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0 20:17:33

정빈 이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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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영조의 후궁
온희정빈 이씨 | 溫僖靖嬪 李氏
파일:수길원.jpg
수길원 전경
출생 1694년
사망 1721년 12월 23일 (향년 28세)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9 일대)
능묘 수길원(綏吉園)
재위기간 조선 소훈
1721년 ~ 1721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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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함양 이씨
부모 부친 - 이후철(李後哲)
모친 - 김해 김씨
배우자 영조
자녀
슬하 1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 ~ 1718)
장남 - 진종 소황제(眞宗 昭皇帝, 1719 ~ 1728)
차녀 -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 ~ 1758)
봉작 소훈(昭訓) → 소원(昭媛) → 정빈(靖嬪)
사당 연호궁(延祜宮)
시호 온희정빈(溫僖靖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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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연잉군의 첫사랑2.2. 임신과 출산 2.3. 독살 의혹2.4. 사후2.5. 치제문
3. 가계
3.1. 친가3.2. 외가3.3. 시가
3.3.1. 배우자 / 자녀
4.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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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분은 비록 남자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 《소훈이씨제문》 中

조선 영조의 첫 번째 후궁.

영조가 즉위하기 전 왕자인 연잉군 시절에 이 되어 자식을 낳고 후궁이 되었으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슬하에 효장세자 이행, 화억옹주, 화순옹주를 낳아 1남 2녀를 두었다.

2. 생애

2.1. 연잉군의 첫사랑

1701년(숙종 27년), 8세의 어린 나이로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 영조는 그녀를 양가의 딸이라고 밝혔는데, 양인(평민)이지만 궁녀로 입궁할만큼 집안이 한미하고 가세가 쇠락했던 것으로 보인다.[1]

언제 어떻게 영조 승은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17년(숙종 43년) 4월 22일에 화억옹주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늦어도 1716년(숙종 42년)에는 승은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승은을 입은 이후 영조 왕세제가 되기 전까지 왕자 신분으로 별궁이었던 창의궁에서 살았다. 그녀가 낳은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까지 모두 영조의 사저(잠저)이자 별궁인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이때부터 정비 정성왕후는 외면당했다

2.2. 임신과 출산

1718년(숙종 44년) 3월 9일, 시어머니가 되는 숙빈 최씨 사망하고, 한달 만인 4월 8일에는 딸 향염(香艶)[2]이 막 지나서 사망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영조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3] 영조는 요절한 죽은 딸을 위해 직접 글을 지어 무덤에 넣어주기까지 했고[4], 1773년(영조 49년) 4월 7일 화억옹주로 추증한다.

이듬해 2월 28일, 첫 아들 효장세자(아명은 만복萬福)를 낳는다. 이 때 꾸었던 태몽은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새가 날아들고 황금 거북이가 나오는 꿈'이었다고 한다.[5] 그러나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 따르면 이 탄생은 썩 환영받지 못한 모양이다.
연령군(延齡君)은 사람됨이 온유(溫柔)하고 영민(英敏)하여 임금의 사랑을 받은 것이 연잉군보다 지나쳤다. 연잉군은 자주 임금의 질책을 받았고 또 생모 상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행검(行檢, 점잖고 바른 몸가짐)이 없다고 책망하여 임금을 알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 정유년( 1617),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정유독대했을 때 임금은 대개 연령군에게 있었다고 한다.

- 《단암만록》, 민진원(閔鎭遠)
출처가 출처인만큼 걸러서 보아야겠지만 민진원 영조의 재위 초반부 정치적 파트너이였다는 점과 그의 정치 성향( 노론)을 고려했을 때 굳이 이런 이야기를 실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숙빈 최씨의 삼우제와 졸곡제가 5월에 있었고 그녀의 삼년상까지 생각하면 이때 영조 정실이든 이든 절대 임신시켜선 안되고 금욕해야 하는 상중 기간이었다.[6] 그러니까 숙종이 이씨의 출산에 대해 화를 낸 건 시대상으로는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근데 숙종도 효종의 삼년상 기간에 태어났다

2.3. 독살 의혹

연잉군 왕세제가 되면서 그녀도 종5품 '소훈(昭訓)'으로 봉작되었으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영조는 제문에서 그녀가 정식 후궁이 되고 자식들도 귀해진 탓에 궁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나 도리어 병이 되었다고 썼다.[7] 궁궐은 엄격하고 복잡한 곳이니 사저에서 살던 시절 같을 수는 없어서 고질병이 되었다고 탓한 것이다.

그런데 1722년(경종 2년) 3월 27일에 남인의 서얼 출신인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이 있었다. 노론 측에서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8]를 들고 나왔는데, 이 중에 정빈 이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목호룡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정빈 이씨의 독살을 주도한 사람은 서덕수(徐德修)이다.[9]

1721년(경종 1년) 6월에 은자 300냥을 환관 장세상(張世相)에게 보내 을 구입하게 했는데, 약의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그해 11월 동궁의 주방나인 이씨를 시켜 음식에 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음식을 먹고 당시 소훈이었던 후궁 정빈 이씨가 죽었다고 밝혔다.[10] 이 말인즉 국왕 경종 시해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모르모트가 되었다는 소리다.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고, 당시 경종 연잉군은 물론 정국을 흔들어 놓았다. 훗날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따라 노론을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소론의 정치공작이 되고 1738년(영조 14년), 역적이 된 서덕수는 신원되었다.[11] 영조는 서덕수를 가리켜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각에서는 서덕수가 저지른 일로 영조의 정치 생명까지 정말 끝장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중전 정성왕후와의 불화 원인으로 꼽는다. 영조의 말에 의하면 당시 영조 정성왕후의 불화 때문에 장차 기사년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있었다고 한다.[12]

다만 이 사건은 영조에 의해 ' 독살 의혹'으로 끝났다.
그리고 서덕수(徐德修)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신축년( 1721년) 6월에 약을 환관 장세상(張世相)의 처소에 들여보내고,
동궁(東宮) 주방(廚房)의 나인이 이소훈(李昭訓)을 독살하였다.’ 고 하였는데,
신축년 6월에는 전하께서 바야흐로 사제에 계셨으니,
어찌 동궁 주방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이야기들이 바로 내가 앞서 말한 사리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 영조실록》 4권, 영조 1년( 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3월 2일 (경자) 1번째기사

1725년(영조 1년), 영조 창경궁 시민당에서 조정 대신들을 인견하였는데, 당시 예조 판서 민진원 임인국안을 '없는 죄를 꾸며서 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지를 펼쳤다.

영조가 이에 동의하면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 복권되는 길이 열린다.

2.4. 사후

영조는 즉위한 해( 1724년)에 이씨를 정4품 '소원(昭媛)', 그 다음 해( 1725년)에 정1품 '정빈(靖嬪)'으로 추증한다.
왕세자를 탄생한 소원 이씨를 정빈으로 추증하다
소원(昭媛) 이씨(李氏)정빈(靖嬪)에 추증(追贈)했는데, 왕세자(王世子)를 탄생했기 때문이다.
- 영조실록》 3권, 영조 1년( 1725년, 청 옹정(雍正) 3년) 2월 27일 (을미) 1번째기사
1764년(영조 38년),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이산은 법적으로 효장세자 양자가 되었는데, 이후 정조로 즉위하며 양아버지인 효장세자진종(眞宗)으로 추존하면서, 진종의 어머니 정빈 이씨 또한 '온희(溫僖)'의 시호와 수길원(綏吉園)의 원호, 연호궁(延祜宮)의 궁호가 추상되었다.

신주는 국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의 하나인 연호궁(延祜宮)에 모셔졌고 무덤은 수길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숙빈 최씨 옆에 장사를 지낸 것은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옆에서 모시겠다는 그녀의 바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소령원과 수길원은 무척 가깝다.

연호궁에 모셔진 이후 '연호궁의 정빈 자가(延祜宮靖嬪自家)'라고 불렸다.[13]

2.5. 치제문

정빈 이씨의 사망 당시 왕세제였던 연잉군( 영조)은 이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문을 지었다.
치제문 中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 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두 아이( 효장세자 · 화순옹주)가 장성하여 만약 생모를 묻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을 도려내는 듯하다."
"아침에는 나와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저녁에는 병이 심하여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 날의 참혹한 광경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이것이 곧 운명인가? 운명이 아닌가?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방년 스물여덟이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간사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이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소훈 이씨 제문
왕세제가 상궁 이씨를 보내고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소훈 이씨(정빈)의 영구 앞에서 전을 올리고 말합니다.
아 슬프구나!
세상에 어찌 애통한 아픔이 없겠느냐만 어찌 내가 오늘 당한 일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아아! 완순한 성품과 우아한 기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입궁하였다.
그대가 뽑혀 들어 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중략)
규중에서 경사스럽게 자식을 낳아 길러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내가 일찍이
“선을 쌓은 사람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으리니 뒷날 자손이 번성 하는 기쁨은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백년을 기한하여 그 복을 누릴 것이다.”
라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하나의 질병에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 슬프도다.
(중략)
이 삶은 끝났으니, 가는 것이 애통하다.
저승과 이승이 영원이 갈라져 소식이 서로 통하기가 어렵고,
소리를 머금고 슬퍼하니 눈물이 흐르는 시내를 이루었으며,
슬픔을 품고 제문을 지으니 목메어 차마 못 짓겠네.
촛불 아래에서 붓을 적시니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못하였다.
아 슬프고, 슬프구나.
(중략)
영혼이여! 멀리 가지 않았으면, 이 슬픈 정을 살펴다오.
아! 나의 도가 다하도다! 내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하겠는가!
온화한 말과 낭낭한 소리를 어느 날에 다시 듣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낯빛을 어느 때에 다시 보겠는가?
매사 슬픔이 더해지고 물건마다 마음이 상하니 바야흐로 함께 살면서 해로하고자 했는데
어찌하여 합하였다가는 다시 이별하게 되었는가!
날마다 더욱 애달파서 이 정을 억제하기 어렵구나.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이에 여관을 보내어 술을 대신 드리게 하니
영혼은 아느냐? 영혼은 아느냐?
지금 내 이 글은 나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글을 꾸미고 지나치게 칭찬하여 평소 삼가고 경계하는 마음을 저버리겠는가!
- 1721년(신축년, 청 강희(康熙) 60년) 11월 19일, 왕세제( 영조) 지음[14]

3. 가계

3.1. 친가

  • 증조부: 증 이조참판 이언양(李彦良)
  • 증조모 증 정경부인 안산 이씨
    • 조부: 증 이조판서 이신선(李信瑄)
    • 조모: 증 정부인 경주 김씨
      • 부친: 증 의정부 좌찬성(贈 議政府 左贊成) 이후철(李後哲)[15]
      • 모친: 증 정경부인 김해 김씨(贈 貞敬夫人 金海 金氏)
        • 본인: 정빈 이씨

3.2. 외가

  • 외증조부: 동지중추부사 김명실(金命實)
    • 외조부: 부사과 김매일(金梅一)
    • 외조모: 철성 이씨(통정대부 이갑생(李甲生)의 딸)

3.3. 시가

3.3.1. 배우자 / 자녀

4. 참고 문서



[1] 출처: 소훈이씨제문(해독). # [2] 향염(香艶)은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이다. [3] 시대상 꽤 늦은 나이인 24세에 처음으로 얻은 자식에다 첫사랑이던 이씨(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났으니... [4]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5] 영조실록》 20권, 영조 4년(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11월 26일 (임신) 2번째기사. # [6] 이러한 상중 임신의 금기시는 민간에서 시부모 상중에 임신한 며느리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성리학적으로 엄격하게 따졌다. 특히 이씨는 첩이라 더욱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을듯. [7] 일개 왕자의 첩일 때는 별궁이자 사저인 창의궁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지만 후궁 봉작 후에는 엄격한 예법으로 규제하는 궁중에서 살아야했던 데다, 당시 정치 상황이 노론 소론으로 극명히 갈려 치열하게 당파싸움 중이었으니 동궁 생활이 녹록치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궁중에서 일하는 궁녀· 환관들도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편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 편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당시 연잉군이었던 이복형 경종에게 문안 인사를 갈 때 드나드는 문까지 감히 막을 정도였다. [8] 대급수(大急手): 칼로 살해 / 소급수(小急手): 약으로 살해 / 평지수(平地手): 모해하여 폐출함. [9] 서덕수는 영조 왕비 정성왕후의 조카로, 미천한 신분인 이씨가 총애를 받고 아이를 셋이나 낳으니 제거하려 했다고 해도 설득력이 있다. 일례로 숙빈 최씨 희빈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 쪽에게 이런 위협을 받았다. [10] 경종실록》 8권, 경종 2년(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5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 [11]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 1738년, 청 건륭(乾隆) 3년) 12월 10일 (무자) 1번째기사. # [12]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2월 10일 신해 4번째기사 [13] 일성록 451책 # [14] 현대어 번역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章書閣) -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15] 정빈 함성이씨 묘지(靖嬪咸城李氏墓地)》 - 靖嬪李氏甲戌生系出咸陽考後哲通訓母金氏副司果梅一女 : 정빈 이씨는 갑술생(1694년)으로, 가계는 함양이며 아버지는 통훈대부 후철(後哲)이고, 어머니 김씨는 부사과(副司果, 종6품 무관) 매일(梅一)의 딸이다. [16] 화순 옹주가 월성위 김한신에게 하가하다. 영조실록》 32권, 영조 8년(1732년, 청 옹정(雍正) 10년) 11월 29일 (임자)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