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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인들의 국외 거주 인구는 주변국인 러시아와 중국 다음으로 한국이 많다. 약 4~5만명 정도 된다.[1] 적어보이지만 몽골 인구가 300만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인구의 1%가 넘으니 적은 게 아니다. 중국에 사는 한국인이 중국조선족을 제외한 수가 약 40만 명이니 비율상 이보다 많다고 보면 된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에서 해외에 노동자로 일하러 가는 경우 아무래도 한국보다 경제규모도 크며 심지어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인력난도 겪는 일본으로 가는 인구가 더 많다. 게다가 일본은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면서 일자리도 남아돌고 있으니. 예를 들면 일본 거주 필리핀인 21만 명, 한국 거주 필리핀인 5~6만 명이고[2] 일본 거주 네팔인 10만 명, 재한 네팔인 4만 명. 그런데 몽골의 경우 일본 거주 인구는 겨우 5,000명으로 특이하게 한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재한 외국인 순위 8위다.2. 갈등
하지만, 이와 함께 몽골인들이 한국에서 저지르는 범죄도 늘었다. 불법체류자도 상당하며, 강력범죄율은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중에 2위다(2016년 조사. 러시아가 인구 10만 명당 범죄자 검거 건수로 4,837명으로 1위, 몽골은 4,678명으로 2위 #). 몽골인들이 순수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유목생활을 하는 시골 초원 사람들의 이야기고 도시 사람들은 많이 다르다. 게다가 순수한 사람이라고 해도,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보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것도 범죄로 이어진다. 사실 몽골인들 범죄 양상을 보면 한국인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성범죄나 한국인 대상의 묻지마 살인 같은 것보다, 자기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그 과정에서 상대를 죽거나 다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몽골인들끼리의 문제다 보니, 한국인이 관심 가질 이유가 적은 것. 외국인 노동자 범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2021년 양산 여중생 폭행사건 당시 피해 여학생이 몽골인으로 알려졌다.
3. 전근대 한국사에서
전근대 고구려가 내몽골 지역의 유목민족들과 교류가 활발하였으나, 이런 경우까지 다 이른바 몽골계 한국인의 원류로 잡기는 어렵다. 물론 고구려와 교류하던 내몽골 유목민족들 중 선비족과 거란족은 진짜 몽골계 민족이긴 하지만 몽골, 몽골족이라는 정체성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칭기즈 칸의 몽골 고원 통일 이후이다.고려사에서도 여요전쟁 당시 사로잡힌 거란족[3] 포로 상당수가 요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정착하였던 바 있는데 전쟁으로 농사지을 인구가 감소하고 논밭이 황폐화되었으므로 전쟁포로들을 시켜서 농지를 다시 개간시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들 거란족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이주정착한 것도 아니고 정복자로서 군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전쟁포로였고 고려인 여성들과 결혼한 후 여타 고려인들과 급속하게 동화되었다.[4]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이후 거란군 패잔병들이 고려에 귀화하기도 했다. 이들은 백정의 대표적인 조상이 되었다.
원 간섭기 시절에는 24대 원종이 정식 사돈 관계를 맺을 것을 쿠빌라이에게 요청하자[5], 25대 충렬왕부터 31대 공민왕까지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하면서 고려 왕실에도 몽골인의 피가 섞였으나, 당대 고려에서는 혼혈에 대한 개념이 없고 부계혈통이 중요했지 모친의 이름도 잘 안 적는 시대에 모친의 혈통은 중시하지 않았다 [6]. 고려의 왕은 원 황실과의 혼인으로 제국에서 n위의 황족으로 대접받았고, 원나라 입장에서 딸도 어느 정도 권력을 보장하니 그 사위의 나라의 사직을 보장해주고 고려 대청도에 수차례나 토곤테무르 등 황자급의 볼모를 보냈고, 어려울 때 군사적 지원이나 기근 때 중국 농지에서 쌀을 실어 보내주기도 하였다.
단 공양왕은 한몽혼혈이 아니다. 원 간섭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하던 몽골인들이 조정의 반원 정책에 반발하여 목호의 난을 일으켰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반란에 참여한 몽골인들의 이름이 순수 몽골어 인명뿐만이 아니라 다양했던 것으로 보아(다시만(多時萬; 다니슈멘드) 등등 이란어/튀르크어권 이름) 몽골 제국에서 각계 각층이 이민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료를 보면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사람들 중에서는 몽골인보다는 위구르인(回回人) 등등 색목인이 더 많았던 것으로도 보이며, 몽골인 다루가치들이 임기가 끝나면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활리길사처럼 고려의 노비 제도를 폐지 혹은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도 있는 반면[7] 연안 인씨의 시조 인후의 경우처럼 개망나니 탐관오리로 악명 높았던 인물도 있었다. 인후의 경우 집 앞에 누가 소를 끌고 지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뺏었다 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동안 고려에서 위세를 떨쳤던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 그리고 목호의 난 진압을 전후하여 몽골계 한국인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점점 잃으면서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팔기군 소속이었던 만주족과 내몽골인 중 일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망명했는데, 이들 또한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조상의 업보 탓에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조선인에 동화되었다.[8]
4. 재한 몽골계 중국인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기존의 재한 화교들과 다른 정체성(중화인민공화국)을 가진 신화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내몽골인 혈통인 몽골계 중국인들도 있다. 이들은 내몽골 자치구 본토 출신도 있지만 대체로 베이징 출신이나 톈진 출신 내지는 동북 3성 출신이 더 많다. 외몽골 출신인 일반적인 재한 몽골인들과 달리 신화교 공동체에서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5. 재한 몽골계 러시아인
러시아 국적의 몽골계 민족들이다. 주로 부랴트인과 칼미크인이 많다. 이들 또한 외몽골 출신인 일반적인 재한 몽골인들과 달리 재한 러시아인 공동체에서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6. 재한 카자흐계 몽골인[9]
카자흐계 몽골인들도 드물게 보인다. 이들도 일반적인 재한 몽골인들과 달리 카자흐스탄 국적의 카자흐인들을 포함한 재한 카자흐인 공동체에서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7. 인물
7.1. 전근대
- 경화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 계국대장공주: 고려 충선왕의 왕비
- 노국대장공주: 고려 공민왕의 왕비
- 덕녕공주: 고려 충혜왕의 왕비, 충목왕의 모후.
- 바자르오르미
- 복국장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 의비(懿妃) 예수진(也速眞, 야속진): 고려 충선왕의 둘째 비. 충숙왕의 모후.
- 제국대장공주: 고려 충렬왕의 왕비, 충선왕의 모후.
- 조국장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용산원자의 모후.
7.2. 현대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한국 체류 경험이 있는
몽골인은 약 30만명,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2]
그런데 일본 인구 약 1억 2천 5백만 명, 한국 인구 약 5천만 명이므로 인구 대비 필리핀인 비중은 좀 다르게 봐야 한다.
[3]
몽골계 언어를 사용하는 동호계 민족이다.
[4]
당나라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수 전쟁 당시
수나라 포로 상당수가
고구려의 유녀(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성이나 창녀 등을 지칭)들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고려 내 거란족이나
여진족 포로들의 생활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5]
쿠빌라이는 내줄 딸이 없다고 핑계를 댔었으나 후에 이에 동의한다
[6]
몽골 사회에서는 그래도 모계 혈통을 조금 더 중시 했다. 티무르가 귀르겐(사위)가 되려고 했던 이유도 황금씨족 여성의 지위가 정통성을 어느 정도 주기 때문이다.
[7]
다만
활리길사는 가족들과 함께 고려에 영구 정착한 것은 아니고 임기가 끝나자 원나라 대도로 돌아갔다.
[8]
일부는 조선을 떠나 일본 본토나
일본령 대만으로 가기도 했다.
[9]
몽골 국적을 가진 카자흐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