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9:20:07

요석덕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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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서공왕(隴西恭王)
요석덕 | 姚碩徳
시호 공왕(恭王)
작위 농서왕(隴西王) → 농서공(隴西公) → 농서왕(隴西王)
(姚)
석덕(碩徳)
불명
생몰 불명
출신 남안군(南安郡) 적정현(赤亭縣)
부황 시조 경원황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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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진의 황족. 시조 경원황제 요익중의 아들이자, 태조 무소황제 요장의 동복동생. 후진의 개국공신.

2. 생애

건초 원년(386년) 8월, 형인 무소제 요장이 거병하여 안정(安定)에 도착했을 때, 농상(隴上)에 주둔하고 있던 요석덕은 정서장군을 칭하며 거병한 뒤, 자신이 통솔하는 강족 부락을 이끌고 요장에게 합류하였다. 요장이 요석덕과 함께 전진의 진주(秦州) 자사 왕통을 공격하자, 천수(天水)의 흉노족 도각부, 약양(略陽)의 강족과 호족(胡族) 10,000여 호가 호응하였고, 약양태수 왕피(王皮)도 후진에 항복하였다.

건초 원년(386년) 9월, 왕통이 마침내 진주를 들어 투항하였다. 이에 요장은 요석덕을 사지절•도독농우제군사•진주자사로 임명하여 상규(上邽)를 진수케 하였다.

건초 원년(386년) 10월, 전진의 남안왕 부등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상규를 향하였다. 무소제 요장은 친히 출병하여 요석덕을 구원하였으나, 호노부(胡奴阜)에서 전진군을 만나 대패하고 부상을 입은 채로 상규로 달아나 보위하였다. 요장이 부상을 치유하는 사이에 요석덕은 요장이 데려온 패잔병을 대신 통솔하며 상규를 방어하였다. 요장이 부상을 치유하는 사이에 요석덕은 요장이 데려온 패잔병을 대신 통솔하며 상규를 방어하였다. 한편, 요장을 격파한 부등은 애평제 부비의 전사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농동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건초 2년(387년) 4월, 후구지를 건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구지공 양정이 압박해오자, 요석덕은 상규를 포기하고 경양(涇陽)으로 가 주둔하였다. 양정은 전진의 노왕 부찬(苻纂)과 군세를 합쳐 경양에서 요석덕을 대파하였다. 이때 요장이 음밀(陰密)에서 나와 요석덕을 구원하러 달려오자, 양정과 부찬은 부육(敷陸)으로 잠시 후퇴하였다.

건초 4년(389년) 9월, 무소제 요장은 요석덕을 안정으로 보내 지키게 하고, 안정군의 1,000여 호를 음밀(陰密)로 이주시켰다. 이후 고제 부등이 동쪽으로 돌아가자, 요석덕을 다시 진주로 보내고, 진주에 수재(守宰)를 두게 하였다.

건초 6년(391년) 4월, 10,0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던 군벌 구요(茍曜)가 고제 부등과 연합하여 전진이 후진을 공격할 때 내응하기로 약조하였다. 이에 부등은 곡뢰(曲牢)에서 번천(繁川)으로 이동하여 마두원(馬頭原)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건초 6년(391년) 5월, 무소제 요장이 고제 부등의 군대를 격퇴시키기 위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웠으나,오히려 패하였고 우장군 오충(吳忠)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요장이 다시 군대를 수습해 싸우려 하니, 요석덕이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금껏 경솔하게 전투를 벌이는 것을 신중히 여기시고, 항상 계책으로 적을 무찌르려 하셨습니다. 지금 전투에서 패배한 상황에서 다시 적에게 다가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장이 답했다.
"부등은 군사를 지휘함에 있어 느리고 허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그는 경군(輕軍)으로 직진하여 우리의 동쪽을 멀리 점거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는 분명히 구요(茍曜)의 무리와 모의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저들이 계책을 완성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하여 그 계획을 분쇄해야만 한다."
이윽고 요장은 다시 진군하여 부등을 격파하였고, 계획이 실패한 부등은 퇴각하여 미(郿)에 주둔하였다.

건초 7년(392년) 3월, 무소제 요장이 요석덕을 이윤(李潤)으로 옮겨 진수케 하였다.

건초 7년(392년) 12월, 무소제 요장이 붕어하고 태자 요흥이 뒤를 이어 후진을 다스리게 되었다. 요흥은 부황의 승하 소식을 비밀로 하여 즉시 발상하지 않고, 요석덕을 다시 음밀로 옮겨 진수케 하였다. 그러자 요석덕의 부하가 요석덕에게 진언하였다.
"공의 위세와 명성은 원래부터 높고, 부하들은 가장 강합니다. 지금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라서 반드시 조정에서 의심할 것입니다. 차라리 진주(秦州)로 달아나 시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 요석덕이 답했다.
"태자의 뜻은 관대하고 명석하니 다른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지금 부등이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친족끼리 서로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다. 나는 죽을지언정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석덕은 요흥을 만나러 갔고, 요흥은 그를 잘 예우하여 보냈다.

황초 2년(395년), 농서왕(隴西王)에 책봉되었다.

황초 3년(396년), 낙성(洛城)에서 평량장군 호금표(胡金豹)를 토벌하였다. 당시 천수 사람 강유(姜乳)가 서진의 걸복건귀가 보낸 군대를 무찌르고 상규를 점거하여 할거하고 있었는데, 요석덕이 이를 공격하자 강유는 무리를 인솔해 투항하였다. 요석덕은 진주목(秦州牧)•호동강교위(護東羌校尉)으로 임명되어 상규를 지켰고, 강유는 조정에 소환되어 상서로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족 강희(彊熈)와 휴관족(休官族) 권천성(權千成)이 병력 30,000명을 거느리고 상규를 포위하였지만, 요석덕이 출격하여 그들을 모두 격파하였고, 강희는 후구지로 달아나 의탁하였다. 이후 요석덕이 서쪽으로 나아가 약양에서 권천성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홍시 원년(399년) 9월, 후진의 영역에서 재앙이 거듭 발생하자, 문환제 요흥은 존호를 내려 진왕(秦王)을 칭하였다. 이에 따라 요석덕 역시 농서공(隴西公)으로 작호를 깎아내렸다. 진왕 요흥은 그를 정서대장군으로 삼았다.

홍시 2년(400년) 5월, 요석덕이 5,000 병력으로 걸복부의 서진을 정벌하여 남안협(南安峽)으로 진입하자, 진왕 걸복건귀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농서에 주둔하여 막았다.

홍시 2년(400년) 6월, 진왕 걸복건귀가 무위장군 모올(慕兀) 등을 파견해 후진군의 보급로를 끊으니, 요흥이 몰래 군대를 이끌고 요석덕을 구원하였다. 이를 들은 걸복건귀는 모올에게 중군(中軍) 20,000명을 이끌고 백양(栢楊)에 주둔하게 하고, 진군장군 나돈(羅敦)에게 외군(外軍) 40,000명을 이끌고 후진곡(侯辰谷)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리고 걸복건귀 자신은 친히 경기병 수천 기를 거느리고 후진군을 정탐하였다. 그러나 이때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면서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걸복건귀와 중군을 이끌던 모올은 서로 길을 잃었고, 요흥이 보낸 추격 기병대가 외군을 공격하여 나돈이 패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에는 걸복건귀가 후진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하였고, 걸복건귀는 달아나 서진의 도읍 원천(苑川)으로 들어갔다. 우두머리가 전장에서 이탈하자, 그 무리 36,000명이 모두 후진으로 투항하였고, 요흥은 여세를 몰아 부한(枹罕)으로 진군하였다.

홍시 2년(400년) 7월, 걸복건귀가 다시 윤오(允吾)으로 달아나 남량에 투항하면서 서진이 멸망하였다. 요석덕의 군대는 서진을 정벌하는 동안 사사로운 약탈을 하지 않게 하여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홍시 3년(401년) 5월, 위안(魏安) 사람 초랑(焦朗)이 사신을 보내 요석덕에게 유세하며 말했다.
"여씨(吕氏)는 무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래로 형제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정치는 혼란에 빠졌고, 백성들은 굶주려 죽은 자가 절반을 넘습니다. 지금 그들이 서로 찬탈하는 시기를 틈타 공격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게 그들을 정복할 수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요석덕은 요흥에게 이 말을 전한 뒤, 보•기 60,000명을 이끌고 후량을 정벌하였다. 이때 걸복건귀도 기병 7,000기를 인솔해 요석덕과 합류하여 후량 정벌을 도왔다.

홍시 3년(401년) 7월, 요석덕이 금성(金城)에서 황하를 건너 광무(廣武)로 진공하였다. 남량의 하서왕 독발리록고는 미리 광무의 수비군을 철수시켜 후진군과의 충돌을 피하였고, 요석덕은 별다른 충돌없이 광무를 지나 후량의 수도 고장(姑臧)에 이르렀다. 후량의 말제 여륭은 보국대장군 여초(呂超)와 용양장군 여막(呂邈)을 출진시켜 요석덕을 공격하였으나, 요석덕은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여막을 생포하였으며, 후량군 수만 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형하였다. 하지만 여륭은 성을 굳게 지키며 투항하지 않았다.

홍시 3년(401년) 8월, 본래 서량의 장수인 강기(姜紀)가 수십 기병과 함께 진군(秦軍)으로 달려와 요석덕에게 진언하였다.
"여륭은 고립된 성을 지키고 있어 지원이 없으니, 명공께서 대군을 이끌고 그를 포위하면, 그는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하나, 그는 문서로만 항복할 뿐,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을 것이므로, 저에게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주시면, 왕송(王松)과 왕총(王怱), 초랑(焦朗), 화순(華純)의 군대를 이끌고 틈을 노려 공격하겠습니다. 그리한다면 여륭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남쪽에 있는 독발리록고의 병력이 강하고 나라가 부유한데, 그들이 고장을 점령하고 세력을 키우게 될 것이고, 저거몽손이나 이고라도 이를 저항하지 못하여 반드시 독발리록고에게 귀속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국가의 큰 적이 될 것입니다."
이에 요석덕은 강기를 무위(武威) 태수로 삼고, 병력 2,000명을 주어 안연(晏然)에 주둔하게 하였다.

요석덕이 고장을 포위한지 여러 달이 지났을 무렵, 고장성 안에서 위익다(魏益多)가 무리를 선동하여 반란을 모의하고, 말제 여륭과 안정공 여초를 죽이려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은 자가 300여 호에 달하였다. 한편, 요석덕은 귀순해온 이민족과 한족을 잘 다스렸고, 수비대를 배치하여 양식을 절약하고 곡식을 모아 장기전을 대비하였다. 후량의 신하들은 후진과 화친할 것을 건의했지만, 여륭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홍시 3년(401년) 9월, 후량의 황제 여륭이 결국 사신을 보내 투항하였다. 요석덕은 여륭을 진서대장군•양주(凉州) 자사•건강공(建康公)으로 삼고, 여륭의 자제들과 후량의 구신(舊臣) 모용축(慕容筑), 양영(楊頴) 등 50여 호를 장안(長安)으로 보내 인질로 삼았다. 요석덕의 군율은 엄격하고, 사소한 것 하나도 범하지 않았으며, 선현을 제사하고 명사들을 예우하여 서쪽 땅 사람들이 그를 기쁘게 여겼다.

홍시 7년(405년) 6월, 요석덕이 후구지의 양성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장수 염구(斂俱)와 함께 한중(漢中)을 공격하여 성고(成固)를 함락시켰으며, 3,000여 호의 유민을 관중(關中)으로 이주시켰다.

홍시 8년(406년) 6월, 후구지 정벌을 마친 요석덕이 입조하니, 요흥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요석덕을 돌려보냈다. 이때 요흥은 그를 옹(雍)까지 친히 전송하고 돌아왔다. 이후 요흥은 경내에 명을 내려 전국의 문무백관들에게 요서와 요석덕을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요흥은 겸손하고 공손하게 효도와 우애를 다하여 두 숙부를 극진히 예우하였고, 항상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두 숙부에게 경의를 표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존칭을 사용하였다. 또, 요흥은 차량, 의복, 장식품 등은 먼저 두 숙부에게 제공한 뒤에 자신은 그 다음 것을 사용하였고, 국가의 큰 정책도 반드시 그들과 상의한 후에 시행하였다.

요석덕의 관직은 태재에 이르렀고, 사망 후에는 '공왕(恭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태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