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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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綏(? ~ 404)
동진의 인물. 자는 언유(彥猷).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왕유의 아들, 왕탄지의 손자다.
2. 생애
어렸을 때부터 높은 명성을 얻어, 왕밀(王謐), 환윤(桓胤) 등의 인재들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갈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왕수 스스로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실제 행동은 천박했고 유능하지도 않았다. 연청2주자사 왕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아버지 왕유가 환현에 의해 사로잡혀 그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로 왕수는 항상 근심이 가득한 낯빛으로 음식을 먹으며 매사에 폄강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시수효자(試守孝子)'라 불렀다. 다행히 왕유는 환현의 매부라 목숨을 잃지 않고 반란이 끝날 때까지 붙들려 있다가 돌아왔다.원흥 원년(402년) 3월, 사마도자를 성공적으로 축출한 환현이 정권을 휘어잡고 스스로 태위에 올랐다. 환현은 왕수가 자신의 생질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총애하여 태위 우장사로 삼았다.
원흥 2년(403년) 12월, 환현이 안제 사마덕종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초나라(楚)의 황제로 즉위하자, 중서령에 제수받았다.
원흥 3년(404년) 3월, 유유가 기의해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한 뒤, 왕수를 관군장군에 임명했다. 유유에게 항복하고 관직을 받은 그 날 밤, 집에서 잠을 자던 왕수는 아무 이유 없이 침대에서 머리가 갑자기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상서롭지 못한 일을 겪었다. 이후 유유에 의해 형주자사, 가절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아버지 왕유는 환씨 집안의 사위라 과거 환온, 환현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었고 또, 과거 유유를 깔봤던 적이 있어 항복한 뒤에도 숙청당할까 내심 불안에 떨었다. 결국 왕유는 모반을 계획했고 왕수도 이에 가담했으나, 일이 누설되어 동생 왕납(王納), 왕집(王緝)을 포함한 삼족이 모두 주멸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