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3 02:09:00

북파공작원

1. 개요2. 역사 및 관련 부대
2.1. 현대
3. 직무
3.1. 침투
3.1.1. 침투, 탈출 방식3.1.2. 해상 침투
3.2. 파괴 및 암살, 테러
4. 선발5. 훈련6. 무기·장비 체계7. 보상, 처벌8. 여담9. 관련 문서

1. 개요


과거 대한민국에서 북한으로 비밀리에 파견했었던 공작원이다.[1] 이들은 각 본부의 정보국에 소속하였으며, 특수임무유공자라고도 불린다.[2] 대중들이 북파공작원이라 지칭하는 인원들은 크게 민수공작원과 군인으로 나뉘며 민간인이면서 일명 돼지, 민수로 불렸던 민수공작원과 부대는 현재 국군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로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모두 7,726명으로, 이중에서 사망 300명, 부상 203명, 북한에 체포 130명, 행방불명 4,849명, 기타 2,244명이다. 한편, 2003년 9월 국군정보사령부 발표자료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94년까지 총 1만 3천여 명의 북파공작원이 양성되었으며, 이중 위와 같은 7,726명을 실종 또는 행방불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실종자 중 상당수는 자수자나 투항자로 간주하고 있다. 과거에는 북파공작원들의 존재조차 부정되었으나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들고 일어난 끝에 2002년에 북파공작원을 인정하는 판결이 최초로 나왔으며 북파공작원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안인 특수임무수행자 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진중권은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훈련받던 군인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특수임무유공자회(특수임무수행자회에서 2011년 개칭)는 북파공작중 희생된 7천여 명의 절대다수를 구성하는 민간인 출신 공작원들과는 활동시대 차이가 있다는 칼럼을 언론사에 기고했다. 당시 특수임무유공자회는 각종 정치깡패 행각으로 빈축을 여럿 사고 있었고 이 때문에 진중권이 당 칼럼을 올렸다 피소를 당했었는데 법원에서 진중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파공작 희생자 7천여명의 99.8%가 민간인 부대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지금은 모두 HID라 지칭되지만 사실은 민간인 구성 부대들과 설악개발단이라는 현역 군인 부대는 별도의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모병은 민간 모병만 하고 있으며 육상, 해상 특수요원으로 조용히 모병을 하고 있다.[3] 물론 과거의 설악개발단과 현재의 정보사 특수임무대는 다르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상이하다.

2. 역사 및 관련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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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과거 북파공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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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틀: 대한민국 군의 특수첩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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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북한만 무장공비를 보낸 것이 아니고 국군에서도 북파공작원을 여러 차례 파견했다. 대표적으로 1940년대 후반에 활약했던 호림부대( # 호림부대 재판장면#)와 현재는 국군정보사령부 예하의 특수임무대로 통합한 HID 산하 설악개발단과, UDU 북파대 등의 북파특임대.

6.25 전쟁 당시에도 이들의 활약은 매우 대단했다. 자세한 사항은 KLO 영도유격대 참조. 다만 KLO부대와 영도유격대는 현존하는 정보사 특수임무부대는 아니다. 분명 별개의 부대들이다. 인천상륙작전 사전에 이를 위한 첩보 작전이 있었는데 이 작전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해군첩보부대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개봉 즈음부터 인천상륙작전에서 활약한 그 첩보부대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는 UDU 동지회측의 언론 인터뷰를 다수 볼 수 있는데 예전에 본인들이 밝힌 UDU의 창설과 모집은 6.25 이후인 1954년 창설, 모집은 1955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갑자기 UDU가 시간을 거슬러 한국전에 등장하게 된 연유는 의문점이다.

본인들이 밝힌 정보들을 취합하여 추론해 볼 때 6.25당시에 해군 첩보부대는 존재하였으나 UDU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추후에 갑자기 UDU가 창설되기 전, 해군에서 첩보임무를 수행하던 부대를 UDU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4] 또한 UDU에서 근무했던 UDT출신자의 증언에 의하면 UDU라는 명칭은 1955년 훨씬 이후에 탄생 된 것으로도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주장하는 바가 서로 상충되나 명확히 정리되어 밝혀진 바가 없다.

해군측 북파공작을 담당하였던 NIU 해상정찰대의 부대계보를 잇는 현재 UDU라고 불리우는 정보사 해상부대는 북파공작 활동 시기 구성원들이 전원 UDT출신들이었거나 대다수가 UDT출신이었던 점, 그리고 현재 UDU부대원의 양성교육이 1971년 UDT교관들의 해군 첩보부대 인사발령을 시작으로 시작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UDU에 미친 해군 UDT/SEAL의 영향은 지대한 것을 넘어 그 자체이다. UDU가 자체적인 요원 양성 능력을 갖추어 독립한 것은 1971년이고,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북파가 중단된 것은 1972년이다. 속인주의 관점에서는 UDT/SEAL이 북파를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5]

당시 UDU는 UDT에서 NIU의 해상정찰 북파공작조 발령된 요원을 지칭하는 명칭이었지 별도의 부대를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었다. 실제 명칭 또한 Unit과 Team의 차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UDT가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 할 때는 NIU 해상정찰대로 인사발령 난 후, 해상정찰대 소속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부대 계보상 해군 첩보부대는 현 UDU가 잇는다. 90년대까지 UDT, UDU는 통합된 전우회를 운영했을 만큼 정체상 면에서 단일 혹은 형제부대로 인식하는 경향이 컸던 것으로 보이나 특수임무수행 보상 법안 통과 이후로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어쨌든 대외적으로 일부 UDU측은 본인들의 정체성을 UDT가 NIU 해상정찰대로 가기전 부터 존재했었던 UDU의 상급부대인 해군 첩보부대(NIU) 대원들[6]을 조상으로 여기는 듯 하다.[7] 분명한 것은 UDU 자체양성 교육을 받고 양성된 UDU대원이 북파공작을 수행했다고 볼 수 없다.[8]

한국전쟁 발발 전부터 각 군에는 자연스럽게 첩보 담당 기관 혹은 부서가 있었고, 한국전쟁 중에 본격적인 공작부대로 활성화 된다. 육군 첩보부대는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 첩보부대는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첩보부대는 AISU(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였고, 이들을 통틀어 북파공작 부대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우리 북파공작원들을 간첩, 무장간첩 등으로 부르고 미국 정보기관 산하에 있던 KLO 영도유격대의 북파공작원은 고용간첩이라 불렀다[9]. KLO부대 대원들은 위에 서술한 첩보부대뿐만 아니라 공식 특수전부대인 특전사의 창설에도 창설요원으로 참여하는 등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북한 피난민을 활용하려 했으나, 북한이 싫어서 도망나온 사람들이기에 지원하기를 꺼렸다. 50년대에는 사형수, 무기수, 고아를 선발해 보냈는데 남한으로 돌아와봤자 얻을 게 없다 보니 북한 당국에 자수하여 훈련 내용을 누출하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60년대부터는 물색조를 통해 모집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20대 초반의 건달들 중 영리한 사람들이 주 타겟이었다. 70년대에는 '양친이 살아있는 중졸 이상 학력자'였고 학력 기준은 점점 높아져 2000년대에는 고졸까지 높아졌다.

위의 상설 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했던 1.21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이들 첩보부대 산하에 각각 임시 보복부대들을 만들게 된다. 육군 산하엔 선갑도부대가, 해군 산하엔 장봉도부대가, 해병대 산하에는 까치부대( MIU)가 창설되었고, 공군 산하에는 바로 영화 실미도로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진 실미도부대( 684부대)가 각각 만들어지게 된다. 공군 실미도부대는 바로 김일성 암살 임무를 맡았던 부대이다. 이들 보복부대들은 보복임무를 위한 훈련을 마치고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 남북간의 정치관계가 화해모드로 바뀌면서 당초의 보복계획이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은 사실상 취소되었고, 그에 따라 존재목적이 없어진 이 보복부대들은 제대로 지원과 관리도 받지 못한채 그저 방치되었고 곧 해체될 운명이었다.

그러자 공군의 684부대원들은 이에 반발하여 1971년 8월 23일 기간요원들을 살해하고 육지로 와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했지만 결국 대부분 사살되고 생존자들도 사형에 처해지면서 부대가 비극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각군의 나머지 임시 보복부대(선갑도부대, 까치부대, 장봉도부대 등)들도 차례로 해체되고, 예전부터 있었던 상설 특수부대인 육군 HID와 해군 UDU, 공군 AISU만 계속 남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각 부대별 해당 문서와 국군정보사령부의 역사 문단 참조.
  • HID
    육군소속 북파공작부대는 타군과 비교하여 상당히 많았다. 현역 군인으로 되어있던 부대(현 정보사 육상)는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적극 활용하였다. 이중 북파공작 희생자의 절대다수가 민간인 부대들에서 발생했었다. 이후 순수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던 부대들은 다 폐쇄되었고 현재 정보사 육상이라 불리는 군인으로 구성되는 부대만 남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과 역사는 해당 문서 참조.
  • UDU
  • AISU
  • KLO
  • 영도유격대
  • XX 회사 / OO 상사 / xx 공사 / @@개발단
    위에 서술된 부대들은 모두 일반 회사, 혹은 연구단체로 위장하며 산하의 북파공작원들도 회사나 상사, 공사 등의 회사원으로 위장한다. 교관들도 과장, 부장, 전무 등의 회사원으로 위장하며, 현직 군인인 교관들의 경우 회사원 명칭을 사용하며 군복을 벗고 출입한다. 이것은 보안 유지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북파공작원이 발각될 경우에 너희 민간인 중 불순분자의 소요로 일축하기 위해서다.[10] 따라서 여기에 소속되면 군번도, 계급도 없다.[11]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록에서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동북산업사'(강화도 교육대), '대한축산협회'(광주 교육대) 등의 위장명칭으로 사람을 모집했다. 이는 동북산업사(서울 양평동)에서 모집된 뒤 경기도 파주에서 훈련받은 사람, 동북산업사에서 모집된 뒤 대한축산연구소(경기도 판교)에서 교육받은 사람 등에 의해 교차증명된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69년 8월에서 1972년 5월까지 33개월 동안 42명을 생포했으며 39명을 사살했다.
  • 판교 광주교육대, 공작원 중앙양성소, 809대, 판교목장
    현장에서 교육중인 인원을 돼지라고 불렀다. 돼지니 목장이니 하고 부른 이유는 대한축산연구소라는 위장명칭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부대 간판이 목장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돼지들'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산은 그 일대에 있는 청계산이다. 1967년에서 1971년까지 실제 교육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북한측 주장을 통해 교차검증 가능하다. 여기서 4개월 정도의 기초훈련을 거치고 춘천, 파주 등으로 파견하여 8개월 정도 훈련받은 뒤 북파를 하였다. 1975년 활동을 중단하였다.

2.1. 현대

  • 국군정보사령부
    각군 첩보부대를 통합해 만든 대한민국의 첩보사령부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 특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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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수임무대( 육상(HID) / 해상(UDU))
      파일:공중기동정찰사령부.png 공중기동정찰사령부
      제28비행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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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사 예하의 특수전 부대이다. 각각 육상, 해상, 28비행전대라고 불린다. 현재 28비행전대는 육상과 해상의 침투수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며, 대외적으로는 공군 기동정찰사령부 소속이나 정보사와 국정원의 관리를 받는다. 공식적으로는 현재는 북파공작활동이 중단된지 50년 가까이 흘렀으며 1972년도 이후에도 종종 북파된 정황이 보이긴 하나 이는 정황상 추측이며 실행 주체가 특수임무부대인지 우회공작요원인지 포섭된 탈북자, 조선족 정보원인지, 남한인인지 확인된 바 없다.[1972.7.4.] 공식명칭은 육상은 인간정보(특수정보가 인간정보 내 포함)부사관이고 해상은 특수정보부사관인데 대외적으로 모병활동은 특수요원이라는 명칭으로 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 국가정보원
    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

3. 직무

1960~1970년대 당시에는 단독수집조(침투)와 특수공작조(파괴)로 임무가 구별되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시기에 인천상륙작전과 그 외의 전투에서 대단한 전공을 세웠으며, 휴전 후에도 남북 양국은 많은 수의 무장 간첩을 파견하였다. 한국에서는 북한 측의 만행만 강조되었지만, 60년대 남 측이 보낸 공작원들의 행동도 북한에서 이와 별로 다를바 없었다. 60년대의 남북의 공작원 파병의 주목적은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상대방 내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 또한 큰 목적이었으므로.

3.1. 침투

단독수집조, 또는 장거리 침투 공작원이라 할 만한 이들의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 고정 간첩에게 공작금, 간첩용 장비를 전달하고 기밀문서, 마이크로필름, 중요 샘플 등을 전달받는다. 통신상으로 전달하기 곤란한 정보 및 지령을 주고받는다.
    • 고정간첩의 탈출을 돕고, 여의치 않은 경우 사살한다. 적에게 고정간첩 1명이 체포되는 것은 100명의 공작원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동식이 이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다.
    • 고정간첩에게 위장 복장, 정보 등을 전달받은 후 현지에서 위험한 임무를 대신 수행한다. 고정간첩을 잠입시키기는 매우 어렵지만 공작원을 훈련시키기는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 무인 포스트 ( 드보크)에 무기 등의 간첩용 장비를 숨겨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다른 간첩이 무기 없이 입국심사를 통과한 뒤 무인 포스트에서 무기를 찾아서 간첩 활동을 할 수 있다.
  • 위성, 사진 촬영만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시설에 직접 무장하고 잠입해 첩보를 수집한다. 1970년대 북한군이 DMZ에 콘크리트 수로 방어벽을 세우자, 북파공작원이 직접 방어벽에 들어가서 수로의 깊이와 폭을 줄자로 재어 오고 방어벽 콘크리트를 일부 샘플로 떼어 와서 분석했다. 또는 70년대 인민재판 동영상을 찍어와서 정훈교육용으로 활용했다. 2000년대에는 핵실험장 근처에 침투해 흙/물 샘플을 담아와 분석하거나 사진을 찍어왔다.
  • 이런 부대의 교관들 중 정보분석장교들은 대규모 간첩 침투 사건이 발생하면 적군의 이동경로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짠다. [13]

3.1.1. 침투, 탈출 방식

공작원은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 침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전투를 최대한 피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흔적 없이 침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탈출할 때에도 최대한 흔적 없이 적의 추격을 피해서 탈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따라서, 공작원의 침투·탈출은 은신에 초점이 맞춰진다.

육로로 침투할 경우, 해당 지역의 수색대(pathfinder)가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공작원들을 안내한다. 이 때 도착하자마자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며칠 가까이 수색대와 함께 움직이면서 이상징후를 노출시키지 않게 노력한다. 그 과정에 망원경을 통해 근처를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다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침투를 하게 된다. 이후 각종 장애물을 극복하고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것이다. 휴전선이 위험한데 육로 침투가 가능하냐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지만 노크 귀순과 같은 원리로 가능하다. 1970년대까지 양측에서 휴전선을 넘어 수천번의 침투가 있었다.

1950~1960년대의 해상 침투는 직접 헤엄을 치거나 고무보트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모선(Q보트)에서 자선(VP)를 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4년 한국군은 최초로 잠수정을 도입했다. 침투 목적으로 이탈리아 코스모스사에서 70여t의 코스모스급을 도입한 것이다. 10여 명 탑승 가능했지만 너무 작아서 한국 기지에서 바로 북한 해안으로 잠입할 수는 없었다. 모선(母船)이 북한 인근 공해를 항해할 때 써야 했다. 해로로 침투하는 것은 소형 잠수정을 이용해 고정간첩과 미리 약속해 놓은 시간에 접선하는 방식이었다. 위험하니까 1분이라도 약속 시간과 틀어지면 침투는 무산되고 각자 되돌아가게 된다. 70년대에는 '비둘기'급이라고 불렀고 2000년대에는 '갈매기'급이라고 불렀다. 비둘기급을 이용한 침투공작은 해군 첩보부대 502기지(신성기업 마산지사)의 것으로, 중앙정보부의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1997년 최정남-강연정 침투사건까지만 해도 미국의 첩보위성이나 한국의 해군 레이더로 북한의 잠수정을 찾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다만, 침투 과정에서 들키면 간첩선과 잠수정이 모두 교전 끝에 격침당하곤 했다.

1980년대에는 150t의 돌고래급 잠수정이 건조되었다. 코리아타코마라는 회사가 독일 기술을 도입해 건조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한국의 대북 침투가 급격히 줄어든 시기라 많이 쓰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침투는 육상, 해상으로만 이루어졌다. HALO 강하로 고고도에서 침투하거나 An-2, 허큘리스 프로펠러 수송기 등으로 저공 침투하여 낙하산 강습[14]하는 것들을 구상했지만 한국전쟁 휴전 이후 실제로 시행된 적은 없다.

침투하는 인원은 일반적으로 3명이다. 독도법, 라디오 암호해독, 지뢰제거 등에서 뛰어난 '조장'이 맨 앞에서 뛰고,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원이 중간에서 뛰고, 흔적 제거에 가장 뛰어난 대원이 끝에서 뛰는 것이다.

중요한 임무의 경우 안기부의 정보요원이나 영관급 정보 장교를 중간에 넣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요원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지만 침투시키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3.1.2. 해상 침투

과거 한국의 경우 북한과 마찬가지로 잠수함의 경우 잠수함 승조원, 작전조를 육지까지 상륙시키는 안내원, 현지에서 침투나 파괴를 하는 작전조로 나눴다. 잠수함 승조원은 침투 훈련을 거의 받지 못 하기 때문에 적지에 고립되면 단체로 자살한다. 안내원은 해상 침투 훈련은 받지만 작전조에 비해서는 침투 능력이 떨어진다. 작전조는 말그대로 침투 후 작전을 수행하는 그룹이다.

코스모스를 도입할 당시 이탈리아 잠수정(비둘기급 잠수정) 기술자와 교관들도 한국에 같이 들어왔다. 북파요원인 일명 '비둘기요원'들에게 폭탄조작, 수중운반, 폭파 등 잠수정 운영법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다. 당시 비둘기요원들이 받았던 훈련은 'U1'이라고 불렸으며 28주 과정이었다. 훈련내용은 잠수훈련, 항해기법, 기술정비, 폭약설치 등 다양했다. 또 정기적으로 무귀환 훈련, 유사지역침투훈련, 탈출훈련을 받았다.

단독수집조는 먼 거리를 침투해야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잠을 자야 했고, 그래서 비트(은신처) 구축에 드는 노력이 컸다.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과 은신 도구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무장이 약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발각되면 대부분 죽게 되었으므로 전투를 피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위기상황에는 전국 어디로 탈출해야 할 지 모르므로 적국 전 지역의 지도를 익혀야만 했다.

3.2. 파괴 및 암살, 테러

반면 국경선(=휴전선) 근처(50km 이내)의 적 시설물을 정찰, 확인, 폭파하기 위한 특수공작조의 활동도 있었다. 전쟁처럼 헬리콥터나 중화기의 지원을 받으며 해당 지역을 다 때려부수고 나오는 DA식 작전은 후방지원이 빵빵하지도 않고 전시가 아니기 때문에[15]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하루~이틀 거리를 비밀리에 잠입해 이러한 활동을 한다. 국경선 근처에서는 탄약고, 유류탱크, 심리전 스피커 등이 파괴의 목표물이다. 그리고 적군의 사기 저하를 위해 부비트랩을 설치하기도 했다. 옥수수 수거 작업을 하는 적군이 자리를 비운 틈에 옥수수단에 부비트랩을 설치한다면, 적군이 옥수수단을 트럭에 싣기 위해 들어올리는 순간 폭발할 것이다. 침투조가 3명이었던 데 비해 파괴공작은 5명으로 이루어졌다.

특수공작조는 자신이 깽판치고 나올 지역에 대해서만 자세히 알면 되기 때문에 모형지도로 그 지역에 대해 샅샅이 훈련은 시키지만 지역의 진짜 지명은 가르쳐 주지 않고 거짓 암호를 썼다. 침투할 때도 시야를 차단하고 이동시켰다.

4. 선발

공작원은 특정 임무가 아닌 이상 내국인을 쓰는 경우가 꽤 드물다. 괜히 잡혔다가 뭘 불어버릴지 알 수도 없고, 모국의 개입을 부정할 수 없어서 외교관계가 경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0년대~1980년대의) 남북관계처럼 대단히 특수한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북한 입장에서는 월북하거나 중공을 여행하는 남한 민간인이 없어서 도저히 포섭을 통해 간첩으로 훈련시켜 남한 사회에 잠입시킬 만한 인원이 없다. 나빠질 외교관계도 애초에 없다. 이 때문에 현지화/현지언어 훈련이 부족하더라도 무장공비를 파견해 간첩활동을 돕게 했다.
  • 남한 입장에서도 탈북자가 없으니 포섭할만한 대상이 없으며 중공도 수교가 없어 조선족을 포섭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북파공작원을 보내 간첩활동을 돕게 했다.
이렇게 내국인을 선발할 경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은 자를 뽑아야 한다. 조금만 충성심이 흔들려도 붙잡히면 적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전향하며, 더 흔들리면 아예 자수해버릴 수 있다. 따라서 매우 강한 신원조회를 시행하여 적국과 전혀 연고가 없는 사람 중 매우 충성심이 강한 자만 선발한다.

침투 공작원의 경우 체구가 작으면 유리하다. 비트를 구축할 때 은신이 쉽고, 식량이 적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자 중에서 몇 가지 조건이 추가된다.
  • 첫째, 인내심이 극히 강한 자여야 한다.
    적에게 쫓길 경우 수풀 틈에서 12시간 동안 똥오줌을 싸 가면서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경우조차 있으며, 비트를 구축할 때는 야삽은 커녕 모종삽으로 3시간동안 꾸역꾸역 구덩이를 파고 흔적을 처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낙엽 위를 걸을 때 낙엽을 한 손으로 치우고 한 발자국을 내딛고, 다시 그 자리에 낙엽을 위장해 자국을 없애는 방식까지도 동원되는 형편이다.
  • 둘째, 암기력이 매우 우수해야 하며, 지능도 평균 이상이어야 한다.
    이들은 지도, 접선 장소나 귀환 방법이 적힌 쪽지, 사전, 언어나 문화에 대한 주의사항이 적힌 쪽지 같은 것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만일 기록해서 가지고 있다면 해당 공작원이 붙잡힐 때 다른 공작원이나 고정간첩들까지 붙잡힐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신분을 증명할 때, 또는 탈출시 도움을 주기 위해 본국에서 보내는 방송에 암호가 사용된다. 이걸 해독하지 못하면 무조건 적국에서 죽기 때문에, 반드시 암호를 해독할 최소한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셋째, 매우 민첩하고 운동을 잘 하는 자여야 한다. 일반적인 고정 간첩이라면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당당하게 출입하겠지만, 오래달리기만이 유일한 침투방법이었던 과거 북파공작원들은 산악 달리기를 매우 잘해야 했다. 또한 직접적인 전투 임무 또한 수행했으므로 당연한 요구 사항. 때문에 선수 출신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 넷째, 성격은 과격해도 안 되고, 우유부단해도 안 된다. 즉, 냉철해야 한다.

5. 훈련

침투 공작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은신술이다. 위에 기술했듯 모종삽과 작은 자루만으로 비트(두더지굴)를 구축하는데, 비트 하나당 1㎥ 정도 파내야 하므로 숙달된 사람에게도 3시간 정도 걸린다. 오래 걸리는 이유는 흙을 갖다 버리고 위장용 덮개를 만들기 위한 나뭇가지를 구해오고 발자국을 숨기는 시간까지 합쳐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간첩 김동식 씨는 대학교 4년동안 100여개의 비트를 파봤다고 한다.

얼굴에는 진흙을 바른다. 침투 기간 동안에는 치약이나 비누를 사용하지 않아서 야생동물에게 냄새로 들키지 않게 해야 한다. 필요할 때는 흔적과 발자국을 없애야 하는데, 심할 경우 한 걸음 이동할 때마다 낙엽을 움직여서 위장하고 다시 한 걸음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은신 상태가 안전하지 않다 싶으면 대소변도 누운 채로 해결한 뒤 땅에 파묻어야 한다. 대소변 때문에 비트 밖으로 기어나가거나 하면 발각되어 죽게 될 수 있다. 주변 징후를 파악하기 위해 마음놓고 잠자지 못 한다. 1시간 정도씩 교대로 잠자면서 서로를 깨워야 한다. 발각될 경우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먹지도 잠자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은신하는데, 산지의 경우 20m 거리에서도 육안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북파공작원에게는 오래달리기, 무장공비에게는 사상적 측면이다. 남한에서는 훈련의 시작은 항상 오래달리기부터 시켰다. 오래달리기를 시키는 과정에서 중도 포기한다고 해서 훈련 과정의 비밀이 누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포기한 사람들은 감시를 받거나 군에게 보복을 당하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정식 훈련 과정으로 들어간 뒤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들은 기밀 유출 문제 때문에 평생 감시를 받는 경우가 많았고 심한 경우 부대를 그만두지 못 하고 배신자라고 맞아죽기도 했다.

오래달리기가 중요한 까닭은, 낮에는 숨어 지내야 하고 밤에도 비트를 구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한정되기 때문이다. 비트 구축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어두워진 다음부터 새벽 3시 정도까지만 뛰는데 이렇다 해도 매일 밤 50~60km 정도나 뛰게 된다. 실전에서 이만큼 많이 뛰어도 정상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하려면 훈련은 그 이상 수준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온 몸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모래조끼를 입고 산지를 뛰는 훈련을 한다. 1997년 남한에서는 기초훈련 100일간 매일 12km를 달렸으며, 반복되는 구보에 열외는 없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정상 근처나 계곡 근처같이 눈에 잘 띄는 곳을 달리면 안 되고 7,8부 능선만 골라서 다녀야 한다. 걷거나 뛸 때 소리가 나도 안 된다. 달리기 중에는 산악지역에서 개를 풀어 추격시키기도 했는데 적에게 들켰을 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훈련을 했다. 처음에는 1시간에 5km도 뛰기 힘들어하지만 계속 훈련을 시키면 30kg 완전군장을 메고 12km의 산악로를 급속행군으로 55분에 주파하거나 (국경선 근처 침투) 25kg 군장을 메고 하루 60km를 평균 시속 10km로 주파하는 것(적지 깊숙한 곳까지 침투)이 가능해지게 된다. 하지만 30kg에 가까운 모래주머니나 배낭을 메고 반복되는 구보를 하게 되면 나중에는 무릎에 이상이 생기게 된다.

남한 사회는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북한 간첩에게는 오래달리기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공비의 경우 장비를 은닉한 뒤 사복으로 환복하고 민간인 코스프레를 하면 검문검색하지 않는 이상 발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 김신조 일당이 침투했을 때 가지고 온 물품중에 신사복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서울까지 내려온 뒤 취객으로 변장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사격, 총기 분해 및 조립, 수류탄, 크레모아 폭파, 폭약제조 및 산출법, 적 화기 운용에 대해서도 배운다. 1970년대의 북파공작원들은 M1 카빈을 사용하였다. 가볍고 휴대가 편리하며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고장이 적다는 이유였다. AK-47은 북한의 제식 소총이기는 하지만 공작원은 필사적으로 숨어서 도망다니므로 위장하는 의미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AK-47은 M1 카빈보다 더 무겁다는 단점이 컸다. 인터넷에 가끔 떠도는 1990년대 정보사 요원들 사진을 보면 AK-74 Vz.61 등으로 주 무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60년대 김신조 일당이 침투했을 때는 가볍고 속사가 가능한 PPS-43을 들고 왔고, 1996년 당시의 무장공비들은 그들이 자체 제작한 M16 RPG-7 등을 사용하였다.

통신, 음어, 모스 부호 수신 훈련을 한다. 현지 고정간첩과 접선했을 때 자신이 본국에서 보낸 공작원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자기 편의 손에 죽기 때문에 암호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북한 무장공비의 남파가 이루어졌던 90년대까지는 난수방송이나 암호 전달용 라디오방송을 통해 지령이나 탈출 방법을 암호로 송출했다.[16] 이런 암호를 해독해내지 못하면 현지에서 죽는다. 이 때문에 공작원에게 소형 라디오를 갖고 가게 했다. 다만 통신을 배우는 것이 반드시 공작원의 무전기 발신으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탐전 기술이 발달한 결과 발신을 하던 북한 간첩들이 60년대에도 체포/사살당했다. 그러다 보니 남한에서는 1970년대부터 무전기를 이용한 발신을 포기하고 라디오를 이용한 수신만 했다. 반면 북한에서는 발신 시간을 매우 짧게 하면 탐전을 당해도 체포를 피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접근해 1990년대 중반 고속 메모리식 무전기를 개발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건에서도 탐전을 한 기록이 있다.

게릴라 전술을 배운다. 가령 1996년 무장공비 사태에서는 무장공비가 장교인 척 하고 초병을 속여넘긴 뒤 초병이 방심했을 때 살해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리고 적에게 발각되어 도주중일 때는 아무리 안전하게 최단거리로 갈 수 있더라도 일부러 반대방향으로 간 뒤 빙빙 둘러서 간다든지, 일부러 지그재그로 반복적인 회피 경로를 잡아서 간다든지 하는 식으로 적의 포위망을 피한다. 이런 게릴라 전술은 일반적인 군인은 알 수 없다. 따라서 북한군이 북파공작원을 포위할 때는 자신들의 공작원의 조언을 받아 대처하게 했다.

적 언어 및 문화, 관습, 상식 등에 대해서도 배운다. 주로 적국의 전향자를 교관으로 활용하나, 북한의 경우 일본인을 납치해 교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97년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에서는 북한 간첩이 버스요금 잔돈을 받는 방법을 몰라 당황한 적이 있었고, 메밀소바를 먹으러 가서는 소스를 국수에 붓는 바람에 바지를 더럽히고 황급히 도망나온 적이 있었다. 이때 여간첩은 생리대와 아기기저귀를 구분하지 못해 두 번이나 아기 기저귀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상하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이 실수들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북한 간첩 김동식 씨는 서울 토박이 출신의 남한말 강사와 1년간 합숙 훈련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아예 건물을 지어서 훈련시키고 있는데, 1980년대 말 김동식씨가 겪은 훈련장에는 슈퍼, 여관, 이발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침투 활동 중에 가장 곤란한 순간이 민간인과 마주쳤을 때인데, 눈치 채고 신고할 경우를 대비해서 사살하는 것이 원칙이나 공작원도 사람이기에 인간적인 갈등을 할 수밖에 없다. 1950년대에 구월산 유격대 등으로 북한 내에서 각종 공작활동을 벌였던 육군 김종벽 씨는 먼 훗날 인터뷰에서 난 북파활동 중에 워낙 나쁜 죄를 많이 지어서 이담에 죽으면 지옥 중에서도 제일 악질들만 모아놓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북한 버전의 이승복 사건 같은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침투, 지뢰 제거, 수영, 잠수, 자물쇠 따기(해건), 담장 넘기등의 지형지물 극복 훈련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휴전선을 실전에서 돌파할 때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리내지 않고 유리창을 깨는 법(유리창 파지법)도 배운다. 수영 훈련의 경우 수영장이 아니라 해상에서 실시한다. 잠수 실력의 경우 2~3분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북한 간첩 김동식씨는 20일간 하루 8시간씩 수영 잠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60년대에는 나뭇가지 장애물, 모래 장애물, 실 장애물 등을 설치해놓고 건드리면 소리가 나거나 흔적이 남게 한다. 이 과정에서 적의 침투 사실을 파악하거나 소리를 듣고 사격 대상으로 잡는다. 모래 장애물은 비를 맞아서 모래가 단단하게 굳은 구역을 손바닥으로 두드려보면서 찾은 후 배낭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가는 방법으로 흔적을 최대한 덜 남길 수 있다. 나머지 흔적은 나뭇가지를 꺾어와서 지운다. 이 꺾어오는 나뭇가지 역시 의심을 사지 않도록 먼 곳에서 꺾어 와야 한다. 실 장애물을 끊었을 때는 짐승의 소행으로 위장하도록 근처의 실을 모두 끊어 놓는다.

요즘도 남아 있는 장애물 중 위협적인 것으로는 철조망, 지뢰밭, 고압선과 콘크리트 수조 장애물을 들 수 있다. 철조망, 지뢰밭, 고압선은 60년대에는 이미 설치가 완료되어 있었다. 철조망은 넘어서기 좋은 곳을 골라 간단히 우회 통과하면 된다. 안내 전문가는 지뢰밭 개척 훈련을 많이 받은 결과 지형만 보고도 지뢰가 어디 묻혀 있을지 판별하여 제거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고압선을 통과할 때는 1m쯤 되는 호스 두 개를 사용한다. 호스를 갈라 아래 위쪽의 고압선에 덮어 씌운 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사람이 통과할 만큼 들어올리면 감전되지 않고 고압선을 통과할 수가 있다. 70년대가 되면서 북한은 5m 높이의 콘크리트 수조[17]를 깔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량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침투 공작원의 경우 많은 양을 가지고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식량은 약간 부족하게 가져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해결한다. 즉, 산나물을 구별해서 먹거나 적의 민가에서 표시나지 않게 식량을 훔치는 것,[18] 또는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 등이다. 70년대 훈련 중에는 개미를 핥아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가져가는 식량의 경우도 영양가는 최대한, 무게는 최소한의 원칙에 따라 바짝 말려서 수분을 제거한 건조식 내지는 가루식 위주로 지참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물만 구해다가 물타 먹는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식량 위주이다.

그 외 무성무기의 사용도 있는데, 나이프 투척 훈련도 시킨다. 1997년 남한에서는 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대원을 묶어놓고 그의 머리 위를 표적으로 투검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19] 북파공작원 관련 영상에서 젓가락이나 드라이버를 던져 30m 거리에서 꽂아버리는 묘기가 자주 나오는 까닭은 이것 때문이다. K7 소음기관단총이나 독총 등의 무성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1970년대에는 나이프 투척과 소음권총이 유일한 무성무기였다. 1970년대에 소음권총은 평균 3인 1정 수준으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돌을 넣고 모래를 채운 양말, 신발끈 등의 급조 무기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배웠다.

얼음물 극복 훈련도 시켰다. 눈 내린 계곡에 3시간씩 사람을 넣어 놓는 것이다. 1997년의 사례에서는 훈련받던 대원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소리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비술도 배웠다. 태권도나 유도 등의 맨손격투 무술도 배웠으며, 나무와 돌 등 별것 아닌 자연물을 위험한 무기로 사용하는 훈련도 받았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면 사람이 쉽게 죽는지도 배웠다. 이런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 사람이 실제로 죽어나갈 정도의 가혹한 훈련을 시행했다.

각종 탈것, 기관차, 경비행기, 소형 선박의 운전법을 배운다. 북한 공작원들의 경우 200t 이하의 배는 누구나 조종할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파업했을 당시 특전사가 투입되어 지하철을 운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도법이 있다. 원래 독도법이란 지도를 읽어서 지형과 위치를 파악하는 기술이지만, 지도를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축소 입체모형과 지도를 이용해 훈련해서 적국 전역의 지도를 외워서 갔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1/15,000 항공사진을 이용했다.

면도칼만으로 이발하는 기술도 배운다.[20] 그것도 없을 때를 대비해서 유리병으로 이발하는 기술도 배운다. 이건 칼로 써먹기 좋게 유리병을 깨는 방법과 같이 배운다. 민가 근처를 지나가야 할 때 민간인들에게 수상하게 보이면 안 되기 때문.

잡힐 것 같으면 자살하도록 배운다. 청산가리 등의 독약 캡슐이나 자폭용 수류탄이 사용된다. 북한 공작원들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훈련을 받고 나면 자폭을 옆집에 물 길러 갔다 오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훈련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한겨울의 산에서 생존주의 훈련을 한다. 민간인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산속에서 먹고 자는 것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군 부대 침투훈련을 시킨다. 첩보부대의 사장실(지휘관실)에 미리 침투를 예고하고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오거나 침투의 증거로 쪽지를 남겨놓고 나오는 것이다. 침투 예고가 되어 있는데다 기간병이 실탄 장전하고 경비중이므로 죽을 수도 있지만 시킨다. 이런 훈련은 북한 공작원들도 동일하게 시행한다. 파주시 광탄면에서 훈련하던 사람은 광탄에 있던 미8군 노무단부대 (KSC)에 침투해 서류를 절취하는 훈련을 7차례 이상 시도해 모두 성공했다. 서류 절취에 성공하면 경계가 허술했다는 이유로 책임자가 문책을 받고 경계를 강화했지만, 반복해서 침투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주특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안내·사진 촬영·흔적 제거 등이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가 영화사 촬영기사를 스카웃해서 1년간 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사진 교육을 실시한 적이 있다.

단기공작원들의 경우는 위와 약간 다른데, 이들은 전투를 전문으로 했기 때문이다.
통신, 음어, 독도법, 관찰, 촬영, 북방한계선지대침투, 사격, 수영, 유격, 공수, 잠수, 해건(자물쇠 따기), 무술, 생존, 구보 30kg배낭-12km산악-55분대 주파, 각종 총기류 분해 및 조립특성, 폭약제조 및 산출법, 북한언어-행동-제식, 게릴라전술

이렇게 1년 정도 훈련을 받으면 실제 침투가 가능할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런 훈련은 사람을 종종 죽거나 크게 다치게 만들고, 육체적으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정신까지 병들게 만든다. 이 때문에 조현병이 온 경우도 있으며, 소송 끝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경우도 있다.

6. 무기·장비 체계

  • 1.21사태 당시의 북한 공작원들은 박정희 암살을 목표로 다음과 같이 무장하였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21]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22]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쌀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PPS-43과 실탄 300발),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TT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 김신조의 회고 중
위 목록 외에도 경비병 제거용 네일배트, 조선로동당 당원증이 두어 개 노획되었다.
  • 1970년대 북파공작원 중 장거리 침투를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무장했다.
소음권총 3인1조에 하나, M1 카빈 소총 1인 1정, 실탄 100발, 수류탄 2~4알, 단도, 청산가리 캡슐(자살용), 응급약(아스피린, 진통제 등의 구급약 종류를 포함. 붕대와 실, 바늘로 어지간한 상처는 혼자서 꿰매버린다.), 만능열쇠, 지도, 운동화,[23] 나침반, 머리빗, 면도칼, 펜치, 라이터, 수통, 숨쉬기빨대, 바닥 밋밋한 농구화. 속옷과 양말 하나씩 여벌, 아대,[24] 3단식 삽자루(모종삽과 야전삽 중간 크기), 낙하산 줄( 파라코드. 밧줄 대용), 소형 망원경, 배낭(뭐든지 안에다 하나씩 넣고 묶게 되어 있는 소형), 식량,[25], 수신 전용 소형 라디오(조장만), 올림푸스 망원카메라(촬영 전문가만)
이들의 목적은 현지 고정간첩에게 장비와 돈을 공급하거나 서류를 받아오고 중요 시설물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무장이 매우 빈약하다. 일단 발각되면 이들 중 대다수는 잡혀 죽게 되었으므로 발각되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이 목적으로 3단식 삽자루, 바닥 밋밋한 농구화, 숨쉬기 빨대, 삽자루 같은 은폐용 도구가 사용되었다. 최소한의 자위용으로 총을 준 것이라 최대한 가벼운 M1 카빈 소총 (2.6kg)[26]을 주었으며 실탄도 매우 적게 주었다. 실탄이 적기 때문에 교전 시에는 무조건 단발로 조준사격해야 했다. 사람이 20kg의 군장을 메고 하루 60km 뛰면 전투 불능 상태까지 체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위와 같다.
  • 1970년대 휴전선 근처에서 북한 초소 테러를 하던 파괴공작조는 크레모아 등 강력한 화기를 사용했다.
RPG-7의 중국 파생형 '692 대전차로켓'(1문+포탄 5발. 중국제.), RPG-43 대전차수류탄(북한제), Mk.2 수류탄 (미국제), AK 소총(4정.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음.), M16 소총(2정), 권총(6정),[28] 수류탄 등 각종 화기
남한 민간인 사복 (남방, 청바지 등), 한국군 위장복, 전투모, 방수모, 방수낭, 수중단도, 군용 해안 도척, 복면, 구명조끼, '해당화' 껌, 수첩 (북한제)
워키토키, 라디오, 이어폰 (일본제)
호흡기(regulator), 수경, 오리발, 산소통, 잠수벨트(일본제)
후지 야간투시경(200m까지 관측 가능.), 캐논 500mm 망원렌즈 카메라, 캠코더, 쌍안경 (일본제)
스쿠버용 태그호이어 손목시계 (스위스제)[29]
수중잠수경 카메라 (러시아제)
스패너 및 공구 (독일제)
망사팬티, 양말, 성냥, 러닝셔츠 (한국산)
사건 당시의 투항 유도 전단 같은 걸 보면 이 때 북한 공작원들의 인상착의는 대부분 위장복이 아니라 국방색(OD#7) 항공점퍼나 남방 등의 상의에 청바지 같은 사복이었는데,[30] 함장 정용구는 밤색 바지, 러닝셔츠(관 속에 들어간 사체가 잠시 나오므로 주의) 등을 입고 있었으며 핵심 멤버인 정찰총국 요원은 처음에는 국군 위장복을 흉내낸 위장복을 입었으나 국군 위장복과 실제로는 너무 차이가 나서 버리고, 대신 국군 병사 표종욱 일병을 습격해 살해하고 그의 군복을 탈취하여 입었다.
북한제 M-16 소총은 1992년 철원 무장공비 사태~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북한에서 무장공비가 내려올 때마다 발견되었다. 총번, 제조국 표시, 제조연월일 등의 표식이 전혀 없다. 26명 중 사살하거나 생포한 22명으로부터 실탄 353발을 노획했다.
정찰장비, 통신장비, 잠수장비는 대개 일본제였다.
이외에도 사살한 공비에게서 민가에서 훔친 것으로 보이는 구운 옥수수, 성냥, 담배 등이 발견되었다.
  • 1998년 7월 발견된 북한 간첩 사체에서는 잠수장비, Vz.61 기관단총과 탄창 2개, 길이 20cm 가량의 대검, 식량(미숫가루, 초코렛 등)이 발견되었다.[31]

7. 보상, 처벌

북한 공작원들에게는 가족의 평양 거주,[32] 자녀의 엘리트 교육, 상당한 레벨의 경제적 생활수준 보장[33] 등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이 보상은 공작원이 필요할 경우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공작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했을 때에 한정한 보상이다. 공작원이 자수하여 귀화하거나 검거되었는데 즉시 자살하지 않았을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들은 최소 수용소행 최대 처형의 가혹한 보복을 받게 된다. 보복이 적용되는 범위는 공작원의 중요도나 죄질에 따라 달라서 가깝게는 직계가족부터 얼굴도 잘 모르는 먼 친척까지 수용소로 끌려갈 수 있다.

남한의 경우 물색조들은 아파트 여러 채를 살 엄청난 금액을 보상해준다느니 6~7급 공무원[34]으로 채용하고 월급 30,000원을 주고 대위 계급을 줘서 대통령 직속 특수부대에 보내준다느니 하는 거짓 약속을 하고 모집을 했지만 모두 순 거짓말이었고, 정작 그만둘 때는 아무 보상을 하지 않았다. 맞아죽지 않고 조용히 그만두게 해 주는 것, 군대 두 번 가기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최대의 보상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만둔 뒤 거주지에 살인 사건이 생기면 경찰들이 최우선 용의자로 몰아 권총 들고 조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한국이 아닌 미국이 민간인들을 모집하여 민간인신분으로 운영되던 KLO나 영도유격대가 군번이 없던 인원들이고 현재 정보사 육상과 해상의 직계계보를 잇는 부대들은 민간인인 척을 한 군인이라 보는게 타당하다. 추후 정보사 육상으로 통폐합 흡수되는 부대들 중에는 실제로 민간인 신분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조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분명 정보사 육상과 해상은 민간인조직이 아니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이후로 신호정보(SIGINT) 체계가 발달하면서 공식적으로 장거리 공작원과 고정간첩을 파견하는 일은 없으며, 정보사 특수요원만을 계속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5월 29일, 주한미군 특수전사령관이 한미 연합 특수부대가 북한에 HALO 강하로 침투, 땅굴이나 공군기지 등 여러 지하시설물의 정보를 직접 탐지하고 왔다는 발언을 했다는 해외 언론 보도가 나와 국내외 언론이 발칵 뒤집혔으나 하루만에 한미 국방부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부인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 보도 이 발언을 한 톨리 주한미군 특수전사령관은 실언으로 경질되었다. 그리고 톨리사령관의 발언을 봐도 그렇고 이 번역기사도 그렇고 침투주체는 정보사 특수임무부대가 아닌 특전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8. 여담

북파 공작원이 된 아버지를 찾아 부대를 찾았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6살에 아버지와 같은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게 된 어처구니 없는 실화가 보도됐다. 북한군에 잡힌 아버지는 역으로 남파된 후 바로 당국에 자수했지만 불법 구금 후 사형되었고 아들은 59년만에야 법원으로부터 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아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게 됐다고 한다. 관련보도 [35] 배상금은 겨우 3억이었다. 사람을 사법살인 시킨 것도 문제지만, 일단 6살 꼬맹이를 불법 구금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다.

1980년대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1.4 후퇴 후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다 실종된 14세 아들 이대식을 찾는 할머니가 출연했었는데, 2015년 3월 28일자 그것이 알고싶다 '소년북파공작원 - 우리는 총알받이였다' 방송에서 밝혀낸 바로는 소년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북파되었다고 한다.[36] 그리고 실종 60년 만에야 국가에선 1952년 사망한 것으로 통보했다. #기사 링크

탈북자들이 저술한 서적을 보면 간혹 북파공작원들이 적발돼서 공개처형 당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북조선에 몇 명이나 침투해 있냐는 질문에 ' 도로의 전봇대만큼 많다'는 말만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37]

북한은 침투 중 생포된 북파공작원들을 공식적으로 공개하진 않았지만 군사정전위원회에서는 자주 언급하며 남한과 미국 측을 비방하는데 써먹었다. #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과거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북파공작원 출신들의 폭력시위가 몇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시위가 2002년 설악산 동지회(HID 출신)가 벌인 폭력시위인데 웬만한 운동권 폭력시위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소화기로도 끄지 못하는 LPG 가스통 화염방사기부터 시작해 손도끼, 쇠파이프, 공사현장에서 쓰는 유로폼 타이를 갈아 만든 단검, 공기총 등 민간차원에서 동원 가능한 생활무기가 전부 동원되었다. 전경들이 탈탈 털리자 경찰특공대까지 투입되었고 '타협' 수준으로 겨우 진압되었다.

9. 관련 문서


[1] 현대에도 여전히 파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기관이 기관인만큼 확실한 정보는 없다. 애초에 공공연히 알려지면 안 될 정보이기도 하니까. [2] 2011년, 특수임무수행자에서 특수임무유공자로 바뀌었다. [3] 군 인트라넷에 팝업공고를 올리거나 병무청 게시판에 모병공고를 게시하고 있고 매년 정기모병하고 있으므로 비공개로 볼 수 없다. [4] 군부대는 아니지만 창설년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삼성이라는 회사에 빗대어 보자면 삼성은 1938년 삼성상회라는 작은 회사로 시작되었고 삼성의 자회사인 삼성전자는 1969년 설립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삼성전자의 구성원들이 우리의 창설년도는 1938년이오 라고 주장한다면 옳은 주장인지 생각 해 볼 문제다. 삼성전자 직원은 크게 보면 삼성의 직원이지만 그렇다고 삼성의 모든 직원이 삼성전자직원은 아니다. 이와 같이 UDU는 해군 첩보부대이지만 해군 첩보부대원 모두가 UDU는 아니다. 해군 첩보부대와 UDU는 서로 상위부대 하위부대의 관계로써 UDU라는 명사가 해군 첩보부대 모두를 통칭하기 시작한 70년대 초반 이전에는 UDU가 해군 첩보부대를 모두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당시의 해군 첩보부대와 UDU는 동등관계(= 등호)가 아니다. [5] 아덴만 여명작전을 수행한 부대는 군 직제상 청해부대 6진(최영함)이며 아덴만 여명작전의 핵심 수행인원은 청해부대 6진(최영함)의 검문검색대이다. 검문검색대를 구성하는건 UDT/SEAL이다. [6] 1955년부터 1970년까지 UDT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은 특수부대원이나 1971년 부터 UDU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은 특수부대원이 아닌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특수교육을 받지 않은 해군첩보부대에서 복무하던 해군 [7] 현재는 아닌 것으로 명백히 밝혀졌지만 한 때, 일부 UDU출신들이 인천상륙작전 참전 해군인원이 UDU요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쓰거나 주장을 했다. 6.25는 UDU 창설 이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해군 첩보부대원이 6.25에 참전했다고 말을 하면 사실일 여지가 있으나 UDU가 6.25에 참전했다는 주장은 명백히 거짓이다. [8] UDU의 마지막 북파공작은 1971년으로 밝혀졌다. [9] 북한어 사전: 제국주의자들에게 매수되어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간첩 [10]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북파한 호림부대의 경우에도 당시 군은 청년들이 북한 인민군과 보안군 등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서 발생한 의거라고 발표했다. [11] 오항균 전 정보사령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군번도, 계급도 없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일명 '돼지'라 불리던 민수공작원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던 것이 사실이다. [1972.7.4.] [13] 예시 [14] 실미도 부대의 예정 침투법 [15] 사실 한국전쟁도 휴전만 된 것이고 종전 선언이 없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도 전시에 해당한다. 다만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상 평시로 간주된다. [16] 논문에 따르면, 2000년 A3 난수방송이 중단되면서 인터넷, 데이터통신 등의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17] 전기철조망 앞에 있어서 감전될 확률을 높이고, 넘어가는 순간에 잠복호의 사격 대상이 된다 [18] 민가에서 간첩신고를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많이 훔칠 수 있을 때도 표시나지 않게 조금만 훔친다. 부대 근처 민가를 대상으로 훈련을 하고, 훈련을 마치면 대위(과장)가 찾아다니며 돈으로 배상해준다. [19] 이 대원은 나이프 투척 훈련에서는 무사했지만, 선배들에게 물고문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사망했다. [20] 듣기엔 쉬워보이지만.. 따라 할 생각은 하지 말자. 셰이빙 크림을 써도 아차하면 베인다. 면도기라는 문명의 은혜에 감사하자. [21] 이들은 서울에 들어와서 검문에 발각될 때까지 훈련 중인 방첩대로 위장하였다. [22] 당시 계획상 서울로 진입한 후에는 취객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23] 많이 뛰어야 하기 때문에 [24] '손목보호대, 무릎보호대' 같은 보호대를 말한다.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양말에 끼워넣기 위해 사용한다. [25] 비상식량 찐쌀이나 육포 같은 종류였다. 보존성과 휴대 용이성을 위해 마른 걸로만 가져간다. 무게 때문에 날짜 계산하여 부족하게 가져가고 부족한 식량은 훔쳐먹고 잡아먹는 식으로 구한다. [26] M1 카빈은 70년대에도 이미 구식이었다. 하지만 M16이나 AK에 비해 가볍다는 장점이 있다. AK 소총을 이용하면 현지에서 탄약을 조달할 수 있어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투가 벌어지면 숫자가 모자라 탄약을 빼앗을 힘도 없기 때문에 전혀 AK가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M1카빈을 지급한 것이다. [27] 이들의 구성은 잠수함 승조원, 안내원, 육상 전투원으로 나뉘었다. 잠수함 승조원들도 공작원으로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만, 자기들 힘으로는 탈출할 능력이 안 된다고 보아 집단 자살하였다. 안내원들은 상륙하였으나 생포되거나 사살당했다. 육상으로 탈출한 공작원들은 육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보겠다는 자신이 있을 만큼 대담하고 위험한 자들이었으며 거의 최후까지 살아남아서 도피했다. [28] 66식 권총 등. [29] 신문기사 [30]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옷 말고도 운동복과 반코트를 버려 두고는 민가에서 다른 운동복으로 훔쳐 입기도 했다. 이 무장공비들의 사복에 대한 내용은 1997년 6월 25일 국방부에서 발행한 서적 "누가 이들을 나약한 신세대라 부르겠는가" 에서도 나온다. [31] 당시 뉴스 [32] 북한에서 평양 거주는 그 자체만으로 특권이다 [33] 물론 북한에서 상당한 수준의 생활수준이라고 해도 남한의 평범한 가정 생활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굶거나 생필품이 부족하지는 않는 정도에서 더도 덜도 아니라고 보면 된다. 그냥 방 2~3개 정도의 집과 밥을 굶지 않는 수준의 생필품에 텔레비전 시청, 배불뚝이 모니터가 달린 구식 컴퓨터 정도라고 보면 된다.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는 북한 국민들의 생활상은 이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34] 구 4급 공무원 [35] 당시 관계자의 증언으론 히틀러 유겐트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했다고 하는데 히틀러 유겐트도 정치적 색채가 진할지언정 원칙적으로 유소년 단체였고 전쟁 막바지에서야 투입됐을 뿐이다. 하물며 저정도 어린애를 훈련시킨 건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36] 정치범수용소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목격담이 있다. [37] 다만 북한이란 사회가 으레 그렇듯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있으면 간첩이니, 반당혁명종자니하면서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수시로 처형하는 게 일상인 동네이므로 저들이 정말 북파공작원이었는지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참고로 북한은 1960년대까지는 생포한 북파공작원들을 공개처형하긴 했으나, 그 이후로는 침투사실 자체를 인민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