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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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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배경2.2. 발행2.3. 문제점2.4. 폐지
3. 여파4. 평가5. 당백전에 대한 변론6.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당백전()은 조선 후기의 화폐로,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1866년(고종 3년) 11월부터 1867년(고종 4년) 6월까지 약 1,600만 개가 주조되었던 동전이다. 일반적으로 지름은 약 38mm ~ 40mm이며 두께는 2.5mm ~ 4.0mm, 무게는 약 22g ~ 28g 정도이고 재질은 구리, 아연, 주석, 납 등의 합금이다.

주화에 새겨진 글자는 '호대당백(戶大當百)[1]'으로, 풀이하면 "이 화폐는 호조(戶曹)에서 주조한 고액 화폐이며, 가치는 일반 동전의 백 배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액면가가 백 배에 달한 반면 실제 구리의 함량은 당대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6-8배에 불과한 악화(惡貨)였다. 이에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대금거래를 대체하게 된 반면, 실물경제에서는 초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 등의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었고 결국 1868년 10월 발행 2년만에 폐지되었다.

당백전의 발행은 당대에도 백성들 사이에 악명이 높아 '땅전', '땅돈' 등으로 불렸으며 이는 푼돈을 뜻하는 땡전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땡전 한 푼 없다."는 관용어는 '(매우 저급한 돈인) 당백전 한 닢조차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2. 역사

2.1. 배경

당백전 문제는 심플하게 인과와 전개를 이해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당백전 이후에도 통화 정책의 실패인 백동화 문제의 뒤에는 대한제국의 귀금속 부족, 자금 부족, 일본의 방관 속에서 일어난 위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반도에는 쓸만한 구리, 은 광맥이 없고 조선시대엔 사실상 구리 전량 수입으로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상황이었으며 인플레이션 우려 탓에 고액권을 발행하는 일이 없어서 조선 후기 내내 심각할 정도의 전황(錢荒, =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평통보는 조선의 국내총생산 3% 정도밖에 감당을 못했으니까 이건 거의 상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인데 + 면포가 보조화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영국 산업혁명으로 인도의 목화와 영국의 기계로 대량 생산해낸 값싸고 좋은 옥양목이 엄청나게 풀리기 시작했다. 쇄국 정책으로 시간을 벌어 보기는 했지만 옥양목은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면포 값을 폭락시켰고 면포+쌀+상평통보로 이루어진 조선의 화폐 체제는 붕괴를 면할 수 없었으니 이걸 커버치려면 면포가 감당하던 통화량을 화폐발행으로 대체해야만 하고 따라서 고액권 발행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당백전의 발행도 단순히 돈 없으니까 막 찍어내자는 무식한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니고 이러한 경제사회적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문제는 조선 조정은 고액권을 발행하고 운용할 재정, 경제적 지식과 실무적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2.2. 발행

좌의정 김병학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생활은 어렵고 재정은 다 떨어졌는데 건축 공사를 크게 벌이고 있으므로 공사(公私) 간에 일을 더는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조절하여 메워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아직 그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돈이라는 것은 경중을 잘 맞추어 준절하여 쓰는 물건입니다. 옛적에 당십전이나 당오전을 쪼개어 당이전이나 당삼전으로 만들어 쓴 법은 모두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한 정사였습니다 지금 나라의 재정이 몹시 고갈된 때에 응당 이익되는 것과 손해보는 것을 절충해서 쓰는 원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당백대전(當百大錢)을 주조하여, 널리 쓰이고 있는 통보(通寶)와 함께 사용한다면 재정을 늘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히 신의 좁은 소견을 대번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官)에게 하문하시기를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아주 좋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10월 30일 2번째 기사

조선 후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정부의 재정이 매우 궁핍하였고 흥선대원군 경복궁의 중건을 추진하면서 이에 많은 노동력과 재원이 투입되면서 조선은 더더욱 궁핍해졌다.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경복궁 중건에 들어간 돈은 원납전으로만 무려 750만냥이 들어갔다. 현물 징수나 노동력 강제동원 등은 모조리 제외한 금액으로도 이 정도인데 당시 조선 조정에 이 액수는 상당히 큰 부담이었다. 순조 22년에 호조에서 낸 통계에 따르면 조선 조정의 1년 세수는 평균 60만냥이었으니, 달리 말하면 대원군이 걷어들인 원납전은 조선 조정의 12년분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이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세금을 적게 걷어들였다고 한들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2] 이 때문에 조선 조정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기부"를 받는 원납전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려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기부" 금액이 줄어들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당백전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1866년( 고종 3년) 11월에 당백전을 처음 발행하여 6개월 간 유통하였다. 그러나 무분별한 발행으로 인해 조선 화폐 경제는 망가지고 말았다. 당백전의 명목상 가치는 상평통보 1푼의 100배인 1냥에 해당했지만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 ~ 6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심각할 정도의 악화(惡貨)였다. 단순히 화폐 가치만 볼 경우 조선 정부는 당백전 1개를 제조할 때마다 상평통보에 비해서 18배의 이득을 본다.[3]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냥(약 10억 푼)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600만냥 정도나 되었다. 즉, 시장에 기존의 1.5배에 달하는 자금이 한순간에 풀린 셈이다.

물론 실물 경제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화폐만 불어났으니 전국적으로 그 이득을 훨씬 상회하는 엄청난 손해가 벌어졌다.

2.3. 문제점

파일:상평통보와당백전.jpg
조선 시대의 화폐 상평통보(좌)와 당백전(우)의 사진.
당백전의 명목상 액면가는 일반적인 상평통보의 100배에 달했으나, 구리 함량은 겨우 5-6배 많은 수준의 악화였다.
당백전의 귀금속 함량을 문제삼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당대에도 화폐의 신용도나 가치는 그 금속 함량이 아니라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수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때 이미 가설로 제기되었으며 현대 경제학에서는 정론으로 자리잡은 내용이다. 문제는 당백전의 무분별한 발행량과, 당시 조선 민간 시장에서는 화폐를 무게를 달아서 가치를 쟀다는 점이었다. 이 두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당백전은 액면 가치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실 이미 조선에서는 조정의 법정화폐인 상평통보 외에 청에서 들어온 청전 등 다양한 화폐가 존재했으나, 어차피 법정화폐는 상평통보 하나인 단순한 체제였기 때문에 당백전 역시 구리 무게에 기반하여 가격을 쟀다. 결국 당백전에 포함된 구리 함량에 기반하여 민간에서의 가치는 딱 무게 값만큼의 가치인 6-8배로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조선의 분권화된 재정구조와 당시에 지방 관아에서 유행하던 도결도 문제의 원인이었다. 도결 제도란 지방 관아 현장 실무에서는 동전으로 세금을 걷고, 걷은 동전으로 쌀이나 포목을 사서 중앙에 납부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지방관아가 차익을 남기는 것이었다. 조선은 중앙에서 일괄 통제하는 조세 기구가 없이 각 관아에게 조세권을 아예 나눠주는 봉건적인 구조였고, 각 관아가 차익을 남기려고 각자 다른 꼼수를 쓰니 당백전의 명목상 가치가 100배라고 중앙 조정이 아무리 우겨도 조정의 명령이 실무에서는 다르게 돌아갔다. 간단하게 말해서 관아들이 실물로 세금을 받고 당백전으로 중앙에 납부하는 짓을 벌였다는 것.

흥선대원군은 이를 토대로 경복궁에 쓰일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조선의 시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냐하면 상인들과 주막의 아줌마들이 심각한 악화(惡貨)인 당백전으로 거래하는 것을 거부했다. 상인들도 이를 꺼려서 물물 교환이 다시 유행했고 백성들도 남몰래 땅을 깊게 파서 상평통보를 묻어 숨기는 경우도 많았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액면가는 100배인데도 실제 가치는 너무나도 떨어지는 화폐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인들을 제외한 백성들은 이 당백전을 안 쓰고 싶어도 안 쓸 수가 없게 되는 돌아 버릴 상황을 맞이하게 된 터라 이 당백전 말고는 다른 화폐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고액권 화폐의 특성상 잔돈 지불도 어려웠기 때문에 매매가 쉽게 되지 않았다. 백성에게는 생활용품을 구입하는 데 있어서 너무 고액화였고 당연히 일상에서 쓰기에는 너무 불편하였다. 기존 상평통보의 단위가 1개당 2문을 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에 쉽게 비유해 보자면 시중에 돈이 5만원권 지폐와 500원짜리 동전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나 과자 하나 사는 손님한테 5만원권을 받고 일일이 500원 동전을 한무더기 거슬러 주다보면 동전 갯수 세다 셔터 내려야 한다. 게다가 전술했듯 조선은 통화량이 너무 적었으므로 거슬러줄 상평통보를 많이 쌓아두지도 못했다. 그러느니 당백전을 안 받고 마는 것이다.

결국 화폐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니 백성들은 물가가 수직 상승해 버려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화폐의 건전성을 회복하여 막대한 자본과 당백전을 보증할 수 있는 귀금속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운산 금광 말고는 활성화가 안 되는 시점에서 이를 제지할 추가적인 재원 확보는 조선에 있어서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조선 경제는 통화정책 실패로 인한 화폐의 신뢰도 하락으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반복으로 인한 경제 붕괴라는 회복할 수 없는 파산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1~2년만에 1섬에 7냥하던 쌀값은 45냥으로 올랐다.

게다가 고액화폐이다보니 사주전[4]도 기승을 부렸다. 조선시대에 화폐를 위조하면 부대시참(不待時斬)[5]이었지만 산 속에서 몰래 위조화폐를 만들었고 심지어 배 위에다 대장간을 차려 놓고 강에서 몰래 주조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통량이 많은 당백전이 위조화폐까지 나돌게 되니 그 총액이 얼마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2.4. 폐지

이렇게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당당하던 흥선대원군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니 결국에는 1867년 4월에 주조를 중단하고 회수하기 시작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유통도 금지되었다.

이렇게 폐지된 당백전 1600만 냥[6]을 회수할 때는 청전[7] 1냥이나 상평통보 1냥으로 교환해 주었고[8] 이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다시 녹여서 철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청전이 당백전에 비해서나 양화이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평통보에 대해서는 악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청전의 유통량이 전체 화폐의 40%를 넘겨 버렸다. 결국 청전은 화폐 경제를 부식시켰고 화폐 불신도 당백전보다는 느렸지만 그 진행은 꾸준했다. 문제는 이 속도가 느리다는 것 때문에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나는 그 순간까지 청전의 유통을 금지하지 않았고 누적되었던 모든 문제에 더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더해지면서 결국 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났다는 점이다. 결국 대원군을 밀어낸 고종은 청전을 그제서야 폐지했고 이를 전액 회수해서 녹여 상평통보로 돌리는 짓을 해버렸는데 이는 당연히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조선 조정은 이미 올라 버린 물가로 인해서 세수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당백전으로 회수된 금액이 1600만 냥인데 시중에 풀린 상평통보와 이전 화폐의 총 양은 1000만 냥으로 추정된다. 즉, 초기에는 장에 풀린 당백전이 물가상승을 이끌면서 인플레이션을 만들었지만 당백전이 시장에서 퇴출되면서 당백전으로 교환한 화폐의 양을 어디서 벌충해 올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됐고 시장에 화폐가 부족해지니 물가는 떨어지는데 화폐의 가치가 오르는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백전만 유통되고 기존의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다시 시중에 나올 리가 있을까? 이 당백전을 회수하느라 조선의 조정에서는 다시 상평통보나 그것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유입전(청전)을 주고 폐지 작업에 들어갔지만 화폐가 부족해져서 물가가 내려간 디플레이션에서 갑자기 대량의 이전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면 단순하게 저울추가 평행으로 이어지지가 않는다. 위의 대책은 오히려 화폐의 가치 하락을 부추김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당백전의 문제로 알게 되는 조선 경제에 인플레이션 효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3. 여파

당백전의 폐해는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큰데 그냥 인플레이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경제를 철저히 박살내 버렸다는 것이다.[9] 결과적으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다음엔 군비가 죄다 축소되어서 신미양요 때 입은 천문학적 규모의 화기 손실을 보충할 여력도 없었으며 무너진 성곽을 재건하지도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 상태에서 운요호 사건을 맞이한 것이었다.[10][11] 게다가 재정 부족으로 인한 구식 군대 임금체불로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임오군란의 결과로 청에 대한 예속 상태가 이어지면서 외국이 조선을 무시하는 심각한 외교적 위신 추락에 이르기까지 구한말 조선이 겪은 국난과 국권 상실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고액권의 공백상태는 누가 봐도 답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당백전에서 뭔가 배우긴 했는지 그나마 조심스럽게 찍어낸 고액화폐가 당오전인데 고종 친정 이후에도 고종 및 신하들이 경제에 까막눈이었다 보니 그나마 발행한 당오전도 시원치 않아서 묄렌도르프는 필요하면 당십전의 발행도, 최악의 경우는 당백전의 재발행까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오전 시기만 해도 급진개화파의 주장인 차관도입은 실패했기 때문에 당오전만 실현되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조선 경제 상황이 엉망이었는지도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데 당백전의 실질 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였다면 애초에 당백전이 아니라 당오전부터 냈으면 원래 경제와 빠르게 융화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당백전이 다 망쳐 놓는 바람에 당오전으로 수비가 안 될 정도로 망가졌다는 뜻이다. 실제로 당백전 후폭풍과 조선의 열악한 재정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고 부족한 귀금속은 본질적 대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일본으로 대표되는 대외세력과 그에 동종한 이들, 이 과정에서 이익을 보겠다는 이들까지 끼어드는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졌다.

이렇다보니 고종 시대의 화폐 관련 정책은 '디플레이션 푸는 게 우선이니 악화라도 풀고 보자'는 (묄렌도르프 등) 인물들과 '그랬다가 제2, 제3의 당백전 사태가 발생하면 더 큰일이다'라는 인물들의 논쟁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긴 것이 조선 후기 내내 국가가 의도적으로 화폐공급을 억눌러서 디플레 상태를 유지하고 시뇨리지를 누렸다면 코인판마냥 당연히 환투기꾼이 생겨난다는 점이었다. 복(이중)본위제만 해도 투기가 미쳐 날뛰는데 조선 후기 화폐체제 자체가 상평통보, 면포, 쌀 삼중본위제라는 시스템이었다. 쌀과 면포는 수확량, 유입량에 따라 가격이 날뛰고 이걸 잡아 줘야 할 상평통보는 정부의 시뇨리지 집착 때문에 제일 미쳐 있는 괴이한 상황이었다. 결국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조선에서 돈이나 권력이 있었던 사람들은 죄다 돈에 투기해서 돈 벌어먹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니 통화정책을 펼치려고 해도 환투기하는 권력층이 반발하고 실질적인 개선은 요원해졌다.

4. 평가

실물의 가치와 국가의 보증 가능성을 무시하고 화폐를 발행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 주는 좋은 예. 당백전의 가치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당시 백성들은 '땅돈'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서 '땡전'이라는 말이 나와 21세기에도 사용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거대한 실책은 경제학적인 측면이 크다 보니 역사 교육 과정보다는 경제 교육 과정에서 더 심오하게 다루며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정책 중 경복궁 중건을 위해 실물가치가 떨어지는 당백전을 발행해 국가 경제가 어려워졌다고만 설명하고 실제 당백전으로 파생된 효과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당백전 사건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던 위정척사 인사들조차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고 단정했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경제에 대해서 이해가 없는 사람들조차 돈이 많이 풀리는데 물자가 그대로면 물가가 오른다는 상식은 당연히 알고 있고 전쟁 시에 쓰이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단위가 높은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서 유통하거나 위조지폐를 범람시켜서 해당 국가의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탐욕에 눈이 멀었던 세도정치기 세도가들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통화위조죄 문서 참조. 실제로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런던 상공에 파운드 스털링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뿌리는 이른바 베른하르트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찍어내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방법도 쓸 수 없을 정도의 문제에 직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개혁을 하고자 급전 마련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고작 궁전을 지으려고 이런 일을 일으킨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화폐 발권기관인 한국은행에서도 발권정책의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실제로 화폐박물관에서도 당백전을 전시하고 있으며 2016년 한국은행 노동조합 측에서 한국형 양적완화라고 불린 발권력 동원을 이 당백전 발행에 비유하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10만원권이 5만원권과 같이 발행되려던 계획도 이 사례까지 언급해가며 경제 파탄을 이유로 반박이 심했던 탓에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서 북한에서도 구한말 당백전 사태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역사가 다시 반복되었다. 자세한 것은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문서를 참고.

5. 당백전에 대한 변론

과거 당백전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발로 최근의 연구에서는 당백전의 여파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12] 우선 당시 조선에서 금속 화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경제 규모의 3%밖에 되지 않았다.[13] 게다가 당백전의 발행시기도 6개월 정도밖에 안되며 서울, 경기 지방에 국한되었다. 평안도 같은데는 들어간적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 경제가 절단나고 일본에게 나라가 먹히는 꼴을 보면서, 당백전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와서 다 저렇게 되었구나 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결론을 내리게 된다.

조선이 일본에게 먹힐 조짐을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이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인데, 당백전 발행은 그보다 9년이나 앞선다. 9년 전에 고작 6개월동안 발행하고 접은 통화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줄기차게 나고, 9년간 그 여파가 지속되어 나라가 망할 수는 없다. 더구나 3% 밖에 안되는 화폐경제 규모를 가진 조선에서는 특히 그렇다. 실제로 당백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금방 잡혔다.
당백전의 회수 후 10여년간의 소강 상태를 얻었으나, 그간에 일본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이) 화폐를 관리하는 기강이 해이됨과 아울러 조선 국내 일반의 사정에 급격한 변혁이 일기 시작하여, 투기하는 자들이 나타났으므로, 조선 돈의 혼란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오카 요이치(岡庸一), 『최신한국사정(最新韓國事情): 한국경제지침(韓國經濟指針)』, 高山堂, 1904, 314쪽.


당백전의 여파를 고려할 때 빠뜨린 부분은 개항기 외국 경제권들의 침략이다. 이때는 제국주의 시대라, 옆나라 들어가서 돈벌이만 된다면 수단 방법 안가리고 하던 시대였다. 조선에서는 금속화폐 대신에 현물인 쌀과 면포를 화폐로 사용했는데, 둘 다 외국의 침략에 의해 망가져버렸다. 일단 쌀은 조선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보다 발달된 경제권인 일본 등에 팔 수 있었는데, 그 이익이 7배가 넘었다.[14]

그래서 외국 상인, 특히 일본 상인들이 밀무역 형태로 공산품을 가지고 와서 쌀이나 원자재로 바꿔 나가는 일이 흔했다.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조선에 많이 들어오던 공산품은 비단, 칠기, 모기장, 면포의 수공업 제품으로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던데다가, 딱히 산업혁명 수준의 기술이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삼국 중 유난히 상공업이 천시되던 조선은 똑같이 수공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던 중국과 일본에게조차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 상품 열 가지 가운데 공산품이 아홉을 차지했는데, 외국으로 나가는 우리 상품은 열 가지 가운데 아홉 가지가 천연자원이니, 우리의 아둔함이 너무 심하다. 대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상품들은 비단, 시계, 칠기같이 교묘하고 기이한 물건들이며, 다른 나라로 나가는 상품들은 모두 쌀, 가죽, 금, 은과 같이 평소 생활에 필요한 보화들이다. 그러니 나라가 척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현, 매천야록

이런 손해보는 행태가 정식 개항을 하기 전부터 단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어나고 있어서, 조정에서도 걱정하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나라 천은 아름다워서 원래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서쪽으로는 연경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왜에 이르러 천을 수입을 하고 있다. 이밖에 신기한 장난감 같은 수입 상품들이란 모두 나라의 돈을 소모하고, 백성들의 판단력만 흐리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서양 물건들이 거의 전국에 가득해, 이미 지각 있는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된 지 오래다.
일성록, 고종 3년(1866년) 7월 30일.

쌀이 외국으로 유출되면서 쌀값이 올랐고, 당장 먹을 것도 모자란 탓에 쌀을 계속 화폐로 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쌀의 대량 유출은 쌀을 봉급으로 받고 있던 군인들의 생계를 위협했고 지방관들이 쌀의 생산량을 올리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게되면서 이것이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던 것이다. 한마디로 잘못된 개항으로 당시 조선의 대부분의 계층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면포는 면을 일정 너비로 짜서 화폐 대신 쓰던 것이었는데, 외국에서 들어온 공장제 면직물들에 의해 가격이고 품질이고 상대도 안되던 조선의 면제품들은 다 멸망했다. 주된 화폐 노릇을 하던 쌀과 면포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점이 조선에게는 당백전 6개월보다 훨씬 큰 타격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조선인들은 무턱대고 개항을 하여 나라를 개판오분전으로 만든 민씨정권을 증오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즈음부터 조선이 금속화폐를 도입하려고 전환국을 설치하는 등 난리를 치는데, 화폐 노릇할 물건이 없어져버린 점이 컸다. 개항장에서는 아예 일본 엔화 쓰는 형편이었고...

현물화폐뿐만 아니라 금속화폐 쪽도 외국에 의해 망가진다. 외국 상인들이 공공연하게 외국 화폐를 개항장 근처에 유통시켰으며, 강화도 조약에는 아예 조선에서 거래할때 외국 화폐를 쓸 수 있다고 보장해 놓았다. 더구나 공업력에서 앞선 주변 나라들이 대장간에서 만드는 수준인 상평통보 따위 공장에서 위조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 진품보다도 더 좋아보이는 위조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15] 조정에서 세력깨나 있었던 민씨정권의 우두머리이자 부패한 탐관오리였던 민영준 아예 평안도 운산에 작업장 차려놓고 상평통보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민씨정권은 잘못된 개항으로 나라를 망가뜨린 것도 모자라 위조화폐까지 만들어서 나라 경제를 수렁에 빠뜨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놈저놈 할 것 없이 금속화폐를 불법으로 계속 찍어냈기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지, 당백전 여파가 9년 넘게 이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개항기 조선 경제가 망가진 이유는 외국 경제권의 침략과 잘못된 개항을 해서 국가를 파탄나게 만든 민씨정권의 잘못이 원인이다. 하지만 그 침략의 과정을 제대로 국사 교과서 등에서 짚어주지 않기 때문에, 당백전 발행했으니 인플레이션 났다, 그래서 조선 경제 망했다, 이런 식으로 중간의 핵심 과정 빼먹고 넘겨짚는 한국인들이 많다. 이 침략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했던 일본측에서는, 당백전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으니 굳이 파고들어 밝혀낼 이유가 없기도 했으며, 민씨정권도 정적인 흥선대원군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으니 일본과 입장이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6. 같이보기


[1] 뒷면은 일반적인 동전과 마찬가지로 상평통보(常平通寶)로 새겨져 있다. [2] 물론 이것에는 당백전과 청전 발행으로 이어진 인플레이션의 영향도 있었기에, 순조 시절과 동일 비교는 힘들다. 그러나 후술할 문제점으로 인해 결국 청전이건 당백전이건 모조리 다 폐지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빚잔치나 한 셈이다. [3] 화폐수량설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4] 私鑄錢, 사적으로 주조한 돈. 즉 위조화폐. [5] 직역하면 "때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을 벤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때는 추분 이후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사람의 원혼이 천지의 조화를 해친다는 명목으로 추분 이후부터 춘분 이전 사이에 사형을 집행하고 그 이외의 시기엔 사형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 부대시참이 걸려 버리면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집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만큼 역적이나 강상죄 같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행해지는데 화폐 위조자를 저렇게 처분한다는 것은 이런 이들과 동급으로 놓겠다는 것을 뜻한다. [6] 상평통보의 총합이 약 1000만 냥이었다. [7] 淸錢, 청의 화폐. 청의 화폐도 조선 말기 상평통보 가치의 1/3 정도로 통용되곤 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수입하기도 했고, 밀수로 유입되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 시대부터 당의 화폐들을 들여와 사용하곤 했다. 생경해 보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해 제대로 된 화폐가 없는 경우 의외로 흔하게 벌어지는 일로, 이렇게 유입된 외국 화폐를 유입전이라고 한다. 고조선에서 통용되던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또 다른 예시다. [8] 명목 가치는 1/100, 실질 가치는 1/6이 된 셈이지만 유통이 금지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공식적으로 주조한 화폐를 녹여서 금속을 건지려고 했다가는 당시 조선의 국법으로 처벌받았다. [9] 그리고 구한말 일제에 의해 이뤄진 화폐정리사업이 결정타가 되어 조선의 경제는 일본에 종속되고 말았다. [10] 물론 고종은 일본에 겁을 먹고 개항한 것이 아니라 이득이 있을 것 같다고 개항한 것이기는 했다. [11] 신미양요때 조선군은 지연전을 펼치면서 광성보를 제외한 요새를 방기하였고 미군은 조선군의 요새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12] 김석원, 『일본의 한국 경제 침략사』, 한길사 발행 참조. [13] 국사편찬위원회, 『화폐와 경제활동의 이중주』, 2006. [14] 류자후(柳子厚), 1940, 『조선화폐고(朝鮮貨幣考)』, 553면. [15] "위조화폐의 발행이 늘어나 조선의 화폐시장은 크게 교란되었다." 시카타 히로시, 「조선 근대자본주의의 성립과정」, 『조선사회경제사연구』, 경성제대 법문학회 편찬, 1933,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