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1:26:26

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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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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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골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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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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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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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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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드러커
라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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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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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역대 세자르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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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B7093><colcolor=#000> 알랭 들롱
Alain Delon
파일:y3i80M6IdgoKn5R3MFOKl2qRErl.jpg
본명 Alain Fabien Maurice Marcel Delon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
출생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오드센 주
사망 2024년 8월 18일 (향년 88세)
프랑스 루아레 주 두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스위스|]][[틀:국기|]][[틀:국기|]][1] ( 복수국적)
신체 178cm, 75kg
부모 아버지 파비앙 들롱(1904~1977)
어머니 에디트 아르놀(1911~1995)
배우자/
파트너
로미 슈나이더(1958–1963)
나탈리 들롱(1964 결혼–1969 이혼)
미레유 다르크(1968–1983)
로잘리 판 브레멘(1987–2001)
히로미 롤린(2021–2023)
자녀 아들 앙토니 들롱(1964년생)
딸 아누슈카 들롱(1990년생)
아들 알랭파비앙 들롱(1994년생)
데뷔 1957년 영화 '여자가 다가올 때'
서명 파일:알랭 들롱 서명.svg

1. 개요2. 생애3. 필모그래피4. 평가5. 여담
5.1. 여자 관계5.2. 사건 사고5.3. 안락사 관련

[clearfix]

1. 개요

파일:알랭 들롱.gif 파일:알랭 들롱 (최근).jpg
젊은 시절 말년
프랑스 배우.

2. 생애

데뷔 전까지 알랭 들롱의 생애와 행적은 그의 유명세에 비해 극히 제한적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파리 교외 소(Sceaux)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이혼한 부모는 각각 재혼했고 아무도 알랭을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집에 입양되었다. 그를 입양한 양아버지는 교도관이었다. 알랭은 파리 교외 프레네스 교도소(Fresnes Prison) 옆집에서 살면서 때때로 사형수들을 처형하는 일제사격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양아버지가 사망했고, 알랭은 원래 부모에게 되돌려 보내졌고 둘 중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다. 부모는 그를 가톨릭 기숙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학교에서 행실 불량으로 6번이나 퇴학 처분을 받으며 학교들을 옮겨 다녔다. 그가 14살이 되자 부모는 그가 더이상 학교를 다닐만한 아이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계부가 일하는 정육점에서 일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계부와도 잦은 갈등을 일으켰고 정육점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파일:Alain DELON en Indochine.jpg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당시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복무 중인 사진. 가장 중앙에 앉은 젊은 군인이 알랭 들롱이다.

정육점 일에도 부적응한 그는 결국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였다. 처음에는 해군 통신학교 기간병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복무 중 절도를 저지르다 발각되어 불명예 전역과 군 복무 연장의 선택에 놓이자 복무 연장을 택했다. 이후 1953~54년에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인 베트남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파병되었다. 하지만 또 파병 기간 중 부대 지프를 훔쳐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영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운전 미숙으로 차량을 강물에 빠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1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56년 해군 상병(Matelot de 1re classe)으로 불명예 전역했다. 들롱은 군에서 수감 기간 포함 총 4년간 복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의 낙하산 부대원 역할을 연기한 적이 있어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 낙하산병이나 해군 특공대 출신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기도 했지만, 실은 위에 나오듯 해군 육전부대인 Fusiliers marins에서 복무하다가 불명예 제대한 것이다.[2]

1956년 불명예 제대 후 프랑스로 돌아온 들롱은 자신의 입대를 만류하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며 가족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군 입대는 들롱 자신이 자원한 것이지만 입대를 위해서는 부모 동의가 필요했는데 부모가 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서 웨이터, 짐꾼, 비서, 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이 시절 그가 갱단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3] 이때 여배우 브리지트 오버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 오버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되었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들롱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들롱은 프랑스의 이브 알레그레 감독을 만나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셀즈닉과의 계약을 파기한 후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1957년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했다.[4] 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등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인기를 얻고, 공전의 히트작 <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수없이 리메이크된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알랭 들롱의 이름값 때문에 소개돼서 히트친 영화도 있을 정도였다.[5]

다만 연기력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입이 떡 벌어질만한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로 꽉 채워진 필모그래피인데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은 없다. 동시대 알랭 들롱과 함께 활동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스타들이 상을 휩쓸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상 실적은 저조하고 본국인 프랑스의 대표적 시상식인 세자르에서도 전성기가 지난 뒤 중년의 나이에 남우주연상을 1회 수상한 것이 전부. 외모와 인기 때문에 연기력이 저평가되었다고 재평가하는 의견이 있다.
파일:tumblr_odwl3mzHTz1r23joco1_400.gif
영화 《태양은 가득히》 중
서늘하면서 퇴폐적인 특유의 매력으로 이후에는 주로 느와르에 출연했으며 독보적인 외모로 "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으며 이런 모습은 < 한밤의 암살자>, <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암흑가의 세 사람>, <볼사리노>, <고독한 추적> 등에서 볼 수 있다. 워낙 범죄자나 악역을 많이 맡다 보니 죽는 역할도 꽤 많다. 위 느와르 영화만으로 사망전대 멤버.

아마 어렸을 적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인지 들롱은 하류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 많은 굴곡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에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하면 매력이 살아난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열심히 영어를 배워가며 시도한 미국 진출이 실패한 이후 프랑스로 복귀했으며, 프랑스 영화계와 다른 할리우드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1991년에 영화 < 카사노바>에서 나이가 든 자코모 카사노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최고 개런티급인 7백만 프랑을 받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한물간 배우에게 무지막지한 개런티를 들인다며 제작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흥행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이후 1998년 <절반의 기회>를 끝으로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들롱은 영화 출연보다는 영화 제작과 복싱 프로모터로 더 활약했다.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스위스에서 살았다. 당시 로망드 TV에 출연하여 귀화 및 이민 동기를 밝혔는데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재산 보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사망 당시 프랑스 두쉬몽코르봉에 있었던 걸 보면 어느 순간 다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2008년에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에서 백발이 성성한 시저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다.

2017년 5월 9일(현지시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 격인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용납 가능한 범주를 넘은 막장 사생활로 인해 수상 반대 여론이 거세다. 온라인에서 수상을 철회하라는 청원에 2만 5천명 이상이 서명했으나 2019년 5월 19일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시상자는 그의 딸 아누슈카 들롱. 수상소감으로 알랭 들롱은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요즘이라 사후에 받을 상을 지금 받는 것 같다"라며 드물게 눈물을 보였다. # #2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현재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2021년 초 딸 아누슈카 들롱이 알린 바에 의하면 건강히 지낸다는 듯. 은퇴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6]

2024년 8월 18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3. 필모그래피

<rowcolor=#000> 개봉연도 제목 배역 이름 비고
1957 여자가 다가올 때 주연
살며시 안아주세요 루루
1958 사랑은 오직 한 길 프란츠 로브하이너
1960 태양은 가득히 톰 리플리
로코와 그의 형제들 로코 파론디
1961 더 조이 오브 리빙 울리세 체코나토
1962 프랑스식 십계 필립 알랑
태양은 외로워 피에로
1963 레오파드 탄크레디 팔코네리
지하실의 멜로디 프란시스
1964 위기탈출 마르크
노란 롤스로이스 스테파노
검은 튤립 기욤 / 줄리앙
1965 원스 어 씨프 에디
1966 강 건너 텍사스 돈 안드레아 발다사르
로스트 코맨드 필리페 에스클라비에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쟈크 샤반-델마스
1967 악마 같은 당신들 피에르 라그랑쥬 / 조르주 캉포
한밤의 암살자 제프 코스텔로
대모험 마뉘
1968 아듀 라미 디노 바령
죽음의 영혼 윌리엄 윌슨
그대 품에 다시 한 번 다니엘
1969 시실리안 로저 싸르테
수영장 장폴
1970 애정의 미로 시몬
볼사리노 로시 시프레디
암흑가의 세 사람 코리
1971 미망인 장 라비뉴
레드 선 갓치 ‘고쉬’ 킨크
1972 트로츠키 암살 프랭크 잭슨
인디안 썸머 다니엘 도미니치
형사 에두아르 콜망
1973 빅 건 토니 아르젠타
스콜피오 로리에르
암흑가의 두 사람 지노
1974 볼사리노 2 로니 시프레디
1975 르 지땅 위고 세나르
형사 이야기 슈카스
조로 엘 조로
1976 부메랑 쟈크
미스터 클라인 로베르 클라인
1977 비밀 수첩
1979 에어포트 79
야전병원 장 마리 데스프리
1980 테헤란 43 파치
세 번째 희생자 미셸 제르포
1981 형사 이야기 초우카스
1982 암살자 마틴 테리어
1983 최후의 방어선 쟈크
1984 스완의 사랑 바론 드 샬루스
우리들의 이야기 로베르 아브랑슈
1985 핫 블러드 다니엘 프라트
1986 페세지 장 디아즈
1988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유진 그렝델
1990 댄싱 머신 알란 볼프
누벨 바그 루이 / 로저 레녹스 / 리차드 레녹스
1992 카사노바 카사노바
1997 낮과 밤 알렉상드르
1998 하프 어 찬스 줄리앙 비냘
2000 배우들 본인
2002 루키노 비스콘티 백작의 시간들 본인 출연
2009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게임 시저 주연
2012 해피 뉴 이어, 엄마! 본인 출연

4. 평가

파일:2019 Cannes Alain.jpg
2019 칸 영화제 스페셜 포스터
영화계의 영원한 레오파드.
éternel guépard du cinéma.


장폴 벨몽도, 카트린 드뇌브, 잔느 모로, 장루이 트랭티냥과 함께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들 중 하나로 프랑스 밖에서도 인지도는 상당하며 이탈리아 영화사에도 영향력 있는 배우로 알려진다.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정작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는 대중적으로 흥했다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이 없었다. 영어를 배워 미국영화에 출연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 미국 진출에 실패로 미국 내 인지도는 떨어진다.[8]

5. 여담

  • 젊은 시절에 배가 고파서 레스토랑 앞에 우두커니 서있으면 종업원이 불러 공짜 밥을 먹여주기도 하고 옷가게 점원이 공짜로 옷을 주기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출처 없는 에피소드다. 다만 남녀노소에게 어린 시절부터 잘생겼다는 얘기를 매일 들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인데, 아기 때부터 하도 그를 만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만지지 마세요'라고 적힌 팻말을 유모차에 붙여둬야 했다고. #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매일 24시간을 열 명 이상이 주변에 졸졸 쫓아다니곤 했는데, 워낙 어려서부터 일상이었다 보니 그게 이상하단 걸 전혀 몰랐다고 한다. 자신은 그저 잘생겨서 데뷔가 가능했고, 그 뒤로도 오로지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전세계에서 많은 기회를 줬는데, 자신의 외모에 그 정도로 힘이 있는 걸 어려서도 알았더라면 10대 시절 정육점에서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일:7989706957_10a310b99d_b.jpg 파일:6161893.jpg 파일:Alain Delon 13.jpg

    미청년 미중년 미노년
  • 신성일이 젊은 시절 별명이 한국의 알랭 들롱이었다. 이미지가 많이 닮았으며, 반항아, 거친 인생을 많이 연기한 것도 비슷하다.[10][11]
  • 마돈나의 2012년 노래인 'Beautiful Killer'의 마지막 가사가 '하지만 넌 절대 알랭 들롱이 될 수 없지(But you'll never be Alain Delon)'이다. 들롱의 모든 영화를 봤으며 알랭 들롱의 굉장한 카리스마를 리스펙트해 넣은 가사라고.
  • 호모포비아이다. '동성애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이며, 동성애자 부부에게서 입양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사진은 게이 컨셉 밴드로 활동했던 더 스미스의 3집 The Queen Is Dead의 앨범 커버로 쓰인 적이 있다. 재밌게도 그를 스타덤에 올린 〈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레즈비언이다.[12] 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알랭 들롱의 연기를 극찬했었고, 둘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생전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알랭 들롱 본인 역시 자신이 〈태양은 가득히〉 덕에 스타덤에 오른 사실을 여러 인터뷰에서 인정했었고, 스스로 꼽는 자신의 최고 출연작에 〈태양은 가득히〉는 반드시 포함시킬 정도로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 SMAPxSMAP 2007년 10월 8일 자 방송에 출연, 미후네 토시로를 단순한 배우가 아닌 한 남자로서도 동경한다 밝혔다. 또 〈태양은 가득히〉, 〈태양은 외로워〉, 〈레오파드〉, 〈암흑가의 두 사람〉, 〈인디안 썸머〉 순서로 이 5작품들이 스스로 선정한 자신의 대표작들이라고 밝혔다.
  • 미국 배우 롭 로가 젊은 시절 알랭 들롱 닮은 외모로 꽤 유명했다. #
  • Samourai’라는 동양풍 향수 브랜드를 론칭한 적이 있다.

5.1. 여자 관계

얼굴에 걸맞은 바람둥이로 많은 염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연인은 교제 당시 '유럽의 약혼자들'로 불렸던 독일의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 알랭 들롱의 말로는 이것이 그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다고. 1958년 알랭은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서 호흡을 맞춘 독일 영화계의 스타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지만 둘이 언쟁을 할 때면 알랭이 눈물을 보일 정도로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배우 출신인 로미 어머니의 반대도 굉장히 심했다. 로미 슈나이더가 헐리우드에 진출하던 60년대 초 알랭은 동료인 니코, 나탈리 등과 외도를 했고 결국 5년 여의 연애 끝에 1964년 결별했다. 둘은 결별 이후로 연락하지 않다가, 1969년경 로미가 결혼 후 복귀를 시도할 때 알랭이 그녀를 자신이 주연으로 나오는 <수영장>의 여주인공으로 적극 추천하면서 다시 만났다. 이 때 로미와 스태프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부인인 나탈리와 소원했던 알랭이 어떻게든 로미를 다시 유혹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미는 이미 유부녀였으며 파혼 당시 나탈리와 결혼한다며 쪽지로 통보하고 떠난 그의 태도도 문제였던지라 끝까지 받아주지 않았다. 다만 이후로도 여러 작품을 함께했고 둘은 사망하기 전까지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바람은 못 끊는지 나탈리와 이혼 후 미레유 다르크와 사귀던 1972년에도 독일에서 < 루드비히: 신들의 황혼>을 찍는 로미를 찾아와 다시 들이댔었고 당연히 실패했다.) 로미의 사후에도 알랭은 로미 관련 행사에는 늘 기꺼이 참석하며 그녀의 생전을 언급하며 칭찬하거나 그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2000년대 이후 다시 연극을 시작했을 때 과거 본인과 로미가 함께 나온 연극에서 쓰인 로미 의상을 드레스룸에 가져다 두었으며, 말년에도 집안 곳곳에 그녀와 찍은 사진을 걸어두었다. 2018년 인터뷰에서는 로미를 “인생의 사랑”으로 언급하며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 알랭의 딸인 아누슈카는 2021년 로미의 딸 사라와 함께 나온 TV 프로그램에서 아버지가 로미를 자주 언급하여 왠지 가족의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로미와 약혼했던 시절 가수 니코와 외도해 1962년 태어난 실질적인 장남 크리스티앙 아론이 있다. 그러나 알랭 들롱은 친자 인정 소송에도 불구, 현재까지도 아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얼굴이 상당히 닮아 있어 확인 소송에서 친자가 아니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 게다가 여태 만났던 수많은 여자들 중 니코에게만 유독 혐오 증세를 보였는데, 아마도 그 당시 자신의 첫사랑이자 연인이었던 로미와 헤어지게 된 계기이자 당시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임신시킨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아서라고 추측된다. 들롱의 어머니는 그 아이를 친손자로 인정해 마약 중독이던 니코 대신 아리를 돌봐주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다만 알랭은 4살 무렵 이혼한 부모에게 거의 버림받다시피 하여 위탁 가정과 기숙학교를 전전하며 자랐고, 유년 시절이 불우했기에 배우로 성공한 후에야 가끔씩 자신을 찾아오는 어머니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말년에 회고하기를 당시 어머니가 마치 그루피(....)가 된 것 같았다고. 어머니가 재혼하여 성이 바뀌었음에도 “들롱 부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즐겼다고 비판했을 만큼 감정의 골이 깊었기에, 친자식은 거두지 않았으면서 사생아인 아리를 거두는 것에 반감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아리는 사진가로 일하다가 2023년 5월 헤로인 중독으로 타계했다. 향년 60세. 마약 중독은 16살 무렵 어머니와 유대감을 쌓기 위해 주사기를 함께 쓰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복형제 끼리는 사이가 좋았는지 아리가 타계한 후에 앙토니 들롱이 추모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1964년부터 1969년까지의 짧지만 유일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부인 나탈리 들롱[13]과의 사이에 공식적인 첫 아들 앙토니 들롱이 있다. 나탈리는 알랭의 바람기에도 잔소리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결혼 막바지에는 본인도 바람을 피웠다. 아들인 앙토니는 할리우드에서 일하지만 부모의 명성에 비해 인지도나 인기는 그저 그런 정도. 대신 앙토니 들롱의 딸인 앨리슨 르 보르게스가 알랭 들롱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14]

가장 오래 사귀었으며 알랭 들롱이 “인생의 여자”라고 말한 여인은, 약 15년간 관계를 지속한 끝에 1982년 결별한 미레유 다르크이다. 알랭이 경호원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부인 나탈리에게조차 외면받을 때 가장 충실했던 여인이었으며, 그가 사귄 사람 중 제일 끈기 있었다고 한다. 알랭은 미레유에게 처음부터 나는 절대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이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곁에 남으라고 말했고, 미레유는 그의 숱한 바람에도 곁을 지켰다. # 결별 원인은 미레유의 지병 때문에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미레유와도 결별 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2017년 그녀가 사망하자 알랭 들롱은 굉장히 상심했다.

배우로 데뷔하기 전인 1950년대에는 "Paroles Paroles"를 함께 불렀던 가수 달리다와도 사귀었었다고 밝혔으며, 브리지트 바르도와도 염문이 있었지만 알랭 들롱이 직접 그녀와는 단지 절친한 사이일 뿐이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루머를 부정했다.

1987년부터는 네덜란드의 모델 로잘리 판 브레멘과 2001년까지 약 15년 가량 동거하며 1990년에는 딸 아누슈카 들롱을, 1994년에는 막내인 아들 알랭 파비앙 들롱을 얻었다. 참고로 나이 차가 서른 살이라 둘 사이의 자녀는 거의 손자뻘이다. 고명딸인 아누슈카를 가장 아낀다고 밝혔다. 다만 그런 딸이 어린 시절 어머니인 로잘리와 정식으로 결혼해달라고 울고 불어도 결코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2021년에는 히로미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과 파트너 관계라고 밝혔다. # #2 2023년에는 그의 자녀들이 그녀를 고소했다. 전화 통화와 이메일 및 우편물 감시와 개 학대 등으로 아버지를 괴롭혔다는 것이 이유다. # #2 자식들은 그녀를 입주도우미로 칭했고 알랭은 다소 중립적으로 표현했다. 영화 관계자라고는 하나 정확한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위 고소 건으로 결국 알랭의 마지막까지 지키지는 못한 듯 하다.

그의 공식적인 장남이자 실질적 차남인 앙토니 들롱도 아버지의 바람기를 물려받았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이혼 경력도 있다고 하며 장녀는 첫째 부인 소생이고 차녀와 3녀는 둘째 부인 소생이다.

5.2. 사건 사고

1968-69년경 경호원 살인 사건(마르코빅 사건)의 용의자로 불려다니면서도 미디어와 공화국 대통령을 상대로 편지를 보내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한 바 있다. 피해자인 마르코빅이 마피아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그가 알랭 들롱의 이름을 대고 도박을 하거나 상류층 파티에 자주 드나든 것도 모자라 그의 아내와 바람을 피웠다는 추문 때문에 들롱을 향한 의심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사건 당시 영화를 찍고 있었다던 들롱의 증언, 결정적인 증거 부족과 함께 사건에 연계된 권력층 때문에 들롱은 7년 간의 공판 끝에 무죄로 판명이 났으나 살해당한 경호원이 남긴 편지[15]와 구속 직전까지 고려했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들롱은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종결 후에도 마피아의 압력으로 경찰이 수사를 중단했다는 등의 무수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파트너였던 30살 연하의 로잘리 판 브레멘을 폭행해 갈비뼈와 코뼈를 부러트린 일이 공개되어 크게 비난받았다.[16] 또한 다른 아들 앙토니 들롱을 어릴 때 개 우리에 가두기도 했었다고 한다.[17]

한국 방문[18] 시기 프랑스 언론은 그에 대해 '아시아 방문하러 간다는데 거기서는 어떤 싸가지로 욕 먹나 봅시다.', '알랭 들롱의 행실은 유럽 밖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자기가 황제인 줄 알았다네요.'라고 보도하는 등 호의적이지 못했다. 옛날엔 미모와 출연한 영화의 흥행으로 엄청난 인기와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브리짓 바르도와 같이 프랑스에서 인성 파탄난 노친네 취급을 받는다.그래도 배우로서의 업적을 가진 알랭 들롱의 취급이 더 나은 편. [19] 이러다보니 프랑스 현지에서는 국민배우로 따지면 장 가방은 물론이고 친구 장 폴 벨몽도보다도 훨씬 입지가 밀린다. 벨몽도 장례식은 국장에 방송 중계까지 했지만 들롱은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을 정도.

당시 통역을 맡은 이다도시의 책에 따르면 알랭 들롱의 줘터진 인성 때문에 관계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다도시에게 같은 나라 사람이니 좀 진정시켜봐라고 하기에 냅다 '나 한국 사람인데요'[20]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혼자 발광하다가 이다도시에게 사랑 때문에 한국에 왔냐면서 분을 풀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1992년 동아일보에서는 들롱을 '세련된 용모와 매너를 겸비한 배우'라고 보도한 바 있다.

정치적으로는 극우 성향으로 장 마리 르펜 지지자 겸 친구이다. 그는 "르펜 대표와 그의 아버지가 그동안 홀로 싸워왔는데 이제 처음으로 그들이 혼자가 아니다. 그들은 프랑스인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부녀를 지지하였다. 황당한 점은, 알랭 들롱은 비시 프랑스 정권의 홀로코스트 동조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인 미스터 클라인(고독한 추적)을 주연 배우 겸 제작자로 찍은 바 있는데, 르펜이 속한 국민전선은 비시 프랑스를 우상화한다는 점이다.[21][22] 이외에도 들롱은 성향과 반대되는 영화를 몇 편 찍은 경력이 있다. '암흑가의 두 사람'이 대표적.

2024년 2월 말, 자택에서 무허가 총기 72자루와 탄약 3,000발이 경찰에게 압수되며 여전히 죽지 않은 한 성깔을 과시했다(...). # #2

2014년부터 벨지언 말라누아 유기견인 루보를 키웠는데[23], 2018년 자신이 사망하면 안락사해 같이 묻어달라고 발언해 욕먹었다. 사망 후 다시 논란이 되었는데 개 나이로 10살이면 노견 초입이긴 하지만 딱히 아프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기에 멋대로 순장하는거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유족이 안락사시키지 않겠다고 해서 일단락 되었다. 출처

5.3. 안락사 관련

2022년 3월 10일 장남 앙토니 들롱은 부친 알랭 들롱이 안락사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 앙토니가 공개한 내용은 지금 즉시 진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2019년 뇌졸중 투병 당시 부자가 나눈 대화로, 더 심각해졌을 경우 안락사를 시행한다는 의미였다. # 그는 2021년에 진행된 TV5 몽드 인터뷰에서도 안락사에 찬성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밝혔던 바 있다.

단, 국내 언론에서 앞뒤 맥락을 자르고 다소 호들갑스럽게 보도한 경향이 있다. 본국인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는 특별히 화제도 아니었고 프랑스에서는 차라리 아들 앙토니 들롱이 화제였다.[24] 물론 실제로 안락사가 진행된다면 큰 이슈가 될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락사한 것은 아니고, 2024년 8월 18일 가족과 함께 있다가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


[1] 1999년 시민권 취득. [2] 프랑스 해군의 Fusiliers marins는 해군 육상 전투부대로 미국의 해병대에 해당하는 조직. [3] 알랭 들롱은 사실 외모에 대한 찬사 외에도 인상이 그리 밝지 않아 어딘가 범죄형의 분위기를 띈다는 평도 함께 받기도 한다. [4] 정작 들롱은 미국에서 경력은 잘 안 풀렸다. 진출 후에도 레드 선 같은 이색작에도 출연했지만 미국에서 자체적인 인기는 끌지 못했다. [5]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가 있다. 한국에서 흥행은 했고 주제가도 유행했지만, 내용 자체는 히트 치기에는 좀 난해한 영화였다. 순전히 알랭 들롱이 나온다는 이유로 보러 갔던 관객들이 많았던 편. [6] 실제로 뇌졸중 투병 전에 쥘리에트 비노슈가 출연하는 은퇴 영화가 계획되었으나 무산된 적이 있다. [7] # [8] 그래서 미국 영화 매체에서는 굳이 쟁쟁한 할리우드 고전 배우들을 제치고 알랭 들롱을 전설적인 배우라고 거론하진 않는다. 물론 유럽 영화계에선 전설로 인정받기에 사생활 논란과 사람들의 반대에도 칸 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9] 태생은 이집트, 혈통은 이탈리아계다. 다수의 히트작들을 남겼으나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1987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샹송가수. [10] 심지어 심한 여성 편력의 막장 사생활, 미남 아들이 영화배우가 된 것도 같다. [11] 동시대 활동한 최무룡 리처드 버튼, 남궁원 그레고리 펙을 닮았다는 평. [12] 그런데 호모포비아 중 유독 게이는 싫어하면서 레즈비언에겐 관대한 성향을 가진 호모피비아들이 있다. [13] 결혼 전 성은 바르텔미. 결혼 전후로 여러 명의 여인과 관계가 있었지만 결혼한 사람은 나탈리 한 명이다. [14] 이 딸은 앙토니 들롱의 질풍노도 시절 생긴 사생아이며, 할머니 나탈리의 젊은 시절 판박이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15]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랭 들롱과 나의 부하 프랑수아 마르칸토니(당시 갱단의 일원)에게 물어달라." [16] 이 사실을 폭로한 아들 알랭파비앙 들롱은 사실 어머니 로잘리도 잔인하고 폭력적이기에 당시 '당해도 싸다'는 심정이었다고 설명했다. [17]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자녀들과 사이가 멀어졌던 적이 있으나 관계를 회복했는지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사진을 자녀들이 sns에 올리기도 했다. 특히 딸 아누슈카와는 사이가 매우 좋아 그녀의 sns의 알랭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나 부녀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가득하다. [18] 199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코냑과 화장품 홍보차 한국을 방문하였고 팬 사인회를 가졌다. [19] 바르도는 영화 배우로서 커리어가 상당히 짧고 은퇴 이후 극성 정치 지지와 막장 인성으로 당대보다 훨씬 저평가 당한다. 다만 비틀즈멤버 중 한명도 팬이었을 만큼 영미권 인지도는 알랭 들롱보다 높다. [20] 이다도시는 귀화해서 한국인이 된 프랑스계 귀화 한국인이다. [21] '미스터 클라인'은 1942년 7월 16-17일 나치의 지시 하에 프랑스 경찰이 13,152명의 유대인들(4,000명 이상의 아동 포함)을 일제검거해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없이 사이클 경기장인 벨디브(Vélodrome d'Hiver, 약칭 Vel' d'Hiv)에 우거넣다시피 임시 수용해 드레퓌스 사건과 함께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감정을 여실히 보여준 '벨디브 사건'을 다루었는데, 르펜은 이에 대해서도 망언을 하였다. [22] 사실 이건 들롱보다 감독 조셉 로지의 성향이 그렇다. 로지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연극을 사사하고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관련해 쫓겨난 매카시즘 피해자로 유럽에서 활동해야 했다. 때문에 굉장히 반골 정신이 강하고, 영국이나 프랑스 치부를 들춰내는 영화를 여럿 만들기도 했다. [23] 예전부터 애견인으로 유명했다. 사망 당시 총 35마리를 키웠다고 알려져 있고, 사유지에 지금까지 키운 개의 무덤도 있을 정도다. 들롱 본인도 이곳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4] 자신의 자서전을 발표하면서 공개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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