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3 15:55:50

귀인 한씨


조선의 후궁
[[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min-height: 33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사도세자|{{{#!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후궁 : 환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 정식 후궁 첩지가 있거나 문서가 등재된 사람만 기재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후궁
귀인 한씨 | 貴人 韓氏
출생 1500년
사망 1574년 3월[1]
(향년 76세)
재위기간 조선 전빈
1520년 ~ 1529년
조선 상궁
1529년 ~ 1532년
조선 숙원
1532년 ~ 1540년
조선 숙용
1540년 ~ 1551년
조선 숙의
1551년 ~ 1571년
조선 소의
1571년 ~ 1572년
조선 귀인
1572년 ~ 1574년 3월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청주 한씨
부모 부친 - 한순(韓恂, 1453 ~ 1541)[2]
모친 - 이등전(李登全)의 딸[3]
부군 중종
자녀 슬하 1남
아들 - 왕자(1528 ~ 1528) 조졸
봉작 전빈(典賓) → 상궁(尙宮) → 숙원(淑媛) → 숙용(淑容) →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귀인(貴人)
}}}}}}}}} ||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조선 중종 후궁. 조부는 청천부원군 한백륜(韓伯倫)[4]이며, 아버지는 정국공신으로 지돈녕부사를 지내고 서원군(西原君)에 책봉된 한순(韓恂)이다.

어머니는 여산 군수를 지낸 이등전(李登全)의 딸인데, 《간이집》에 실린 묘지명에 부실(副室)[5]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한순의 첩이다.

2. 생애

귀인 한씨는 어릴 때부터 행동이 예의 바르고, 성품이 온유하고 명민하였는데, 1514년(중종 9)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서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순왕후는 이미 1498년(연산군 4)에 승하하였으므로 《 간이집》에 실린 묘지명과는 상반된다. 1518년(중종 13)에 후궁에 들어오도록 명을 받았고, 1520년(중종 15) 정7품 전빈(典賓)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왕자를 낳았으나 돌이 되기 전에 요절하였고, 이듬해 정5품 상궁으로 품계가 높아졌다. 정식 후궁으로 봉작된 것은 1532년(중종 27)으로 종4품 숙원, 1540년(중종 35) 종3품 숙용이 봉작 되었다.[6]

중종이 승하한 뒤에는 인수궁(仁壽宮)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문정왕후가 만류하여 궁 안팎을 오가며 살았고, 나중에 경복궁 영추문 밖의 사저에서 살았다.[7] 숙의, 소의를 거쳐 1572년(선조 5) 종1품 귀인으로 봉작되었다. 이때는 문정왕후도 없고, 궁중의 의례를 능숙하게 알고 행하는 사람이 없어 항상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8] 1574년(선조 7) 인순왕후의 상중에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이 들어 그해 3월 무신일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데, 《 선조실록》에 인순왕후는 1575년(선조 8)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하였다고 써있으므로 이 역시 기록이 맞지 않다.[9] 다만, 최립이 쓴 《간이집》이 1631년(인조 9)에 출간되었으므로 육십갑자를 잘못 썼을 수도 있다. 옮겨쓰다가 오타?

일찍이 자식이 요절한 까닭에 성균관 사예 김규(金戣)의 처가 된 해안군의 딸을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사랑하였고[10], 말년에는 의천군 이인(李仁)[11]을 자신의 후사로 삼아 의탁하였다.[12]
[1] 최립이 쓴 《간이집》에 실린 묘지명을 따르지만,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2] 한백륜의 4남이자 안순왕후의 남동생. [3] 측실이다. [4] 예종의 장인이며, 안순왕후의 아버지이다. [5] 부실은 다른 사람의 첩을 대접하여 부를 때 쓰는 말이다. [6] 1540년(중종 35)에 숙원 안씨도 숙용으로 봉작되었는데, 이 숙용 안씨가 창빈 안씨이다. [7] 본래 선왕의 후궁들은 자수궁, 인수궁, 정업원 등으로 나가서 살도록 되어있다. 문정왕후가 특이하게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중종의 후궁들을 궁중에 그대로 거처하도록 하였다. [8] 그러나 문정왕후는 없어도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가 살아있던 때이므로 묘지명 특유의 과장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 [9] 1574년 3월과 1575년 3월에는 무신일이 없고 1575년 1월 2일에 인순왕후가 승하하고 1월 8일이 무신일이다. [10] 해안군의 부인 신씨가 귀인 한씨의 외질(外姪)이었기 때문에 멀지 않은 사이였다. [11] 성종의 증손자이다. 즉, 성종의 서자 완원군 이수의 장남 이성군 이수강(李壽剛)의 차남이 의천군 이인이 된다. [12] 귀인 한씨는 의천군의 어머니 청천현부인(淸川縣夫人) 한씨와 자매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