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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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吉挹(? ~ 379)
동진의 인물. 자는 조충(祖沖). 사례 빙익군(馮翊郡) 연작현(蓮芍縣) 출신. 민제 사마업을 섬겼던 어사중승 길랑(吉朗)의 손자.[1]
2. 생애
길읍은 젊어서부터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그는 장강 이북에 살다가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북벌할 때, 자신의 두 동생과 함께 동진으로 귀순하고 신야태수에 임명되었다.영강 원년(373년) 8월,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천왕 부견이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군대를 보내 동진의 영토인 양(梁), 익(益) 2주를 빼앗았다. 이에 정서장군 환활이 조정에 표를 올려 길읍을 위흥태수에 임명하고 경거장군, 영진릉태수(領晉昌太守)를 더하였다. 이후 전진의 공격을 한 차례 막으면서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侍郎)에 임명되었다.
태원 3년(378년) 8월, 부견이 다시 남침을 개시하면서 양주자사(梁州) 위종(韋鐘)을 보내 위흥(魏興)을 공략하게 했다. 길읍은 군대를 파견해 위종을 격파하고 적병 700여 명을 참수하니, 조정에서 그의 공을 인정해 다섯 군의 병력을 추가로 관할하게 하였다. 한편, 길읍에게 한 번 패한 위종은 위흥 공략을 포기하고, 당시 양양(襄陽)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장락공 부비의 군대와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길읍이 또 군대를 파견해 위종의 뒤를 치고 적병 5,000여 명을 참하자, 위종은 분노하여 양양으로 가려던 걸 취소하고 위흥을 포위해 버렸다.
태원 4년(379년) 4월, 길읍은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위종군을 상대로 승리하였지만, 전진은 계속해서 위종에게 지원군을 보내는 반면, 길읍을 지원해줘야 하는 거기장군 환충은 전진군이 두려워 형세만 관망하였다. 8개월 동안 위흥에서 항전하던 길읍은 힘이 다하였고, 서성(西城)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자결하기 위해 칼을 뽑았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나서서 말렸다.
"먼저 다른 계략을 강구하고, 그것마저 실패한다면 그때 가서 죽어도 늦지 않소."
길읍이 친구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하려 하니, 친구는 하는 수 없이 길읍의 칼을 빼앗았다. 결국 자살에 실패하고 전진군에게 붙잡힌 길읍은 입을 다문 뒤 말하지도, 먹지도 않다가 아사하였다. 부견은 그의 죽음을 전해듣고는"주맹위(孟威: 주효의 자)[2]는 앞에서 굴하지 아니하였고, 정언원(彥遠: 정목의 자)[3]은 뒤에서 자신의 절개를 깨끗이 지켰는데, 이번에는 길조충(祖沖)이 입을 다물고 죽다니, 진나라에는 어찌하여 이리도 충신이 많은 것인가!"
라며 감탄하였다.길읍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은 환충은 조정에 표를 올려 그 충정을 알렸고, 효무제 사마요 또한 길읍을 기리기 위해 익주자사로 추증해 주었다.