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9:33:16

모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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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주릉후(州陵侯)
毛寶 | 모보
시호 없음
작위 주릉현(州陵縣) 개국후(開國侯)
(毛)
(寶)
석진(碩真)
생몰 ? ~ 339년
출신 형양군(滎陽郡) 양무현(陽武縣)
자녀 모목지(毛穆之), 모안지(毛安之)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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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비록 선조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나,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동진 시기에 번성했다. 모덕조와는 먼 친척 사이.

2. 생애

왕돈에 의해 임상현령에 임명되었다가, 왕돈 사후 평남장군 온교의 휘하로 배속되어 참군을 지냈다. 얼마 뒤, 소준의 반란군이 도성 건강(建康)을 함락시키자, 무사히 건강에서 빠져나온 유량(庾亮)이 강주자사를 겸하고 있던 온교에게 도망쳐 왔다. 유량과 온교는 소준을 토벌하고자 바로 의군을 일으키고, 도간에게 서신을 보내 맹주가 되어달라 청했다. 그러나 도간은 마음 속에 의심을 품고, 거듭되는 온교의 설득에도 의군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온교가 최초의 서신을 보낸지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답이 없자 포기하려 했는데, 때마침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모보가 대충 사정을 전해듣고 온교에게 말했다.
"무릇 큰 일을 할 때에는 천하와 공동으로 해야 하고, 무리가 공동으로 일을 할 때에 성공 여부는 구성원 간의 화합에 달려 있을 뿐, 이와 다른 것은 들은 바 없습니다. 가령 의심을 외부로 표시한다 해도 마땅히 깨닫지 못할진대, 하물며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서둘러 서신을 되돌리고, 원본을 수정해 반드시 함께 호응해야만 한다고 설득해야 합니다. 만약 이전의 서신을 도로 회수할 수 없다면 사자를 다시 파견하십시오."
온교는 깨달은 바가 있어 즉시 사자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고, 함께 의군을 조직하자는 내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서신을 고쳐서 다시 도간에게 보냈다. 마침내 도간이 응하자, 온교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고 각지의 장군과 지방관들에게 소준의 죄를 널리 알렸다. 모보는 온교군의 선봉이 되어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가자포(茄子浦)에 주둔했다.

온교는 자신의 남부군이 수전에 익숙한 것에 반해, 소준군은 육상전에 뛰어나다 여겨, 장점인 수군을 통해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상륙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군령을 내렸다. 당시 소준은 군량 10,000석을 동료인 예주자사 조약에게 보냈는데, 조약은 사마 환무(桓撫) 등을 파견해 이를 맞이하게 했다. 모보가 자신의 병사들을 향해,
"병법에는 군령을 따를 수 없는 경우도 있거늘, 어찌 눈앞에 적을 두고도 상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제멋대로 군령을 어기고 환무를 습격해 그 군량을 모두 탈취했다. 이로 인해 죽거나 사로잡힌 적이 10,000여 명이나 되었고, 군량을 빼앗긴 조약의 군사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모보의 승전 소식을 접한 온교는 그가 군령을 어겼음에도 매우 기뻐하며 여강태수로 삼았다.

함화 3년(328년) 6월, 조약이 조환(祖渙), 환무 등을 보내 심양(尋陽)의 분구(湓口)를 습격하게 했다. 의군의 맹주인 도간이 몸소 조환 등을 막기 위해 이동하려 하자, 모보가 나서서 말했다.
"지금 의군은 공께 의지하고 있으니, 공께서는 직접 움직이지 마십시오. 청컨대 이 보(寶)가 토벌하러 가겠습니다."
도간은 이를 허락하고 모보를 보내 조환 등을 막게 했다. 당시 마두산(馬頭山)에서 적을 막고 있던 초국내사 환선은 모보에게 구원을 청했다. 모보는 환선이 본래 조약의 부하라 여겨, 그를 의심했다가 환선의 아들인 환융(桓戎)이 오고 나서야 의심을 거두고 진군했다. 환융의 안내에 따라 전장에 도착한 모보는 곧바로 적에게 공격을 받았다. 아직 선발대만 도착한 데다, 전투 준비까지 덜 된 마당에 공격을 받으니, 모보는 끝내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했다. 이때 화살이 모보의 허벅지를 관통해 말 안장에 박혔는데, 사람을 시켜 화살을 뽑게 하니, 그 피가 계속 흘러나와 가죽신을 가득 메웠다. 모보는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별을 관측하면서 밤새 뱃길로 100여 리를 물러났다.

겨우 뒤따라오던 본군과 합류한 모보는 앞선 전투에서 사망한 장병들을 기리며 곡을 하고, 상처 부위에 생긴 고름을 깨끗이 씻어낸 뒤, 다시 환선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했다. 모보의 군대가 환선의 군영에 이르자, 조환과 환무는 그대로 도주했다. 모보는 환선을 온교에게 보내고, 자신은 계속 진격해 동관(東關), 합비(合肥)에서 조약군과 연이어 싸워 승리한 후, 온교의 명에 따라 석두(石頭)로 귀환했다.

함화 4년(328년) 9월, 소준이 직접 전장을 지휘하기 시작하면서 도간과 온교는 반란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소준과 그의 장수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가는 곳마다 의군을 격파해버리니, 도간은 토벌을 포기하고 다시 형주로 돌아가려 했다. 이에 모보가 도간에게 말했다.
"공께서는 본래 무호(蕪湖)를 다스리면서 남북으로 의군을 지원하셨으니, 기왕에 시작한 토벌에서 물러나 형세를 되돌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군정(軍政)에 있어서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는데, 지금 3군을 가지런히 정돈시키지 않는다면, 전군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따로 물러날 곳조차 없어 종국에는 모두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두도는 분명 강성한 세력이었음에도 공께서 결국 이를 멸망시키셨는데, 어찌하여 소준은 깨뜨릴 수 없다 하십니까! 역적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으며, 모두가 용건(勇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제게 병력을 내어주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그들이 곤궁에 빠지게 하는 임무를 맡겨 주십시오. 만약 이 모보의 계책이 효과가 없다면, 그 후에 공이 떠나셔도 인심이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간이 그 요청을 승낙하고, 모보에게 독호를 더했다. 모보가 군대를 이끌고 구용(句容)과 호숙(湖孰)의 군량 창고를 습격해, 소준이 쌓아둔 군량을 전부 불살라버리니, 비로소 소준의 기세가 한풀 꺾였고 도간은 의군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함화 5년(329년) 정월, 소준이 어이없게 전사하자, 그의 부하 광술(匡術)이 건강의 원성(苑城)을 들어 의군에게 투항했다. 도간은 모보를 보내 건강의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고, 등악을 보내 서성(西城)을 지키게 했다. 형 소준의 뒤를 이어 세력을 이끌던 동생 소일은 원성을 되찾기 위해 소석, 한황 등과 함께 대성(臺城)을 쳐, 태극전(太極殿)의 동당(東堂)과 비각(秘閣)에 불을 질렀다. 남성을 지키던 모보가 직접 성 위에 올라 적군 수십 명을 쏘아 죽이자, 한황이 그를 향해 물었다.
"그대가 모여강(毛廬江)인가?"
모보가 맞다고 답하니, 한황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굳세고 용맹하기로 유명한데, 어찌하여 성 밖으로 나와서 싸우지 않는가!"
이에 모보도 맞받아쳤다.
"그대도 용장이면서 어찌 성 안으로 들어와서 싸우려 하지 않는가!"
모보의 말을 들은 한황은 한바탕 웃고는 군을 돌려 퇴각했다.

함화 5년(329년) 2월, 소준의 잔당이 관군에 의해 완전히 토벌되었다. 모보는 공을 인정받아 주릉현개국후(州陵縣開國侯)에 봉해지니, 식읍이 1,600여 호에 달했다.

함화 9년(334년) 6월, 정서장군 유량이 무창(武昌)에 주둔하면서 조정에 상표해, 모보를 보국장군, 강하상으로 삼아 수(隨)와 의양(義陽) 두 군을 관할하게 하고, 상명(上明)을 진수하게 했다. 이후 남중랑장으로 승진하여 유량과 함께 곽묵의 난 진압에도 참여했다.

함강 원년(335년) 4월, 후조의 정로장군 석우(石遇)가 7,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양양(襄陽)을 쳤다. 모보는 유량의 명령에 따라 정서사마 왕건기(王愆期) 등과 더불어 양양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하여 장산(章山)에 주둔했다. 한편, 석우는 3면으로 땅굴을 파 성벽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환선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성에서 뛰쳐나와 그 뒤를 공격하자 금새 혼란에 빠졌다. 이때 모보와 왕건기도 가세하여 적군 수백 명을 사살했고, 그 공으로 모보는 정로장군에 임명되었다.

함강 5년(339년) 3월, 사공 유량이 조정에 표문을 올려 중원의 회복을 주장하고, 본격적으로 북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량이 자신의 예주자사 직책을 해직하고 모보에게 더해주길 청하니, 조정에서 모보를 감양주지강서제군사(監揚州之江西諸軍事), 예주자사로 삼고 장군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 예주자사에 임명된 모보는 서양태수 번준(樊峻)과 함께 정예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주성(邾城)에 주둔했다.

함강 5년(339년) 8월, 당초, 형주자사 도간은 굳이 후조를 자극하고 싶어하지 않아, 여러 부하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주성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간이 죽고 형주를 다스리게 된 유량이 갑자기 주성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후조의 천왕 석호는 노하여 동진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석호는 태위 기안(夔安)을 대도독으로 삼아, 의양공 석감, 장수 석민, 이토(李菟), 이농(李農)을 보내, 50,000 대군으로 형주와 양주의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게 하는 한편, 장학(張貉)에게 기병 20,000을 주어 주성을 치게 했다. 모보는 재빨리 유량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유량은 주성이 견고할 것이라 여기고 제때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주성은 함락되었고, 모보와 번준은 필사적으로 싸워서 겨우 장학의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뒤에 적을 둔 채 황급히 장강을 건너다가 지휘관인 모보를 포함한 동진군 6,000여 명이 그대로 익사했다.

조정에서는 모보가 소준의 난 당시 세웠던 공을 참작하여,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에 특별히 추증하지도 않았다. 또, 패전 직후에는 작위 박탈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대신들이 모보의 작위까지 박탈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승평 3년(359년)에 조서를 내려 모보의 봉국까지 완전히 회복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