처결해야 하며 규모가 일단 확고히 세워지면 국법보다 엄한 법이다. 오늘날의 신자로서 어느 누가 이러한 규모는 절대로 변동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나의 한 가지 정당한 규모에 관해서 방금 말을 하였는데 그것을 잘 모르는 자는 간혹 내가 사람을 취사할 때 선후와 피차가 서로 다른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병신년이후 등용한 자를 살펴보면 내 본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다. 기해·경자년 당시는 바야흐로 어진 자를 대거 등용할 때였으나 불행하게도 홍국영(洪國榮)의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때의 상황으로는 우선 쉬게 했다가 다시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 어쩔 수 없이 진출시켰다가 다시 또 내보내는 등 오락가락 하였으나 한때의 진퇴가 의리의 경중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기해년 이후 8년 사이에 비로소 조금씩 옛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고상(故相) 채판부(蔡判府)와 김봉조하(金奉朝賀) 등의 경우는 액을 당한 시기가 마침 같기 때문에 신축년부터 무신년까지 8년 사이에 또 다시 등용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조정에 쓸 만한 인물이 많았으므로 윤우상(尹右相) 같은 자는 때마침 사건을 만난 김에 들어가서 쉬게 하였다가 무신년부터 을묘년까지 8년 동안에 다시 등용하였다. 대체로 그 등용하고 내보내고 하는 주기를 모두 8년으로 기한을 두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월을 낭비했던 점은 있으나 반드시 쉬게 한 뒤에 쓰려고 했던 이유는 시대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고 또한 그 사람을 위해 신망을 기르는 방안이었다. 내가 그를 쉬게 한 이유도 일찍이 그 자신에게 말해준 것이 있었지만 그 자신이 잘 쉬어준 것도 그 어찌 처신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8년을 주기적으로 등용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하지만 8년을 전후하여 세 정승을 번갈아 등용하였고 그 중간에 정승으로 제수되어 책임을 맡은 자 또한 많았는데, 모두 그 마음이나 행적이 의리를 고수한 실상이 반드시 있어야만 등용하였었다. 지금 이 분부도 어느 한 부분만 들추어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깊은 뜻이 따로 있다.

과거 선조(先朝) 때에는 당쟁을 없애려는 고심 때문에 등용하고 물리치는 일이 기준이 없는 때도 있었으나 나는 이와 같이 일정한 기준을 두었는데 이는 또한 이른바 때 시() 자의 의미가 크다고 한 경우이다. 그 진퇴는 혹 서로 다른 때가 있었으나 지극히 엄중한 의리는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을 때 여러 가지 시고 짠 반찬이야 많아도 ··· 등의 본디 맛은 항상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재 의리를 주장하는 한두 신하들 또한 몇명 남지 않았다는 한탄이 있으나 지위의 고하와 대소를 막론하고 참으로 선을 사모하고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곧 우리 당의 인물이니, 내가 사람을 쓰는 기준 또한 어찌 이러한 규모에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친절하신 분부로써 환하게 일러주시니 오늘 연석에 올라온 제신으로 어느 누가 삼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한 가지 규모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큰 기준을 삼았다고 말했지만 다시 또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의 ‘솔교(率敎)’ 두 자를 가지고 제신에게 자세히 말할까 한다.

중용(中庸)》에서, 하늘이 사람에게 준 기품을 본성이라 이르고 그 본성을 따라 행하는 것을 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하늘의 떳떳한 도를 지닌 것은 천성에 근본을 둔 것으로서 그대로 잘 따라 어긋남이 없는 것이 이른바 도(道)이고, 임금과 스승의 자리에 앉은 자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그리하여 예악과 형정(刑政)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 이른바 도를 조절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자기가 한 말을 어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성인이 깊이 경계한 것이지만 하늘의 법에 부합되고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라면 위에 있는 자가 어찌 감히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것인가. 《 대학(大學)》에서, (()은 천하를 인()으로써 인도하자 백성들이 그것을 따랐다고 했고 또, 명을 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과 서로 틀리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좋아하는 것이라는 글자는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긴 하나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는 뜻의 ‘호시의덕(好是懿德)’의 호(好) 자로서 또한 단장 취의(斷章取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명하는 것이 그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그 우애함을 일깨워주는 교화에 포용되고 크게 한덩어리로 뭉치는 영역으로 함께 가지 않겠는가.

대체로 의리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지극히 옳은 것이 곧 의리이니 옛날의 의리나 오늘날의 의리를 막론하고 지극히 옳은 점에 있어서는 다 마찬가지이다. 오직 그것이 지극히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보다 한 등급이 높은 선배의 선류들도 모두 법칙에 들어맞고 가르침을 따르는 영역으로 함께 돌아갔는데, 겉으로 치닫는 별종의 무리는 도리어 기회를 엿보고 상대편의 비위를 맞춘다는 죄목을 순종하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니, 이 어찌 세도의 깊은 걱정거리가 아니겠는가. 의리가 있는 곳은 지극히 정밀하고 엄정하므로 반드시 면밀히 살펴본 뒤에야 변함없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평소에 쌓은 학력(學力)은 이러한 부분에 똑바로 보았다고 자부하여 즉위하던 그 당시 일찍이 한두 신하와 삼대(三代) 성군의 정치를 이룩하자고 서로 기약했던 말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우스운 일이나 내가 고수했던 것은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을묘년 이후 나는 세도를 깊이 염려한 끝에 습속을 바로잡자는 ‘교속(矯俗)’ 두 글자를 끄집어 냈는데 대체로 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운 쪽을 애써 따라 야박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속(俗) 자 하나로 말하였으나 사실을 따지고 보면 모년(某年)의 의리에 국법을 범한 것도 곧 이 속 자이고 을미·병신년에 관계된 것 또한 이 속 자 하나였다.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오늘날의 신자가 된 자라면 아무리 무지 몽매한 필부라도 누가 ‘교속’ 두 글자가 형벌보다 엄하다는 것을 모를 것인가. 이 때문에 요즘 분부를 내릴 때 속 자 하나를 가지고 언급할 경우에는 비록 변동할 수 없는 정황이 있더라도 행여 뒤처질세라 헐레벌떡 바짝 다가가 다루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어찌 속 자 하나에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엄중해서가 아니겠는가. 이번 이조판서의 일로 말하더라도 사직소에 대한 비답이나 나오라고 권하는 분부에서 첫째도 교속을 말했고 둘째도 교속을 말했으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히 그러하였겠는가.

대체로 여러 해 전부터 일종의 풍습이 녹봉과 벼슬자리만 추구하여 사실 좋은 벼슬을 지낼 수만 있다면 염치 같은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미친듯이 허둥대므로 그 해독은 장차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 이를 판국이다. 그러다가 일단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다시 또 그만둘 생각을 가져 상피(相避)하는데, 그 사례가 법전에 없다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군신간의 분의(分義)가 지엄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여 같은 성씨의 먼 친족 사이에서도 그 관계를 끌어대어 이유로 삼기를 《대전(大典)》 본문의 상피 조항과 다름없이 하고 있다. 이른바 시종신이란 자들도 제수된 관직을 그 즉시 행공하려 하지 않고 임금과의 관계가 소원한 자들까지도 다 그것을 아름다운 일로 간주하여 앞다투어 본받고 있으니, 이런 점들이 세도의 폐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작은 일이 아니다. 어제 하교 가운데, 존귀한 지위로서 청환 요직을 차지한 자들이 그 직함을 받기가 무섭게 모면하려 한다고 한 것은 나 또한 십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같이 썼을 뿐이다.

나는 이 한 가지 일만 바로잡으면 충분히 습속의 폐단을 전부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자(程子)가 한 말씀에 효제(孝悌)는 인(仁)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 했는데 나 역시 이것은 습속을 바로잡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일을 바로잡으면 한 가지 일의 성과가 있고 두 가지 일을 바로잡으면 두 가지 일의 성과가 있을 것이므로 이와 같이 계속해 나간다면 크게 모두 변화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내가 고심하고 있는 바로 그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중비(中批)로 조처하는 일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일인데 내가 어찌 현직 우상의 아우를 특별히 그 벼슬에 제수하였겠는가. 정승과 이조판서 자리를 형제가 나누어 앉는 것은 그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백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게다가 지금 사람은 자질이 옛사람보다 못한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처럼 파격적인 일을 했으니, 이조판서로서는 나와 달라는 분부를 받는 즉시 주저하지 말고 명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습속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본의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조판서의 사직소를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가 김이재(金履載)의 상소가 들어온 뒤에 다시 가져다 보았더니, 먼저 진(晉)나라 왕술(王述)의 말을 쓰고 그 다음 이귀(李貴)의 일을 인용하여 잘 들어맞지 않아 오활하다 할 수 있으므로 나 또한 어폐가 없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습속을 바로잡는 것과 관계가 있으니 비록 이보다 더 큰 망발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쥐를 때려잡고 싶어도 그릇이 깨질까 염려하는 혐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 말을 논박하고 싶더라도 반드시 습속을 바로잡는다는 본의부터 먼저 천명한 다음에 그 어구가 중도에 지나쳤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지금 이 김이재의 상소는 그 명목은 이조판서 한 사람을 논박한 것이지만 사실은 종이에 가득 떠벌린 말들이 오로지 요즘에 내가 분부하는 ‘교속(矯俗)’ 두 글자를 버젓이 배치하려고 한 것들이다. 내가 현재 그가 어구를 흠잡은 것을 나쁘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의 상소문 속의 어구를 가지고 지적하여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 취지를 살펴보면 표적이 이조판서에 있지 않고 오로지 ‘교속’ 두 글자를 파탈하자는 데에 있다. 나의 본의를 그가 반드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니, 알면서도 이러한 행위를 한 자를 어떤 벌로 다스려야 하겠는가. 의리가 개재되어 있는 문제는 털끝만큼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의리의 반대는 곧 속습(俗習)이니, 속습을 바로잡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마땅히 나막신 신고 압록강 얼음판을 건너간다는 속담처럼 정성껏 따르고 삼가 지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감히 이처럼 상반되는 행위를 한 것은 과연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그 상소문은 이미 ‘교속’ 두 글자에 배치되는데 이것으로 이조판서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았으니, 이조판서의 일은 저절로 속습과 상반되는 쪽에 속하게 되며 속습과 상반되는 자는 곧 군자쪽 사람인 것이다. 또 더구나 자신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일삼다가 그의 공격하는 말을 받았으니, 이조판서 그 자신에 있어서도 어찌 아울러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그는 신진 소년에 불과하므로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여 그 상소를 도로 내려줘 버린다면 더 이상 아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관직을 돌아보면 옥당의 유신(儒臣)이고 그 사람을 돌아보면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던 명문인데다 그 상소를 돌아보면 또 국사를 말한다는 것으로 이름을 내세웠으니, 그 사람을 꾸짖을 가치도 없다고 하여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일찍이 이재를 강경(講經)과 제술 시험을 보이는 자리에서 보아 그 사람을 익히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멍청한 것처럼 보이나 확신할 수가 없고 영리한 것처럼은 보이나 단정지을 수 없었으며 게다가 기백이 강하면서도 거친 점이 있기까지 하였으므로 머리 셋에다가 팔 여섯 개가 달린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를 판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요즘 조정 안에 권간으로 지목할 만한 자가 없으므로 또한 그의 지시를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외면상으로 얼른 보면 그 원인을 몰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혹시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음종(陰腫)처럼 당장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일은 마땅히 눈앞에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니 어찌 그 이외의 것을 건드릴 것까지야 있겠는가마는 그렇다고 그대로 놓아둔다는 것은 왕자의 어진 마음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대략 내보이고 경들에게 한번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전교에서 귀양보낸다는 뜻의 ‘투비(投畀)’ 문자를 구사한 것은 《 시경(詩經)》의 이른바 ‘북녘땅으로 던지련다.를 인용한 것이니, 이 또한 참소하는 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공자께서 사대(四代)의 예악을 안연(顔淵)에게 말해줄 때 그 결말을 짓는 말은 ‘ 정(鄭)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물리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였다.’고 한 것에 불과했으며, 우순(虞舜)이 용(龍)을 간관으로 명해 참소하는 자를 없애라고 했던 것도 참소하는 말은 현혹되기 쉬워 진실을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소문은 얼른 보면 말이 되는 것도 같지만 나는 그 숨은 걱정이 천진교(天津橋)에서 울던 두견새 소리보다 못하지 않다고 본다. 천진교의 두견새는 군자가 사라지고 소인이 득세할 조짐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 이 상소문은 그 관계되는 바가 과연 어떤 것인가.

을묘년 이후 새롭게 변모할 가망이 있을 듯하면서도 한해 두해가 지나가도 그 보람이 전혀 없다. 의리를 고수하는 일만으로 말하더라도 을사·병오년 사이에 신묘·임진년과 같은 죽이고 들이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장서서 의리를 담당한 자도 공적인 분개에다 사적인 원수를 겸한 옛사람들보다 못하였다. 대체로 오늘날 세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 또한 어찌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는 한탄이야 없겠는가마는 다만 서로 부족한 점을 닦아 합심하여 함께 가면 될 것이다. 어찌 스스로 업신여기고 있다 하여 의리에 관계되는 것까지도 반드시 망가뜨리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이러한 무리를 처치하는 일에 어찌 단호하게 하지 않았던가. 병신년에 처분한 일로 보더라도 나는 결단을 내리는 면에 있어서는 또한 부족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어찌 오로지 보살펴주기만 하였겠는가마는 근년에는 사실 조정에 사람이 없다는 한탄이 있고 아울러 일체 휴양을 위주로 하고 싶어 크거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오로지 침묵을 지켜 마음상으로 허다한 생각만 허비하였다. 요즘 정신과 근력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도 반드시 그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금년은 다른 해와는 달리 금오(金吾)에 까치가 집을 지어 그 뜻이 화기를 이끌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보므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모두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말하고 싶다. 지금 이 하교는 참고 또 참다가 나온 것으로 매우 평범하게 하는 말이다.

교서를 내리든 어쩌든 간에 한번은 이와 같은 뜻을 내보일 생각이지만 먼저 이러한 뜻을 경 등을 위해 상세히 말하였으니, 오늘 연석에 올라온 제신들은 밖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알려 점차로 의리를 일깨워 주라. 그러면 그늘에서 학이 울 때 그 새끼가 화답하는 것처럼 똑같은 이치에 의해 서로 감응하는 묘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하교를 들어본 자 가운데는 반드시 의기가 북받쳐올라 그 의리를 천명할 길을 생각할 자도 있을 것이고 또한 반드시 걱정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는 방안을 생각할 자도 있을 것이며,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또한 어찌 얼굴과 마음을 고쳐 위엄을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할 것을 꾀하는 자가 없을 것인가. 이제부터는 아비는 그 자식을 훈계하고 형은 그 아우를 권하여 속습의 버릇을 벗어버리지 못한 자는 참으로 그 낡은 버릇을 씻어 제거함으로써 늦게나마 옳은 길로 따라나서야 할 것이며, 혹시 본디부터 고루한 속습으로 빠지지 않은 자가 있다면 또한 마땅히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자세로 더 한층 노력하여 내가 하려고 하는 정치를 도와줬으면 하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인데, 내가 이처럼 분명히 일러준 이상 앞으로는 더 이상 여러말을 하지 않겠다. 임금의 뜻에 부응하는 책임은 오로지 경들에게 있으니 우선 경들부터 사소한 혐의는 전부 쓸어버리고 각자 책임을 지고 속습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을 누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우선 신들부터 밖에 나가서 한세상 사람에게 두루 알려 모두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환히 알게 한다면 또한 어찌 알면서도 일부러 범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리를 천명하든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든지간에 오직 자기 한 몸에 매인 일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도 또 보람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대체로 김이재(金履載)의 상소문은 그 말이 가소로우니 그 사람을 문책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일이야 극히 하찮은 것이지만 규범을 무시하고 훈계를 어기는 짓을 자신이 직접 범하였다. 머리를 숙이고 제 잘못을 승복하였으니 분명히 그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지만 감히 먼저 말을 꺼내 나를 한번 시험해보려고 시도한 것은 곧 병신년 이후 25년 동안에 처음 있는 일이니, 어찌 그 사람을 문책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그 말을 예사롭게 보며 그 일을 쉽게 간주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다스리고 속습을 제재하면서 일종의 규모가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어릴적부터 성인의 글을 통해 대도(大道)를 대강 들어서 알았으며 그것을 안 뒤에는 또 그대로 실천하였고 실천한 뒤에는 규모를 세워 나 자신이 먼저 행하고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파급시켜 반드시 따르게 함으로써 반드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전부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무슨 이재(履載)와 같은 무리가 오늘의 조정에서 불길한 행위를 하려 한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생각하면 또한 매우 측은하다. 그 자신이야 하찮아서 거론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대대로 요직을 지낸 집안이 아닌가. 특별히 한 사람을 귀양보내 만인을 구제하는 계책에 의해 오늘의 처분이 나온 것이니, 경들은 마땅히 이러한 본의를 알아야 한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오늘 연석에서 하교한 것은 맨 먼저 고금의 의리가 시대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을 말했고 다음은 규모, 그 다음은 인물을 등용한 문제, 그 다음은 가르침을 펴고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방안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 번 되새기고 반복하였는데, 마디마다 세교(世敎)를 부식하고 구절마다 고심을 드러내었다.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한 통의 연화(筵話)로 기록하여 한 본은 묘당에게 보이고 한 본은 간원 홍문관의 관원에게 보인 뒤에 장고(掌攷)에 자세히 등재하게 할 것이며 그 원본은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54권, 24년(1800 경신 / 가경(嘉慶) 5년) 5월 30일(신해) 1번째기사

4. 분석

정조 역시 김이재의 상소가 외면만으로 봤을때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2] 그 상소의 내용이 단순히 이조 판서 이만수를 탄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큰 뜻인 '교속'(矯俗)을 비난하려고 하는데 있다고 지적한다.[3]

그와 함께 영·정조 시대 정치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의리'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데 정조는 김이재의 상소를 '속습'(俗習)으로 규하는데 여기서 속습이란 당쟁 과정에서 당파별로 세웠던 자신들만의 의리, 예를 들자면 숙·경종 시기 연잉군을 따르고 세자인 경종을 적대한 노론의 신임의리(辛壬義理)[4],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하고 세손인 본인을 위협했던 북당 등 탕평파의 임오의리(壬午義理) 등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당파적인 의리론, '속습'이 대의리라고 할 수 있는 군신간의 의리, 성리학적 질서의 근본을 흔들었다고 보고 연교 내내 이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한마디로 정조가 교속하여 '대의리'로 바로잡고자 한건 편협한 당론에 근거하여 군주의 정당한 권한을 침범하려는, 또는 이를 억제하려는 행태라는 것이다.

준론 탕평을 앞세워 시비를 확실히 가리면서 오랜 시간 사도세자 추숭 및 당파 화합에 나섰던 정조답지 않게 매우 거친 어조로 연교가 구성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정조 본인의 건강 악화와 정조 시기 탕평을 이끌어갔던 남인 당수 채재공, 노론 당수 김종수의 연이은 사망 등으로 인한 정조 자신의 조급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 같이보기


[1] 이조나 병조를 거치는 통상적인 인사 체계를 거치지 않고 왕이 특명 형태로 관직을 제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2] "만일 외면으로만 본다면 그 상소는 한 사람 이조판서를 논박한 것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 또한 경고하고 꾸짖으라고 한 것에 불과하니, 이른바 추고하는 정도로 약간 다스리면 충분할 것이다." [3] 내가 현재 그가 어구를 흠잡은 것을 나쁘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의 상소문 속의 어구를 가지고 지적하여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 취지를 살펴보면 표적이 이조판서에 있지 않고 오로지 ‘교속’ 두 글자를 파탈하자는 데에 있다 [4] 실제로 영조가 이후 천의소감(闡義昭鑑)까지 편찬해서 신임의리가 역심이 아니라 충의임을 변론해야했을 정도로 크게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