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18749><tablebgcolor=#018749> |
셀틱 FC 관련 문서 |
{{{#373A3C,#DDD {{{#!wiki style="margin:0 -10px -5px" {{{#01874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373A3C,#DDD |
<colbgcolor=#018749> 정보 | <colbgcolor=#fff> 구단 |
셀틱 FC |
셀틱 FC 위민 셀틱 FC 아카데미 |
|
선수단 | 스쿼드 | 스쿼드(간략) | 임대 명단 | |||
스태프 | 보드진 · 코칭 스태프 | |||
역사 | 정보 | 역사 | 기록 | 전적 | 유니폼 | 역대 유니폼 엠블럼 | ||
최근 시즌 | 1966-67, 2014-15, 2015-16, 2016-17, 2017-18, 2018-19, 2019-20, 2020-21, 2021-22, 2022-23, 2023-24, 2024-25 | |||
관련 인물 | 역대 최고의 팀 | Hall of Fame | 역대 감독 | 올해의 선수 | 역대 최다 출장자 | 역대 최다 득점자 | |||
관련 상식 | 더비 매치 | 올드 펌 | ||
구단 시설 | 경기장 |
오리지날 셀틱 파크1888~1892 셀틱 파크1892~현재 |
||
훈련장 | 레녹스타운 트레이닝 센터 | |||
이 외 | 연고지 | 글래스고 | ||
스폰서 | dafabet메인 스폰서 | 아디다스킷 스폰서 |
1. 개요2. 창단 초기(1887~1897)3. 윌리 말리의 시대(1897~1940)4.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5. 지미 맥그로리 시대(1945~1965)6. 조크 스타인 시대(1965~1978)7. 빌리 맥닐과 데이비 헤이의 시대(1978~1991)8. 리암 브래디와 루 마카리의 시대(1991~1994)9. 퍼거스 맥칸의 시대(1994~1999)10. 마틴 오닐의 집권(1999~2005)11. 고든 스트라칸과 토니 모브레이의 시대 (2005~2010)12. 2011-12 시즌13. 2012-13 시즌14. 2013-14 시즌15.
2014-15 시즌16.
2015-16 시즌17.
2016-17 시즌18.
2017-18 시즌19.
2018-19 시즌20.
2019-20 시즌21.
2020-21 시즌22.
2021-22 시즌23.
2022-23 시즌24.
2023-24 시즌25.
2024-25 시즌
1. 개요
|
|
Celtic Football Club History
|
스코틀랜드의 축구 클럽 셀틱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창단 초기(1887~1897)
|
|
셀틱을 창단한 월프리드 수사
|
1887년 11월 6일에 월프리드 수사가 설립한 단체인 '가난한 아이들의 저녁 식탁'을 위해 모금함으로써 글래스고 동쪽 끝의 빈곤을 완화하려는 목적으로 세인트 메리 성당에서 셀틱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 기금 마련의 수단으로 축구 클럽을 설립하려는 월프리드의 움직임은 몇 년 전 에든버러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로 구성된 히버니언 FC의 사례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왈프리드가 제안한 ‘셀틱’[1]이라는 이름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뿌리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 클럽의 공식적인 애칭은 ‘The Bhoys’이다. 하지만 그 당시 언론들에 따르면, 새로 창단된 셀틱은 많은 사람들에게 ‘the bold boys’ 즉, 대담한 소년들로 알려졌다고 한다. ‘Bhoys’에 추가된 ‘h’는 게일어의 철자법을 모방한 것인데, 여기서 문자 ‘B’는 종종 문자 ‘H’를 동반한다고 한다.
1888년 5월 28일, 셀틱은 공식적으로 첫번째 경기를 치르게 된다. 상대는 현재 셀틱의 최대 지역 라이벌인 레인저스 FC와의 친선경기였다. 경기 결과는 5:2로 셀틱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때 골을 넣은 닐 맥칼럼은 셀틱 역사상 첫번째 득점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레인저스와의 경기를 올드 펌라고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 매치 중 하나다.
1888-1889 킷 | 1889-1891 킷 | 1904-1905 킷 |
셀틱의 첫번째 킷의 형태는 흰색 셔츠에 녹색 카라가 달렸고, 검은색 반바지, 그리고 에메랄드 녹색의 양말이었다. 그리고 엠블럼은 붉은색 바탕에 녹색 십자가가 새겨진 형태였다. 1889년, 현재 셀틱 홈킷의 형태와 색은 같지만 흰색, 녹색 세로 줄무늬 형태의 킷이 탄생했다. 그리고 1903년 마침내 현재 셀틱의 홈킷 형태와 같은 녹색, 흰색 가로 줄무늬 형태의 유니폼이 등장한다. 이 형태를 현지에서는 ‘hoops’라고 하고 현재 셀틱의 또 다른 애칭이기도 하다.
왈프리드 수사는 창단 당시 오로지 자선적인 목적으로만 구단을 운영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셀틱의 경제적인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건축가였던 존 글라스와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온 재단사 팻 웰시는 1885년에 잉글랜드에 프로페셔널리즘이 정착한 것을 보고 스코틀랜드에도 충분히 통할 것이란 것을 알아챘다. 1888년 8월, 글라스는 왈프리드 수사와 클럽 위원회도 모르게 당시 히버니언의 최고의 선수 8명에게 현금을 제공하며 영입하게 된다. 당시 너무 많은 선수를 뺏긴 히버니언은 절망감에 빠졌고, 그들은 즉시 쇠락하여 시즌이 끝날 무렵 축구 사업을 접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다시 입지를 굳혀나갔다.
1889년, 셀틱은 그들의 첫번째 시즌에서 스코티시 컵 결승에 올라가는 쾌거를 이루게 되지만 써드 라나크에게 1:2로 패배하며, 첫 우승컵을 다음으로 기약하게 되었다. 셀틱은 또한 글래스고 지역 기반 대회인 글래스고 북동컵 결승에 진출하였고, 카울레어스를 6:1로 제압하며, 첫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 셀틱은 3년 뒤인 1892년에 다시 한 번 스코티시 컵 결승[2]에 오르게 되었고, 퀸즈 파크 FC에게 5:1 승리하며 구단 첫번째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이때 당시 샌디 맥마혼과 존 캠벨이 각각 2골씩 넣었다. 몇 달 뒤, 1892-93 시즌부터 셀틱은 새로운 홈구장인 셀틱 파크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이 시즌에 무려 스코틀랜드 풋볼 리그를 우승하게 되며, 스코틀랜드 축구 최강자로 올라서게 된다. 1895년 10월 26일, 셀틱은 홈에서 던디 FC를 11:0으로 대파하며, 리그 레코드를 세우기도 했다.
3. 윌리 말리의 시대(1897~1940)
|
|
셀틱의 기틀을 마련한 윌리 말리
|
1897년, 셀틱은 유한회사로 운영하게 되었고 윌리 말리가 구단의 첫 정식 감독이 되었다. 말리는 초반에 경험이 있는 선수들을 위주로 영입했고, 어린 선수들은 주니어 팀에서 육성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말리의 이러한 운영으로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6번 연속 리그 우승을 거두며 20세기 초반 10년을 셀틱의 시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07년과 1908년에 셀틱은 스코티시 컵도 우승을 거두었는데, 당시 2연속 스코티시 컵 우승을 한 것은 셀틱이 처음이었다. 이 기간 동안 알렉 맥네어, 지미 퀸, 짐 영, 피터 소머스, 알렉 베넷, 데이비 해밀턴, 지미 맥메너미 그리고 데이비 아담스와 같은 선수들이 셀틱의 중추 역할을 했다.
환상적인 10년을 보낸 후 몇몇 선수들은 은퇴를 하거나 다른 클럽으로 이적을 하였다. 이 때문에 1911년에서 1913년에 라이벌인 레인저스가 3회 연속 리그 우승을 거두면서 리그에서는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코티시 컵에서는 1911년 해밀턴 아카데미컬 FC, 1912년 클라이드, 1914년 히버니언을 결승에서 꺾으며 계속해서 성공을 이어나갔다. 당시 짐 영은 큰 덩치로 힘을 보여주며 측면의 지배자였고, 체격이 작았던 팻시 갤러허는 신명나는 기술로 자신의 왜소한 체격을 커버했다. 피터 존스톤, 앤디 맥아티, 맥네어 그리고 맥메너미와 같은 경험 많은 선수들에 팻시 갤러허의 가세로 더욱 강력해진 셀틱은 1914년 4월 말에 리그 제패 후 3년 연속 리그 우승과 컵대회까지 두 번 우승했다.
셀틱은 191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페렌츠바로시 베이스[3]에서 우승했다. 당시 결승에서 번리 FC와 맞붙었는데, 대회 주최 측과 참가 팀들은 이긴 팀에게 트로피를 주겠다고 합의했지만 셀틱과 번리는 연장전을 거부했다. 셀틱은 이미 글래스고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부다페스트에서 재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대회 측은 동전 던지기를 통해 번리의 홈에서 재경기를 치르기로 했고, 셀틱은 잉글랜드로 건너가 재경기를 치러 2:0 승리를 거두며 우승팀이 되었다. 이때 셀틱은 트로피가 당시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판매되었기 때문에 수여 받지 못했고, 우승 상금의 일부를 헝가리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74년 뒤인 1988년에 셀틱 창단 100주년을 맞이해 페렌츠바로시는 수여하지 못했던 트로피를 수여하기도 했다. 1914년 대회 당시 트로피 모양이었던 백자를 제작해 글래스고로 가져왔고, 1988년 4월에 열린 던디 FC와의 우승이 결정되었던 경기에 선보여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셀틱은 네 번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15년 11월 20일부터 1917년 4월 14일까지 62경기 무패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고, 이 기록은 2017년 셀틱이 깰 때까지 100년 가량 깨지지 않았던 기록이다. 이 기간 동안 경기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셀틱이지만 외적으로는 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관중 수가 급격히 줄었고, 선수의 연봉 또한 줄었으며, 고정 선수 명단을 제출하라는 압력도 존재했다. 1916년 어느 날은 하루에 레이스 로버스 FC와 머더웰 FC와 두 경기를 치르는 날도 있었다. 경기는 각각 6:0, 3:1로 승리를 거뒀다. 축구 경기를 치르기 위해 선수 선발전을 개최하기도 했고, 어느 날엔 셀틱 파크에서 참호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몇 몇 셀틱 선수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2군 팀 선수였던 윌리엄 앵거스는 열심히 싸워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셀틱에서 200경기 이상 출장했었고, 팬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피터 존스톤은 1917년 솜 전투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또한 1915년 4월 17일에 셀틱 창단에 큰 공헌을 한 왈프리드 수사가 사망했고, 그는 덤프리스에 있는 마리스트 묘지에 묻혔다. 이에 말리는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 보고서에 왈프리드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며 “그는 셀틱의 창립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라고 말했고, 그의 셀틱의 대한 공헌에 대해 “진정으로 클럽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까지 레인저스가 스코틀랜드 축구를 지배했다. 셀틱이 1920년대에 두 번 우승하는 동안 레인저스는 8번의 리그 타이틀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셀틱은 스코티시 컵에서 3번의 타이틀을 가져가며 성공을 이어갔다. 1925년에 거두었던 스코티시 컵 우승이 많은 이들에게 인상을 주었다. 햄던 파크에서 준결승전이 열렸고, 상대는 라이벌인 레인저스였으며, 당시 들어온 10만 관중 앞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4월 11일에 열린 던디와의 결승전에서 2:1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
|
셀틱 최다 득점자 지미 맥그로리
|
1920년대 중반 지미 맥그로리는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1923-24 시즌에 클라이드뱅크에서 넣은 16골을 포함해 16년 동안 550골을 집어넣었다. 1926-27 시즌에 리그와 컵대회에서 넣은 골이 무려 57골이었다. 그리고 1928년 1월에 열린 던펌린과의 경기에서 셀틱은 8골을 넣었는데 모두 맥그로리가 기록했다. 1928년에 아스날 FC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당시에 엄청난 액수를 제시했고, 셀틱은 그를 매각하려고 했으나, 맥그로리는 셀틱을 떠나고 싶지 않아했고, 셀틱에 잔류했다. 후에 맥그로리는 “아스날에서의 맥그로리는 셀틱에서의 맥그로리 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31년 9월, 셀틱은 올드 펌 더비 도중 골키퍼인 존 톰슨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를 경험하기도 했다. 톰슨은 볼을 잡아내기 위해 레인저스의 선수였던 샘 잉글리시의 발 아래로 향했고, 이에 톰슨은 두개골 골절을 당했고, 병원으로 향했지만 그 날 저녁 사망했다. 톰슨의 나이는 겨우 22세였지만 1927년 18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200경기 이상을 뛴 경험이 풍부한 선수였다. 짧은 기간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의 동료들과 상대팀 선수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훌륭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후에 휴 테일러의 책인 ‘스코틀랜드 축구의 달인(1967)’에서 ‘골키퍼 왕자’로 언급되는데 이 별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카덴덴에서 열린 톰슨의 장례식에 약 3만 명 가량이 조문에 참석했다. 이 사고와 연관되어 있던 샘 잉글리시는 스코틀랜드의 주목 받는 젊은 선수였고, 사고에 대해 전혀 흠잡을 문제는 없었지만 1938년,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잉글랜드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잉글리시는 톰슨이 죽은 후 그의 축구 경력에 대해 “7년간 전혀 즐겁게 축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말리의 시대 동안 아시아 대륙의 선수가 처음으로 영입되기도 했는데, 1936년에 인도[4]의 모하메드 압둘 살림을 영입했다. 그는 축구화를 신지 않고 맨발로 뛰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밀턴 에이시스와의 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고, 7:1로 이긴 갈스턴과의 경기에서 동료에게 3골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비록 두 경기 모두 친선경기였지만 팬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인도 반도 출신으로 유럽에서 뛰는 첫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셀틱에서 몇 달 생활했지만 주전 경쟁에서 밀려 어떠한 경기에도 출전할 수 없었고, 인도로 돌아가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셀틱은 1930년대 중반에 지미 델라니, 조니 크럼, 윌리 부찬, 존 다이버스가 기존의 베테랑인 지미 맥그로리를 보완해주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셀틱은 1936년에 1926년 이후 처름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21년 이후로 처음으로 아이브록스 원정, 1926년 이후 처음으로 퍼 파크 원정에서 승리를 거뒀다. 맥그로리는 해당 시즌에 50골을 기록했다. 다음 해에 셀틱은 스코티시 컵 결승에 올랐고, 상대는 애버딘 FC였다. 그때 관중이 146,433명이 입장했는데, 이 기록은 지금까지 유럽 최다 관중수 기록이다. 셀틱은 이 경기에서 2:1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37-38 시즌은 골든 주빌리[5] 시즌이었다. 이 역사적인 시즌에 19번째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강팀끼리 겨룬 엠파이어 엑시비션 트로피 결승에서 에버튼 FC를 꺾으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40년 1월에 윌리 말리는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나이는 71세였고, 처음에는 셀틱의 선수로 그리고 비서 겸 감독으로 52년 간 헌신한 레전드였다.
4.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전 셀틱 선수였던 지미 맥스테이가 1940년 2월에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셀틱의 감독으로 5년 동안 역임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공식적인 리그가 치러지지 않아 공식전 기록이 전무하다. 많은 선수들이 전쟁에 참여했기에 많은 팀들은 선수가 부족했고, 초청 선수들을 출전시키기도 했다. 리그와 컵 대회가 중지되었고, 지역 리그 대회에 참여했다.셀틱은 전쟁 기간 동안 특별히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초청 선수들을 내보내는 것을 꺼린 것이 도움 되지 않았다. 그래도 1941년 글래스고 컵과 1943년 글래스고 채리티 컵을 우승하는데 성공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윌리 밀러, 존 맥페일, 바비 에반스 등 매우 뛰어난 유망주들이 등장했다.
1945년 5월 9일, 당시 일회성 대회였던 유럽 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맥스테이는 셀틱 위원회로부터 사임 요청을 받았고, 그는 마지못해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셀틱의 스카우터로 일하기도 했다.
5. 지미 맥그로리 시대(1945~1965)
|
|
지미 맥그로리의 감독 시절
|
셀틱의 전 주장이었던 지미 맥그로리가 1945년 여름에 셀틱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47년, 셀틱의 회장이었던 톰 화이트가 사망하면서 이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1931년부터 클럽의 이사였던 로버트 켈리가 새로운 회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셀틱에서 18년 간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셀틱은 맥그로리 집권 전후로 몇 년 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고, 1948년에 간신히 강등을 면하기도 했다. 셀틱은 여름 동안에 지미 호건을 코치로 영입했고, 그는 이전에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일했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6년을 보냈다. 호건은 셀틱에서 겨우 2년 있었지만 1950년대 초 셀틱의 축구 퀄리티를 향상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코칭 방식은 후에 전설적인 감독인 조크 스타인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1951년 4월, 스코티시 컵 결승에서 존 맥페일의 골로 셀틱은 머더웰을 1:0으로 꺾고 전쟁 이후 처음으로 메이저 트로피를 따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953년 5월에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기념해 열린 일회성 토너먼트였던 대관식 컵에서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히버니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1954년에 셀틱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와 컵 대회를 동시에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고, 이 리그 우승은 1938년 이후 첫 리그 우승이었다. 더블 과정을 보게 되면 중앙 수비수였던 조크 스타인을 라넬리로부터 싼 값에 영입했고, 주장이었던 션 팰런의 부상으로 스타인이 대리 주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팰런이 복귀한 후에도 주장 자리를 지켰다. 스타인의 존재는 그동안 부족했던 팀 내 목표 의식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셀틱은 리그에서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보다 승점 5점을 앞선 채 리그 우승을 만들어냈고, 단 29 실점 만을 기록하며 리그 최소 실점을 달성했다. 또한 스코티시 컵 결승에서 애버딘을 상대로 숀 팰런의 골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1950년대 셀틱의 주축으로 바비 에반스, 버티 피콕, 바비 콜린스 그리고 찰리 툴리 등이 등장했다. 이 중에 툴리는 특히 돋보였는데, 대담한 드리블, 날카로운 재치 그리고 카리스마를 갖춘 특별한 선수였다. 1953년 폴커크에서 열린 스코티시 컵 경기에서 툴리는 코너킥으로 직접 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골을 코너킥 아크에서 떨어졌다는 이후로 취소되었고, 툴리는 다시 코너킥 아크로 가서 다시 직접 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툴리는 셀틱 팬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고, 글래스고의 ‘툴리마니아’라는 카페는 ‘툴리 아이스크림’, 어느 칵테일 바에서는 ‘툴리 칵테일’ 그리고 ‘툴리 넥타이’를 파는 가게들 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스타였던 바비 콜린스는 툴리와는 대조적으로 완고한 선수였지만 매우 창조적인 미드필더였다. 그는 18세에 데뷔하여 1950년대에 셀틱에서 활약했고, 1951년 스코티시 컵 우승, 1953-54 시즌 스코틀랜드 풋볼 리그, 1956년과 1957년에 스코티시 리그 컵 우승을 하는데 큰 공헌을 한 선수였다. 콜린스는 160cm 가량의 작은 선수였고, “The Wee Bara”라는 별명을 가진 셀틱에서 매우 인기있는 선수였다. 그는 셀틱 소속으로 320경기를 치렀고, 116골을 기록했다.
1957년 10월 19일, 셀틱은 햄던 파크에서 열린 스코티시 리그 컵 결승에서 라이벌 레인저스를 7:1로 완파하며 2년 연속 리그 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스코어는 영국 국내 컵 대회 결승전 최다 점수차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몇 년 동안 빌리 맥닐, 패디 크레랜드, 지미 존스톤과 같은 좋은 유망주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맥그로리 감독 하에 더 이상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1950년대 후반, 조크 스타인과 숀 팰런은 부상으로 인해 은퇴를 해야만 했다. 스타인은 은퇴 후 1960년에 던펌린 애슬레틱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팰런은 셀틱에 남아 수석 코치가 되었다. 다른 주축 선수들도 이 시기에 팀을 떠났는데, 존 맥페일은 1956년에 은퇴했고, 바비 콜린스는 1958년에 에버튼으로 이적했고, 찰리 툴리는 1959년에 아일랜드로 돌아갔으며, 바비 에반스는 1960년에 첼시 FC로 이적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등번호를 점점 사용하기 시작하다가 1960년대에 의무화되었다. 당시 셀틱은 끝까지 유니폼에 등번호 새기는 것을 거부했고, 팀 유니폼에 등번호를 새긴 마지막 영국팀이었다. 전통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였던 셀틱의 회장인 로버트 켈리는 등번호로 인해 녹색과 흰색 훕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에 실망했고, 셀틱은 반바지에 번호를 부착했다.
1960년대 초 셀틱은 처음으로 유럽 대항전에 출전했다. 셀틱은 전 시즌에 리그 3위를 기록하며, 1962년에 인터-시티 페어스컵에 진출할 수 있었다. 셀틱은 1라운드에서 스페인의 발렌시아 CF를 만나게 되었다. 각 팀의 홈 경기장에서 1, 2차전을 치르는 방식이었고, 스페인 원정에서 셀틱은 4:2 패배, 2차전 글래스고에서 열린 홈에서는 2:2로 비기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에 실패하며 첫 유럽대항전은 아쉽게 마무리 되었다.
다음 시즌인 1963-64 시즌, 셀틱은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에 진출하였다. 셀틱은 이 대회에서 FC 바젤, GNK 디나모 자그레브,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를 물리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동안 국내 대회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유럽대항전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준결승 상대는 MTK 부다페스트 FC였고, 1차전에서 셀틱은 3:0으로 멋지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 0:4로 패하며 합계 3:4로 아쉽게 탈락을 하고 만다.
셀틱은 국내 대회에서도 계속해서 고군분투했다. 1965년 1월, 셀틱은 새해에 열린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패하고, 클라이드와 무승부, 던디 유나이티드 FC에게 패배하며, 다시 한 번 리그 선두 경쟁에서 밀려났다. 1965년 1월 12일, 데일리 메일은 셀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들은 지방 구단들에게 조차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그들은 레인저스에 너무 뒤쳐저 있고 더 이상 우승 레이스를 할 수 없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같은 날, 셀틱 이사회는 경영진의 변화를 논의하기 위해 특별 회의를 열었다.
6. 조크 스타인 시대(1965~1978)
|
|
셀틱의 최전성기를 이끈 조크 스타인
|
전 셀틱의 주장이었던 조크 스타인이 맥그로리 다음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타인은 셀틱의 선수였고, 주장이었으며,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현재 인정 받고 있다. 스타인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셀틱의 리그 9회 연속 우승을 만들어냈고, 이는 당시 MTK 부다페스트 FC와 PFC CSKA 소피아가 갖고 있던 세계 기록과 같은 기록이었다.
1965년 1월 31일, 조크 스타인이 신임 감독으로 발표되었으나, 그의 전 직장이었던 히버니언이 다음 감독을 찾지 못해 3월까지 히버니언 감독을 역임했다. 그동안 임시로 숀 팰런이 감독 대행을 했다. 지미 맥그로리는 은퇴할 때까지 셀틱의 홍보 담당 역할을 수행했다.
1965년 3월, 스타인이 셀틱에 부임했을 때 셀틱은 리그에서 고전을 면지 못하였고, 스타인은 첫 경기였던 에어 유나이티드 FC전에서 6:0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히버니언에게 2:4, 폴커크에게 2:6으로 패배했다. 스타인이 부임하기 전 셀틱은 스코티시 컵 준결승에 진출해 있던 상태였고, 머더웰과의 준결승에서 2:2 무승부 후, 재경기에서 3:0으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했다. 1965년 4월 24일, 던펌린과의 결승전이 열렸고, 3:2로 승리하며, 1957년 이후 처음으로 메이저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1965년 8월, 셀틱은 셀틱 뷰(Celtic view)라는 구단 자체 주간지을 제작했고, 영국 축구 클럽 최초의 일이었다. 그 신문은 4페이지 분량의 주간지로 제작되었고, 비버브룩 신문사의 발행부서에서 일하던 잭 맥긴의 발상이었다. 맥긴은 자신이 처음 몇 년 동안 이 신문을 편집했고, 발행 부수는 처음에는 약 26,000부에 달했다.
1965-66 시즌은 스타인의 셀틱에서의 첫 풀 시즌이었다. 1965년 10월 23일, 레인저스와의 리그 컵 결승에서 2:1로 꺾으며, 그의 두번째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66년 5월 7일, 퍼 파크에서 머더웰을 1:0으로 이기고, 레인저스를 2점 차로 따돌리며, 1954년 이래 처음으로 리그 우승 타이틀을 가져왔다. 스타인 부임 후 셀틱은 전 시즌보다 30골을 더 넣었다. 셀틱은 이 시즌에 유럽대항전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준결승에 진출했다. 셀틱은 준결승에서 리버풀 FC에게 합계 1:2로 패했지만, 안필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아쉽게 막판에 실점하며 무릎을 꿇어야 했다.
1966-67 시즌은 셀틱 구단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시즌이었다. 셀틱은 해당 시즌에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96골을 득점했다. 스코틀랜드 풋볼 리그, 스코티시 컵, 스코티시 리그 컵, 글래스고 컵 그리고 유러피언컵까지 우승하며 5관왕을 달성했다. 1966년 10월 29일, 리그 컵 결승에서 레인저스를 상대로 1:0으로 승리하였고, 일주일 후에 열린 글래스고 컵 결승에서는 파틱 시슬 FC를 4:0으로 대파하며 일찌감치 두 개의 대회를 석권했다. 리그는 굉장히 치열했는데, 셀틱은 두 경기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인저스와 끝까지 경쟁하였고, 최종전까지 두 경기 남은 상황 속에서도 접전을 펼쳤다.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레인저스와 경기를 펼치게 되었는데, 이 경기에서 셀틱은 무승부만 거둬도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지미 존스톤이 2골을 기록하며, 2:2를 기록했고, 리그 우승을 가져왔다.
셀틱은 1966-67 시즌에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에 참가했는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참가한 시즌이었다. 첫 두 라운드에서 FC 취리히, FC 낭트를 각각 합계 5:0, 6:2로 가볍게 승리를 가져오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준준결승에 진출한 셀틱의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의 챔피언이었던 FK 보이보디나와 맞붙었고, 1차전에서 1:0으로 패배한 셀틱은 글래스고에서 열린 2차전에서 동점골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보이보디나의 수비는 단단했고, 좀처럼 골이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티비 샬머스가 골을 기록했고, 역전을 위해 계속해서 두드렸지만, 합계 1:1 스코어가 유지되었고,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중립지역인 브뤼셀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후반 막판 빌리 맥닐이 찰리 갤라허의 크로스를 헤더로 마무리하며 극적인 역전에 성공했고, 준결승으로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FK 두클라 프라하와 맞대결을 펼쳤고, 1, 2차전 합계 3:1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했다. 셀틱은 준결승 2차전에서 0:0으로 비겼는데, 극한의 수비 축구를 하며 경기 후 많은 비난이 쏟아지자 스타인은 사과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
|
"Lisbon Lions"
|
결승전은 1967년 5월 25일, 포르투갈 리스본 외곽에 있던 이스타디우 나시오날에서 치러졌고, 상대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였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시작 7분 만에 셀틱은 선제 실점을 허용하게 되었다. 셀틱의 짐 크레이그가 레나토 카펠리니에게 페널티 박스에서 반칙을 범했고, 이 페널티킥을 산드로 마촐라가 마무리하며 인테르가 앞서갔다. 셀틱은 이후 지속적으로 공격을 퍼부으며, 인테르의 골문을 위협했지만 인테르의 골리였던 줄리아노 사르티가 눈부신 선방쇼를 보여줬다. 하지만 후반 63분, 토미 젬멜이 25야드 거리에서 중거리 슛을 날려 동점골을 기록했다. 셀틱은 지속적으로 인테르의 골문을 두드렸고, 결국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놓고, 바비 머독 장거리 슛을 날렸고, 골문 앞에 있던 스티비 샬머스가 발만 갖다대며, 역전골을 기록했고, 경기는 그대로 종료되며, 셀틱이 유럽 챔피언에 올랐다. 영국 팀으로서는 최초로 우승한 기록이고,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 나온 첫 우승이었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긴 방식에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축구를 통해 이 결과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 조크 스타인 -
축구를 통해 이 결과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 조크 스타인 -
셀틱은 클럽 본국의 국적의 선수들로만 구성해 우승한 세 클럽 중 하나이며[6], 팀의 모든 선수들은 셀틱 파크 주변 30마일 이내에서 태어났으며, 이 우승을 통해 ‘Lisbon Lions’로 전 유럽에 알려졌다. 현재 셀틱 파크의 동쪽 스탠드는 리스본 라이온스, 서쪽 스탠스는 조크 스타인이라 명명되어 있다. 주장이었던 빌리 맥닐이 빅 이어를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은 스코틀랜드 축구의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2015년 12월엔 셀틱 파크 앞에 맥닐이 빅 이어을 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졌다.
|
|
빅 이어를 들어올리는
빌리 맥닐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1966-67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
2주 후인 1967년 6월 7일, 셀틱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은퇴 기념 경기를 위해 마드리드로 건너갔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 CF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10만 명 관중 앞에서 기념 경기지만 각각 한 명씩 퇴장 당할 정도로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디 스테파노는 15분 동안 경기를 뛰었고, 관중들은 ‘올레’라고 외치며 응원했지만, 이를 초 친 것은 지미 존스톤이었다. 존스톤은 경기 내내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경기에서 바비 레녹스의 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경기는 셀틱이 1:0으로 승리했다.
다음 시즌인 1967년 10월과 11월에 셀틱은 당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이었던 라싱 클루브와 인터컨티넨탈컵을 치렀다. 첫 경기는 햄던 파크에서 열렸는데, 빌리 맥닐의 골로 1:0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경기는 매우 거칠었고, 상대 선수들이 침을 뱉는 행위를 하는 등 매우 폭력적인 경기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2차전 역시 매우 치열했다. 관중이 쏜 폭죽을 셀틱의 골키퍼였던 로니 심슨이 맞아 존 팰런으로 교체하는 일도 벌어졌다. 셀틱은 그럼에도 전반에 토미 젬멜이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앞서 나갔다. 그러나 후반전에 노베르토 라포와 후안 카를로스 카르데나의 연속골로 1:2 역전을 당하게 된다. 1, 2차전 합계 2:2가 되어 몬테비데오에서 결정전이 열렸다. 경기는 라싱 선수들의 거친 파울과 침 뱉기 그리고 파라과이 국적의 심판의 무능함 때문에 경기는 난장판이 되었다. 셀틱에서 4명, 라싱에서 2명, 무려 양 팀에서 6명의 퇴장이 나왔다. 셀틱의 네번째 퇴장자였던 버티 올드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것을 거부했고, 타미 게멜은 라싱 선수의 성기를 발로 차기도 했다[7]. 라싱은 후반전에 1골을 넣으며 경기는 1:0으로 종료되어 라싱이 인터컨티넨탈 컵의 주인이 되었다. 셀틱의 우승 결정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라싱은 3경기 모두 비매너적인 행위를 많이 했기에 발생했던 일이었다. 조크 스타인은 대회 이후에 “나는 전 세계의 모든 돈을 준다해도 우리 팀을 데리고 다시는 남미 원정을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많이 분노했다.
셀틱은 인터컨티넨탈 컵에서의 트라우마를 뒤로 하고, 1967-68 시즌 역시 레인저스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리그 3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그리고 리그 컵 결승에서 던디를 5:3으로 물리치며, 더블을 달성했다.
1968-69 시즌에 셀틱은 리그, 스코티시 컵, 리그 컵을 모두 우승하며,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했고, 구단 역사상 두번째 트레블을 달성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32년 동안 트레블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셀틱은 1970년에 유러피언컵 결승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는데, 2라운드에서 포르투갈의 벤피카과의 경기에서 3:0으로 승리했고, 준결승에서는 잉글랜드 챔피언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 FC와 만났다. 이는 유럽대항전에서 처음으로 스코틀랜드 챔피언과 잉글랜드 챔피언이 맞붙은 경기였다. 1차전은 엘런드 로드에서 열렸고, 조지 코넬리의 골로 1:0으로 셀틱이 승리했다. 2차전은 햄던 파크에서 열렸는데, 136,505명이 운집했고, 리즈의 빌리 브렘너의 선제골로 리즈가 앞서나갔다. 그러나 셀틱은 후반 2분에 존 휴즈의 헤더로 동점골을 만들었고, 지미 존스톤은 리즈 선수들을 흔들어놨고, 결국 바비 머녹의 강력한 슛으로 골을 기록하며, 2차전도 셀틱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셀틱은 3년 만에 다시 유러피언컵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다.
'''''' | ||||||||||
페예노르트 | 팀 | 셀틱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KR 레이캬비퀴르 | 16:2 승 | 12:2 승 (원정) | 4:0 승 (홈) | 1라운드 | 바젤 | 2:0 승 | 0:0 무 (원정) | 2:0 승 (홈) | ||
밀란 | 2:1 승 | 0:1 패 (원정) | 2:0 승 (홈) | 2라운드 | 벤피카 |
3:3 무 (동전 던지기) 승 |
3:0 승 (홈) | 0:3 패 (원정) | ||
포어베르츠 베를린 | 2:1 승 | 0:1 패 (원정) | 4:2 승 (홈) | 준준결승 | 피오렌티나 | 3:1 승 | 3:0 승 (홈) | 0:1 패 (원정) | ||
레기아 바르샤바 | 2:0 승 | 0:0 무 (홈) | 2:0 승 (원정) | 준결승 | 리즈 | 3:1 승 | 1:0 승 (원정) | 2:1 승 (홈) | ||
4승 1무 3패 (24득점 6실점) | 합계 성적 | 4승 1무 3패 (11득점 5실점) | ||||||||
◀ 1968-69 | 결승 | ▶ 1970-71 |
'''''' | ||
산 시로 (밀라노) | ||
주심: 콘체토 로벨로 (이탈리아) | ||
관중: 53,187명 | ||
|
|
|
페예노르트 | 셀틱 | |
2 | 1 | |
<rowcolor=#000,#fff> 32'
리누스 이스라엘 117' 오베 킨드발 |
|
30' 타미 게멜 |
- | ||
◀ 1969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71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결승전은 밀라노의 산 시로에서 열렸고, 상대는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과의 경기였다. 셀틱이 압도적인 우승 후보로 점쳐졌었고, 타미 게멜이 전반 30분 만에 선제골을 기록하자 큰 이변이 없는 한 셀틱이 우승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셀틱의 선수들은 먼저 실점한 페예노르트에게 오히려 압도당했고, 결국 연장전 끝에 1:2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1970년대 초에는 대니 맥그레인, 케니 달글리시, 데이비드 헤이, 루 마카리, 조지 코넬리 같은 어린 선수들이 등장했는데, 모두 셀틱에서 많은 명예를 얻었고, 스코틀랜드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1972년에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오르게 되었는데, 인테르 나치오날레에게 아쉽게 승부차기에서 패했고, 1974년 준결승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0:2패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 아쉽게 실패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매우 험악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이었던 후안 카를로스 로렌조 때문인데, 그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이었고, 그 당시 잉글랜드의 알프 램지에 의해 ‘동물’이라고 낙인이 찍혔던 인물일 정도로 험악한 인물이었다. 셀틱 파크에서 열렸던 1차전에서 아틀레티코 선수들은 3명이 퇴장 당할 정도로 계속해서 셀틱 선수들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고, 정상적인 경기 운영을 할 수 없게 했다. 결국 0:0으로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경기 후 드레싱룸으로 갈 때 주먹 다짐이 있기도 했다. 마드리드에서 열린 2차전을 앞두고 지미 존스톤은 호텔 전화로 살해 협박을 받았고, 스페인 언론들은 셀틱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를 계속 보도하며, 셀틱 선수들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훈련하는 것도 방해하는 등 선수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결국 아틀레티코는 자신들의 홈에서 2:0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서독의 강호였던 바이에른 뮌헨에게 0:4로 패배하였다.
셀틱은 1973-74 시즌마저 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MTK 부다페스트와 CSKA 소피아가 가지고 있던 세계 기록인 리그 9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시즌엔 리그 우승에 실패하며 10연패의 꿈은 접게 되었다. 하지만 1975년 5월 3일에 스코티시 컵 우승을 차지하며,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경기는 주장인 빌리 맥닐의 셀틱에서의 822번째 경기였고, 경기 시작 전에 그는 팀 동료들에게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할 것이라고 알렸다. 동료들로부터 ‘Cesar’라고 불렸던 맥닐은 셀틱에서만 17년 동안 뛰었고, 셀틱 탄탄한 수비의 중심이었다. 그는 조크 스타인이 리저브 팀 감독 시절이었던 1950년대 말에 셀틱에 합류했고, 스타인이 1965년에 셀틱 1군 감독으로 부임하자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그는 팀의 리더였고, 몇 년 후 인터뷰에서 선수들과 말과 신체적인 싸움이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너무 자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끼리의 기준을 정했고, 만약 이것이 누군가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음..”이라고 말했다. 1975년에 들어올린 스코티시 컵 우승은 그의 선수로서 23번째 우승컵이었다.
1975년 여름에 스타인은 교통사고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다음 시즌을 회복의 시간으로 보냈다. 1976-77 시즌에 복귀하면서, 히버니언의 오랜 주장이었고, 주축 수비수였던 팻 스탠턴을 영입했다. 그리고 얼마 뒤,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알피 콘을 영입했다. 콘은 1970년대 초반에 레인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1972년에 유러피언컵위너스컵을 들어올렸고, 1973년 스코티시 컵 결승전에서 셀틱을 상대로 골을 넣었던 선수였기 때문에 이 영입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레인저스와 셀틱에서 뛴 선수가 되었다. 셀틱은 스탠턴의 수비에 힘입어 리그와 컵을 들어올려 셀틱의 10번째 더블을 달성했다. 셀틱은 리그에서 승점 9점 차로 레인저스를 따돌렸고, 스코티시 컵 결승에서는 앤디 린치의 페널티킥 골로 1:0으로 승리하며, 우승컵을 가져왔다.
다음 시즌은 스타인의 셀틱 감독으로서 마지막 시즌이었는데, 매우 처참한 시즌이었다. 셀틱의 주축 선수 중 한 명이었던 케니 달글리시가 리버풀로 떠났고, 맥그레인, 스탠튼이 장기 부상으로 이탈하여, 리그 5위로 밀려났고, 하부리그에 있던 킬마녹 FC에게 패하며 스코티시 컵에서 탈락했고, 리그 컵 결승에서는 레인저스에게 1:2로 패하며 무관을 보내게 되었다.
1978년 5월, 셀틱의 전 주장이었던 빌리 맥닐은 자신의 팀 동료였던 존 클라크를 수석코치로 두며, 새로운 셀틱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전 감독이었던 조크 스타인은 셀틱에 몇 달 더 머물렀다. 당시 스타인이 이사회 의석을 제안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보도가 있지만, 어느 쪽이든 스타인은 클럽을 운영하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스타인은 그 역할을 선호하지 않았고, 결국 1978년 8월, 리즈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셀틱과의 동행을 끝냈다.
|
|
조크 스타인과 알렉스 퍼거슨 경
|
조크 스타인은 윌리 말리 이후 셀틱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타인은 셀틱을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는 축구팀으로 지위를 회복시켜 놓았고, 전 유럽에서 존경하는 클럽 중 하나로 만들었다. 스타인은 스코틀랜드에서 ‘감독’이라는 개념을 한 차원 더 발전시켰고, 경기를 읽는 능력은 그 시대보다 몇 년 더 앞서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스타인은 모든 동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고, 그의 뒤를 이을 차세대 감독들, 특히 애버딘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경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7. 빌리 맥닐과 데이비 헤이의 시대(1978~1991)
|
|
빌리 맥닐의 감독 시절
|
셀틱의 전 주장이었던 빌리 맥닐이 1978년 8월에 셀틱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대니 맥그레인의 부상 복귀와 데이비드 프로반과 머도 맥레오드의 영입은 지난 시즌 무너졌던 셀틱의 전력 강화에 큰 힘을 보탰다. 1979년 5월, 셀틱의 리그 마지막 경기의 상대는 레인저스였다. 셀틱은 이 경기에서 4:2로 승리를 거두며, 리그 우승을 다시 가져왔다.
다음 시즌 셀틱은 유러피언 컵 8강에 진출했다. 셀틱은 레알 마드리드와 경기를 하게 되었고, 셀틱 파크에서 열린 경기를 2:0으로 승리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2주 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차전에서 0:3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하며, 탈락을 하게 된다. 그리고 리그에서 셀틱은 선두에서 승점 8점을 앞서도 있었지만, 알렉스 퍼거슨의 애버딘에게 역전 우승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1980년 5월에 열린 레인저스와의 올드 펌에서 셀틱이 1:0으로 승리하여, 셀틱 팬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왔고, 다수의 레인저스 팬들도 함께 들어와 싸움이 일어났고, 두 구단은 2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 받기도 했다.
맥닐은 이후 1981년과 1982년에 셀틱의 리그 2연패를 만들어냈고, 이 시기에 찰리 니콜라스, 폴 맥스테이, 팻 보너 같은 유망한 선수들이 등장했다. 특히 이 중 니콜라스는 특출난 선수였는데, 1982-83 시즌에 모든 공식 대회에서 48골을 기록했고, 이 활약을 지켜본 많은 잉글랜드 팀들은 그를 노리기 시작했고, 시즌 말미에 75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아스날로 이적했다.
폴 맥스테이는 1982년 1월 30일에 애버딘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17세의 나이로 데뷔하게 된다. 맥스테이 집안은 셀틱과 깊은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고모부인 윌리와 지미 맥스테이는 둘 다 셀틱의 주장이었고, 지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셀틱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폴의 형인 윌리 맥스테이도 1980년대 초중반에 셀틱에서 뛰기도 했다. 폴 맥스테이는 1군에 데뷔했고, 그는 좋은 활약을 보이며, 국제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
맥닐은 1980년대 애버딘과 던디 유나이티드가 뉴 펌으로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시즌마다 트로피를 따냈다. 그러나 당시 회장이었던 데스몬드 화이트와 찰리 니콜라스를 아스날로 매각하며 받은 이적료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고, 감독과 보드진 사이에 관계가 악화되었다. 맥닐이 보드진과 계약 협상과 임금 인상을 시도했을 때 상황이 이상해졌다. 그는 당시 던디 유나이티드, 애버딘, 레인저스의 감독보다 낮은 연봉을 받고 있었고, 머더웰과 세인트 존스톤의 감독보다도 낮은 연봉을 받았기에 임금 인상 요구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이트는 보도자료를 통해 “맥닐의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해 셀틱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가부되었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굴욕감을 느낀 맥닐은 셀틱을 떠났다. 그는 1983년 6월에 맨체스터 시티 FC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
|
데이비드 헤이의 감독 시절
|
셀틱의 또 다른 전 선수가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데이비드 헤이였다. 1983년 7월에 부임했지만, 첫 시즌은 무관에 그쳤다. 하지만 1983년 여름에 머더웰에서 영입한 브라이언 맥클레어가 32골을 기록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셀틱은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휩싸였는데, SK 라피트 빈과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1차전에서 셀틱은 1:3으로 패하였고, 글래스고에서 열린 2차전에서 셀틱은 3:0으로 이기며 합계 4:3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라피트 빈 구단은 2차전 경기 도중 셀틱 팬들이 동전과 병을 던지는 행위로 인해 빈 선수가 부상을 입었다고 UEFA에게 항소했고, 첫번째 항소는 기각되었지만, 2차 항소는 받아들여지면서 UEFA는 글래스고에서 최소 150km 떨어진 곳에서 재경기를 치르라는 명령을 내렸고,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포드에서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셀틱은 이 경기에서 0:1로 패하며 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셀틱 선수 두 명은 라피트 빈 선수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하였고, UEFA는 셀틱에게 벌금을 부과했고, 다음 시즌에 열리는 유럽대항전에서 셀틱은 홈경기를 비공개로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징계를 내리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UEFA의 부패와 셀틱 보드진의 무능함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었다.
같은 시즌에 셀틱은 처음으로 셔츠 스폰서를 받게 되었다. 파이프 지역에 기반을 둔 회사인 ‘CR Smith’였고, 이 회사의 로고를 셔츠 전면에 새겨 넣었다. 1984년 9월 29일 열린 던디와의 원정 경기에서 처음으로 유니폼에 새겨 출전했다.
1985년 5월, 셀틱이 스코티시 컵 100주년 결승전에서 던디 유나이티드를 2:1로 역전승을 거두며, 데이비드 헤이 감독의 첫 트로피를 만들어냈다.
이듬해, 셀틱은 아주 극적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셀틱은 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세인트 미렌과의 경기에서 3골 혹은 그 이상의 차이로 승리를 해야 했고, 하츠가 던디에게 패배하기를 바라야했다. 셀틱은 전반전에 4:0으로 앞서나갔고, 하츠와 던디의 경기는 득점 없이 전반이 종료되었다. 셀틱은 후반에 5번째 골을 넣었고, 하츠와 던디의 경기에서도 던디가 2:0으로 승리하며, 극적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다음 시즌 레인저스는 신임 선수 겸 감독인 그레이엄 수네스 하에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다. 셀틱은 7점 차로 앞서며 리그를 순조롭게 끌고 갔지만 레인저스에게 역전 우승을 당하며, 허무하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레인저스는 1978년 이후 첫 리그 우승이었다. 그리고 리그 컵 결승에서도 레인저스에게 1:2로 패배했다. 수네스는 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만약 셀틱이 잉글랜드 리그에 참가한다면, 나는 내일 잉글랜드 리그에 지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셀틱은 스코티시 컵에서도 탈락하며, 무관에 그치고 만다. 브라이언 맥클레어가 41골을 득점했음에도 셀틱은 우승 컵 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데이비드 헤이는 1987년 5월 28일 해고되었고, 빌리 맥닐은 다시 셀틱 감독으로 복귀했다.
빌리 맥닐이 셀틱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 그는 여름 동안 선수단에 변화를 주었다. 브라이언 맥클레어, 모 존스톤, 앨런 맥이널리, 머도 맥레오드를 내보냈다. 그리고 데이비 프로반은 건강 문제로 은퇴했고, 베테랑 수비수이자 주장인 대니 맥그레인도 FA로 풀렸고, 믹 맥카시는 데이비드 헤이가 해임되기 몇 주 전에 맨체스터 시티로부터 영입되었다. 맥닐은 셰필드 유나이티드 FC에서 크리스 모리스를 데려왔고, 애버딘으로부터 빌리 스타크, 머더웰에서 앤디 워커 등 3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시즌이 시작된 후에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프랭크 맥아베니를 영입했고, 애버딘으로부터 조 밀러를 영입했다.
로이 에이트켄을 주장으로 임명했고, 셀틱은 다른 팀이 되었다. 31경기 무패행진을 이어갔고, 클럽 100주년 시즌에 역사적인 리그 우승과 스코티시 컵 우승을 하며 더블을 이루어냈다. 워커와 맥아베니는 최전방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고, 폴 맥스테이는 스코틀랜드 선수 협회와 스코틀랜드 기자 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맥닐의 성공적인 행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리그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냈고, 레인저스와의 시즌 첫 올드 펌에서 1:5로 대패했다. 그래도 스코티시 컵 결승에서 레인저스를 1:0으로 꺾으며, 스코티시 컵 타이틀을 지켜냈다.
1989-90 시즌도 실망스러운 시즌이었다. 셀틱의 새 공격수였던 폴란드 국적의 다리우스 지에카노프스키가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와의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1라운드 2차전에서 4골을 기록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리그에서도 형편 없는 모습을 보이며, 5위를 차지했다. 스코티시 컵은 결승에 진출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애버딘에게 우승컵을 내주게 되었다. 그 시즌 중간에 셀틱의 주장이었던 로이 에이트켄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고, 폴 맥스테이가 주장 자리를 이어 받았다.
1990년 5월, 글래스고의 전 시장이었던 마이클 켈리, 부동산 개발업자 브라이언 뎀프시가 셀틱 이사회에 합류하여 회장인 잭 맥긴, 기존 이사였던 크리스 화이트, 케빈 켈리, 제임 파렐, 톰 그랜트와 함께 이사진을 구성했다. 그러나 뎀프시는 피터헤드에서 로브로이스턴으로 이전하자는 제안에 대한 논쟁으로 5개월 후에 이사회의 투표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사건부터 인해 셀틱 이사회는 최악의 구단 운영을 하게 된다.
맥닐의 셀틱은 다음 시즌에도 부진이 이어졌는데, 이로 인해 테리 캐시디 최고 경영자가 맥닐을 해고할 전략을 발표했고, 그의 자리는 더욱 위태로워 졌다. 사면초가에 몰린 맥닐이 1990-91 시즌 말미에 구단을 떠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8. 리암 브래디와 루 마카리의 시대(1991~1994)
|
|
리암 브래디의 감독 시절
|
리암 브래디는 맥닐이 떠난 직후 셀틱의 감독을 맡았고, 약 100년 역사상 8번째 감독이 되었다. 선수 시절 아스날, 유벤투스에서 뛰었고, 아일랜드 국가대표 선수로서 많은 성공을 거뒀음에도 감독으로서는 어떠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감독이었다.
브래디는 첫 시즌 이적 시장에서 여러 선수를 영입했다. 1991년 여름에 아스톤 빌라 FC로부터 클럽 레코드 기록인 110만 파운드로 토니 카스카리노를 영입했다. 카스카리노는 셀틱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1992년 2월에 첼시의 수비수 톰 보이드와 트레이드 되었다. 셀틱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리버풀의 수비수인 게리 길레스피를 92만 5천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그러나 길레스피는 거친 스코틀랜드 무대에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브래디는 몇 달 후 미들즈브러 FC의 토니 모브레이와 계약을 맺으며 수비를강력하게 보강했다. 불행하게도 길레스피와 모브레이는 둘 다 부상으로 인해 두 선수가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많이 선보이지 못했다.
1991년 10월 23일, 스위스의 뇌샤텔 크사막스 FCS와의 UEFA 컵 16강 1차전 원정에서 셀틱은 1:5로 대패를 당하며 망신을 당했고, 셀틱 파크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1:0으로 간신히 승리하였으나, 합계 2:5로 뒤지며 탈락하게 된다. 셀틱은 1992년 5월에 레인저스와 하츠에 이어 리그 3위를 차지했고, 리그 컵 8강에서 에어드리에게 승부차기에서 패배했고, 스코티시 컵 준결승에서는 10명이 뛴 레인저스에게 패했다.
이후 셀틱은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생겼다. 지난 시즌의 실패로 인해 구단 셔츠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였다. 마케팅 매출 손실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레플리카 판매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회장이었던 테리 캐시디는 계속해서 논란을 만들었고, 결국 1992년 10월 26일에 해임되었다.
브래디는 1992-93 시즌 시작 전에 수비수 에릭 와이트와 크리스 모리스를 이적시켰고, 스튜어트 슬레이터와 앤디 페이턴을 잉글랜드에서 영입했다. 셀틱은 이전 시즌보다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리그 컵 준결승에서 애버딘에게 패배했고, 스코티시 컵에서는 폴커크에게 0:2로 패배, 리그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UEFA 컵에서는 독일에서 열린 FC 쾰른과의 1차전에서 0:2로 패배했지만 2차전인 홈에서 3:0으로 만회하면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이 경기에서 3번째 골을 넣었던 존 콜린스는 빌리 맥닐이 이끌고 있던 히버니언으로 1990년에 이적했지만 평범한 시즌을 보낸 후 브래디가 영입했고, 셀틱에서 만족할만한 활약을 했다. 브래디 재임 기간 동안 성공한 몇 안되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1993년 여름, 스코틀랜드 태생의 캐나다인 사업가인 퍼거스 맥캔은 셀틱을 인수하려는 여러 개인과 컨소시엄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는 현재 셀틱 이사진을 해체하는데 노력하던 몇 몇 사람들과 함께 ‘반역자들’로 불리게 되었다.
셀틱은 1993-94 시즌 다시 유니폼 스폰서를 구하게 되었고, ‘CR Smith’와 다시 계약을 맺게 되었고, 4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셀틱은 여전히 기진맥진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1993년 10월에 세인트 존스톤과의 리그 경기에서 패배한 후 셀틱을 떠났다.
|
|
루 마카리의 감독 시절
|
1993년 10월 27일, 루 마카리가 셀틱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셀틱은 여전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셀틱 파크에서 열린 새해 첫 경기였던 레인저스와의 올드 펌에서 2:4 참패를 당했다. 마카리는 겨울 이적 시장에 몇 명의 선수를 영입했지만, 그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셀틱에서 몇 라운드 동안 꾸준히 득점한 선수였던 케리 크리니는 갑자기 몇 라운드 동안 주전 자리를 잃고, 포츠머스 FC로 60만 파운드에 매각되었다. 윌리 팔코너는 셰필드 유나이티드, 리 마틴과 칼 머글턴은 잉글랜드 북쪽에서 셀틱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마카리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는데 앤디 페이튼을 반즐리의 웨인 비긴스와 트레이드를 맺은 선택을 한 것이었다.
1994년 1월, 머더웰에서 열린 스코티시 컵 조기 탈락으로 셀틱은 또 다시 우울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서 열린 경기들은 탄력을 받고 있었다. 페르구스 맥칸과 제럴드 바이스펠드가 이끄는 두 컨소시엄이 셀틱을 인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그런데 셀틱 이사회는 갑자기 캄부슬랑에 새 경기장을 짓는 계획을 추진했다. 1994년 2월 25일, 셀틱은 기자회견을 열고 스위스 상업은행인 제피노르를 통해 새 경기장 건립을 위한 자금이 마련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날 오후 제피노르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부인했고, 같은 날 저녁 스코틀랜드 TV와 라디오 매체들은 셀틱 이사회를 조롱했다.
그 후 며칠동안 셀틱 이사회가 해체될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스코틀랜드 은행은 1994년 3월 3일에 셀틱의 이사회를 소집하여 24시간 이내에 100만 파운드의 보증서를 내지 못한다면 클럽 업무를 마무리하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다음 날, 퍼거스 맥칸은 새 감독진을 선임하면서 셀틱의 새 구단주가 되었다. 전직 이사이자 이사진 변화 운동에 크게 관여했던 브라이언 뎀프시는 맥캔 인수를 돕기 위해 100만 파운드를 자신의 돈으로 낼 것을 약속하고 “반군이 승리했다”고 말했다.
9. 퍼거스 맥칸의 시대(1994~1999)
|
|
셀틱을 안정궤도에 올려놓은 맥칸
|
스코틀랜드 은행은 1994년 3월 3일, 셀틱은 500만 파운드의 대출 빚으로 인해 파산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사업가였던 퍼거스 맥칸은 셀틱 창단 이래 계속해서 구단을 보유하고 있던 가문에게 구단 지배권을 넘겨 받아 900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셀틱을 인수한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맥칸은 셀틱이 파산 선고를 받기 몇 분 전에 클럽을 인수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셀틱은 700만 파운드의 빚을 진 것으로 추산되었고, 셀틱 파크의 관중수가 종종 2만 명이하로 떨어질 때도 있었다. 이상했던 이전 이사회는 “시즌 티켓은 여러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7,000장으로 시즌 티켓을 제한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했었다. 또한 인수 직전에 이사진들은 구단의 사정에 비해 무리한 금액을 요구하여 맥칸이 분개하기도 했다.
맥칸은 클럽의 부채를 경감하기 위해 맥칸의 개인 소유였던 셀틱 앤 애슬레틱 유한회사를 공공 유한 회사인 셀틱 PLC로 재건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맥칸은 주식 발행을 개시하여 영국 금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주식 시장 부양 중 하나인 1,400만 파운드를 창출해냈다.
9.1. 타미 번스의 부임
|
|
스코티시컵을 들고 있는 번스
|
루 마카리는 결국 해임되었고, 1994년 여름에 전 셀틱 선수였던 타미 번스가 감독으로 부임되었다. 그의 수석 코치는 빌리 스타크였다. 전 셀틱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헤이도 수석 스카우터로 복귀했다. 셀틱 파크의 재개발로 인해 셀틱은 새로운 시즌 홈 경기를 햄던 파크에서 치르게 되었다. 셀틱은 그 시즌에 부진했지만, 1995년 5월 27일, 스코티시 컵 결승에서 에어드리에게 1:0으로 승리하며 6년 만에 첫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당시 결승골을 넣은 선수는 네덜란드 국적의 피에르 판호이동크였다. 그는 이 골을 넣기 몇 달 전에 NAC 브레다에서 120만 파운드로 영입한 선수였다.
다음 시즌엔 셀틱 파크에서 다시 홈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전 동독 국가대표였던 안드레아스 톰을 당시 클럽 최고 이적료였던 220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영입했다. 프리시즌 동안, 수비수 토니 모브레이가 선수들의 동료애와 단결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선수들을 옹기종기 모이게 하여 말로써 사기를 증진시켰다. 비록 모브레이는 몇 달 뒤 팀을 떠났지만 이것이 팀의 전통이 되어 경기 시작 전 항상 행해졌다. 토미 번즈는 새로운 시즌에 측면 공격을 위주로 하는 공격적인 스타일의 축구를 구사했고, 이것이 성공적으로 먹혔다. 그리고 폴 맥스테이와 존 콜린스의 미드필더 듀오는 셀틱의 매력적인 축구에 필수적인 요소였고, 재키 맥나마라와 사이먼 도넬리의 오른쪽에서의 연게 플레이는 찬사를 받았다. 셀틱은 1995-96 시즌에 리그에서 단 한 경기만을 패했지만, 레인저스의 리그 8연패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96-97 시즌에 셀틱은 레인저스가 9년 연속 우승을 하여 셀틱의 기록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팬들로부터 받았다. 맥칸은 검소했지만 팬들과 언론들의 비난을 인식하여 시즌 시작 전 여름에 포르투갈 국적의 호르헤 카데테와 이탈리아의 파올로 디카니오를 영입하면서 전력을 보강했다.
1996-97 시즌 동안 토미 번스는 레인저스의 9연패를 막아야 했기 때문에 언론의 집중적인 감시와 팬들의 압력에 시달렸다. 반 호이동크, 카데테, 디 카니오가 뛰어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셀틱은 고군분투했다. 존 콜린스는 시즌 시작 전 AS 모나코로 떠났고, 폴 맥스테이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새로 영입한 선수들의 뛰어남은 셀틱의 경기 결과까지 바꿀 수는 없었고, 결국 레인저스는 리그 9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조크 스타인이 세운 9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셀틱은 컵 대회에서도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하며, 무관에 그쳤다.
맥칸은 당시 “Three Amigos”라고 불렸던, 반 호이동크, 카데테, 디 카니오와 계약적인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맥칸은 이 외국인 선수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팬들의 실망을 무릅쓰고, 매각해버렸다.
1996-97 시즌이 끝나지 3주 전, 번스는 경질이 되었고, 남은 코칭 스태프들도 시즌 말미에 팀을 떠났다. 그리고 언론들은 여름에 새로운 감독으로 여러 감독들을 물망에 올렸지만, 맥칸은 네덜란드 국적의 빔 얀선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게다가 셀틱은 전통적인 감독을 폐지하고 매니징, 전술 그리고 팀 선발을 담당하는 감독(얀선)과 계약과 일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총 감독, 이렇게 두 가지의 감독으로 나누게 되었다. 총 감독은 사무 변호사이자 전 축구 해설위원이었던 조크 브라운이 임명되었고, 이는 다소 논란이 되었다. 데이비드 헤이는 수석 스카우터에서 수석 코치로 보직을 옮겼고, 전 셀틱 선수였던 무르도 맥레오드는 얀선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9.2. 얀선의 지도 하에 리그 타이틀을 가져오다
|
|
라르손과 얀선
|
1997년 여름에 셀틱 선수단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선수였던 대런 잭슨과 크레이그 벌리가 얀센의 첫 영입이었고, 네덜란드의 윙어 레지 블링커, 덴마크의 중앙 수비수 마르크 리퍼 그리고 셀틱의 역사를 바꿀 한 선수를 영입하는데, 페예노르트의 스웨덴 국적 공격수였던 헨리크 라르손을 65만 파운드로 영입하게 되었다. 또한 브래드포드 시티 AFC의 2군 골키퍼였던 조너선 굴드도 헐 값에 데려왔다. 그러나 주장이었던 폴 맥스테이는 부상으로 인해 15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멈추고 은퇴하였다. 그는 셀틱에서 678경기를 출전했다.
레인저스는 그해 여름에도 많은 보강을 하였고, 1997-98 시즌 역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며 시즌을 시작했다. 셀틱은 처음 두 번의 리그 경기에서 패하면서 형편없는 출발을 했지만, 곧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크 리퍼와 앨런 스터브스는 중앙 수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크레이그 벌리는 중원에서 활력을 불어넣으며, 중요한 골들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조너선 굴드는 팀의 퍼스트 골키퍼가 되었고,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헨리크 라르손은 인상적인 출발을 하지 못했는데, 히버니언과의 리그 데뷔전에서 부주의한 패스로 결승골을 내주었고, UEFA 컵에서 자책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르손은 곧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선수가 되었다.
1997년 11월, 레인저스와의 올드 펌에서 경기 내내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후반 추가 시간에 앨런 스터브스의 동점골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새해 첫 날에 열린 올드 펌에서는 크레이그 벌리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영입한 폴 램버트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후 몇 달 동안 셀틱과 레인저스는 리그 최상위권에 위치했지만, 시즌 막판으로 갈 즈음부터 두 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셀틱은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세인트 존스톤을 2:0으로 이기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타이틀을 가져오게 되었다.
셀틱의 우승에도 불구하고, 빔 얀선은 조크 브라운과 퍼거스 맥칸과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우승 확정 후 이틀 뒤에 사임하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브라운은 악당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수석코치였던 데이비드 헤이도 시즌 초반 브라운에 의해 경질되었고, 맥레오드 역시도 얀센 사임 후 일주일 뒤 사임되었다.
9.3. 벵글로시의 부임
|
|
비운의 감독 벵글로시
|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가 처음 시작되는 1998-99 시즌을 앞두고 얀선 감독의 후임으로 많은 명장들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슬로바키아 출신의 요제프 벵글로시 감독이 부임했다. 많은 팬들은 구단의 이 결정에 많은 실망을 했는데, 셀틱에 부임하기 몇 년 전에 아스톤 빌라 FC에서 부진했기 때문이다. 벵글로시 감독 부임 후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컵, 스코티시 리그컵에서 모두 조기 탈락했고 리그 초반 부진으로 인해 언론에 많이 이름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가 영입한 선수들의 부진이 이어져 선수를 보는 안목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그를 데려온 조크 브라운이 사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이 어느 정도 지나고 늦가을 정도 되었을 때 헨리크 라르손, 마크 비두카 등의 활약으로 레인저스 FC를 5:1로 대파하면서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올드 펌 승리 이후 벵글로시는 좋은 축구를 펼치게 되었고, 라르손을 매우 잘 활용하였고 라르손은 이 시즌에 38골을 기록했다. 벵글로시의 셀틱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끝내 레인저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스코티시컵 결승에서도 레인저스에게 패배하면서 우승을 내주었다.
시즌 종료 후 벵글로시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였고, 잠시동안 구단의 고문과 스카우터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팬들은 그의 반자리를 그리워 하기도 했다.
1999년 3월, 1996년 셀틱으로 합류한 호르헤 카데테 영입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시간을 지연했다는 이유로 당시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 짐 페리가 해임되었다. 그 당시 카데테 영입 지연으로 인해 셀틱 소속으로 출전할 수 있었던 몇 경기를 놓쳤고, 이 경기 중에 레인저스와의 스코티시컵 준결승 경기도 있었다. 셀틱은 당시 레인저스에게 1:2로 패배했다. 그래서 퍼거스 맥칸은 이 문제에 대해 축구 협회에 불만을 제기했고, 독립위원회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로부터 약 3년 뒤인 1999년에 위원회는 당시 회장이었던 페리의 중대한 위법 행위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고, 이 판결이 나오고 며칠 후 해임되었다.
셀틱의 구단주였던 퍼거스 맥칸은 1994년에 셀틱을 인수하면서 5년 동안만 구단을 소유할 것이라고 밝혔었다. 그리고 1999년 9월, 맥칸은 구단을 매각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맥칸이 오기 이전에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셀틱은 맥칸이 구단을 인수한 후 셀틱 파크를 6만석 규모의 재개발을 완료했고, 클럽의 재정 상황을 안정적으로 만들었고 암흑기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서 큰 공을 세웠기에 많은 팬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맥칸이 구단을 매각한 후 구단 지분의 20%를 보유하게 된 더못 데스몬드가 최대주주가 되었고, 앨런 맥도날드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0. 마틴 오닐의 집권(1999~2005)
|
10.1. 반스 & 달글리시
|
|
최악의 셀틱이라 평가 받는 존 반스의 셀틱
|
셀틱 역사에 있어서 1999-2000 시즌은 역사상 최악의 시즌 중 하나로 여겨진다. 구단의 레전드인 케니 달글리시가 총감독 자리로 들어왔고, 리버풀 FC와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였던 존 반스가 감독 자리에 부임했다.
반스는 셀틱 부임 이전에 한 번도 프로 구단을 지휘해 본 적이 없었고, 1999-2000 시즌 겨울 휴식기 이후에 팀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올림피크 리옹과의 UEFA 컵에서 패배해 탈락했고, 리그 선두 자리도 레인저스에게 내주게 되었다. 결국 팬들은 반스의 경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000년 2월 8일, 셀틱은 인버네스 캘리도니언 시슬 FC와 스코티시컵 홈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인버네스는 1994년 이후로 리그에서 4위권 이내의 성적을 계속 유지하던 강팀이었지만 셀틱은 인버네스에 비하면 전력적으로 우세하다는 평가를 받던 팀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셀틱의 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인버네스는 3:1로 승리를 거뒀고, 이 패배로 100명이 넘는 셀틱 팬들이 경기장 밖에서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이 경기가 끝난 후 기자회견을 거부했던 존 반스는 다음 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하프타임 당시 마크 비두카와 언쟁이 있었고, 이것이 팀을 불안하게 만들어 패배한 것이라며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반스는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
|
임시 감독 시절 달글리시
|
반스의 해임으로 공석이 된 감독직은 케니 달글리시가 임시 감독이 되었고, 이전에 셀틱에서 감독 생활을 했던 타미 번스를 코치로 데려왔다. 달글리시는 셀틱 서포터들의 큰 지지를 받았지만 리그에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시즌 종료 후 선두 레인저스와의 승점 차는 21점이나 벌어졌다. 다행히 애버딘 FC와의 스코티시 리그컵 결승에서 승리를 거두며 트로피를 하나 가져왔지만 클럽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10.2. 마틴 오닐 부임
|
|
조크 스타인 이후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셀틱
|
존 반스 경질 이후 거스 히딩크가 유력한 후임으로 떠올랐지만 히딩크는 셀틱 감독직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대주주였던 더모트 데스몬드의 개입으로 인해 당시 레스터 시티 FC의 감독이었던 마틴 오닐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2000년 6월, 마틴 오닐이 셀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달글리시 임시 감독 체제가 끝났고, 당시 총감독으로 부임 중이었던 달글리시는 6월 말에 경질되었다. 그리고 총감독/감독 체제를 사용 중이었던 셀틱은 이 체제를 없애고 전통적인 감독 자리만 두는 것으로 결정했다.
오닐 감독 부임 후 2000년 여름 이적시장이 시작되자 첼시 FC에 600만 파운드를 지불하며 클럽 레코드로 크리스 서튼을 영입했고, 마크 비두카를 리즈 유나이티드 FC에 매각했다. 그리고 허술한 수비진 보강을 위해 요스 볼가렌을 영입했다.
오닐이 영입한 선수들은 빠르게 셀틱에 녹아들었고, 던디 유나이티드 FC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서튼이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2:1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아스톤 빌라 FC에서 앨런 톰슨을 영입했고, 오닐이 레스터에서 지도하던 닐 레넌을 영입하면서 더욱 스쿼드를 보강했다. 이 시즌에 셀틱은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스코티시컵, 스코티시 리그컵을 우승하면서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했다. 오닐은 조크 스타인에 이어 두번째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한 감독이 되었다. 이 시즌에 올드 펌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스코틀랜드 내에서의 패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닐의 데뷔 시즌엔 새로 영입한 선수들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기존에 있던 자원들 역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선수는 역시 헨리크 라르손이었다. 모든 대회에서 53골을 기록하였고, 리그에서만 35골을 기록하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다. 그리고 라르손은 SPFA와 스코틀랜드 축구 기자 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또한 스틸리얀 페트로프 역시 SPFA 올해의 영플레이어상을 수상한 최초 외국인 선수가 되기도 했다.
10.2.1. 유럽 무대에서의 임팩트
|
|
UEFA컵 준우승을 거둔 셀틱
|
셀틱은 2001-02 시즌이 들어서면서 스쿼드 보강에 더욱 힘을 썼다. 이 시즌에 보보 발데와 존 하트슨을 영입했다.
2001년 8월 8일, 셀틱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AFC 아약스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1차전에서 엄청난 모습을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1차전에서 셀틱은 전반전에 바비 페타와 디디에 아가테가 득점을 하며 전반에만 2:1로 앞섰고, 후반전 들어서 크리스 서튼이 세번째 골을 작렬하면서 암스테르담 원정에서 3:1 승리를 거두었다. 셀틱 홈에서 열린 2차전은 0:1로 패배했지만 1차전에서 두 점 차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룹 스테이지로 진출했다. 셀틱의 이 조별리그 진출은 유러피언컵에서 챔피언스리그로 개편된 이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2001년 9월 18일, 셀틱은 토리노에서 열린 유벤투스와의 경기를 통해 챔피언스리그 데뷔전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2골 차로 뒤지고 있던 것을 2:2까지 만들어냈지만 경기 막판에 페널티킥을 내주며 2:3으로 패배했다. 셀틱은 이후 홈에서 열린 FC 포르투와 로센보르그 BK와의 2연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치러진 포르투와 로센보르그 원정에서는 패배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셀틱 파크에 유벤투스를 불러들였다. 크리스 서튼과 루보미르 모라브치크의 맹활약으로 4:3 승리를 거두며 1차전 패배 설욕에 성공했다. 셀틱은 이 승리를 통해 승점 9점을 챙겼지만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다. 결국 3위로 UEFA 컵에 출전하게 된다. UEFA 컵에서 발렌시아 CF를 만나게 됐는데, 발렌시아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0:1로 패배했지만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1:0 승리를 거두었고,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셀틱은 레인저스와의 격차를 18점으로 벌리며 리그 타이틀을 따냈는데, 20년 만에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 알렉스 매클리시의 레인저스에게 스코티시 리그컵 4강전과 스코티시컵 결승에서 고배를 마시며 리그 타이틀만 가져오게 됐다.
오닐의 세번째 시즌인 2002-03 시즌은 국내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거둔 시즌이었지만 모든 셀틱 팬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었을 것이다.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FC 바젤과 만났는데, 원정 다득점에 의해 탈락하며 UEFA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UEFA 컵 1라운드는 FK 수두바와의 경기였는데 1, 2차전 합계 10:1로 물리치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2라운으에서 만난 팀은 전 레인저스 선수였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이끄는 블랙번 로버스였다. 셀틱 홈에서 치른 1차전에서 셀틱은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였지만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헨리크 라르손이 골을 터트리며 1:0으로 경기를 마치며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2차전은 블랙번의 홈인 이우드 파크에서 열렸는데, 경기 시작 14분 만에 라르손이 선제골을 넣으며 순조롭게 경기를 시작했고, 크리스 서튼의 추가골까지 나와 1, 2차전 합계 3:0으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3라운드에서 만난 팀은 셀타 비고였다. 셀틱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라르손의 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2차전에서는 1:2로 패배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셀틱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이 진출로 셀틱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스페인 팀을 탈락시킨 사례가 되었고, 23년 만에 크리스마스 이후에도 유럽대항전에서 살아남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4라운드는 VfB 슈투트가르트를 만났다. 셀틱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3:1로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서는 2:3으로 패배했으나 합계 5:4로 앞서 셀틱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준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리버풀이었다. 셀틱 홈에서 치러진 1차전에서 라르손이 1분 만에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이후 실점하며 1:1 무승부를 거두게 됐다. 1차전에 리버풀의 공격수인 엘 하지 디우프가 셀틱 팬에게 침을 뱉는 행동을 해 글래스고 보안 법원에서 5,0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안필드에서 치러진 2차전은 앨런 톰슨의 프리킥 골과 존 하트슨의 중거리 골로 셀틱이 2:0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셀틱은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유럽대항전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는 포르투갈의 보아비스타였다. 셀틱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거두었고, 포르투갈 원정에서 치른 2차전에서 80분에 라르손이 골을 집어넣으며 UEFA컵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2003년 5월, 80,000명 이상의 셀틱 팬들이 결승전이 열리는 세비야로 모였다. 셀틱은 헨리크 라르손의 2골에도 불구하고 연장 끝에 2:3으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패배의 원인으로 보보 발데가 늦은 시간에 퇴장과 포르투 선수들이 시간 지연을 하는데 주심이 방관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세비야의 방문한 수천 명의 셀틱팬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세비야 사람들에게 널리 찬사를 받았고, 이에 셀틱 팬들은 “매우 충성스럽고 스포츠적인 행동”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FIFA와 UEFA로부터 페어플레이상을 받았다.
10.2.2. 계속된 성공
셀틱은 2003-04 시즌에도 리그에서 강세를 보여주었다. 2위와의 승점 차를 18점 차로 벌리며 우승했고, 득점도 100골 이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리그에서 25경기 연속 승리라는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영국 축구 역사상 최다 리그 연승 기록으로 인정 받았다. 또한 이 시즌에 라이벌 레인저스에게 5전 전승을 기록했다.이 시즌에 셀틱은 지난 시즌과 다르게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조에서 3위를 기록해 다시 UEFA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UEFA컵에서 FK 테플리체를 꺾고 16강에 진출했는데 상대는 스페인의 강호 FC 바르셀로나였다. 셀틱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앨런 톰슨의 극적인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하프타임 동안 셀틱의 골키퍼인 랍 더글라스와 바르셀로나의 티아고 모타 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두 선수 모두 퇴장 당하며 다음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2차전은 19세의 어린 골키퍼인 데이비드 마셜이 장갑을 끼고 나왔고, 보보 발데의 출장 정지로 인해 어린 수비수인 존 케네디가 출전했다. 어린 선수들의 출장이었기에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루이스 엔리케와 루이스 가르시아를 상대로 마셜이 눈부신 선방을 보여줬고, 케네디 역시 환상적인 태클을 선보이며 셀틱의 준준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하지만 준준결승에서 비야레알에게 합계 1:3 패배를 기록하며 유럽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스코티시컵은 비교적 쉽게 결승까지 진출했다. 2004년 5월 22일, 던펌린 애슬레틱과의 결승전이 열렸고, 이 경기가 라르손의 셀틱에서 마지막 경기였다. 라르손은 이 경기에서 두 골을 집어넣었고, 셀틱은 3:1로 승리를 거두며 리그에 이어 더블을 달성했다.
2004-05 시즌은 오닐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이 시즌엔 근 몇 시즌 간 보지 못했던 불안함이 존재했다. 시즌 초반에 선두를 달렸고 2004년 8월에 펼쳐진 올드 펌에서도 승리하며 7경기 연속 올드 펌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머더웰과의 경기에서 승리가 필요했지만 1:2로 패배하며 우승을 레인저스에게 내주고 말았다. 또한 스코티시컵도 결승에서 던디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 시즌을 끝으로 오닐은 셀틱을 떠나게 되었다.
마틴 오닐은 유러피언컵을 들어올렸던 리스본 라이언스 이래 가장 성공적인 팀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셀틱은 오닐의 5년 간의 지도하에 3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고, 우승을 하지 못한 두 시즌도 1골의 골득실 차와 승점 1점 차로 각각 우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또한 3번의 스코티시컵과 한 번의 리그컵 우승을 들어올렸다. 유럽대항전에서는 유벤투스, 포르투,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등이 셀틱을 상대하기 위해 글래스고를 방문했다가 패배하기도 했다. 그는 연장전 끝에 패배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유럽대항전 준우승을 거두었고, 셀틱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77경기 무패 행진을 달성했으며, 한 시즌 최다 연승 기록도 세웠다. 그가 있는 동안에 셀틱의 승률은 무려 75%였으며, 이는 셀틱 역사상 가장 높은 기록이다. 결론적으로 오닐은 조크 스타인 이후에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라 평가해도 무방하다.
11. 고든 스트라칸과 토니 모브레이의 시대 (2005~2010)
|
|
닐 레넌과 고든 스트라칸
|
2005년 6월, 전임 감독이었던 마틴 오늘의 추천으로 고든 스트라칸이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스트라칸은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는데, 선수단은 좋았지만 나이가 많고 라르손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워야할 지에 대한 문제였다. 스트라칸의 스타트는 매우 좋지 않았다.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슬로바키아의 아르트메디아 브라티슬라바에게 0:5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이 패배는 셀틱의 유럽대항전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그러나 셀틱은 빠른 시간 안에 폼을 되찾았고,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창설 이후 가장 빠른 시간에 우승을 확정지었고, 리그컵도 들어올리며 더블을 달성했다. 특히 이 시즌에 유망주였던 숀 말로니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이 시즌의 활약으로 PFA 스코틀랜드로부터 올해의 선수상과 올해의 영플레이어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시즌 평균 관중이 58,149명이었는데, 이 기록은 영국 내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다음으로 많은 기록이었다.
2006-07 시즌에도 선수단의 임금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오닐 감독하에서 매시즌마다 40골 이상을 만들어줬던 존 하트슨과 크리스 서튼 대신 더 싸고 어린 선수들로 대체되었다. 이 시즌 겨울이적시장 전까지 셀틱은 2위인 레인저스보다 승점 19점이나 앞선 채 선두를 달렸지만 선수단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후반기에는 폼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2007년 4월 22일, 킬마녹과의 리그 경기에서 경기 종료 1분을 남겨두고 나카무라 슌스케가 25야드 거리에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2:1 역전에 성공했고, 이 경기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2006-07 시즌은 또한 스트라칸의 지도하에 챔피언스리그로 개편 이후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한 시즌이기도 하다. 셀틱 홈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나카무라 슌스케의 환상적인 프리킥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셀틱은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셀틱은 16강에서 이 시즌 챔스 우승팀인 AC 밀란을 만났는데, 1차전 무승부 이후 2차전에서도 0:0으로 이어지며 연장까지 갔지만 연장에서 카카에게 실점하며 아쉽게 탈락했다. 그리고 2007년 5월 26일, 스코티시컵 결승에서 던펌린을 1:0으로 꺾으며 더블을 달성했다.
2007년 9월 28일, 존 리드가 셀틱의 회장으로 내정되었고 11월 7일에 브라이언 퀸에 이어 회장에 부임했다. 리드는 어린 시절부터 셀틱을 응원했고,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임명은 다수의 주주들에 의해 승인되긴 했지만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영국 정부에서 그가 맡았던 임무 때문에 많은 팬들은 셀틱의 연례 총회에서 그의 부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2007-08 시즌, 스트라칸의 세번째 시즌은 더욱 변화되었다. 주장이었던 닐 레넌이 떠났고 스티븐 맥마너스가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5월에 히버니언으로부터 스콧 브라운을 44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이 이적료는 스코틀랜드 구단 간에 지불된 가장 큰 이적료였다. 머더웰의 스트라이커인 스콧 맥도날드 또한 70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셀틱 파크에 입성했다.
이 시즌에 셀틱은 SPL 우승을 놓고 레인저스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셀틱은 시즌 초반에 선두를 달렸지만, 겨울과 이른 봄에 좋지 않은 결과가 잇따르면서 레인저스가 선두로 치고 올라갔다. 2008년 3월 31일, 케빈 톰슨의 골로 셀틱은 레인저스에게 0:1로 패배했고, 셀틱은 레인저스와 6점 차가 6점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1군 코치이자 구단의 레전드였던 타미 번스가 흑색종으로 인해 코치직을 그만두었고, 닐 레넌이 이 자리를 대체했다. 4월 16일, 다시 올드 펌이 열렸는데 이 날 셀틱은 극적으로 폼이 회복되었고, 전반에 나카무라 슌스케가 30야드 거리에서 골을 집어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레인저스는 후반 초반에 나초 노보가 동점골을 기록했지만, 나카무라의 슈팅을 수비수인 카를로스 쿠엘라가 손에 맞으며 퇴장당했다. 이 파울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페널티킥이 선언되었고, 스콧 맥도날드가 처리했지만 앨런 맥그레거가 이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그러나 후반 인저리 타임에 얀 페네호르오프헤셀링크가 역전골을 기록하며 극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셀틱은 이 승리로 다시 레인저스와의 승점 차를 좁혔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리그 선수 자리를 탈환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스트라칸이 셀틱에 부임한 후 3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셀틱의 조크 스타인과 애버딘의 윌리 말리만이 가지고 있던 기록이었다. 또한 이 우승은 리그 마지막 경기 전 주에 사망한 셀틱의 레전드이자 감독과 코치로서 헌신했던 타미 번스를 위한 우승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즌에 챔피언스리그에 다시 참가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셀틱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예선에서 꺾으며 그룹 스테이지에 안착했다. 셀틱은 AC 밀란, SL 벤피카 그리고 샤흐타르 도네츠크와 같은 조에 속해 3승 3패를 기록하며 전 시즌에 이어 녹아웃 스테이지에 진출했다. 16강에서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나름 선전했지만 합계 2:4로 밀려 탈락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셀틱은 리그컵 결승에서 레인저스를 2:0으로 꺽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SPL 우승은 실패했고, 2008-09 시즌이 스트라칸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
|
셀틱 감독 시절 모브레이
|
2009년 6월 16일, 토니 모브레이가 새롭게 선임되었다. 모브레이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셀틱에서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부임 후 당시 티키타카로 유명했던 바르셀로나의 스타일로 축구를 할 것이고 더 공격적인 축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셀틱은 이전 시즌에 준우승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룹 스테이지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2번의 예선전을 거쳐야했다. 홈에서 열린 디나모 모스크바와의 경기에서 0:1로 패배했지만, 모스크바 원정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셀틱이 유럽대항전에서 홈에서 먼저 패배한 후 원정에서 승리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선 다음 라운드의 상대는 아스날이었고,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0:2로 패배,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 1:3으로 패배하며 합계 1:5로 그룹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이 시즌 8월에 FC 서울의 기성용을 겨울 이적시장에 데려온다는 사전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챔피언스리그 탈락 이후 셀틱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셀틱은 리그 내 약체들에게 점수를 내주기 시작했고,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조별리그 탈락을 했다. 이에 셀틱은 겨울 이적시장에서 스쿼드 정리를 단행했다. 주장이었던 스티븐 맥마너스를 미들즈브러로 임대를 보냈고, 스콧 맥도날드, 배리 롭슨, 대니 폭스 그리고 몇몇 선수들을 팀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FC 서울에서 기성용을 영입했고, 토트넘 홋스퍼와 풀럼으로부터 로비 킨과 디오만시 카마라을 임대영입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좋지 않은 성적이 지속되었고, 결국 2010년 3월 24일에 세인트 미렌에게 0:4로 패배한 후 모브레이는 경질되었다. 그리고 남은 잔여 시즌을 닐 레넌이 이끌었다.
12. 2011-12 시즌
2009-10 시즌 후반기에 기성용이 셀틱에 입단했고, 2010-11 시즌에 좋은 활약을 보이며 주전으로 발돋음 했고, 같은 시기에 차두리까지 영입되며, 국내에서 셀틱의 인지도가 가장 높은 시기였다.리그 우승을 일찌감치 차지한 시즌이 되었다. 라이벌 레인저스가 자본 문제로 승점을 10점이나 감점되었기 때문. 게다가 레인저스가 구단주의 탈세 삽질 이후 벌금 및 엄청난 양의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강제 정리당하고 4부 리그에 새로운 클럽을 만들어 계승하면서 당분간 셀틱이 우승 독주가 계속 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이전부터 논의되어 온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의 이전까지 다시 거론되었지만 만약 이전할 경우 3부 리그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상황에 온갖 견제가 있을 예정이라서 말이 많고 갈등도 많다. 셀틱이 나간다면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는 완전히 무너질 상황이기 때문이다.
리그 컵에선 킬마녹 FC에게 0-1로 허무하게 져 3년만의 우승에 실패하면서 리그와 FA 컵, 리그 컵 우승 트레블 목표도 좌절되었다. 당시 리그 7위이며, 140년이 넘는 긴 역사[8]에도 리그 컵 준우승만 5번이 고작이던[9] 킬마녹과의 결승에서 셀틱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킬마녹의 사상 첫 리그 컵 우승 제물이 되었고, 킬마녹 선수들이 리그 컵 우승 트로피를 부여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남은 FA 컵 2연패로 더블 우승을 노렸으나 이마저도 4월 15일에 벌어진 4강전에서 하츠에게 1-2로 지면서 놓쳤다.
13. 2012-13 시즌
레인저스가 없어진 리그에서는 셀틱을 상대할 적수가 없었고, 리그 7라운드 던디 FC 원정에서 승리한 이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34라운드에서 인버네스 캘리도니언 시슬 FC를 홈에서 4-1로 승리하면서 리그 4경기를 남겨두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최종 성적은 24승 7무 7패 승점 79점으로 2위 마더웰 FC보다 16점 앞섰다.UEFA 챔피언스 리그 2차 예선에서 핀란드의 HJK 헬싱키를 1, 2차전 도합 4-1으로 승리했고, 3차 예선에서 스웨덴 헬싱보리 IF와 격돌하게 되었다. 1, 2차전 각각 2-0씩 도합 4-0으로 승리했고, 오랜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진출한다. 하지만 조 추첨 결과 G 조의 FC 바르셀로나, 벤피카,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한 조에 속해있다.
1차전 홈 경기에서 벤피카와 0-0 무승부를 거뒀다.
2차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원정 경기에서는 1-2로 지고 있다가 상대 수비수 후안 마누엘 인사우랄데의 퇴장에 힘입어 3-2 역전승을 거뒀다.
3차전 바르셀로나 원정에서는 사마라스의 행운의 선제골로 앞서가다가 전반 종료 직전에 이니에스타에게 동점골을 내주었고, 후반 종료 직전에 조르디 알바에게 역전골을 허용하면서 1-2로 패해 무승부만 거둬도 큰 수확인 경기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4차전 바르셀로나와의 홈경기에서 1군 멤버를 전부 투입한 바르셀로나를 2-1로 승리하면서 조 2위로 올라섰고, 더불어 바르셀로나의 12경기 무패를 깨뜨렸다. 국내 중계 하이라이트, 해외 하이라이트
5차전 벤피카 원정에서 1-2로 패배했지만 6차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의 홈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면서 승점 10점을 기록,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득점 없이 비긴 벤피카를 2점차로 밀어내고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전은 유벤투스와 맞붙게 되었다.
16강 유벤투스와의 1차전 경기를 앞두고 레논 감독은 경기 하루전 인터뷰에서 셀틱을 얕보지 말라며 자신감을 내보였지만 홈에서 열린 유벤투스와 16강 1차전 경기에서 0-3으로 패배했다. 유벤투스의 전략적 우위에 눌렸다는 것이 중평. 그 외에도 커먼스를 제외한 공격진의 결정력이 심각하여 지안루이지 부폰이 졸다가도 막는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였다. 그리고 2차전 원정에서도 0-2로 패하면서 16강으로 만족해야 했다.
14. 2013-14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리그 우승자격으로 13-14 시즌 챔피언스 리그 2차 예선에 진출했다.2차 예선에서 북아일랜드의 클리프턴빌 FC를 상대로 1차전 원정에서 3-0으로 승리했고, 2차전 홈에서 2-0으로 이기면서 도합 5-0으로 3차 예선에 진출했다.
3차예선에서 스웨덴의 IF 엘프스보리를 상대로 1차전 홈에서 1-0 승, 2차전 원정에서 0-0으로 비기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카자흐스탄의 FC 샤흐테르 카라간디과 맞붙었다. 압승이 기대되었지만 원정에서 0-2으로 패하면서 이변을 낳았다. 하지만 2차전 홈에서 후반전 시작 이후 2골을 연달아 만들어냈고, 종료 직전에 제임스 포레스트의 결승골로 3-0으로 이기면서 골득실에 앞서 본선에 진출했다.
조 추첨 결과 작년에 이어 또 맞붙은 FC 바르셀로나,그리고 AC 밀란, AFC 아약스와 함께 죽음의 조인 H조에 속했다. 공교롭게도 4팀 모두 역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둔 팀끼리 조가 이뤄졌다.
3라운드 아약스와의 홈경기에서 2-1로 승리를 한 것 빼고는 모두 패하면서 1승 5패로 조꼴찌로 탈락했다.
리그에선 31승 6무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승점 99점으로 2위 마더웰과 29점이나 차이났다. 이 중 1패는 25라운드에서 3위 애버딘 FC 원정경기에게 1-2로 패배한 것이다.
스코티시컵 8강에서는 애버딘에게 1-2로 패해 탈락했고, 리그컵에서는 16강전에서 맞붙은 3부리그 소속의 그린녹 모튼과의 홈경기에서 연장전까지 간 끝에 0-1로 패하면서 탈락해 왕조라고 하기에는 좀 쑥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15. 2014-15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14-15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16. 2015-16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15-16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17. 2016-17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16-17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18. 2017-18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17-18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유럽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국내에서는 스코틀랜드 축구클럽 연속 무패기록 경신을 했다. 100년 묵은 62경기 무패기록을 깨고 2017년 11월 4일 세인트 존스톤을 상대로 63경기 연속 무패를 달성했다.
19. 2018-19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18-19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시즌 중 지휘봉을 잡고 있던 브렌던 로저스가 레스터 시티 FC로 떠나고 닐 레넌이 후임 감독으로 와 잔여시즌을 치렀는데 다시 한번 자국 대회 3관왕에 올랐다. 3시즌 연속 3관왕으로 셀틱 팬들은 이를 '트레블 트레블'이라고 표현한다.
20. 2019-20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19-20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21. 2020-21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20-21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 2월 24일 로스 카운티 FC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닐 레논 감독은 레인저스와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경질되었고 수석 코치였던 존 케네디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22. 2021-22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21-22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23. 2022-23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22-23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24. 2023-24 시즌
|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23-24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25. 2024-25 시즌
자세한 내용은 셀틱 FC/2023-24 시즌 문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
[1]
현재는 켈틱으로 발음되지만 19세기 당시에는 ‘셀틱’이라고 발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켈트 참조.
[2]
당시 장소는
아이브록스 스타디움
[3]
부다페스트 컵이라고도 불림, 당시 작은 유럽대항전
[4]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다
[5]
50주년
[6]
나머지 두 클럽은 2연패 시절의
SL 벤피카와 전시즌 대회 우승팀인
레알 마드리드 CF
[7]
그러나 심판은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8]
1869년에 창단되어 11~12 시즌 현재까지 스코틀랜드 1부 리그 구단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여담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단으론 1853년에 창단되었던 에디픽스 시티가 있는데 이름을 바꾸고 재창단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5부 리그로 내려앉았다.
[9]
리그 우승은 1965년 딱 1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