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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리스는 경제학자, 역사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이며 영문위키 프로필에서도 직업을 "물리학자 (physicist), 작가 (Writer), 에디터 (editor)"라고 적시하고 있다. 실제 마두리스는 인도 자다브퍼 대학 (Jadavpur University)에서 물리학 학사를,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美 렌셀레어 폴리테크닉 공대에서 물리학 석사를,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도 Scientific American라는 美 과학잡지에서 편집자로서 일하고 있는 물리학과 더 관련이 깊은 사람이다. # 마두리스는 본인의 홈피에 작가 (Writer), 편집자 (Editor), 연구원 (Researcher)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 마찬가지로 마두리스는 해당잡지에서 가장 최근까지 올린 기고문들을 보면, 역시 “환경보호, 심리, AI 규제필요성, 공공의학, 동물”등에 대한 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두리스는 2017년부터 Scientific American에 다시 복직해 일하고 있는데, 2025년 기준으로 역사관련 집필한 책은 ① 벌거벗은 사람들의 땅: 석기시대 섬 주민과의 만남, The land of naked people : encounters with Stone Age islanders (2003), ② 처칠의 비밀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제국과 인도의 약탈, Churchill's secret war :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 india during world war ii. (2011) 모두 2권이다. 마두리스가 Scientific American에 최근까지 올린 칼럼 # 2009년 처칠과 간디 (Churchill and Gandhi)란 책으로 퓰리처상 (Pulitzer Prize) 최종 후보에도 오른 미국의 유명 역사가 아서 허먼 (Arthur Herman)는 마두리스의 책에 대한 비평의 일부이다. 처칠과 히틀러를 비교하는 이런 불쾌한 비교가 이 책의 핵심 주제입니다. 불행히도 실제 기록은 거의 모든 지점에서 그녀의 설명과 모순됩니다. 무케르지의 설명을 읽어보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주로
찬드라 보스와 같은 반영국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호의적인 동맹으로 묘사됩니다. 심지어 아메리 (Amery)조차 퀘벡회의에서 중요한 전쟁용 선박을 인도로 전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반론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총독은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인종차별적 음모론과는 거리가 먼.."모든 자치령 정부가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 "고 언급했습니다. 처칠과 전쟁 내각은 캐나다가 인도에 밀 10만 톤을 보내자는 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호주가 그 약속을 이행하고 25만 톤을 더 보내도록 촉구했습니다. This invidious comparison of Churchill with Hitler is the thematic hinge of the book. Unfortunately for the author, the actual record contradicts her account at almost every point. Reading Mukerjee’s account, one might never know there was a war raging in Europe and the rest of Asia. Germany barely rates a mention. Japan appears mainly as the sympathetic ally of anti-British Indian nationalists like Subhas Chandra Bose. Even Amery admitted, during the Quebec Conference, the “unassailable” case against diverting vital war shipping to India. Far from a racist conspiracy to break the country, the Viceroy noted that “all the Dominion Governments are doing their best to help.” While Churchill and the War Cabinet vetoed a Canadian proposal to send 100,000 tons of wheat to India, they pushed for Australia to fulfill that commitment—and 250,000 tons more. ARTHUR HERMAN, CAbsent Churchill, Bengal’s Famine Would Have Been Worse, JOctober 13, 2017 #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 (Amartya Sen) 역시도 마두리스를 다소신랄하게 비평했ㅏ. 마두리스는 아마르티야 센의 저서를 자주 인용했으면서도 경제학적으로 센에게 반박을 하지 못했으며 인용에 대해 비판받는 촌극이 연출됐다. 마두스리 무케르지는 정보가 거의 없어도 만족하는 듯합니다. 마크 타우거의 데이터는 27개 지구가 있는 분할되지 않은 벵골의 두 지구에서 정확히 두 개의 "쌀 연구 기지"에서 나왔습니다. 날씨 변화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모든 지구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제가 한 분석에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하려면 이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분석에 따르면 1943년(기근이 있던 해)의 식량 가용성은 1941년(기근이 없었던 해)보다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녀는 제 연구에서 사용한 데이터 범위를 무시하고 제 추정치가 "예측"에 근거한 것이라고 잘못 설명합니다. 무케르지가 언급한 다른 요점에서 그녀는 인도 국무장관의 성명에서 인용한 제 오타를 이야기로 만들면서, 오타가 식량 상황에 대한 제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0만 톤의 "부족"조차도 "60/70만 톤"(국무장관이 언급했듯이)의 총 작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물론 혼란스러운 문제는 Lelyveld가 지적했듯이 "부족"이라는 개념 자체입니다. 실제로 수요에 비해 상당한 부족이 있었고, 제가 자세히 설명했듯이 전쟁 경제에서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이는 이전 몇 년 동안 공급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Mukerjee는 이 중요한 구별을 놓친 듯하며, 처칠을 못 박으려는 그녀의 일심동체적인, 이해할 수 있는 시도에서 그녀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혼란과 무정함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는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Madhusree Mukerjee seems satisfied with little information. Mark Tauger’s data come from exactly two “rice research stations” from two districts in undivided Bengal, which had twenty-seven districts. Since weather variations have regionally diverse effects, it would require more than this to “seriously challenge” the analysis I made, using data from all districts, which indicated that food availability in 1943 (the famine year) was significantly higher than in 1941 (when there was no famine). Ignoring the range of data I used in my study, she misdescribes my estimates as being based only “on projections.” On the other point mentioned by Mukerjee, she makes a story out of a typo in my quotation from a statement of the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omitting to mention that the typo has not the slightest bearing on my assessment of the food situation. Moreover, even a “shortage” of 1.4 million tons is a small proportion of the total crop of “60/70 million tons” (as the secretary of state mentioned). The confounding issue, of course, is the idea of “shortage” itself, as Lelyveld has noted. There was indeed a substantial shortfall compared with demand, hugely enhanced in a war economy, as I have described in detail, but that is quite different from a shortfall of supply compared with supply in previous years. Mukerjee seems to miss this crucial distinction, and in her single-minded, if understandable, attempt to nail down Churchill, she ends up absolving British imperial policy of confusion and callousness, which had disastrous consequences. 무케르지의 편지에 대한 아마르티야 센의 응답 (Amartya Sen has sent the following comment on the above letter #)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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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3년 벵골 길거리에서 아사한 아이의 시신 |
1942년 말부터 1944년까지 인도 제국의 동부에서 진행된 대기근.
인도인 약 200~300만 명이 아사하였는데, 원인과 경과, 그리고 대처 과정을 두고 논란이 있다.
2. 배경
당시 인도의 인구 밀도[1] | 당시 캘커타의 모습 |
사실 벵골 지방은 무굴 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자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꿀땅이었다. 비단, 모슬린, 면화 등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은 서구와 교역하며 한때 무굴제국의 세금 절반이 여기서 걷혔고, 무굴 제국 GDP의 절반 가까이 여기서 나왔을 정도. 하지만 이러한 풍요는 필연적으로 서구 열강들의 이목을 끌었고, 벵골은 인도 아대륙 전체에서도 영국에게 가장 먼저 침략당해 수탈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무굴 제국의 혼란과 무굴 제국의 일개 태수였으나 제국의 혼란을 틈타 사실상 독립하여 독립 군주가 된 벵골 태수 나와브(Nawab)들의 실정, 마라타 제국의 침략과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국의 지배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쇠퇴하던 벵골은 여전히 인구 밀집도는 세계에서 가장 빽빽한 지방이라서 인도 전체 쌀 생산량의 3분의 1을 생산했고 식량 생산의 최전선으로 손꼽혔다.
벵골 대기근의 원인을 하나로 딱 잘라말하기는 어렵다. 벵골은 1901년부터 40년 동안 인구가 4210만 명에서 6030만 명으로 무려 43% 폭증했다.[2] 벵골 경제는 농업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농업 생산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았고 한때 비옥했던 삼각주는 환경 파괴와 지나친 농경으로 빈사 상태에 빠졌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88%에서 쌀을 재배했지만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벵골인들은 인도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쌀을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따라서 한때 식량 순수출 지방이었던 벵골은 식량 순수입 지방이 되어버려 한해 흉년이라도 들면 곧바로 기근에 취약해지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영국 식민정부의 정책적인 실패도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인도 제국의 토지 제도는 쓸데없이 복잡했고, 사회의 최하층인 소규모 자영농은 법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했다. 영국령 기간동안 부를 축적한 신흥계층인 부농 '조테다르'들은 고리대금으로 재산 불리기에 열중했다. 20세기초 세계적으로 닥친 대공황 때문에 상당수의 공식 금융기관들이 사라졌기에 가난한 자영농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비공식 금융, 즉 사채에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다. 자영농들의 빚은 날로 불어났고 빚을 갚지 못하면 현물을, 그마저도 없으면 바로 땅을 빼앗겼다. 부익부빈익빈은 갈수록 심해졌고 1940년대에는 수 백만명에 달하는 자영농들이 죄다 땅을 지주와 부농들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바로 이들이 대기근의 주요 피해자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끔찍한 대재앙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일본 제국이 영국령 버마를 침공하며 미얀마에서 들어오는 쌀 수입이 끊어졌고 50만 명의 난민들이 벵골로 쏟아져들어왔다. 전시 인플레이션 때문에 양모, 식량, 가죽 같은 생활 필수품의 가격이 폭증했다. 대일 전선의 최전선인 벵골의 타격은 더욱 심각했다. 그와중에 영국 식민당국은 청야전술을 펼쳐 일본군이 인접한 마을 3곳의 쌀을 태우는가 하면[3] 벵골 삼각주의 배를 강제징발해 식량 수송을 교란했다. 게다가 1942년에는 인도 국내에서도 자치권을 받은 각 주마다 무역 장벽을 세워서 벵골로의 쌀 수입을 막았다. 의도는 급격한 식량 가격 인상과 해외 유출을 막으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벵골인들이 서서히 목이 졸려 굶어죽어가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버마의 상실로 인해 캘커타가 전선 최전선이자 주요 군수기지로 떠올랐다. 영국령 인도 현지정부는 사회를 '우선 그룹'과 '비우선 그룹'으로 나누고 우선 그룹에게 물자와 식량을 먼저 배분했다. 우선 그룹은 주로 부르주아, 친영 인도인, 군인, 공무원 등이었고 매주 쌀과 식량을 배급받았다. 이들은 인플레와 상관없이 싼 가격에 물건을 공급받았고 물, 의료품, 말라리아 치료제를 충분히 받았다. 1942년 7월 기근의 조짐이 보일때에는 일반 근로자에도 이를 확대했는데 12월엔 약 100만명의 뱅골 근로자와 그의 가족들도 안정적인 물자를 공급받았다. 반면 빈민, 농부 등으로 구성된 '비우선 그룹'은 꼴이 비참해졌다. 인플레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았으며 치솟는 식량 가격을 버티지 못하고 굶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식민당국이 기근 전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42년 6월 벵골 정부는 쌀 가격 통제에 나섰고 가격을 시장가보다 상당히 낮게 고정시켜버렸다. 그러자 판매자들은 아예 쌀을 팔지않고 창고나 암시장으로 보내버렸는데, 이에 당황한 정부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쌀 가격통제를 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했다. 이런 조치에 힘입어 약 4개월 간 쌀 가격은 나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사이클론과 3번의 홍수가 겹치는 바람에 쌀 가격이 다시 치솟았고, 이번에는 정부의 가격 통제 시도가 먹히지 않았다. 1943년 3월에는 정부의 가격 통제가 아예 철회됐고 곡물가는 급속도로 올라갔다. 정부는 쌀이 부족하지 않지만 투기와 사재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1943년 말 벵골의 곡물가는 1년 전에 비해 8~10배로 뛰었고 정부는 가격 통제에 완벽히 실패했다.
벵골의 대기근에 쐐기를 박은 건 1942년 10월 몰아친 거대한 사이클론과 연이은 3차례 일어난 홍수였다. 사람 1만 4500명과 소 19만 마리가 죽었고 논도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엄청난 양의 논이 파괴됐다. 뒤따라 3번 일어난 폭풍 해일은 미드나포르의 방파제를 파괴했으며, 파도는 농경지 450평방마일을 휩쓸었고 대지 400평방마일이 홍수에 잠겼다. 바람과 폭우 때문에 토지 3200평방마일이 피해를 입었고, 생계에 악영향을 입은 벵골인은 최소 250만 명에 달했다. 마을 7400여 곳이 피해를 입었고 가옥 52만 7천 채와 학교 1900개소가 무너졌다. 주에서 가장 비옥한 논이 최소한 1천 평방마일 이상이 망가졌고 밭 또한 3천 평방마일 넘게 큰 피해를 입었다.
3. 전개
수백만 명이 굶어 죽게 방치한 영국![4] |
3.1. 일본의 버마점령 이후 패닉과 혼란
3.1.1. 벵골인들의 전쟁 패닉과 영국에 대한 반감 및 일본군에 대한 우호적 반응
영국에게는 인도의 전쟁 기여는 필수적이었다. 1945년까지 인도는 영국 인도 육군에 250만 명, 인도 해군에 3만 명, 인도 공군에 2만 8,538명을 파병했고, 1940년 5월부터 인도 국무장관 레오폴드 애머리는 매달 약 4만 톤의 곡물을 인도에서 수송하는 작업을 감독했고 인도는 20억 파운드 이상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대영제국의 전쟁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1939년 9월 5일엔 인도 방위법이 통과되어 인도총독은 영국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법령을 통과시킬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참전하기 전의 벵골에서는 전쟁에 대한 깊은 무관심이 만연했고 공습 경계(ARP) 훈련은 종종 무시됐다.[5]일본이 싱가포르와 말랴에에서 점령하는데도 성공하고 대영제국의 동쪽 끝으로 빠르게 진격하면서 인도는 전쟁에 가까워졌고, 전시 정책은 벵골의 여러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영국과의 갈등을 일으켰다. 1941년 10월, 인도 정부는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벵골 시간제를 도입했고, 학교, 사무실, 사업장은 근무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겼다. 중산층은 이 조치가 일상을 무너트렸다고 불평했다. 1941년 12월 캘커타와 그 근교는 '위험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당국은 추축국 방송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막기 위해 발견되는 모든 개인 라디오를 압수했다. 1942년 1월, 애머리는 린리스고우 경으로부터 인도 동부에서 추축국 동조 세력의 성장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경고를 받았다. [6]
캘커타가 일본군의 폭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노동자들은 공장을 벗어났다.[7]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버마에서 영국이 당한 손실은 영국에게 불안감만 줬을 뿐 아니라 굴욕적인 이미지까지 선사했다. 버마에서 영국의 혼란스러운 철수와 난민들의 고통은 영국의 평판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으며 벵골 주민들에게 제국의 종말이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게했고, 라지(영국령 인도)에 대한 믿음을 훼손시켰다. 실다와 하우라 기차역에서는 버마에서 돌아온 엄청난 수의 인도 난민들이 몰려온 탓에 일본의 승리는 확실하다는 느낌을 받고 영국의 제국이 종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난민들은 벵골 주민들에겐 후퇴하는 영국의 모습과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경고'를 보여줬다. 동남아시아 대피 과정에서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도 퍼지게 됐다. 유럽인들은 충분한 물자와 많은 짐꾼을 거느리고 철수했지만 인도인들은 억류되서 비참한 임시 수용소에서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죽게됐다는 것이다.[8]
영국은 자금이 부족해서 벵골에서 제대로 된 프로파간다가 어려웠다. 이로 인해 인도 마을 살마들은 주로 군인 가족으로부터 얻은 이야기, 마을 모임에서 소리 내어 읽은 신문 기사, 지역의 도시 상점에 있는 라디오 방송, 추축국이 유포한 반대 프로파간다를 통해 전쟁을 이해했다. 그리고 영국 채널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에 대해 일반 시민들은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영국은 버마에서의 철수 이야기를 왜곡하고 축소해서 프로파간다를 하고 난민들의 겪은 고난을 최소화한 탓에 공식 채널의 이야기는 벵골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일본에 대한 불안과 소문이 번성해서 국가에 대한 이미지가 흔들렸다.[9]
인도 중앙정보부가 발행한 1942년 3월 월간 정보 보고서:
"가장 거친 성격의 소문과 이야기가 계속해서 유포되었고, 일반적인 불안감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침략이 발생하면 내부 무법 상태와 공동체적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우려가 있습니다... 일본 침략자들이 점령지의 인도인과 다른 아시아 거주자들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다는 적의 영감을 받은 보고는 현재 널리 유포되고 있으며 우연히도 사실이 아니며, 일부 사람들이 일본의 통치가 실제로 축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 가지 이유를 제공합니다... 극동에서 연합군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인도가 침략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분노가 표출되었습니다."
Rumours and stories of the wildest nature have continued to circulate, and have helped to produce a general feeling of unrest … . There is general apprehension that should an invasion take place, there will be outbreaks of internal lawlessness and communal disturbances … . Enemy inspired reports, now in wide circulation, and incidentally untrue, that the Japanese invaders are treating Indians and other Asiatic residents of occupied territories with special consideration, provide one reason for the section of the people maintaining that Japanese rule might actually prove a blessing … . There has been much criticism of the Allied policy in the Far East, and resentment has been expressed over India’s alleged unpreparedness to meet aggression.[10]
Rumours and stories of the wildest nature have continued to circulate, and have helped to produce a general feeling of unrest … . There is general apprehension that should an invasion take place, there will be outbreaks of internal lawlessness and communal disturbances … . Enemy inspired reports, now in wide circulation, and incidentally untrue, that the Japanese invaders are treating Indians and other Asiatic residents of occupied territories with special consideration, provide one reason for the section of the people maintaining that Japanese rule might actually prove a blessing … . There has been much criticism of the Allied policy in the Far East, and resentment has been expressed over India’s alleged unpreparedness to meet aggression.[10]
인도 정부에 따르면 일본이 인도인과 다투지 않으며 폭탄을 투하하더라도 인도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라는 '속삭이는 캠페인'이 있었다. 캘커타의 특수부대(경찰)는 지방 전역에 유포된 소문의 종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유지했다. 정보부 관리들은 소문을 몇 가지 광범위한 범주로 '분류'했다.
첫째, 말레이시아의 인도 연대에 많은 사상자와 불만이 있다는 인도군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 이를 보고한 장교는 그 소문이 거짓이며, 이 범주에 속하는 소문은 모집 지역에서 두려움을 유발하고 심지어 일반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도록 분명히 계산된 것이라고 재빨리 지적했다.
두 번째, 일본과 인도가 아시아의 일부이므로 일본이 인도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범아시아적' 서사였다. 이는 일본에 대한 인도의 반감과 침략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소문이었다.
세 번째,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인종적 적대감을 조장하고 영국 '침략자'와 일본 '구원자'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계산된 반백인 소문이었다.
마지막, 공황 상태와 내부적 혼란. 그리고 일반적으로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있었다.[11]
캘커타 경찰국장은 '어떤 사악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고의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성명을 반복해서 발표하며, 잠재적인 소문 퍼뜨리는 사람과 '법을 준수하고 무고한 시민'을 구분했다. 한 성명에서는 이러한 '악의적인 사람들'이 법을 준수하는 시민을 '파멸, 비참함, 심지어 죽음'의 위험에 빠뜨리려 한다는 분노가 커지고 있으며, 그들은 '도시 전체에 대한 범죄, 살인보다 더 나쁜 범죄'를 저질렀다고 언급했다.[12]
1942년 1월 특별 지부 보고서에 따르면, 1941년 12월 31일과 1942년 1월 1일의 단 이틀 동안 캘커타에서 가로채는 동안 '패닉 편지' 총 2천 통이 눈에 띄었다. 1941년 12월 15일자로 가로채인 벵골어 편지에서 캘커타의 아난타 바네르지는 파리드푸르의 아타시 데비에게 일본이 버마를 공격했으며 캘커타 자체가 며칠 내에 파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상황을 볼 때 영국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 절망적으로 패배하고 있습니다...'. 1941년 12월 18일에 가로채인 캘커타의 K. 사르켈이 바리살의 산티 데비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는 더욱 확실한 두려움을 강조했다. 사르켈은 데비에게 캘커타의 상황이 위급하며 사람들이 마을 집으로 도망가고 있으며, 그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또한 데비에게 일본이 아마도 인도의 '싱하푸르'를 점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언급된 것은 싱가포르의 함락을 의미하지만, 편지의 작성자는 싱하푸르가 인도 어딘가에 있다고 착각하면서 캘커타에서 시골 바리살로 전달된 불안감을 조성했다.[13]
두 형제인 '다다'와 비렌은 1941년 12월 30일에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다다'는 비렌에게 '비정상적인 시대'이므로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말라고 말했다. '다다'는 또한 캘커타 전체가 군부 통치 하에 놓이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모든 사람이 군부의 통제를 받게 되어 강제 대피 명령에 따라 이동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1942년 1월 24일 캘커타에 있는 '아누'가 비르부움에 있는 미스 사르카르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 '아누'는 자신이 아는 두 신사가 최근 양곤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왔으며, 그들에게서 추출된 총알은 '우리 당국의 소유물... 즉, 영국산 총알. 우리 당국이 이제 우리에게 연습을 시작했다.'라고 썼다. 특수부는 이 편지를 '매우 불쾌하다'고 보고, '작성자가 영국에 대한 반감을 퍼뜨리고 있다. 특수부는 그를 추적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이유로 편지를 보류하고 작성자에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벵골 외부로 보낸 편지도 비슷한 불안을 반영했다. 1942년 1월 2일자로 가로채인 편지는 가우르가 캘커타에서 칸푸르(현재는 칸푸르)에 있는 삼촌 N.K. 바라티야에게 쓴 것으로, 캘커타에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생명이 더 이상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습격을 예상하고 있으며 도시의 방어 시설이 약하다고 말했다. 가우르가 라지(영국령 인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이 정부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민 경비대원이 두 여성에게 쓴 두 통의 편지는 하나는 아이슬란드에, 다른 하나는 영국에 보냈는데,그 내용은 인도인은 영국의 승리를 원하지 않으며 영국이 전쟁에서 지면 영국이 '노예 국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14]
다른 편지의 내용은 주로 일본의 공격, 침략 또는 폭격에 대한 두려움과 영국 정부가 인도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에 관한 것이었고, 또한 독일과 일본이 인도인에 대해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과 일본이 인도를 구출하기를 바라는 내용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42년 1월, 다카의 산토시 무케르지는 캘커타의 두르가 차크라바르티에게 편지를 써서 페낭이 일본의 자비에 맡겨진 후, 일본이 그곳의 인도인들에게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계속하라고 격려했으며, 페낭에서 온 이 소식이 '임박한 주인의 교체 시기에' 벵골인들의 마음에 희망을 불러일으켰다고 암시했다. 1942년 1월, 어느 라디오 아나운서는 '베를린 라디오'에서 히틀러가 인도를 해방시키지 않고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인도인들에게 확신시켰지만 아시아에 대한 개인적 야망은 없으며 오직 유럽과 아프리카에만 관심이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고 보도되었다. 논문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자비로운 해석은 적어도 일부 벵골인들에게는 파시즘이 제국주의보다 덜 공격적으로 보였음"을 시사한다.[15]
켈커타 주민들은 시골과 주변 지방으로 대규모로 이동했다. 캘커타는 원로 오랫동안 먼 곳에서 공장으로 온 노동자들로 이루어졌으나 일본의 선전포고에 따른 공황으로 인해 인접한 주에서 캘커타로 오는 노동자의 흐름이 중단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941년 12월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캘커타는 시민들은 공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동한 것이었다. [16]
"불안, 공포, 소문이 폭팔성 혼합물을 만들어 벵골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영국에 대한 불만과 좌절이 고조되고 친일적 동조가 조장되었고 많은 벵골 주민들은 인도에서 영국이 붕괴 직전이라고 확신했다. 일본이 인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커졌고,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오래된 속담이 통용됐다. 이는 혁명적 운동과 1942년 후반의 '인도를 떠나라' 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다.[17]
3.1.2. 벵골지역 친일 독립운동가들의 반영 투쟁
정치적 활동주의는 시골에서 동원의 형태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고, 그 대부분은 인도 국민회의의 관할권과 통제 밖에 있었다. 1939년에서 1942년 사이의 기간에는 소규모의 종종 지역적인 정당이 수행한 극심한 반영국 선전의 벌어졌다. 이들은 인도 국민회의의 범위와 권한을 벗어난 집단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정당을 포괄적인 용어인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분류했으며, 영국 정부의 이 '테러리스트 집단'에는 아누실란 사미티Anushilan Samiti, 주간타르 당원Jugantar Party, 슈리 상Shree Sangha(인도 캘커타의 사교 클럽), 벵골 의용대Bengal Volunteer Group, 전진 블록Forward Bloc이 포함되었으며, 모두 다양한 정도로 수바스 찬드라 보스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특히 많은 학생 추종자를 확보했다. 찬드라 보스가 1942년 초에 독일, 나중에는 일본과 동맺을 맺자 정당들의 사기가 올라갔다.[18]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자 찬드라 보스는 인도를 해방할 기회를 모색했고,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면 발생할 수 있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약화를 이용할 준비를 했다. 보스 자신은 일본의 군사적 기술과 공격성에 대해 많은 존경심을 가졌다. 간디가 예상하기 훨씬 전인 1930년대 중반과 후반에 보스는 비폭력적인 대중 운동을 재개하겠다는 위협을 벌일 때 영국에 최후 통첩을 내리는 것도 포함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찬드 보스는 전쟁을 인도에 유리하게 이용할 필요성을 계속 강조했고, 의회에 단호하게 행동하고 대중 운동을 통해 영국에 압력을 가해 인도를 떠나게 하라고 주장했다. 찬드라 보스는 40대 초반에도 젊은이들과 공감하며, 젊은이들에게 제국주의의 모든 반동 세력과 민족주의 진영에 맞서는 '남자다운' 싸움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1940년대 초, 찬드라 보스는 학생 대회에서 '진정한 애국자'라면 제국주의와의 '간디적 타협'에 주의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러한 견해는 벵골의 다양한 혁명 집단에 공감을 얻었다.[19]
찬드라 보스는 영국 제국주의와 타협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1939년 트리푸라 의회에서 찬드라 보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간디는 그것을 자신의 패배로 여겼다. 하지만 간디와 그의 지지자 대부분은 보스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의회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하자 보스는 의회에서 사임했다. 1939년 의회 의장직에서 사임한 후 전진 블록을 결성해서 반식민지 활동을 확대했으며, 1940년 7월에는 1760년에 세워진 이 제국 기념물인 홀웰 기념비 철거 운동에 착수했다. 이 기념비 인도의 노예화와 굴욕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찬드라 보스는 힌두교와 무슬림 학생 모두의 지지를 확보하고 특히 벵골에서 인기를 높였다. 이후 찬드라 보스는 1940년 7월 홀웰 선동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보스의 건강은 위험할 정도로 악화되었고, 린리스고와 허버트(벵골 주지사)는 감옥에서 보스의 죽음을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신 1940년 12월에 보스의 집으로 보내 그곳에서 가택연금을 했다. 그래서 캘커타의 저택에서 가택 연금 당했지만 1941년 1월 영국 관리들의 눈앞에서 탈출했고, 이 사건은 벵골인들에게 흥분을 일으켰다.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가 함락된 후, 찬드라 보스는 인도에 첫 공개 방송을 하여 일본의 승리는 영국 제국의 붕괴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찬드라 보스의 첫 방송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신나는 설렘'이 터져 나왔다. 찬드로 보스는 방송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인도의 자연스러운 동맹국이며 이 나라들은 인도의 독립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해 6월 12일 기자 회견에서 보스는 이 점을 반복했지만, 인도가 반란 직전이며 속박의 사슬을 끊고 싶어한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찬드라 보스는 추축국이 인도를 공격하고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확신했고 전진 블록의 추종자들에게 이 혁명을 가능하게 하라고 명확하게 지시했다. 블록의 '전복 캠페인'에는 영국 통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추축국의 군대 진입에 대한 대중의 준비를 위한 선전 강화와 일본군의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인도 동부 해안의 전략적 지점에 인도 '요원'을 배치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20]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이 형성되기 전에, 영국 정부에게 벵골의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지정된 단체들은 찬드라 보스의 계획에 따라 영국에 대한 대규모 봉기를 계획하기 시작하면서 프로파간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찬드라 보스 지지 집단의 결의를 강화했고 영국이 붕괴한다는 희망을 느끼며 프로파간다를 더욱 강화시켰다. 1942년 3월부터 4월까지 다카, 캘커타, 파리드푸르에 본거지를 둔 주간타르 당(Jugantar Party)운 보스가 추축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해방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렸다.주간타르 당(Jugantar Party)의 주요 지도자인 파니 마줌다르는 영국의 상황이 악화되면 '대규모 봉기'의 기회가 올 수 있고, 이 위기가 다가오고 있으니 당에 대비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편지는 1941년 3월 초에 정보부 관리들에게 입수되었다.[21]
1941년 당시, 간디는 대중 운동을 하지 않고 대신 개인적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를 시작했다. 당시에 간디는 그 단계에서 대중 운동을 시작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느꼈으며, 전쟁의 그 단계에서 영국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를 할 동료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사티아그라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폭력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가 완전히 믿는 사람들만 선택했다. 주간타르당은 이러한 움직임을 비난했다.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인 부펜 다타는 벵골의 젊은이들이 사티아그라하 프로그램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좀 더 '활기찬' 것을 요구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사티아그라하에 반대했던 또 다른 당 지도자 마노란잔 굽타는 영국이 전쟁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무장 혁명을 일으키기에 완벽한 시기가 될 것이며, 모푸실에서 정부의 눈에 보이는 상징인 경찰서를 폭도들이 쉽게 점령하고 무기를 약탈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다타는 제소르와 쿨나라는 지역구에서 주요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농민들에게 전쟁 상황을 설명하고 적절한 순간이 오면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경찰을 경찰서에서 몰아내라고 촉구하기 위해 제소르로 구성원을 보냈다. 정보부 관리들은 이 두 사람을 곧 처리하지 않으면 벵골에서 폭력이 빠르게 퍼질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경찰서는 '결의한 폭도'에 직면하면 취약했다. 경찰서에 대한 공격은 나중에 벵골의 Quit India 운동의 결정적 특징 중 하나로 입증되었다. 1942년 9월 29일에는 미드나포르에서 3개의 타나(경찰서)가 '혁명가'에게 동시에 공격당했다.[22]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대 초부터 아누실란 사미티(인도 혁명단체)는 영국이 전쟁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때 마지막 투쟁의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고 인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장 봉기를 계획해 왔다. 사미티 지도자들은 학생, 노동자,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라지샤히, 티페라, 비르부움, 미멘싱, 바카르간지, 캘커타 등 여러 지구에서 재조직 운동을 벌였다. 1940년에 이 당은 이름을 혁명적 사회당the Revolutionary Socialist Party (RSP)으로 변경했다. 정보부 관리들은 1940년 7월~8월에 두 장의 '선동적인' 전단지를 회수했다. 첫 번째 전단지는 벵골어로 'Biplabi Senar Dal Egiye Chalo(혁명군의 군인들이여, 진군하라)'라는 제목으로, '혁명의 군인들'에게 영국의 손에서 행정부를 빼앗고, 투옥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혁명을 승리로 이끄자고 호소했다. 두 번째 전단지는 '승리 아니면 죽음을 향하여'(제목이 간디가 나중에 한 '행군 아니면 죽음'이라는 호소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함)라는 제목으로, 150년간 인도를 묶어 온 사슬을 끊고 독립을 쟁취할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이 전단지는 1940년 7월 13일 캘커타에서 열린 전 벵골 무슬림 학생 협회 회의에서 배포되었다. 또한 사미티는 무장 혁명이 일어날 경우 정부 기관을 공격하기 위한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23]
1942년 4월, 정보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벵골을 침공했을 때 RSP는 무장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이 인도를 침공하면 인도에 독립을 허락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노아칼리, 바리살, 미멘싱, 다카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3월에 RSP는 다카와 치타공에서 '그때와 지금'이라는 제목의 벵골어 팜플렛을 배포했는데, 이는 인도 공산당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에서 영국을 지원한 것을 비난하고 지금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 혁명을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다카에서 발견된 여러 전단지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지도 하에 있는 모든 인도 혁명당이 전쟁이라는 기회를 이용하려던 시기에 공산당이 배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1942년 7월에 정보부는 RSP를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평가했다. "RSP는 극렬하게 영국에 반대하며 영국의 통치가 생활비 상승, 인도의 필수 식량 고갈, 영국군이 안전하게 후방에 있는 동안 인도인을 전투의 최전선에 배치한다는 선전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려 하고 있습니다." 1942년 1월 특별 지부 보고서는 캘커타의 전진 블록이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서 일본의 성공에 열광했으며 일본이 궁극적으로 인도를 침략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지도자들을 대량 체포할까봐 경계하는 한편, 진방 블록은 승전한 일본이 그들을 풀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본이 점령지에서 아시아인을 '괜찮은 대우'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보도되었기 때문에 캘커타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24]
비국민회의 운동의 중심지인 미드나포르에서는 혁명적 테러리즘에 대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930년 치타공 병기고 약탈 사건이 발생했고, 경찰은 약탈자를 숨겨 주었다는 의심하여 컨타이(서벵골 주 퍼바 메디니푸르 지구의 해안 및 하위 구분 도시이자 지자체) 마을을 약탈했고, 부팔 찬드라 판다Bhupal Panda(인도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영국 식민지 관리들에 대한 암살을 감행한 인도 혁명가이자 벵골 의용대원)와 Sukumar Ghose(벵골 의용대원의 선두주자)는 혁명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30년과 1933년 사이에 미드나포어는 억압적인 정부 법률을 횡포하고 종종 잔인하게 시행한 것으로 알려진 3명의 지방 행정관을 연달아 암살한 사건으로 공식 사회에서 악명을 얻었다.미드나포어와 치타공에서 확산되는 혁명 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1932년 벵골 테러 진압법과 비상권한령이 통과되었다. 1931년 지방 행정관 제임스 페디James Peddie가 살해된 후, 다양한 혁명 테러 집단의 약 20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공격자를 식별할 목격자나 정보 제공자가 나오지 않아 지역 관리들은 지역의 성향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분노에 대한 동정심의 밑바탕에 있는 것 같았다’. 전쟁이 발발한 후, 미드나포르는 이러한 혁명 집단의 선전에 새로운 활력을 얻어 노출되었다. 1942년 4월, 1930년대부터 찬드라 보스와 매우 가까웠던 벵골 의용대 구성원들은 일본을 환영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 지역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인 라자니 자나는 콘타이의 해안 지역에서 그룹 구성원들을 만나 일본이 그 지역에 상륙하면 일본과 협력하라고 조언했다. 1942년 2월, 미드나포르에선 벵골 의용대에 대학생을 모집했다.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1942년 4월부터 캘커타의 그룹 구성원들이 미드나포르의 구성원들과 연락을 유지하여 공산당의 반파시스트 선전에 속지 않도록 막았다고 한다.[25]
또한 여러 다른 반영국 팸플릿과 전단지가 유통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혁명 인민당에서 발행했다. 1942년 2월, '깨어나라 혁명당'이라는 제목의 벵골어 전단지는 영국에게 임박한 몰락을 예측하면서 '수바스 보스 진다바드'라는 슬로건으로 마무리했다. 영어로 쓰여지고 수바스 락시 달Subhas Rakshi Dal(수바스 방위 그룹)에서 발행한 또 다른 전단지 '비드로히(혁명적)'는 싱가포르가 인도 군인들이 싸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되었다고 선언하고 인도 군인들에게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수바스 근위대는 국제 상황을 이용하여 인도를 해방해야 하며, 인도의 젊은 혁명가들은 '비드로히 수바스 보스의 무장 혁명에 대한 명확한 부름'에 응하여 수천 명씩 수바스 근위대에 합류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일 감정이 반드시 파시즘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찬드라 보스 자신은 이에 대해 단호했으며, 추축국과의 동맹이 추축국의 이념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친일 감정은 단지 영국을 축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정보 보고서는 이러한 태도를 정확히 요약했다. '그들이 한때 매우 강력하다고 생각했던 영국이 지금은 약해 보입니다. 그러니 왜 일본에 저항해야 합니까? 잠재적인 승자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찬드 보스의 추종자 중 다수는 보스의 개입만으로도 일본이 인도의 독립 추구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는 정보 당국에 의해 '근시안적'이며 수바스 경비대의 '사고방식의 변태성'을 반영한다고 조롱받았다.[26]
3.2. 처칠과 영국정부의 벵골 해안 초토화
"당장은 일본이 아니라 영국이 벵골 시골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벵골인들의 인식[27]
당시 벵골인들의 인식[27]
1941년 말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영국-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동인도, 필리핀, 인도차이나, 태국, 버마를 빠르게 점령하고 인도 아대륙 동쪽 끝의 치타공 시를 포격했다. 1942년 3월 10일 버마가 함락된 후 일본군이 버마에 인접한 벵골 해안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적절한 방어 장비가 부족했다. 게다가 메디니푸르의 수실 다라를 포함한 많은 벵골인들은 일본의 성공에 기뻐했다. 군부는 벵골 사람들이 일본을 환영할까봐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유로 윈스턴 처칠 총리는 1941년 11월 14일 ' 초토화 정책'을 주장했다. ' 초토화 정책'은 항복할 영토를 대량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초토화정책을 채택했고, 시행은 인도 정부와 벵골 정부가 해야 했다.[28]
그 초토화정책의 이름은 '디나이얼 정책'이었다. 디나이얼 정책에는 쌀 디나이얼 정책과 보트 디나이얼 정책이라는 두가지 형태가 있었다. 군 당국은 1942년 초에 디나이얼 정책을 실행했다. 미드나포르, 바카르간지, 쿨나의 해안 지역에서 작물 연도가 끝날 때까지 10명 이상의 승객을 현지 요구 사항을 초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쌀과 논을 운반할 수 있는 모든 보트를 제거, 파괴 및 침몰시킨 것이다. 보트 디나이얼 정책은 일본이 하류 삼각주를 통해 벵골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1942년 5월에 제정되었으며 마침내 1943년 6월에 모든 제한이 제거되었다. 이 기간 사이에 기근이 여러 곳으로 퍼졌다. 1942년 11월 말까지 총 66,563척의 보트가 파괴되고 침몰되었으며 제거되었다.[29]
보트 파괴는 가난한 농부와 어부의 생계를 파괴했다. 보트 제거는 식량 공급의 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벵골은 주로 습지와 죽은 수역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보트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미드나포르에선 지방 판사가 콘타이의 모든 유형의 보트를 3시간 안에 제거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수백 척의 배가 불에 탔고, 보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부들은 어장에 갈 수 없었고, 농민들은 농작물을 포기해야 했으며, 도예가들은 상품을 시장으로 운송할 수 없었다. [30]
이 보트 디나이얼 정책은 많은 보트맨과 어부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노동계급 사람들은 생계가 부족하여 사망했다. 마다리푸르 마을의 아리얼 칸 강둑에 그런 보트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디나이얼 정책은 교통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여러 지역에서 식량 부족을 초래하며, 물가를 인상시켰다. 또한 마다리푸르 시 근처에 콜라(Darga Khola)와 쿨파디(Kulpaddi)라는 두 마을이 있니다. 아리얼칸강 건너편에는 넓은 지역에 농부들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의 기근에 시달리고 궁핍한 사람들은 식량을 바라며 마을로 왔다. 어부 계층의 경제는 배를 철거하면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1943년 12월, 한 기자가 동벨골의 파리드푸르를 방문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당시 200가구가 사는 어촌 마을에서 50가구가 완전히 몰살당했고, 3만 5천 가구가 쿤 캠프와 비행장 건설로 인해 집과 농작물을 잃었다.[31]
몇 달 사이에 선박 총 4만 6146척이 군사적 목적으로 징발되어 침몰하거나 파괴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사용이 중단되었고, 벵골의 강 교통 인프라는 심각하게 마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캘커타는 더욱 중앙 집권화되었고 주변 지역은 더욱 소외되었다. 그 후 시골의 삶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캘커타에 대한 일본의 두려운 공격이 실현되지 않자 몇 달 전에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점점 더 희소해지는 자원을 찾아 캘커타로 다시 힘겹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도시의 요구는 더욱 커졌다.[32]
쌀 역시 제거대상이 됐다. 경찰은 마을에서 집집마다 급습하여 가능한 많은 쌀을 파괴하거나 강제로 정부요원에게 쌀을 보냈다. 마을의 농부와 상인들은 경찰에 분노했다. [33] 미드나푸르에선 어느 날 군중이 쌀 선적를 막기 위해 정미소 밖에 모이지 경찰이 발포해서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 일어났다. 1942년 2월 동벵골의 문시간즈에 도착한 인도 공무원 아쇼크 미트라Ashok Mitra는 수천 톤의 쌀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약 10톤밖에 보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경찰이 다른 재고를 파괴하거나 압수한 것이었다.[34] 정부 요원들은 많은 캘커타인이 도망친 바로 그 시골로 가서 강제와 강압으로 찾을 수 있는 모든 쌀을 구매했다. 몇 달 만에 여러 지역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들은 해안 지역에서 "잉여" 벼를 벗기는 데 크게 성공했다. 이 쌀은 표면적으로는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하고 산업 노동력을 만족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대부분은 단순히 시장에서 제거되어 기업 창고에 비축되거나 그 자리에 서서 썩도록 내버려 두었다("D. L. Mazumdar의 증언"). 심지어 시골에서 기아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미 1942년 4월에는 쌀 가격이 위험할 정도로 상승했고, 캘커타에서는 "비싼 수당"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노동 파업이 있었고, 쌀에 대한 보장된 접근성을 위해 상점을 통제했다. 거부는 위험을 더 높여 쌀 가격에 더 많은 해로운 압력을 가하고, 전통적인 시장 시스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미 불안한 국민에게 국가의 고조되는 불안을 경고했다.[35]
이러한 디나이얼 정책은 해당 지역 사람들의 삶과 경제를 파괴했다. 버마가 함락된 후 영국 정부가 배 거부 정책과 쌀 거부 정책을 포함한 '초토화 정책'을 채택했고 이런 정책은 벵골에 부과되어 벵골을 기근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배 디나이얼 정책은 파리드푸르 어부들의 생계를 파괴했고, 쌀 디나이얼 정책 하에서 파리드푸르에서 쌀 생산량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강제로 쌀 가격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 요원들이 쌀을 사들여 쌀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하여 쌀 시장 체계가 파괴되고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여 대중 생활에 기근이 초래되었고, 파리드푸르 지구에도 기근이 촉발되었다.[36]
1942년 12월 20일, 캘커타는 일본군의 폭격을 받았다. 공습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소식은 델리에서 검열되었고, 공식 보고서는 상당한 파괴나 이주를 부인했지만 도시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쌀 상인과 대규모 재고업체(대부분이 다른 곳에 뿌리를 둔 마르와리족)가 상점을 봉쇄하고 더 안전한 항구로 떠났다. 동시에 식민지 정부는 다양한 상공 회의소와 협력하여 전쟁 기계를 계속 가동해야 했고, 이는 무엇보다도 산업 노동력을 위한 풍부한 쌀 공급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1942년 12월, 일본의 이 일련의 폭격 중 네 번째가 있은 후, 정부는 폐쇄된 개인 창고의 자물쇠를 풀고 찾을 수 있는 모든 쌀을 징발했다. 며칠 만에 캘커타에 있는 재고의 3분의 2가 즉시 압수되었다. 기근 조사 위원회의 벵골 보고서에 따르면, "그 순간부터 일반적인 무역 기계로는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고 위기가 시작되었다" 쌀 가격이 급등하고 점점 더 많은 공급이 번창하는 암시장으로 들어가자 정부와 산업계는 다시 한 번 시골로 몰려들어 가격 통제를 포기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벼를 사들였다. 캘커타에서는 투기꾼과 쌓아두는 사람들이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국과 모든 대형 산업 회사가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캘커타는 벵골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곳이 되어 가고 있었고, 모든 지역에서 쌀이 점점 더 부족해졌다.[37]
인도 국회는 벵골의 '거부' 정책이 엄청난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안은 1942년 8월의 '인도 탈퇴' 운동이 전개되는 데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38]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동벵골 주민들의 배를 빼앗는 것은 '중요한 사지를 잘라내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39]
벵골 시민들의 입장에선 "당장은 일본이 아니라 영국이 벵골 시골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벵골의 많은 사람들에겐 외국 침략자가 점령하던 말던 정부가 이미 취한 방어 조치보다는 더 파괴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40]
한국 인터넷에서 처칠의 영국 정부가 벵골 해안에 "Scorched earth 초토화"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벵골 대기근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학 논문은 영국 정부가 시행한 행위가 "Scorched earth 초토화"라는 것에 동의한다.
이 장에서는 연합군 대 일본 전쟁의 최동쪽 전선이 된 벵골의 행정과 주민 모두를 사로잡은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캘커타는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도시가 되어 전쟁 생산과 병력 이동에 점점 더 필수적인 도시가 되었다. 일본의 육로 공격을 두려워한 식민지 정부는 일본이 침략 시 캘커타로 진격할 자원을 '디나이얼'하기 위해 벵골 해안 지역에 초토화 정책을 시행했다. '방어'라는 명목으로 쌀, 배, 영토를 압수하여 벵골 주에 엄청난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다. 인도 국회는 벵골의 '거부' 정책이 엄청난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안은 1942년 8월의 '인도를 떠나라' 운동이 전개되는 데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__. 그 사이 벵골 시골에서는 흉년과 굶주림이 계속되어 아사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10월에는 대규모 사이클론이 캘커타 남서쪽 지역을 초토화시키면서 기근 난민의 첫 번째 물결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불과 두 달 후 일본은 캘커타 항구에 공습을 감행하며 도시에 전쟁을 불러왔다.
Mukherjee, Janam, 'Denial', Hungry Bengal: War, Famine and the End of Empire (2015; online edn, Oxford Academic, 21 Jan. 2016), https://doi.org/10.1093/acprof:oso/9780190209889.003.0003, accessed 1 Jan.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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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chapter details the increasing anxiety which gripped both the administration and population of Bengal, which had now become the furthest eastern front of the Allied war against Japan. Calcutta, in turn, had also become the most important industrial city in Asia, increasingly essential to war production and troop movements. Fearing an overland Japanese attack, the colonial government enacted a scorched earth policy in the coastal regions of Bengal, in order to “deny” Japan the resources to advance on Calcutta in the event of invasion. Rice, boats and territory were seized in the name of “defence,” causing tremendous economic dislocations in the province. Understanding that the “denial” policy in Bengal was creating immense hardships,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issued a resolution sharply critical of it. This resolution was of fundamental importance to how the “Quit India” movement of August 1942 played out. Meanwhile, scarcity and hunger were all the while whittling away at the Bengal countryside and starvation was steadily increasing. In October a massive cyclone devastated the district just southwest of Calcutta, propelling the first wave of famine refugees into the city. Just two months later Japan mounted air-raids on the Calcutta port, bringing war home to the city.
Mukherjee, Janam, 'Denial', Hungry Bengal: War, Famine and the End of Empire (2015; online edn, Oxford Academic, 21 Jan. 2016), https://doi.org/10.1093/acprof:oso/9780190209889.003.0003, accessed 1 Jan. 2025.
일련의 과정과 결정이 이 비극을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인도 동부 벵골 지방의 기근은 전쟁으로 인해 인도에 가져온 만연한 혼란 없이는 발생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은 아대륙의 자원을 크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버마가 함락되자 벵골 동부는 최전선이 되었고 적으로부터 인도를 방어하는 것은 영국 제국의 붕괴를 막는 데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1942년 중반, 인도의 영국 당국은 일본의 인도 침공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지만 본질적으로 벵골의 농업 종사자들의 수입 수단을 박탈했다. 농촌 인구의 빈곤에 더해, 1942년 10월, 오리사와 벵골의 해안 지역은 먼저 사이클론에 맞았고, 그다음에는 해일에 휩쓸려 풍경이 황폐화되었고 이 지역은 다가올 기근에 더 취약해졌다. 이 재난으로 인해 250만 명이 사망하거나 생계를 잃거나 삶의 터전이 쫓겨났다.
Simonow, Joanna.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2020): 168-197.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3086534.2019.1638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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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though a series of processes and decisions contributed to the making of this tragedy, the famine in India’s eastern province of Bengal could not have occurred without the pervasive disturbances brought upon India by the war. With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d War, Britain began to draw heavily on the subcontinent’s resources. When Japan advanced in the East and Burma fell, the East of Bengal became a frontline and defending India against the enemy was considered essential for warding off the collapse of the British Empire. In mid-1942, the British authorities in India had introduced a scorched earth campaign that aimed to deter Japan from invading India but essentially deprived Bengal’s agriculturalists from their means of income. Adding to the impoverishment of the rural population, in October 1942, the coastal line of Orissa and Bengal was first hit by a cyclone and then by tidal waves that devastated the landscape and made the region more vulnerable to the coming famine. The disaster affected 2.5 million who died, lost their livelihood or were uprooted.
Simonow, Joanna.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2020): 168-197.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3086534.2019.1638622.
초토화 정책:
1942년 3월 10일 버마가 함락된 후 일본군이 버마에 인접한 벵골 해안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적절한 방어 장비가 부족했다. 게다가 메디니푸르의 수실 다라를 비롯한 많은 벵골인들은 일본군의 성공에 기뻐했다. 군부는 벵골 주민들이 일본군을 환영할까 봐 두려웠다. 이런 이유로 1941년 11월 14일 윈스턴 처칠 총리는 '초토화 정책'을 주장했다. '초토화 정책'이란 항복할 영토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인도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감안할 때 벵골 총독 존 아서 허버트 경과 총독 린리스고우 경은 벵골을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해 자원 투자나 곡물 저장을 피해야 하는 일종의 전쟁 위험 지역으로 취급했다.
초토화 정책의 불길한 이름은 '거부 정책'이다. 이 거부 정책에는 쌀 거부 정책과 배 거부 정책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군 당국은 1942년 초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중요한 조치를 포함하는 거부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하나는 미드나푸르, 바카르간즈, 쿨나의 해안 지역에서 수확기가 끝날 때까지 현지 필요량 이상으로 추정되는 쌀과 벼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침략에 취약한 것으로 간주되는 델타 지역에서 1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모든 배를 제거, 파괴, 침몰시키는 것이었다(Woodhead, 1945, 25쪽). 1942년 5월 일본의 벵골 하류 델타 침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트 거부 정책이 시행되었고, 마침내 1943년 6월 모든 제한이 철폐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여러 곳에서 기근이 퍼졌습니다. 1942년 11월 말까지 총 66,563척의 배가 파괴, 침몰, 제거되었다(우드헤드, 1945, 26쪽). 보트 금지 정책이 시행된 배경에는 1942년 바카르간즈의 차 둘라샤르에서 일본군 장교 7명이 관용선을 이용해 정찰 상륙을 피해 탈출하려 했으나 정부가 일본군이 벵골로 잠입할 때 관용선을 이용했다고 하여 일본군이 위험하다는 증거로 인용한 사건과 같이 일본군이 보트를 사용한 드문 사건이 있었다(De, 2006, 13쪽).
파리드푸르 지역의 마다리푸르 마을에 거주하는 아말렌두 데이는 그의 글 '뱃사람과 어부의 곤경'에서 "이 (보트 거부) 정책은 많은 뱃사람과 어부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며 뱃사람과 어부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노동 계급의 사람들은 생계 부족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마다리푸르 마을의 아리얄 카 강 유역에 그런 배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반면에 거부 정책은 교통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여러 지역에서 식량 부족을 유발하며 물가를 상승시켰다.(Dey, 2015, 138쪽). 그는 또한 "마다리푸르 시 근처에 다르가 콜라와 쿨파디라는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리아르 카 강 건너편에는 넓은 지역에 농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기근에 시달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 마을로 왔습니다."(Dey, 2015, 140쪽).
레오나드 조지 피넬은 기근 위원회에서 어선 철거로 인해 어민 계층의 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증언했다. 1943년 12월, 한 저널리스트가 동벵골의 파리드푸르에 방문했다. 그는 한 장로로부터 200가구로 구성된 어부 마을에서 50가구가 완전히 전멸했고, 군 캠프와 비행장 건설로 인해 35,000가구가 집과 농작물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기근으로 희생된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무카파디야, 2017, 84-85쪽). 50명의 어부 가족이 전멸했다는 사실은 파리드푸르 지역의 보트 거부 정책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보여준다.
Islam, Muhammad Saiful. "Impact of British fall in Burma on Bengal famine of 1943: experience of Faridpur district of Bangladesh." Southeast Asia: A Multidisciplinary Journal 24.1 (2024) https://doi.org/10.1108/SEAMJ-02-2023-0015
1942년 3월 10일 버마가 함락된 후 일본군이 버마에 인접한 벵골 해안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적절한 방어 장비가 부족했다. 게다가 메디니푸르의 수실 다라를 비롯한 많은 벵골인들은 일본군의 성공에 기뻐했다. 군부는 벵골 주민들이 일본군을 환영할까 봐 두려웠다. 이런 이유로 1941년 11월 14일 윈스턴 처칠 총리는 '초토화 정책'을 주장했다. '초토화 정책'이란 항복할 영토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인도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감안할 때 벵골 총독 존 아서 허버트 경과 총독 린리스고우 경은 벵골을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해 자원 투자나 곡물 저장을 피해야 하는 일종의 전쟁 위험 지역으로 취급했다.
초토화 정책의 불길한 이름은 '거부 정책'이다. 이 거부 정책에는 쌀 거부 정책과 배 거부 정책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군 당국은 1942년 초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중요한 조치를 포함하는 거부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하나는 미드나푸르, 바카르간즈, 쿨나의 해안 지역에서 수확기가 끝날 때까지 현지 필요량 이상으로 추정되는 쌀과 벼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침략에 취약한 것으로 간주되는 델타 지역에서 1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모든 배를 제거, 파괴, 침몰시키는 것이었다(Woodhead, 1945, 25쪽). 1942년 5월 일본의 벵골 하류 델타 침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보트 거부 정책이 시행되었고, 마침내 1943년 6월 모든 제한이 철폐되었다. 이 기간 동안 여러 곳에서 기근이 퍼졌습니다. 1942년 11월 말까지 총 66,563척의 배가 파괴, 침몰, 제거되었다(우드헤드, 1945, 26쪽). 보트 금지 정책이 시행된 배경에는 1942년 바카르간즈의 차 둘라샤르에서 일본군 장교 7명이 관용선을 이용해 정찰 상륙을 피해 탈출하려 했으나 정부가 일본군이 벵골로 잠입할 때 관용선을 이용했다고 하여 일본군이 위험하다는 증거로 인용한 사건과 같이 일본군이 보트를 사용한 드문 사건이 있었다(De, 2006, 13쪽).
파리드푸르 지역의 마다리푸르 마을에 거주하는 아말렌두 데이는 그의 글 '뱃사람과 어부의 곤경'에서 "이 (보트 거부) 정책은 많은 뱃사람과 어부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며 뱃사람과 어부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노동 계급의 사람들은 생계 부족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마다리푸르 마을의 아리얄 카 강 유역에 그런 배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반면에 거부 정책은 교통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여러 지역에서 식량 부족을 유발하며 물가를 상승시켰다.(Dey, 2015, 138쪽). 그는 또한 "마다리푸르 시 근처에 다르가 콜라와 쿨파디라는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리아르 카 강 건너편에는 넓은 지역에 농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기근에 시달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 마을로 왔습니다."(Dey, 2015, 140쪽).
레오나드 조지 피넬은 기근 위원회에서 어선 철거로 인해 어민 계층의 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증언했다. 1943년 12월, 한 저널리스트가 동벵골의 파리드푸르에 방문했다. 그는 한 장로로부터 200가구로 구성된 어부 마을에서 50가구가 완전히 전멸했고, 군 캠프와 비행장 건설로 인해 35,000가구가 집과 농작물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기근으로 희생된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무카파디야, 2017, 84-85쪽). 50명의 어부 가족이 전멸했다는 사실은 파리드푸르 지역의 보트 거부 정책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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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orched earth policy:
A situation arose that after the fall of Burma on March 10, 1942, the Japanese army might arrive on the coast of Bengal adjacent to Burma. The British government lacked adequate defense equipment to withstand a Japanese attack. Moreover, many Bengalis, including Sushil Dhara of Medinipur, were elated by the success of the Japanese. The military department was afraid that the people of Bengal might welcome the Japanese. For this reason, Prime Minister Winston Churchill on 14 November 1941 insisted on the ‘Scorched Earth Policy'. The ‘scorched earth policy' is the massive destruction of the territory to be surrendered (Mukhapadhya, 2017). Given the callous attitude of Winston Churchill, the British prime minister, towards India, both Sir Jon Arthur Herbert, governor of Bengal and Lord Linlithgow, the viceroy, treated Bengal as a kind of endangered war zone where resource-investment or grain storage was to be avoided for fear of Japanese intrusion (Islam and Tasnuva, 2021, p. 233).
The scorched earth policy's sinister name is ‘Denial Policy'. There are two forms of this denial policy are - the Rice Denial Policy and the Boat Denial Policy. The military authorities put into action of denial policy in early 1942 involving above mentioned two significant measures. One was the removal from the coastal districts of Midnapore, Bakarganj and Khulna of rice and paddy estimated to be more than local requirements until the end of the crop year, and the other was the removal, destruction and sunk of all boats, capable of carrying 10 passengers or more, from those parts of the delta considered vulnerable to invasion (Woodhead, 1945, p. 25). The Boat Denial Policy was instituted in May 1942 for fear of a Japanese invasion of Bengal through the lower delta and finally, in June 1943 all restrictions were removed. Between these periods, famine had been spread in many places. By the end of November 1942, the total number of boats 66,563 were destroyed, sunk and removed (Woodhead, 1945, p. 26). Behind the imposition of the Boat Denial Policy were stray and rare incidents of the use of boats by members of the Japanese armed forces, such as the incident in Char Dhulashar in Bakarganj in 1942, where seven Japanese army officers tried to escape from a reconnaissance landing using a government boat but the government said that Japanese army using country boat to sneak into Bengal and were cited it as evidence of the danger of the Japanese army (De, 2006, p. 13).
Amalendu Dey, a resident of Madaripur town in Faridpur district, spoke about the plight of boatmen and fishermen in his article Michhiler chape Longorkhana-“This (boat denial) policy endangered the lives of many boatmen and fishermen. These working-class people fell to death due to a lack of livelihood. We were shocked to see a stack of such boats on the banks of the Ariyal Kha River in Madaripur town. On the other hand, the denial policy complicates transportation problems, causes food shortages in various regions, and increases prices” (Dey, 2015, p. 138). He further said, “There were two villages named Darga Khola and Kulpaddi near Madaripur city. Across the Arial Kha River, there were farmers in large areas. The famine-stricken and destitute people of these regions come to the town in the hope of food” (Dey, 2015, p. 140).
Leonard George Pinnell testified to the Famine Commission that the economy of the fishing class had completely collapsed due to the removal of the boats. In December 1943, a journalist visited Faridpur in East Bengal. He was then told by an elder, that in his fisherman's village of 200 families, 50 of them had been completely wiped out, and 35,000 families had lost their homes and crops due to the construction of military camps and airfields. This is also a special reason for being sacrificed in Famine (Mukhapadhya, 2017, pp. 84-85). The fact that 50 fishermen's families were wiped out that shows how terrible the boat denial policy was in the Faridpur district.
Islam, Muhammad Saiful. "Impact of British fall in Burma on Bengal famine of 1943: experience of Faridpur district of Bangladesh." Southeast Asia: A Multidisciplinary Journal 24.1 (2024) https://doi.org/10.1108/SEAMJ-02-2023-0015
마찬가지로, 초토화 계획은 '내부 경제, 무역 및 행정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했다. 관리들은 일본이 삼각주 벵골을 침략할 경우, 정부의 시설과 지역 주민이 침략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부가 그 지역을 완전히 대피시키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고 잘못 믿었다. 정부가 시행한 또 다른 전시 조치는 해안 지역의 많은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켰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3년 동안 벵골에 주둔할 영국군을 위한 비행장으로 광대한 경작 가능한 농장을 전환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3만에서 3만 6천 가구 남짓한 인원, 약 15만~18만 명이 보상의 약속 없이 하룻밤 사이에 집에서 쫓겨났다. 이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중에 이미 높은 기근 사망률을 더 증가시켰다.
De, B. (2006). Imperial Governance and the Challenges of War: Management of Food Supplies in Bengal, 1943–44. Studies in History, 22(1), 14. https://doi.org/10.1177/025764300502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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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milarly, the Scorched Earth Scheme implied the 'complete destruction of internal economy, trade and administration'. The officials erroneously believed that in the event of Japanese invasion of deltaic Bengal, it was the government's responsibility to completely evacuate the region, lest the government's installations and the local people fell into the invaders' hands. Another wartime measure imple- mented by the government, which displaced a large numbers of villagers in the coastal districts, was the decision to transform extensive tracts of cultivable farms into airstrips for British armed forces to be stationed in Bengal for the last three years of the Second World War. Between 30,000 and 36,000 families, comprising 150,000 to 180,000 individuals, were uprooted overnight from their homes, without any promise of compensation. A large majority of these villagers later augmented the already high figures of famine mortality.
De, B. (2006). Imperial Governance and the Challenges of War: Management of Food Supplies in Bengal, 1943–44. Studies in History, 22(1), 14. https://doi.org/10.1177/025764300502200101
하지만 도시에 대한 충성심은 유동적이었지만 캘커타의 물리적 영토는 필수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었고, 그 보호는 제국의 많은 관심의 중심이었다. 누구의 도시이든, 그것은 왕관의 지정학적 소유였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연합군이 아시아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노력의 주요 전선이었다. 아마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또한 전시 생산의 중심지였고 기록적인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이 대담하고 무자비한 적임을 증명했고 캘커타가 결국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영국이 대비하지 않을 것아다. 그들은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고, 캘커타의 군사적 보호는 기껏해야 최소한으로 유지되었지만, 벵골 주민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일본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특정 임시 조치가 취해졌다. 이 계획은 초토화 작전, 즉 일본이 벵골을 침공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디나이얼"하는 계획이었다.
"디나이얼"(이 계획의 명칭)의 첫 번째 조치는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해안 지역에서 모든 "잉여" 쌀을 몰수하여 일본이 공격을 받을 경우 이를 압류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부 요원들은 많은 캘커타인이 도망친 바로 그 시골로 가서 강제와 강압으로 찾을 수 있는 모든 쌀을 구매했다. 몇 달 만에 여러 지역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들은 해안 지역에서 "잉여" 벼를 벗기는 데 크게 성공했다. 이 쌀은 표면적으로는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하고 산업 노동력을 만족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대부분은 단순히 시장에서 제거되어 기업 창고에 비축되거나 그 자리에 서서 썩도록 내버려 두었다("D. L. Mazumdar의 증언"). 심지어 시골에서 기아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미 1942년 4월에는 쌀 가격이 위험할 정도로 상승했고, 캘커타에서는 "비싼 수당"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노동 파업이 있었고, 쌀에 대한 보장된 접근성을 위해 상점을 통제했다(Chattetjee, P.K. 78). 거부는 위험을 더 높여 쌀 가격에 더 많은 해로운 압력을 가하고, 전통적인 시장 시스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미 불안한 국민에게 국가의 고조되는 불안을 경고했다("벵골 쌀 공장 협회 대표의 증언").
"쌀 거부" 이후, 식민지 정부는 잠재적인 일본 상륙군이 캘커타로 진군하기 위해 현지 운송 수단을 전유할 기회를 거부한다는 생각으로 "보트 거부" 계획으로 옮겼다. 몇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총 46,146척의 배가 군사적 목적으로 징발되어 침몰하거나 파괴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사용이 중단되었고, 벵골의 강 교통 인프라는 심각하게 마비되었다(벵골 보고서 26). 그 과정에서 캘커타는 더욱 중앙 집권화되었고 주변 지역은 더욱 소외되었다. 그 후 시골의 삶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캘커타에 대한 일본의 두려운 공격이 실현되지 않자 몇 달 전에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점점 더 희소해지는 자원을 찾아 캘커타로 다시 힘겹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도시의 요구는 더욱 커졌다.
마침내 1942년 12월 20일, 캘커타는 일본군의 폭격을 받았다. 공습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소식은 델리에서 검열되었고, 공식 보고서는 상당한 파괴나 이주를 부인했지만 도시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Stephens 82). 가장 놀라운 것은 쌀 상인과 대규모 재고업체(대부분이 다른 곳에 뿌리를 둔 마르와리족)가 상점을 봉쇄하고 더 안전한 항구로 떠났다는 것이다. 동시에 식민지 정부는 다양한 상공 회의소와 협력하여 전쟁 기계를 계속 가동해야 했고, 이는 무엇보다도 산업 노동력을 위한 풍부한 쌀 공급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1942년 12월, 일본의 이 일련의 폭격 중 네 번째가 있은 후, 정부는 폐쇄된 개인 창고의 자물쇠를 풀고 찾을 수 있는 모든 쌀을 징발했다("L. G. Pinnell의 증언"). 며칠 만에 캘커타에 있는 재고의 3분의 2가 즉시 압수되었다. 기근 조사 위원회의 벵골 보고서에 따르면, "그 순간부터 일반적인 무역 기계로는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고 위기가 시작되었다"(34, 강조 추가). 쌀 가격이 급등하고 점점 더 많은 공급이 번창하는 암시장으로 들어가자 정부와 산업계는 다시 한 번 시골로 몰려들어 가격 통제를 포기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벼를 사들였다(37). 캘커타에서는 투기꾼과 쌓아두는 사람들이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국과 모든 대형 산업 회사가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게 되었다(38). 그런 까닭에 캘커타는 벵골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곳이 되어 가고 있었고, 모든 지역에서 쌀이 점점 더 부족해졌다.
Mukherjee, J. (2011). Hungry Bengal: The Long Journey “Home.” South Asian Review, 32(3), 189-190. https://doi.org/10.1080/02759527.2011.11932855
"디나이얼"(이 계획의 명칭)의 첫 번째 조치는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해안 지역에서 모든 "잉여" 쌀을 몰수하여 일본이 공격을 받을 경우 이를 압류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부 요원들은 많은 캘커타인이 도망친 바로 그 시골로 가서 강제와 강압으로 찾을 수 있는 모든 쌀을 구매했다. 몇 달 만에 여러 지역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들은 해안 지역에서 "잉여" 벼를 벗기는 데 크게 성공했다. 이 쌀은 표면적으로는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하고 산업 노동력을 만족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대부분은 단순히 시장에서 제거되어 기업 창고에 비축되거나 그 자리에 서서 썩도록 내버려 두었다("D. L. Mazumdar의 증언"). 심지어 시골에서 기아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미 1942년 4월에는 쌀 가격이 위험할 정도로 상승했고, 캘커타에서는 "비싼 수당"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노동 파업이 있었고, 쌀에 대한 보장된 접근성을 위해 상점을 통제했다(Chattetjee, P.K. 78). 거부는 위험을 더 높여 쌀 가격에 더 많은 해로운 압력을 가하고, 전통적인 시장 시스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이미 불안한 국민에게 국가의 고조되는 불안을 경고했다("벵골 쌀 공장 협회 대표의 증언").
"쌀 거부" 이후, 식민지 정부는 잠재적인 일본 상륙군이 캘커타로 진군하기 위해 현지 운송 수단을 전유할 기회를 거부한다는 생각으로 "보트 거부" 계획으로 옮겼다. 몇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총 46,146척의 배가 군사적 목적으로 징발되어 침몰하거나 파괴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사용이 중단되었고, 벵골의 강 교통 인프라는 심각하게 마비되었다(벵골 보고서 26). 그 과정에서 캘커타는 더욱 중앙 집권화되었고 주변 지역은 더욱 소외되었다. 그 후 시골의 삶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캘커타에 대한 일본의 두려운 공격이 실현되지 않자 몇 달 전에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점점 더 희소해지는 자원을 찾아 캘커타로 다시 힘겹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도시의 요구는 더욱 커졌다.
마침내 1942년 12월 20일, 캘커타는 일본군의 폭격을 받았다. 공습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소식은 델리에서 검열되었고, 공식 보고서는 상당한 파괴나 이주를 부인했지만 도시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Stephens 82). 가장 놀라운 것은 쌀 상인과 대규모 재고업체(대부분이 다른 곳에 뿌리를 둔 마르와리족)가 상점을 봉쇄하고 더 안전한 항구로 떠났다는 것이다. 동시에 식민지 정부는 다양한 상공 회의소와 협력하여 전쟁 기계를 계속 가동해야 했고, 이는 무엇보다도 산업 노동력을 위한 풍부한 쌀 공급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1942년 12월, 일본의 이 일련의 폭격 중 네 번째가 있은 후, 정부는 폐쇄된 개인 창고의 자물쇠를 풀고 찾을 수 있는 모든 쌀을 징발했다("L. G. Pinnell의 증언"). 며칠 만에 캘커타에 있는 재고의 3분의 2가 즉시 압수되었다. 기근 조사 위원회의 벵골 보고서에 따르면, "그 순간부터 일반적인 무역 기계로는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고 위기가 시작되었다"(34, 강조 추가). 쌀 가격이 급등하고 점점 더 많은 공급이 번창하는 암시장으로 들어가자 정부와 산업계는 다시 한 번 시골로 몰려들어 가격 통제를 포기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벼를 사들였다(37). 캘커타에서는 투기꾼과 쌓아두는 사람들이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국과 모든 대형 산업 회사가 캘커타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게 되었다(38). 그런 까닭에 캘커타는 벵골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곳이 되어 가고 있었고, 모든 지역에서 쌀이 점점 더 부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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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t although allegiances to the city remained fluid, the physical territory of Calcutta was understood from the viewpoint of necessity, and its protection was the center of much concern to empire. Whoever's city it was, it was geopolitical possession of the crown and most importantly, the main front in the Allied efforts to defeat their Asian enemy. Just as importantly, perhaps, it was also the center of wartime production and record profits were being made. Meanwhile, the Japanese had proved themselves a daring and ruthless enemy and there was very little doubt that Calcutta would eventually be attacked. This time the British would not be caught off guard; they would do everything within their power to retain the city, and although the military protection of Calcutta remained minimal at best, certain ad hoc measures were taken to thwart Japanese attack-measures that would have catastrophic consequences for residents of Bengal. The plan amounted to a scorched-earth campaign, a scheme to "deny" Japan the resources that it might utilize in the event of an invasion of Bengal.
The first measure of "denial" (as the scheme was called) was to confiscate all "surplus" rice in what were thought to be vulnerable coastal districts, so that Japan could not appropriate them in the event of attack. Government agents went into the countryside, the very countryside into which many Calcuttans had fled, and by force and coercion purchased all the rice that could be found. In a few months, though they met with strong opposition in several districts, they had largely succeeded in denuding the coastal regions of their "surplus" of paddy. This rice-ostensibly-would be used to feed Calcutta and keep the industrial labor force contented. Much of it, however, was merely removed from the open market and hoarded in corporate godowns or left to stand in place and rot ("Testimony of D. L. Mazumdar"), even while starvation began to mount in the countryside. Already, by April 1942, the price of rice had risen dangerously, and in Calcutta there were widespread labor strikes in demand for "dearness allowances"7 and controlled shops for guaranteed access to rice (Chattetjee, P.K. 78). Denial upped the ante, putting further deleterious pressure on the price of rice, disorganizing the traditional market system, and alerting an already uneasy population to the state's mounting anxiety ("Testimony of representative of the Bengal Rice Mills Association").
After "rice denial," the colonial government moved on to its scheme of "boat denial," with the idea of denying potential Japanese landing forces the opportunity of appropriating local conveyance to advance on Calcutta. In the period of a few short months, a total of 46,146 boats were requisitioned for military purposes, sunk, destroyed, or otherwise removed from use, and the riverine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of Bengal was severely crippled (Report on Bengal 26). Calcutta, in the process, was further centralized, and the periphery further estranged. Subsequently, as life in the countryside began to deteriorate-and the feared Japanese attack on the Calcutta failed to materialize-those who had fled the city months earlier began to straggle back in to Calcutta, in search of increasingly scarce resources. Accordingly, the needs of the city escalated still further.
Finally, on 20 December 1942, Calcutta was bombed by the Japanese. News about damage from the raids was censored from Delhi, with official reports denying any significant destruction or dislocation but panic gripped the city (Stephens 82). Most alarmingly, rice merchants and large stockists-many of whom were Marwaris with roots elsewhere-boarded up their shops and departed for safer harbors. At the same time, the colonial government, in conjunction with various Chambers of Commerce, had to keep the war machine rUlming, and this meant, above all, securing an abundant supply of rice for the industrial labor force. Thus in December 1942, after the fourth in this series of Japanese bombings, the government broke the locks on shuttered private warehouses and requisitioned all the rice that they could find ("Testimony of L. G. Pinnell"). In a few short days, twothirds of the available stocks in Calcutta were summarily seized. According to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s Report on Bengal, "from that moment the ordinary trade machinery could not be relied upon to feed Calcutta [and] the crisis had begun" (34, emphasis added). As rice prices skyrocketed, and more and more supplies went into the thriving black market, government and industrial interests once again descended on the countryside, abandoning price controls and buying up all the paddy that they could lay their hands on (37), while in Calcutta speculators and hoarders began to rule the trade. It was now out in the open that the British and all the big industrial firms would pay any price to keep Calcutta fed (38). As such, Calcutta was fast becoming the only safe place to be in Bengal, as rice became scarcer and scarcer in all districts.
Middle-class, white-collar workers, who had fled the bombings earlier, now returned to claim their seat at the table, confident of their claim to the resources available in the city. Close on their heels was a wave of starving villagers that began to crash onto the shores of Calcutta by early summer of 1943 (Greenough 170). They came with nothing to their names; every possession had been sold or bartered to buy whatever share of rice was available at whatever price it could be purchased. They came naked or draped in rags and filled the lanes and bylanes of the city with their broken bodies, human skeletons uttering plaintive moans, "Ma phen Dao, mago, bachao, phen doa."8 Whe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finally became alerted to the inconveniences of life in Bengal, "relief' was rushed to the scene. The first priority of the relief mission in Calcutta, however, was not to feed the "sick destitute" (as they were called)9 , but to remove them from the streets of Britain's "second city" and to wipe the story of their starvation from international headlines. These wretched souls had come from "outside Calcutta" and would have to be "returned." Accordingly, fortified compounds were set up on Calcutta's periphery, and the starving masses of Bengal were rounded up from the city's streets in military and police lorries, by force when necessary, and removed to these repatriation camps, where they were held, most often, against their will (Testimony of O.M. Martin"). Contrary to the received notion of the passivity of famine victims in Bengal, it might be noted, many resisted these "relief efforts" to the best of their ability, desperately clinging to Calcutta and preferring to die on its streets rather than as detainees in god-forsaken government camps that supplied only starvation rations (Testimony of B. K. Guha").
As the toll of famine mounted, so too did the corpses that government and society needed to process-materially, politically, psychologically, and socially. The sheer enormity of the devastation wrought by famine inured society to death, amounting to a collective brutalization that was deep and abiding. In the countryside, bodies remained where they had fallen and rotted in the sun, or were tom apart by wild animals. But in Calcutta, which had its international image to maintain, corpses needed to be removed from public view, categorized, and disposed of in orderly fashion; however, because famine victims were the most marginal citizens of empire, the record of corpses collected by the authorities was extremely limited (Report on Bengal 1 09). In fact, the sole criteria used to classify the dead was most often religious affiliation-Hindu or Muslim. 10 That the state only recognized these nameless corpses as Hindu or Muslim, it might be noted, was merely an extension of the simplistic binary by which they were wont to categorize the population of India more generally. That corpses were thus understood, however, lent a certain biopolitical "proof' to the long-advanced, discursive argument that this distinction, above all else, was paramount in understanding the Indian population. The identification of mere corpses as either Hindu or Muslim is, in this sense, the height of essentialism. Together with the cheapening of life that famine and war entailed, the colonial state's contention that religious affiliation adhered to the very bodies of the residents of Bengal represented a dark foreshadow of the violence to come.
Meanwhile, among the living, various claims for entitlement were pursued with increasing desperation according to relative claims of identity or importance. Anglo-Indians petitioned that because they were "practically European in [their] habits and needs," they should be entitled to equivalent resources [WBSA File 165/41(1)]. Muslims petitioned for their own special needs regarding sugar during Ramadan, and Hindu interests claimed the need for larger rations of rice for bhog11 ("Testimony of Representatives of CMC"). Caste Hindus, moreover, appealed for dry rations, citing their inability to take food from public kitchens, where rules of purity could not be maintained. Private relief operations also divided along communal lines, with each community accusing the other of only coming to the rescue of only its own ("Dar-el-Islam"). With Congress leaders in jail, the Hindu Mahasabha, in particular, stepped into the void, gaining a critical, popular foothold in Bengal in the midst of famine (Greenough 190). The Muslim League, in power in the Bengal Assembly, meanwhile structured its claim to authority in relation to hunger as well, citing government relief as proof of Muslim competence (Sen 175). As such, it could be said, the biopolitics of famine congealed identities by means of necessity, while again the demographic map of the city was in fast transition and there were more and more bodies in need of labeling.
Mukherjee, J. (2011). Hungry Bengal: The Long Journey “Home.” South Asian Review, 32(3), 189-190. https://doi.org/10.1080/02759527.2011.11932855
영국 공무원 Leonard George Pinnell(1896–1979)의 아들인 Martin Pinnell은 '회의당[인도 국민회의]의 "Quit India" 캠페인의 여파로 일부 사람들은 기근을 영국 행정부를 잡아먹는 막대기로 사용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아버지는 1942년 8월부터 1943년 4월까지 벵골에서 민간 공급 책임자로 재직했으며 그 전에는 1942년 벵골 정부의 악명 높은 '디나이얼 정책'의 시행을 감독했다. 벵갈 해안과 자전거, 그리고 특히 보트(해안 지역에서 곡물을 운송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는 일본군이 인도를 침공할 경우 일본군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생계 수단과 운송 수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거부시키기 위해 파괴되었다. L. G. Pinnell은 벵골의 모든 해안 부서의 추가 위원으로서 '거부 정책'의 실행을 감독했다. 보트의 파괴는 이 지역에 수많은 강, 운하, 조수 강어귀, 늪지대 및 역류가 있고, 종종 시골보트가 곡물을 운송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지역이었던 동부 벵골의 곡물 무역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Pinnell의 '디나이얼 정책' 구현에 대해서는 Pinnell, With the Sanction of Government, pp. 89–93을 참조하라. 그의 아들 M. C. Pinnell은 'The Bengal Famine, 1942–43'챕터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35년 후에 다음 텍스트를 구술할 때 그[아버지]는 여전히 비극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Ibid., p. 94. 현장 인도 공무원의 정책 실행에 대한 생생한 개인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Mitra, Asok, Towards Independence, 1940–1947: Memoirs of an Indian Civil Servant, Bombay: Popular Prakashan, 1991, pp. 104–107. 또한 Asok Mitra, ‘Famine of 1943 in Vikrampur Dacca’,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4 February 1989, Special Article, pp. 253–255 참조. '디나이얼 정책'에 대한 현대의 비판은 Ghosh, Kali Charan, Famines in Bengal, 1770–1943, Calcutta: Indian Associated Publishing Co. Ld., 1944, pp. 52–55 G를 참조하라. 또한 Santhanam, K., The Cry of Distress: A First-Hand Description and an Objective Study of the Indian Famine of 1943, New Delhi: Hindustan Times Press, December 1943, 1st edition, Chapter XIII 'Denial Policy in Midnapore', 52~54쪽도 참조하라. 정책 실행에 대한 최근 학술 연구는 Mukherjee, Hungry Bengal, Chapter 2 'Denial', pp. 55–83 및 Mukerjee, Churchill's Secret War, Chapter 3 'Scorched', 특히 pp. 63–67을 참조하라. 벵골에서 배를 파괴하는 형태로 스스로 유도한 황폐화로 적의 장애물을 만드는 방법은 허난성의 중국 국민당(국민주의) 정부가 일본의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황하를 범람시킨 것과 같다. 중국 국민주의자들에 의한 의도적인 황하 범람에 대해서는 Garnaut, 'A Quantitative Description of the Henan Famine', p. 2009. Mitter, Rana,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 The Struggle for Survival, London: Penguin Books, 2014, p. 264를 참조하라. Abhijit Sarkar. (2020). Fed by Famine: The Hindu Mahasabha's politics of religion, caste, and relief in response to the Great Bengal Famine, 1943–1944. Modern Asian Studies, 54(6), p.2025. DOI: https://doi.org/10.1017/S0026749X19000192 |
어류는 조기 감소 후 1단계(1942년 6월-9월) 중반에 회복된 후 다시 침체되는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인 회복은 부분적으로 어획의 계절적 요인에 기인했지만(동인도 농업 경제 연구 센터(1960), 페이지 49 이후의 다른 해의 6-9월 가격 참조), 군사적 목적으로 추구된 '보트 디나이얼' 정책의 결과'''로 벵골의 어류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1942년 5월에 내려진 명령에 의해 강에 기반을 둔 벵골의 광대한 지역에서 1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보트들이 제거되었고, 도착 가능성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을 '거부'했고, 이것은 강 운송과 어업을 모두 방해했다.(기근 조사 위원회, 1945A, 페이지 26-27 참조). 따라서 어민들의 고통은 어미 환율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 환율조차도 그 후 급격하게 하락했다. Bolpur는 생선에 대한 다소 작은 시장이기 때문에 캘커타의 생선-쌀 환율은 Table 6에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하락은 Bolpur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고 다소 덜 심각했다. Amartya Sen, Starvation and exchange entitlements: a general approach and its application to the great Bengal famine,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No. 1 (March 1977), pp.45-46. https://doi.org/10.1093/oxfordjournals.cje.a035349 |
기근기간에 최악의 영향을 받은 집단은 어부, 운송 노동자, 벼농사 노동자, 농업 노동자, '기타 생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장인, 비농업 노동자 순으로 나타났다. 가장 영향을 덜 받은 사람들은 농부들과 소작농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기근 이전'(우리가 기근의 1단계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한다) 기간에 가장 영향을 적게 받은 그룹이었다. Amartya Sen, Starvation and exchange entitlements: a general approach and its application to the great Bengal famine,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No. 1 (March 1977), p.47. |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채용(destitution or husking paddy로 정의됨) 측면에서 '어업', '운송' 및 '농업 노동'은 직종 중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나타낸다. 운송 노동자에 대해서는 표본 크기가 다소 작았고 하천 운송은 '어부 카스트의 구성원에 의해 주로 관리되기'(Ghattopadhyaya and Mukherjea, 1946, p. 7) 어부의 고통과 농촌 운송 노동자의 고통 사이에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가 약간 어렵다 . 그러나 어부와 농업 노동자가 기근의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큰 타격을 입은 그룹은 '기타 생산직', '비농업 노동', '공예'였다. Amartya Sen, Starvation and exchange entitlements: a general approach and its application to the great Bengal famine,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No. 1 (March 1977), p.48. |
3.3. 벵골 미드나푸르에서의 정치적 혼란
영국 정부의 초토화 정책인 벵골의 "디나이얼" 정책을 목격한 인도 국민회의는 이를 비판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안은 1942년 8월 "(영국은)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이 전개되는 데 근본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41]1942년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주도한 운동은 영국을 상대로 한 대중 운동 성격의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간디와 국민회의 지도부들 체포했다. 지도부들이 체포되자 대중운동은 이후엔 대규모 폭력 사태로 성격이 변화됐다. [42]
1942년 영국을 인도에서 쫓아내기 위해 인도를 떠나라 Quit India 운동이 발생했을 때 혁명적 집단의 주요 지원 기반이었던 학생들은 또한 벵골의 Quit India 운동의 최전선에 섰으며, 특히 하우라, 비르부움, 캘커타, 그리고 물론 미드나포르에서 그러했다. 탐룩, 칸티, 미드나포르 타운의 학교와 대학의 학생들은 극단주의 정치 활동가들로부터 전투적인 민족주의를 흡수했다. 케주리에서 운동을 이끈 학생 지도자인 풀린베하리 센은 이 일꾼들이 청년들에게 라티와 단검 사용법을 교육하고 혁명적 문헌을 배포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영향으로 센은 자신이 찬드라 보스에 대한 '편애'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1942년 8월, 칸티의 의회와 전진 블록( 찬드라 보스 충성 집단) 지도자들은 단결하고 함께 운동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43]
이런 벵골에서는 1942년 12월 미드나푸르Midnapore에서 탐랄립타 자티야 사르카르Tamralipta Jatiya Sarkar 라는 독립적인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영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타나(경찰서), 우체국, 기차 노선, 전신주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벵골엔 일본이 인도의 동쪽 국경으로 진격하려는 전쟁 상황과 맞물려서 영국의 인도 통치를 붕괴시키려 하였다.[44]
‘Quit India’ 와 관련해 벵골은 특히 미드나푸르에서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면서 벵골 공무원을 장기간의 법과 질서 분쟁에 묶어 두어서 행정적인 차질이 생겼다.[45]
1942년 8월 국민 의회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이후 미드나포르는 혼란에 빠졌고, 지방장관[46] N. M. 칸과 부하들은 9월 29일에 일어난 폭력으로 이미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양쪽에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1942년 16~17일 밤, 사이클론으로 인해 미드나포르의 방파제를 무너뜨렸지만 지배적인 마히샤(벵골 힌두교 전통 농경 계급) 공동체 사이에선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강해서 사이클론조차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선 무력이 필요했다. N. M. 칸이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지역 사회에 대해 구호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인상이 확인됐다. 실제로 반 인도 활동을 담당한 경찰관 S. G. 테일러는 N. M. 칸이 폭력의 재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훔친 총을 넘기고 더 이상 어떤 파괴적인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불만을 품은 마을에 대한 구호를 보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보고했다. 그에 비해 컨타이의 분과 장교는 "아사로 인한 사망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고 명령했었다. 수석 비서관인 J. R. 블레어는 구호의 지연에 반대했지만, 영국정부는 구호 활동 중에도 행동력을 줄이지 않은채 의원들을 계속 추적했다.[47]
모한다스 간디 및 인도 국민 회의가 시작한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었지만 인도에 대한 처칠의 완고한 태도만큼이나 기근 극복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48]
3.4.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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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49] | 굶주린 인도인의 뒷모습 |
게다가 전염병마저 창궐했다. 대기근으로 인해 위생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틈을 타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된 것인데, 1943년 10월부터 질병 사망자 수가 갑자기 증가하더니 12월에는 기아보다도 더 많은 사망자를 만들어냈다. 질병 중에 가장 심각한건 단연 말라리아였다. 1943년 12월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 수는 평균에 비해 203% 높았다.[50] 벵골인들에게서 무작위로 추출해낸 혈액 샘플의 52%에서 말라리아 유충이 발견됐고 벵골인들은 말라리아에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게다가 사이클론으로 수원이 오염되며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가 대유행했고, 엎친데덮친격으로 천연두마저 튀어나오며 벵골은 전염병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말라리아 치료제의 보급은 지지부진하게 이뤄졌다. 퀴닌은 너무 부족해서 암시장에서나 볼 수 있었고 아타브린 같은 고급 항말라리아제는 군인들에게 나눠주기에도 모자랐다. 치료제 보급은 군대와 인도 거주 영국인들 위주로만 이뤄졌고 가장 피해가 컸던 벵골 빈민층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DDT나 제충제는 오직 군사 시설 주변에만 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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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가난한 가정들은 연달아 무너져내렸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구재산들을 내다팔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않자 결국 가족을 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다. 늙은이들은 집에 버려졌다. 빈민들은 조금이라도 구호물품이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결국 도시에서 굶어죽었다. 캘커타로 몰려든 빈민 가정들의 절반이 해체됐다. 대략 10만 ~ 15만 명에 달하는 빈민들이 식량에 대한 희망을 품고 캘커타로 몰려들었지만 대다수가 길거리에 쓰러져죽었다. 캘커타 거리에는 이렇게 죽은 빈민들의 시체가 한가득했다. 캘커타의 사망자 대다수는 농촌 빈곤층들이 도시로 들어와 거리에서 죽어가는 형태였다.
상황이 이모양이었으니 위생은 완벽하게 파국을 맞았다. 시체의 수가 너무 많아 화장장, 매장지, 병원은 극포화 상태였고, 대부분의 시체들은 그냥 길거리에서 썩어가거나 강이나 호수 등에 버려졌다. 시체가 너무 많아서 마치 굴비 꿰듯이 시체의 목에 밧줄을 매달고 도랑으로 끌고 갔다고. 시체들은 독수리나 자칼이 뜯어먹었는데, 심지어 아직 살아있는 와중에도 뜯어먹히곤 했다. 한 언론인은 1943년 7월 미드나포어에서 11km 정도 배를 탔는데, 눈에 들어온 것만 최소 500여 구가 넘는 시체들이 둥둥 떠있었다고 한다. 1943년 여름의 벵골은 그냥 통째로 거대한 납골당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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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벵골인들의 모습과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줄 |
기근이 몰아닥치니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착취는 극도로 심해졌다. 캘커타 등 대도시로 이주온 여자와 어린 소녀들은 남성 보호자에게 버려졌거나 죽어버린 경우가 많았고, 결국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 수단은 매춘 밖에 없었다. 기근 기간 동안 도시로 유입된 15세 이하 농촌 소녀들 상당수가 매음굴로 사라졌고 벵골 항은 매춘하는 소녀들로 북적거렸다. 소녀는 군인들에게 몸을 팔았고 소년들은 포주 노릇을 했다. 가족들도 극히 조금의 식량을 위해 딸과 아내들을 헐값에 지주나 군인들에게 팔아치우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여성의 순결이 중요시되던 인도 사회에서 이들은 영구적으로 소외됐고, 기근이 끝난 이후에도 남편과 친가족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다.
이 시기에 수 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고아로 전락했다. 가족들은 껍질도 안 벗긴 쌀 1kg'에 자식을 팔아치웠다. 이들은 노예보다 '약간 더 나은 처우'를 받으며 현대판 하인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성범죄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노리고 고아들을 사들이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됐다.
이후 영국 본국이 사태의 심각상을 알아차리고, 1944년 이후 전세가 반전되며 영국도 여유가 생기자 벵골에 대한 대대적인 구호가 들어왔다. 1만 5천 명에 달하는 영국 군인들이 벵골의 농촌까지 구석구석 다니며 구호 활동을 펼쳤다. 1943년 8월에 철도가 복구되며 그해 말부터 대규모 구호물품들이 유입됐는데, 펀자브에서 곡물이 대량 유입되는 한편 의료물품의 양도 크게 늘었다. 특히 당시 인도 총독이던 아치볼드 웨이벌이 벵골에 지속적인 식량 구호를 약속하고 최소 배급 제도를 제정하면서 쌀 값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웨이벌 총독이 본국에게 끈질기게 식량 지원을 요구, 결국 성공시킨 덕에 벵골의 기근은 차차 해소됐다. 이렇게 벵골의 대기근은 1944년 경 종결됐지만, 대기근이 남긴 경제적, 사회적 악영향은 엄청났다. 따라서 영국을 비판하고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드세졌다.
3.5. 상인들의 사재기
벵골 대기근이 악화된 데에는 상인의 사재기 문제가 영향을 끼쳤는데, 이 또한 영국의 식민지 당국인 인도정부(영국이 보낸 총독이 운영)의 정책과 연관됐다. 디나이얼 정책에서 잉여 쌀을 제거하는 계획은 즉시 난관에 봉착했다. 인도 정부가 이 작업에 자금을 지원했지만 주요 곡물상인 중 누구도 이 작업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강력한 무슬림 연맹과 연결된 상인을 선택한 후 정치적 혼란이 뒤따랐고, 결국 다양한 장관의 지원을 받은 지역 쌀거래회사 4곳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과도한 재고 제거가 완료되면 거부 지역 주민들의 필수 쌀 수요는 허가된 상인이 남겨둘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구매 담당자는 강압적으로 매수하여 쌀 지역을 고갈시키고 델타 지역의 식량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B. M. Bhatia는 갠지스 삼각주의 내외 무역의 이러한 혼란이 1943년에 이어진 기근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T. G. Narayan은 기근으로 이어진 사건 목록에서 디나이얼 정책을 시작점으로 삼았다.[51] 악덕상인의 사재기도 영국의 잘못된 정책과 연관된 것이다.파리드푸르 선거구의 비라트 찬드라 만달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는 파리드푸르 사다르에 가서 벵골 정부가 쌀을 사기 위해 고용한 중개인과 브로커를 찾았고, 다크 방갈로에서 그들은 몇 달 동안 함께 살도록 배정되었습니다. 저는 지역 시장에서 조사했고, 이 사람들이 사기 시작하자마자 가격이 갑자기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상황은 장관이 더 이상 대중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제 선거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장관은 그의 과실과 거짓된 안전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살인자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BLA, Vol-LXVII, No.1, 18th Session, 1944a, 51-52쪽)
Islam, M.S. (2024), "Impact of British fall in Burma on Bengal famine of 1943: experience of Faridpur district of Bangladesh", Southeast Asia: A Multidisciplinary Journal, Vol. 24 No. 1, pp. 30-31. https://doi.org/10.1108/SEAMJ-02-2023-0015
쌀 가격 상승에는 비축과 암시장과 같은 다른 많은 결정 요인이 있었다. 레누 차크라보르티Renu Chakraborty는 암시장 상인들이 파리드푸르에서 쌀을 비축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했다. 1943년 3월 25일에 200명의 여성이 파리드푸르 지구의 마다리푸르에 있는 치안판사에게 행렬을 지어 음식을 요구했다. 치안판사는 즉시 모든 숨겨진 쌀을 찾아내어 식량위원회를 통해 15루피에 판매하라고 명령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차르마구리아와 마다리푸르 시장에 가서 사람들의 도움으로 쌀 더미 2500개와 벼 더미 500개의 비밀 재고를 회수했다. 쌀 두 척과 벼 여섯 척도 압수되었다. 마다리푸르에서는 대량의 쌀과 밀이 도시의 대형 창고에 식량을 저장하면서 낭비되는데 사람들은 식량 부족으로 도시에서 죽고 있었다. 이것이 비축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52]Islam, M.S. (2024), "Impact of British fall in Burma on Bengal famine of 1943: experience of Faridpur district of Bangladesh", Southeast Asia: A Multidisciplinary Journal, Vol. 24 No. 1, pp. 30-31. https://doi.org/10.1108/SEAMJ-02-2023-0015
3.6. 펀자브의 고의적인 잉여 곡물 분배 거부
1944년에 식량 곡물이 잉여였던 펀자브의 분배 거부도 벵골 대기근에 중요한 영량을 끼쳤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 동안 펀자브 농민은 경제적 손실을 겪었는데, 펀자브 농민 로비단체와 펀자브 집권당은 이를 보상하기 지속적으로 분배를 막았다. 이들은 전쟁 중 식량 곡물 가격이 급등하는 것을 이용했으며, 정부는 전시 곡물 시장이 자유방임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공개적으로 옹호하여 펀자브 농촌 유권자를 보호했다. 또한 펀자브 많은 농민 지도자들은 농부들에게 정부 기관이 고정 가격으로 식량 작물을 조달하는 것에 저항하라고 독려했다. 특히 벵골이 고통을 겪었던 시기에 펀자브는 오히려 전쟁으로 인해 번영했고 인도 내에서 불균형적인 발전을 재생산시켰다.[53]3.7. 영국 정부의 은폐와 저항
"반식민주의 및 반제국주의 네트워크가 기근 사진을 이용한 또 다른 사례는 사회주의 독립노동당의 대변지인 '뉴 리더' 10월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콜라주 사진에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허버트 모리슨 내무장관의 사진 두 장이 결합되어 있다. 사진의 배열은 두 사람이 바닥에 누워 있거나 쪼그리고 앉아 있는 벵골 여성과 어린이를 굽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첨부된 인용문을 통해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 주장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두 정치인은 이미 인도 독립 운동의 정치적 요구에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콜라주에서 처칠과 모리슨은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 통치가 가져다준 혜택을 언급했는데, 이는 비참한 사진으로 인해 터무니없는 주장이 되었다.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보고서에 이러한 이미지가 삽입되면서 영국 정부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결정적인 요인은 스테이트맨이 영국에서 얻은 명성이었기 때문에 기근 구호 반대자들이 이 이미지를 조작된 것으로 치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후 몇 주 동안 인도 국무장관 L.S. 애머리는 점점 더 해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런던과 영국 내 인도 노동자와 선원들의 거점 도시에서 활동하는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중요한 기관인 인도연맹은 영국 내 인도 디아스포라가 접근할 수 있도록 영어 언론 보도를 벵골어, 우르두어, 힌디어로 번역했다. 이는 곧 효과를 발휘했다. 10월에 자신의 지역구인 스파크브룩에서 공개 연설을 하려던 애머리는 성난 인도 노동자와 선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물러나야 했다." »What we have we hold«, in: The New Leader, 16.10.1943, S. 3. Joanna Simonow, Der Hungertod in Bildern. Fotografien in der öffentlichen Debatte um Hungerhilfe für Bengalen 1943, in: Zeithistorische Forschungen/Studies in Contemporary History, Online-Ausgabe, 18 (2021), H. 2, URL: https://zeithistorische-forschungen.de/2-2021/5962, DOI: https://doi.org/10.14765/zzf.dok-2337, Druckausgabe: S. 358-359. |
일련의 과정과 결정이 이 비극을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인도 동부 벵골 지방의 기근은 전쟁으로 인도에 퍼진 혼란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발발과 더불어 영국은 아대륙의 자원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동쪽으로 진출하고 버마가 함락되자 벵골 동쪽은 최전선이 되었고 적으로부터 인도를 지키는 것은 대영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한 필수요소로 간주되었다. 1942년 중반, 인도의 영국 당국(the British authorities in India)은 일본의 인도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지만 본질적으로 벵골의 농업 노동자들의 수입원을 박탈했다.농촌 주민의 빈곤에 더불어 1942년 10월 오리사와 벵갈 해안서는 처음에는 사이클론에 의해 강타당했고, 그 다음에는 해일에 의한 그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다가오는 기근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 재해로 인해 250만 명이 사망하거나 생계를 잃거나 집을 잃었다. 한편 전쟁 경제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일어나자 쌀 가격은 급상승했고, 벵골 사람들 식단의 주요한 부분은 점점 더 부족해졌다. 임박한 재앙의 징후가 선명했지만, 식민당국은 전쟁 준비를 위해 기근대처용 매커니즘을 사용하기를 자제했다. 동시에 언론 규제가 적에게 유리할 수 있는, 벵골로부터의 정보 유통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벵골의 기근이 일본이 인도 침공을 시작하도록 동기를 부여할까 우려하여 관련된 뉴스를 통제하고, 기건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1. https://doi.org/10.1080/03086534.2019.1638622 |
그러나 검열은 구멍투성이였다. 임박한 위기에 대한 정보는 인도 디아스포라의 네트워크, 영국과 미국 군인들의 편지, 그리고 동남아시아 전쟁 현장에서 전 세계 청중들에게 전보를 보내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전쟁 특파원들을 통해 대도시로 흘러들어갔다. 영국에서는 1943년 1월부터 인도 민족주의 단체들과 영국 좌파 단체들이 새로운 위기에 대해 글을 쓰고 말하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자들은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하여 회의, 집회, 시위 행렬뿐만 아니라 팜플렛, 포스터, 인쇄된 언론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영국이 식민지 주민들의 기본적인 요구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위기를 이용했다. 인도의 자치 추구에 동조하는 영국의 사람들과 협회들은 기근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식민지 행정부에 식량 원조를 제공하라는 압력을 증가시켰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1-172. |
안티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영국의 인도인들이 전쟁 노력을 받아들이도록 강력한 동기브를 제공했지만, 점점 더 많은 인도인들, 특히 노동계급 사이에선 이 전쟁에 반대했다. 이렇게 반대가 커지는 이유는 다양했다. 한편으로 인도인들은 영국의 '제국주의 전쟁'에 초연하여 고국에 투옥된 인도 정치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표현하려고 했다. 1942년 8월 인도 국민회의는 영국이 '인도에서 떠나라'고 요구했고 가혹한 보복에 직면했다. 한편, 영국 내 인도인 징집 문제는 영국에 2년 이상 거주한 남아시아인들이 국가 징집에 소집됨에 따라 전쟁 반대론을 더욱 강화했다. 인도인 징집에 반대하는 시위는 인도 민족주의자와 노동계급 조직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이들은 회원들이 모집을 우회하도록 돕기 위해 소속 변호사와 의사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영국 당국이, 의심스러운 충성도에 의해 전쟁 중에 훨씬 더 위험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도인을 더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에 있는 인도들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적대감을 날카롭게 하고 충성심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인도 연맹은 영국 전쟁 노력에 대한 지지로 인해 대도시에서 인도의 모든 의견을 대변하는 데 점점 더 실패했다. 연맹의 이전 지지자들은 새로운 협회를 설립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3. |
그러나 영국에서의 전쟁에 대한 반대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 정부가 인도 정치 엘리트와의 사전 협의 없이 영국의 전쟁 노력에 대한 인도의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 일찍 나타났다. 이로 인해 INC는 전쟁을 보이콧하기로 최종 결정했고 영국의 많은 인도인들은 INC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87. |
1942년 여름, 인도 국민회의와 영국 정부의 협상이 결렬된 후 전자는 식민주의자들에게 "Quit India"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INC 지도부는 투옥되었고 정치적 지도력이 부족하여 인도 동조자들의 항의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INC는 금지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금되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87. |
Swaraj House는 인도 국무장관 Leopold S. Amery가 하원에서 인도의 기근 상황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 직후인 1943년 1월부터 인도의 기근에 대해 글을 쓰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Amery의 진술에 대해 Swaraj House는 '기근? 오늘날 인도의 빈곤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라는 팜플렛으로 반응했다. 이 팜플렛은 2월 초 Percy Street에 있는 Bengal India Restaurant에서 열린 기자 회견을 통해 광고되었다. 저자는 인도의 경제학자이자 농업 전문가인 Nagendranath Gangulee로, 일리노이 주 캘커타 대학교와 런던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일시적으로 인도에 정착하여 농업과 농촌 복지를 실험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4. |
영국 당국은 기근에 관한 Gangulee의 팜플렛을 '불행한'것이고 '정직하거나 성실한 문서'일 가능성이 적다고 간주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5. |
Swaraj House가 기근을 민족주의 선동의 문제로 만든 직후 인도 연맹도 식량 부족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도의 기근 상황이 연맹 회의 의제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 노동계급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인 Ayub Ali의 지원으로 인도연맹은 1943년 6월 이스트런던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 곳은 상업 거리에 있는 Ali’s Shah Jola 식당 바로 위에 있었는데, 인도 선원과 도시 동부 노동자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청중들에게 '그들이 영국 정부를 돕고 이 나라에 식량을 가져오는 데 목숨을 바치는 동안 인도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친척은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인도 노동자와 선원들은 식민 착취에 맞서 투쟁하는 연맹에 가입하도록 요청받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인도 노동계급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인도 연맹과 Swaraj House의 공개 캠페인에 참여하여 영국 거리에서 식량 지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5. |
독립 노동당의 New Leader 10월호에는 정치가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영국 내무부 장관 허버트 모리슨과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굶주린 인도 여성과 어린이들 집단과 기대어 있는 모습을 묘사한 사진 콜라주가 실렸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8-179. |
언론 보도와 이미지의 부재로 인해 Amery가 인도 위기의 심각성을 부인할 수 있었던 1월 말과 달리, 일요일 화보가 상황을 파악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인도 국무장관은 하원 앞의 벵골에서 '기근의 위협'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기를 폭리와 사재기로 돌림으로써 정부의 책임을 계속 희석시켰다. 그 후 몇 주 동안 Amery에 대한 언어 공격은, 그가 시위와 화난 인도인의 방해에 직면하지 않고는 버밍엄의 Sparkbrook에있는 그의 선거구를 더 이상 방문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증가했다. 버밍엄은 인도 노동계급 운동의 본거지였으며, 이제 Amery의 사임을 요구하기 위해 동원된 일련의 협회와 조직이 있었다. 행사장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도노동자협회는 '처칠과 Amery가 인도의 남성, 여성, 어린이를 죽이고 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벵골 기근을 인도 기근 위기의 역사적 궤적 안에 배치하는 전단지를 배포하며 영국이 혁명가들을 일부러 굶어죽이려한다고 비난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79-180. |
위원회에 공식적인 지원을 제공한 vice-presidents의 긴 목록에는 저명한 영국 공적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이미 인도 연맹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인도에서 영국 퀘이커 교도들의 활동을 위해 기부를 요청하는 기근 구호 위원회를 동시에 운영한 퀘이커 Horace Alexander였다. Alexander는 FAU(Friends’ Ambulance Unit)의 영혼이자 두뇌였다. 후자는 일본의 최근 공격에 비추어 벵골에 왔으며 FAU는 공습 예방 훈련을 인도로 확장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계속되는 기근을 목격한 FAU는 대신 피해 지역에 식량과 의료 구호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Alexander는 간디 및 인도 국민 회의와의 관계를 강화했으며 이는 식민 당국을 화나게했다. 벵갈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역할로 악명을 떨친 인도 총독 Linlithgow 경은, Alexander가 떠나는 것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나는 솔직히 그가 이 나라를 떠나면 안심할 것입니다. 나는 그가 선의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종종 있는 것처럼 특이하게 꼬불꼬불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나는 그가 우리를 물질적으로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81-182. |
다른 사람들도 인도 연맹의 견해를 반드시 지지하지 않고 새로 위원회에 합류했는데, 이는 Menon이 다양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인도를 위한 영국 식량 구호 지원을 집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한 사례 중 하나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캘커타에서 CMS(Church Missionary Society)의 비서로 일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인 Geoffrey F. Cranswick 주교였다. Cranswick은 인도인 구호 위원회(Indian Relief Committee)를 지지하는 동시에 캔터베리 대주교인 William Temple에게 벵갈의 기근 구호를 위한 선교사들의 노력을 지원해 달라는 비공식 요청과 함께 연설했다. 그는 선교사의 기근 구호 활동에 도움이 될 기금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영국 교회 협의회는 이미 설립된 영국 퀘이커교도와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기금에 합류하여 인도 기근 구호를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범위를 영국 청중으로 넓혔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82. |
이러한 범위[인도 민족주의, 영국 사회주의, 영국 공산주의, 퀘이커 교도, 기독교인, 영국의 좌익과 우익 등]의 비공식 조직이 관여하면서 식민 기관이 굶주린 벵갈을 구하려는 탐구에서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 처음에 정부는 1935년 인도 정부법에 따라 설립된 후, 전쟁에 의한 법적 메커니즘을 통해 잠식됐었던 벵골 지방 정부의 형식적 자율성을 지적함으로써 책임을 희석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182. |
1943년 11월 초 금요일, 영국에서, 인도의 굶주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금을 모금하는 7개 기근 구호 위원회 대표들이 런던의 인도인 하우스에 모였다. 그 후 발표된 공동 언론 성명서의 첫 구절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대중은 벵갈과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기근으로 인한 광범위한 고통에 깊은 자극을 받았다.' 이 회의는, 10월에 벵골의 기근이 영국에서 뉴스거리로 떠오를 뿐만 아니라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셀레브레의 원인이 되었을 때 일어난, 영국 대중의 의식의 다소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미했다. 벵골의 '식량 상황'에 대한 정보는 1943년 초에 대도시로 스며들기 시작했지만 9월 말에 인도 기근 희생자들의 쇠약하고 뼈만 남은 시체의 이미지가 공개되면서 대중이 벵갈의 상태와 그 위기와 해결책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위기에 대한 뉴스 부족과 인도주의적 이니셔티브의 부족이 병행되었던 지난 몇 달과는 대조적으로, 1943년 4분기에는 구호 위원회의 확산과 인도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기부하려는 의지가 증가했다. 눈에 띄는 여론의 변화는 아마도 영국 정부가 재난을 마침내 해결하기로 결정하여 11월에 새로 임명된 총독 Wavell이 식량과 의료 구호를 제공하기 위해 왕립 공군을 배치한 데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대도시 대중이 벵골의 재난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기근은 이미 절정에 달했다. 1943년 7월 수십만 명의 굶주린 빈민들이 일자리와 구호품을 찾아 벵갈의 도심 캘커타로 이주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음 달에 도시의 거리에서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식민 정부가 위기를 인정하지 않고 인도 민간 구호 단체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인구의 필요로 인해 기근은 끔찍한 차원의 재앙으로 발전했다.1943년과 1944년에 약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궁핍하게 되었다. 위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위기 직전에 남아 있던 지방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크게 산산조각 냈다. Joanna Simonow (2020) The Great Bengal Famine in Britain: Metropolitan Campaigning for Food Relief and the End of Empire, 1943–44,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48:1 pp.168-169. |
4. 원인에 대한 학계의 반응
뱅골 대기근의 원인에 대한 학계의 논란은 수십년동안 지속되고 있다. 책임을 결론 지으려는 시도로서 여러 연구와 분석들은 “자연의 영향, 시장의 실패, 정책의 실패, 현지 정부기관의 부패행위, 전쟁으로 인한 이익추구 또는 사기업의 비도덕적인 행위”등과 같은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현대적인 통계 및 자료들은 대부분이 그 정확성이 의심스럽고, 분석과 결론마저도 정치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학자들은 지적한다. [54] [55] [56] [57]
실제 당시 뱅골의 식량문제에 관해서도 ①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설 [58], ② 실제 식량이 부족했다는 설이 현재까지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59]
벵골대기근 원인에 대해 학계에선 경쟁되던 두 이론은 식량 가용성 감소Food Availability Decline (FAD) 와 Failure of Exchange Entitlements (FEE)이다. FAD 설명은 가뭄, 홍수 또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와 같은 위기로 인해 주로 발생한 작물 실패을 기근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한다. FEE 설명은 이러한 외부 요인이 어떤 경우에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기근은 주로 기존의 "구조적 취약성"(빈곤 등)과 식량에 대한 경제 시장을 혼란시키는 충격적 사건(전쟁 또는 시장의 정치적 간섭 등) 간의 상호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학계에서 다수설은 아마르티야 센의 FEE 모델이다.
1942년 후반의 작물 부족 정도와 1943년의 영향은 기근에 대한 역사학을 지배했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 간의 더 큰 논쟁을 반영합니다. 하나는 기근의 원인으로서 식량 가용성 감소(FAD)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교환 자격 실패(FEE)에 초점을 맞춘다. FAD 설명은 가뭄, 홍수 또는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와 같은 위기로 인해 주로 발생한 작물 실패로 기근을 비난한다. FEE 설명은 이러한 외부 요인이 어떤 경우에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기근은 주로 기존의 "구조적 취약성"(빈곤 등)과 식량에 대한 경제 시장을 혼란시키는 충격적 사건(전쟁 또는 시장의 정치적 간섭 등) 간의 상호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인이 상호 작용할 때 사회 내의 일부 집단은 충분한 공급이 가능하더라도 식량을 구매하거나 획득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FAD와 FEE 관점 모두 벵골이 1943년에 버마에서 수입이 감소하고, 사이클론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해충 공격으로 인한 작물 질병으로 인해 최소한 일부 곡물이 부족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Padmanabhan, 1973). 그러나 FEE 분석은 식량 부족을 주요 요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학계는 일반적으로 아마르티아 센이 공식화한 FEE 설명을 따르며 1943년 벵골 기근을 "권리 기근"으로 개념화했다. 이 관점에서 기근의 서곡은 일반화된 전시 인플레이션이었다. 이 문제는 우선 순위가 높은 분배와 실패한 가격 통제 시도로 인해 악화되었다. 높은 인플레이션율로 인해 토지가 없는 농업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치명적으로 감소했다. 센(1981)은 기근 조사 위원회가 제시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벵골 기근은 식량 가용성의 감소가 아니라 식량에 대한 권리의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고 확언했다. 그는 벵골 기근을 "인위적인 기근"이라고 부르고 기근 취약성의 주요 결정 요인 중 하나로 계층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쌀 공급이 이전 5년 평균보다 약 5% 낮았고, 1941년에는 기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1941년보다 13% 더 많았다고 지적했다(Sen, 1982).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12~3213
위의 학계 설명이 사실이란 증거는
피인용수로 논문에 벵골대기근이 주제라는 것이 명시된 논문만 해도 피인용수가 압도적이다.학계는 일반적으로 아마르티아 센이 공식화한 FEE 설명을 따르며 1943년 벵골 기근을 "권리 기근"으로 개념화했다. 이 관점에서 기근의 서곡은 일반화된 전시 인플레이션이었다. 이 문제는 우선 순위가 높은 분배와 실패한 가격 통제 시도로 인해 악화되었다. 높은 인플레이션율로 인해 토지가 없는 농업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치명적으로 감소했다. 센(1981)은 기근 조사 위원회가 제시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벵골 기근은 식량 가용성의 감소가 아니라 식량에 대한 권리의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고 확언했다. 그는 벵골 기근을 "인위적인 기근"이라고 부르고 기근 취약성의 주요 결정 요인 중 하나로 계층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쌀 공급이 이전 5년 평균보다 약 5% 낮았고, 1941년에는 기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1941년보다 13% 더 많았다고 지적했다(Sen, 1982).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12~3213
Sen, Amartya. "Starvation and exchange entitlements: a general approach and its application to the Great Bengal Famine."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1.1 (1977): 33-59.
피인용수 399회
그 유명한 Sen, Amartya. Poverty and famines: an essay on entitlement and depriv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2.(피인용수 18421회)의 피인용 목록에서 인용 문서 내에서 "Bengal Famine"으로 검색하면
아마르티야 센의 영향력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Sen, Amartya. Poverty and famines: an essay on entitlement and depriv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2의 피인용 서적중 "Bengal Famine" 검색 반드시 큰따옴표를 삽입할 것.
2025년 1월 3일 기준으로 벵골 대기근 주제에 한정된 피인용수는 1000개다. 피인용수 399회
물론 다수설이라고 무조건 진실인 것은 아니며, 단순히 구글 학술검색 인용횟수만으로 정설이라고 재단하는것 역시 위험하다. 학술인용은 대게 오래될 수록, 그리고 새롭고 파격적인 내용일수록, 대중적일수록, 발제국가의 인구가 많을수록 더 많이 인용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마르티야 센은 1998년 "복지 경제학" 기여 공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로서 그의 연구에서 벵골의 사례가 많이 언급되긴 하나, 벵골 대기근에 관한 내용 그 자체보다 "사회적 선택이론, 경제와 사회적 정의, 아시아의 성차별과 그로 인한 여성 사망률, 기근에 대한 경제이론, 의사결정 이론, 개발 경제학"등의 공로로 상을 수상한 학자이다. [60]
센은 벵골에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거의 최초의 학자로서 그 내용이 한동안 많이 인용되며 지지를 받아왔다. 다만 그의 연구는 근래 여러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데, 여러 현대 전문가들은 훨씬 더 큰 식량부족에 대한 증거를 인용한다.[61]
① 실제 당시 기근조사위원회 위원인 웰라스 아크로이드 (Wallace Aykroyd)는 1974년에 1942년 겨울 수확에 25%의 부족이 있었다고 밝혔다. [62] ② 또 1942년 8월부터 1943년 4월까지 벵골정부의 식량 공급관리를 담당했던 LG Pinne은 작물 손실을 20%로 추산했으며 사이클론보다 질병으로 인한 손실이 더 컸다고 보고했고, 다른 정부 소식통은 비공개적으로 부족량이 200만톤이라고 인정했다. [63] [64] ③ 경제학자 조지블린 (George Blyn)은 10월의 사이클론과 홍수, 버마에서의 수입 손실로 인해 1942년 벵골 쌀 수확량이 3분의 1로 줄었다고 주장했다. [65] [66] [67]
아마르티야 센의 오래된 연구방법론을 데이터를 통해 반박하는 반박하는 여러 학자 중 하나가 피터 보브릭 (Peter Bowbrick)이다. 아래는 센과 그의 지지자들의 주장이 오래전부터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으며, 센은 이에 대해 1986년 이후 수십년간 확실한 반박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아래는 학술지 wiley저널에 실린 그 비판내용 중 일부이다. # 해당내용은 SCOPUS 논문급에 해당하는 ScienceDirect저널에도 확인할 수 있다. # 해당논문은 현재까지 총 136회 인용됐다. #
서로 다른 전문적 배경, 서로 다른 이론 및 분석 기술, 서로 다른 정보 및 원시 데이터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센의 벵골 기근 이론을 반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센의 1943년 벵골 기근 원인 이론을 반박했습니다 (Bowbrick, 1986 , 1987 , 1988 , 2008 ). 저는 13개의 엄격하고 공식적이며 증거가 있는 반박을 제시했는데, 그 중 6개는 센의 전체이론에 치명적이었고 7개는 그 이론의 중요한 부분에 치명적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독립적입니다. 하나 또는 여러개가 무효하다고 증명될 수 있더라도 나머지는 반박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센이나 다른 누구도 그 중 어느 것에도 반박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센이 30건 이상의 출처에서 체계적으로 사실을 잘못 표현했다는 내 증거를 반박하려는 시도는 없었습니다. Tauger ( 2003 , 2006 , 2009 )는 기근에 대한 공식적이고 엄격하고 꼼꼼한 분석을 제시했는데, 이 분석도 마찬가지로 센을 여러 방향에서 반복해서 반박합니다. Dewey( 1978 ), Das( 1949 ), Tauger는 인도 통계 전문가들의 반박을 검토했습니다. 다른 비평가로는 Goswami( 1990 ), Dyson과 Maharatna( 1991 ), Dyson( 1991 , 1996 ), Basu( 1984 , 1986 )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센은 이러한 반박들에 대해 답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that people with different professional backgrounds, different sets of theoretical and analytical skills and different sources of information and raw data have refuted Sen's theory of the Bengal famine from a range of perspectives. I refuted Sen's theory of the cause of the 1943 Bengal famine (Bowbrick, 1986, 1987, 1988, 2008). I presented 13 rigorous, formal, evidenced, refutations, six of which were fatal to Sen's entire theory and seven of which were fatal to significant parts of it. They are independent: Even if one, or several, could be shown to be invalid, the rest would remain unchallenged. In fact, neither Sen nor anybody else has even attempted to challenge any of them. Nor has there been any attempt to counter my evidence that Sen systematically misrepresented the facts in his sources in more than 30 instances. Tauger (2003, 2006, 2009) produced a formal, rigorous, scrupulous, analysis of the famine which, similarly, refutes Sen again and again, from different directions. Dewey (1978), Das (1949) and Tauger review the refutations by the Indian statistics profession. Other critics include Goswami (1990), Dyson and Maharatna (1991), Dyson (1991, 1996) and Basu (1984, 1986). 2 Again, Sen has made no attempt to reply to the refutations.)
센의 주장을 따르는 다우드 (Daoud)그는 기근이 식량 부족이나 흉작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며, 벵골에는 식량이 충분했다고 거듭해서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인구의 3분의 2가 굶주렸다는 주장이 제기된 기근이 있었고, 수백만명이 실제로 매우 굶주렸습니다. 인구의 3.3%~5%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쌀을 100만톤 또는 200만톤 적게 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 있는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100만톤 또는 200만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 인구가 정상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거나, 누군가가 시장에서 그것을 가져갔지만 다우드는 어떠한 제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He states repeatedly that the famine was not caused by a shortage of food, or by a crop failure, and that Bengal had plenty of food. In spite of this, there was a famine in which, it has been argued, at least two-thirds of the population went hungry. 4 Millions went very hungry indeed—3.3%–5% of the population died. We may guess that these people ate one or two million tons less rice, or the calorific equivalent—no meaningful statistics ever existed. 5 What happened to this one or two million tons? Either some of the population ate much more than normal, or someone took it off the market. Daoud does not suggest any alternatives.)
이 주장은 기근이 600만명의 도시인구, 아마도 캘커타의 노동자들 중 일부가 평소보다 더 많이 먹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아 4천만명 이상이 굶주리고, 천만명은 몹시 굶주리고, 200만에서 300만명이 죽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시사합니다. 이러한 식습관의 변화는 1942년 11월에 갑자기 발생하여 소비가 정상으로 돌아온 1944년 1월에 끝났다고 합니다. 그는 기근이 1942/1943년의 흉작시기에 시작되어 1943/1944년의 풍년해의 쌀 작물이 시장에 나왔을때 끝났다는 사실을 생략했는데, 이는 기근이 작물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This argument suggests that the famine was caused by some of the six million urban population, workers in Calcutta probably, eating more than they did normally, leaving so little for the rest that more than forty million people went hungry, ten million went very hungry and two to three million died. This change in eating patterns allegedly occurred suddenly in November 1942 and ended in January 1944, when consumption returned to normal. He omits the fact that the famine started at the time of the poor 1942/1943 harvest and came to an end when the excellent 1943/1944 rice crop came on the market, which suggests that the famine was caused by crop failures.)
다우드가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기근 조사 위원회 (1945)는 많은 도시 근로자들이 더 많이 먹을 수 없는 고정된 배급량이나 생계 수당을 받았고, 기근 가격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받은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기근 동안 캘커타의 인구가 15% 감소하여 도시 소비가 정상보다 적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기근 조사 위원회는 또한 캘커타가 물자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분배되는 양이 종종 삭감되었으며, 기근 내내 캘커타의 식량 소비가 감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저는 다우드가 반복적으로 인용한 논문(1986, 117쪽)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 which Daoud cites repeatedly, makes it clear that many urban employees had fixed rations or dearness allowances which did not allow them to eat more, that very few people were paid enough to buy at famine prices and that the population of Calcutta fell by 15% during the famine so urban consumption was less than normal.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also reported that Calcutta had great difficulty in getting supplies, that the amount distributed was often cut because of shortage of food and that food consumption in Calcutta fell throughout the famine (e.g. pp. 31, 32, 63). I also mentioned this in a paper Daoud cites repeatedly (1986, p. 117).)
저는 센이 한 약간 다른 주장을 조사했고, 어떤 사람들은 역사상 어떤 인구도 먹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다우드가 자신의 모델에 따라 사람들이 얼마나 먹었을지 조사하지 않은 것은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증거와 달리, 도시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기근 동안 훨씬 더 많이 먹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가난한 계층 100만명이 1942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1800년부터 2600년까지 하루 소비하는 칼로리가 증가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캘커타를 떠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쌀 추가소비는 기근 조사 위원회의 '1943년 조정된 현재 공급량'의 1.4%이며, 센과 다우드가 1941년보다 식량이 11% 더 많았다고 주장한 당시 총 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더 작습니다. 이것이 보고된 가격 변화나 광범위한 굶주림과 기아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된 배고픔과 굶주림을 유발하기 위해 14배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했습니다. 매일 2주치 식량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 설명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틀렸습니다.
(I examined a slightly different claim made by Sen and showed that it would require that some people ate vastly more than any population in history has eaten (1986). It is a matter for concern, therefore, that Daoud does not examine how much people would have eaten under his model. Let us assume, contrary to the evidence, that a significant number of people in the cities did eat a lot more during the famine, say, one million of the very poorest increasing calories consumed per day from 1800 to 2600, starting in November 1942 and ending in January 1944. Let us also pretend that nobody left Calcutta. The extra consumption is then 1.4% of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s ‘Adjusted Current Supply for 1943, for rice only, and a smaller proportion of total food, at a time when Sen and Daoud claim that there was 11% more food available than in 1941. This certainly cannot have produced the price changes reported or the widespread hunger and starvation. They would have to have consumed something in the order of 14 times more—eating 2 week's food each day—to cause the hunger and starvation that was reported. This explanation is impossible and, therefore, wrong.)
어림짐작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하려면 상인 카르텔이 연합하여 대량의 식량(이 경우 100만~200만 톤)을 시장에서 철수하여 공급이 기근 수준으로 떨어지고 가격이 기근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100만~200만톤은 파기되거나 수출되거나 1~2년 동안 저장되어야 하는데, 이는 비밀로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우드가 기근 조사 위원회가 이런 추측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놀랍습니다.
기근 조사 위원회 (1945)는 실제 그러한 재고가 존재했는지 여부를 조사했습니다.
1943년 6월 첫째주 벵골정부는 식량재고에 대한 위치를 확인하고, 비축물을 찾기 위해 주 전체에 걸친 '식량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55쪽). '시민 공급부'는 대규모 상인과 무역상의 재고를 조사했는데, 방대한 재고를 보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6명 뿐이었다 (57쪽)'. 기근 조사 위원회는 대부분의 무역상이 평년보다 상당히 적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발견했습니다. 푸드 드라이브는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재고를 압수했는데, 그것이 특이한 투기라는 암시는 전혀 없었습니다. "상인이든 농부든 개인 소유자에게서 발견된 300마운드가 넘는 모든 재고의 25%는 징발되어야 했는데, 징발을 통해 얻은 식량재고는 쌀 23,000톤, 벼 18,000톤이었다. (56쪽)" 이것은 기근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100만~200만 톤과 비교하면 미미한 양입니다 . 이런 추측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Again, it is surprising that Daoud does not mention the fact that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showed that this speculation did not happen.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 examines whether such stocks existed: ‘In the first week of June, 1943 the Government of Bengal launched a province-wide “food drive” … “To ascertain the actual statistical position, to locate hoards …”’ (p. 55). The ‘intelligence staff of the Civil Supplies’ examined the stocks of the big merchants and traders, the only people who could be holding the vast stocks required 6 (p. 57). They found only that most traders had significantly less than they would have had in normal years. The Food Drive confiscated stocks from a wide range of people, without any suggestion that they were unusual speculative stocks: ‘Again, 25% of all stocks in excess of 300 maunds found with any individual owner, whether a trader or agriculturist, was to be requisitioned. The stocks obtained by requisitioning were 23,000 tons of rice and 18,000 tons of paddy’ (p. 56). This is miniscule in relation to the one or two million tons needed to cause a famine. This speculation did not happen.)
(...이하 중략)
피터 보브릭 (Peter Bowbrick), Falsehoods and myths in famine research: The Bengal famine and Daoud. #
(that people with different professional backgrounds, different sets of theoretical and analytical skills and different sources of information and raw data have refuted Sen's theory of the Bengal famine from a range of perspectives. I refuted Sen's theory of the cause of the 1943 Bengal famine (Bowbrick, 1986, 1987, 1988, 2008). I presented 13 rigorous, formal, evidenced, refutations, six of which were fatal to Sen's entire theory and seven of which were fatal to significant parts of it. They are independent: Even if one, or several, could be shown to be invalid, the rest would remain unchallenged. In fact, neither Sen nor anybody else has even attempted to challenge any of them. Nor has there been any attempt to counter my evidence that Sen systematically misrepresented the facts in his sources in more than 30 instances. Tauger (2003, 2006, 2009) produced a formal, rigorous, scrupulous, analysis of the famine which, similarly, refutes Sen again and again, from different directions. Dewey (1978), Das (1949) and Tauger review the refutations by the Indian statistics profession. Other critics include Goswami (1990), Dyson and Maharatna (1991), Dyson (1991, 1996) and Basu (1984, 1986). 2 Again, Sen has made no attempt to reply to the refutations.)
센의 주장을 따르는 다우드 (Daoud)그는 기근이 식량 부족이나 흉작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며, 벵골에는 식량이 충분했다고 거듭해서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인구의 3분의 2가 굶주렸다는 주장이 제기된 기근이 있었고, 수백만명이 실제로 매우 굶주렸습니다. 인구의 3.3%~5%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쌀을 100만톤 또는 200만톤 적게 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 있는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100만톤 또는 200만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 인구가 정상보다 훨씬 더 많이 먹었거나, 누군가가 시장에서 그것을 가져갔지만 다우드는 어떠한 제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He states repeatedly that the famine was not caused by a shortage of food, or by a crop failure, and that Bengal had plenty of food. In spite of this, there was a famine in which, it has been argued, at least two-thirds of the population went hungry. 4 Millions went very hungry indeed—3.3%–5% of the population died. We may guess that these people ate one or two million tons less rice, or the calorific equivalent—no meaningful statistics ever existed. 5 What happened to this one or two million tons? Either some of the population ate much more than normal, or someone took it off the market. Daoud does not suggest any alternatives.)
이 주장은 기근이 600만명의 도시인구, 아마도 캘커타의 노동자들 중 일부가 평소보다 더 많이 먹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아 4천만명 이상이 굶주리고, 천만명은 몹시 굶주리고, 200만에서 300만명이 죽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시사합니다. 이러한 식습관의 변화는 1942년 11월에 갑자기 발생하여 소비가 정상으로 돌아온 1944년 1월에 끝났다고 합니다. 그는 기근이 1942/1943년의 흉작시기에 시작되어 1943/1944년의 풍년해의 쌀 작물이 시장에 나왔을때 끝났다는 사실을 생략했는데, 이는 기근이 작물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This argument suggests that the famine was caused by some of the six million urban population, workers in Calcutta probably, eating more than they did normally, leaving so little for the rest that more than forty million people went hungry, ten million went very hungry and two to three million died. This change in eating patterns allegedly occurred suddenly in November 1942 and ended in January 1944, when consumption returned to normal. He omits the fact that the famine started at the time of the poor 1942/1943 harvest and came to an end when the excellent 1943/1944 rice crop came on the market, which suggests that the famine was caused by crop failures.)
다우드가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기근 조사 위원회 (1945)는 많은 도시 근로자들이 더 많이 먹을 수 없는 고정된 배급량이나 생계 수당을 받았고, 기근 가격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받은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기근 동안 캘커타의 인구가 15% 감소하여 도시 소비가 정상보다 적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기근 조사 위원회는 또한 캘커타가 물자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분배되는 양이 종종 삭감되었으며, 기근 내내 캘커타의 식량 소비가 감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저는 다우드가 반복적으로 인용한 논문(1986, 117쪽)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 which Daoud cites repeatedly, makes it clear that many urban employees had fixed rations or dearness allowances which did not allow them to eat more, that very few people were paid enough to buy at famine prices and that the population of Calcutta fell by 15% during the famine so urban consumption was less than normal.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also reported that Calcutta had great difficulty in getting supplies, that the amount distributed was often cut because of shortage of food and that food consumption in Calcutta fell throughout the famine (e.g. pp. 31, 32, 63). I also mentioned this in a paper Daoud cites repeatedly (1986, p. 117).)
저는 센이 한 약간 다른 주장을 조사했고, 어떤 사람들은 역사상 어떤 인구도 먹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다우드가 자신의 모델에 따라 사람들이 얼마나 먹었을지 조사하지 않은 것은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증거와 달리, 도시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기근 동안 훨씬 더 많이 먹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가난한 계층 100만명이 1942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1800년부터 2600년까지 하루 소비하는 칼로리가 증가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캘커타를 떠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쌀 추가소비는 기근 조사 위원회의 '1943년 조정된 현재 공급량'의 1.4%이며, 센과 다우드가 1941년보다 식량이 11% 더 많았다고 주장한 당시 총 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더 작습니다. 이것이 보고된 가격 변화나 광범위한 굶주림과 기아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된 배고픔과 굶주림을 유발하기 위해 14배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했습니다. 매일 2주치 식량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 설명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틀렸습니다.
(I examined a slightly different claim made by Sen and showed that it would require that some people ate vastly more than any population in history has eaten (1986). It is a matter for concern, therefore, that Daoud does not examine how much people would have eaten under his model. Let us assume, contrary to the evidence, that a significant number of people in the cities did eat a lot more during the famine, say, one million of the very poorest increasing calories consumed per day from 1800 to 2600, starting in November 1942 and ending in January 1944. Let us also pretend that nobody left Calcutta. The extra consumption is then 1.4% of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s ‘Adjusted Current Supply for 1943, for rice only, and a smaller proportion of total food, at a time when Sen and Daoud claim that there was 11% more food available than in 1941. This certainly cannot have produced the price changes reported or the widespread hunger and starvation. They would have to have consumed something in the order of 14 times more—eating 2 week's food each day—to cause the hunger and starvation that was reported. This explanation is impossible and, therefore, wrong.)
어림짐작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하려면 상인 카르텔이 연합하여 대량의 식량(이 경우 100만~200만 톤)을 시장에서 철수하여 공급이 기근 수준으로 떨어지고 가격이 기근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100만~200만톤은 파기되거나 수출되거나 1~2년 동안 저장되어야 하는데, 이는 비밀로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우드가 기근 조사 위원회가 이런 추측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놀랍습니다.
기근 조사 위원회 (1945)는 실제 그러한 재고가 존재했는지 여부를 조사했습니다.
1943년 6월 첫째주 벵골정부는 식량재고에 대한 위치를 확인하고, 비축물을 찾기 위해 주 전체에 걸친 '식량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55쪽). '시민 공급부'는 대규모 상인과 무역상의 재고를 조사했는데, 방대한 재고를 보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6명 뿐이었다 (57쪽)'. 기근 조사 위원회는 대부분의 무역상이 평년보다 상당히 적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발견했습니다. 푸드 드라이브는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재고를 압수했는데, 그것이 특이한 투기라는 암시는 전혀 없었습니다. "상인이든 농부든 개인 소유자에게서 발견된 300마운드가 넘는 모든 재고의 25%는 징발되어야 했는데, 징발을 통해 얻은 식량재고는 쌀 23,000톤, 벼 18,000톤이었다. (56쪽)" 이것은 기근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100만~200만 톤과 비교하면 미미한 양입니다 . 이런 추측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Again, it is surprising that Daoud does not mention the fact that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showed that this speculation did not happen. The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 examines whether such stocks existed: ‘In the first week of June, 1943 the Government of Bengal launched a province-wide “food drive” … “To ascertain the actual statistical position, to locate hoards …”’ (p. 55). The ‘intelligence staff of the Civil Supplies’ examined the stocks of the big merchants and traders, the only people who could be holding the vast stocks required 6 (p. 57). They found only that most traders had significantly less than they would have had in normal years. The Food Drive confiscated stocks from a wide range of people, without any suggestion that they were unusual speculative stocks: ‘Again, 25% of all stocks in excess of 300 maunds found with any individual owner, whether a trader or agriculturist, was to be requisitioned. The stocks obtained by requisitioning were 23,000 tons of rice and 18,000 tons of paddy’ (p. 56). This is miniscule in relation to the one or two million tons needed to cause a famine. This speculation did not happen.)
(...이하 중략)
피터 보브릭 (Peter Bowbrick), Falsehoods and myths in famine research: The Bengal famine and Daoud. #
결과적으로 센의 이론은 보브릭을 비롯한 여러 현대학자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에 대한 센의 확인되는 마지막 반박은 1986년도 인걸로 확인된다. #
그 와중 2019년 기근원인에 대해 강수량 데이터를 활용, 토양 수분과 가뭄에 대한 자연과학을 사용한 연구논문이 Q1 SCIE 저널 GEOPHYSICAL RESEARCH LETTERS에 게재됐는데, 2025년까지 피인용수가 180회가 넘는다. # 연구 결과 가뭄이 가장 널리 퍼진 시기는 기근 이전인 1941년 8월과 12월이었으며, 이것은 토양 수분 가뭄과 작물 실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근이었고, 기근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1943년 6월, 7월, 8월, 9월에 정상보다 15%, 3%, 9%, 4% 높은 강수량을 기록했다. 결론은 군사적, 정치적 사건 및 버마 피난민들과 영국 정부가 시행한 전시 곡물 수입 제한 조치 및 영국의 총체적인 정책실패에 의한 인재라는 것이다.
1 소개
기근은 “상당한 수의 사망자를 수반하는 식량 부족”으로 정의된다(Dyson, 1991). 인도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기아로 몰아넣은 기근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Passmore, 1951). 영국의 인도 통치 기간(1765~1947) 동안 12번의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1873~1874년, 1876~1878년, 1896~1897년, 1899~1900년, 1943~1944년)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Maharatna, 1996). 이러한 기근의 대부분은 여름 몬순의 실패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광범위한 가뭄과 농작물 실패가 발생했다(Cook et al., 2010). 1947년 인도 독립 이후 큰 기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발생한 대규모 가뭄은 인도에 계속해서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Bhalme et al., 1983; Gadgil & Gadgil, 2006; Mishra ) 등, 2016; Parthasarathy 등, 1987).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가뭄은 인구 증가, 낮은 작물 수확량, 관개 시설 부족으로 인해 점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2010). 따라서 인도의 역사적 기근과 가뭄에 대한 이해는 가뭄과 관련된 물리적 요인과 농업 생산성 및 관리와 관련이 있다.
토양 수분 가뭄은 특히 관개 시설이 없는 인도의 작물 생산과 식량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Mishra et al., 2014, 2018). 토양 수분 가뭄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 중반에 관개 시설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 인도의 식량 생산과 기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인도 기근에서 토양 수분의 중요한 역할은 장기간 관찰이 일반적으로 없기 때문에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인도에서 18세기와 19세기 가뭄을 연구하려는 대부분의 이전 시도는 기상학적(Bhalme et al., 1983; Mooley & Parthasarathy, 1984) 또는 고기후 재구성(Cook et al., 2010)으로 제한되었으며 주로 가뭄에 대한 연구를 촉진했다. 대규모 기후 변동성의 역할.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 반(1870~2016) 동안의 토양 수분(건조지 농업과의 근접한 연관성)과 기근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뭄의 최초 재구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미국(Andreadis & Lettenmaier, 2006)과 중국(Wang et al., 2011)에 대해 이전에 입증된 것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여 토양 수분을 재구성하기 위해 가변 침투 용량(VIC) 모델을 사용했다.
2 데이터 및 방법
우리는 인도 기상부(IMD)로부터 1901~2016년 기간 동안 0.25° 일일 격자 강수량 데이터를 얻었으며(Pai et al., 2015), Maurer et al.에 설명된 대로 시너지 매핑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0.5° 공간 해상도로 다시 격자화했다. 알 . (2002). Paiet al. (2015)은 역 거리 가중치를 사용하여 인도 전역의 6,995개 관측소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IMD 그리드 강수량 제품을 개발했다(Shepard, 1984). 인도 여름 몬순 강수량의 지형적 특징과 공간적 변동성은 격자형 강수량에 의해 잘 포착된다(Pai et al., 2015). IMD 그리드 강수량 제품은 1900년 이후 기간에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1870~1900년 관측소 관측을 사용하여 0.5°에서 호환 가능한 제품을 개발했다. 이 기간 동안 데이터 가용성과 스테이션 수는 다양했다. 그러나 우리는 1900년 이전 기간의 대부분 동안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1,690개 관측소로부터 합리적으로 완전한 강수량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관측, 20세기 재분석(20CR) 및 버클리 지구 데이터 평가를 통한 데이터 준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지원 정보 텍스트 S1(Compo et al., 2006; Dai et al., 2004; Wood et al., 2004)에서 얻을 수 있다.(2002).
우리는 토양과 식생 매개변수를 취하여 물과 에너지 플럭스를 시뮬레이션하는 VIC(Liang et al., 1994) 거시적 규모 수문학 모델(Text S2, Nijssen et al., 2001; Shuttleworth, 1993; Mishra et al., 2010)을 사용했다. 입력으로 기상 강제력. VIC 모델은 다양한 공간 규모에서 토양 수분 가뭄 평가에 널리 적용되었다(예: Andreadis & Lettenmaier, 2006; Mishra et al., 2014, 2018; H.L. Shah & Mishra, 2016a; R. D. Shah & Mishra, ; 2015, 2016b Sheffield, Goteti, 외, 2004;) 우리는 1870년부터 2016년까지 각 0.5° 그리드에 대해 일일 시간 간격으로 VIC 모델을 적용했다(자세한 내용은 지원 정보 텍스트 S2 참조). 한 달 이내에 강수량과 온도 변동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각 그리드의 일일 토양 수분을 월별로 집계했다. 이는 월별 집계가 일일 값보다 더 정확한 20CR에서 일일 강수량과 기온을 다시 샘플링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적 Weibull 도표 위치 방법(Andreadis & Lettenmaier, 2006)을 사용하여 토양 수분 백분위수(SMP)를 추정했다. SMP 20 미만은 가뭄으로 분류된다(SMP 20~30: 비정상적으로 건조함, 10~20: 중간 정도의 가뭄, 5~10: 극심한 가뭄, 2~5: 극심한 가뭄, 2 미만: 극심한 가뭄; Svoboda et al. , 2002). 우리는 Mishra et al.에 따라 대부분의 작물에 대한 일반적인 뿌리 영역 깊이인 60cm 깊이에서 월별 토양 수분 백분위수를 추정했다. (2018).
우리는 Andreadis와 Lettenmaier(2006)가 개발하고 Sheffield et al이 적용한 SAD(심각도-지역-지속 기간) 분석을 사용했다. (2009) 및 Wang et al. (2011)은 1870~2016년 동안의 주요 가뭄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Andreadis와 Lettenmaier(2006)의 클러스터링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시간과 공간에서 가뭄 기간을 식별했다. 알고리즘은 가뭄 지속 기간과 심각도가 계산되는 최소 면적 임계값(0.1 × 106km2)이 있는 가뭄 클러스터를 고려한다. SAD 분석에서는 기간이 주요 변수이다. 예상되는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SAD 분석은 심각도와 지역에 대한 이변량 분석을 수행한다. SAD 분석의 심각도와 영역은 명확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해당 영역의 평균인 심각도는 영역이 축소되거나 확장됨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우리는 경험적 Weibull 분포를 사용하여 월간 토양 수분 백분위수를 추정했다. 우리는 SAD 분석을 사용하여 다양한 기간, 심각도 및 공간적 범위(면적)의 가뭄을 평가했다. 가뭄의 심각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여기서 S는 가뭄 심각도, SMP는 월별 토양 수분 백분위수(Sheffield, Goteti, et al., 2004), t는 가뭄 기간(개월)이다. 우리는 3개월, 6개월, 12개월, 24개월, 48개월 기간에 대한 가뭄 심각도를 계산했다. 한 지역에서는 단기(3개월) 또는 장기(12~48개월) 기간의 가뭄이 발생할 수 있으며, 단기 기간은 긴 기간 내에 속하지만 "사건"의 심각성과 면적 범위는 ” 많이 다를 수 있다. 우리는 SAD 분석을 통해 7개의 주요 가뭄 기간을 확인했다. 우리는 문헌에서 1870~2016년 기간 동안 기근과 영향을 받은 지역을 확인했다(표 S1). 우리는 국립해양대기청(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의 Extended Reconstructed SST 버전 5(Huang et al., 2017)를 사용하여 기근을 일으킨 주요 가뭄에 대한 몬순 시즌의 해수면 온도(SST) 이상치를 구축했다.
....
다음으로, 우리는 1870년부터 2016년까지 150년 동안 기근(표 S1)과 관련 원인을 분석했다. 우리의 초점은 기근과 토양 수분 가뭄 사이의 중복을 식별한 뿌리 영역 토양 수분(Mishra et al., 2018에 따라 60cm)이다. 특히, 우리는 1870~2016년 기록 동안 발생한 과거 문헌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주요 기근(1873~1874, 1876~1878, 1896~1897, 1899~1900, 1943~1944)을 발견한다(표 S1). 세 번의 기근은 SAD 분석에 의해 확인된 가뭄 기간과 일치한다. 두 가지 예외는 1873~1874년과 1943~1941년이다. 이 두 연도의 시퀀스는 (a) SAD 봉투 곡선에 나타나기에는 너무 국지적이거나 (b) 기근이 토양 수분 부족과 일치하지 않았고 다음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SAD 분석에서 가뭄 기간으로 식별되지 않았다. 다른 요인(예: 식품 유통 시스템의 실패). SAD 분석을 사용한 주요 가뭄 식별은 전국에 대한 것이지만 기근은 인도의 여러 지역에 위치했다(그림 2 및 표 S1). 따라서 대륙 규모의 토양 수분과 기근의 시간적 범위에서 확인된 가뭄 기간에는 필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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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통치 시대의 마지막 주요 기근은 1943년에 발생했으며, 벵골 기근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기근으로 200만~300만 명이 사망했다(Devereux, 2000 ). 우리의 SAD 분석은 심각성, 면적, 지속 기간을 기준으로 1937~1945년을 가뭄 기간으로 식별했다. 그러나 가뭄이 가장 널리 퍼진 시기는 기근 이전인 1941년 8월과 12월이었다(표 S2 및 S3 ). 이것은 토양 수분 가뭄과 작물 실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근이었다(그림 S13 및 S14 ). 기근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1943년 6월, 7월, 8월, 9월에 정상보다 15%, 3%, 9%, 4% 높은 강수량을 기록했다(그림 S13 ). 우리는 벵골 대기근이 말라리아, 기아, 영양실조를 포함한 2차 세계 대전의 지속적인 아시아 위협과 적어도 부분적으로 관련된 다른 요인들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냈다(Sen, 1976 ). 1943년 초, 군사적, 정치적 사건들이 벵골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Tauger, 2009 ), 이는 버마에서 온 난민들에 의해 악화되었다(Maharatna, 1996 ). 게다가, 영국 정부가 부과한 전시 곡물 수입 제한이 기근에 큰 역할을 했다(FIC, 1945 ). 우리는 1943년 벵골 대기근을 제외하고 1870~2016년의 다른 모든 기근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광범위한 토양 수분 가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
3.4 기근을 일으키지 않은 가뭄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근과 동시에 발생하지 않은 1900년대 이후의 주요 토양 수분 가뭄 기간을 식별한다(그림 4 및 표 S1 )...1937년~1945년 가뭄 기간은 1941년 8월에 가장 큰 범위를 보였으며, 인도의 46.8%(주로 북서부와 남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그림 4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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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관개(McGinn, 2009 )와 낮은 작물 수확량은 거의 확실히 토양 수분 가뭄과 결합되어 영국 통치 시대에 작물 실패와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다. 토양 수분 가뭄은 작물 실패를 초래하여 식량 가용성뿐만 아니라 인구의 대부분 생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식량을 운송할 운송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Dreze( 1988 )는 영국 시대의 가뭄이 대규모 작물 실패와 식량 부족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농촌 경제를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위에서 식별한 여섯 가지 기근 중 1873년과 1943년은 몇 가지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비하르와 벵골 지방에서 1873년에 몬순 실패와 가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은 최소였다(Hall-Matthews, 2008 ). 게다가 다른 4가지 가뭄의 인간 사망률은 1873-1874년 기근보다 상당히 높았는데, 이는 정책 실패와 관리 부실로 인한 것일 수 있다(Davis, 2001 ; Ferguson, 2004 ). 1943년 벵골 기근은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영국 통치 시대의 완전한 정책 실패의 결과였다.
1870년에서 1943년까지 발생한 일련의 기근으로 인해 인도에서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 기근 중 하나를 제외한 모든 기근은 토양 수분 가뭄과 관련이 있다. 인도에서 기근을 일으킨 주요 가뭄 5건 중 3건은 열대 태평양의 양의 해수면 온도 이상(엘니뇨)으로 인해 발생했다. 인도는 치명적인 1900년 이전 기근(예: 1918년과 1920년)과 함께 발생한 가뭄만큼 심각한 토양 수분 가뭄을 겪었다. 이러한 가뭄이 기근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주로 정부의 대응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0년에서 2016년 사이에 인구가 상당히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인도에서는 기근 사망이 본질적으로 없어졌다. 주된 이유는 더 나은 식량 분배와 완충 식량 비축, 농촌 고용 창출, 운송, 지하수 기반 관개이다(Aiyar, 2012 ). 인도 북부의 지하수의 급속한 고갈(Asoka et al., 2017 ; Rodell et al., 2009 )은 인도의 식량 및 담수 안보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인도의 가뭄과 기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우리의 결과는 이 지역의 식량 및 담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
Mishra, V., Tiwari, A. D., Aadhar, S., Shah, R., Xiao, M., Pai, D. S., & Lettenmaier, D. (2019). Drought and famine in India, 1870–2016. Geophysical Research Letters, 46, 2075–2083. https://doi.org/10.1029/2018GL081477
기근은 “상당한 수의 사망자를 수반하는 식량 부족”으로 정의된다(Dyson, 1991). 인도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기아로 몰아넣은 기근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Passmore, 1951). 영국의 인도 통치 기간(1765~1947) 동안 12번의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1873~1874년, 1876~1878년, 1896~1897년, 1899~1900년, 1943~1944년)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Maharatna, 1996). 이러한 기근의 대부분은 여름 몬순의 실패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광범위한 가뭄과 농작물 실패가 발생했다(Cook et al., 2010). 1947년 인도 독립 이후 큰 기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발생한 대규모 가뭄은 인도에 계속해서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Bhalme et al., 1983; Gadgil & Gadgil, 2006; Mishra ) 등, 2016; Parthasarathy 등, 1987).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가뭄은 인구 증가, 낮은 작물 수확량, 관개 시설 부족으로 인해 점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2010). 따라서 인도의 역사적 기근과 가뭄에 대한 이해는 가뭄과 관련된 물리적 요인과 농업 생산성 및 관리와 관련이 있다.
토양 수분 가뭄은 특히 관개 시설이 없는 인도의 작물 생산과 식량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Mishra et al., 2014, 2018). 토양 수분 가뭄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 중반에 관개 시설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 인도의 식량 생산과 기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인도 기근에서 토양 수분의 중요한 역할은 장기간 관찰이 일반적으로 없기 때문에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인도에서 18세기와 19세기 가뭄을 연구하려는 대부분의 이전 시도는 기상학적(Bhalme et al., 1983; Mooley & Parthasarathy, 1984) 또는 고기후 재구성(Cook et al., 2010)으로 제한되었으며 주로 가뭄에 대한 연구를 촉진했다. 대규모 기후 변동성의 역할.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 반(1870~2016) 동안의 토양 수분(건조지 농업과의 근접한 연관성)과 기근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뭄의 최초 재구성을 제공한다. 우리는 미국(Andreadis & Lettenmaier, 2006)과 중국(Wang et al., 2011)에 대해 이전에 입증된 것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여 토양 수분을 재구성하기 위해 가변 침투 용량(VIC) 모델을 사용했다.
2 데이터 및 방법
우리는 인도 기상부(IMD)로부터 1901~2016년 기간 동안 0.25° 일일 격자 강수량 데이터를 얻었으며(Pai et al., 2015), Maurer et al.에 설명된 대로 시너지 매핑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0.5° 공간 해상도로 다시 격자화했다. 알 . (2002). Paiet al. (2015)은 역 거리 가중치를 사용하여 인도 전역의 6,995개 관측소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IMD 그리드 강수량 제품을 개발했다(Shepard, 1984). 인도 여름 몬순 강수량의 지형적 특징과 공간적 변동성은 격자형 강수량에 의해 잘 포착된다(Pai et al., 2015). IMD 그리드 강수량 제품은 1900년 이후 기간에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1870~1900년 관측소 관측을 사용하여 0.5°에서 호환 가능한 제품을 개발했다. 이 기간 동안 데이터 가용성과 스테이션 수는 다양했다. 그러나 우리는 1900년 이전 기간의 대부분 동안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1,690개 관측소로부터 합리적으로 완전한 강수량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관측, 20세기 재분석(20CR) 및 버클리 지구 데이터 평가를 통한 데이터 준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지원 정보 텍스트 S1(Compo et al., 2006; Dai et al., 2004; Wood et al., 2004)에서 얻을 수 있다.(2002).
우리는 토양과 식생 매개변수를 취하여 물과 에너지 플럭스를 시뮬레이션하는 VIC(Liang et al., 1994) 거시적 규모 수문학 모델(Text S2, Nijssen et al., 2001; Shuttleworth, 1993; Mishra et al., 2010)을 사용했다. 입력으로 기상 강제력. VIC 모델은 다양한 공간 규모에서 토양 수분 가뭄 평가에 널리 적용되었다(예: Andreadis & Lettenmaier, 2006; Mishra et al., 2014, 2018; H.L. Shah & Mishra, 2016a; R. D. Shah & Mishra, ; 2015, 2016b Sheffield, Goteti, 외, 2004;) 우리는 1870년부터 2016년까지 각 0.5° 그리드에 대해 일일 시간 간격으로 VIC 모델을 적용했다(자세한 내용은 지원 정보 텍스트 S2 참조). 한 달 이내에 강수량과 온도 변동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각 그리드의 일일 토양 수분을 월별로 집계했다. 이는 월별 집계가 일일 값보다 더 정확한 20CR에서 일일 강수량과 기온을 다시 샘플링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적 Weibull 도표 위치 방법(Andreadis & Lettenmaier, 2006)을 사용하여 토양 수분 백분위수(SMP)를 추정했다. SMP 20 미만은 가뭄으로 분류된다(SMP 20~30: 비정상적으로 건조함, 10~20: 중간 정도의 가뭄, 5~10: 극심한 가뭄, 2~5: 극심한 가뭄, 2 미만: 극심한 가뭄; Svoboda et al. , 2002). 우리는 Mishra et al.에 따라 대부분의 작물에 대한 일반적인 뿌리 영역 깊이인 60cm 깊이에서 월별 토양 수분 백분위수를 추정했다. (2018).
우리는 Andreadis와 Lettenmaier(2006)가 개발하고 Sheffield et al이 적용한 SAD(심각도-지역-지속 기간) 분석을 사용했다. (2009) 및 Wang et al. (2011)은 1870~2016년 동안의 주요 가뭄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Andreadis와 Lettenmaier(2006)의 클러스터링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시간과 공간에서 가뭄 기간을 식별했다. 알고리즘은 가뭄 지속 기간과 심각도가 계산되는 최소 면적 임계값(0.1 × 106km2)이 있는 가뭄 클러스터를 고려한다. SAD 분석에서는 기간이 주요 변수이다. 예상되는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SAD 분석은 심각도와 지역에 대한 이변량 분석을 수행한다. SAD 분석의 심각도와 영역은 명확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해당 영역의 평균인 심각도는 영역이 축소되거나 확장됨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우리는 경험적 Weibull 분포를 사용하여 월간 토양 수분 백분위수를 추정했다. 우리는 SAD 분석을 사용하여 다양한 기간, 심각도 및 공간적 범위(면적)의 가뭄을 평가했다. 가뭄의 심각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여기서 S는 가뭄 심각도, SMP는 월별 토양 수분 백분위수(Sheffield, Goteti, et al., 2004), t는 가뭄 기간(개월)이다. 우리는 3개월, 6개월, 12개월, 24개월, 48개월 기간에 대한 가뭄 심각도를 계산했다. 한 지역에서는 단기(3개월) 또는 장기(12~48개월) 기간의 가뭄이 발생할 수 있으며, 단기 기간은 긴 기간 내에 속하지만 "사건"의 심각성과 면적 범위는 ” 많이 다를 수 있다. 우리는 SAD 분석을 통해 7개의 주요 가뭄 기간을 확인했다. 우리는 문헌에서 1870~2016년 기간 동안 기근과 영향을 받은 지역을 확인했다(표 S1). 우리는 국립해양대기청(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의 Extended Reconstructed SST 버전 5(Huang et al., 2017)를 사용하여 기근을 일으킨 주요 가뭄에 대한 몬순 시즌의 해수면 온도(SST) 이상치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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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1870년부터 2016년까지 150년 동안 기근(표 S1)과 관련 원인을 분석했다. 우리의 초점은 기근과 토양 수분 가뭄 사이의 중복을 식별한 뿌리 영역 토양 수분(Mishra et al., 2018에 따라 60cm)이다. 특히, 우리는 1870~2016년 기록 동안 발생한 과거 문헌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주요 기근(1873~1874, 1876~1878, 1896~1897, 1899~1900, 1943~1944)을 발견한다(표 S1). 세 번의 기근은 SAD 분석에 의해 확인된 가뭄 기간과 일치한다. 두 가지 예외는 1873~1874년과 1943~1941년이다. 이 두 연도의 시퀀스는 (a) SAD 봉투 곡선에 나타나기에는 너무 국지적이거나 (b) 기근이 토양 수분 부족과 일치하지 않았고 다음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SAD 분석에서 가뭄 기간으로 식별되지 않았다. 다른 요인(예: 식품 유통 시스템의 실패). SAD 분석을 사용한 주요 가뭄 식별은 전국에 대한 것이지만 기근은 인도의 여러 지역에 위치했다(그림 2 및 표 S1). 따라서 대륙 규모의 토양 수분과 기근의 시간적 범위에서 확인된 가뭄 기간에는 필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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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통치 시대의 마지막 주요 기근은 1943년에 발생했으며, 벵골 기근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기근으로 200만~300만 명이 사망했다(Devereux, 2000 ). 우리의 SAD 분석은 심각성, 면적, 지속 기간을 기준으로 1937~1945년을 가뭄 기간으로 식별했다. 그러나 가뭄이 가장 널리 퍼진 시기는 기근 이전인 1941년 8월과 12월이었다(표 S2 및 S3 ). 이것은 토양 수분 가뭄과 작물 실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근이었다(그림 S13 및 S14 ). 기근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1943년 6월, 7월, 8월, 9월에 정상보다 15%, 3%, 9%, 4% 높은 강수량을 기록했다(그림 S13 ). 우리는 벵골 대기근이 말라리아, 기아, 영양실조를 포함한 2차 세계 대전의 지속적인 아시아 위협과 적어도 부분적으로 관련된 다른 요인들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냈다(Sen, 1976 ). 1943년 초, 군사적, 정치적 사건들이 벵골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Tauger, 2009 ), 이는 버마에서 온 난민들에 의해 악화되었다(Maharatna, 1996 ). 게다가, 영국 정부가 부과한 전시 곡물 수입 제한이 기근에 큰 역할을 했다(FIC, 1945 ). 우리는 1943년 벵골 대기근을 제외하고 1870~2016년의 다른 모든 기근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광범위한 토양 수분 가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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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기근을 일으키지 않은 가뭄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근과 동시에 발생하지 않은 1900년대 이후의 주요 토양 수분 가뭄 기간을 식별한다(그림 4 및 표 S1 )...1937년~1945년 가뭄 기간은 1941년 8월에 가장 큰 범위를 보였으며, 인도의 46.8%(주로 북서부와 남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그림 4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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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관개(McGinn, 2009 )와 낮은 작물 수확량은 거의 확실히 토양 수분 가뭄과 결합되어 영국 통치 시대에 작물 실패와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다. 토양 수분 가뭄은 작물 실패를 초래하여 식량 가용성뿐만 아니라 인구의 대부분 생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식량을 운송할 운송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 Dreze( 1988 )는 영국 시대의 가뭄이 대규모 작물 실패와 식량 부족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농촌 경제를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위에서 식별한 여섯 가지 기근 중 1873년과 1943년은 몇 가지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비하르와 벵골 지방에서 1873년에 몬순 실패와 가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은 최소였다(Hall-Matthews, 2008 ). 게다가 다른 4가지 가뭄의 인간 사망률은 1873-1874년 기근보다 상당히 높았는데, 이는 정책 실패와 관리 부실로 인한 것일 수 있다(Davis, 2001 ; Ferguson, 2004 ). 1943년 벵골 기근은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영국 통치 시대의 완전한 정책 실패의 결과였다.
1870년에서 1943년까지 발생한 일련의 기근으로 인해 인도에서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 기근 중 하나를 제외한 모든 기근은 토양 수분 가뭄과 관련이 있다. 인도에서 기근을 일으킨 주요 가뭄 5건 중 3건은 열대 태평양의 양의 해수면 온도 이상(엘니뇨)으로 인해 발생했다. 인도는 치명적인 1900년 이전 기근(예: 1918년과 1920년)과 함께 발생한 가뭄만큼 심각한 토양 수분 가뭄을 겪었다. 이러한 가뭄이 기근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주로 정부의 대응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0년에서 2016년 사이에 인구가 상당히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인도에서는 기근 사망이 본질적으로 없어졌다. 주된 이유는 더 나은 식량 분배와 완충 식량 비축, 농촌 고용 창출, 운송, 지하수 기반 관개이다(Aiyar, 2012 ). 인도 북부의 지하수의 급속한 고갈(Asoka et al., 2017 ; Rodell et al., 2009 )은 인도의 식량 및 담수 안보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인도의 가뭄과 기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우리의 결과는 이 지역의 식량 및 담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
Mishra, V., Tiwari, A. D., Aadhar, S., Shah, R., Xiao, M., Pai, D. S., & Lettenmaier, D. (2019). Drought and famine in India, 1870–2016. Geophysical Research Letters, 46, 2075–2083. https://doi.org/10.1029/2018GL081477
5. 영국의 책임
5.1. 영국의 정책적 실책
It was ultimately special wartime factors that caused this difficult situation to become a disastrous famine. Fearing Japanese invasion, British authorities stockpiled food to feed defending troops, and they exported considerable quantities to British forces in the Middle East. They also confiscated boats, carts, and elephants in Chittagong, where the invasion was expected. This deprived fishermen and their customers of the ability to operate and generally inhibited the sort of low-level commerce upon which many Bengalis relied for survival.
이 어려운 상황이 비참한 기근이 된 것은 궁극적으로 특별한 전시 요인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한 영국 당국은 방어군을 먹이기 위해 식량을 비축했고 상당한 양을 중동 의 영국군에게 수출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침략이 예상되는 치타공에서 보트, 수레, 코끼리를 압수했습니다. 이로 인해 어부와 고객의 운영 능력이 박탈되었고 일반적으로 많은 벵골인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일종의 저급 상업이 금지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Bengal famine of 1943
최대 약 380만 명의 인도인들이 사망하였고 영국 식민당국은 1944년부터 연합군의 우세로 전황이 바뀌고 나서야 대기근을 수습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인도와의 약속을 어긴 영국에 대한 불신이 대기근으로 더욱 심해졌고 이후 벵골 대기근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꾸준하게 처칠에 대한 비판거리로 작용하고 있다.이 어려운 상황이 비참한 기근이 된 것은 궁극적으로 특별한 전시 요인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한 영국 당국은 방어군을 먹이기 위해 식량을 비축했고 상당한 양을 중동 의 영국군에게 수출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침략이 예상되는 치타공에서 보트, 수레, 코끼리를 압수했습니다. 이로 인해 어부와 고객의 운영 능력이 박탈되었고 일반적으로 많은 벵골인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일종의 저급 상업이 금지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Bengal famine of 1943
영국이 고의적으로 인도인들을 대량학살하기 위해 대기근을 방치했다거나, 제노사이드를 벌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식민당국이 기근을 악화시키는 실책을 범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영국은 영국령 버마에서 일본 제국과 싸우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이 벵골을 통해 인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해 크게 2가지의 선제적 청야전술을 펼쳤다. 첫째, 영국은 벵골 만 해안 지방에서 벼와 쌀 등 잉여 식량들을 즉시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압수 식량들의 양은 그렇게까지 큰 수치는 아니었으나, 당시 구매대행업체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강압적인 징발을 고려하면, 그리고 심지어 긴급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은 지방에서도 폐기가 이루어진 걸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식량들이 폐기되거나 압수됐을 가능성이 크다. 기근을 앞두고 식량을 폐기한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 조치로 인해 식량 시장에 대한 신용이 치명타를 입었으며 이는 벵골의 식량 무역 흐름에 큰 타격을 입혔다.
둘째, 영국은 벵골의 배와 각종 운송수단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일본군이 벵골 현지의 배들을 이용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 조치가 당시 벵골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는 것. 영국군은 10명 이상을 태울 수 있을만큼 큰 배들은 죄다 파괴하거나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이후 무려 선박 4만 5천여 척을 강제로 징발했다. 이는 강을 통한 식량의 이동과 운송에 큰 피해를 입혔고 어업 계층의 경제활동에 큰 제약을 걸었다. 영국군은 징발한 배들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도 제대로 된 보상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인도주정부법"에 의해 생겨난 무역장벽도 기근을 가중시켰다. 자치권을 부여받은 인도의 각 주들은 1942년 중반부터 주 간 무역장벽을 세워서 쌀과 물자의 공급을 통제했는데, 벵골에 위기가 닥치자 힌두교 기반의 지차체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뱅골에 식량을 수출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때문에 벵골에 식량 유입이 크게 줄었다. 원래 목적은 평시 쌀 가격 통제와 불안 요소 차단이였지만 결과적으로 뱅골기근시 주 별 이기주의로 벵골의 숨통을 틀어막는 조치가 되어버렸다. 1942년 1월에는 펀자브에서 쌀 수출이 중단됐고 얼마 안가서 중부 지방, 마드라스에서도 쌀 수출이 끊겼다. 벵골은 대기근 동안에 국내로부터 쌀을 지원받을 수 없었고 벵골은 서서히 목이 졸렸다.
영국 책임설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영국 본국이 초기 인도의 식량지원 요구를 묵살하거나 원래 금액의 일부로 축소되었다는것이다. 사실 이 면에서 영국에게 책임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린리스고 총독, 존 허버트 벵골 주지사, 인도 최고 사령관 루이 마운트배튼 등은 1942년 12월부터 이미 본토에 인도에 대한 식량 수입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칠의 전시 내각은 몇 개월 동안이나 이 요구를 씹었다. 처칠은 군대를 최우선순위로 두어 식민지가 자체적으로 식량 수입을 위해 자체 스털링 비축량을 사용하는 것을 막았고, 자체 선박을 이용해 식량을 수입하는 것 역시 막았다.
하지만 독자연구를 선호하는 아마추어 역사가 측은 처칠의 전시내각도 당시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뱅골의 문제는 식량부족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재기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건지 독자연구 측은 설명을 못한다. 1943년 7월에 열린 전인도 식량회의 (All india food conference)에서도 "뱅골의 유일한 문제는 사재기 때문.."라는 주장이 다른 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지지를 받았다. # 이것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잘못된 대처를 하던 상황'이라 주장하며 저 멀리 바다 건너 한참 전쟁중이던 처칠의 전시내각이 이를 심각하게 인지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한다고 독자연구 측은 주장하는데 '사재기가 문제라고 지적하면 문제를 잘못 파악한거고 심각하게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독자연구자들만의 아마추어 사화과학이론이다. 그러나 위 문단의 주류 정설을 보면 이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무지에 의한 것이다. 가뭄이 가장 널리 퍼진 시기는 기근 이전인 1941년 8월과 12월이었다. 이것은 토양 수분 가뭄과 작물 실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기근이었고, 기근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1943년 6월, 7월, 8월, 9월에 정상보다 15%, 3%, 9%, 4% 높은 강수량을 기록했다.[68] 즉, 자연재해가 아닌 인위적인 기근이란 것이다. 벵골 대기근은 인위적인 기근이다.
결국 전시내각이 기근의 규모를 완전히 알게된건 1943년 9월24일 부터였는데 그 결과 연말까지 20만톤의 곡물을 인도로 보내는 것을 긴급 합의했다. 또 처칠은 1944년 2월 14일 전시 비상회의를 소집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인도를 도울 것이지만,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발언하며 다가오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해가 되지 않는 선이라는 전제를 달았는데, 결국 1943년 후반 아치볼드 웨이벌이 새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연달아 구호를 요청했으나 런던은 노르망디 작전으로 인한 여유분의 함선부족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944년 2월 분노한 웨이벌 총독이 "영국 통치 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닥친 가장 큰 재난 중 하나이며 인도인과 인도 체류 외국인 모두 사이에서 우리의 명성에 대한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라고 비난했을 정도. 결국 처칠은 1944년 4월 후술하는 바와 같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인도 식량배송을 위해 특별히 수송선을 할당해 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썻으나, 루스벨트 역시 마찬자기로 수송선 부족의 이유로 이를 거절당했다.
그 외에도 지속적인 개간지 확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뛰어넘는 폭증하는 뱅골의 인구는 이를 근본적으로 기근에 취약한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69], 이것이 다른 식량공급지인 버마와 제대로 운송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쟁이 터지고 버마가 점령된 상황에서 영국이 식량 통제를 하고 운수 시스템에 개입을 함으로서 원활한 식량공급이 불가능해졌고 한 것도 기근 문제를 악화시켰다.
5.2. 영국 정부의 식민지 차별
학계에서는 영국 정부의 식민지차별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 같다.1943년 벵골대기근 당시 처칠은 이렇게 발언했다.
나는 인디언을 싫어한다. 그들은 짐승 같은 종교를 가진 짐승 같은 사람들이다. 기근은 토끼처럼 번식한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I hate Indians. They are a beastly people with a beastly religion. The famine was their own fault for breeding like rabbits.
윈스턴 처칠[70]
윈스턴 처칠[70]
이에 대한 평가를 보자
처칠의 말은 오늘날에는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20세기 중반 인도인에 대한 정통적인 영국 제국주의적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비극적으로, 이러한 비인간화는 수백만 명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정책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1943년 벵골 대기근 때 그러했다.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05–3221 (2023). https://doi.org/10.1007/s10708-022-10803-4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05–3221 (2023). https://doi.org/10.1007/s10708-022-10803-4
롱허스트(2001, 3쪽)는 신체가 사람들의 장소 경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고, 구체화와 공간성과 관련된 작업을 바탕으로 "신체는 사람과 장소 간의 권력, 지식, 사회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진하는 잠재력"이라고 선언했다. 비슷한 개념이 벵골 기근과 연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은 그리스인을 다른 누구보다 튼튼하다고 여겼고 피부색과 체격을 기준으로 그들을 우선시했다. Choudhury(2021, 7쪽)는 레오폴드 아머리가 "윈스턴은 어쨌든 제대로 먹지 못하는 벵골인의 굶주림이 튼튼한 그리스인의 굶주림보다 덜 심각하다고 말한 것이 옳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 나라에서 제국의 책임감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을 때 이러한 발언을 강조했다. 웨이벨 경이 한 추가 발언은 "분명히 인도인보다 그리스인과 해방된 나라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 나라에서 운송을 제공하거나 줄기를 줄이는 데 주저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05–3221 (2023). https://doi.org/10.1007/s10708-022-10803-4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05–3221 (2023). https://doi.org/10.1007/s10708-022-10803-4
식민지적 풍경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행사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원을 추출하는 표면이기도 했으며, 식민지 개척자와 식민지 집단이 모두 관여하고 함께 묶이는 다양한 갈등을 만들어냈다. 영국은 위치와 계층(농촌 대 도시, 부유층 대 빈곤층)에 따라 인디언을 차별했고 기근을 증폭시키는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인도인의 풍경,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원은 모두 당연하게 여겨지고,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 자신의 식량 부족을 관리하는 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 논문은 사회적 관계가 필연적으로 구체화되고, 권력 관계가 위에서만(즉, 식민지 개척자와 식민지 신민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르티아 센이 보여준 것처럼 아래에서 같은 공동체나 가족 내에서 발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근에서 특권 계층은 가난한 계층과 같은 결과에 직면하지 않았고, 지주(같은 공동체에 속함)는 식품 가격이 부풀려진 것을 이용했다. 이 과정은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05–3221 (2023). https://doi.org/10.1007/s10708-022-10803-4
논문을 직접 읽어보면 영국 정부 뿐 아니라 벵골 내부도 같이 비판하는 논문이다.이 논문은 사회적 관계가 필연적으로 구체화되고, 권력 관계가 위에서만(즉, 식민지 개척자와 식민지 신민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르티아 센이 보여준 것처럼 아래에서 같은 공동체나 가족 내에서 발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근에서 특권 계층은 가난한 계층과 같은 결과에 직면하지 않았고, 지주(같은 공동체에 속함)는 식품 가격이 부풀려진 것을 이용했다. 이 과정은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Mallik, S. Colonial Biopolitics and the Great Bengal Famine of 1943. GeoJournal 88, 3205–3221 (2023). https://doi.org/10.1007/s10708-022-10803-4
5.2.1. 해당 처칠발언의 부정확성
나는 인디언을 싫어한다. 그들은 짐승 같은 종교를 가진 짐승 같은 사람들이다. 기근은 토끼처럼 번식한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I hate Indians. They are a beastly people with a beastly religion. The famine was their own fault for breeding like rabbits.)
(I hate Indians. They are a beastly people with a beastly religion. The famine was their own fault for breeding like rabbits.)
사악한 처칠에 대한 강한 근거로서 자주 활용되는 처칠의 해당발언은 본질적으로 처칠의 직역이라는 확실한 원문이 없는 불확실한 출처이다. 그 원류는 처칠의 직역이 아닌, 어린시절부터 친구이자 당시 처칠과 인도문제로 충돌하며 서로 자극적인 농담도 자주했던 인도의 국무장관이던 아메리 (Amery)의 사후에 출판된 개인일기 (The Empire at Bay: The Leo Amery Diaries, 1988년 #)에 나온 의역이 전부일 뿐이다. (According to Amery, during the Bengal famine, Churchill stated that any potential relief efforts sent to India would accomplish little to nothing, as Indians "breeding like rabbits", but then asked his transport minister how they could be sent food. [71]), 더군다나 아메리야 말로 그의 일기에서 "흑인, 동양인, 얼스터인" 등 인종차별 발언을 즐겨 사용했는데 #, 때문에 사학자 앤드류 로버츠 (Andrew Roberts) 역시 출처의 신뢰성 문제와 함께 그 해석 역시도 상당히 과장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아메리가 처칠에게 돌린 발언은 거의 모두가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의역한 것이었고, 총리의 비서 중 한 명이 이를 처칠의 '도발적인 유머'라고 부른 것을 감안하고 봐야 합니다.."
(Almost all of the remarks Leo Amery ascribed to Churchill were paraphrases rather than direct quotations, and should be seen in light of what one of the Prime Minister's private secretaries called his 'provocative humour.)
P208, Roberts, Andrew (2018). Churchill: Walking with Destiny. London: Allen Lane. #
(Almost all of the remarks Leo Amery ascribed to Churchill were paraphrases rather than direct quotations, and should be seen in light of what one of the Prime Minister's private secretaries called his 'provocative humour.)
P208, Roberts, Andrew (2018). Churchill: Walking with Destiny. London: Allen Lane. #
처칠은 해로우에서 함께 학교에 다닐 때 그를 괴롭혔고, 심지어 옷을 다 입은 채로 수영장에 던진 적도 있었습니다. 아메리는 훌륭하지만 다소 장황하고 지루한 연설가로 성장했으며, 내각회의에서 청중을 지루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윈스턴은 아메리의 인도에 대한 긴 연설을 그를 충격에 빠뜨려 짧게 끝내기 위해 고안된 인종차별적 농담으로 중단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메리는 즐겁지 않았고, 한때 처칠의 언어를 히틀러의 언어에 비유하며 반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의도가 아니었지만, Amery는 일기에 엄숙하게 모든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일기가 1997년에 출판되었을 때 그것은 (마두수리) Mukerjee와 그녀의 동료에게 엄청난 횡재가 됐고, 그들은 처칠의 모든 인종차별적 단어를 더욱 어두운 행위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Zareer Masani, Churchill and the genocide myth #
아메리는 즐겁지 않았고, 한때 처칠의 언어를 히틀러의 언어에 비유하며 반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의도가 아니었지만, Amery는 일기에 엄숙하게 모든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일기가 1997년에 출판되었을 때 그것은 (마두수리) Mukerjee와 그녀의 동료에게 엄청난 횡재가 됐고, 그들은 처칠의 모든 인종차별적 단어를 더욱 어두운 행위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Zareer Masani, Churchill and the genocide myth #
결과적으로 해당발언은 처칠의 직역 원문이라는 확실한 출처가 없이 오로지 아메리의 일기내용 속 의역만이 존재하는게 현실이다. 더군다나, 정치인의 사적인 발언이 실제 정책과 연결되지 않는 사례는 무수히 많으며, 아메리가 인용했다던 처칠의 해당발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처칠과 교통부 장관인 레더경 (Lord Leathers)이 오히려 인도에 대한 구체적인 식량지원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모인 회의자리였음을 리차즈 랭워스 (Richard M. Langworth)는 밝히고 있다. [72]
오히려 논란의 해당발언과는 상충적으로, 아래와 같이 처칠이 평소 인도인들을 칭송했던 발언도 더러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도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오래된 관념은 사라져야 합니다. 나는 우리가 위대한 캐나다나 호주만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위대한 빛나는 인도를 보고 싶습니다..
(In July 1944, over lunch with the Indian statesman Sir Ramaswamy Mudaliar, a member of the War Cabinet, Churchill was heard assuring him that the old notion that the Indian was in any way inferior to the White man must disappear.)
1944년 7월, 처칠이 인도출신 정치가 라마사미 무달리아르경 (Ramasamy Mudaliar)과 점심을 나누며 나눈 대화 中 [73]
(In July 1944, over lunch with the Indian statesman Sir Ramaswamy Mudaliar, a member of the War Cabinet, Churchill was heard assuring him that the old notion that the Indian was in any way inferior to the White man must disappear.)
1944년 7월, 처칠이 인도출신 정치가 라마사미 무달리아르경 (Ramasamy Mudaliar)과 점심을 나누며 나눈 대화 中 [73]
인도군이 보여준 국왕-황제에 대한 충성심, 인도 왕자들과 맺은 조약에 대한 자랑스러운 충실함, 무슬림과 힌두교를 포함한 인도 군인과 장교들의 탁월한 용기는 전쟁 기록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he unsurpassed bravery of Indian soldiers and officers, both Moslem and Hindu, shine for ever in the annals of war. Upwards of two and a half million Indians volunteered to serve in the forces.)
1950년 처칠의 자서전 "운명의 흰지" 내용 中 [74]
(he unsurpassed bravery of Indian soldiers and officers, both Moslem and Hindu, shine for ever in the annals of war. Upwards of two and a half million Indians volunteered to serve in the forces.)
1950년 처칠의 자서전 "운명의 흰지" 내용 中 [74]
당신 (간디)이 영국에 더 충성하든 덜 충성하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교육에 대해 신경 쓰진 않지만, (인도)대중에게 더 많은 버터를 제공해주세요.. 간디씨에게 제공된 권한을 사용하여 일을 성공시키라고 말하세요... 저는 인도에 대해 진정으로 연민을 느낍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하세요. 만약 성공한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으라고 당신을 지지할 것입니다."
(I do not care whether you are more or less loyal to Great Britain. I do not mind about education, but give the masses more butter....Tell Mr. Gandhi to use the powers that are offered and make the thing a success....I am genuinely sympathetic towards India. I have got real fears about the future…But you have got the things now; make a success and if you do I will advocate your getting much more.)
1935년 처칠이 간디에게 보낸 편지 中 #
저는 교육에 대해 신경 쓰진 않지만, (인도)대중에게 더 많은 버터를 제공해주세요.. 간디씨에게 제공된 권한을 사용하여 일을 성공시키라고 말하세요... 저는 인도에 대해 진정으로 연민을 느낍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하세요. 만약 성공한다면 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으라고 당신을 지지할 것입니다."
(I do not care whether you are more or less loyal to Great Britain. I do not mind about education, but give the masses more butter....Tell Mr. Gandhi to use the powers that are offered and make the thing a success....I am genuinely sympathetic towards India. I have got real fears about the future…But you have got the things now; make a success and if you do I will advocate your getting much more.)
1935년 처칠이 간디에게 보낸 편지 中 #
결국 똑같이 특정발언만 선택편취한다면 처칠을 인도인에 대한 악마가 아닌 박애자로서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것이다. 결국 원출처가 불분명한 본질적으로 의역에 불과한 해당발언을 전후맥락 없이 기근과 결부시켜 근거로 삼는 것은 심한 비약으로서 본질적으로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rowcolor=#fff> 함께하는 세계사 - 수백만 명이 굶어 죽게 방치한 영국!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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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영국 정부의 기근 구호 활동
식량 부족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처칠은 내각에 연설하면서 인도 총독인 웨이벨 경이 "자신의 임무는 인도가 현재 진행 중인 일본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위한 안전한 기지가 되도록 하고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며 기근 과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라고 발표하면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75]처칠은 그 후 웨이벨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평화, 질서, 그리고 대중들 사이의 높은 전시 복지상태는 적에 대한 전진 공격의 필수적 기반을 구성합니다... 세계대전의 강력한 압력은 수년 만에 처음으로 인도에 궁핍한 상황을 가져왔고,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 기근에 가까워졌습니다. 전쟁 목적으로 긴급히 필요한 선박을 전환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지역적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Peace, order and a high condition of war-time well-being among the masses of the people constitute the essential foundation of the forward thrust against the enemy….The hard pressures of world-war have for the first time for many years brought conditions of scarcity, verging in some localities into actual famine, upon India. Every effort must be made, even by the diversion of shipping urgently needed for war purposes, to deal with local shortages….Every effort should be made by you to assuage the strife between the Hindus and Moslems and to induce them to work together for the common good)
Winston S. Churchill to Members of the War Cabinet, 8 October 1943. (Churchill papers, 23/11). [76]
(Peace, order and a high condition of war-time well-being among the masses of the people constitute the essential foundation of the forward thrust against the enemy….The hard pressures of world-war have for the first time for many years brought conditions of scarcity, verging in some localities into actual famine, upon India. Every effort must be made, even by the diversion of shipping urgently needed for war purposes, to deal with local shortages….Every effort should be made by you to assuage the strife between the Hindus and Moslems and to induce them to work together for the common good)
Winston S. Churchill to Members of the War Cabinet, 8 October 1943. (Churchill papers, 23/11). [76]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벵골에 식량을 보내기 위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인도의 식량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작년 우리는 벵골에 최소한 70만 명이 사망한 극심한 기근을 겪었습니다. 올해는 쌀이 풍년이지만 전례 없는 폭풍으로 인해 밀이 극심한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군수품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밀 35만톤을 마련할 수 있었고, 1944년 첫 9개월 동안 호주로부터 인도로 배송됐습니다. 이는 최단 거리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배송에 대한 큰 지원을 추가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 많은 주저함을 느꼈지만, 인도의 만족스러운 상황이 일본에 대한 우리의 공동작전에 매우 중요하므로 이를 고려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주에서 인도로 밀을 운반하기 위한 특별 선박 할당.. 우리는 (호주에) 밀을 가지고 있지만 선박이 부족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총독의 요청에 한동안 저항했지만... 더이상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I am seriously concerned about the foodsituation in India….Last year we had a grievous famine in Bengal through whichat least 700,000 people died. This year there is a good crop of rice, but we are faced withan acute shortage of wheat, aggravated by unprecedented storms….By cutting downmilitary shipments and other means, I have been able to arrange for 350,000tons of wheat to be shipped to India from Australia during the first ninemonths of 1944. This is the shortest haul. I cannot see how to do more. I have had much hesitation in asking you to addto the great assistance you are giving us with shipping but a satisfactorysituation in India is of such vital importance to the success of our jointplans against the Japanese that I am impelled to ask you to consider a special allocation of ships tocarry wheat to India from Australia….We have the wheat (in Australia) but welack the ships. I have resisted for some time the Viceroy’s request that Ishould ask you for your help, but… I am no longer justified in not asking foryour help)
Winston S. Churchill to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29 April 1944. Prime Minister’s Personal Telegram T.996/4 (Churchill papers, 20/163).[77]
나는 당신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배송에 대한 큰 지원을 추가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 많은 주저함을 느꼈지만, 인도의 만족스러운 상황이 일본에 대한 우리의 공동작전에 매우 중요하므로 이를 고려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주에서 인도로 밀을 운반하기 위한 특별 선박 할당.. 우리는 (호주에) 밀을 가지고 있지만 선박이 부족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총독의 요청에 한동안 저항했지만... 더이상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I am seriously concerned about the foodsituation in India….Last year we had a grievous famine in Bengal through whichat least 700,000 people died. This year there is a good crop of rice, but we are faced withan acute shortage of wheat, aggravated by unprecedented storms….By cutting downmilitary shipments and other means, I have been able to arrange for 350,000tons of wheat to be shipped to India from Australia during the first ninemonths of 1944. This is the shortest haul. I cannot see how to do more. I have had much hesitation in asking you to addto the great assistance you are giving us with shipping but a satisfactorysituation in India is of such vital importance to the success of our jointplans against the Japanese that I am impelled to ask you to consider a special allocation of ships tocarry wheat to India from Australia….We have the wheat (in Australia) but welack the ships. I have resisted for some time the Viceroy’s request that Ishould ask you for your help, but… I am no longer justified in not asking foryour help)
Winston S. Churchill to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29 April 1944. Prime Minister’s Personal Telegram T.996/4 (Churchill papers, 20/163).[77]
힐스데이 칼리지의 처칠 프로젝트에서 인정한 바에 따르면 "처칠이 그 어려운 몇 주 동안 (부하들이 기록한 대로) 격노와 여러 전선의 전쟁 압박으로 인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칠이 인디언이 굶어죽기를 바랐다는 증거는 없다." 즉, 제노사이드론은 근거가 없다.
다만 처칠을 비판하는 학자들 대부분도 제노사이드론은 주장하지 않는다. 처칠에게 식민지차별적 의도가 있어서 벵골 대기근에 영향을 끼쳤다는 지리학 논문은 존재하지만[78] 제노사이드론 같은 이야기는 아니고, 피식민지 내부도 같이 비판하는 게 일반적이다.
5.4. 탈식민주의 및 PC 진영의 제노사이드론
탈식민주의 학파, 좌파 리버럴( 정치적 올바름 주의자들, Black Lives Matter 진영)에서 윈스턴 처칠의 제노사이드라 주장한다.현재
흑인 생명에 대한 광기와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는 단순한 인종 차별에서 실제 제노사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혐의로 기소된 영국의 가장 소중한 영웅인
윈스턴 처칠의 악명입니다. 최악의 비난은 1943년 기근으로 400만 명의 벵골인을 고의로 굶겨 죽였다는 혐의입니다.
A favourite trope of the current black lives madness and its apologists has been the alleged infamy of Britain’s most cherished hero, Winston Churchill, charged with everything from mere racism to actual genocide. The worst accusation is that of deliberately starving four million Bengalis to death in the famine of 1943.
ZAREER MASANI, Churchill and the Genocide Myth: Last Word on the Bengal Famine, January 27, 2021 https://winstonchurchill.hillsdale.edu/masani-bengal-famine/
A favourite trope of the current black lives madness and its apologists has been the alleged infamy of Britain’s most cherished hero, Winston Churchill, charged with everything from mere racism to actual genocide. The worst accusation is that of deliberately starving four million Bengalis to death in the famine of 1943.
ZAREER MASANI, Churchill and the Genocide Myth: Last Word on the Bengal Famine, January 27, 2021 https://winstonchurchill.hillsdale.edu/masani-bengal-famine/
탈식민주의 학자들과 좌파 자유주의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는 영국의 가장 소중한 영웅인 윈스턴 처칠이 우연한 인종 차별에서 실제 제노사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혐의를 받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A favourite trope of postcolonial academics and their left-liberal public has been the alleged infamy of Britain’s most cherished hero, Winston Churchill, charged with everything from casual racism to actual genocide
ZAREER MASANI, Churchill and the Bengal Famine, 12/08/2021, https://historyreclaimed.co.uk/churchill-and-the-bengal-famine/
A favourite trope of postcolonial academics and their left-liberal public has been the alleged infamy of Britain’s most cherished hero, Winston Churchill, charged with everything from casual racism to actual genocide
ZAREER MASANI, Churchill and the Bengal Famine, 12/08/2021, https://historyreclaimed.co.uk/churchill-and-the-bengal-famine/
그런데 이 제노사이드란 주장이란 은연중의 인종차별에 의한 구조적 기근이라는 식의 해체주의적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인문학 주장이라 구체적인 증거같은 건 없다.(...)
예를 들면 저자 당사자가 정작 제노사이드론을 주장하지 않았는데 번역가가 제노사이드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Bengal Famine: An Unpunished Genocide - A Commentary on Syama Prasad Mookerjee Panchasher Manwantar, October 13, 2017, Syama Prasad Mookerjee, Sudip Kar Purkayastha (Translator)
다만 저널에서 정말로 제노사이드론을 주장하는 논문은 거의 없다. 제노사이드 드립은 당연히 저널 밖에서나 꺼낼 수 있는 드립이다. 하지만 트위터의 정치적 올바름 이용자들은 일반적으로 저널의 논문은 읽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수준낮은 글들은 보통 이런 기고글이다. 버니 샌더스가 처칠의 긍정적인 면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를 꺼내서 비판하는 프로불편러 성향의 글로, 균형없이 일반적으로 처칠을 억까하는 정치운동가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6. 한국에서의 왜곡
6.1. "무케르지" 관련 선동
한국에선 "무케르지"라는 '이름'의 작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황당한 소문이 도는데 예시 원본 링크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자남 무케르지Janam Mukherjee는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 받고 토론토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로 일하며 벵글 대기근 연구서적으로 180번 이상 인용된 역사학자이다. 자남 무케르지, Mukherjee, Janam. Hungry Bengal: War, famine and the end of empire.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피인용수 183회무케르지는 이름이 아니라 성씨이며 벵골에서 엄청나게 자주쓰는 성씨이다. 영위백의 Mukherjee 문서 하지만."무케르지" 관련 선동글들은 성씨인 "무케르지"만 언급해서 마두스리와 자남을 혼동하게 만든다. 이름을 빼고 성씨만 강조한 예시
마두스리의 처칠 책보다 자남 무케르지의 벵골 대기근 연구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이 훨씬 빨리(2011) 나왔다. Mukherjee, Janam. Hungry Bengal: War, Famine, Riots, and the End of Empire 1939–1946. University of Michigan, 2011. 이를 바탕으로 보충한 2015년 서적은 피인용수가 180회 넘는 대표적인 벵골 대기근 역사학 연구서적인데도 한국에선 읽지도 않고 아는 척 하는 역덕이 많은 실정이다.
6.2. 전문가 아서 허먼 선동
처칠 책임을 부정하는 측에서 역사학자 아서 허먼의 처칠이 없었다면 벵골의 기근은 더 심했을 것이다Absent Churchill, Bengal’s Famine Would Have Been Worse"라는 발언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 # 그러나 이를 제대로 인용하는 사람이 없는데...왜냐하면 제대로 링크를 포함해서 인용하면 저자의 행적이 금방 들통나기 때문이다. 해당 발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ARTHUR HERMAN, Absent Churchill, Bengal’s Famine Would Have Been Worse, October 13, 2017 이를 통해 아서 허먼의 경력을 확인하면 아서 허먼의 박사학위 논문은 Herman, Arthur L. THE SAUMUR ASSEMBLY 1611: HUGUENOT POLITICAL BELIEF AND ACTION IN THE AGE OF MARIE DE MEDICI (FRANC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1984.로 20세기는커녕 18~19세기 분야의 전문가조차 아님을 알 수 있다.아서 허먼이 전공이 아닌 분야에 주장한 예시는 다음과 같다.
아서 허먼은 아베 신조 피살 사건 이후 아베 신조가 처칠과 동급의 전략적 사상가라고 주장했다.
신조 아베, 대전략가... 이것이 제가 아베의 또 다른 측면을 인정하게 된 이유인데, 그는 일본의 가장 심오한 전략 사상가로, 처칠이나 비스마르크와 동등한 사상가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언론이 아베를 "극우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려는 노력이 정확히 반대되는 이유이다.
Shinzo Abe, Grand Strategist...This is the other facet of Abe I came to appreciate, as Japan’s most profound strategic thinker — a thinker on the par of Churchill or Bismarck...This is why the effort by the liberal media to portray Abe as an “ultra-nationalist” has it exactly backwards.
Arthur Herman, Shinzo Abe, Grand Strategist, National Review, Jul 8, 2022, https://www.hudson.org/foreign-policy/shinzo-abe-grand-strategist
Shinzo Abe, Grand Strategist...This is the other facet of Abe I came to appreciate, as Japan’s most profound strategic thinker — a thinker on the par of Churchill or Bismarck...This is why the effort by the liberal media to portray Abe as an “ultra-nationalist” has it exactly backwards.
Arthur Herman, Shinzo Abe, Grand Strategist, National Review, Jul 8, 2022, https://www.hudson.org/foreign-policy/shinzo-abe-grand-strategist
그리고 아서 허먼은 매카시즘으로 악명 높은 조셉 매카시를 "맥카시가 국무부 내 공산주의자 57명이 카드를 소지하고 있다는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하더라도, 큰 그림에서 보면 그의 주장이 틀렸다기보다는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79]고 재평가해서 학계 전문가들에게 비판받은 학자이다.
이 인물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쓸 만한 정당성이 있는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이미 두 권의 훌륭한 전기가 있다. 토머스 리브스의 철저한 The Life and Times of Joe McCarthy: A Biography(1982)와 데이비드 M. 오신스키의 좀 더 미묘한 A Conspiracy So Immense: The World of Joe McCarthy(1983)이다. 지금 검토 중인 티 저작의 경우, 유럽 역사가 아서 허먼은 중요한 새로운 기록 보관소에 접근하지도 않았고, 매카시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의 연구는 적어도 피상적이다. 군 파일과 구술 역사 인터뷰에 대한 몇 가지 탐험을 제외하면, 그는 거의 전적으로 표준 출판 자료에 의존한다. 여기에는 새로운 것이 없으며, 평판 좋은 학술 연구에 포함되어야 할 것보다 더 많은(내 생각에는) 허술한 사실적 오류가 있다. 간첩 애호가들만이 법무부 직원인 주디스 코플론이 지하철이 아닌 뉴욕 거리에서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몰라도, 유럽 역사가라면 베를린 봉쇄가 1961년이 아니라 1948-1949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수는 훨씬 더 많다. 하지만 부주의가 대죄는 아니다. 훨씬 더 불안한 것은 허먼이 자신의 정보를 오용한 것이다.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하다. 허먼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주의 기득권에 침투한 방식에 대해 논의하면서 "하버드와 버클리에는 교수진에 공산주의자 교수가 많았다"고 주장한다.(89쪽). 나는 학계에서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공부했지만 그런 사람을 몇 명 만난 적이 없어서 허먼의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습니다. 내가 쓴 No Ivory Tower: McCarthyism and the Universities(1986)가 "passim"이기는 하지만 출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무모함은 Herman의 전기 주제의 특징이다. 학문적 연구(또는 적어도 적절한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이 책은 부제가 그를 묘사한 대로 "미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상원의원"의 평판을 회복하려는 철저한 시도인 듯 하다. 타이밍은 분명해 보인다. Herman은 소련 기록 보관소가 공개되고 미국 정부가 KGB 모스크바 본부와 미국 대표 간의 부분적으로 해독된 전신 서신을 공개한 이후 냉전 이후의 수정주의 물결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소위 Venona 문서다. 하지만 Harvey Klehr, John E. Haynes, Allen Weinstein, 그리고 그들의 러시아 공저자들과 같은 대부분의 수정주의자들이 McCarthy에 선을 긋는 경향이 있는 반면, Herman은 계속 밀어붙인다.
그는 미국 공산당의 간첩 활동과 방해 행위로 인한 진정한 위협이 있었고, 심각한 예방 조치와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폭로가 필요하다는 수정주의자들의 합의에 공감하지만, 연방 정부가 위협을 잘 처리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반대로, 허먼은 "공산주의가 나타내는 종류의 이념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뉴딜 기득권 자유주의자"가 "공산주의의 목표와 목적, 반드시 방법은 아니더라도, 공산주의의 목적과 목적에 치명적으로 끌렸기 때문에" (88쪽) 위험을 증가시켰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매카시와 그의 동료들이 제기한 요점이었다. 따라서 허먼에게 위스콘신 상원의원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본질적으로 옳았다.
Ellen Schrecker, Arthur Herman. Joseph McCarthy: Reexamining the Life and Legacy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 New York: Free Press. 2000. Pp. 404. $26.00,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ume 106, Issue 2, April 2001, Pages 597–598, https://doi.org/10.1086/ahr/106.2.597
그는 미국 공산당의 간첩 활동과 방해 행위로 인한 진정한 위협이 있었고, 심각한 예방 조치와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폭로가 필요하다는 수정주의자들의 합의에 공감하지만, 연방 정부가 위협을 잘 처리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반대로, 허먼은 "공산주의가 나타내는 종류의 이념적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뉴딜 기득권 자유주의자"가 "공산주의의 목표와 목적, 반드시 방법은 아니더라도, 공산주의의 목적과 목적에 치명적으로 끌렸기 때문에" (88쪽) 위험을 증가시켰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매카시와 그의 동료들이 제기한 요점이었다. 따라서 허먼에게 위스콘신 상원의원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본질적으로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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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has become something of a cliché among those of us who write about the home front in the early Cold War that McCarthyism was much more than the career of Senator Joseph R. McCarthy of Wisconsin. After all, McCarthy did not get into the headlines until 1950, by which time Alger Hiss had been convicted, the Hollywood Ten were about to go to prison, Klaus Fuchs was already there, and the federal government's loyaltysecurity program had been in operation for nearly three years. Still, McCarthy's hyped-up accusations of subversion in high places so intensified the political rancor of the period that there is some historical justification for giving his name to the whole anticommunist mess.
Whether there is any justification for writing a new biography of the man is more questionable. Two fine ones already exist: Thomas Reeves's exhaustive The Life and Times of Joe McCarthy: A Biography (1982) and David M. Oshinsky's more nuanced A Conspiracy So Immense: The World of Joe McCarthy (1983). For the work under review, the European historian Arthur Herman did not gain access to any important new archives or uncover any new aspects of McCarthy's past. On the contrary, his research is perfunctory, to say the least. With a few excursions into some Army files and oral history interviews, he relies almost entirely on the standard published sources. There is nothing new here—and more (I assume) sloppy factual errors than a reputable piece of scholarship should contain. Although only espionage afficionados may know that Justice Department employee Judith Coplon was arrested by the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FBI) on a New York City street, not a subway, surely a European historian should know that the Berlin blockade occurred in 1948-1949, not 1961. And there are many more such blunders. But, sloppiness is hardly a cardinal sin. Far more unsettling is Herman's misuse of his sources. One example should suffice. In his discussion of the way in which Communists had infiltrated the liberal establishment, Herman makes the claim that "Harvard and Berkeley had numerous Communist professors on their faculties" (p. 89). Because I had studied communism and anticommunism in the academy and had never encountered more than a handful of such individuals, I was curious to find out where Herman's information came from. It was something of a shock to discover that my own No Ivory Tower: McCarthyism and the Universities (1986) was the source, albeit "passim." Such recklessness is characteristic of the subject of Herman's biography. Rather than scholarship (or at least adequate scholarship), this volume seems to be an exhaustive attempt to rehabilitate the reputation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 as the book's subtitle describes him The timing seems obvious. Herman is positioning himself within the wave of post-Cold War revisionism that followed the opening of the Soviet archives and the American government's publication of the partially deciphered telegraphic correspondence between the KGB's Moscow headquarters and its American representatives: the so-called Venona documents. But while most of those revisionists—like Harvey Klehr, John E. Haynes, Allen Weinstein, and their Russian coauthors—tend to draw the line at McCarthy, Herman pushes on.
He shares the revisionists' consensus that there was a genuine threat from espionage and sabotage on the part of the American Communist Party that required serious preventive measures and the exposure of native Communists, but he disagrees with them that the federal government handled the threat well. On the contrary, Herman insists, the danger was enhanced by the "New Deal establishment liberal" who was "unable to deal effectively with the kind of ideological challenge communism represented . . . thanks to his seemingly fatal attraction to the goals and aims, if not necessarily the methods, of communism" (p. 88). This was, of course, the point McCarthy and his allies were making. So, for Herman, the Wisconsin senator's allegations, even if untrue, were essentially correct: the Democratie administration had been lax about security and "someone at the top was covering up" (p. 115). Herman even manages to rationalize what both historians and contemporaries saw as McCarthy's most egregious charges—those against the venerated World War II chief of staff and Secretary of Defense, George C. Marshall. Marshall was, Herman notes, part of a "fioundering New Deal establishment" that had "helped the Soviet Union become a superpower by their own poorly considered actions" (p. 193).
Ellen Schrecker, Arthur Herman. Joseph McCarthy: Reexamining the Life and Legacy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 New York: Free Press. 2000. Pp. 404. $26.00,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ume 106, Issue 2, April 2001, Pages 597–598, https://doi.org/10.1086/ahr/106.2.597
아서 허먼의 편향적인 조셉 매카시: 미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상원의원의 삶과 유산을 재검토하는 것은 이러한 추세의 최악이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을 나타낸다. 흐릿한 사고의 모델인 이 책은 일부 미국 관리들이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이제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듯이) 매카시의 정부 내 공산주의자에 대한 캠페인은 사실상 선의의 힘이었다고 주장한다. 허먼은 그의 과잉이 무엇이든 매카시는 "큰 그림의 관점에서 볼 때 옳았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보다 더 많이 증명되었다"고 썼다.
David Greenberg(David Greenberg, a Richard Hofstadter Fellow in American History at Columbia University), The Man We Loved to Hate, 워싱턴 포스트, January 1, 2000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entertainment/books/2000/01/02/the-man-we-loved-to-hate/e7a4861d-a64a-47f3-be93-0d5c12ecd04c/
책 소개에서부터 공식적으로 - [ 펼치기 · 접기 ]
- Worse than unbecoming, this in-your-face school of history tends to produce bad scholarship; the End of History threatens to bring about the end of history. Arthur Herman's tendentious Joseph McCarthy: Reexamining the Life and Legacy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 represents what one can only hope will be the nadir of this trend. A model of muddy thinking, the book contends that just because some U.S. officials spied for the Soviet Union (as we now know definitively), McCarthy's campaign against communists in government was ipso facto a force for good. Whatever his excesses, Herman writes, McCarthy has "been proved more right than wrong in terms of the larger picture."
David Greenberg(David Greenberg, a Richard Hofstadter Fellow in American History at Columbia University), The Man We Loved to Hate, 워싱턴 포스트, January 1, 2000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entertainment/books/2000/01/02/the-man-we-loved-to-hate/e7a4861d-a64a-47f3-be93-0d5c12ecd04c/
미국 역사상 가장 증오받는 인물 중 한 명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안보 위험과 공산주의자 침투에 대한 매카시의 일반적인 의혹 중 상당수가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A re-interpretation of one of the most hated figures in American history shows that many of McCarthy's general suspicions about security risks and communist infiltration did have a basis in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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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명시했다물론 아서 허먼이 다 위의 급 정도의 책을 쓰진 않았고 호평받은 대중서 성격의 저작도 같이 썼다. # 결국 호평받는 책과 혹평받는 책이 공존하는 저자이며 학술적 연구성과보단 대중 서적 위주로 활동하는 역사가이며 벵골 대기근에 대해서는 전문적 권위가 전혀 없는 역사학자이다. 즉 역덕들은 일부러 학계의 벵골대기근 연구자를 다 빼버리고 무관한 사람의 글을 제시한 것.
20세기 대영제국 및 인도 민족주의와 영국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의 인도 경찰이 연구분야인[80] 역사학과 교수Professor Campion is Lewis & Clark’s historian 데이비드 캠피온main contentDavid Campion역사학 박사Dr. Robert B. Pamplin Jr. Associate Professor of History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마두르스)무케르지의 학문은 설득력이 있으며, 그녀는 처칠 역사학의 강력한 흐름에 맞서 헤엄칠 수 있는 힘을 분명히 쌓아왔다. 그녀의 글은 종종 논쟁의 여지가 있다(하지만 이는 처칠에 대한 대중적 역사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찬사를 보내는 지배적인 어조를 바로잡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쟁 범죄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처칠의 개인적 책임에 대한 그녀의 큰 결론은 강력하지만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수상의 인종차별주의와 인도에 대한 융통성 없는 태도(그의 전시 고문인 처웰 경의 맬서스적 관점 덕분에 가능했던)는 문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 독립 운동을 통해 인도를 통치할 수 없게 만들려는 노력도 이 위기 속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위협은 여전히 현실로 남아 있었고, 수많은 벵골인들의 식량을 빼앗아간 연합군의 전쟁 기계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 점령의 명백한 잔혹함에서 확실히 구해냈다. 처칠이 수천 명의 영국인이 희생된 같은 식민지를 상대로 비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비난은 지나친 것 같다. 그의 냉담한 무시와 뿌리 깊은 편견이 벵골의 재 앙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며, 아마도 1급 범죄의 과실 수준까지 올라갈 수도 있지만, 인도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계산된 계획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David A. Campion (2011) A Review of “Churchill's Secret War: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India during World War II”, History: Reviews of New Books, 39:3, 95-96, DOI: https://doi.org/10.1080/03612759.2011.557957
'처칠의 냉담함과 편견이 벵골의 재난에 1급 범죄의 과실 수준으로 기여함 것은 분명하지만 처칠에 대한 비난은 지나치고 가혹하다.'는 게 해당분야 전문가의 의견이다. 데이비드 캠피온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 결국 처칠에 대한 지나치고 가혹한 비난은 반박할 수 있지만 과실은 옹호할 수가 없게되는 것이다.- [ 펼치기 · 접기 ]
- Mukerjee’s scholarship is compelling; she has clearly built up the strength to swim against the powerful current of Churchill historiography, much of it hagiographic. Her writing often borders on polemic (though, again, this may be intended as a necessary corrective to the prevailing tone of unquestioning adulation in popular history about Churchill). Yet her larger conclusion about Churchill’s personal responsibility for what is essentially characterized as a war crime is powerful but not entirely convincing. Certainly, the prime minister’s racism and inflexible attitude about India (enabled by the Malthusian view of his wartime advisor, Lord Cherwell) did nothing to help matters. Neither, however, did efforts by Gandhi and the Indian National Congress, through the Quit Indiamovement, tomake India ungovernable in the midst of this crisis. Furthermore, the threat of imminent invasion by Japan remained very real, and the Allied war machine that took food away from so many Bengalis surely spared many others the incontrovertible brutality of Japanese occupation. The accusation that Churchill launched a secret war against the same colony for whose protection thousands of British lives were being sacrificed seems excessive. His callous disregard and deepseated prejudice certainly contributed to the disaster in Bengal and, perhaps, may rise to the level of criminal negligence of the first order, but this is not the same as a calculated plan to wage war on the people of India."
David A. Campion (2011) A Review of “Churchill's Secret War: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India during World War II”, History: Reviews of New Books, 39:3, 95-96, DOI: https://doi.org/10.1080/03612759.2011.557957
6.3. 전문가 김태수 선동
국내 처칠 책임을 강조하는 측에선 주로 김태수, 함께하는 세계사의 유튜브 영상 (수백만 명이 굶어 죽게 방치한 영국! )를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 주요 논리는 김태수는 역사학자이고, 네티즌은 그저 비역사가, 역덕일 뿐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김태수는 본질적으로 뱅골 대기근과 전혀 무관한 독일 현대사 전공이며, 마찬가지로 박사논문도 독일 보수혁명 (Konservativen Revolution)에 관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따라서 6.2. 전문가 아서 허먼 선동 항목에서 아서 허먼이 1984년 박사논문으로 17세기 위그노에 관한 논문을 썻다며 벵골 대기근의 비전문가라고 매도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결국 자승자박인 것이다.① 오히려 아서 허먼 (Arthur Herman)은 2009년 인도 현대사를 다룬 처칠과 간디 (Churchill and Gandhi: The Epic Rivalry that Destroyed an Empire and Forged Our Age)란 책으로 퓰리처상 (Pulitzer Prize) 최종 후보에도 올랐으며 #, 그의 학술인용도 2025년 1월까지 147회 인용이다. # [81] ② 반면, 김태수는 학술인용이 0회이다. 왜냐하면 관련 주제에 대한 저술활동이 아예 전무하기 때문이다. 즉, 권위주의 오류에 따라 김태수를 실제 역사학자라고 칭송하며 그의 벵골 대기근 영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네티즌을 아마추어, 비역사가일 뿐이라며 매도하거나, 처칠의 노력을 인정한 아서 허먼 같은 美 유명 역사학자마저 벵골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그의 아베 신조, 조셉 매카시에 대한 평가까지 문제 삼으며 비전문가라고 매도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 아서 허먼보다 훨씬 세계적으로 권위, 인지도가 낮은 유튜버의 고작 몇분짜리 영상에 의존하고 있는 셈..
실제 9분짜리 유튜브 영상에서도 시간 대부분을 ① 영국의 초토화 정책과, ② 처칠의 인종차별적 시선 - "인도인들은 토끼처럼 번식한다는 발언" (I hate Indians. They are a beastly people with a beastly religion. The famine was their own fault for breeding like rabbits.)에 할당하고, 초기 2분간을 일본의 침략과 쌀 수입 제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짧게 언급하고 마는데, 때문에 "대규모 홍수와 태풍, 인도 지자체의 이기주의 협조거부, 벵골 무슬림 자치정부의 통계의 부정확성과 무능, 전염병, 2차대전으로 인한 운송의 어려움, 처칠이 기근종식이 제1순위라며 신임총독을 임명한 사실이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용 전쟁선박까지 줄이며 벵골에 식량을 어떻게든 지원하려 했던 사정.."등 여러 요인을 알고있던 네티즌의 상당수 반박댓글을 볼 수 있었다. #
이에 김태수를 변호하는 측은 그가 아마르티야 센과 자남 무케르지 (Janam Mukherjee)라는 나름 이름있는 학자를 영상출처로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짧은 영상에서 상당수를 할애한 처칠의 논란의 발언조차 5.2.1. 해당 처칠발언의 부정확성에서 밝히듯, 그게 처칠의 직역이라는 확실한 원문이 없는 신뢰성이 낮은 출처라는 것을 봤을때, 역사학자로서 출처 검증과정 의문과 과연 이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것이 사실이다.
7. 문헌
7.1. 마두스리 무케르지에 대한 평가
7.1.1. 호평
마두스리 무케르지Madhusree Mukherjee의 저서 Mukerjee, Churchill's Secret War, Chapter 3 'Scorched는 인도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저서이다. 예를 들면 아비짓 사카르Abhijit Sarkar는 전시 식민주의와 벵골의 재앙 사이의 인과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주장을 지지하려는 욕망은 비판했다. 특히 벵골이 고통받을 때 펀잡이 전시 번영으로 수혜를 입었지만 이에 대한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비난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벵골이 고통받을 때 아무런 구호를 하지 않고 조용히 번영하며 공론화 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펀잡과 같은 식량 잉여 지역의 농부와 곡물 상인의 이해관계와 식량 부족 지역의 굶주린 소비자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충돌하고 연합당이 이끄는 펀잡 선출 정부의 행동이 인도의 전시 식량 상황을 악화시켰는지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82] 하지만 아비짓 사카르는 Mukerjee, Churchill's Secret War, Chapter 3 'Scorched'에 대해서는 영국의 디나이얼 정책 실행에 대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학술자료라고 소개하고 있다.[83] 인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학술적 연구도서임에도 한국에선 폄훼당한다.Lewis & Clark의 20세기 대영제국 및 인도 민족주의와 영국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의 인도 경찰이 연구분야인 역사학과 교수Professor Campion is Lewis & Clark’s historian of Modern Britain and Ireland, the British Empire, and Modern South Asia 데이비드 캠피온 main contentDavid Campion 역사학 박사Dr. Robert B. Pamplin Jr. Associate Professor of History는 무케르지의 일부 무모한 결론을 비판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설득력 있고 인상적이라고 호평을 내렸다.
마두스리 무케르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파괴적인 책을 썼다. 처칠의 비밀 전쟁의 초점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인도의 자원을 착취한 영국의 상징적인 총리의 역할과 확장하여 1943년 벵골 기근으로 300만 명의 인도인이 사망한 데 대한 그의 개인적 책임이다. 이 무서운 사건은 남아시아 역사가들이 전쟁 중 인도의 격동적인 경험을 기록하면서 잘 기록했지만 종종 2차 세계 대전의 더 큰 서사에서 각주로 언급된다. 마찬가지로 처칠 자신의 방대한 학문과 대중적 전기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Scientific American의 전 편집자이자 훈련을 받은 물리학자인 무케르지는 인도 역사의 이 어두운 에피소드에 빛을 비추고 처칠의 역사적 유산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위해 인상적인 기록 증거와 목격자 진술을 정리했다. 무케르지는 동인도 회사 시절부터 광대한 제국의 중심지로서 영국령 인도 제국의 부상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추적하면서 시작한다. 그녀는 또한 젊은 처칠이 인도가 영국 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 즉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종말이라는 견해가 인도 북서부 국경에서의 군 복무를 통해 형성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굳건해졌다고 설명한다. 1930년대에 보수적인 의원이었던 처칠은 인도인에게 더 큰 자치권을 이양하려는 웨스트민스터의 모든 시도에 가장 강인한 적이었다. 국가와 제국에 대한 실존적 위협에 직면한 전시 총리로서 처칠은 여러 전선에서 전쟁 노력을 위한 인력과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인도에 의지했다. 인도에서는 전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현금 작물 경제에 대한 압박, 식품 가격 급등, 군사적 우선순위를 위한 운송 수단의 징발로 인해 최상의 시기에 생계 수준에서 살아남았던 인도 농민들이 기근의 위험이 커졌다. 1943년 벵골의 사이클론이 바로 그런 재앙을 촉발했는데, 무케르지는 처칠과 그의 전쟁 내각이 이를 완전히 무시했고, 그 결과 이 지방이 황폐화되었고 300만 명이 거의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이 재앙 내내 인도는 전쟁 노력을 위해 식량을 창고에 보관하고 수출했다. 가장 혹독한 주장은 처칠 정부가 기근을 완화할 수 있는 배와 식량 잉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인도인에 대한 선천적 인종적 증오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수행하려는 강박관념이 섞여서 총리가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기꺼이 그리고 고의적으로 죽음에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무케르지의 연구는 광범위하고 인상적이다. 그녀는 공급과 운송에 대한 통계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기아로 파괴된 마을과 캘커타로 도망쳐 거리에서 죽는 생존자들에 대한 친밀하고 가슴 아픈 설명을 결합한다. 그녀는 또한 두 명의 총독과 처칠의 인도 장관인 레오 아메리를 포함한 절망에 빠진 영국 관리들의 여러 출처에서 나온 증거를 공개했는데,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인도인에 대한 완고한 경멸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무관심을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케르지의 학문적 지식은 설득력이 있다. 그녀는 처칠 역사학의 강력한 흐름, 그 대부분이 성인전인 흐름에 맞서 헤엄칠 수 있는 힘을 분명히 키웠다. 그녀의 글은 종종 논쟁에 가깝다(다시 말하지만, 이는 대중 역사에서 처칠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아첨의 지배적인 분위기에 대한 필요한 교정으로 의도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쟁 범죄로 특징지어지는 것에 대한 처칠의 개인적 책임에 대한 그녀의 더 큰 결론은 강력하지만 전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확실히 총리의 인종 차별주의와 인도에 대한 완고한 태도(전쟁 중 고문인 셔웰 경의 맬서스적 관점에 의해 가능해짐)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가 Quit India 운동을 통해 이 위기 속에서 인도를 통치할 수 없게 만들려는 노력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일본의 임박한 침략 위협은 여전히 매우 현실적이었고, 많은 벵골인에게서 식량을 빼앗은 연합군 전쟁 기계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일본 점령의 명백한 잔혹함에서 확실히 구해냈다. 처칠이 수천 명의 영국인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된 식민지에 대해 비밀 전쟁을 시작했다는 비난은 지나친 듯하다. 그의 무자비한 무시와 깊이 자리 잡은 편견은 확실히 벵골의 재앙에 기여했으며, 아마도 1급의 범죄적 과실 수준으로 치닫겠지만, 이는 인도 국민에게 전쟁을 일으키려는 계산된 계획과 같지 않다. 처칠의 비밀 전쟁은 잘 쓰여졌고 일반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특히 대학 학부생들에게 이 논란을 소개하고 영국의 전쟁 지도자에 대한 보다 섬세한 관점을 제공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상당히 발전시키고 처칠의 신화화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축소를 제공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단어는 아니다. David A. Campion (2011) A Review of “Churchill's Secret War: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India during World War II”, History: Reviews of New Books, 39:3, 95-96, DOI: https://doi.org/10.1080/03612759.2011.557957 |
힐스데일 컬리지의 처칠 연구회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ARTHUR HERMAN, Absent Churchill, Bengal’s Famine Would Have Been Worse, October 13, 2017 #
-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나치를 물리친 건 영국인데) 마두스리 무케르지 박사는 나치를 물리친 것이 소련이라고 왜곡한다'라는, 학계정설(2021년 3월 14일)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소련이 나치를 물리쳤다...”
“당연히 나치를 물리친 것은 소련이었다"는 무커지 박사의 주장은 1939년과 1940년, 그리고 1941년의 절반 동안 소련이 나치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1939년 8월 나치-소련 협정이 아니었다면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이 1942년부터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독일을 폭격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독일군과 공군의 70%가 아니라 100%가 소련에 대항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1941년 미국이 연합국에 상당한 군사 물자와 지원을 제공하는 렌드리스(Lend-Lease) 프로그램을 통해 소련은 지프와 트럭 40만 대, 비행기 1만 4천 대, 트랙터 8천 대, 탱크 1만 3천 대, 담요 150만 장, 군화 1천 5백만 켤레, 면화 9만 7천 톤, 석유 제품 240만 톤, 식량 4백만 톤을 추가로 확보했습니다.10 참고로 1945년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수송되어 입성한 것은 소련이 아닌 미국 트럭이었다.11 나치를 물리친 것은 소련 자체의 힘이 아니었으며, 특히 공중전과 해전에서 영국과 미국이 압도적인 힘을 보탰다는 것은 분명하다.
Cambridge: “The Racial Consequences of Mr. Churchill,” A Review(March 14, 2021)
그러나 영국의 대표적인 2차 세계대전 역사학자인 리처드 오버리의
피와 폐허 1~2 세트 - 전2권,
러시아의 전쟁 - 인류사상 최대 단일전, 독일-소련 전쟁 1941-1945 에서 보다시피 이미 영국사학계에선 소련이 나치를 물리쳤다는 사실을 2000년대 이후부터 정설로 취급받는다.“당연히 나치를 물리친 것은 소련이었다"는 무커지 박사의 주장은 1939년과 1940년, 그리고 1941년의 절반 동안 소련이 나치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1939년 8월 나치-소련 협정이 아니었다면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이 1942년부터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독일을 폭격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독일군과 공군의 70%가 아니라 100%가 소련에 대항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1941년 미국이 연합국에 상당한 군사 물자와 지원을 제공하는 렌드리스(Lend-Lease) 프로그램을 통해 소련은 지프와 트럭 40만 대, 비행기 1만 4천 대, 트랙터 8천 대, 탱크 1만 3천 대, 담요 150만 장, 군화 1천 5백만 켤레, 면화 9만 7천 톤, 석유 제품 240만 톤, 식량 4백만 톤을 추가로 확보했습니다.10 참고로 1945년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수송되어 입성한 것은 소련이 아닌 미국 트럭이었다.11 나치를 물리친 것은 소련 자체의 힘이 아니었으며, 특히 공중전과 해전에서 영국과 미국이 압도적인 힘을 보탰다는 것은 분명하다.
Cambridge: “The Racial Consequences of Mr. Churchill,” A Review(March 14, 2021)
7.1.2. 혹평
마두리스는 경제학자, 역사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이며, 그녀의 영문위키 프로필에서도 직업을 "물리학자 (physicist), 작가 (Writer), 에디터 (editor)"라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 그녀는 인도 자다브퍼 대학 (Jadavpur University)에서 물리학 학사를,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美 렌셀레어 폴리테크닉 공대에서 물리학 석사를,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도 Scientific American라는 美 과학잡지에서 편집자로서 일하고 있는 물리학과 더 관련이 깊은 사람이다. #
심지어 무케르지 조차 본인의 홈피에 작가 (Writer), 편집자 (Editor), 연구원 (Researcher)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 마찬가지로 그녀가 해당잡지에서 가장 최근까지 올린 기고문들을 보면, 역시 "환경보호, 심리학, AI 관련기고, 공공의학, 동물" 등에 대한 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케르지가 Scientific American에 최근까지 올린 칼럼 # |
마두스리 무케르지 (Madhusree Mukerjee)는 Scientific American의 수석 편집자로, "심리학, 인류학 및 기타 다양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녀는 Churchill's Secret War (Basic Books, 2010)와 The Land of Naked People (Houghton-Mifflin, 2003)이라는 두권의 논픽션 책을 썼습니다. 그녀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구겐하임 펠로우십을 받아 첫번째 책을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원주민 문제, 개발 및 식민지주의에 대한 수많은 기사를 썼으며 세번째 책을 작업 중입니다.
Madhusree Mukerjee is a senior editor at Scientific American, where she covers psychology, anthropology, and diverse other topics. She has authored two nonfiction books: Churchill's Secret War (Basic Books, 2010) and The Land of Naked People (Houghton-Mifflin, 2003). She has a PhD in physics from the University of Chicago and received a Guggenheim fellowship to complete her first book. She has written numerous articles on Indigenous issues, development and colonialism and is working on a third book.
Scientific American의 마두스리 무케르지에 대한 소개란 #
Madhusree Mukerjee is a senior editor at Scientific American, where she covers psychology, anthropology, and diverse other topics. She has authored two nonfiction books: Churchill's Secret War (Basic Books, 2010) and The Land of Naked People (Houghton-Mifflin, 2003). She has a PhD in physics from the University of Chicago and received a Guggenheim fellowship to complete her first book. She has written numerous articles on Indigenous issues, development and colonialism and is working on a third book.
Scientific American의 마두스리 무케르지에 대한 소개란 #
또한 그녀는 2017년부터 Scientific American에 다시 복직해 일하고 있는데, 2025년기준 역사에 관해 쓴 책은 ① 벌거벗은 사람들의 땅: 석기시대 섬 주민과의 만남, The land of naked people : encounters with Stone Age islanders (2003), ② 처칠의 비밀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제국과 인도의 약탈, Churchill's secret war :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 india during world war ii. (2011) 모두 2권이다.
아래는 2009년 처칠과 간디 (Churchill and Gandhi)란 책으로 퓰리처상 (Pulitzer Prize) 최종 후보에도 오른 미국의 유명 역사가 아서 허먼 (Arthur Herman)는 무케르지의 책에 대한 비평의 일부이다.
처칠과 히틀러를 비교하는 이런 불쾌한 비교가 이 책의 핵심 주제입니다. 불행히도 실제 기록은 거의 모든 지점에서 그녀의 설명과 모순됩니다. 무케르지의 설명을 읽어보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독일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일본은 주로
찬드라 보스와 같은 반영국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호의적인 동맹으로 묘사됩니다. 심지어 아메리 (Amery)조차 퀘벡회의에서 중요한 전쟁용 선박을 인도로 전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반론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총독은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인종차별적 음모론과는 거리가 먼.."모든 자치령 정부가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 "고 언급했습니다. 처칠과 전쟁 내각은 캐나다가 인도에 밀 10만 톤을 보내자는 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호주가 그 약속을 이행하고 25만 톤을 더 보내도록 촉구했습니다.
This invidious comparison of Churchill with Hitler is the thematic hinge of the book. Unfortunately for the author, the actual record contradicts her account at almost every point. Reading Mukerjee’s account, one might never know there was a war raging in Europe and the rest of Asia. Germany barely rates a mention. Japan appears mainly as the sympathetic ally of anti-British Indian nationalists like Subhas Chandra Bose. Even Amery admitted, during the Quebec Conference, the “unassailable” case against diverting vital war shipping to India. Far from a racist conspiracy to break the country, the Viceroy noted that “all the Dominion Governments are doing their best to help.” While Churchill and the War Cabinet vetoed a Canadian proposal to send 100,000 tons of wheat to India, they pushed for Australia to fulfill that commitment—and 250,000 tons more.
ARTHUR HERMAN, CAbsent Churchill, Bengal’s Famine Would Have Been Worse, JOctober 13, 2017 #
This invidious comparison of Churchill with Hitler is the thematic hinge of the book. Unfortunately for the author, the actual record contradicts her account at almost every point. Reading Mukerjee’s account, one might never know there was a war raging in Europe and the rest of Asia. Germany barely rates a mention. Japan appears mainly as the sympathetic ally of anti-British Indian nationalists like Subhas Chandra Bose. Even Amery admitted, during the Quebec Conference, the “unassailable” case against diverting vital war shipping to India. Far from a racist conspiracy to break the country, the Viceroy noted that “all the Dominion Governments are doing their best to help.” While Churchill and the War Cabinet vetoed a Canadian proposal to send 100,000 tons of wheat to India, they pushed for Australia to fulfill that commitment—and 250,000 tons more.
ARTHUR HERMAN, CAbsent Churchill, Bengal’s Famine Would Have Been Worse, JOctober 13, 2017 #
심지어 무케르지가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 (Amartya Sen) 역시도 그녀를 다소신랄하게 비평했는데, 마두리스는 경제학적으로 반박을 하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이 인용하는 학자에 대해 비판받는 촌극이 연출됐다.
마두스리 무케르지는 정보가 거의 없어도 만족하는 듯합니다. 마크 타우거의 데이터는 27개 지구가 있는 분할되지 않은 벵골의 두 지구에서 정확히 두 개의 "쌀 연구 기지"에서 나왔습니다. 날씨 변화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모든 지구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제가 한 분석에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하려면 이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분석에 따르면 1943년(기근이 있던 해)의 식량 가용성은 1941년(기근이 없었던 해)보다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녀는 제 연구에서 사용한 데이터 범위를 무시하고 제 추정치가 "예측"에 근거한 것이라고 잘못 설명합니다.
무케르지가 언급한 다른 요점에서 그녀는 인도 국무장관의 성명에서 인용한 제 오타를 이야기로 만들면서, 오타가 식량 상황에 대한 제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0만 톤의 "부족"조차도 "60/70만 톤"(국무장관이 언급했듯이)의 총 작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물론 혼란스러운 문제는 Lelyveld가 지적했듯이 "부족"이라는 개념 자체입니다. 실제로 수요에 비해 상당한 부족이 있었고, 제가 자세히 설명했듯이 전쟁 경제에서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이는 이전 몇 년 동안 공급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Mukerjee는 이 중요한 구별을 놓친 듯하며, 처칠을 못 박으려는 그녀의 일심동체적인, 이해할 수 있는 시도에서 그녀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혼란과 무정함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는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Madhusree Mukerjee seems satisfied with little information. Mark Tauger’s data come from exactly two “rice research stations” from two districts in undivided Bengal, which had twenty-seven districts. Since weather variations have regionally diverse effects, it would require more than this to “seriously challenge” the analysis I made, using data from all districts, which indicated that food availability in 1943 (the famine year) was significantly higher than in 1941 (when there was no famine). Ignoring the range of data I used in my study, she misdescribes my estimates as being based only “on projections.”
On the other point mentioned by Mukerjee, she makes a story out of a typo in my quotation from a statement of the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omitting to mention that the typo has not the slightest bearing on my assessment of the food situation. Moreover, even a “shortage” of 1.4 million tons is a small proportion of the total crop of “60/70 million tons” (as the secretary of state mentioned).
The confounding issue, of course, is the idea of “shortage” itself, as Lelyveld has noted. There was indeed a substantial shortfall compared with demand, hugely enhanced in a war economy, as I have described in detail, but that is quite different from a shortfall of supply compared with supply in previous years. Mukerjee seems to miss this crucial distinction, and in her single-minded, if understandable, attempt to nail down Churchill, she ends up absolving British imperial policy of confusion and callousness, which had disastrous consequences.
무케르지의 편지에 대한 아마르티야 센의 응답 (Amartya Sen has sent the following comment on the above letter #)
무케르지가 언급한 다른 요점에서 그녀는 인도 국무장관의 성명에서 인용한 제 오타를 이야기로 만들면서, 오타가 식량 상황에 대한 제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0만 톤의 "부족"조차도 "60/70만 톤"(국무장관이 언급했듯이)의 총 작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물론 혼란스러운 문제는 Lelyveld가 지적했듯이 "부족"이라는 개념 자체입니다. 실제로 수요에 비해 상당한 부족이 있었고, 제가 자세히 설명했듯이 전쟁 경제에서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이는 이전 몇 년 동안 공급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Mukerjee는 이 중요한 구별을 놓친 듯하며, 처칠을 못 박으려는 그녀의 일심동체적인, 이해할 수 있는 시도에서 그녀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혼란과 무정함에서 벗어나게 했고, 이는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Madhusree Mukerjee seems satisfied with little information. Mark Tauger’s data come from exactly two “rice research stations” from two districts in undivided Bengal, which had twenty-seven districts. Since weather variations have regionally diverse effects, it would require more than this to “seriously challenge” the analysis I made, using data from all districts, which indicated that food availability in 1943 (the famine year) was significantly higher than in 1941 (when there was no famine). Ignoring the range of data I used in my study, she misdescribes my estimates as being based only “on projections.”
On the other point mentioned by Mukerjee, she makes a story out of a typo in my quotation from a statement of the secretary of state for India, omitting to mention that the typo has not the slightest bearing on my assessment of the food situation. Moreover, even a “shortage” of 1.4 million tons is a small proportion of the total crop of “60/70 million tons” (as the secretary of state mentioned).
The confounding issue, of course, is the idea of “shortage” itself, as Lelyveld has noted. There was indeed a substantial shortfall compared with demand, hugely enhanced in a war economy, as I have described in detail, but that is quite different from a shortfall of supply compared with supply in previous years. Mukerjee seems to miss this crucial distinction, and in her single-minded, if understandable, attempt to nail down Churchill, she ends up absolving British imperial policy of confusion and callousness, which had disastrous consequences.
무케르지의 편지에 대한 아마르티야 센의 응답 (Amartya Sen has sent the following comment on the above letter #)
8. 참고 자료
※ 레퍼런스 관련 양식은 출처의 2번 문단과 인용/양식 문서를 참고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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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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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외부 링크
- 한국어
[1]
델리와 중부 주를 중심으로 한 인도 북서부와
벵골 지방에 인구가 미친 듯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이는 인도 제국 시기의 의료 기술 향상 덕분도 약간 있었는데, 같은 기간 인도 전체의 인구는 약 38% 증가했다.
[3]
주로 벵골만 해안의 지방들에서 쌀을 태웠다. 공식적으로 태웠다고 기록된 양은 그렇게까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일단 기근이 앞닥친 상황에서 식량을 태웠다는 점에서 욕을 먹을만하고 비공식적으로 태워버린 양까지 합하면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4]
함께하는 세계사의 영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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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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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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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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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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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43년 8월 22일자 '더 스테이츠맨'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사진으로, 세계에 당시 벵골의 참혹함을 알린 사진이기도 하다.
[50]
이 통계마저도 낮게 잡은 것 같다. 말라리아의 증상은 다른 열병의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말라리라 환자들이 다른 질병에 걸린 것으로 조사됐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말라리아 확진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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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통계에 따르면 1901년~1941년 동안 뱅골인구는 4210만 명에서 6030만 명으로 무려 43%가 증가했다. - Famine Inquiry Commission 1945a, pp. 4,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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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lius Rosenberg had worked notfortheState Department but forthe Army. But even ifMcCarthy had had toback down from hisclaims about fifty-seven card-carrying Communists intheState Department, he had been proved more right than wrong interms of thelarger picture. Further revelations regarding the Rosenberg case and atomic espionage would reinforce McCarthy's main charge, which through vanity and bravado he had almostbotched: that Democratic administrations had been unconscionablylax indealing with an internal Communist threat. His charge also gained credibility as every day brought more evidence that Truman's people were floundering in their attempts to deal with the external threat on the cold war's global stage." Herman, Arthur. Joseph McCarthy: Reexamining the Life and Legacy of America's Most Hated Senator. Simon and Schuster, 2000, 139.
[80]
"Prof. Campion’s research interests focus primarily on the British Empire in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particularly in North India, Ireland, and the Mediterranean. He has studied the influence of Irish revolutionaries in the development of Indian nationalism and is currently working on a book about the Indian Police during British colonial rule. His scholarly interests tend to focus on the effects of cross-cultural contact, particularly in a colonial setting. Prof. Campion’s research and teaching have been supported by the William J. Fulbright Foundation, the American Council of Learned Societies, the Andrew J. Mellon Foundation, 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the American Institute of Indian Studies, and the Rotary International Foundation."
[81]
또한 2012년 Freedom's Forge: How American Business Produced Victory in World War II란 책으로
이코노미스트의 그 해 최고의 책을 수상했으며, 현재도 美 허드슨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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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Abhijit Sarkar. (2020). Fed by Famine: The Hindu Mahasabha's politics of religion, caste, and relief in response to the Great Bengal Famine, 1943–1944. Modern Asian Studies, 54(6), pp.2028-2029.
[83]
Abhijit Sarkar. (2020). Fed by Famine: The Hindu Mahasabha's politics of religion, caste, and relief in response to the Great Bengal Famine, 1943–1944. Modern Asian Studies, 54(6), p.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