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2 14:48:43

왕호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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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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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王胡之
(? ~ 348)

동진의 인물. 자는 수령(修齡). 서주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출신. 무릉후 왕이의 차남으로, 아들로는 왕승지(王承之), 왕무지(王茂之), 왕화지(王和之)가 있다.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재능과 명망이 있어 오흥태수, 시중, 단양윤과 같은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심장이 허약해 풍현증(風眩症)을 앓아, 이로 인해 발작을 수 차례 일으켜 자주 고통 받았음에도, 왕호지는 뛰어난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영화 5년(348년) 4월, 후조 무황제 석호가 사망하고 그 혈육들이 황제 자리를 두고 골육상쟁하였다. 동진 조정은 이를 기회로 삼아 하남(河南)과 낙양(洛陽)의 구토를 회복하기 위해, 왕호지를 서중랑장, 평북장군, 사주자사(司州刺史), 가절로 삼으려 했지만, 왕호지는 지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그의 우려대로 지병이 또다시 발동하니, 이후로 계속 앓다가 이내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왕무지 또한 아버지처럼 아름다운 명성이 있어, 조정에 출사했고 관직은 진릉태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