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00:54:36

수로왕릉

김해 수로왕릉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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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73호
김해 수로왕릉
金海 首露王陵
Royal Tomb Of King Suro\, Gim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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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 서상동)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면적 61,487㎡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가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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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전설
3. 대중교통
3.1. 버스3.2. 도시철도
4. 외부 링크5. 사적 제73호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파일:20161118_101442.jpg
수로왕릉 전경. 무덤 좌측에서 벌초작업을 하는 것이 보인다.
사적 제73호.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 ( 서상동)에 있는 무덤이다. 이 능의 주인 수로왕은 전설에 따르면 가락국의 초대 국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원형 봉토무덤으로 높이가 5m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도보 20분 내 거리에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김해여객터미널 등이 있다.

예부터 납릉(納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왕릉 구역 안에는 수로왕의 위패를 모신, 팔전 중 하나인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원래는 가야 때 수로왕 사후에 지은 빈궁(殯宮), 신라 문무왕 때 지은 사당이 있었으나 수백 년이 지나 조선시대 들어서는 옛 시설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왕릉의 격에 맞추어 여러 시설들을 추가하여 지금까지 전한다.

2. 상세

수로왕 이야기는 『 삼국유사』의 「 가락국기」에 전하지만,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본 무덤이 수로왕이 묻힌 곳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적어도 본 무덤이 삼국유사에 수로왕릉이라고 기록된 그 무덤임은 확실하다고 본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도 신라 문무왕의 명령으로 매년 제사를 지냈다.[1]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도 호족 소충자가 수로왕의 사당을 빼앗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간신히 넘겼다. 이후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해진 듯하다. 『세종실록』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는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혔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무덤을 열어보는 것은 불경한 일이므로 현대에 발굴한 적은 없지만 『 지봉유설(芝峰類洩)』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릉이 임진왜란 일본군에게 도굴을 당하여 내부가 드러났는데, 순장된 여자 시신 두 구가 있었다고 한다.[2] 이 기록을 믿는다면 수로왕릉은 큰 돌방무덤(석실묘)일 것이다.

조선시대 지도와 구한말 흑백사진에 담긴 《수로왕릉》 모습

2.1. 전설

투탕카멘의 저주와 유사하게, 삼국유사 수로왕편에 따르면 수로왕릉을 함부로 건드린 사람들이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신라 말년 후삼국시대 호족 충지의 부하 아간 영규라는 사람이 멋대로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낼 권한을 빼앗고 단오날 제사를 올리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 죽었다. 이에 영규의 상관이던 충지가 수로왕의 영정을 그려놓고 경건히 제사를 지냈는데,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충지는 두려워 영정을 불태우고 수로왕의 후손들에게 다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단오날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이 행패를 부리며 후손들이 차려놓은 제수를 치워놓고 자기가 멋대로 제수를 차려서 제사를 지내다가 술잔을 다 올리기도 전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당 내부에는 금옥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노리고 들어온 도적들이 있었는데, 처음 시도에서는 웬 중무장한 갑옷무사가 사당 속에서 나타나 도적 일고여덟 명을 활로 쏘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그들이 다시 왔을 때에는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는 거대한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도적 여덟아홉 명을 물어 죽이자 도적들은 두려워하여 도망가 버렸다.

또한 고려 성종 11년(992)에는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3] 조문선(趙文善)이란 사람이 수로왕릉에 딸린 밭이 너무 많으므로 옛 제도대로 15결[4]로 줄이자고 요청하여, 조정에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양전사가 재차 청하자 절반을 왕릉에 남기기로 하고 나머지 절반을 김해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일이 끝나갈 무렵 조문선의 꿈속에 귀신 일고여덟 위가 나타났다. 귀신들은 조문선에게 큰 죄를 지었으므로 잡아 죽이겠다고 하며 칼과 밧줄로 고문을 가했다. 조문선은 꿈에서 깨어났으나 이내 병이 걸리는 바람에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중에 급히 도망, 관문을 지나다가 이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후 재차 조사해 보니 왕릉에 남기기로 한 토지가 15결에 못미치는 11결 12부 9속일 뿐이고 3결 87부 1속을 조문선이 가로챈 것이 드러나서, 왕명으로 다시금 넉넉히 지급하였다고 한다.

3. 대중교통

3.1. 버스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수로왕릉(1008·1053) ||
좌석
일반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농협김해시지부/국민은행(1062·1135) ||
김해시 시내버스
일반
부산광역시 시내버스
급행
일반

3.2. 도시철도

부산김해경전철 수로왕릉역으로 접근 가능하지만 왕릉까지는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4. 외부 링크

5. 사적 제73호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洩)』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로왕릉 → 김해 수로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6. 대중매체에서

한국 소설 다 음자리 클럽에서 주인공의 첫사랑 회상 장면 배경으로 등장한다.


[1] 문무왕의 어머니 문명왕후 김유신의 여동생, 즉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녀로, 문무왕 역시 가야계 혈통을 이어받았다. [2] 금관가야의 왕릉급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무덤마다 1~5명쯤을 순장하였다. 수로왕릉이 고대의 왕릉이라면 가야의 관습대로 순장된 시신이 있음은 당연하다. [3] 토지를 측량하고 조사하는 관리. [4] 이를 '결부제'라 부르는데, 신라 이래 토지 면적에 따른 수확량 산출에 의거한 계산법이다. 농부의 손에 쥔 벼 한 줌을 기준으로, 열 줌을 1파, 10파를 1속, 10속을 1부, 100부를 1결로 계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