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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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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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鄧騫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로 자는 장진(長真). 형주 장사군(長沙郡) 출신으로, 지조와 충신(忠信)이 있었으며, 사교성도 좋아 남들과 널리 사귀었다고 한다. 성격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태위 유량(庾亮)도 그를 가리켜 장자(長者)라 칭했다.
2. 생애
어렸을 적부터 의지와 기개가 있어 마을 이웃 사람들이 그를 중시했다. 세상이 무척 어지러운 시기에도 정직함을 잃지 않았으며 항상 성의를 다해 자신을 수양했다. 상주자사 초왕 사마승은 그를 불러 자신의 주부로 삼았다.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던 사마승은 등건을 왕돈과 동진 조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양주자사 감탁에게 보내 유세하게 했다. 감탁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등건의 간곡한 설득에도 결정하지 못했지만, 그의 재능은 쓸 만하다 생각해 자신의 참군으로 삼았다.
이윽고 악도융(樂道融)의 설득에 넘어가 조정의 편에 서서 왕돈을 토벌하기로 결심한 감탁은 등건과 함께 무창으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때마침 왕돈의 장수 위예(魏乂)와 이항(李恒)이 갑사 20,000명으로 사마승의 치소가 있는 임상(臨湘)을 기습했다. 등건이 임상에 있는 노모가 걱정된다며 감탁의 제안을 사양하니, 감탁은 그를 임상으로 돌려보냈다.
영창 원년(322년) 4월 10일, 위예가 임상을 함락시키고 사마승과 용릉현령 이웅을 사로잡아 왕돈에게 압송했다. 위예가 사마승의 장사 우괴와 주부 환웅 등을 주살하자, 마을 사람들은 등건도 죽임을 당할까 심히 두려워 했다. 등건은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저들은 나를 어떻게든 쓰려 할 것이오. 주(州)를 손에 넣으면서 충직한 인물들을 많이 죽여 이제 현인을 구할 때인데, 어찌 이 심부름꾼에게도 죄를 묻겠소!"
그러고는 스스로 위예를 찾아갔다. 위예는 등건을 해양(解揚)[1]에 빗대면서 영접하고 자신의 별가로 삼았다.왕돈이 평정된 이후, 무릉(武陵)과 시흥(始興)의 태수직을 역임하고, 승진하여 대사농을 지내던 중 사망했다.[2] 아들로는 등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