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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요시노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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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안 내력과 출생2. 청년기: 차기 쇼군 후보3. 공무합체파 정권의 수반으로서
3.1. 쇼군 후견직3.2. 조정의 관리로서
4. 쇼군 시절
4.1. 대정봉환4.2. 실각과 무혈개성
5. 이후6. 사망7. 참고 자료

1. 집안 내력과 출생

도쿠가와 요시노부 1837년 에도 고이시카와 미토 번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산케 미토 번 제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 어머니는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 출신인 요시코 여왕이다.[1] 요시노부는 나리아키의 7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미토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화려하고 가벼운 에도의 특징이 소박하고 남자다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한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요시노부를 미토 번으로 보내어 그를 키웠다. 이미 쇠퇴해가고 있던 미토의 전통을 키우는 방법을 나리아키는 요시노부 때문에 부활시켰던 것이다. 7남임에도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이는 요시노부가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도쿠가와 요시아츠와 함께 단 둘뿐인 정실 소생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혹시 있을지 모를 장남의 죽음을 대비해서 대타로 남겨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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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추정되는 사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린 시절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 후 열공(烈公)으로 불릴 정도로 사나운 기상을 지녔던 인물이다.[2] 나리아키는 모두 37명이나 자녀를 뒀는데 그중에서도 요시노부를 엄격하게 키웠다. 쇼군의 후계자로 기대받아서 어릴 때부터 제왕학의 영재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잠버릇을 고치고자 베개 양옆에 칼날을 세워두고 재울 정도로 혹독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유명했다.[3] 그는 수리검술을 좋아했고 수리검을 굉장히 잘다뤄서 수리검의 달인으로 불렸으며, 훗날 대정봉환 후에도 매일 수리검을 계속했다고 한다. 요시노부는 미토에서 번교, 홍도관에서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 1782 ~ 1863), 아오야마 노부미쓰(青山延光, 1807 ~ 1871) 등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과 무술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존왕양이 이론의 경전으로 꼽히는 '신론(新論)'의 저자이고, 아오야마 노부미쓰는 번교 홍도관의 주임교수이자 사국 창고관의 총재다. 두 사람은 미토 번의 학문과 번풍을 요시노부에게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의 가문 미토 가문은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츠쿠니 이래 ' 대일본사'의 편찬이라는 저술 사업에 몰두하고 있기도 했고, 여기서 파생된 "존왕천패[4](尊王賤覇)"라는 역사관에 요시노부는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또한 도쿠가와 가문의 다이묘의 자제들은 일반 무사보다 강건해야 한다는 생각에 독서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요시노부의 어린 시절 식사는 국 한 가지와 나물 한 가지를 주로 먹었고 물고기 등 동물성 단백질이 붙는 것은 한달에 3회 먹었다고 한다. 더욱이 옷감이나 이불 역시 비단을 사용하지 않고 무명이나 삼베로 만든 옷을 사용하였다. 일상에서 이렇게 힘들었으니 장난을 치려고 하면 사정없이 혼쭐이 났다. 말을 듣지 않으면 아예 방 안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엄격한 미토에서 예의범절에 대해서, 요시노부가 단지 얌전히 따랐는가 하면, 그 나름의 저항도 보이고는 했다. 그는 검, 활, 말 등 저마다 전문 스승이 될 정도로 무술에는 열중했지만 독서는 차마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방에 처박혀서도 여전히 책읽기를 거부한 요시노부는 식사도 금지당하자 넌더리가 났고, 이후론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22~23세 무렵부터 자치통감이나 손자병법을 읽었다고 한다. #

1847년, 10살 때 막부에서 요시노부를 고산쿄의 히토츠바시가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히토츠바시 가의 양자가 들어가서 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이름을 하사받아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5]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요시노부를 히토츠바시가의 양자로 선정한 이유는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스물 아홉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여러 해 전에 요절해 어른이 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사다뿐이다.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총명하다는 소문[6]을 쇼군 이에요시는 일찍이 이에 대해 들은 바 있다. 또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부인은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씨로, 요시노부의 생모와 함께 자매지간이기도 했다. 요시노부는 이때 쇼군에게 종3위와 좌근위중장이라는 관직을 받게 되어 형부경 (刑部卿)히쓰토바시가의 주인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11살이었다. 이에요시는 병약한 도쿠가와 이에사다보다 요시노부에게 더 마음이 끌려 요시노부를 쇼군 후계자로 할 생각까지 가졌다. 가신 아베 마사히로의 간언으로 뜻을 접긴 했다.[7]

2. 청년기: 차기 쇼군 후보

1853년, 미국 제독 매튜 페리의 함대가 에도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에요시가 사망하자, 차차기 쇼군을 두고 후계자 다툼이 일게 되었다.[8] 로주 아베 마사히로,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의 소위 히토츠바시 파는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반면 히코네 번 이이 나오스케, 이에사다의 생모 혼쥬인를 중심으로 한 오오쿠의 난키 파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다. 당시 요시노부는 그의 아버지 나리아키에게 이런 편지를 쓴 것은 유명하다.
"천하를 얻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습니다. 힘들어서 싫다는 건 아니지만, 천하를 잡은 뒤 실패할 바에야 아예 천하를 빼앗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요시노부공전>

멋대로 자신에게 기대하는 주변을 이렇게 견제한 요시노부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본인이 내키지 않는 가운데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하자는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그런 흐름에 반발한 것이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다. 이에사다는 뇌성마비를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언어 능력이 불분명했다. 그 때문에 미국에게 통상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이에사다로는 긴급사태를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누구나가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사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차기 쇼군을 빨리 뽑아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 것이 요시노부다. 그러나 미토 가문의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종가와는 피가 먼데다가, 아버지 나리아키는 막부와의 사이가 나빴다. 이것이 그가 쇼군이 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의 측근인 히라오카 엔시로가 펴낸 책이《요시노부공어언행사기(慶喜公御言行私記)》라는 책자라고 한다. 이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됨됨이를 알리기 위한 팜플렛이었다고 한다. 이를 다이묘들에게 나눠주며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만들기 위한 지지를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조궁의 신손이라는 기술이 있어 그가 이에야스의 정통 후계자임을 어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히토츠바시 파가 아베 마사히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지리멸렬해졌고,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가 핏줄을 중시하여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강렬히 추대한 것과 쇼군 이에사다의 의향도 있었다. 이에사다가 사망하자 1858년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이 되었다. 16살 때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추천하여 자신을 도쿠가와 종가의 후계자로 하려하자 요시노부는 "천하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귀찮은 일은 없다."라고 편지를 써보냈다고 하지만, 과연 야망이 정말 없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요시노부는 다이로의 이이 나오스케에게 이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血筋からいっても、慶福の様子からいっても、それが妥当だ
핏줄로 보나 요시토미(=이에모치)[9]의 모습으로 보나 그것이 타당하다. #

확실히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촌 동생뻘이 되기 때문에 쇼군 집안의 핏줄은 가깝다. 열세 살 갓 지난 어린 나이가 걱정스러웠지만, '요시토미의 모습으로 보아도'라는 말로 보아 요시노부는 이에모치로 괜찮을 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시노부의 언행은 읽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의 언행이 단순하지 않은 것은 핏줄이 복잡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요시코는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의 딸이다. 즉 요시노부에게는 도쿠가와 가문과 조정의 두 피가 흘렀다는 얘기가 된다. 도쿠가와 가문과 조정이 대립했을 때에, 어느 쪽의 의향을 중시하는가는가는 싫든 좋든 틈새에 몰리는 처지에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사태를 예측하고, 아버지 나리아키는 요시노부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고, 요시노부 자신이 '석몽회필기'에서 되돌아 보고 있다.
たとえこれから幕府に背くことがあっても、絶対に朝廷に背いてはならない
비록 앞으로 막부를 거역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조정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미토 번은 도쿠가와 고산케(기슈, 오와리, 미토)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막부를 중시할 법하지만 고산케 중에서는 격하로 여겨졌으며, 도쿠가와 종가의 가독을 상속할 권리도 없었다. 미토 번이 '존왕'을 내건 것도 '막부에는 결코 중시되지 않는다'는 상황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 외면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요시노부지만 본인도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에도에 등장했을 때는, 하녀들에게 "예(자신)는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손자다"라고 내뱉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이런 가운데 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 고메이 덴노의 칙허도 받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요시노부는 후쿠이 번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 등과 함께 이이 나오스케에게 이를 따졌다. 그렇다고해도, 서명 자체를 화낸 것은 아니다. 이를 조정에 보고하는 데 사신을 보내지 않고 편지로 보고하는 데 그친 데 쓴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런 무리한 일을 했던 이이를 요시노부는 이후 "재략은 부족하지만, 결단에는 풍부한 사람이다. 자신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才略には乏しけれども、決断には富める人なりき. 自分には、そういう決断はできそうにない)"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미 조인이 끝났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사정은 교토에 상세히 전해야 한다. 하루 빨리 막부로부터 몇 명이 상경하여 엎드려 천황에게 말씀해야 한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 (석몽회필기 昔夢会筆記) #

이후 1858년 4월 9일. 일방적으로 차기 쇼군 후보로 취급된 요시노부는 이후에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히토츠바시파인 에치젠국 후쿠이번 16대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10]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요시나가에게서 해상방위에 대한 의견을 요구받자, 요시노부는 다음날 "지금의 판세에 대해 정견이 없다(当今の形勢について定見がない)"라고 적어 바로 답장을 보냈다. 당시 그는 차기 쇼군 후보의 핵심 인물로서 주목받고 있었지만, 이 답장에서 보듯이 주위에서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시 그가 정치적인 의견다운 말을 한 것은 이이 나오스케에게 직필로 쓴소리를 한 것 정도였다. 그것도 국가운영 방침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다. 어머니로부터 조정의 혈통을 이어받는 사람으로서 '조정을 경시하지 말라'며 그 절차에 불만을 제기했을 뿐이다. 그가 정치적 의견을 밝힌 적은 그 이전에 딱 한 번 있었다. 1857년 5월 8일에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막정(막부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아버지께 전해주십시오(幕政に参与することを辞退するよう父上に伝えてほしい)" #

1858년 5월 이이 나오스케는 로주 마나베 아키카쓰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막부에 반대하는 존황양이 세력과 히토츠바시파를 숙청하는 사태를 일으켰다. 요시노부는 근신처분을 받는 정도였지만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은 처형될 정도로 100여 명의 인사들이 연루된 큰 옥사였다. 더불어 요시노부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번주직을 박탈당하고 칩거 처분을 받고 방안에 갇힌 생활을 했다.[11] 이유다운 이유는 없고, 아버지인 나리아키가 존왕양이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견제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서 요시노부는 극단적인 태도로 그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낮이나 밤이나 덧문을 닫은 요시노부는 두 치 남짓한 대나무를 덧문 중간 중간에 끼우고 약간의 불빛만 얻었다고 한다. 머리털(月代)도 깎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수염도 마음대로 길렀다고 한다. 불합리한 탄압에 대해서 그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저항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고집공(強情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860년 6월에는 근신 처분이 풀리지 않은 채, 아버지 나리아키는 미토에서 급서하며 향년 61세로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요시노부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던 1860년, 이이 나오스케가 사쓰마, 미토 낭인 집단에게 암살되었다. 공무합체파였던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뒤를 이어 사쓰마의 실권을 쥔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츠는 교토에 직접 군을 이끌고 상경해서 근신중이던 요시노부와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처벌을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요시노부의 근신이 풀린 것은 동년의 9월 4일,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 후이다. 반년이나 근신 처분이 계속 된 것이다.

3. 공무합체파 정권의 수반으로서

3.1. 쇼군 후견직

근신 처분이 풀리자마자 요시노부는 정치판으로 뛰어들게 된다. 1862년 이른바 분큐 2년의 개혁(文久の改革), 시마즈 히사미츠의 의향대로, 요시노부는 쇼군후견직(将軍後見職)에 임명되고, 동시에 요시노부와 마찬가지로 근신에서 벗어난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정사총재(政事總裁)[12]직에 임명되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후견직에 오른것이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병약했고 어렸기 때문에 요시노부가 배후로 나섰다. 요시노부와 슌가쿠를 정권의 핵심으로 삼으려고 암약한 이가 존왕양이파의 공경(公卿) 오오하라 시게노리(大原重徳, 1801 ~ 1879)이다. 그 뒤에는 사츠마번의 국부 시마즈 히사미츠가 있었다. 이 무렵, 히사미츠는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자신의 품에 포섭하고, 교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다음은 에도로 히사미츠는 조정에서 막부에 칙사를 보낼 계획이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오오하라이다. 요시노부와 슌가쿠가 막부에서 등용된 것은 오오하라가 강하게 압박한 결과였다.

사실 막부는 그런 사쓰마번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에모치가 쇼군에 취임한 후 계속 후견직을 맡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요리(徳川慶頼, 1828 ~ 1876)를 파면했다. 이유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성인이 되었으므로 이제 후견직은 불필요하다."였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후견직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다 오오하라 시게노리에 힘의 밀리고 말았고, 한번 잃어버린 이에시게의 후견직을 부활시켜 거기에 경쟁자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취임시키는 묘한 일이 되었다. 덧붙여서, 에도로 향하는 오오하라를 히사미츠도 수행하고 있다. 700명이나 되는 보병을 거느리고 히사미츠가 에도에 오른 것은 막부에 대한 위협 그 자체였다. 이로 인해 히사미츠가 막정에 개입하려다 막부로부터 큰 반감을 사게 된다. 요시노부 입장에서는 강력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가 하면 이번에는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츠나 조정이 자신을 이용하려 들게 된것이다. 막부 입장에서 보면 강요된 인사들로, 요시노부는 불청객 그자체였다. 자연스럽게 관리들은 요시노부와 슌가쿠에게 비협조적인 태도가 된다. 요시노부는 이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だいたいあの節の将軍後見職・政事総裁職というものは、ただの大老でもなければ何でもない
대체로 그때의 쇼군 후견직·정사총재직이라는 것은 단순한 다이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
形こそ御相談だが、実際は同意させて、将軍後見職や政事総裁職の名前を出して行ってしまえば、朝廷も何も言ってこないし、諸大名も受け入れざるをえないだろうという考えのようだ
형식은 의논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동의시켜 놓고 쇼군 후견직이나 정사총재직 이름을 대고 가버리면 조정도 할 말이 없고 다이묘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인 것 같다. #

큰 권한은 없고 떠안기는 것은 책임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를 계속해서 피했던 요시노부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태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지는 않았다. 요시노부와 슌가쿠는 분큐의 개혁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교토수호직이 신설되고, 다이묘들이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번갈아 오고가야 했던 참근교대를 3년에 한 번으로 완화했다. 더불어 다이묘의 에도에서 체류 기간을 100일로 줄이고, 볼모였던 처자식을 고향에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사실상 참근교대의 폐지나 다름없었다. 외국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해상 방비를 갖추기 위해서도, 부담이 무거운 참근 교대의 완화는 필요했다. 사쓰마번 히사미츠의 희망이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이 개혁으로 여러 다이묘는 기뻐했지만, 다이묘의 처자와 번사가 차례로, 에도로부터 떠나 버렸다. 조건을 완화하고 그것을 허락했으니까 당연하지만, 그 결과, 에도의 인구는 단번에 감소하고 실업자도 증가하게 된다.

당시 조정이 자꾸만 재촉했던 것은 양이였다. 자신들을 막부에 보내온 오오하라는 에도성에 오를 때마다 막부에게 양이를 강요하고 있었다. 히사미츠는 막부에 반감을 산 탓에 정치활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미 에도를 떠났다. 그 틈을 타서 교토에서는 조슈 번이 세력을 확대했다. 거기에 토사 번이 더해져 존왕양이 운동은 한층 더 고조되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사쓰마 번 무사들이 외국인을 살해하는 나마무기 사건이 터졌다. 조정으로부터의 압력이 너무나도 격렬하여, 원래 개국론자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도 양이파로 전향해 막부와 대립을 심화시켜 간다. 당연히 슌가쿠와 개혁을 진행했던 요시노부도 그에 호응할 것 같았다. 존왕양이 세력이 언제나 요시노부의 뒤를 받쳐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주위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양이파로 전향해버린 슌가쿠에게 1862년 10월 1일, 이렇게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世界万国が天地の公道に基づいて互いに交誼を図っている今日、わが国だけが鎖国の旧習を守るべきではない
세계 만국이 천지공도를 바탕으로 서로 교의를 도모하는 오늘날 우리나라만이 쇄국의 구습을 지켜서는 안 된다. #

이 글로 인해 요시노부가 사람들에게 개국파로 인식하게 된다. 제대로 반박을 당한 마츠다이라 슌가쿠는 다시 개국파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요시노부는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을 무시하고 체결했다고 여겨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대해서도, 국제감있는 대국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었다. 양이 바람이 불어닥칠 당시 이토록 대국관을 갖고 있었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今日の条約は外国から見れば政府と政府の間で取り交わされた約束である。アメリカを恐れて調印したからといって、破棄しようという議論は、国内では通用しても、外国には、とうてい承服されがたいであろう
오늘의 조약은 외국에서 보면 정부와 정부 사이에 교환된 약속이다. 미국이 무서워 조인했다고 해서 폐기하자는 논의는 국내에서는 통하더라도 외국에는 도저히 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

그런데 양이를 추진하고자 조슈와 토사의 양 번사가 조정에 입김을 불고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가코지 킨토모(姉小路公知)가 교토를 떠나 에도에 오게 된 이후부터 요시노부의 입장이 조금씩 바꼈다. 요시노부에게 망설임이 생기기 시작하고 만것이다. 본심이 개국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양이의 명분을 버리고 조정에 대항해야 하는가 하면 태도를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요시노부는 조정으로부터 양이 요청을 받자, 거부하지 못하고 동조한다. 게다가 그 후 로쥬(老中)에게 "쇼군 후견직에서 사퇴하고 싶다"는 뜻을 제의하였다. 왜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만일 그만둘 생각이었다면 개국론으로 일관해도 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며 그에 기대하는 지지자들은 당황했다.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의견이 확고하지 않은 요시노부에게 마츠다이라 슌가쿠는 깊게 실망해 "결단력이 없고 약하다"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히토츠바시 가문을 지원해 온 전 토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山内豊信)[13]도 대놓고 낙담했다. 다만 결단력이 없다고 비판했던 슌가쿠도 개국과 양이 사이를 오락가락했다는 점이다. 막부의 로주들(老中)들도 그랬다. 양이 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도에서 건너온 산조 사네토미 칙사와의 교섭 결과 막부는 양이의 칙지를 받아들였다. 그가 한 번 접었던 쇼군 후견직 사직을 다시 단행하려 한 것은 막부의 그런 태도를 본 직후였고 이러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카즈노미야를 쇼군 이에모치에게 약혼녀 요청을 하면서 7, 8년 내지 10년 안에 외국인을 일본에서 멀리하기로 고메이 덴노에게 굳게 약속한 이상 여기서 양이의 실행을 거절하면 파양이 될 수도 있다. #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조정의 허가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막부가 체결 한 것으로, 조정과 막부의 대립은 심화했다. 그러나 외국의 위협이 닥치는 가운데 지금은 국내에서 분열돼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정과 막부를 결합시켜 체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것이 이른바 '공무합체(公武合體)'였다. 공무 합체의 구체책으로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황매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이 결혼했다. 그때 막부는 조정에 7, 8년 내지 10년 이내에 양이를 결행하기로 약속해 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경위를 고려하면, 양이를 여기서 거부하면, 공무합체도 엉망이 되는 것이었다. 우선은 받아들이고, 교토에서 대화하면 되는것이었다. 로주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는 요시노부대로 막부의 태도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후 요시노부는 쇼군 후견직에 머무르기로 하고 있다. 얼핏 보면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언행에도 역시 이유가 있었지만, 그의 주위를 돌아보면 역시 똑같은 갈등과 망설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만큼 정답이 없는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이런 혼미한 시대에, 요시노부가 특별히 비난받은 것은, 그만큼 기대치가 컸기 때문이다. 영향력이 큰 존재였고, 그에게는 흔들림 없는 태도가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진영으로부터도 '분명하지 않다'라고 비난받았다. 이런 요시노부에게 붙여진 별명이 "이신덴(二心殿)"이다. "언제나 기분이 자꾸 바뀐다"다는 뜻이다. 게다가 자신의 의도가 통하지 않게 되거나, 자신의 안위가 위험해진다고 판단하면 그 자리에서 떠나는 행동을 반복했다. 본인에게 있어서는 처세술이자, 일종의 협상술이었을것이다.

또한 당시 후견직인 요시노부와 정사총재직인 슌가쿠는 조정에 막정 방침을 올렸다. 바로 '실정의 사과'와 '공무합체(公武合体)'다. " 이이 나오스케 다이로가 잘못된 정책을 펴 죄송하다. 이제는 막부와 조정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안세이 대옥의 실정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전임자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러나 교토에서는 대옥의 반동으로 양이에 기운이 첨예화되어 있었다. 조정에 들어와 있던 조슈번이 극단적인 양이론을 전개한다. 막부에 양이를 강제하자는 의견이 팽배했다. 그리고 칙사를 에도에 파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막부는 이듬해 3월에 조정과의 융화를 위해 쇼군의 상락(교토로 올라가는 것)을 계획했다. 이에 앞서 요시노부가 먼저 의견을 보이며 공무합체의 조정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여기서 반대의 뜻을 밝힌 것이 마츠다이라 슌가쿠다. 조정과의 교섭에서 협조해야 할 요시노부와 슌가쿠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갈라졌다. 슌가쿠는 "외국과의 조약을 일단 파기하고 전국 대명과 국의를 연 뒤에 다시 나라를 열겠다."였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조약의 파기는 불가능하다. 전쟁이 되어 버린다. 설령 이겼다고 해도 명예는 못 된다."라고 답변했다. 막부는 권력을 내놓는 슌가쿠의 의견에는 물론 반대했고, 요시노부의 의견 역시 반대한 데다 조정에서는 억지로라도 개국을 허락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슌가쿠는 파업을 일으킨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조정의 뜻에 반하여 개국을 추진한다면 기름에 불을 쏟는 일이 생길 것이다. 이에 슌가쿠는 조정이 개국에 반대한다면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납할 테니 마음대로 양이를 행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주의자인 요시노부는 거기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양이를 받아들이는 생각으로 바꾸었지만, 막부의 대표로서는 개국론도 표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게 된 요시노부가 취한 행동은 사표 제출이다. 이유는 조정이 개국론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후견직으로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 전 토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1827 ~ 1872)와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설득하여 사의를 번복하고 등성했다. 막부 내에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은 가운데, 11월이 되어 다시 교토로부터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등 칙사가 도착했다. 막부에 대해 양이의 명쾌한 결행을 시기를 요구했다. 요시노부와 막부가 갈등을 빚으면서 1862년 12월 5일 쇼군 이에모치는 양이 결행을 수락하는 봉답서를 산조 사네토미에게 제출한다. 이후 1863년, 229년 만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상경하여 천황에게 양이를 맹세하는 것에 앞서 쇼군 후견직인 요시노부가 조정과 실무협의를 했다. 그렇게 상경한 요시노부를 기다린 것은 강렬한 양이의 재촉이었다.

1월 5일 교토에 도착한 뒤 11일에는 조슈 번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1840 ~ 1864), 데라지마 추자부로(寺島忠三郎, 1843 ~ 1864), 그리고 구마모토 번의 카와카미 겐사이와 토도로키 무베(轟武兵衛, 1818 ~ 1873)가 숙소로 들이닥쳤다.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2월 8일 교토에 도착하자 양이 재촉은 점점 심해진다. 당시 교토는 조슈번 토사 번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더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장수들은 양이를 명하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 날짜를 정하라는 재촉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메이 덴노나 다카쓰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 관백은 의주의 산조 사네토미 등을 요시노부에게 파견하여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으면 낭인들이 폭발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전했다. 성화같은 재촉을 받으며 요시노부는 부득이 양이 기일을 정하기 위한 논의에 응하게 된다. 3월에 쇼군 이에모치가 상경하자 이에모치도 표적이 됐고 교토의 산조 대교(三条大橋)에는 이에모치와 요시노부를 위협하는 문서가 내걸렸다. 너무나 시끄러워져서 요시노부는 양이의 기일을 5월 10일로 잡고 있다. 최종적으로 날짜를 확정한 것이 4월 20일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급한 일이다. 하지만 양이 맹세의 목적은 양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고있던 도막파를 견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요시노부는 조정에게 "기존대로 조정이 막부에게 모든 국정을 위임하던지, 아니면 막부가 국정행사권을 조정에 반납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압박했다. 즉 도막파가 주장하는 행정권의 조정반납을 조정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14] 결국 조정을 통해 도막파를 견제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막부 내에서도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요시노부와 로쥬들의 소통 부족이다. 조정에 갈수록 열세를 보이는 막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통일방침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도 요시노부는 나름대로 분투했다. 쇼군의 체류를 연장하는 등 조정과 교섭했다. 또한 '공무 합체(公武合体)'의 체제를 만들어, 지금까지와 같이 국사는 막부가 계속 주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조정은 조정 나름대로 "막부의 국정운영은 인정하지만 천황이 직접 각 번에 명령을 내릴 권한도 있다"라고 맞서 결국 양이를 실행하라고 해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이런 조정의 조치에 반발해 정사총재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히자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고 막부의 신료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임시방편으로 막부가 조정과 나눈 양이 약속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요시노부는 1863년 1월 5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 앞서 교토로 들어간다. 이에 요시노부는 조정과 존왕지사들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양이 기한을 약속하고 말았다. 요시노부는 쇼군 이에모치가 아직 교토에 오지 않은 단계에서 쇼군이 에도에 돌아온 지 20일 후라고 양이 기일을 정하게 돼 있다. 이에모치가 교토에 오는 것은 3월 10일이었다. 열흘 정도 교토에 머무른다면 에도에는 3월 20일 이후에 돌아오게 되고 그로부터 20일 후니 양이는 '4월 중순경'이라고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이에모치가 교토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양이 기한은 5월 10일로 정해졌다. 물론 4월이건 5월이건 양이 따위가 쉽사리 될 리 없다. 시끄러운 존왕양이파들과 조슈번을 묵살시키기 위해 일단 기한을 정한 데 불과하다. 당시 요시노부는 이러한 말을 하기도 했다.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양이거든 다시 행할 수 없을 만큼의 기일에 정하라.(到底行うべからざる攘夷なれば、また行われざる程の期日に定むべし)"

어차피 양이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할 수도 없는 기일에 정해 버려라고 말한 것이다. 정사총재직을 지낸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돌아가 버렸으므로 교토에 남겨진 이에시게와 요시노부는 존왕양이파의 샌드백 상태였다. 제멋대로 말을 들으면서도, 요시노부와 이에모치는 교토에서 나오지 못하고 인질처럼 되어 버렸다. 실제로 쇼군이 에도로 돌아가는 것을 조정으로부터 여러 번 제지당했다. 행렬이 출발하고 나서 궁궐로 불려가는 일조차 있었다. 가능한 한 오래도록 교토에 머물게 하면서 쇼군의 실추를 세상에 알리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양이 기한에 대해 요시노부가 쇼군이 에도에 돌아온 지 20일 후라고 했기 때문에 돌려받지 못하면 양이가 될 수 없다는 이치가 된다. 그런 점에서는 양이의 기일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시노부는 절묘하게 양이를 피했는데, 고메이 덴노와 쇼군이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에 가서 천황이 내리는 검을 쇼군이 받으면 양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이 감기몸살이 나서 예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핑계를 대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4월 21일에는 이에모치가, 22일에는 요시노부가 에도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물론 양이 등을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고 약속된 5월 10일에 양이 결행을 결행한 것은 시모노세키의 해협을 지나는 외국 선박을 포격한 조슈 번뿐이었다.

에도로 돌아온 뒤에는 양이거부를 주장하는 막부 내 신료들을 밀어내고 양이 실행책으로 에도와 가까워 서양의 침공이 일어나면 방어에 불리한 요코하마항의 폐쇄를 추진했다.1863년 11월 26일, 요시노부는 다시 교토로 올라간다. 요코하마항의 폐쇄 문제의 대응을 결정하기 위해서이다. 요시노부가 교토에 이르자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 유력한 번의 대표자들이 모여 연일 의논을 나누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어느새 중심 인물로 취급되는 요시노부였지만, 사쓰마번의 발언력도 높아졌다. 조슈번의 궁중지배에 진저리가 났던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이 사쓰마번과 손을 잡고 고메이 덴노에게도 동의를 얻어낸 후 조슈 번을 교토에서 쫓아냈기 때문이다. 이것을 8월 18일의 정변이라고 부른다.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존황양이파가 조정에서 밀려나고 공무합체파가 득세했다.

요시노부는 공무합체파와 막부 신료 등이 참여한 참예회의에 참석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요코하마항 폐쇄를 놓고 시마즈 히사미츠와 마츠다이라 슌가쿠 등과 대립했다. 정사총재직을 그만둔 슌가쿠는 요시노부와 한 번은 결렬되었으나 다시 교토에 들어온 그를 가장 먼저 방문한 이가 바로 슌가쿠였다. 그가 묻고 싶었던 것은 요시노부가 사쓰마 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였다. 슌가쿠는 그에게 사쓰마에 대해서 의심이 되냐는 거냐고 질문하다. 요시노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幕府は大いに疑っていたし、私も同様だったが、疑ったところで何もよいことはないので、もう疑うことのないようにしている
막부는 크게 의심하고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의심해 보았자 좋은 것은 없으므로 이제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

슌가쿠로서는 조슈 번이 사라지고 과격한 존왕양이파가 교토를 떠난 지금이야말로 유력 다이묘가 정리되어야 할 때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사쓰마번과 적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그 후도 대화는 사쓰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츠가 주도해 나아간다. 그리고 히사미츠는 그들에게 "우유부단한 공경들(公卿)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이때에 다이묘들도 넣어 의주(議奏)에 보태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다이묘들이 모여 조정참예회의를 열자는 히사미츠의 의견에 사람들은 이의가 없었다.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마츠다이라 슌가쿠,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야마우치 도요시게, 그리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시마즈 히사미츠가 조의 참예로 임명되었다. 조정뿐만 아니라 막부의 의사결정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조의 참예 구조를 만들기 위해 사쓰마 번이 조정과 교섭하고 있는 중에 요시노부는 마츠다이라 슌가쿠에게 "지금 시세에 맞는 것은 중흥의 정신인가, 창업의 정신인가.(今の時勢に合うのは、中興の精神か、それとも創業の精神か)"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요시노부는 "내 방침은 중흥이 아니라 창업 쪽에 있다고 단언했다." 또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中興ならば、今までしたことは採らねばならぬ。だが、創業ならば、規則もなければ慣例もないのだから、善いと思ったことはすぐやれる
중흥이라면 지금까지 한 것을 해야 한다. 하지만 창업이라면 규칙도 없고 관례도 없으니 좋은 일은 금방 할 수 있다. #

그런데 요시노부가 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모순이 생겨버렸다. 요시노부는 막부를 대표하는 것이지만, 이 조직은 막부와는 별개의 정부기관이다. 즉 막부는 그 하부조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막부의 위신을 지키고자 하는 요시노부가 승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1월 15일, 이에모치가 로쥬를 동반하여 다시 상경해, 요시노부의 모순이 트러블을 일으킨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쇄국과 개국 문제다. '참예회의'에서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천황의 의향을 받아들여 개국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단 받아들인 양이 방침에 따른 막부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진의는 조정이나 도자마 다이묘의 말에 따라 마구잡이로 방침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개국 방침인 참예회의의 일원인 요시노부는, 로쥬들의 강한 반발을 받는다. 결국 여기서도 요시노부는 의견을 바꾸게 되는데, 8월 18일 정변 이후 사쓰마 번이 조정을 좌지우지 하려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자, 요시노부의 '참예회의 죽이기' 책략이 시작된다. 둘 다 공무합체파였지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 시도하던 도자마 다이묘 사쓰마 번과 기존대로 막부가 정권을 좌지우지하려는 요시노부의 대결이었다.

이후 히사미츠는 최근 현안사항인 요코하마항의 폐쇄에 대해 애매모호한 청서를 조정에 제출했다. 그리고 조의가 열리자 조정 측은 애매함에 난색을 표했다. '빨리 요코하마항을 폐쇄하라' 라고 말이다. 그래서, 개국파였던 히사미츠와 무네나리가 반발한다. 다음날, 히사미츠에 신경을 쓴 조정이 요코하마항 폐쇄 추진을 취하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오자, 요시노부는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당시 나카가와노미야 中川宮)이 주관한 연회에서 일부러 만취한 척하며 다테 무네나리, 마츠다이라 슌가쿠 등을 맹비난하고 구니노미야에게 "시마즈 같은 것은 얼마든지 있다"라고 폭언을 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この3人は天下の大愚物なのに、宮さまはなぜご信用あそばすのですか?
이 세 사람은 천하의 멍청이인데, 황공께서는 어찌 신용을 하시는 것입니까?
この者達は天下の大愚物、天下の大奸物であります
이 자들은 천하의 멍청이, 천하의 간신배입니다

술에 만취한 척 연기한 요시노부가 갑자기 슌가쿠, 무네나리, 그리고 히사미츠를 '대우물[15](大愚物)'이라고 매도했던 것이다. 이에 히사미츠는 대격노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참예회의는 사실상 붕괴한다. 의견이 분분했던 것은 '요코하마항 폐쇄 문제'다. 이는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의거해 열린 요코하마항을 닫아달라는 조정에서 막부에 요구한 것으로 문제점은 평소와 같다. 외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개국 상태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조약을 파기하고 쇄국을 단행할 것인가 하는 논의이다. 원래 개국론자인 히사미츠, 무네나리는 물론 한때 양이파가 됐다가 개국파로 돌아선 슌가쿠는 일단 열었던 요코하마항을 다시 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갑자기 요시노부는 반대했고, 조정과 마찬가지로 양이의 입장에 선 것이다. 그리고 이 술에 취한 채 한 막말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국내를 안정시키려고 양이파를 배려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고, 양이하기를 희망하는 조정에 사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두 추측 다 맞을 확률이 높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자마 다이묘였던 사쓰마 번이 정치를 주도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슌가쿠도 조심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여러 번의 유력자들은 저마다의 세력기반이 있다. 하지만, 요시노부의 후원자는 도쿠가와 가문이다. 참예회의가 힘을 갖는 것은 자신의 영향력을 잃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당시에 사쓰마번이 급속히 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히사미츠가 천황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폭언을 퍼부어 참예회의를 때려 부쉈다는 것이 진상에 가까울 것이다. 이걸 본 하라 이치노리신(原市之進)은 "열공(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신령이 옮겼는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요시노부는 저택에 돌아오면 호위무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今日は愉快、愉快。大技計をぶちこわしたのは痛快の至り
오늘은 참으로 유쾌하구나. 대담한 기술[16]을 깨뜨린 것은 통쾌하기 짝이 없다. #

요시노부는 이 사건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가진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힘겹게 성공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하던 공무합체의 기회는 잃게 되었다.[17]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요시노부의 이 대담한 행동이 막부 내부에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원래 참예회의에 참가한 시점에서 막부 내에서의 요시노부의 구심력은 저하되었다. 당시 요시노부는 언제나 주위를 적으로만 돌렸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모두가 그에게 찾아왔고,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지향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중심이 된, 지금까지 없었던 틀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슌가쿠에게 '창업'이라고 한 말에는, 거짓말이 없었다. 이후 요시노부는 전부터 사표를 냈던 후견직을 정식으로 사임했다.

3.2. 조정의 관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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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어수위 총독 재임 당시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4년 3월, 쇼군 후견직에서 금리어수위 총독으로 임명, 교토 궁궐 수위직이 된다. 즉, 막부의 관리에서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18] 금리수위 총독이란 천황이 있는 궁중을 경호하는 최고책임자라는 뜻이다. 더욱이 섭해 방어 지휘란 오사카 만에 들어오는 외국인으로부터 천황을 보호하는 중요 역할이다. 이때부터 교토에 있으면서 막부의 중앙부와는 독립된 자신의 파벌을 형성해나가는 한편, 막부 내에는 정사총재직을 맡은 카와고에 번주와 연계해 요코하마항 폐쇄를 계속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텐구당의 난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막부 내 신료들의 갈등이 일어나, 결국 카와고에 번주는 정사총재직에서 물러났고 요코하마항 폐쇄는 사실상 좌절로 돌아갔다. 현재의 연구자들은 그의 금리수위 총독 취임을 두고 또 다른 쇼군 탄생이라거나 교토 막부의 성립 같은 말을 쓰고 있다. # 당시 막각은 쇼군 이에모치의 명으로 몇 번이나 요시노부를 에도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요시노부가 막부보다 조정을 더 중히 여겼던 자세의 표현이기도 하다.

1864년 7월,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궁궐 수위직인 요시노부는 직접 수비군을 지휘해 타카츠카사 저택(鷹司邸)를 점령한 조슈군과 맞서 싸웠다. 요시노부는 교토에 쳐들어온 조슈번 병사들과 대치하게 된다. 원래는 교토 수호직이자 아이즈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임무였으나 병중인 몸을 이끌고 그를 천황 곁에 남겨둔 채 요시노부가 대신하게 되었다. 조슈 번 병사들이 하마구리고몬(蛤御門)을 공격하고, 아이즈 번병은 한때 고전에 빠졌는데, 사쓰마 번병이 지원해 오면서, 형세는 역전됐다. 조슈 군대가 패주하는 가운데, 전쟁터가 된 교토는 대혼란에 빠진다. 그런 가운데, 요시노부는 날아오는 유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군세를 거느리고 교토의 경호에 임했다. 쵸슈 번 병사들의 잔당은, 다카쓰카사 저택에 돌입해 점거했다. 요시노부는 "열세인 조슈병들이 억지로 조정에 돌입할지 모른다"며 위기감을 갖는다. 금리어수위 총독으로서 그런 일만은 막아야 했고, 단숨에 이 사태를 매듭짓기 위해서 대담하게도 다카쓰카사 저택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후에 요시노부는 '석몽회필기(昔夢会筆記)'에서 '그러고 보니 중대사이므로 일각도 유예하기 어렵다.'라고 그 심경을 썼다. 필사적인 각오의 결단이었지만 그 작전이 통해 요시노부가 조슈 번의 마지막 부대를 패주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불기운이 강해, 교토의 시가지를 태워 버리기도 했다. 요시노부는 최전선에서 아군을 고무시켰고, 한편 전투가 끝날 때까지 4차례나 궁전에 돌아가 천황의 안부를 살피며 조정의 동향을 살폈다. 두 번째 발을 디뎠을 때, 조슈에 신경전을 품은 공가가, 마음대로 조슈와의 화의를 맺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시노부는 홀로 설전을 벌여 그들을 철저히 논파했다고 한다.

다음에 요시노부가 전선에서 궁전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천황을 어소에서 도망쳐 시모카모로 옮기려는 상담이 시작되었다. 천황의 거처인 시신덴에는 이미 천황의 도망에 대비해 탈것(봉련)과 삼종의 신기(神器)가 준비되어 있었다. 요시노부는 이를 보고 쏜살같이 고메이 천황에게 다가가 소매를 잡으며 "내가 수호해 드릴 테니 아직 천행(天行:천황이 동좌하는 것)할 시기가 아닙니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힘을 얻은 천황은 고쇼(御所)로부터의 도피를 만류하고 요시노부에 대한 신임이 점점 깊어졌다고 한다. 이 소동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에 사쓰마번 고마쓰 다테와키(小松帯刀, 1835 ~ 1870)가 있다. 고마쓰는 이때의 요시노부의 모습을 '위의당당(威儀堂々)' '무쌍한 호걸'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
요시노부의 정치력은 고메이 덴노의 신뢰를 쟁취한 것이 컸다. (중략) 요시노부의 모친은 아리스가와노미야 집안 출신으로, 요시노부 자신도 자신이 조정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다. 요시노부의 충성심은 진품이라고 고메이 덴노의 마음에 박힌 것이다.
― 안도 유이치로(역사학자, 安藤優一郎) #

이것이 요시노부에게 생애 첫 실전 지휘였다. 이때의 일로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막부 쇼군 중 유일하게 말에 타지 않고 싸운 쇼군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금문의 변에서 승리해, 고메이 덴노로부터도 노고를 치하받아, 득의양양하게 된다. 이것을 기회로 요시노부는, 교토 수호직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와 교토 토코로지대로 구와나 번주인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19]와 제휴를 한층 더 강화해 간다. 금문의 변 전까지는 요시노부는 존왕양이파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이었지만, 금문의 변 이후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해 반존왕양이파인 아이즈, 구와나와 제휴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를 히토츠바시, 아이즈, 구와나의 앞글자를 딴 '이치카이소 정권'이라고 부르며 조정과 연계해 천황을 등에 업고 요시노부는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렇게 원하던 자기 조직을 드디어 가질 수 있었던 셈이다. 요시노부는 아이즈, 구와나, 에치젠, 사쓰마, 히코네, 오가키, 아사오의 각 번주 앞으로 조슈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감회를 보냈다.

이렇게 기쁨에 젖어 있던 요시노부였지만, 당시 막부는 "조슈 정벌은 어디까지나 쇼군의 일이었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직할군이나 여러 번을 동원해 조슈를 쳐야 하는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조슈 정벌군 총독부에도 요시노부는 뽑히지 않고, 전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徳川慶勝, 1824 ~ 1883)가 임명되었다. 조슈의 처분에 관한 전권은 요시카쓰에게 주어졌다. 요시카쓰는 참모역에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기용하고 있다. 이는 의외의 인선이었다. 정벌군 총독부에는 고메이 덴노도 요시노부가 당연히 취임하는 줄 알았고 아이즈, 구와나, 히고번의 관계자에 이르러서는 취임을 요청받은 요시노부가 고사했을 경우를 상정했다. 그래도 요시노부를 총독으로 모두가 밀려고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쓰마번 조차도 그가 취임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요시노부가 막부에 사양해 취임을 고사했다는 설도 있지만, 막부가 노골적으로 요시노부를 홀대했다는 설이 정설이다. 막부가 보기에 그를 불신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쨌든 도쿠가와 가문에 몸담고 있으면서 참예회의 다음에는 일회상과 천황의 위광을 등에 업고 발언력을 높여 막부에 주문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막부의 분노는 정책에도 반영이 됐다. 일찌기 요시노부와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지시한 '분큐의 개혁'으로, 참근교대의 조건을 큰폭으로 완화시켰다. 외국의 위협에 직면한 가운데, 각 번에는 국방에 진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막부는 참근교대제의 부활과 다이묘 처자의 에도 거주를 명하는 번명을 내렸다. 목적은 막부의 복권이다. 막부의 요시노부에 대한 처사는 조롱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금문의 변' 직후에는, 요시노부가 호위로서 재경하고 있는 미토 번사에 대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이라고 하는 막명을, 히토츠바시가의 가로(家老)에게 내리고 있다. 하지만 횡포한 막부에 대해 요시노부가 분노했는가 하면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미토 번에서 과격한 존왕양이파가 대두했다. 그들은 '텐구당'이라고 이름 붙여, 조슈의 츠쿠바산에 거병했던 것이다. 막부도 애를 먹고 있는 가운데, 토벌을 피한 텐구당은, 교토에 있는 요시노부를 짊어지고, 기사회생을 도모하려 하고 있었다. 일단을 이들을 이끈 것은 타케다 코운사이[20](武田耕雲斎, 1803 ~ 1865)다.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 밑에서 미토 번정을 지탱한 인물로, 요시노부와도 신뢰 관계가 깊었다. 다케다 입장에서는 '열공(나리아키)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라고 하는 자부심도 있어, 요시노부라면 반드시 이해하고, 조정에 연결해 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텐구당은 기타칸토에서 시나노, 미노를 거쳐 교토로 넘어왔다. 조정의 회의에서 텐구당의 난을 토벌을 허락하였으므로 요시노부는 군대에 자진 출병하기로 결정하였다. 요시노부는 여기서 냉철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텐구당으로부터 전해진 탄원서의 수리를 거절했다. 설득에 임하지도 않았다. 요시노부에게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텐구당은 항복을 한다. 한바탕 싸움을 벌이지 못하고 내란은 종결을 맞는다. 이후에도 요시노부는 철저했다. 다케다 코운사이 외에 전원을 가나자와 번으로 잡아들여 350여 명이 처형됐다. 냉혹하게 여겨지는 처사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때는 내 신세가 좀체로 위태로웠다. 다케다를 비롯한 일에 말참견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そのときは、私の身の上がなかなか危なかった。それでどうも何分にも、武田のことをはじめ口を出すわけにいかぬ事情があったんだ)" 당시 요시노부에게는 암살 위험이 늘 따라다녔다. 몇몇 측근은 실제로 살해당했다. 다케다가 조금만 달라붙어도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던 것이라고 요시노부는 주장한다. 실제로 텐구당은 요시노부를 새로운 미토 번주로 앉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미토번에서의 요시노부의 평판이 나빠진다. 또한 막부를 배려해 엄벌했음에도 막부는 여전히 요시노부를 불신했다.

1865년 2월, 로쥬(老中) 아베 마사토(阿部正外, 1827 ~ 1887)와 마츠다이라 무네히데(松平宗秀, 1809 ~ 1873)가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에 올라왔다. 목적은 요시노부를 에도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요시노부 뿐만 아니라 교토 수호직이나 교토쇼시다이 모두 에도로 돌아오라고 종용했다. 교토의 일도 앞으로는 막부에 맡겨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로쥬들의 말을 거절했다. 당신들은 뭣하러 왔냐는 듯이 그들을 되물렀다. 조정에서도 관백이 무엇 때문에 대군을 이끌고 왔느냐고 질책하자 로쥬들은 풀이 죽어 에도로 돌아갔다. 이후 요시노부는 제1차 조슈 정벌 이후 서양열강들이 현안이던 안세이 5개국 조약의 비준을 위해 조정과 협상을 벌였다. 공경(公卿)들의 의견은 갈리고 있다. 단호히 반대한것은 고노에 다다후사(近衛忠房, 1838 ~ 1873)와 마사치카마치 산조 사네나루(正親町三条実愛, 1821 ~ 1909) 등이 있으며, 그 뒤에는 사쓰마 번이 있다는 것을 요시노부는 알고 있었다.

회의에서는 출구 없는 논의가 진행되어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밤이 깊었다. 관백이 '오늘은 이 근처에서...'라고 회의를 끝내려고 하는 순간, 요시노부는 갑자기 이렇게 말을 꺼냈다.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자신의 할복까지 거론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
これほど申し上げても朝廷が条約を許可しないならば、私は責任を取って切腹します。わが一命はもとより惜しむに足りません。しかし、私が切腹したら、家来どもがおのおのがたに向かってどんなことをしでかすか、保証しかねますぞ
그렇게 아뢰어도 조정이 조약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는 책임을 지고 할복하겠습니다. 우리 목숨은 처음부터 아낄 것이 못됩니다. 하지만 이 할복 후 신하들이 각각 당신들을 향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이렇게 말을 하며 요시노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백은 당황했다. 결국 요시노부의 버티기에 조정이 꺾인다. 천황으로부터 조약비준의 칙령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효고 개항은 불허되었지만, 조약 칙허는 실현됐다. 이 때의 일을, 요시노부는 후년에 이렇게 되돌아 보고 있다. "나는 일생 중 죽음을 각오한 적이 세 번 있었지만 조약칙허는 그중 하나다.(自分は一生のうち死を覚悟したときが3回あったが、条約勅許はそのひとつだ)"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 을 위해 다시 출전하지만 이때는 사쓰마 번이 출병을 거부한 탓에 막부군은 쵸슈군에게 패배했다. 사쓰마 번은 막부의 출병에 협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벌 직전 조슈와 밀약을 맺고 신식 소총, 군함 제공 등 후방 지원을 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중개한 것으로 알려진 ' 삿초 동맹(薩長同盟)'이다. 사쓰마번 이외의 규슈 여러 번도 조슈 정벌에 적극적이지 못하여 제대로 쳐들어오지 않았다. 애당초 조슈번이 막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체제를 굳힌 것[21]과 대조적으로 막부군은 전술다운 전술도 없었고 전투 의욕도 부족했다. 아무리 머릿 수에서는 앞질러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7월 20일, 이 전쟁의 패전을 결정한 것이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병사이다. 이에모치는 오사카성에서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됐다. 이후 요시노부는 조정에 요청해 조슈와의 휴전을 이끌어냈다.

4. 쇼군 시절

이에모치의 죽음은 한 달 동안 공표되지 않고 덮어졌지만 소문은 금세 퍼져버린다. 이에모치는 6촌 동생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로쥬(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와 오가사와라 나가미치(小笠原長行, 1822 ~ 1891)는 에도의 반대 여론을 억누르고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밀었다.[22] 규슈제번이 귀국하여 다음 사태에 대비하는 가운데 오사카성에서는 마츠다이라 슌가쿠와 로쥬(老中)의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静, 1823 ~ 1889)가 밀담하고 있다.

화두는 물론 차기 쇼군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추천했다. 두 사람은 의견을 굳히지만 문제는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맡을것인가' 였다. 이타쿠라는 그가 쉽사리 맡지 않을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슌가쿠는 자신이 있었다. 몇 차례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그를 만난 지는 오래였고, 반드시 요시노부에게 쇼군직을 맡게 하고야 말겠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이타쿠라나 마츠다이라, 하타모토의 나가이 나오유키(永井尚志)등이 몇 번을 제의해도 응하는 기색조차 없이, 이렇게 단언할 뿐이었다.
私には将軍になる気持ちはない。万一、朝廷で仰せ出されるようなことがあれば、引退するつもりだ
나는 쇼군이 될 생각이 없다. 만에 하나 조정에서 분부를 받는다면 은퇴하겠다.

회고록인 석몽회필기에서 측근 하라 이치노신(原市之進)을 몰래 불러내, 이런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고 스스로도 되돌아 보고 있다. 그는 "도쿠가와가는 이제 더 이상 지탱하지 않는다. 이때, 왕정복고를 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이치노신에게 질문했다고 적었다. 이치노신은 "그 생각은 지당하지만, 조금이라도 방법이 잘못되면, 대혼란에 빠집니다. 실례지만 지금의 로쥬들로서는 대응할 수 없는 것 아니까요?"라고 말하며 일단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요시노부에게 말했다고 한다. 쇼군은 맡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의 수를 어떻게 둘 것인가. 생각에 잠긴 요시노부는 이런 묘한 말을 꺼냈다.
徳川家を相続するだけで、将軍職を引き受けなくてもよいなら、考えてもよい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할 뿐 쇼군 직을 맡지 않아도 된다면 생각해 봐도 좋다.

지금까지 쇼군 가문과 도쿠가와 종가의 상속은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그런 상식을 뒤엎고 '도쿠가와 가문만 상속한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거부한 데는 욕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에사토를 지지하는 오오쿠( 텐쇼인)와 미토번을 중심으로 한 반(反) 요시노부 세력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하고 나서, 쇼군에 취임하기까지, 약 4개월이나 걸려 있다. 당시 이에모치가 사망해 '요시노부야말로 차기 쇼군으로'라고 추천한 것은, 마츠다이라 슌가쿠 외에, 고메이 덴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 1847 ~ 1908), 마츠다이라 모치쓰구(松平茂承, 1844 ~ 1906), 도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静), 관백 니조 나리유키(二条斉敬, 1816 ~ 1878)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 '요시노부 이외를 쇼군으로'라고 하는 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에사다의 정실인 텐쇼인과 이에모치의 정실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은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쇼군직을 맡아달라고 로쥬 이타쿠라 가쓰키요에게 밀서를 보낸 바 있다. 또 막부의 신하나 오오쿠에도 요시노부만은 싫다는 세력이 존재했다. 에도나 오사카 거주의 막부의 신하중에는, 요시노부의 암살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었다. 쇼군 후보를 대충 꼽아봐도 오와리 번에서는 과거 번주 도쿠가와 오시카쓰(徳川慶勝)나 도쿠가와 모치하루 (徳川茂徳, 1831 ~ 1884), 또 현 번주 도쿠가와 요시노리(徳川義宜, 1858 ~ 1875) 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기슈 번주 도쿠가와 모치쓰구(徳川茂承, 1844 ~ 1906), 다야스 도쿠가와의 도쿠가와 요시요리(徳川慶頼), 도쿠가와 이에사토 그리고 요시노부의 형 미토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쓰(徳川慶篤, 1832 ~ 1868) 등을 생각할 수 있었으며 그중에는 취임 의욕이 넘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요시노부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슬하의 미토 번에서의 비인기이다. 양이주의자 측과 그에 대항하는 번주 측, 어느 쪽에도 요시노부는 신용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에모치가 사망하자 미토 번 관계자는 요시노부만 아니면 좋다는 식으로 쇼군 후보를 추천했다. 양이파에 대한 요시노부 자신의 어정쩡한 대응이 각 방면에서 알력을 불렀다고는 하나, 여러 나라로부터 통상을 강요당하고 사쓰마와 조슈 등 유력 다이묘가 대두하는 가운데 이만큼 반발을 산다면 일치단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산쿄인 히토츠바시 가문은, 자신들의 병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군사를 조달하려면 협력 관계가 필요 불가결했다. 그래서 요시노부는 반대파를 자극하지 않도록 쇼군 취임은 일단 미루고 일단 도쿠가와 종가만을 이어받아 조슈 정벌을 시도한다. 의욕이 넘친 요시노부는, 금리어수위 총독을 사임하고, 기본군을 총대로 개편한다. 또 교분을 갖고 있던 프랑스 공사 로슈에게 군사 지원도 요청했다. 더욱이 고메이 덴노로부터도 지지를 얻어, 의욕 넘치게 준비를 진행시켜 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또 마음이 변한다. 선발된 막부군이 패전한 소식을 듣자 급거 출진을 취소하고 멋대로 조슈와 화해한다. 이에 아이즈 번이나 막신은 납득하지 않고, 요시노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다. 그리고 기대했던 조정도 크게 실망시켰다. 요시노부의 신하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저술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에서는 "관백도 궁도 중심에는 불만족하며, 사람에 대해서 불평을 토로한 적도 자주 있었다."라고, 요시노부에 대한 불평 불만이 높아진 모습을 적고 있다. 원래 조슈 정벌에 반대하던 조정에 이르러서는 "방침을 번복하고 조정을 우롱했다"며 요시노부를 매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막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체제를 만들라는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뜻을 받아들여 요시노부는 주요 다이묘들을 모으려고 한다.

하지만 조정으로부터 29명에게 제번소집의 칙명을 내리지만, 상경한 것은 단 5명이다. 정벌에 무참히 실패한데다 쇼군이 아닌 인물을 따를 리가 없다. 가능한 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쇼군직을 맡으려다 완전히 뒤집힌 요시노부였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쇼군직을 맡음으로써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되찾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월 5일, 쇼군 선하를 받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니조성에서 15대 정이대장군에 취임했다. 맹우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가 몇 번이나 설득해도 소군직을 맡지 않고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하기만 하면 된다며 단호히 쇼군직을 거절했던 요시노부였다. 그런데도 왜 쇼군을 맡았는지를 '석몽회필기'에서 요시노부는 이렇게 회고한다.
いったん(徳川宗家を)相続するや、老中などはまた将軍職も受けるべきだと強く請うてくるし、外国などの関係もあって結局引き受けるしかなかった
일단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자 로쥬 등은 또 쇼군직도 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고 외국 등의 관계도 있어 결국 맡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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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가 보내온 군복을 입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6년 12월 25일 요시노부의 지지자였던 고메이 덴노가 갑자기 붕어한다. 그가 쇼군 선하를 받은 지 불과 20일 만이다. 지지 기반이 부실했던 요시노부에게는 뼈아픈 일이었다. 동란의 막부 말기를 요시노부에게 맡기듯 하는 급사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역풍이 계속되는 요시노부지만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내성은 강했다. 고메이 천황의 비호가 없어지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천황의 체면을 세워 양이를 가장할 필요도 없게 됐다.[23] 요시노부는 오히려 고메이 천황의 사망을 당당히 개국파로 돌아설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고 큰 승부를 건다. 바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 4개국 공사들을 오사카에 집결시켜 차례로 회견한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효고 개항을, 요시노부는 '쇼군이 책임을 지고 단행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조정의 허락을 기다리다가는 열강의 식민지가 될 것을 우려해, 무허가로 효고 개항 조약을 맺은것이다. 각국 공사들도 깜짝 놀랐다. 주일 영국 대사 해리 파크스(Harry Parkes)는 요시노부를 "지금까지 만난 일본인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절찬하고 있다. 개국파 지도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조슈 번의 카츠라 코고로는 "이에야스의 재림"이라고 말하며 극찬했고, 공무합체에서 도막파로 기울어지는 이와쿠라 도모미는 "강한 정적"으로 인정하고, 삿초 동맹의 일등공신인 사카모토 료마도 "한 가닥 잡을 수 없는 사나이"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다. 이런 요시노부의 선명한 외교 작전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곳은 사쓰마 번이었다. 하지만 사쓰마는 개국을 주장해 왔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요시노부와 대립점이 없다. 그래서 곤란했는데, 막부를 쓰러뜨릴 구실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요시노부의 독단에 초조하고 분노한 것은 사쓰마 번이다. 사쓰마번의 국부 시마즈 히사미츠에게 참모 오쿠보 도시미치는 "막부 토벌 준비는 진행되고 있다. 고자세로 압도해야 한다.(討幕準備は進んでいる。居丈高に圧倒すべし)" 주상을 하고 있었다. 히사미츠 외, 야마우치 요도, 다테 무네나리 등이 모인 4후회의(四侯会議)에서 "요시노부와 싸워 주세요"라고, 오쿠보는 발언했던 것이다. 사이고와 오쿠보는 히사미츠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고, 그래서 요시노부를 어떻게 몰아붙이는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히사미츠에게 건언서로서 4통이나 보냈다. 오쿠보의 작전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조슈의 처분에 대해 막부에 관대한 조치를 호소해 조슈 정벌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게다가 그가 독단적으로 추진한 막부의 효고 개항 문제를 대응하라고 몰아세우고, 외교권을 조정에 이관해 천황 중심의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몰아붙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867년 5월 4후회의가 막상 열리자 요시노부는 히사미츠의 요구를 모두 잘 받아넘긴다. 조슈 문제를 먼저 매듭지어야 한다는 히사미츠의 주장은 조슈의 처분은 내정의 문제로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며 막부는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라고 간단히 비켜가면서 적당히 무마시켰다.

이어서 전대 쇼군 때부터 교토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조정이 개항을 반대해왔던 효고항 개항 문제에 대해서는 요시노부는 "국제 신의의 문제로 해결을 서둘러야 한다"라고 정면으로 주장했다. 이 때 항의한 시마즈 히사미츠와 마츠다이라 슌가쿠, 다테 무네나리, 야마우치 요도 등 4명의 번주를 토론에서 논파하고 압도해 버렸다. 원래 개국파였던 히사미츠는 유효한 반론도 하지 못한 채, 요시노부가 회의를 끝내 버렸다. 행사에서는 그의 제안으로 기념사진까지 촬영하기도 했다.[24] 다음날 회의에서는 공경(公卿)을 상대하여 요시노부는 "오늘은 꼭 칙명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30시간을 버텼다. 이후 조정에서도 밤을 새워 설득하는 등 외교를 독단적으로 결행한 후 반대 세력들을 토론에서 모두 이기고 만다. 마침내 조정의 합의도 이루어 효고 개항을 실현시켰다. "효고항에서 자유롭게 영업을 실시해야 한다"라고 당당하게 공포하게 된다.

이를 빌미로 요시노부로부터 정치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무단으로 효고항 개항을 선언했다고 요시노부를 탄핵하기 위해 모인 사츠마, 에치젠, 토사, 우와지마의 소위 4후회의를 해산시킴으로써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눌렀다. 그러나 4후회의에서 요시노부에게 당한 일이 오히려 사이고와 오쿠보의 투지에 불을 질렀다. 요시노부도 토막파도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조타수를 누가 쥐느냐의 문제였다. 쇼군 요시노부는 막부가 주도하길 원했고, 사이고, 오쿠보 등의 토막파 하급무사들은 자신들이 주도하길 원했기 때문에 막부는 무력을 써서라도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4후회의를 전후로 사이고와 오쿠보는 막부에 대한 정치 투쟁을 단념, 무력 타도를 계획하게 된다.

당시 요시노부는 에도를 중심으로 국정 운영을 한 기존의 쇼군과는 달리, 조정과의 긴밀한 연계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자연히 에도가 아닌 교토를 중심으로 한 키나이가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실제로 이 시절 에도에 있던 막부의 신료 대부분은 키나이로 상경해야 했다. 한편으로 자신과 대립하는 관계에 있던 막부의 개혁파 오구리 타다마사와 제휴해 소위 게이오의 개혁이라는 정책을 추진했다. 인재 등용·군사력 강화·외교의 신의 등 8개조의 개혁 강령을 정했다. 로쥬를 전임 장관으로 하는 관제개혁을 추진해 오국체제(육군총재 해군총재 회계총재 국내사무총재 외국사무총재)를 확립하고 로쥬 수좌의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静)를 5국의 총괄 조정하는 총리역으로 삼아 사실상의 내각제도 도입을 꾀했다. 또한 인재 등용을 강화하고 실무 능력을 가진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 1827 ~ 1868)와 구리모토 조운(栗本鋤雲, 1822 ~ 1897) 등 친불파 관료를 발탁해 신세 도입을 통한 재정 개혁, 하타모토의 군역 폐지(전납 대체)를 실행했다.

프랑스로부터[25] 240만 달러의 원조차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26] 또 프랑스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레온스 · 붸루니에 의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조선소로서 요코스카 제철소의 건설을 실시하는 등, 해군 강화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프랑스로부터 군사고문단을 초빙해 군제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해 프랑스 공사 로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샤노왕 대위 다른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청했고, 그 지도에 따라 보병 포병 기병 등 3병으로 구성된 프랑스식 훈련을 추진하며 육군 개혁에 매진했다. 또 이복 동생 도쿠가와 아키타케를 프랑스로 파견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게 하는 등 막부 신료들을 해외로 보내 근대문물을 보고 오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그가 단행한 게이오의 개혁은 막부의 세력 회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후 일본의 근대화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할 수있다. 또 군사면에서는 근대식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요코하마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프랑스 육군의 장교를 데려와서 고문단을 꾸리고,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약 2만 4천명의 군인들을 양병했다. 막부육군 문서 참조.

당시 요시노부에게 든든한 지원군 고메이 덴노의 사망으로 타격을 입었다. 그러기에 개국을 과감히 할 수 있었지만 외교 수완으로 국내가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 프랑스를 본뜬 군제 개혁은 인력 부족과 재정난으로 좌초되고 만다. 사이고와 오쿠보가 막부 토벌의 방향으로 번내를 정리하려고 하고 있었을 무렵, 요시노부 또한 내정 굳히기에 고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토 번에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더 강했다. 개국을 천명한 것을 두고 반감을 높인 자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요시노부의 단점인 설명 능력이 부족한 점이 부각된다. 본인 속에서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행동도 다른 사람들 곁에서 보면 지리멸렬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외국과의 대응에 활로를 찾고 있는 사이에, 당초에는 그토록 고집했던 조슈 정벌도 도무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요시노부는 제2차 조슈정벌에서 패전 책임을 물어 로쥬(老中)에서 파면된 오가사와라 나가유키를 본인이 거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 교섭의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1868년 6월는 오가사와라를 외국사무총재에 임명해 중용했다. 조슈 문제를 경시하기 시작한 그를 보고, 아이즈 번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고메이 천황의 국상이 밝혀지기를 기다리다 2월에 교토 수호직을 사임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로슈를 통해 잠시 병사는 풀되 조슈에 대한 처치를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카타모리를 설득해 사퇴시키지 않았다.

이후로도 카타모리의 귀번에 대해서는 막부가 4월에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유를 들어 카타모리를 묶어 귀번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슈는 물론 사쓰마까지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자 아이즈 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카타모리를 귀번하여 버릴 수는 없었다. 이 때 요시노부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아이즈 번은 사쓰마번, 조슈번의 분노를 사고 만다. 후에 아이즈 전쟁이라는 비극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지만 고립이 심화되어 가는 요시노부에 거기까지의 전망도 여유도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868년 8월, 그가 막신으로서 추대한 측근 중의 측근인 하라 이치노신(原市之進, 1830 ~ 1867)이 암살당하고 만다.

암살은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하라 이치노신은 당시, 측근의 우메자와 마고타로(梅沢孫太郎, 1817 ~ 1881)나 로쥬 이타쿠라 가쓰키요에게도 호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라는 등뒤로부터 습격당해, 목을 뜯겨 살해되었다. 요시노부는 하라에게 비밀리에 막부는 더 이상 갖지 않는다고 쇼군 취임 전에 마음을 털어놓았을 정도로 최측근이었다. 믿을 만한 상대가 살해당하고 만 것이기 때문에 요시노부의 충격은 상당했다. 당시 요시노부는 나카네 쵸쥬로(中根長十郎, 1794 ~ 1863),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 1822 ~ 1864), 하라 이치노신 등 그가 아꼈던 심복들이 모두 암살되었다.

4.1. 대정봉환

공무합체 운동이 좌절되고 사이고, 오쿠보 등 토막파가 권력을 잡은 사쓰마는 조슈와 동맹을 맺고, 무력으로 막부 타도를 시도하려 했다. 대정봉환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막부를 무력으로 토벌하자 제안한다. 사실 요시노부는 8월부터 9월경까지 이들이 반도쿠가와 연합을 형성해 자신을 무력으로 치려고 한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막부와 사쓰마를 비롯한 도막파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자청한 인물이 있었다. 토사 번의 야마우치 요도와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1838 ~ 1879)다. 1868년 10월 3일, 고토는 야마우치의 신임을 받아 사카모토 료마가 입안했다고 알려진[27] '선중팔책'을 기초로 한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한다. 선중팔책의 한 항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日本の政権を朝廷に奉還し、政令はみな一本化して朝廷から出す
일본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정령은 모두 단일화해 조정에서 내놓겠다.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돌려주는 대정봉환이었다. 정권을 내놓는 것은 모두가 주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시노부의 행동은 언제나 예측하기 힘들었다. 위기를 감지한 그는 대정봉환 실행이라는 과감한 행동을 한다. 어쨌든 그는 아직 이에모치의 쇼군 후견직이었을 무렵에 숨겨둔 개국론을 털어놓고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今、自分がこのような意見を立てるのは、すでに幕府をないものと見て、日本全国のためを謀ろうとするからだ
지금 내가 이런 의견을 세우는 것은 이미 막부를 없는 것 으로 보고 일본 전국을 위하려는 마음에서이다. #

어려서부터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에게 '존왕론/존황론(尊王論/尊皇論)'을 핵심으로 한 '미토학(水戸学)'의 영향을 받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였다. 따라서 대정봉환을 실시하는 것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또한 이 시대는 구미 열강이 일본의 개국을 강력히 요구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에 의해 일본 리더가 조정을 대표하는 천황이었는지, 아니면 막부를 대표하는 쇼군이었는지를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정권을 조정에 반환했다는 자세를 보이면 사쓰마도 조슈도 도막의 대의명분을 잃게 된다. 그래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의 실행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의 정치력을 유지한 채 사쓰마 번과 조슈 번과의 무력 충돌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요시노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목적에서 1867년 10월 14일, 막부의 국정 운영권을 천황에게 반환한다는 상주문을 메이지 덴노에게 올려 다음날 윤허를 받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뜻밖에 대정봉환에 응하는 모습을 보이자 제안한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 등은 "미증유의 영단, 참으로 감복하여 마지않다"라고 말했다. 대정봉환을 실시한 것은 틀림없이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있어서 최대의 공적이다. 요시노부의 빠른 판단에 의해 내란을 막았고, 그것을 이용한 서양 열강(삿초파와 동맹관계인 영국)의 침략도 저지했다. 이것만으로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판단은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불만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었다. 에도로부터 교대로 로쥬들이 요시노부의 아래에 나타나서는, 저마다 이렇게 비난했다고 그의 회고록 석몽회필기(昔夢会筆記)에 적혀있다.
なぜ、政権を返してしまったのですか。今になって徳川家を潰してしまっては、東照宮に対しても申し訳がたちませんぞ!
왜 정권을 돌려놓았습니까. 이제 와서 도쿠가와 가문을 망쳐 버리면 동조궁[28]에 대해서도 면목이 없습니다!

초대 이야야스에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비판받는 것은 참을 만하지만, 요시노부는 " 간토 사람은 대체로 시세에 어둡고, 대단히 설득에 곤란했다"라고, 아랑곳하지 않는다. 로쥬 만이 아니고, 아이즈 번, 쿠와나 번의 양번이나 막신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면으로부터, 대정봉환에 불만이나 분노의 소리가 오르지만, 그런 것은 포함이 끝난 상태였다.

실제로 대정봉환을 알게 된 막신들과 좌막파들은 크게 놀라 그 결정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역사학자 이에치카 요시키(家近良樹)는 당시 요시노부에 대해 "막신이나 민중에 대한 관심, 배려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막부에서 조정으로 정치를 반납하면 당연히 많은 막신이 실직한다. 하지만 대정봉환을 결단함에 있어, 요시노부가 막신의 기분이나 생활에 고민하고 배려하거나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

이후 요시노부가 주시하고 있던 것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움직임이다. 그가 니조 성의 니노마루 어전에 로쥬 등을 모아놓고 정권 반환에 대해 연설한 것은 1868년 10월 12일이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에도의 중신에게 통고하고, 또 그 다음날인 14일에 요시노부는 대정봉환한 후표문을 조정에 제출하였다. 거기에는, '정권을 조정에 봉귀하고, 넓게 천하의 공의를 다하여 성단을 받들어, 만민이 일치하여 황국을 흥륭하고, 외국과 견줄 것(権を朝廷に奉帰(ほうき)して、広く天下の公議を尽して御聖断(ごせいだん)を仰ぎ、万民一致して皇国を興隆し、外国と並び立つこと)'이라고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조정은 이를 수리하였다. 고토 쇼지로가 막부에 건의서를 제출한 것이 10월 3일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속도감으로 진행 된 건이다. 로쥬들이나 중신들에게 통고했을때도 그들은 요시노부의 기세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는 정면에서 반박한자가 없었다고 하니 상당한 결의를 가지고 단행한것을 알 수 있다. 또 요시노부가 조정에 강력히 요청하므로 다음날인 15일에 후표문이 수리가 되었다. 조정에는 원치 않는 정권을 억지로 내준 격이지만 요시노부는 급했다. 사실 이 결단이 하루만 늦었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대정봉환의 상표문을 조정에 제출한 10월 14일에 사쓰마 번의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번의 히로사와 효스케(広沢兵助) 등은 공경(公卿)의 마사치카마치 산조 사네나루(正親町三条実愛)부터 도쿠가와 요시노부 토벌의 조서를 받았다. 이는 이와쿠라 도모미의 책략으로 조의도 거치지 않았거나 천황도 인정하지 않은 위칙이었음을 알면서도 사쓰마와 조슈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조서에는 요시노부를 규탄하고 주살하라고 글이 적혀있다. # 이것으로 막부를 무력으로 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삿초동맹이었지만,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돌려주고 만것이다. 요시노부가 고마쓰에게 지난번 소식에 정통해 지금 당장 봉환을 주문하라고 권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며 내전을 피하려는 사쓰마번의 고마쓰 기요카도(小松帯刀)가 은밀히 누설했음을 밝히고 있다.

대정봉환으로 조정에 정권을 넘겨주는 데 성공한 요시노부였고, 뜬금없이 조정은 정권의 주인이 되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정은 이런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大事は諸大名の会議で決めるが、日常的なことはこれまでどおりにせよ
큰 일은 제대명 회의에서 결정하되 일상적인 것은 그대로 하라

요시노부는 새롭게 조정에 태어나는 신정권에 참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순히 정권을 내준 셈이니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갑자기 정권을 양도받은 조정도 난처해져, 당분간은 도쿠가와 가문에 그대로 정무나 외교를 맡기고, 한편으로 여러 다이묘에게 서둘러 상락을 명했다. 향후 정치체제의 방향을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다이묘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조정은 요시노부의 쇼군직마저 그대로 두었다. 원래대로라면 정권을 돌려준 셈이니 요시노부는 단호히 쇼군직의 사퇴했어야 했다. 그것을 하지 않은 것은 역시 자신이 집권해야 한다고 다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제시하는 한편 도쿠가와 쇼군가가 다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려고 한 것이다.

이래서는, 도쿠가와 가문의 세력도 평소의 생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광대한 영지는 그대로인 동시에 천황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영지조차도 지금까지처럼 도쿠가와가 관리하게 되었다. 요시노부가 일상 업무에 대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아도 되느냐며 조정에 거듭 다짐해 10월 22일 예전과 같아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낸 바 있다. 요시노부의 협상은 아직도 계속됐다. 23일에는 "외국과의 교환등도, 지금까지와 같이 해도 좋은 것인가"라고 조정에 확인했다.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하루 만에 정이대장군의 사표를 조정에 제출해 흔드는 일을 잊지 않는다. "전부 그쪽에 맡겨도, 이쪽은 아무런 문제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조정으로서는 그런 큰일을 맡겨봤자 난감하다. 조정으로부터 26일 외교 내정 모두 평상시 업무는 그대로라는 취지의 답변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것이 요시노부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

대정봉환으로 정권을 되찾음으로써 요시노부는 구 막부나 제번이 협력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조정을 주체로 한 신정권의 수립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간신히 막부의 굴레에서 풀려난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이런 의욕이 넘치는 말을 하고 있다.
皇国の大権を一にし、天下と共同会議、全国の力を尽くして事に従って、海外万国と並び立つべき大業を期すべきなり
황국의 대권을 하나로 하여 천하와 공동회의, 전국의 힘을 다해 일을 받들어 해외 만국과 겨룰 대업을 기할지어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협력하고, 황국을 보호하면, 해외의 만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후에 메이지 신정부는 부국강병의 슬로건 아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근대화에 매진하게 되는데, 확실히 같은 목표를 요시노부는 내걸고 있었던 것이다.

4.2. 실각과 무혈개성

막부 토벌을 향해 바야흐로 움직이려던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시노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정국에서 대담한 행동으로 계속 집권했다. 이대로라면 도쿠가와 막부를 대신할 신 정부가 수립된다고 해도 그가 고위직에 채용될 것은 틀림없었다. 당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토막파의 사관납지 요구를 일단 받아들임으로써 신정부에서 정권의 중심이 되는 의정 자리에 취임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의정서에 임명되기 위해 오사카에서 준비 작업을 시작했었다. 그래서는 같은 일의 반복으로 구태 의연한 체제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다고, 오쿠보나 사이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도쿠가와의 영향을 배제한 형태로의 신정부를 고집했다. 그래서 1867년 12월 9일 사이고와 오쿠보 등이 중심이 되고 사쓰마 시마즈, 토사 야마우치, 오와리 도쿠가와, 에치젠 마츠다이라, 아키 아사노[29]의 5번이 협력하고 메이지 덴노를 설득하여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불리는 쿠데타가 결행된다.

같은 날 아침 조정의 회의가 끝나고 섭정, 관백과 친도쿠가와 성향의 공가들이 퇴출되자 그 자리에 남은 산조 사네토미와 도쿠가와 요시카츠(德川義勝, 오와리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를 제압하여 이와쿠라 토모미가 천황의 왕정복고 칙서를 들고 참내되어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내려졌다. 5번의 군사가 어소를 군사적으로 제압했고, 천황의 이름으로 막부와 섭정관백을 폐지하고 신정부 출범을 거창하게 선언한 것이다.

갑작스런 강행 돌파에, 쇼군에서 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요시노부는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요시노부는 부하들이 도발에 넘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교토의 니조성에서 조용히 오사카성으로 떠났다. 굳이 사태를 관망하였던 것이다. 사실 실행되기 3일 전에 에치젠 번을 개입시켜, 쿠데타가 행해진다는 정보는, 요시노부의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만약 그것을 니조 섭정이나 나카가와 궁, 아이소 양번에 알리고 어소에 엄중한 경계태세를 당겼다면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애써 무시하며, 주위에 쿠데타 계획을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천황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세운다는 왕정복고 대호령의 취지에는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이 쿠데타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予は別に驚かなかった。すでに政権を返上し、将軍職をも辞したのだから、王政復古の御沙汰があるのは当然であり、王政復古にこれらの職が廃されるのもまた当然だからである
여(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정권을 내놓고 쇼군직도 내놓았으니 왕정복고 통지가 있는 것은 당연하고 왕정복고에 이 직책들이 폐지되는 것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대정봉환에 반대하고 막부 지배에 집착하는 세력을 억누르기까지 했다. '사쓰마, 용서하지 말자(薩摩、許すまじ)'며 삿초동맹을 코고쇼에서 추격하려는 막부의 신하들과 아이즈 번과 구와나 번 등을 제지하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오사카성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동시에 외국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외교에 대해서는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선언하고 다시 오사카 주변과 교토 교외로 군사를 산개시켰다. 교토에서 나와 삿초의 무력충돌을 피하면서 외교권을 쥐고, 나아가 오사카성에 거점을 마련한 뒤 병력으로 새 정부를 위압한 것이다. 이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한편으로 요시노부는 조정에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의 조치를 좀더 늦추려고 여러 경로를 통해 애썼다. 사쓰마는 좀처럼 링에 올라오지 않는 요시노부에게 또 골탕을 먹었던 것이다. 어쩌면 놓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오쿠보는 고고쇼에서 회의를 열고, 요시노부의 처우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内大臣の官位を辞してもらい、800万石におよぶ徳川領の返上を命じたい
내대신의 벼슬을 사임받아 800만석에 달하는 도쿠가와령의 반환을 명하고 싶다.

이와쿠라 토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 도막파는, 요시노부의 내대신 사임과 영지(일부)를 조정에 반환할 것을 주장했다. 반대하는 친도쿠가와 성향의 야마우치 요도나 마츠다이라 슌가쿠 등을 위협해, 무리하게 결정했던 것이다. 막신이나 막부를 격앙시켜 그들이 봉기한 곳에서 무력토벌하려는 것이었다.

가혹한 처우는 요시노부를 몰아붙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구 막부의 광대한 영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기 때문에, 오쿠보는 신정부의 첫걸음으로서 이 사관납지 문제부터 손을 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고민의 여지가 있다라는 의견이 회의에서는 잇따른다. 왕정복고 쿠데타에 찬성한 자들로부터도 사쓰마 번의 강경노선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곧이어 많은 다이묘들로부터 '영지를 거론하다니 요시노부공이 불쌍한 것 아니냐'는 동정표가 몰렸고, 그의 움직임에 이와쿠라 토모미 등 도막파 공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에 힘을 얻은 공의정체파(도사번, 에치젠번, 오와리번)가 신정부 내에서 도막파(삿초 양번)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무려 요시노부가 신정부의 맹주가 되기로 거의 결정되었던 것이다. 대정봉환을 주도한 토사 번에 이르러서는, 쿠데타의 참가 자체가 내전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했다고도 한다. 바로 이 상태야말로 오쿠보나 사이고가 막부의 무력에 의한 토벌에 집착한 이유였다. 온건적으로 밀려서는 개혁파로 뭉치기가 어려워졌다.

사쓰마 번과 동맹관계였던 영국으로부터도 강경노선에 대해서는 반대해버리자 신 정부는 벌써부터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왕국, 프로이센 왕국의 공사와 회견했다. 게다가, 모두 상대측으로부터 요구받은 교류이며, 요시노부는 거기서 '자신이 주권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쉽게 내놓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권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상당한 정치적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음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이는 경치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서 그를 닥치는 대로 따라가기도 불안했다. 교토를 간단하게 내주고 오사카성으로 내려갔을 때도 아이즈 번과 구와나 번의 번사들과 막부 장교들은 초조해 하며 삿초 동맹을 왜 때려눕히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후 요시노부는 새 정부가 자멸하기를 기다리다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은 조정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요청받자 흔쾌히 헌금을 받았다. 조정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면서 사쓰마를 타도하기 위한 접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물살이 확 바뀌게 된다. 내외적으로 과격파들이 문제였다. 당시 로쥬의 이타쿠라 가쓰키요(板倉勝静)가 막부 장졸들이 격앙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묻자 요시노부는 몸져누우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막부 중에 사이고 키치노스케(사이고 다카모리)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있는가." 이타쿠라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술 더떠서 "되면 오쿠보 이치조(오쿠보 도시미치) 정도의 인물은 있는가"라고 묻자, 역시 "있지 않습니다"라고 이타쿠라가 대답했으므로, 요시노부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 모양이니 싸워 봤자 필승책이 있겠나.(こんなありさまでは、戦っても必勝の策などあるはずない)"

사쓰마에는 사이고와 오쿠보라는 뛰어난 인재도 있고 군비력도 있었다. 하지만 재정면이나 외교면에서는, 도쿠가와가가 아직도 우위였다. 무력충돌로 구타만 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흐름이 오리라고 생각한 요시노부는 지금까지의 정치경험을 통해 확신했다. 반대로 말하면 사쓰마의 입장에서는 무력충돌만 가능하면 실권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돌파구는 하나이고 단순하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어떻게 막부를 도발해 화나게 할 것인가에 주력했다. 사이고에 의해 사쓰마 낭사대의 리더로 발탁된 이가 존왕양이파의 지사로 혈기왕성했던 사가라 소조(相楽総三, 1839 ~ 1868)[30]이다. 사이고는 사가라에게 명령해 에도 거리에서 칼 휘두르기, 강도, 방화를 반복하게 했다. 사이고가 지시해 이들은 '사쓰마 어용도(薩摩御用盗)'라 부른 무뢰집단을 조직해 밤낮으로 에도 시민들을 강도·약탈·방화·살인·강간 등의 난동을 일삼으며 구 막부를 도발했고, 어떻게든 내전으로 몰고 가려 했던 것이다. #

요시노부는 어떻게든 무력충돌을 피하려고 했으나 사쓰마가 에도 시내에서 벌인 테러사건에 분노한 막부 과격파들이 사쓰마 번저를 방화, 소실시켜버렸다. 도발낭사들을 단속하고 있던 쇼나이 번[31]의 강경파가, 그런 도발 행위를 해버린 것이다. 사쓰마번 저택의 화공을 결행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오사카 성내는 단숨에 타도 사쓰마로 승승장구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결국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앞서 소개한 요시노부와 이타쿠라의 대화는 화공 소식이 전해지기 전이었지만 그때조차 그가 아무리 상황을 설명해도 이타쿠라는 이렇게 내뱉듯이 말할 뿐이었다.
将士らは激昂が甚だしいので、制止できるとは思えません。どこまでも上様が彼らの願いを拒むのであれば、上様をお刺ししても脱走しかねない勢いでございまするぞ
장졸들이 워낙 격앙이 심해 제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끝끝내 주군께서 그들의 청을 거부하신다면 주군을 찌른다 하여도 달아날 수 없을정도의 형세입니다.

원래 요시노부는 조정에 진입하여 토막파를 체포하거나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한 다음, 사쓰마 토벌의 선지를 받아 정당성을 확보하고 일본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려 공격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사쓰마-죠슈, 토사번병의 숫자도 매우 적었고 사쓰마는 막부의 전면전 시도에 당황하여 비상시 메이지 덴노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1월 2일의 저녁에는, 효고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사쓰마번의 군대를 포격했고, 그날 밤엔 오사카 사쓰마번 저택을 공격하고 있다.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에 머물면서 각국 공사들에게 서한을 보내 사쓰마도 물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도쿠가와 방군은 15,000 병력으로 사쓰마-조슈 병력은 많아야 5,000명 정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에게의 편지에서, 이렇게 결의를 말하고 있다.
今日に至って戦争に及ばなかったら、皇国の事はこれっきりで水の泡となるでしょう
오늘까지와서 전쟁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황국의 일은 이것으로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일련의 사건으로 결국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병력으로 따지면 도쿠가와 군이 질 리 없는 싸움이었다. 별 수 없이 요시노부는 아이즈번과 쿠와나번에 동원령을 내리고 막부 육군, 신센구미 미마와리구미를 동원하여 교토를 포위하고 시내로 진입을 시도한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도바-후시미 전투이다.

이런 가운데 1868년 1월 3일 오후 3시경 도바-후시미 전투 서전이 열린다. 신호의 나팔과 함께 도바 가도 좌우에서 사쓰마 총대가 발사했다. 막부 측은 어디서 어떻게 싸울지 전략도 모호했다. 불시의 공격을 받아 패닉 상태에 빠져 사상자 수가 속출했다. 갑자기 패전 소식이 오사카성에 전해지자 요시노부는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당시 강한 전투 의욕이 있던 것은, 아이즈 번병뿐이었다고 조차 말해지고 있다. 이래서는 아무리 수가 많아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나중에 사이고는 "토바의 포성은 백만 아군을 얻은 것보다 기뻤다."라고 말했다지만 병력에서 앞선 도쿠가와 쪽이 서전에서 사쓰마에게 패한 영향은 컸다. 요도 번에 이르러서는 전황을 듣고 성문을 폐쇄해 배신하고 도쿠가와군을 몰아내고 만다.

그리고 사쓰마군이 니시키노미하타[32]를 내걸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시노부는 큰 충격을 받는다. 니시키노미하타는 곧 관군(官軍), 즉 천황의 군임을 뜻한다. 요시노부는 자신이 역적이 돼버린 것을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朝廷に対して、刃向かうべき意思は露ばかりもなかったのに、まちがって賊名を負うに至ったのが悲しい
조정에 맞서 싸울 뜻은 조금도 없었는데 잘못하여 적명을 지게 된 것이 슬프다.

이후 막부육군 지휘관인 타키가와 하리마노카미의 무능함 탓에 교토 진입은 실패하고 반격을 받아 밀려나게 된다.
시세는 날이 갈수록 촉박해서 과격론자의 오발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바후시미 전투는 앞서 나간 일부 과격론자들이 벌인 일이다. 게다가 금기마저 발포해 급기야는 조적의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더 이상 자신이 오사카성에 머물면 점점 더 과격론자들을 자극해 어떤 대사를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이 이상 예는 신속히 에도로 돌아가 공순근신을 지키며 조명을 기다리려 한다.

단, 아사노(아사노 우지스케, 浅野氏祐)여. 이 사실은 비밀이야. 그대만의 가슴에 담아두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안된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게이키 공전자료편) #

처음부터 요시노부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들어간 이 전쟁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성내의 강경론자들이 더욱 수습되지 않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패전소식이 들려오자 이때다 하고 오사카성에서 전함을 타고 에도로 탈출해버린다. 이날 낮에 중신들을 성의 큰방에 모아놓고 "이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일시라도 빨리 출마하소서. 그러면 군사들의 사기가 진작되고 삿초를 쳐죽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자, "좋아, 즉시 출마하겠다. 너희들은 그럴 준비를 하라고 공언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신들은 크게 기뻐하며 저마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
우리가 목표로 한 것은 조정에 발돋움하여 군을 자기 것으로 조종하려는 간신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패전은 이미 결정적이 됐고, 적군이라는 비난으로 우리 진영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 반드시 하늘이 보고 있을 것이다.

이 위로는 이 오사카성에서 적을 맞아 싸워 단호히 사수하자.

비록 이 성이 불타서 비록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에도성에 있는 충신들이 나의 뜻을 이어줄 것이다.

제군이여, 이곳은 분발, 부디 전력을 다해 주기를 바라오. 나와 함께 국가에 일하자!
― 도쿠가와 요시노부 (아이즈무진전사), 요시노부가 에도성으로 도망치기 전에 한 말 #

이렇게 부하들을 속인 1월 6일 밤이 되어 측근이나 로쥬,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나, 쿠와나 번주 마츠다이라 사다아키 등 극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첩 오요시까지 챙겨 오사카성에서 몰래 빠져나와 오사카만에서 배 카이요마루(開陽丸)를 타고 에도에 퇴각했다. 게다가 이 때, 카타모리에게는 의욕도 없으면서, 에도에서의 재기를 약속했다고 한다. 이때,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는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아, 에노모토는 전쟁터에 방치됐다. 장병들에게 싸우라고 엄명해 놓고, 자신은 몰래 야반도주 이 도망은 지금까지도 요시노부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다. 막신들 중 일부는 요시노부의 명령을 지켜 끝까지 싸우다 사망했다. 당시, 적인 사쓰마군들도 이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이 불쌍해서 위령비를 세워줬다. 오사카성으로 귀환하던 막부 패잔병은 졸지에 적지 한가운데 방치되어버렸고, 이들은 결국 자력으로 에도로 귀환한다. 졸지에 총대장에게 버림받은 군사들은 회상 두 번병과 막신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요시노부가 카이요마루 승선중에, 아이즈무진전사에 기록된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와 주고 받은 대화가 있다. #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지난 5일 나이후사마(요시노부)의 용감한 연설을 통해 우리 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습니다. 말씀대로 나이후사마가 출진하셨다면 며칠 동안의 패전을 뒤집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셨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요시노부는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분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건 일종의 방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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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를 탈출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그린 그림[33]

그리고, 카이요마루가 무사히 오사카만을 빠져나와 기슈바다로 나왔을 때, 이타쿠라 가쓰키요를 함장실로 불러들여 이렇게 명령했다.
에도에 돌아와 나는 공순 근신하며 조정의 분부대로 따르기로 결심했다. 결코 항전은 하지 않는다. 모두 그렇게 알았으면 좋겠다.

에도로 돌아온 요시노부에 대한 주위의 눈은 싸늘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868년 1월 15일, 죽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아내,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もはや勝ち目がないと判断して、ひとまず大坂城を退去した
더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일단 오사카성을 떠났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성으로 도망친 후, 에도성에서 열린 평정(評定)에서 가신 오구리 다다마사(小栗忠順)는 에노모토 다케아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8 ~ 1911), 미즈노 다다노리(水野忠徳, 1810 ~ 1868) 등과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다. 이때 오구리는 '삿초 동맹군이 하코네에서 내려오면 육군으로 요격하고, 동시에 에노모토가 이끄는 구 막부 함대를 스루가 만에 돌입시켜 함포사격으로 후속 보급부대를 괴멸시키며, 고립되고 보급이 끊긴 삿초 동맹군을 섬멸한다'는 협공책을 제안했다. 이후에, 이 작전을 들은 조슈 번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34]는 "그 계책이 실행되었다면 지금쯤 우리의 목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해 두려워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이 시점에서 구 막부측은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다수의 예비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우호 관계에 있던 프랑스군의 지원도 막신들은 제안했다. 또한 프랑스 공사 로슈는 요시노부에게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 줄테니 신정부군과 싸우라고 요청했다. 하시만 요시노부는 로슈에게 "사쓰마번 등의 신정부군과 싸워 우리가 승리를 얻는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천황마저 실수로 쳐버리면 말대까지 조적의 악명을 면하기 어렵다. (중략) 더구나 예(자신)의 본의(공순)를 저버리고 고집을 부려 군사를 움직이려는 자는 집안 대대로의 영위에 이미 충신이 아니다. 하물며 황국에 있어서는 역적이 되리라." "그러한 까닭에 예(자신)는 비록 자신의 목이 베일지라도 천황을 향하여 활을 쏠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로슈도 요시노부의 이 말을 듣고 설득되었다고 한다. #
はからずも朝敵の汚名をこうむってしまったからには、いまさらなんの言い訳もできない。ひとえに天のお裁きを仰ぎ、これまでの落ち度を謝るだけだ。部下の憤激はいわれないことではない、しかしもしここで戦をおこなってなかなか終わらなければ、中国(支那、大清帝国など)やインドと同じわだちをふみ(列強からの侵略・植民地化を受けて)、皇国は瓦解し、万民は塗炭の苦しみにおちいってしまうだろう。これを忍ぶことは到底できない
하필이면 조적의 오명을 뒤집어썼으니 이제 와서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다. 그저 하늘의 심판을 빌고 그동안의 잘못을 사과할 뿐이다. 부하의 분격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여기서 전쟁을 실시해 좀처럼 끝나지 않으면,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전철을 밟아, 황국은 와해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져 버릴 것이다. 이것을 감내하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 #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항전론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가쓰 가이슈의 공순(恭順)론을 채택했다. 만약 요시노부가 오구리 다다마사의 항전론을 받아들이고 프랑스군마저 개입했다면 일본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상황을 보던 서국의 모든 번들이 일제히 조정에 붙어버리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에도로 진격해오는 과정에서 요시노부는 충분한 군사력이 있었음에도 우에노 간에이지 다이지원에서 근신 공순했다. 이후, 가쓰 가이슈를 협상대표로 내세워 에도성을 무혈개성하고 조정에 항복해버린다.[35] 이 협상에는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요시노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파크스는 전쟁에 패해 사로잡힌 나폴레옹이 처형되지 않고 유배지에 그친 사례를 들며, 공순한 요시노부가 처벌을 받는 것은 만국공법에 어긋난다며 사이고 타카모리 등을 압박했다고 한다. #

이 사건을 어느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고 개성에 이른 '에도무혈개성(江戸無血開城)'[36]이라고도 한다. 에도성을 내준다는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잃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그대로 은거 생활에 들어가, 막부 제도나 정이대장군은 폐지됐다. 그리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 정이대장군이 된 것이다. 이미 역적으로 추토령이 내려져 있었음에도 사실상 무조건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슨푸성으로 옮겨져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며 근신했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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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지에서 칩거하고 있던 요시노부가 신정부에게 보낸 사죄장.
신정부에 대한 공순과 에도 공격의 중지를 호소하고 있다.

충분히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노부가 끝내 싸움을 포기한 데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일었는데,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요시노부 정권이 기본적으로 천황 권위에 기반한 정권이었고, 천황의 권위가 이제 토막파에게 넘어가면서 정치생명이 끊어지게 됨에 따라 요시노부가 모든 걸 포기하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요시노부는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애초에 싸울 마음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요시노부는 천성부터 천황에게 약했다고 한다. 천황이 나서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는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미토 번은 미토학의 영향으로 존황사상이 강한 지역이었고, 그의 친부 나리아키도 열렬한 존황양이론자였으며 어머니는 아예 황실의 4대 세습친왕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노미야케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고산케를 구상할 때, 미토 번은 천황 가와 연결시켜 에도 막부가 망할 때를 대비해서 막부가 망하더라도 천황 가의 편에 서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런데 미토 번 출신의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고, 조적(역적)으로 몰린 것은 요시노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런 의미로 따지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든 보험이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했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요시노부가 덴노와 토막파를 쓰러뜨린 뒤엔 뭘 어찌해야 될지를 몰라서 알아서 포기해버린거라는 주장도 있다. 내가 왕을 할 수도 없고 그냥 아시카가 다카우지마냥 천황을 교토에서 쫒아내고 허수아비 천황을 세우면 안 됐나?[38] 여하간 이 정도라서 어쩌면 최소한의 체면은 지켰을지도 모른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왜 도망쳤냐?"는 오늘날에도 좋은 떡밥이다. 요시노부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25년의 세월을 들여 편찬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대정봉환을 했는데 왜 도바 후시미에서 전투를 치렀느냐" "대군으로 상락하면 사쓰마군과의 전투가 불가피할 것은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왜 오사카에서 에도로 군함을 타고 돌아가 버렸는가?"였다. 메이지대학 국제일본학부 교수 가지마 시게루(鹿島茂)는 이 도망을 요시노부가 철저한 '존황제일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글 전문 보기 ]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철저한 존황제일주의자인 것이다. 요시노부에게 큰 영향을 미친 아버지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달리 요시노부의 사상의 첫째는 존황양이에서 양이를 뺀 것이며 개국이냐 양이냐는 둘째 세번째다. 더구나 머리로 생각한 추상적인 존황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 천황에 대한 존황이다. 자신의 생각이 천황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드러났을 때는 반드시 천황에게 맞춘다. 고메이 덴노가 조슈에 겁을 먹고 정벌의 칙명을 내리자 방침을 바꾼 것이다. 대정봉환도 순수한 존황제일주의의 성취였다. 그에겐 막부라는 것에 대한 애착, 미련이 없다. 도바-후시미 전투는 처음에는 사쓰마 측과 구막 측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구막측에서 토벌대장군으로 임명된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에게 조적정벌의 금의 어기가 수여되어 관군 vs 적군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요시노부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총대장의 적전 도망이라는 일본 역사에서 전대미문, 전무후무한 진기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가 에도성으로 돌아오자 프랑스의 원조로 군대의 근대화를 다룬 오구리 다다즈미(小栗忠順)를 비롯한 구 막신들이 잇달아 요시노부에게 주전론(主戦論, 전쟁하기를 주장하는 의견이나 태도)을 주장했다.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Léon Roches, 1809 ~ 1901)도 여러 차례 등성해 요시노부에게 재거를 촉구했다. 구막 측은 최신예 다수의 함선과 만 단위의 총을 보유하고 있으며 보병부대도 근대화돼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전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본인이야말로 진짜 존황주의자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 곁의 간신을 친다는 논리를 내세울 만했겠지만 존황제일주의 때문에 요시노부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만일 요시노부가 에도에서 거병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실제의 보신전쟁 이상의 격렬한 내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어 신정부군은 하코네를 넘어 진공하지 못하고 하코네를 사이에 두고 구막군과 신정부군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동서 분열이다. 내란 내지 교착상태가 길어졌더라면 남북전쟁을 끝내고 밖으로 나갈 여유를 찾았던 미국의 개입을 초래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 보신전쟁은 단기로 끝났고 일본은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근대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메이지 유신의 최대의 공로자'는 요시노부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하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 근신을 후일에 이렇게 설명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공이 도바 후시미에서 막부가 관군을 적으로 삼아 싸우던 중에 오사카에서 군함을 타고 에도로 돌아가 우에노의 야마우치에 틀어박혀 공순의 뜻을 표한 것은 실로 갑작스런 일로, 막부군 사람들도 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요시노부공은 그 때 자신의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막부군 사람들은 공의 어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후로도 여러 가지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는데, 그 때 요시노부공이 공순의 태도를 취하기에 이 상황에 이른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락) 요시노부공은 일종의 특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분으로, 세상이 뭐라고 하지만, 남이 뭐라고 비난하든 그런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것이 공순의 진의를 막부 군인들에게 털어놓고 말씀하지 못하고, 갑자기 오사카에서 배로 에도로 돌아가 우에노에 틀어박혀 공순의 뜻을 표하기에 이른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요시노부공은 세상이 아무리 오해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까 하는 태도로 나올 수 있는 분이었던 것이다. #

더 이상 내란이 계속되면 열강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뻔했고, 외국 공사와 교류한 요시노부였기에 그 위협도 컸을 것이다. 이렇게 도망을 친 것으로 인해 '무책임하다' '비겁하다'고 리더로서 실격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가 일찍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에 전쟁이 커지지 않았고 열강개입을 통한 식민지화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으며, 조속한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하는 사람들도 많다. 요시노부가 전쟁에서 도망쳐 항복한건 둘째치고, 그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성공하면서 결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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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각 이후 취미 활동(사냥)을 즐겨한 도쿠가와 요시노부[39]

근신을 시작한 요시노부지만, 이 때 나이가 아직 32세였다. 메이지 시대의 시작과 함께 슨푸성( 시즈오카)에서의 근신을 명받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호다이인(宝台院, 시즈오카시 아오이구)에 들어가 1869년에 근신이 해제된 후에도, 국정 등 공적인 일을 멀리하면서 시즈오카에서 폐거를 계속했다. 시즈오카로 이주한 그 해 말 프랑스에서 귀국한 요시노부의 측근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요시노부를 만났지만, 요시노부는 유럽 순회의 모습을 물어 올 뿐, 신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처지에 대한 푸념 같은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시노부는 시즈오카에서 사냥과 낚시, 바둑, 사진, 자전거 등의 취미에 몰두했다. 특히 카메라를 좋아해서 다양한 풍경 촬영을 즐겼다. 당시 흔치않은 취미였던 자전거 타기를 즐기거나 활쏘기와 수리검술 등의 단련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 그는 에도막부 말기 무렵부터 자수와 사진, 회화, 사쿠토( 도자기를 만드는 것) 등의 취미와 무예에 힘썼다. 근신생활 초기의 요시노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실내에서 묵묵히 작업할 수 있는 회화에 몰두하여, '개성소(에도막부에 있던 양학 교육 연구기관)'에서 서양화법을 습득한 화가 '나카지마 쿠와지로(中島鍬次郎, 1832 ~ 1914)로부터 유화를 배웠다.

요시노부는 서양의 도감이나 화집을 의지하여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렸다. 또한 무예에도 열심히 임한 요시노부는 사냥의 일종인 ' 투망'이나 '대궁(大弓)', ' 수렵', ' 사이클링'을 많이 했다. 시즈오카에서는 한때, 연일 투망에 열중해, 때로는 강의 중류(中流)에 빠져 버린 일도 있다. 이후 강에 빠진 실패를 후회하고, 그 후 정원에서 매일 그물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궁은 젊은 시절부터 열심히 한 취미로 하루에 150개의 대궁을 쏘곤 했다. 말년이 되면 의사로부터 지적을 받아 대궁의 갯수를 줄였지만, 하루 중 2, 3시간은 저택 내에 설치된 활터에서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사냥은 그가 평생 계속되었던 취미로, 말년의 도쿄 이주 후에도 70세 무렵까지 즐기고 있었다.

도쿠가와 종가로부터 윤택한 은거수당을 받고 취미 활동을 했으며 시즈오카 주민들에게 '케이키님' '케이키씨'라 불리며 시즈오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신하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마련한 대관 저택을 바탕으로, 교토로부터 불러들인 오가와 지헤(小川治兵衛)[40]에게 부월루(浮月楼)라는 정원을 만들게 했다. 그는 이곳에서 1869년부터 약 20년간을 보냈다. 요시노부는 1888년의 도카이도선 개통시에 도시의 소란을 싫어해, 시즈오카의 니시오후카의 저택로 이사했다. 그 후 부월루는 유력 정치인들이 자주 모이는 요정으로 개업했다.

또한 요시노부는 사망할때까지 정치적 야심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긴 여생 동안 정치에 관여하거나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마지막까지 침묵을 지켰다. 구 막부의 신하들이 그를 만나러 가도 나오기를 꺼려 면회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설이 유력하다. 단 가쓰 가이슈[41], 시부사와 에이이치[42], 에노모토 다케아키[43], 마츠다이라 가타모리[44], 마츠다이라 슌가쿠[45]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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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작위를 받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72년 이후, 메이지 정부로부터의 배려로 재차 위계를 받아, 겁먹지 않고 공적인 장소에 나갈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한동안 시즈오카에서 본인에 선택으로 칩거 생활을 계속했지만, 환갑이 된 것을 계기로 도쿄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그는 1897년 11월에는 도쿄의 스가모 잇쵸메로 이주한다. 현재의 스가모역에 가까이 위치에 있으며 부지 3000평, 연면적 400평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을 통해서 황족과의 관계를 깊게 해 가게 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에 의하면, 요시노부가 말년에 도쿄로 이주한 이유로서 조정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서 참내하는 것, 아이들이 결혼해 시즈오카를 떠났기 때문에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던 것, 의료와 간호에 곤란하지 않는 환경에 몸을 두는 것 등의 3가지를 들었다. 요시노부는 지병 요양을 위해 이주한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60세를 맞이하여 건강 상태에 불안을 품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요시노부는 자신의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고 말년에도 엄격하게 몸을 가꿔 역대 에도 막부 쇼군 중 가장 장수했다.[46] 말년에 취미를 즐기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생활을 한 것도 큰 효과를 봤을것이다.

요시노부는 도쿄로 옮긴 뒤 1898년에 ' 메이지 덴노'를 대정봉환 이후 30년만에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대정봉환 이후 요시노부의 가슴에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은 사건이었다. 요시노부가 메이지 덴노와 쇼켄 황후를 대면했을 때의 에피소드는 역사학자 다나카 아키라(田中彰)의 저서 '메이지 유신의 패자와 승자(明治維新の敗者と勝者)'에 적혀있다.
伊藤、俺も今日でやっと今までの罪ほろぼしができたよ。慶喜の天下を取ってしまったが、今日は酒盛りをしたら、もうお互いに浮き世のことで仕方がないと言って帰った
이토, 나도 오늘에야 지금까지의 죄를 갚을 수 있었네. 요시노부의 천하를 빼앗아 버렸지만, 오늘은 술판을 벌였더니 이제 서로 속세의 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돌아갔네.
메이지 덴노 #

이후 요시노부는 궁중에 자주 초대되었다. 당시 황태자였던 다이쇼 덴노와 친구 사이가 되어 같이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 그 후, 1900년에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에게 주는 '사향간지후(麝香間祗候)'에 서임되고, 1902년에는 메이지 덴노에게 화족의 최고 등급인 공작 작위를 받았다. 6월 3일에 공작 작위 수여식이 진행됐는데, 대정봉환 후의 '도바·후시미 전투'로 조정의 역적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 세이난 전쟁'을 지휘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아들 사이고 도라타로(西郷寅太郎, 1866 ~ 1919)가 동시에 후작 작위를 수여받는 전대미문의 수여식이기도 했다. 이 모습은 다음날 신문에서 메이지유신 갈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어필이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요시노부가 공작에 오른 것을 보고 메이지 덴노도 "잘됐다. 잘됐다(よかった。よかった)라며 안도의 목소리를 측근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당시 요시노부의 공작 수여에 진력한 것은 시부사와 에이이치라고 한다. # 1902년 요시노부는 66세에 공작이 되어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1910년에 7남 요시히사(慶久, 1884 ~ 1922)에게 귀족원 의원을 물려줄 때까지 8년여간 활동했다. 귀족원 의원 임기를 마치자 곧 다시 취미생활로 돌아갔다. 더욱이 '도쿠가와 종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허용되어,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일가를 일으켜 당주가 되었다.

7남 요시히사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 2대 당주가 되었고, 1908년에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차녀 '미에코여왕(實枝子女王, 1891 ~ 1933)과 결혼했다. 귀족원의원이었던 도쿠가와 요시히사는 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닮아 총명하고,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영화배우만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평을 들을 만큼 잘생겼기 때문에 종종 화족 자녀들로부터 동경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그는 뇌출혈로 37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도쿠가와 요시히사는 1남 4녀를 두었고, 이 중 장남인 '도쿠가와 요시미츠(徳川慶光, 1913 ~ 1993)'가 가문의 계승자가 됐다.

190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말년에 그의 측근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요시노부의 전기를 편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기 편찬에 있어서 시부사와가 취한 스탠스는 무엇보다도 요시노부의 명예 회복이었다. 조정에 공순 자세를 관철한 요시노부야말로 메이지 유신의 최대 공로자임을 증명하고 싶은 강한 마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시부사와는 역시 막부의 신하 출신인 후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郎)에게 편찬사업을 의뢰했으나, 1904년 후쿠치가 중의원에 당선되는 바람에 바쁘게 되어 편찬사업은 일시 중지된다. 그리고 2년 후인 1906년에는 후쿠치가 병으로 사망해 버린다. 여기에 이르러 시부사와는 방침을 전환한다.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사료편찬을 맡고 있는 미카미 산지(三上參次)와 상의하여 역사 전문가에게 편찬을 의뢰하기로 했다.

막부 관계자에게 요시노부의 전기편찬을 위탁하면 아무래도 막부측 입장에서 서술하게 된다. 내용이 막부에 편향된다면 불공평한 서술과 후세의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는 충고를 받았고, 시부사와도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편찬의 주임으로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역사학자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를 추천받는다. 이후 1907년 6월의 편찬 작업을 시작한다. 요시노부는 전기 편찬에 소극적이었지만 공작을 받는 등 명예가 회복되면서 꺼림칙한 과거를 직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편찬원의 질문에도 기꺼이 대답하기 시작한다. 그를 초청해 편찬원들이 직접 질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요시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는 시부사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내키지 않는 요시노부를 설득하고 요시노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키무카이(昔夢会)" 모임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들의 모음은 "세키무카이히키"라고 불렸다. 토론 형식으로 녹음된 한 현장에서는 요시노부의 목소리가 녹음되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나이를 핑계로 '시마즈 히사미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1815 ~ 1871)는 교활한 놈이었다'며 당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에도막부 말기의 복잡한 사정을 요시노부 스스로 편찬원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 답변에 의문이 있으면 편찬원이 관련 사료를 제시하며 직접 요시노부에게 캐묻기도 했다. 요시노부는 자신의 언동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고 공정한 기록을 남겨달라고 부탁했으며, 자신의 실패와 실책을 솔직히 인정하기도 했다. 다만, 요시노부가 모든 이야기를 말한 것이 아니다. 요시노부는 어떠한 사실을 부정하기도 했으나, 편찬원이 증거기록을 제시하자 "기억이 잘 나지 않아"같은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회피하기도 했다. # 이후 요시노부가 사망한 후,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요시노부의 전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徳川慶喜公伝)"으로 완성되었다.[47] 요시노부의 생애를 그린 NHK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드라마)도 이 자료를 참고로 해 만들어졌다.

이렇듯 메이지 정부로부터 영예로운 작위를 받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하게 됐는데, 간신히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은둔 생활에서 탈피한 것이다. 또한 1908년에는 대정봉환의 공로와 메이지 국가의 공로자로서 이토 히로후미의 추천으로,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수여받았다. 그리하여 말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명실공히 복권되어, 시간이 지나 대정봉환의 공적을 기리게 되었다. 이후 연하였던 메이지 덴노가 1912년 사망한다.

6.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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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장례 행렬

1913년 요시노부는 컨디션 불량으로 궁중에 입궐하였는데, 이후 감기가 악화된 원인으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급성 폐렴이었다. 그는 병사하기 직전 “이에야스 공은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서 막부를 열었다. 나는 그 막부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쇼군이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 그는 조정의 역적으로 지목된 자신을 사면하고 화족 최고위급인 공작을 수여한 메이지 덴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자신의 장례를 불교식이 아닌 신식(神式)으로 치르도록 유언했다.

그의 사망으로 다이쇼 덴노가 애도 성명을 보내기도 했으며, 언론들도 앞다퉈 그의 정권반납의 초첨을 맞춰서 엄청난 찬사를 보내며 애도 기사를 적었다. 이 기사들을 보면 그의 재평가가 이 당시부터 벌써 이뤄지고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요시노부) 공의 결연히 정권을 반납한 것은 대국주명(大国主命)[48]이 우리 국토를 바친 것보다도 우수하다. 우리들은 근대의 일본 역사에 있어서, 혁혁한 공업, 모습도 와 같은 메이지 대제( 메이지 덴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함과 동시에, 마치 에 비할 만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세계 유식의 선비는, 우리 메이지 덴노의 위대를 향해서 찬미를 바침과 동시에, 반드시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의 염담(담박하여 돈·지위에 집착하지 않는 모양), 겸억(겸손하여 자기를 억제함), 급기 희생의 정신에 대해서 감탄을 인색해야 한다. 메이지 덴노를 적극적 위인으로 칭송한다면, 공은 실로 소극적 위인이라 할 만한 사람이다. 우리들은 이제 이 위인의 영구를 보내는데 있어서, 특히 이 위인이 국민을 위해 남긴 위대한 교훈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도쿄아사히신문 #
돌이켜보면 공대정을 봉환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종 근신의 일어기 여생을 일관한 것은 범인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로 하고, 실제로 공이 잘난 까닭이다. 우리들은 거상이위(建国以来)라, 건국 이래, 일본의 역사를 통해서,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두 개의 모범적인 대인물이 있고, 그 하나는 대국주명이고, 또 하나는 실로 도쿠가와 요시노부공이라고, 훙서라고 해도, 공의 인격은 그 이름과 함께 썩지 않는다.
요미우리 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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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묘

11월 25일에는 임시 도쿄 시회가 열려 요시노부에 대한 애도문이 결의된다. 11월 30일에는 조문의 칙사도 파견되어 요시노부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 당일 도쿄시는 시청과 시전차에 조기를 게양하고 시민들에게는 가무음곡을 삼가라고 촉구했다. 장례식의 장례위원장은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맡았으며 #, 그의 묘는 도쿄도 다이토구 야나카레이엔 묘지에 있다. #[49][50]

7. 참고 자료

  • 동양경제일보(東洋経済日報) 《도쿠가와 요시노부》시리즈[51]
    • 이 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참고해 연재됐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 『석몽회필기』(동양문고)
      • 시부사와 에이이치『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 전 4권』(동양문고)
      • 이에치카 요시키[52]『도쿠가와 요시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 이에치카 요시키 『막부 말기 유신의 개성 ① 도쿠가와 요시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 마츠우라 레이[53]『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 가문의 메이지 유신 증보판』(중공신서)
      • 노구치 다케히코[54] 『요시노부의 카리스마』(고단샤)


[1]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 친왕의 12녀. [2] 나리아키가 사망하고 그를 신으로 모신 사당이 있을 정도였다. [3] 이유는 쇼군이 됐을 때 재앙이 될 까봐 걱정해서 그랬다고 한다. [4] 왕도정치를 존중하고 패도정치를 천하게 여기는 사상이다. [5] 다만, 쇼군이 되기 전까지는 이름을 한자독음으로 읽은 '케이키'라고 불렀다. [6] 어린 시절의 요시노부가 총명했다는 것은 근거가 모호하다. 그가 정치판에 뛰어 들기전까지 딱히 총명했다고 할 에피소드가 없다. 아버지 나리아키가 요시노부의 자질에 주목하여 사사건건 막각이나 제후들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 # [7] 강성인 부친을 감안하면 당시로써는 이해할 수 있는 판단이다. [8] 이때 이에요시의 아들 이에사다가 쇼군이었지만 병약하고 득남도 가망이 안 보였다. [9]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이름을 받아 요시토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0] 막말의 4현후 중 한 사람으로, 호인 마츠다이라 슌가쿠(春嶽)로도 불린다. [11] 근신과 칩거의 차이는 근신은 살고있는 집밖으로 나오면 안되고, 칩거는 집안에서도 거처하는 어떤 방 하나에 가둬놓고 그 방밖으로 나오면 안되는 점이다. [12] 다이로에서 이름만 바꿨다. 다이로는 대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하 집안인 후다이 다이묘에서 임명되었는데, 슌가쿠는 그 보다 격이 높은 도쿠가와 직계인 신판 다이묘였다. 그래서 직책명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13] 막말의 4현후 중 한 사람으로, 호인 야마우치 요도(容堂)로도 불린다. [14] 가마쿠라 막부 이래로 수백 년간 국정실무를 담당하는 것에서 멀어진 조정이기 때문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웠다. 다시 말해서 조정이 국정을 행사하게 된다 해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원만하게 이끌기는 어려웠다는 말. [15] 바보 멍청이들이라는 뜻이다. [16] 사쓰마 번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것. [17] 이 사건이 없었다면, 삿초 동맹 메이지 유신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조슈 번만의 힘으로는 막부를 멸망시킬 수 없었고 이때까지 사쓰마 번은 도막이 아닌 공합체를 원했기 때문이다. [18] 당시 요시노부의 금리수위 총독 취임에 힘을 다해 조정 공작을 담당한 사람이 그의 측근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였다. [19] 카타모리의 동생으로 다카쓰 4형제 중 하나. [20]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기도 했다. [21] 이때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가 많은 활약을 하였다. [22] 게다가 이에모치 사망 당시 이에사토는 아직 3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23] 고메이 덴노는 양이론자이면서도 도막은 바라지 않으며, 오히려 조정과 막부가 협력하여 양이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에서 '공무합체파'(공부합체파:오래부터 있던 조정의 권위와 막부나 여러 번을 결합하여 막번체제의 재강화를 도모하고자 한 사상)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24] 이때 히사미츠가 심기불편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했는데, 히사미츠 생애 유일한 사진이 되었다. # [25] 영국이 삿초에 붙자, 라이벌 관계인 프랑스 에도 막부 편에 섰다. 원래 600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지만. [26]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평가한 막부의 가신 오구리 타다마사 1865년 14대 쇼군 이에모치에게 허가를 받아 건설했다. 배를 만들기 위한 제철부터 시작해서 각종 부품을 만들기 위한 종합 공장 시설이었다. 프랑스 고문의 지도를 받았지만, 대정봉환으로 실제로 배는 못 만들었다. [27] 다만 이것은 가쓰 가이슈나 사쿠마 쇼잔, 혹은 요코이 쇼난으로부터 배운 것을 정리했을 뿐이다. 료마가 단독으로 만든것이 아니다. # [28]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신사 [29] 주고쿠 히로시마 지역을 근거로 한 석고로 40만 석이 넘는 대번으로, 히로시마 번 또는 게이슈(芸州) 번이라고도 불렸다. [30] 적보대(赤報隊, 세키호타이)의 1번대 대장.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 사가라 사노스케의 스승으로 각색되었다. [31]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를 근거지로 한 후다이 번으로, 이후 동북전쟁에서 좌막파 오오에쓰 열번동맹의 핵심 세력으로 참전했다. [32] 錦の御旗. 조정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33] 그린 사람은 우키요에 화가 츠키오카 요시토(月岡芳年) [34]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 [35] 이것 때문에 상당수의 막부군이 자력으로 지휘체계를 이탈, 동북부로 탈출해버린다. [36] 그냥 '에도개성'이라고도 한다. [37] 막부 해군 총재인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막부의 항복명령을 무시하고 함대를 이끌고 도쿄만에 진주하면서 신정부에 압박을 가했는데, 요시노부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즉시 반격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었다. 요시노부가 슨푸성 다이묘로 임명받고 신변이 보장되자, 에노모토는 주군에 대한 의리를 다했다고 여기며 함대를 이끌고 북방으로 탈출한다. [38]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덴노를 축출한 때는 황실이 지묘인통 다이카쿠지통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점이라 상황이 전혀 달랐다. 메이지 덴노는 비록 서출이긴 하나 선황 고메이 덴노의 소생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었으며, 증조부 고카쿠 덴노 즉위 이래 직계로 황위를 이어 받은 인물이다. [39] 부월루(浮月楼)에 거주하던 당시 사냥을 즐기던 모습이다. 시즈오카 시내의 강과 늪에서 오리를 쫓고 멧돼지를 찾아 근교에서 멀게는 이즈의 아마기산까지 갔다고 한다. [40] 근대 일본 정원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41] 가쓰 가이슈는 도쿠가와 정권이 붕괴하고 나서 구 막신으로 일관하며 도쿠가와 가문을 위해 일했다. [42] 시부사와는 마지막까지 요시노부에게 충성심을 보이며 그를 받들어 모셨다. 시부사와는 "공께서는 세상으로부터 도쿠가와의 가문을 분쇄하러 들어갔다든가, 목숨을 아까워한다든가, 여러가지 악평을 받은 것을 일절 돌아보지 않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도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실로 그 인격의 높은 곳으로 저의 경모를 금치 못할 바입니다(公は世間から徳川の家を潰しに入ったとか、命を惜しむとか、様々に悪評を受けられたのを一切顧みず、何の言い訳もされなかったばかりか、今日に至ってもこのことについては何も言われません。これは実にその人格の高いところで、私の敬慕にたえないところです)"라고 글을 적기도 했다. [43] 1899년 요시노부는 에노모토에게 그가 찍은 사진을 선물하기도 했다. [44] 주군인 요시노부 본인이 항복했음에도 항전을 이어나가다 신정부에게 토벌되고 본인과 가신들이 고초를 겪었다. [45]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육녀가 요시노부의 사남 도쿠가와 아츠시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다. [46] 두번째로 장수한 인물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47] 1915년 간행에 앞서 시부사와는 요시노부의 묘 앞에 헌정하는 봉고식(奉告式)을 거행하고 있다. [48]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 [49] 그의 묘는 도쿠가와 가문의 위패를 모신 절(徳川家菩提寺)인 조죠지(増上寺)도, 간에이지(關永寺)도 아니고, 야나카레이엔에 왕족과 비슷한 원분이 세워졌다. 교토에서 역대 천황릉이 검소한 것을 보고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50] 참고로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이 묘소에 묻혔다. [51]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요시노부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그의 일생을 연재한 시리즈. [52] 역사학자, 오사카경제대학 교수 [53] 역사학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연구자. 모모야마가쿠인대학 교수 [54] 고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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