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09:29:22

왕연(전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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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王延
(? ~ 318)

전조의 인물. 자는 불명. 사례 하서군(西河郡) 출신.

2. 생애

어머니가 사망하자 당시 9세 밖에 되지 않았던 왕연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3년상을 치르다가 거의 사망할 뻔했다. 상을 무사히 마친 후로도 왕연은 어머니의 기일만 되면 10일 동안 슬피 울었다. 계모 복씨(卜氏)는 무도하여 왕연을 함부로 다루었는데, 이 때문에 왕연은 추운 겨울에도 얇은 베옷만 걸치고 지냈다. 이를 발견한 왕연의 친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연유를 캐물었으나, 왕연은 알고도 말을 하지 않고 계모를 정성껏 섬길 뿐이었다.

어느 겨울날, 계모 복씨는 날생선이 먹고 싶어 왕연에게 생선을 잡아오라 시켰으나, 왕연이 아무것도 잡지 못 하고 돌아오자 몽둥이로 피가 나도록 그를 때렸다. 계모에게 흠씬 맞은 왕연은 분수(汾水)에 이르러 꽁꽁 언 얼음을 두드리며 통곡하니, 길이가 다섯 척이나 되는 물고기 한 마리가 얼음을 깨고 튀어나왔다. 왕연은 그 물고기를 가져다가 복씨에게 먹였는데, 복씨가 그 물고기를 며칠 동안 먹어도 다 먹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신비한 일에 마음이 움직인 복씨는 그 후로 왕연을 자신의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왕연은 항상 부모님의 불편한 기색을 살피어, 여름에는 부채를 들고 누워있는 부모의 머리 맡에 앉아 열심히 부채질을 하였고, 겨울에는 직접 이불을 덮어주어 따뜻하게 하였다. 혹한기가 올 때도 왕연은 스스로 제대로 입지 못해도 부모에게는 항상 양질의 음식을 먹이는 것에 신경썼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낮에는 일을 나가 품삯을 벌어오고, 밤에는 독서에 열중하여 경서와 역사에 통달하니, 마침내 그 대의가 통하게 되어, 주와 군에서 예로써 그를 초빙하려 했다. 하지만 왕연은 굳게 사양하고 부모를 부양하는 데에 힘썼다. 그리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왕연은 부모의 묘 앞에 기거하면서 항상 필요 이상의 의복을 입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영가의 난으로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왕연은 유연을 따라 평양(平陽)에 자리잡고 부지런히 종족들에게 농업과 양잠업을 가르쳤다. 한번은 집에서 키우는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른 사람이 이를 알고는 그의 집으로 와서 송아지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일이 있었다. 왕연은 아쉬운 기색 없이 그 송아지를 넘겨주면서도 일절 난처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송아지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그 사람이 다시 와서 왕연에게 사죄하며 송아지를 돌려주려 했지만, 왕연은 한사코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왕연이 60세에 이르렀을 때, 유총의 눈에 띄어 상서좌승에 임명되었다가 승진하여 관직이 금자광록대부에 이르렀다.

건원 2년(316년) 2월, 중상시 왕침(王沈), 중궁복야 곽위(郭猗) 등은 유총의 총애를 믿고, 평소 자신들을 무시하던 대신들을 모함했다. 유총은 그들의 말만 믿고 상추각(上秋閣)에 이르러, 소부 진휴(陳休), 좌위장군 복숭(卜崇), 특진 기모달(綦毋達), 태중대부 공사욱, 상서 왕염(王琰)과 전흠(田歆), 대사농 주탄(朱誕)을 체포해 참수해버렸다. 왕연은 태재, 하간왕 유이, 대장군, 발해왕 유부(劉敷), 어사대부 진원달(陳元達)과 더불어 대궐로 나와 왕침의 무리를 면직시킬 것을 굳게 간언했으나, 유총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왕침 등을 되려 열후에 책봉하였다.

인가 3년(318년) 4월, 왕침의 양녀는 미색이 출중하였기에, 유총은 그녀를 좌황후로 삼았다. 상서령 왕감(王鑒), 중서감 최의지(崔懿之), 중서령 조순(曹恂)이 간했지만, 유총은 대로하여 태자 유찬을 보내 왕감 등을 잡아 가두었다. 이후 유총이 이들을 저자에서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왕연은 뒤늦게 이를 알고 유총을 알현하려 했으나, 문지기에게 가로막혀 실패했다.

한창 원년(318년) 8월, 소무제 유총의 뒤를 이은 효은제 유찬은 항상 후궁에서 연회를 즐기면서 모든 국정을 대장군, 녹상서사 근준에게 맡겼다. 본래 반란의 뜻을 품고 있던 근준이 조서를 꾸며 자신의 친족들을 주요 장군직에 앉히고 왕연을 찾아가 모반을 모의하려 했다. 그러나 근준과 뜻이 달랐던 왕연은 말을 타고 도망쳐 유찬에게 일러바치려 했는데, 위장군 근강(靳康)에게 붙잡혀 억류되었다. 결국 근준은 유찬을 시해하고 한천왕(漢天王)을 자칭했다.

정변에 성공한 근준은 붙잡혀 있는 왕연을 불러들여 좌광록대부로 삼으면서 그를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왕연이라며 욕을 퍼붓자, 근준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왕연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