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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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僧渉公(? ~ 381)
오호십육국시대 서역의 승려.[1] 성은 모르고, 섭공이라는 이름도 전진의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보인다.
2. 생애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승섭공은 건원 11년(375년)에 전진의 도읍 장안(長安)에 왔다. 그는 닷새 동안이나 곡식을 먹지 않고도 하루에 500리를 걸을 수 있었고, 마치 손금 보듯이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예지하였으며, 알 수 없는 주술을 외워 신룡(神龍)을 소환하기도 하였다.그의 신통력은 매우 유명하여 한번은 전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천왕 부견이 그에게 친히 해결을 부탁할 정도였다. 이때 승섭공은 주술을 외워 신룡을 소환하였고, 용이 승섭공이 들고 있는 바리때 속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를 본 부견과 신하들은 모두 승섭공의 바리때 안을 들여다보고, 그 기이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승섭공은 부견에 의해 국신(國神)으로 떠받들여졌고, 백성들은 신분의 귀천과 관계없이 모두 그의 발을 만지면서 재앙이 다시 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건원 16년(381년) 12월,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망하여 천왕 부견이 통곡하였다. 죽은지 5일 뒤, 천왕 부견은 승섭공의 신이함을 시험하고자 승섭공의 관을 열어 확인해보게 하였다. 그러나 관 안에 주검 없이 단지 수의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건원 17년(382년)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이 닥쳤다. 6월이 되었을 때, 천왕 부견은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임으로써 화기(和氣)를 영접하려 하였다. 그러자 7월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이를 본 천왕 부견은 중서감 주융에게 말했다.
"섭공(渉公)이 있었다면 짐을 이처럼 우려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오. 그 공(公)은 대성인(大聖人)이었소."
주융이 답했다."그 기술의 심오하고도 아득하여 전례 없을 정도로 기이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우러러 보는 생각이 이와 같았다.
[1]
또는 촉(蜀) 땅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